70~80년대 시인1. 서론2. 본론2.1. 김남주2.2.1. 김남주의 생애2.2.2. 김남주의 시세계2.2. 김지하2.2.1. 김지하의 생애2.2.2. 김지하의 시세계2.2.3. 김지하 시의 특성2.3. 문병란2.3.1. 문병란의 생애2.3.2. 문병란의 시세계2.3.3. 문병란 평가3. 결론1. 서론1970년대 전기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매우 특기할 만한 시기이다. 사회적으로 볼 때는 1960년 이후 군사적 억압으로 국민을 통치하던 박정희 독재가 내부로부터의 궤양으로 서서히 자멸의 길로 접어들 때였고, 문학적으로는 서구시, 그중에서도 모더니즘 시의 영향으로 병들었던 우리 시가 민중적인 자각을 거쳐서 새로운 민족시의 틀을 만들어가고 건강을 되찾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70년대 후반은 ‘유신’이라는 이름의 가혹한 독재체제가 이 땅의 자유로운 정신들을 짓누르던 시대이다. 하지만 그러한 폭압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적 대응은 도무지 위축되지 않았다. 문학사적으로는 70년대 후반은 민족현실에 대한 정당한 관심을 필요조건으로 하는 민족문학이 확고히 자기 자리를 잡은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70년대 이래로 줄기차게 전개되어온 민주와 독재 간의 대립, 미국 및 매판세력을 겨냥한 민중의 자각과 싸움은 군부의 하수인과 계승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립에 위기를 느끼게 했으니 12·12사태의 핵심은 바로 이 점과 직결된다 하겠다. 반민족·반민주·반민중 세력에 대한 보다 강고한 인식이 민중들에게 심어지고, 변혁주체로서의 민중이 점차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게 되자, 외세에 대한 방어적 인식도 아울러 정비되기 시작하였으니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은 80년대 우리 사회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80년대’라는 깊고 길며, 절대 다수의 시인들은 차분히, 혹은 역동적으로 자신의 정리하며 다가올 불안한 시간에 대한 응전력을 키워온 시대라고 할 수 있다.본고에서는 1970~80년 시대의 민중시인들 중 문병란, 김지하, 김남주를 대표적으로 그들의 생애와 그들이 나 첫 시집『진혼가』(청사출판사)가 나온 것은 1984년 그의 나이 39살 되던 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차디찬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때였다.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혓바닥을 내밀었다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진혼가」부분권총을 이마에 대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막무가내로 다그치는 수사관의 혹독한 대우에, 김남주의 영혼이 파괴되던 기막힌 모습이 아닐 수 없다.)살기 위해서는 양심은 똥개의 혀가 되어, '나'를 위협하는 자의 똥구멍이라도 핥아주고,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다는 시인에게 있어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수사관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현명한 판단이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우기고 버텨봤자 육신에 좌절과 아픔만 증가할 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차라리 참아라 차라리 참는 게 낫다고 자신을 조용히 타이른다. 그러나 이 참음은 시인의 절망과 포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힘을 저장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거대한 공포와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싸우는 것보다 온몸으로 죽음까지도 불사를 수 있는 정신이 준비될 때까지 참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의식 혹은 반독재 투쟁에 나서는 결의를 더욱 다듬어가고 있는 내면 상황을 잘 드러낸 이 시는 이후의 혁명시의 정신적 모태가 되는 시라고 할 수 있겠다.2.2.2.3. 중기(옥중)시의 세계― 진리의 직접적 ‘폭로성’과 단호함『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그가 옥중에 있던 1980년대는 우리 민족사에 대한 부당한 권력의 유린이 가장 강도 높게 전개되던 암흑의 시절이었다. 특히 그에게 80년대 벽두에 터졌던 광주민중항쟁은 가장 뿌리 깊은 시적 화두가 되었에 멍이 들어 병원으로 가고옷가지 챙겨 들고 아버지 보러 감옥에 가랴밥반찬 보자기에 싸들고 어머니 보러 병원에 가랴누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눈물 보일 겨를도 없다면서꽃 한송이 사들고 내일은 동생 보려 무덤 찾겠다네-「이 좋은 세상에」전문「이 좋은 세상에」는 김남주의 풍자 정신이 잘 집약 되어 있다. 강경대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본격적 응전이라기보다는 역시 간접화의 회로를 통한 우회적 방법을 통해 한 시대를 그리고 있다.시인은 강경대 열사의 죽음과 그로 인해 수난을 겪었던 가족사를 담담하게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억울한 아들의 죽음에 생계수단인 사업마저 내팽개친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역시 억울하게 감옥으로 가고, 아들의 죽음과 남편의 감옥살이를 지켜본 어머니는 팔팔 끓는 심장을 가누지 못해 병원으로 가고, 마지막 아무도 없는 집에 남은 누나는 눈물을 참아가며 입술을 깨물어 가며 감옥으로 병원으로 무덤으로 뛰어다녀야만 하는 이 세상을 ‘이 좋은 세상에’라고 반어적으로 표현하면서 짓밟힌 생명의식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2.2.3. 김남주 시의 특징2.2.3.1. 형식적 특징김남주의 시는 쉽게 이해되는 산문체의 문장이 비교나 대조 등을 통한 나열과 점층적 반복 또는 계산된 어순의 도치 등의 형식을 통해 적절하게 행으로 분할되면서 시 전체가 빠른 맥박을 갖게 되면서 긴장감을 유발한다. 또한 비수 같은 풍자와 반어는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언어로 드러나 모순투성이인 당시의 시대상황을 따끔하게 꼬집어 주었다.미군이 있으면삼팔선이 든든하지요삼팔선이 든든하면부자들 배가 든든하고요.―「쓰다만 시」전문2.2.3.2. 내용적 특징그의 시적 특성은 한마디로, 시인과 사회 현실 사이의 긴장관계가 치열할 때 현실성과 사상성 및 서정성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당대 현실의 ‘총체적인 모습’과 ‘전형적인 인물 또는 사회적 상황 ? 갈등’을 작품 속에 형상화시켰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리얼리즘의 요구와 정신을 잘표했다. 그러나 이 「창조」지는 곧 중앙정보부에 의해 전면 판매 금지되고 발행인과 주간 구중서가 연행됐으며, 김지하 역시 수배 중 체포되었다.1975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LOTUS)상을 수상하고 1981년 국제시인회의(POETRY INTERNATIONAL)의 을 수상한다. 시집으로는 『황토(黃土)』(한얼문고, 1970), 『타는 목마름으로』(창작과비평사, 1982), 『대설(大說)』(창작과비평사, 1984), 『애린1』(실천문학사, 1987), 『애린2』(실천문학사, 1987), 『검은산 하얀방』(분도출판사, 1987), 『별밭을 우러르며』(동광출판사, 1989), 『중심의 괴로움』(솔, 1994)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밥』(1984) 등이 있다.2.2.2. 김지하의 시세계김지하의 시세계는 현실의 불모성과 상실성에 대한 비극적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1960년대 군사정권의 지배전략의 일환으로 시행된 개발 이데올로기는 조국 근대화라는 정치적 명분을 내세워 유기적인 사림의 문화를 급속도로 해체시켜 나아갔다. 김지하의 초기 시편은 대체로 이러한 개발 이데올로기의 급속한 시행과 그로 인한 생명가치의 상실, 공동체 문화의 해체 등에 대한 상심, 비탄, 울분 등의 심정이 주조를 이룬다.김지하는 1969년 「시인」지에 ‘황토길’ 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작품에 일관적으로 흐르는 것은, “이 땅의 오랜 수난의 역사와 그 속에서의 한스런 삶”이다.)간다울지 마라 간다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팍팍한 서울길몸 팔러 간다언제야 돌아오리란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꽃피어 돌아오리란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간다울지 마라 간다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간다울지 마라 간다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팍팍한 서울길몸 팔러 간다.- 「서울길」전문이 시는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에 의해 고향을 박탈당하고 무 김지하에게 대필을 시킨 형국이다. 이 점은 이 시의 구성 원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3연으로 된 이 시는 시적 화자인 ‘나’가 “가슴팍 속에 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을 “남 몰래” 쓰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새겨지는”이라는 언표이다. 시적 화자의 자의에 의해 “네 이름”을 가슴팍 속에 새긴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새겨지는 것이다. 시 전반을 압도하고 있는 “푸르른 자유”와 “살아오는 삶”의 모습을 띈 “네 이름”이 역사의 중심에 선 “내 가슴팍 속”에 들어와 작용한 것이다. 즉 “네 이름” 그 “외로운 눈부심”의 감각이 먼저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시적 화자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을 생각하게 되면서, “노여움”에 치떨리게 되어 “네 이름을 남 몰래” 쓰기에 이른다. 즉, 나와 “네 이름”이 “남 몰래” 합치되는데, 이러한 과정의 역사적 배경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가 뒤섞인 현실 상황이다. 나와 “네 이름”이 만나는 것은, 곧 시인이 개별적인 자아에서 역사 속의 공적인 자아로 진입하는 자기 객관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한편, 여기에서 “네 이름”은 “민주주의”이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투쟁 대상이 유신체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신정권은 1960년대 이래 지배 권력의 영속화를 위한 일환으로 예속적인 근대 개발 이데올로기의 급속한 실행을 통해 인위적으로 인간 및 범생명의 물질화, 전통적인 지역공동체문화의 파괴를 주도했던 주체세력이었으며, 민주화 운동은 바로 이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었다. 이를 정리하면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벌이는 김지하의 지난한 반역과 저항의 투쟁은 궁극적으로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 신이 창조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자유, 정의, 양심의 투쟁”)이며, 그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매개항은 폭압적인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과 투쟁으로 요약할 수 있다.김지하의 문학세계 전반을 고찰해 볼 때, 결국 그의 문학세계는 반생명적인
1930년대 순수주의 및 모더니즘- 신석정, 김기림, 백석을 중심으로 -?차례?1. 서론2. 1930년대 순수주의 및 모더니즘2.1. 신석정2.2. 김기림2.3. 백석3. 결론* 작가연보 및 참고문헌1. 서론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8년에 발효된 치안 유지법에 기초하여 조선인들에 대한 사상 탄압이 가중되었다. 특히 만주 사변, 중일 전쟁으로 인해 일제가 조선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삼으려 함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수탈 역시 가중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만주 침략 노골화로 인한 동아시아 정세의 악화는 조선 사회를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그 심한 위기감으로 하여 한국 문학 역시 불안하게 되었다.그리하여 현실 비판적인 작품은 일체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고 문학의 탈정치화 경향이 강화되었으며, 1930년대 초의 시문학파를 중심으로 한 순수시 운동, 1930년대 후반의 모더니즘적인 경향, 그리고 생명파 등은 모두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 상황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시적 경향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학적 움직임은 뚜렷한 방향을 잃고 여러 갈래로 분산되었다.여기서 우리는 1930년대의 순수주의 및 모더니즘을 통하여 신석정, 김기림, 백석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2. 1930년대 순수주의 및 모더니즘 시인2.1. 신석정2.1.1. 신석정의 생애신석정(莘石汀)은 당시를 좋아했던 가난한 한학자이자 한약방을 경영하던 소암 신재열의 손자이다. 간재의 문하를 출입하던 한학자이자 가업이었던 한약방을 경영하던 아버지 신기온과 전주 이씨인 어머니 이윤옥 사이에 3남 2녀중 둘째 아들로(위로는 두 누님과 장형 석갑과 동생 석우가 있다) 전라북도 부안읍 동중리 307번지에서 태어났다.부안 읍내에는 영월 신씨들이 집성촌이다. 이조 명문의 후예로 동학혁명 때에는 재산과 생명을 바친 애국지사가 많이 나왔다. 특히 이조 말기 유명한 유학자 간제 전우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시인은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 라고 절규하였다. 이 무렵 시인은 청구원을 떠나 교직에 몸을 담아, 김제 죽산중(1947~1949). 부안중(1949~1950)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그는 1951년부터 태백신문 편집고문 일을 맡아 보았고 1954년에는 전주고 교사로 후진을 양성했다. 이듬해부터 전북대와 영생대 등에서 시론을 강의한다. 이 과정에서 1954년에는 (정양사), 1956년에는 제 3시집 (정음사), 1958년에는 이병기와 공저로 , 대역본(낭주매창시집간행회)을 간행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58년에는 ‘전라북도 문화상’을 수상하게 된다.4?19가 일어난 시기에 시인은 문학의 현실에 대한 참여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기에 이르며, 이르며 구체적인 작품 창작을 통하여 보여주기도 한다. 이때 , , 를 발표하며 5?16 직후 때문에 당국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후 시인은 김제고 (1961~1962)를 거쳐 전주상고(1963~1972)에 재직하면서 유네스코와 예총 등을 활동 하면서 제 4시집 (가림출판사1967) 과 제 5시집 (1970)를 펴냈다. 이후 시인은 굉장히 왕성한 시활동을 하였다.1971년에는 제 6시집을 위해 그 동한발표한 시작품을 정리해 두었다가 그 일부인 13편을 , (한국문협 전북지부,1971.4)에 소개하기도 하였으며, 이 1년 동안 에만 , , , , , 등에 40여 편을 발표하고 이러한 공로로 1972년 ‘문화 포장’을 수상 1973년 10월에는 ‘대한 민국예술문화상’이라는 영예로운 상을 수상했다.) 이후 시인은 ‘전북문화상’을 심사하던 도중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어 7개월에 투병 생활 끝에 1974년 7월 6일에 홀연히 떠났다. “내 마지막 원이니 의자에 한 번만 앉게 해 달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시인은 전북 임실군 관촌면 신월리에 묻혔다. 시인이 떠난 직후 1974년에 유고 수상집인 (지식산업사)이 출간되었다.2.1.2. 신석정의 작품 세계신석정은 전원적, 목가적, 낭만주의적 시풍으로 기억되며 또한 반세속적이(主知主義) 문학론에 근거한 모더니즘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고, 그러한 경향에 맞추어 창작에 임하기도 하였다.1936년 조선 일보사를 휴직하고 일본 동북제대 영문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1939년 졸업하고 귀국해서 조선일보사에 다시 복직을 하게 도고 고향에 있던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3년 후인 1942년 5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영어교육이 폐지되자 수학을 가르쳤다. 해방이 되자 서울로 와서 서울대 사대와 연희대,)중앙대 에서 영어과 전임교수로 나가고 동국대 국학대등 시간강사로 나가게 되었고, 조선 문학 건설 본부에 가담했다고 한다.1946년 조선 문학건설 본부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흡수하여, 조선 문학가동맹으로 바뀜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 단체에 가담하게 되면서 중앙 집행위원과 시부 위원장, 서울시 문학가동맹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고, 1950년 미국에 교환교수로 파견되어 준비하다가 6.25가 터지는 바람에,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그 후의 생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2.2.2. 김기림의? 작품세계김기림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시와 평론뿐만 아니라 소설, 문학이론, 수필 시론, 과학서 번역 등 다방면의? 글을 남겼다. 여러 장르의 글을 통해 우리는 김기림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그의 박학하고 선구적인 지성을 확인할 수 있다.?1933년에 결성된 9인회 동인에서 시외 평론을 통해 30년대 우리시의 새로운 특성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시인이다. 이때 새로운 특성이란 그에 의하면 모더니티로 규정된다.그의 초기작은 『꿈꾸는 진주(眞珠)여 바다로 가자』(,1931.1),(),1931.10),,(,1931,11),『날개가돋치면』(,1931,11)등으로 추정된다.)그에게는『기상도(氣象圖』(1936),《태양(太陽)의 풍속(風俗)》(1939)시집에《바다와 나비》(1946) 『새노래』(1948) 네 권의 시집이 있으며, 넷째 시집은 예술적 가치가 거의 없는 좌경적인 정치주의 시집으로 평가된다.)첫 시집『기상도(氣 신가정, 조선문학 등 많은 작품이 발표되고 있다.그런데 이들 작품들이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일부는 부실해서 제외된 것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은 것도 상당수 있다.2)기상도(氣象圖)의 시편들 (1935-36)1936년 7월 창문사 에서 엮어낸 기상도는 1948년 9월 산호장 에서 재판되었다.시집 기사도는 다른 시집과 마찬가지로 여러 작품을 모아서 만든 게 아니라, 한 주제를 정하고 쓴 장시이다. 1935년 4월호와 7월호 지에 발표한 1, 2와 1935년 11월, 12월 호 지에 실린 를 중심으로 엮은 시집이다.이 기상도가 출간되기까지 이외의 많은 작품들이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되고 있지만, 그 일부가 세 번째 시집인 에 편성되어 있을 뿐이다.??????한개의 현대(現代)의 문향악(文響樂)을 허획(許劃)한다. 현대 문명의 모-든 릉각(稜角)은???여기서 발언의 권리의 기회를 거절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무모(無謀) 대신에 다만 그러한 관대(寬大)만을 준비하였다.)?를 '서언'으로 하고 있는 는 시집에 실릴 때 많은 부분이 개작되었다.다만, 등 7편으로 편성되었다.?????? 보라빛 구름으로 선을 둘른???회색(灰色)의 칸바쓰를 등지고???꾸겨진 빨래처럼???바다는?? 산맥(山脈)의 돌단(突端)에 컬려 퍼덕인다.????????????????????????????????????????????????? -병(病)든 풍경(風景)??병(病)든 풍경(風景) 말고도 올배미의 주문, 쇠바퀴의 노래 이 3 편의 시는 태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를 묘사하는 작품인데 그의 솜씨는 대상의 시각적 인상에 대한 축소 지향적 변형에 기울어져 있다. 문명의 모순과 세태 풍자, 정치적 위기 상황을 그려내려던 야심작 는? 그가 의도 하려던 '현대의 교향곡'이 되기보다 국적과 주체 불명이 혼란되고 말았다.?그 후 김기림의 시 작품 활동은 1939년부터 다시 시작했는데 , 그 기간은 그가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동북제대(일본)에서 수학할 당시의 공백 기간인 것이다영생여고보로 전직했다. 1938년에는 교원 직을 구만 두고 1939년에는 서울에 와서 「여성」지의 편집에 관계하다가 만주의 신경(新京)으로 갔다. 1941년에는 만주의 안동(安東)으로 자리를 옮겨 세관업무에 종사했고 1945년에는 귀국하여 한때 신의주에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이처럼 한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옮겨 다닌 기록이 있다.백석의 중기 작품을 읽게 되면, 묘사된 외부의 대상 대신 백석 자신의 속사정과 속마음과 현재의 감정적인 정황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는 이 시기에 낭만적이며 감정적인 주관주의자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백석은 함흥고보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 한 여성을 만났다. 어느 날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그 여성에게 헤어질 무렵 백석은 〈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요 〉라고 선언을 하고, 자야(子夜)라고 호를 붙여 주었다.)백석은 부모가 맺어준 신부와 초례만 치르고 사흘 만에 함흥의 자야 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백석의 혼인 사실을 알게 된 자야는 그 길로 짐을 싸들고 서울로 가버렸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동거를 하다가 1939년 6월, 백석은 다시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두 번째 혼인을 했다. 그러나 백석은 두 번째 결혼에서도 며칠 되지 않아서 집을 나왔다. 1939년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함께 가자고 말을 하지만, 자야는 가지 않고 백석은 혼자서 만주로 떠났다.오늘저녁 이 좁다란방의 힌 바람벽에어쩐지 쓸쓸한것만이 오고 간다이 힌 바람벽에히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이 힌 바람벽에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있다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그의 지아비와 마조음.
피라미드구조와 역사목 차ㅡㅡㅡㅡㅡ□ 요 약 ………………………………………………………… 3□ 서 론 ………………………………………………………… 4□ 본 론1. 고대이집트 무덤의 변천사(1) 개요 …………………………………………………… 5(2) 변천단계 ……………………………………………………52. 피라미드의 건축 배경(1) 강력한 전제왕권의 형성 …………………………………6(2) 파라오의 신격화 …………………………………63. 피라미드 규모와 구조(1) 피라미드의 규모 ………………………………………… 8(2) 피라미드의 구조 ………………………………………… 104. 피라미드 건축 방법 및 기술(1) 개요 ……………………………………………………… 15(2) 피라미드 건축 기술 및 현대기술과의 비교 ………… 165. 피라미드 파워 …………………………………………… 20□ 결 론 ………………………………………………………… 23□ 참 고 문 헌………………………………………………‥24?요 약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자의 부활을 믿었고 사후세계를 내세와 동일시 하는 면이 있었다.그래서 비교적 다른 문화보다 사자의 육신을 중시 하였고, 사자가 내세에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고려하여 무덤양식을 발달 시켰다. 이집트의 무덤양식은 마스터바-단형 피라미드-굴절형 피라미드-일반형 피라미드 순으로 발달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쿠퍼왕의 피라미드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마스터바(Mastaba),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라고 불리는 초기 무덤양식에서 발전한 것이다.고대 이집트 사회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치수사업에 의존한 관개농업사회였으며.치수의 필요에 따라서 강력한 왕권이 형성되었고, 신격화를 통해서 파라오의 권한이 시간에 따라 강화되었고,신권을 행사하는 강력한 파라오가 지배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피라미드이다. 그중에서도 다른 파라오의 것들보다 규모면에서나 정교함에서 월등한 것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기자의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쿠푸왕의 피라미드의 규모는 기하학에서 말하는 보존하려고 했다. 그래서 미라가 생겨난듯하다.미라는 시체를 모래에 묻으면 건조가 빨라져 부패 과정을 겪지 않고 인체의 장기가오그라들면서 원형을 보존한다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시체를 여러가지 재료로 싸고 송진을 바르는 등 보다 나은 기술을 개발해 나갔다. 3왕조말기인 기원전 2600경 이집트인들은 사자의 몸을 갈라 내장 기관을 적출한케노푸스 단지라고 알려진 단지에 담아 죽은 사람에게 다시 장기가 필요할 때를대비했다. 남은 사체는 건조를 위해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했는데, 소라에서 추출한탄산나트륨을 이용해 더 빨리 건조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아다.사체는 붕대에 싸인 채 장례를 기다렸다.두 번째로 장례식과 제례 역시 중시했다. 묘지가 나일 강 서안에 있었으므로 죽은 사람을안칙처로 데려가려면 바지선으로 강을 건너야 했다. 그러나 이런 실제 과정이 정신적인의미를 갖기도 했는데, 동에서 서로 물을 건너는 것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과 같은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를 실은 배나 이를 따르는 배에는 죽은 사람의 젊은 시절을상징적으로 조각하나 ‘카’가 실렸다. 시체가 훼손된 경우, 조형물은 사체를 대신하는 적절한대체물이 되었다.석관이 묘실에 도착하면. 관 주위는 사후 세계에 필요한 장기 보관 단지나 음식, 옷, 보석,신분을 상징하는 징표, 화장품, 오일 등으로 가득 찼다. 중왕조 시기에는 우샤브티라는 인간모양을 한 작은 인물상이 함께 묻히기도 했는데, 이 인물상은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노동력을 대신 수행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이집트 장례 관습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매장 이후에 나타난다. 망자를 기리는 관습은지금도 지구촌 곳곳에 남아 있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이 의식은 주기를 두고 간헐적으로 행하는 장례 의식과는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몇 달, 몇 년 심지어 몇세기 동안 다른 세계로 떠난 사람을 기렸다. 무덤에는 음식을올렸고, 그때마다 크게 고함을 질러 효험을 빌었다. 성직자들은 제사의 기관과 방식을 확인했다.세계 7대 불가사의인 기자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자처하였다. 이것을 백성들이 사실로 믿도록 하기 위하여 족내혼을 행하였다. 신격화된 파라오는 신권정치를 행하였으며, 파라오의 권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해졌다.신권을 지닌 파라오의 지배하에서 이집트의 백성들은 노예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 이집트의 전국토는 이론상 파라오의 소유였다. 물론 백성들이 농사를 지었지만 형식상 국왕의 토지를 빌어서 농사를 짓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수확량의 대부분을 국가에 세금으로 바쳤다. 나아가서 백성들은 공물과 부역을 강요당하였다. 자신의 토지에 있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도 공물이 부과되었다. 수로의 굴착, 제방의 구축, 왕궁과 신전의 건축이 모두 백성들의 동원으로 이루어졌다.이렇게 이집트 사회는 치수사업에 의존한 관개농업사회였으며, 치수의 필요에 따라서 강력한 왕권이 형성되었고, 신격화를 통해서 파라오의 권한이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신권을 행사하는 강력한 파라오가 지배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피라미드였다.그림 2 - 13. 피라미드의 규모와 구조- 여기서 우리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알려진 피라미드의 규모는 얼마나 되며, 과연 어떻게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건축하였을까?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전형적인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그 규모와 동원인력을 알아본 후, 가능한 건축방법을 살펴보기로 하자.(1) 피라미드의 규모파라오의 권한이 막강하였던 이집트 고왕국 시대에 건축된 80여기의 피라미드 중 현재 50여기가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피라미드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서남방 15km 지점에 있는 기자 지역의 3대 피라미드이다. 이집트 제4왕조(B. C. 2613-2494)의 왕들인 쿠프왕(Khufu), 카프레왕(Khafre), 멘카우레왕(Menkaure)이 3대 피라미드의 주인공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정교한 피라미드가 Khufu 왕의 피라미드(230m×230m×146m)이다. 쿠푸왕 이후에 카프레왕(214m×214m×143m), 멘카우레왕(105m×1고, 벽은 10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벽에는 70톤의 화강암이, 천장에는 50톤 무게의 화강암 아홉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방의 한쪽 구석의 천장에는 균열이 나있고, 균열에는 몰타르가 발라져 있다.이 균열은 피라미드가 완성되기 전에 이미 나있었으며, 방의 구조상 받게 되는 뒤틀림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이 뒤틀림은 건설 당시에 생겼으며, 그 균열의 정도는 더 이상의 진행은 없다.그리고 방 안의 어디에도 문자나 그림 같은 건 없다.g. 석관그림 3 - 7석관은 외부체적이 2,332.8리터로서 정확히 내부 체적의 2배이다.처음 발견당시에 뚜껑은 없었다. 시신과 부장품도 없었다.석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한눈에 보는 피라미드 구조그림 3 - 84. 피라미드 건축 방법 및 기술(1) 개 요막대한 인력을 동원하였다고 하지만, 수많은 석재를 어떻게 가공하였으며, 또 가공한 석재를 어떻게 높은 곳까지 운반하여 피라미드를 완성하였을까? 한 마디로 정확히 알 수 없다. 마땅한 장비가 없었던 이 시기에 어떻게 채석장에서 정교하게 돌을 캐낼 수 있었단 말인가? 순전히 인력만으로 무거운 돌덩이를 정교하게 짜 맞추어 그렇게 높이 쌓아올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혹시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이라면 수평과 수직을 잘 조정하여 높이 쌓아올리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피라미드는 비스듬하게 만들어졌다. 이것이 피라미드 건축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더구나 비스듬하게 4면에서 쌓아 올려 꼭지점에서 정확히 맞추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였겠는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혹자는 피라미드를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신의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혹자는 외계인이 지구에 내려와 만든 외계인의 작품이라고 보기도 한다.그런데 더욱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증언이다. '역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는 유명한 그의 『역사』(Historia)라는 책에서 피라미드는 위에서부터 이래로 완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래없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단순한 추와 조준할 때 사용하는 막대기 베이가 측량장비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더욱이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몇 천 년 전부터 태양, 달, 별, 행성들의 운동을 세밀하게 관측하는 등 천문학에 고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우선 그들은 태양력을 사용했다. 이집트에서 달력의 사용을 보통 기원전4241년으로 공인하고 있으므로 쿠프의 대피라미드를 건설할 당시를 기원전 2500년으로 볼 때 태양력이 사용된 지는 이미1700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달을 30일로 한 12개월 여분으로 5일을 더해 1년으로 하였다.그들은 기원전3000년부터 달에 기초하는 태음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매년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나일강의 홍수가 일어나는 날과 큰개별자리 시리우스별이 1년에 1회 동트기 직전에 나타나는 것을 정확히 탐지하여 일 년이 365.25임이 되는 것도 알았고, 이 순간을 1년의 시발점으로 정하였다.또한 피라미드 텍스트를 보면 밤 동안의 시간을 결정하는 ‘데칸’에 대해서도 나타나있다. 천체의 1년 사이클은 10일 단위의 36면으로 나뉘는데 이것을 ‘데칸’ 이라고 부른다. 데칸은 하루에 7면은 보이지 않고 29개 면만 보이는데, 그 중 12개 면만이 남중하는 순간의 시간을 가르쳐준다는 것도 이집트인들은 알고 있었다.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체적과 표면적을 계산하고 수직을 세우는 것인데 이집트인들이 그 방법도 숙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황금비율와 원주율 π에 관한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1.618이고 π=3.1416 이다.우선 황금 비율=x/b, 즉 변심거리x와 1/2밑변거리는 x/b=1+이다. 실제를 쿠프의 대피라미드에 적용할 경우로 거의 14/11 비율에서 겨우 8/1000 오차가 난다.피타고라스의 정리에 의하여 직각삼각형인 경우임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임을 유도하면 황금비율인가나온다. 원주율 π의 경우 피라미드의 밑변 둘레 절반과 높이의 비가 π와 같다는 것이다. 즉.
1930년대 후반의 생명파와 문장파-서정주, 이병기, 조지훈을 중심으로-1. 서론2. 미당 서정주론2-1. 서정주의 생애와 시세계2-2. 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2-3 서정주의 문학사적 의의3. 가람 이병기론3-1. 난초와 술, 서적을 사랑한 시인3-2. 가람의 작시원리3-3. 가람의 시 세계와 4. 조지훈 론4-1. 지훈의 생애4-2. 생애에 따른 작품5. 결론1. 서론한국의 시문학사에 있어서 1930년대 후반은 현대적 의미의 시문학이 성숙하는 시기로 주목된다. 발표지면의 급속한 확장과 전문 시인의 등장, 다양한 문학론의 출현 등 시문학사에 있어 가장 다채롭고 풍성했던 시기였다. 일제의 탄압은 30년대 들어 더욱 극심해졌으나 이런 강력한 억압국면은 무엇보다 카프의 침체를 가져왔으며 문학 외적인 것보다는 문학 그 자체에 대한 관심과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 카프나 민족주의 문학이 지향했던 목적의식과 내용중심의 경향이나 감상적, 영탄적 낭만주의에 대한 문단에서의 비판과 반성의 분위기가 만들어 졌으며 언어 미학으로서의 순수한 시적 세계를 탐구한 시문학파나, 주지적 모더니즘 계열의 시들이 점차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에 따라 모더니즘의 비생명적 기계주의와 순수시파의 인위적 기교를 거부하면서, 나름대로는 현실적인 역사성이나 사회성을 수용할 수 없는 문학적 한계인식 속에서 생명탐구라는 문학적 주제에 관심을 갖는 와 전통적 서정시를 주장하는 가 등장하게 된다.본고에서는 의 대표적 문인이라 할 수 있는 서정주와 의 이병기, 조지훈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들이 주로 다뤘던 소재와 주제가 가지는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2. 미당 서정주론미당 서정주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견해가 분분하다 하더라도 그가 한국 현대시사상 최대 시인의 한사람임을 부인할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1930년대 문단에 등장한 이래 1990년대까지 무려 반세기가 넘는 60여년에 걸쳐 외곬의 길을 걸으며 방대한 시세계를 펼쳐 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15권에 이르는 중요한 시집이든머언 먼 젊은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닢이 필라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이 시가 정작 발표된 것은 1947년 11월 9일 지상이다. 해방 이전에 ‘생명파’의 일원으로서 들끓어 오르는 삶의 욕구와 격정들을 노래한 시인이 그 경향을 달리하여 보다 균형된 삶의 차원으로 나아가려한 변화의 자취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미당은 이 시에 대해 스스로 말하기를 젊은 날의 흥분과 모든 감정의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美의 영상을 담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에서 누님은 국화꽃에 비유되어 있다. 국화꽃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핀 것이 아니고 봄에 처절하게 울어대는 소쩍새와 여름에 많은 비를 가져오기 전의 천둥소리, 그리고 가을밤의 묽은 서리가 국화꽃을 피우는데 모두 작용을 하여 하나의 국화꽃이 완성되었듯이, 중년 여인의 원숙미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이루어진 것이라는 동일화의 시상이 이 시를 낳게끔 했다. 하나의 꽃이 피기까지의 우주적 인연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불교의 인연설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40대 전체에 걸친 미당의 정신적 모색이 신라라는 역사적 과거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그가 신라를 재발견한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전주 피난 시절 『삼국유사』를 탐독하면서 부터이다. 1960년 12월 출간된 미당의 제4집 『신라초』(정음사)는 신라 정신에 예술적 표현을 부여하려는 그의 야심적인 시도를 선보인 시집이다. 여기에 실린 신라 소재의 시편들이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욱체를 가진 인간의 욕망과 그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갈등이다. 예컨데 「꽃밭의 獨白」에서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은 육체의 환락에 식상한 시의 화자 사소에게 쇠진을 모른는 영원한 생명의 비전으로 다가온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는 절규는 어떠한 고난이든 감내하고 미지의 구사 등으로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이 작품은 모더니즘이 풍미하던 30년대에 시단에 육성의 절규와 원시적 생명력의 추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소위 ‘생명파’라는 유파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당은 이성과 합리성 뒤에 숨겨진 인간 본능의 세계를 들추어내고 싶었으며 이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육체였다. ) 미당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이 와 같은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정열의 세계에 탐닉한 이유는 ‘고대 그리스적 육체성’에 대한 매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적 육체성에 매료되어 시적 과감성과 도발성을 통한 죄악을 오히려 생의 매력으로 느꼈던 것이다. 이 시의 모티브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브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먹게끔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짓게 한 뱀의 이야기다.꽃뱀은 의미상 꽃과 뱀의 복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략- 가장 아름다운 것의 표상인 꽃과 가장 추하고 징그러운 것의 대명사인 뱀의 결합은 그것이 라는 구체적인 오브제를 떠나서도 여러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의 모순으로 가득 찬 인생사의 반영일 수도 있을 것이다.)이렇듯 는 징그러우면서도 매혹적인 뱀에 대한 화자의 양가적 태도, 즉 관능적 욕망과 죄의식의 충돌로 설명되어 진다. 또한 잠재된 생명력과 그 본능에 대한 동경과 애착을 나타냄으로서 원초적인 형상미, 생명미를 추구한 차원 높은 작품이라 볼 수 있다.2-3 서정주의 문학사적 의의60년 가까운 그의 장구한 시력은 쉼 없는 모색과 다채로운 변신으로 이어졌다. 고뇌하는 젊음의 신음과 절규에서 서러운 운명과의 공감으로, 비탄과 체념의 구슬픈 가락에서 약동하는 생명에 대한 환희로, 신라 풍류의 상상적 재현에서 인연과 윤회의 미학으로, 토속적 신앙과 민담의 세계에서 천진성과 고졸함의 경지로 미당은 거듭해서 변하는 시의 신명을 보여주었다.그가 추구해 온 시적 역경은 사회나 현실의 험난한 소용돌이와 정면으로 맞서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이로 인해 그의 시가 현실적, 사회적 기제, 즉, 전통적인 양식인 시조를 계승하되 고풍을 버리고 혁신을 해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내놓은 설득력있는 대책인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① 실감?실정을 표현하자 : 옛날 시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무 엉터리도 없는 공상 망상이나 한문 한시구에서 받아 온 것들을 털어 버리고 사물에의 절실한 감정이나 또는 색채가 가득한 감각적 광경을 표현해야 한다.②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 : 옛날의 시조 작가들은 그 취하는 재료를 몇몇 가지에만 한정해 놓다시피 한 것이며, 또는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 대해서도 그것의 전부가 아니라, 그 어느 한 부분만 보고 한 것이다. 그 재료라도 그 전부를 다 보고 또는 그 변화되는 현상을 다 보고 취한다면 무진무진하다.③ 용어의 수삼(數三) : 옛날 시조의 투어인 “아희야, 아마도, 어즈버, …고야, …는구나”라든지 “만정도화, 물환성이, 심산절경” 등 한문구어 따위는 젖혀 놓고, 시조로 쓰는 이도 항시 독자에게 새로운 좋은 느낌을 주는 말을 선택하여 써야 한다. 이런 작가야말로 정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④ 격조의 변화 : 음악으로 보는 시조보다도 문학으로-시가로 보는 시조로, 다시 말하면 부르는 시조보다도 짓는 시조로, 읽는 시조로 하자. 시조의 격조는 그 작가 자기의 감정으로 흘러 나오는 리듬에서 생기며, 동시에 그 작품의 내용 의미와 조화되는 그것이라야 한다.⑤ 연작을 쓰자 : 오늘날 우리의 생활상은 예전보다도 퍽 복잡하여지고 새 자극을 많이 받게 됨에 따라 자연, 그 표현 방법도 거기 맞게 전개시킬 수 밖에 없다. 곧 연작을 쓰자 함이다.⑥ 쓰는법?읽는법 : 신시에서 자를 떼고 행을 나누고 하여 제 가락에 맞게 기사를 하듯이, 시조도 작가의 제 가락에 맞게끔 행구분하여 써야 한다. 또 시조는 다른 시가를 읽고 감상하는 것과 같이 읽는 법까지라도 잘 하여야 한다. 낭독이든 묵독이든 어느 것이든 자기의 마음대로 할 것이다. 잘 완미하도록 읽으면 좋겠다.)더불어 가람은 시조가 정형시이면서 자유시이므로 시조의 들은 아직도 현대 시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4. 조지훈 론1939년 창간한 『문장』지가 산출한 시인들 중에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은 ‘자연’에 귀의한 작품을 써 모아 삼인의 합저 시집 『청록집』을 발간했다. 이 셋은 ‘자연’이란 공통의 소재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이점이 있는데 서정주는 그들의 특징을 나누기를 박두진의 자연은 기독교적인 취향이 농후하고 박몰월은 향토적이며, 조지훈은 ‘흥미’와 망국민의 비탄, 고전적인 취미가 들어 있다 했다.) 본고에서는 청록파 중에서도 문장파의 정신을 가장 잘 이어나갔다 할 수 있는 조지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4-1. 지훈의 생애지훈은 1920년 12월 3일 경북 영양(英陽)군 일월면 주곡동 202번지에서 부 조헌영과 모 전주이씨 사이에서 4남매중 차남으로 한양 조씨(漢陽趙氏) 일색의 작은 마을 태어났다. 조부 인석(寅錫)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천석군의 부호였고 부친 헌영(憲泳)은 제헌 2대의 국회의원을 지낸 명문의 선비 집안이었다. 부친은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신문화를 접한 인텔리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의 부친은 신광대학 총무간사 일을 맡아 보았고, 한의학을 연구하였으며, 그는 유학시절부터 해방되기까지 ?隱亭에 인근의 청소년들을 모아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가르쳐 日人들에게 고초를 당한애국장이기도 하다.지훈은 혜화전문학교를 제외하고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조부로부터 한학을 습득하며 성장하였다. 그것은 지훈이 일본식 현대교육을 받는 것을 유교적 지절의 한학자인 조부 조인석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가 선대의 유교적 전통과 문벌의 계승을 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부 조인석은 지훈이 한의학을 배우기를 강력하게 바랬다고 지훈의 미망인 김위남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17세에『大學』까지 마친 걸로 보아 총명도 총명이려니와 이때 이미 학문의 소양이 상당하였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간다이처럼 선비 지사인 조부 밑에서 한학을 연마하게 된 것이 그의 인격 형성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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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근대 시인- 최남선, 주요한, 김억, 황석우 중심으로◆ 차례 ◆1. 서론2. 초창기 근대 시인2.1. 최남선2.2. 주요한2.3. 김억2.4. 황석우3. 결론* 작가연보 및 참고문헌1. 서론우리나라는 20세기 초 일제의 식민지하에 있었다.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해 우리 민족은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빼앗겼으며 서양의 근대문학도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문학 활동을 통해 민족의 해방과 근대화를 추진했고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서정시가 주류가 되는 등 문학은 달라진 양상을 보이게 된다.그러나 이 모든 것은 3?1운동 이전에 이행기가 징검다리 구실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대문학의 이행기에는 기존의 한시, 가사, 시조, 사설시조 등이 존재함과 동시에 개화를 노래하는 창가, 정통 율격을 깬 신체시, 자신의 개인 정서나 민족사상을 반영한 자유시가 발달하였다. 근대 문학의 토대를 다진 초창기 근대 시인들로는 최남선, 주요한, 김억, 이광수, 황석우 등이 있으며 여기서는 그들이 근대 문학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2. 초창기 근대시인2.1. 최남선 - 근대문학의 선구자1) 계몽주의와 민족주의육당(六堂) 최남선은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헌규는 중인출신으로 한약방을 운영하는 동시에 관상감) 기사로 근무했었고, 뛰어난 장사 솜씨로 인해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다. 당시 중인들의 벼슬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평생을 사무관이나 기술관으로밖에 지낼 수 없었다. 그러나 개화기에는 높은 정치가들의 보좌관이 되어 나라 일을 바로잡도록 보필한 일이 많았고 부친 역시 개화에 눈을 뜬 인물이었다. 또한 시조 무민공(武愍公))과 오경석, 유대치 등 중인 출신 중 뛰어난 위인의 업적을 항상 최남선에게 들려주었다.)최남선은 다섯 살에 이미 한글을 깨쳐 고전소설, 중국소설, 성경 등 다양한 문학작품을 읽었으며 특히 『Pilgrim's progress』(천로역정; 天路歷程)을 기억나는 소설로 꼽고 反)민족주의자냐를 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최남선에 대한 논란은 1928년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위원이 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1948년에는 반민족행위자처단법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나는 사건도 있었다.1949년 3월 9일부터 10일까지 『자유신문』에 올라온 최남선의 자열서(自列書)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는데 그 죄는 다음과 같은 5가지이다.① 조선총독부의 한국사 왜곡기관인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이 된 것(1928년)②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가 된 것(1938년)③ 만주국립건국대학 교수가 된 것(1939년)④ 학병 권유 연사가 된 것(1943년)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주장했던 것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 자신이 한 일은 민족을 위한 일이었으며 자의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나는 분명히 일평생 一條路를 일심으로 매진한 것을 자신하는 자이다. 중간에 어려운 환경, 유약한 성격의 내외 원인이 서로 합병하여서 내 의심에 흙을 바르고 내 행동에 올가미를 씌웠을지라도 이는 그때그때의 외적 변모일 따름이요 결코 내 心興行의 변전변환은 아니었다. 이점을 밝히겠다 하여 이 이상의 강변스러운 말을 더하지 않거니와 다만 조선사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 후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열 번 갈아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제는 언제고 終始一貫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역사의 건설 그것이 없어진 일 없었음은…(중략)자열서) 中최남선의 사상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문명진보론이다. 이것은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문명 진보만이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힘이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문명진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두 번째는 민족자각론으로 민족의 자각이 없는 문명진보운동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문화우위론이 있다. “민족은 작고 문화는 크다. 역사는 짧고 문화는 길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화를 민족보다 더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을 편집하였다. 여기에서 신문학운동의 거장인 춘원 이광수를 만났고 또 민족지도자인 도산 안창호를 만났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1920년 주요한은 상해 호강대학에 입학하여 못 다한 학문수업을 계속했다. 주요한이 일본 학문수업에서 문학에 열을 올리던 때와는 달리 화학을 전공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요한의 상해 학간수업기는 진로의 크나큰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해외에서 민족주의를 마음껏 신장할 수 있었다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대학 수업과정에서 화학을 공부하는 한 편 시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주요한은 상해에서 시를 향한 마음을 늦추지 않고 고독한 환경에서 이국풍정(異國風情)을 노래했다. 같은 빼어난 작품도 이때에 쓴 것이다. 이 시는 단순한 서경만 드러낸 것이 아니고, 상해의 이국풍정 속에 고향의 그리움도 노래했다. 이 고향의 그리움은 주요한의 시의 뺄 수 없는 특질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게 상해에서 한창 아름다운 감성으로 시를 왕성하게 써오다가 1924년 방인근이 창간한 『조선문단』에 그의 시론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와 함께 , , 같은 시를 발표했다. 그리하여 『조선문단』의 요청으로 일본에서 쓴 시와 상해에서 쓴 시를 한데 모아 첫 시집 『 아름다운 새벽』을 출간했다. 이것이 주요한 시의 대성기였다.1925년 주요한은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서 다음해 26세 때 황해도 사리원 규수 최선복과 결혼 했다. 그 후 한사람의 생활인으로서 『동아일보』, 『조선일보』기자를 거쳐 화신상회(和信商會) 등 실업계에 종사하기도 했다. 주요한은 그동안 『조선문단』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면서 1929년에 『三仁詩歌集』(이광수, 김동환, 주요한 공저)를 냈고, 다음해 1930년엔 시조급 소곡만을 모아 『봉사꽃』을 출간했다.해방 후에도 일절 시를 쓰지 않고 언론계, 정당 등에 가담하다가 드디어 50년대 후반 정계에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장관으로 활리고 5호에서는 투르게네프의 작품인 , 를, 6호에는 베를레느(Verlaine)의 이하 3편을, 7호에는 예이츠(Yeats)의 이하 6편을 번역, 소개했다.김억은 주로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상징주의계 시인들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번역했다. 당시에 발간된 거의 모든 지면을 이용해서 해외시의 수입 ? 소개에 공을 들였다. 이것은 1921년 3월에 발간된 최초의 번역 시집 『懊惱의 舞蹈』에서 집대성 된다. 『태서문예신보』, 『폐허』, 『창조』, 『개벽』 등에 발표했던 역시(譯詩)를 묶어낸 것으로 『오뇌의 무도』 초판에는 베를레느의 이하 구르몽(Gourmont), 사맹(Samain), 보들레르(Baudelaire), 예이츠, 기타 여러 시인들의 작품 84편)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 ? 소개했다. 1923년 8월의 재판 때에는 약 10편의 시가 더 첨가되어 94편이 수록되었다.『오뇌의 무도』의 출현의 의의는 우리 시단에 시다운 시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에 시적 감정과 현대시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 주었다는 것과, 현대시의 형태, 즉 상징파의 시가 곧 자유시라는 점을 밝혀준 것, 베를레느의 「作詩論」을 통해 시작법(詩作法)을 제시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말을 시적 언어로 순화시켰다는 것에 역사적 뜻이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작품들을 번역 ? 소개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한계를 드러냈다. 『오뇌의 무도』에는 텍스트 선정의 문제와 번역상의 과오가 나타났다.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한다면 그의 가장 특징적인 일면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작을 택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 , 같은 작품이나 보들레르의 이국취향, 악마파적 일면을 드러내고 있는 , , 등을 수록하는 게 제격이겠지만 김억의 『오뇌의 무도』에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평이한 명사의 뜻이나 초보적인 문법조차 소화하지 못했다.?안의 敷石에?어지는 나무닢의 애닯은 소리를나는 발서 듣고 놀내엿노라 - 제 1연)J’entends deja tomber avec des chocs fun결국 이 안서의 「시형의 음률과 호흡」은 자유시를 이론적으로 성찰하고 주장한 최초의 시론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3) 민요시로의 전환상징적 자유시에 젖어 있었던 김억은 자유시를 튼튼하게 정착시키기도 전에 1925년 무렵부터 민요시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시단에서 프로문학파의 계급주의적 시가 열띤 입김으로 기세를 올리게 되자 그것에 대한 응전에서 국민문학 또는 민족문학의 일환으로서의 민요시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민요 가락에 담아 계승하려고 했던 것이다.20년대 중반기 한국 사회가 식민지 통치하에서 물산장려운동, 노동운동, 형평운동, 부인운동, 학생운동, 사회주의운동 등 논리적 응전력(應戰力)을 갖추게 되었을 때 문학쪽에서는 편파적(偏派的) 순간적인 체험으로서의 시보다도 삶의 총체적 파악이 가능한 소설이 중심 세력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그가 무의식적으로나마 이 사실을 느끼고 민요시를 쓰게 된 것이다.한국 최초의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1923년 6월에 발간된 것으로 8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부록 「북방의 소녀」 속에 있는 , , 등은 7?5조, 는 7?7과 7?5조의 혼합으로 된 정형률의 반복이지만, 그밖의 것은 일정한 자수율을 벗어난 시형이다. 『해파리의 노래』의 시들은 대부분 3?1운동 후의 좌절, 허무, 실의를 반영하는데 이것은 김억의 시세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그의 초기 시들이(『해파리의 노래』) 비록 프랑스 상징파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근대시로서 새로운 자각이라는 점에서 우월하다. 뿐만 아니라 육당처럼 사회개발을 외친 계몽적인 것도 아니고 주요한처럼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정돈되지 않은 시를 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시로서 성공하지 못한 요소를 말끔히 씻고 개인의 정감의 소리가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즉, 현대시가 가지고 있는 내포와 외연이 잘 결합되면서 응축된 시적 표현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후기 시편 『안서시집』에서는 우리것을 찾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