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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
    11. 조선시대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1) 趙光祖의 정치활동과 사회개혁(1) 위훈삭제의 배경기묘사림이란 기묘사화의 이전 세력인데, 후대의 용어를 인용하여 일반적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피화된 신진사류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들은 중종반정 이후 1519년 (중종 14년) 기묘사화까지의 정치과정에서 결집되고 구체화된다. 중종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쪽은 물론 공신으로 책봉된 세력이었다. 전례 없이 107명에 달하는 공신의 구성요소는 복잡하여 成宗ㆍ燕山君代처럼 훈구 대 사림의 정치구도와는 달랐다.中宗초부터 한 10년경까지의 정국운영의 추이를 본다면 朴元宗(박원종)ㆍ柳順丁(유순정)ㆍ成希顔(성희안)의 이른바 反正 3대장과 일부 공신계가 요직을 차지하고 비공신계의 인사들이 나머지 관직을 구성하는 형세를 이루었으며 종래의 훈구계열이 공신계의 한 축을 형성하는 정치구조였다. 1514년 (중종 9년)까지의 政曹(정조)는 공신 중심의 지배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비록 소수의 사림파가 등장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세력이 미약하여 영향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9년 이후 공신세력이 쇠퇴하고 비공신계 훈구세력이 그 주축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鄭光弼(정광필)ㆍ安?(안당) 등 사림세력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훈구계 정치인들은 사림파 진출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사림파는 정조의 상위층까지는 진출하지 못하고 郞官으로의 진출에만 그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언관으로의 진출은 정조에 비해 훨씬 활발하였다. 1513년 (중종 8년)까지의 언관도 훈구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지만, 이후 점차적으로 상위 직에는 정광필ㆍ안당 등이 재직하고 있어서 후일 사림파의 진출에 직ㆍ간접으로 긍정적 작용을 하게 되었으며, 하위직에서는 金安國(김안국)ㆍ金正國(김정국)ㆍ金?(김정)ㆍ權?(권벌)ㆍ孔瑞麟(공서린)ㆍ朴祥(박상) 등 사림파와 그들과 정치적 성향을 같이하는 李思釣(이사조) 등이 진출하였다. 이러한 사림파의 언관 진출은 조광조의 등장 이후부터 본격화 하였다.무엇이 어렵겠습니까?)그런데 그가 내세우고 있는 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이 점은 그의 지치의 내용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道입니다. 이른바 도라는 것은 天性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 천성이 있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에 道도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크게는 禮樂刑政(예악형정)과 작게는 制度(제도), 文化事業이 인력을 빌지 않는 것이 없으며 각각 당연한 이치가 있지 않는 것이 없사온데 이것이 곧 고금의 제왕들이 다같이 실천하며, 정치를 하시던 것으로서 하늘과 땅에 가득 차고 옛날과 지금을 관찰하는 것으로서 실은 일찍이 내 마음 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즉, 道라는 것이 국가의 제반 제도나 禮樂刑政(예악형정) 속에 반영된다는 것으로서 그의 經世와 제도와의 상관관계가 밀접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지치도 구체적으로 국가를 통치해가는 과정에서 제도개편이라는 형태를 띠고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 점은 조광조의 일련에 제도개편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제도개편이야 말로 지치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반정직후에 추진되었어야 할 폐정의 개혁과 새로운 정치이념의 제시가 이 때 와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동안 공신 지배체제하에서나마 간간이 표출되어 오던 개혁을 향한 분산된 목소리들이 이제 한 접점에서 수렴되어 정치적인 큰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 구심점에는 조광조가 있었고 여기서 후일 기묘사림이라고 불리는 정치집단이 형성되게 된다. 후세에 보통 기묘사림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이른바 『중종실록』에서 자주 사용되는 ‘光祖之輩(조광지배)’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조광조의 정계진출 이후 전개된 정치적 상황에서 결집된 정치세력이었으며, 조광조를 구심점으로 하여 끊임없이 사회개혁과 정치활동을 전개한 정치 세력이었다. 그의 정치적 활동 중에서 위훈삭제를 빼놓을 수 가 없을 것이다.중종반정 직후에 책봉된 정국공신은 무려 107명으로 정치사회적인 제반문제를 야기하조의 건국과정에서 그 처지를 달리하는 두 계열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개국에 참여한 功臣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반대한 인물들로 그 일부는 향촌에 은거하여 후일을 도모한 在地士林(재지사림)이었다.조선 초기, 즉 건국에서 성종 중엽까지의 중앙정부를 주도한 정치권력은 역대의 공신을 주축으로 한 훈구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開國(개국) ? 定社(정사) ? 佐命(좌명) 등 국초의 3공신이 책봉되면서 공신 자신이나 그 후손들은 관직과 토지의 분배에 있어서 일방적인 특혜를 누리게 되었으며, 그 권력과 富는 후대에 가면서 더욱 증대되어 갔다.중앙의 정치권력이 훈구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던 시대적 배경에서 향촌에서는 재지적 기반을 가진 사림이 영남 ? 기호 등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은 성리학에 몰두하고 주자가례의 실천을 통해 자기수양을 추구하는 한편, 왕조의 건국이념이자 자기들의 이상인 성리학적 통치 질서 확립을 위한 구상에도 유념하고 있었다.그 중 몇몇은 가끔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나름대로의 신념을 펴기도 하였으나, 훈구세력 중심의 정치운영 형태에 영향을 주는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그들의 노력이 어느 정도 정치에 반영될 수 있게 된 것은 공동체로의 결속력을 지니기 시작한 시점에 이르러서였다. 다시 말하면, 사림의 단계에서가 아니라 사림파의 단계에 서였던 것이다.사림의 연원은 高麗末 성리학 수입과 더불어 등장한 사대부 가운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배격하고 초야에 묻힌 吉再 계통의 私學派(사학파)가 연원이다. 이들은 조선초 집권 官學派(관학파)에 밀리어 낙향, 재지지주층으로 성장하면서 세조의 왕권 찬탈에 훈구파를 비판하고 유향소)를 통해서 재기를 준비하다가 성종대에 김종직과 그 門徒(문도)가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각하였다.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지니고, 당시 유일한 정치집단으로서의 지위를 누려오던 훈구파에 대해 견제 내지 압력 기능을 어느 정도 행사함으로써 기존세력과 맞서게 될 만한 수준의 집단이 된 것은 1484에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피화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던 사람들 모두를 동일한 수준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기묘사화 이전에는 주로 조광조 등과 함께 유대관계를 갖고 특정한 案(안)에서나,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던 사람들이 기묘사림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에 비해, 기묘사화 이후에는 단순히 그들의 처벌을 반대하다가 피화되었던 사람들까지도 기묘사림으로 분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묘사림에 대한 보다 엄밀한 이해를 위해서는 사화이전 조광조와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던 사람들과, 사화를 계기로 새롭게 기묘사림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조광조의 진출 후, 특히 1517년 (중종 12년)부터 급속히 성장한 사림파는 기존의 반대세력인 훈구계 인물들로부터 그 상대성을, 더 나아가서는 적대적 존재로 주목되었다. 대체로 기묘사화 이전의 기묘사림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조광조세력’ (光祖之輩:광조지배)으로 지목되던 부류로서 이들은 조광조의 정계진출을 통해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결집되었다. 즉, 조광조의 등장이후 일련의 정치적 사건 등을 경험해 가면서 조광조를 구심점으로 해서 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이다.己卯士林(기묘사림)의 인적 구성을 가늠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상징적인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는데, 1518년 (중종 13년) 8월 21일에 발생한 소위 ‘矢幹係書(시간계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의 성장에 불만을 품은 측에서 “國政(국정)을 변경하고 어지럽혀 社稷(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인물들” 이라는 내용과 함께 조광조 ? 이자를 비롯한 30여인의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를 화살에 묶어서 의정부와 사간원의 대문에 쏜 사건이다.)이 명단에 수록된 사람들은 기묘사화 당시 모두 ‘조광조세력’으로 분류되어 처벌되거나 또는 파직된 인물들로서 기묘사림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로 간주할 수 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중종대의 사림파는 정국공신 중심의 훈구대신의 집권 하에서 벌어지는 각종 운동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소격서 폐지를 주창하고 실현한 것이다. 소격서는 어떤 의미로 보아도 중요한 관청이 아니었다.그러나 조광조가 관직에 진출한 1515년 (중종 10년) 이후 이 소격서 논쟁이 격화되었던 1518년 (중종 13년) 8, 9월에 이르기까지 조광조는 많은 일에 관여하였지만, 이 소격서 폐지 주장처럼 강력하고 적극적이며 지속적인 노력을 한 것은 없다.소격서 폐지론은 이전에도 몇 차례 건의된 바 있으나, 본격적으로 공론화 되고 쟁점화 된 것은 1518년 (중종 13년) 8월 1일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에 의하여 치도의 근본원리를 開陳(개진)하여 “道惟一而德無不明 治惟純而國無不理(도유일이덕무불명 치유순이국무불이)”라 전제 하고나서, 소격서 혁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계기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변하였다. 조광조의 상소가 제출된 다음 날 중종은 “소격서는 선대의 왕들도 성심으로 높여 받든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그 유래가 오래되어 갑자기 혁파할 수 없을 뿐이다.” 라고 답변 하였다. 그러자 同知事(동지사) 金淨은 전대의 잘못된 일을 그대로 후대에 전해서는 안 되니 당장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전 대간에서는 도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하면서, 사직상소를 제출하였다. 여기에 조광조도 가세하고 나서 소격서를 폐지하도록 중종에게 압력을 가하였다.그러나 중종도 전 대간을 교체하는 일이 있어도 소격서를 폐지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나왔다. 이 문제에 대하여 중종이 이처럼 완강한 태도로 임한 것도 무척 이례적인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조광조의 대응도 격렬하였다. 이제 왕도 조광조도 물러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사표를 낸 대간이 되돌아올 명분도 없었으며, 선왕들이 지켜온 관례를 결코 깰 수 없다는 중종의 주장도 철회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물러난 쪽이 심각한 정치적 손상을 입을 것이 확실하였다.소격서 폐지를 주장하는 조광조의 상소 제출로 시작된 1518년 (중.
    인문/어학| 2010.12.23| 14페이지| 1,500원| 조회(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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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대외관계
    8. 고려의 대외관계 -거란의 침략과 서희의 외교1) 대외관계한국은 동아시아 세계의 상호관계 속에서 독자적으로 역사의 정통성을 유지해왔다. 이러한 점에서 대외관계사는 한국역사 전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그것은 단순히 대외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여러 영역과 폭넓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10~14세기에 걸치는 고려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고려시대의 대외관계 전개에는 무엇보다 한족왕조인 송에 대하여 요, 금, 원 등으로 이어지는 대륙 북방 유목민족의 잇따른 흥기가 특히 중요한 국제적 환경을 형성하였다. 송조는 당을 계승한 측면이 있지만 그 국제적 영향력이 제한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거란(遼:요), 여진(金), 몽골(元) 등은 부족 통합을 통한 강력한 국가를 구축하여 ‘정복국가’로서 대륙의 정세를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민족주의의 시대’라고도 묘사한 바 있는 이 같은 다원적 국제 환경에서 고려는 때로 그 일방에 귀속이 강요되기도 하고 주체적인 상호 연대를 추구하기도 하는 가운데, 어느 시기보다 역동적인 대외관계가 전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고려 대외관계의 맥락과 성격, 대외 항쟁사의 문제 및 경제적ㆍ 문화적 교류의 양상을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송 등 고려시대의 주변국과의 관계를 연결 지으면서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2) 거란과의 항쟁고려를 둘러싼 다원적 국제관계의 현실에서 고려가 선택한 대외관계의 특징은 무엇보다 명분을 중시하면서도 현실적 국제환경 속에서 실리를 함께 고려하는 외교적 노선을 추구하였다는 점이다.건국초기 고려는 중국 5대와 관계를 통하여 신왕조의 권위를 뒷받침 받고자 하였다. 960년 송조(북송, 960~1279)가 출현하자 고려는 곧 그와 통교하고(962) 외교적 연대를 모색하였다. 송을 대외관계의 중심에 둔 것은 한족왕조의 정통성과 문화적 역량을 평가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거란(요, 907~1125)을단을 두려워하여 별다른 소득 없이 현종의 入朝(입조)를 조건으로 물러갔다. 현종의 입조는 물론 고려의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따라서 실현되지도 않았다.그 후에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누차 소규모적인 침입을 하여 오더니 현종 9년(1018)에 제3차의 침입을 하여 왔다. 이때 蕭排押(소배압)이 거느린 거란군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퇴각하는 것을 姜邯贊(강감찬)이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여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하였다.이리하여 거란의 고려에 대한 침략은 실패하고 말았다. 고려는 이 민족의 침략에 대항하여 감연히 싸워서 이를 격퇴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현종 10년(1019)에 양국은 강화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3) 여진정벌 및 금과의 관계대외관계의 전개는 단순히 국제관계라는 표면적 관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결정하는 국내의 정치세력 또는 정치 운영의 방향과 일정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국제관계의 조건이 국내정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반대로 국내 정치세력의 향배가 국제관계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고려의 정치는 대외관계에서 국가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태도와 교류를 통한 문화의 수용 또는 현실적 대외관계의 조건을 중시하는 상반되는 태도가 함께 공존 하였다. 12세기 대금 관계를 놓고 이른바 자주와 사대로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정치적 상황은 이 같은 정치와 외교의 상관성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대외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견해차는 12세기만이 아니라 고려 초 대거란 또는 대송관계에서부터 있었던 것이고, 13세기의 대몽골 항쟁의 과정에서도 확인된다.거란과의 평화가 수립될 무렵 새로 고려를 괴롭히게 된 것은 女眞(여진)이었다. 고려가 덕종 2년(1033)부터 정종 10년(1044)에 이르는 12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축조한 압록강 입구로부터 동해안의 都連浦(도련포)(廣浦:광포)에 이르는 千里長城(천리장성)은 거란뿐 아니라 여진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여현실적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간과할 수 없다.4) 송과의 관계고려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것은 주변국가에 고려의 국위를 크게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거란에게 황하 이북의 땅을 빼앗긴 송은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서 고려와 가까워지기를 희망했다. 한편, 고려는 송을 문화적인 선진국으로 생각하고 그로부터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였다.그리하여 두 나라 사이에는 빈번한 사신왕래를 통해, 활발한 경제,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1세기 초에서 12세기 중엽에 이르는 150년간은 고려의 경제ㆍ문화수준이 절정기에 이르고, 고려의 국위를 널리 세계에 떨치게 되었다.우선 외교적으로 송은 고려에서 간 사신을 朝貢使(조공사)로 부르지 않고, 國信使(국신사)로 호칭하여 송과 대등한 국가의 사신으로 극진히 대우했다. 송은 고려를 제후국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그만큼 고려의 문화수준과 국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문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송의 학인들과 교류했던 金悌(김제), 朴寅亮(박인량)(?~1096), 金覲(김근)의 시문이 송나라 학자들의 찬탄을 받아『小華集(소화집)』이라는 이름으로 송에서 간행된 사실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송에서도 고려에 사신을 보낼 때에는 시문이 뛰어난 인물을 선발했다.이렇게 공적인 사신이나 왕래나 사적인 상선의 내왕을 통해서 고려는 금ㆍ은ㆍ동ㆍ인삼ㆍ잣(松子) 등의 원료품과 종이ㆍ붓ㆍ먹ㆍ부채 등 송인이 좋아하는 수공품들을 수출하고, 그 대신 비단ㆍ책ㆍ자기ㆍ약재ㆍ악기 등을 수입하였다.이러한 수입품들은 고려의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가령 宋板本(송판본)은 고려 木版印刷(목판인쇄)의 발달에, 宋磁(송자)는 고려청자의 발달에 각기 이바지 하였다. 이같이 두 나라의 관계는 평화적인 토대 위에 선 문화적ㆍ경제적 교섭이었고, 이것은 고려 귀족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대각국사 의천이 송에서 귀국한 후 敎藏都監(교장도감)을 설치하여 송, 요, 일본 등으로부터 4천 권의 외국서적을 모은 것도 기억해 둘 만하다.1170년 이후 1세기 동안 고려는 무인정권의 시대였다. 무인정권은 국왕의 권위를 이용하여 특정의 무인집권자가 독재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였다는 점에서 정치 세력 사이의 합의와 세력 균형의 향배가 정책 결정의 중요 변수였던 시기와는 그 양상이 크게 달랐다.무인정권이 몽골의 침입에 대하여 강경론으로 일관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요, 금의 고려와의 관계가 형식적 사대라는 측면이 강하였던 것에 대하여, 몽골의 고려에 대한 요구는 정치적ㆍ경제적인 예속관계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몽골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고려는 자주성을 크게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왕권은 몽골 세력에 연결되어 무인정권은 자신의 정치기반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한편으로 대외관계에서 자주적 대응에 대한 요구는 국초부터 일정한 흐름의 하나였다. 무인정권이라는 특성은 이 같은 강경한 대외관과 더욱 합치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따라서 무인정권은 몽골에 복속을 거부하는 자주적 입장의 대외관을 명분으로 끝까지 대외항전을 견지하였던 것이다.몽골의 고려 침입은 123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금에 대한 정복전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1234년 몽골의 공격에 따른 금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1232년 서울을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을 지속하였다. 금 멸망 이후 동아시아에서 몽골의 주요 작전 대상은 남송과 고려였다.고려는 금의 배후이기도 하고 남송의 배후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군사적 조치가 병행된 것이다. 고려 정부의 복속은 1270년 정변으로 무인정권이 붕괴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였다. 그러나 무인정권의 붕괴에도 반몽 정책을 견지하였던 잔재세력은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1273년까지 항전을 지속하였다.고려 무인정권의 항몽 전쟁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어 왔다. 무인정권의 항전을 역사적으로 평가한 것은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공헌이었다. 이에 따라 몽골과의 항전은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민족항전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최근에는 대몽항전의 실질적인 주체가 농있다.이러한 점에서 원을 통한 문물의 교류와 영향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더욱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일본과 관계는 다른 어는 시대보다 소원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제 교류와 대외관계는 기본적으로 상호간 필요성이 전제되는 것인 만큼 중세적 세계 안에서 여ㆍ일 상호간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고, 더욱이 여몽연합군의 일본침입, 또는 14세기 이후 왜구의 발호가 고려를 괴롭혔던 사정으로 말미암아 후기에는 원만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그러나 최근 카마쿠라와 큐슈 지역 일대에서 다양한 고려자기의 자료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여일관계에서 상호 교역이 일정 수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더 깊은 연구를 기대하게 된다.7) 고려의 외교관계를 보면서고려시대의 대외관계는 중국 대륙에서 부침한 한족왕조 송과, 유목적 전통을 가진 요, 금, 원 등 여러 국가와 이루어진 관계를 그 특징으로 한다. 다원적 국제환경 속에서 고려는 때로는 군사적 대결을 불사하면서도 의례적 사대관계를 수용하거나 외교적 방식에 따른 세력 균형을 꾀하는 등 실리주의적 입장에서 이에 적절히 대처하고자 하였던 대외관계의 유연성이 주목된다.이 같은 대외관계 전개는 무엇보다 송-요(금)-고려 또는(서하)가 삼각의 세력 균형 축을 형성하고 있던 고려 전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조건에 따라서 가능하였다. 이에 실리주의 또는 호혜성이 외교관계의 주요 선택 원리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세력균형과 실리주의에 바탕을 둔 대외관계의 전개는 고려인의 세계인식과 밀접히 연관된 문제이기고 하다. 이 시기에는 고려 중심의 세계관이나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함께, 중국 중심의 세계를 인정하면서도 고려를 중국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다원론적 천하관이 함께 공존하였다.고려가 필요에 따라서 요, 금의 연호를 취하는 등 사대적 외교관계를 수용하면서도 실제로는 황제국에 준하는 격식과 제도를 채용하여 황제국 체제를 유지하였다는 것이 근년의 연구로 새로이 정립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1.
    인문/어학| 2010.12.23| 12페이지| 2,500원| 조회(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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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시대와 호족
    7. 후삼국시대와 호족1) 신라말기 사회의 동요와 地方豪族(지방호족)의 대두『三國史記』에서는 신라의 역사를 上代 ? 中代 ? 下代 세시기로 구분했는데, 중대는 신라의 전성기로서 武烈王(무열왕)의 직계자손들에 의한 왕권의 전제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그러나 중대 말경인 景德王(경덕왕)때 와서는 왕권의 강화도 한계점에 도달하여 방계의 진골귀족들이 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신라의 정치와 사회운영의 기본원리로 기능하던 骨品(골품)제도가 모순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경덕왕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무열왕 이후부터 추진해 왔던 귀족세력의 억제를 위한 시도로서 漢化政策(한화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실시했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다음 해인 惠恭王(혜공왕)때 마침내 골품 제도의 모순은 커다란 반란으로 폭발했다.혜공왕은 96각간(족장)의 내란과 같은 방계귀족들의 반란으로 살해되고 중대 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宣德王(선덕왕)때부터 방계귀족들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마지막 敬順王(경순왕)때까지를 하대라고 한다.이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인 경향에 대한 진골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된 것이었기 때문에 하대의 신라사회는 귀족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었다. 이제는 왕이라 하더라도 귀족 전부의 대표자일 수는 없다. 그를 추대한 일파의 대표자에 불과했다.그 결과 중앙귀족 간의 대립과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하대 155년간에 왕이 20명이나 교체되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의 왕이 정권쟁탈전에 희생되었다. 중앙 진골귀족들의 분열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지배체제의 구성원리가 되었던 골품제도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도 크게 약화되었다.眞聖女王(진성여왕)이후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반란이 폭발하고 독립적인 지방 세력이 대두함으로써 마침내 중앙 진골귀족은 역사무대에서 밀려나게 되었다.한편 중앙 진골귀족들이 전반적으로 몰락해 가고 있을 때 먼저 그 비판세력으로 등장한 인물들은 6두품이 지방의 세력가들은 신라말기의 혼란기에 처해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성을 쌓고 자립하여 城主, 將軍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사병을 조직함과 아울러 중앙정부에 비견될 만한 행정조직을 갖추고 그 지방의 백성들에 대해 세금의 수취와 노동력의 징발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인근의 다른 호족세력들을 통합하면서 그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신라 말기 후삼국시대는 흔히 호족으로 불리는 이 지방 세력가들이 상호 다툼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가운데 야기된 대동란의 시대였다. 후삼국통일의 성패는 이 주체세력들의 지지와 협력의 여하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松嶽(송악)지방의 촌주 출신으로 대두한 왕건도 궁예가 한강 유역을 차지해 가던 때 개성, 승천부, 연안, 백천, 강화, 교동, 하음 등 송악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일부와 한강 하류 유역 일대의 해상세력과 군진세력까지 통합하면서 그 지역의 大호족세력으로 성장했다.2) 후삼국의 분열과 고려의 통일진성여왕 이후 신라 골품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자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지방 반란 가운데 대표적인 세력이 궁예, 견훤, 왕건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먼저 견훤은 완산주를 근거로 삼고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 다는 구호아래 후백제를 건국했고(892, 진성여왕 6), 궁예는 왕건세력과 연결하여 송악을 근거로 하여(뒤에 철원으로 옮김) 고구려의 부흥을 구실 삼아 후고구려를 건국하여(901, 효공왕 5) 신라와 더불어 삼국정립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주의 신라왕실이 실제로 지배할 수 있는 지역은 낙동강 이동, 소맥산맥 이남의 원래의 신라지역으로 줄어들고 말았다.이리하여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신라는 역사의 추진력을 이미 상실한 잔존세력에 불과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역사 전개과정은 궁예, 견원, 왕건의 체질과 그들의 정치세력의 성격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먼저 泰封(태봉)의 궁예는 草賊(초적)의 무리를 모은 賊黨(적당)세력의 편성이 중요한 세력 기반이었다. 중앙귀족들의 문란한 수취와 기근으로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고려를 개창했다(918, 경명왕 2).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옮겨 정치적 ? 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새로운 국가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그는 해상세력과 군진세력을 포용한 지방호족 출신으로서의 성격을 바탕으로 하여 안으로는 지방호족들과의 연합과 민심 수습에 노력하여 후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밖으로는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후백제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대결하여 타도하려는 외교정책을 폈다. 이와 같은 왕건의 정책은 실효를 거두어 고려는 먼저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평화리에 신라를 합병하는 데 성공했다(935, 경순왕 9, 태조 18). 이어서 다음 해에는 왕실의 내분으로 분열된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936, 태조 19).3) 궁예의 정사속의 최후, 전설속의 죽음(1) 궁예의 비참한 종말을 재구성해 보다그 이유는 삼국사기 나 고려사 등 이른바 정사에 그려진 궁예의 최후가 너무 처참하기 때문이다. 또 궁예에서 왕건으로 이어지는 정권교체의 진정한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궁예의 죽음을 재구성해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고려사 는 궁예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918년, 하유월 을묘) 기병장군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몰래 짜고 밤중에 태조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왕으로 추대할 뜻을 함께 말했다. 태조는 굳이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니 여려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오면서 사람을 놓아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왕공이 벌써 의기를 들었다”라고 했다.이때에 분주히 달려와서 함께 참가한 자들이 이루 셀 수가 없었고 먼저 궁문으로 와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 말하기를, “왕공이 벌써 천하를 얻었으니 내 일은 끝났다”라고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리하여 변복을 하고 북문으로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삼봉 최고지에 올라서 은피하여 제도할 땅을 둘러볼 즈음에 문득 한 승을 만나서 우선 먹을 것을 시여하라 하매, 자기도 약간 후량을 어제까지 다 먹고 이제는 죽기만 기다리노라 한다. 혹시 용잠호장 할 땅이 없겠느냐 하매 병목 같은 이 속에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 하고는 인홀불견이었다. 아아 천지망아로다 하고, 그곳에서 심연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졌더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시방 능 있는 곳에 와서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선 채로 금관을 만들어 씌우고 그 위를 석봉 한 것이 시방 능소요, 이 금관을 훔치려 하여 도굴의 환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제마다 천변이 있어 무서워 퇴폐하였으며, 그때부터 심위가 혁연하여 근경의 화복을 섭리치 아니하는 것이 없으므로 시방까지 이 지방의 독자신이 되었다 한다. 덕물산의 최 장군처럼, 가림성의 유 장군처럼, 신도와 습합하여 만인의 찬양과 백대의 보사를 받는 조선의 선인기념법도 한 특례라 할 것이다. 말하고 보면 능연각ㆍ유명비 ㆍ동상목주가 사무의 입에 나왔으며, 환난의 제마다 용출하는 것이다.이 전설은 어찌 보면 평범한 듯 느껴지지만, 몇 가지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첫째, 궁예가 구례라고도 불렀다는 사실이다. 구례는 고유명사이면 동시에 고구려를 의미하는 고려 ? 고리의 동의이음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궁예왕은 고려왕이라는 의미이며, 궁예는 고려의 동음이사 현상일 수도 있다. 둘째, 궁예왕은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천명을 알고 이에 순응하여 자결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폭정으로 쫓겨난 폭군과 천명을 알고 자결한 의군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셋째, 궁예가 죽은 뒤 지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궁예가 이 일대에서 나중에까지도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재기를 꿈꾸었다는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이처럼 전설 속의 궁예는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은 폭군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존경을 받은 왕으로 남아 있다. 반대세력인 이성계 일파에게 역모로 몰려 처 특히 서경 경영은 고려왕실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육성함으로써 호족세력을 견제하려는 한 방책이었다는 견해도 있다.고려 초기의 중앙관제는 태봉을 주축으로 하여 신라의 관제를 병용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중국 唐(당)ㆍ宋(송)나라의 관제까지 받아들이면서 많은 호족을 중앙관리로 전환시켰다. 지방관제는 아직 지방관을 파견할 정도의 정비단계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事審官(사심관))제도와 其人(기인))제도를 통해 지방을 감독ㆍ통솔하고 있었다.그러나 태조의 이러한 노력과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왕권의 안정과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을 이루지 못한 채 즉위 26년 만에 후대의 왕들이 지켜야 할 것들을 적어놓은『訓要十條(훈요십조)』)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943, 태조 26). 태조 자신이 본래 호족세력의 한사람으로서 왕실의 안정을 위해서는『訓要十條』와 같은 家訓(가훈)적인 문서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訓要十條』의 내용은 유고, 불교, 풍수지리설, 산신신앙 등의 여러 사상이 뒤섞인 혼합관념 형태로 이루러져 있는데, 국가의 정치이념이나 운영원리로서 국내에 널리 반포한『정계』나『계백료서』,그리고 조서형식의 공식문서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사적 문서라고 할 수 있다.이『訓要十條』의 관념 형태는 지방호족에서 성장한 고려왕실의 호족적인 체질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일반 호족에게 관료로서의 전환이 요구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태조에게도 호족에서 제왕으로서의 전신이 요구되고 있었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왕실이나 호족세력에게 남아 있는 호족적 체질을 극복하여 제왕과 관료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적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5) 왕권과 호족태조가 죽은 지 2년 뒤에 王規(왕규)의 난이 일어났다. 왕규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그의 2녀가 태조의 제15비 ? 제16비로 들어가 1子 廣州院君(광주원군)을 낳았다. 그런데, 왕규는 다시 1녀를 惠宗(혜종)에게 들이는 한편 광주원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기 위하여 혜종과 그 동생들 간의 중상을 일삼고, 드디어는 혜종을 다.
    인문/어학| 2010.12.23| 12페이지| 2,500원| 조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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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에 대하여
    5. 백제의 역사와 문화-왜 ? 중국과의 관계1) 백제의 건국과 발전백제도 건국설화가 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에 의하면, 기원전 18년에 주몽의 아들 沸流(비류)와 溫祚(온조)형제가 10명의 신하를 이끌고 마한 땅으로 내려갔는데, 형 비류는 바닷가인 ?鄒忽(미추홀)에 자리 잡고, 동생 온조는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에 백제국을 세웠다.) 이 전설은 부여족의 한 갈래가 고구려 건국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한강 유역에 내려와 두 파가 경쟁하다가 위례성에 자리 잡은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백제를 세웠다는 사실을 설화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여기서 비류가 터 잡았다는 바닷가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지방과 아산만 일대로 비정되고, 온조가 터 잡은 하남 위례성은 지금의 송파구 혹은 하남시 일대로 생각된다.) 이곳은 높은 산과 강이 둘러싸고 평야가 남쪽으로 전개되어 있어 수도로서 매우 적합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위례성을 한강 이북으로 옮겼는데, 이를 하북 위례성이라고 한다.) 백제는 하북과 하남을 오가면서 수도를 경영했는데, 주변에는 토성과 柵(책)을 세워 방비를 강화하고 궁궐과 國母祠堂(국모사당)을 세웠다고 한다.백제는 처음에 힘이 약하여 북으로는 낙랑과 말갈의 침략을 자주 받고, 남으로는 천안 혹은 익산에 있는 마한왕(진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한강 유역의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미추홀의 비주류세력을 통합하고)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한층 강력한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여 갔다.백제는 기원후 1세기 중엽에는 마한을 공격하고, 3세기 중엽 古爾王(고이왕)(234~286)때에는 魏(위)지배하의 낙랑군과 대방군 그리고 말갈족을 북으로 밀어내면서 영토를 넓히고,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했다. 즉 중앙에 6개의 佐平(좌평)(260)을 두어 업무를 분장시키고, 16품의 官等制(관등제)와 백관의 公服(공복)을 제정하여 지방 족장들을 차등 있게 중앙관료로 흡수함으로써 정비된 고대왕국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이왕을 뒤에 백제의 시조로 추대한 이유가 여기에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유산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백제의 연속되는 고난의 역사가 후세에 남겨준 선물이었던 셈이다.4세기 후반에 백제는 근초고왕이라는 영웅이 있어 평양 일대까지 치고 올라가 고구려 남부의 영토를 많이 차지했었다. 그러나 곧바로 고구려의 왕들이 체제를 정비한 뒤 특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는 백제를 집중 공격하였다.당시 장수왕은 중국과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남하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그래서 한 반도 이남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고구려가 계속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백제가 공격의 제일 목표가 됐던 것이다.결국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에 밀려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웅진은 지역이 협소하고 강이 옆에 흐르기는 하지만, 방어 상으로도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다 안정된 수도를 찾아 다시 옮긴 곳이 부여였다.그 뒤에도 수도를 더 남쪽인 오늘날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으로 옮기려던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잘 알다시피 낙화암 삼천궁녀의 전설과 함께 의자왕을 마지막으로 백제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것이다.(3) 백제의 세련된 문화백제 문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세련성이다. 한국 고고학계 최대의 발굴이라고 할 만큼 많은 유물들이 발굴된 무령왕릉과 한국 최고의 탑이라고 할 수 있는 미륵사지탑, 그리고 서산에 마애삼존불상 등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안정되고 세련되고 균형 잡힌, 한마디로 말해서 귀족적인 맛을 느끼게 한다.1993녀 10월,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되어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金銅龍鳳蓬萊山香爐(금동용봉봉래산향로)도 마찬가지이다. 이 향로는 중국의 博山爐(박산로)보다 훨씬 세련되어 백제의 세공시술이 중국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향로는 단지 기술만이 아니라 사상세계까지 품어내는 예술성으로 인해 우리를 한없이 감동시킨다.삼국이 신라에 의해 통일됨으로 인해 백제의 역사는 그 뒤 역사 서술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백제문화는 백제가 있던 서남부지역과 함께 중심무隆寺(광륭사)를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캄무천황(桓武天皇(환무천황), 781~806)이 794년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한 것도 하타씨의 재정적 후원 때문이었다.특히 소가씨는 백제 근초고왕 때 가야를 정복한 장군 목라근자의 후손으로서 6~7세기에 걸쳐 100년간 실질적으로 일본을 지배한 인물이었다. 소가씨의 한 사람인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소아마자)가 6세기말에 세운 절이 바로 일본 最古(최고)의 사찰인 아스카지(飛鳥寺:비조사)이며,) 그의 무덤이 거대한 고인돌 형식의 石舞臺(석무대)고분으로서 지금 아스카 부근에 있다.한편, 백제왕실도 4세기경부터 일본 천황가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백제 태자가 일본으로 가서 혼인하고 있다가 귀국하여 왕이 되기고 하고, 백제 왕녀가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를 낳기도 했다. 따라서 두 나라 왕실 사이에는 피가 섞이게 되었다.그리하여 일본에서 출생했거나 도일했다가 귀국하여 왕이 된 것은 5세기 초 전지왕(405~420)을 필두로 하여 5세기 후반 東城王(동성왕)(479~501), 6세기 초 武寧王(무령왕) 등을 들 수 있다. 7세기 초에 쇼토쿠태자(聖德太子:성덕태자) 상을 그린 유명한 阿佐太子(아좌태자)가 백제왕이고, 8세기말에 수도를 교토로 옮긴 캄무천황의 어머니도 백제인으로 알려져 있다.이렇게 두 나라가 가까워지면서 백제가 위기에 처하면 일본에서 군대를 보내 백제를 도와주고, 백제 지배층은 또 일본에 갈 때 학자와 고급 기술자들을 데리고 가서 문화건설을 주도했던 것이다.『일본서기』에는 4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의 이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한다.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는 阿直岐(아직기)가 일본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어 박사 王仁은 경학과 역사를 가르쳤다. 왕은 또 369년(근초고왕24)에 유명한 칠지도를 만들어 왕자로 하여금 倭王(왜왕)에게 하사하도록 했다. 이 칼이 지금 국보로 지정되어 天理市(천리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안치되어 있다.)5세기 중반 개로왕 때인 463년에는 화가 因斯羅我(인이 무수히 많으나 여기서 일일이 소개하는 것을 줄인다.백제가 망한지 130여 년이 지난 794년에 일본의 캄무천황(桓武天皇:환무천황)은 수도를 나라에서 지금의 교토(京都:경도)인 헤이안(平安:평안)으로 옮기는데, 앞서 설명한대로 캄무는 어머니가 백제인이고, 백제계 하타씨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천도를 달성했다. 아마 일본을 후원하던 백제의 멸망이 백제계 일본인들의 자각과 분발심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헤이안 시대의 일본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백제의 역사를 일본역사로 바꾸어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왜곡하여 만든 것이『日本書紀(일본서기)』이다. 이 책은 720년에 편찬되었다고 하나, 10세기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日本書紀』의 앞부분은 神代記(신대기), 뒷부분은 天皇記(천황기)로 구성되어 있다. 신대기 에서는 天神(천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천조대신)를 비롯한 수많은 귀신들이 일본을 세우는 건국신화를 적었는데, 한반도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신화로 만든 것이다.천황기 는 기원전 660년 짐무천황(神武天皇)으로부터 기원후 697년의 지토천황(持統天皇:지통천황)에 이르는 42대 천황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런데 기원후 4세기 이전에는 국가가 없었으므로 천황기 의 앞부분은 대부분 날조된 역사이며, 4세기 이후의 역사는 진실된 기록이 적지 않다. 다만 백제를 일본으로 둔갑시켜 서술했기 때문에 백제가 한 일을 일본이 한 일로 적은 것이 많다. 예컨대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일본이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를 가야지방에 설치했다는 기록이나, 일본이 삼국의 조공을 받았다는 서술 혹은 삼국인이 일본으로 歸化(귀화)했다는 표현 등은 주객을 뒤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우리는『日本書紀(일본서기)』에 담긴 진실과 허구를 구별하여 고대한일관계를 연구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일본말에 ‘구다라나이(くだちなぃ)’라는 말이 있다. ‘구다라’는 ‘백제’라는 뜻이고 ‘나이’는 ‘아 마음이 상해 있었던 것이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늘 승과 패가 교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뇌리에는 설사 다른 팀에게는 지더라도 결코 일본에게만은 져서 안된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처럼 박혀 있는 듯하다.일종의 적개심과도 같은 이라한 심정은 아마도 20세기 초반 일본에 의해 굴욕적인 식민지배를 받았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고대에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또 한번 분노하게 된다.이른바 ‘임나일본부설’로 불리는 고대 일본의 남한경영론에 대해 학계 내외에서 비판의 소리가 고조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단적으로 반영한다. 이라한 경향은 고대에는 우리가 일본을 지배했다든지, 고대 일본의 지배층은 우리 쪽에서 넘어간 집단이라든지, 그와 함께 우리의 우수한 문화가 일본에 건너가 그들을 문명의 단계로 이끌었다든지 하는 이 야기를 통해 심리적 보상을 받으려는 차원으로 번져나가기도 한다.(1) 비류백제설1984년, 한 일간시문에는 ‘해양국가 비류백제’라는 연재물이 문화면 특집으로 실린 적이 있었다. 이 글은 대중매체의 위력을 확인시켜주듯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온조를 시조로 하는 백제와는 다른 비류백제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비류백제의 지배층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天皇家(천황가)를 이루었다는 주장이 더 흥미를 끌었다. 물론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전부터 있었지만, 그간 잘 풀지 못했던 미스테리를 일순간에 해결해주듯이 보였다.이어 유사한 내용의 글들이 소설 형태로도 등장하였다. 같은 신문에 연재된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역사소설은 고대 일본열도가 백제의 식민지였다는 전제 아래 씌어졌다.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잃어버린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복원한 것일까.(2) 비류백제설의 내용삼국사기 의 백제 시조설화에는, 온조를 시조로 한 것과 비류를 시조로 한 것 두 가지가 모두 실려 있다. 비류백제설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온조설화에서는, 고구려에서 망명해 내려온 후 형인 비류는 자살하고 동생 온조가일이다.
    인문/어학| 2010.12.23| 12페이지| 2,500원| 조회(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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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개항과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13. 근대개항과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1) 통상개화론의 대두와 개항(1) 통상개화론의 대두이미 北學論者(북학론자)인 朴齊家(박제가)는 단지 청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서양과도 장차 통상의 길을 터야 국가가 부강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李圭景(이경규)도 純祖(순조) 32년(1832)에 영국 상선이 통상을 요구하여 왔을 때에 이를 허락할 것을 주장한 바 있었다. 그리고 崔漢綺(최한기) 또한 海國圖志(해국도지) ? 瀛環志略(영환지략) 등을 읽고 서양 여러 나라에 관한 지식을 얻어 地球典要(지구전요) 를 저술해서 소개할 뿐 아니라 문호를 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그런데 이러한 통상론은 단순히 무역에 의한 재부를 얻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자는 데에도 있었다.이러한 통상론은 朴珪壽(박규수) ? 吳慶錫(오경석) ? 劉鴻基(유홍기) 등에 의하여 더욱 추진되었다. 박규수는 朴趾源(박지원)의 손자로서 그 조부의 사상을 이어받고 또 서양의 신문물에 대한 서적을 읽어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문화를 수입 할 것을 주장하였다. 오경석은 中人출신의 譯官(역관)으로 청에 왕래하면서 海國圖志(해국도지)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이를 널리 권장하였다.유홍기(大致:대치)도 역시 중인 출신으로의 醫(의)를 業(업)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는 오경석과 가까워 그로부터 서양문물에 관한 책을 얻어 읽고 통상과 개화를 주장하였다. 이 같은 통상과 개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커감에 따라서 대외통상을 위한 조건이 국내적으로 성숙해 가고 있었던 셈이다.한편, 강경한 쇄국주의자인 大院君(대원군)이 고종 10년(1873)에 드디어 정권에서 물러난 것도 대외통상을 위한 하나의 조건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이때 대원군은 그의 적대세력인 유학자들과 새로 등장한 閔氏(민씨)의 세력에 의하여 축출된 것이다.金氏 勢道(김씨 세도)의 폐해를 알고 있는 대원군은 고종의 妃를 한미한 민씨의 집에서 맞이하였다. 그러나 明成皇后 閔妃(명성황후 민비)는 고종을 조종하여 崔益鉉(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에 대서 나라가 부강하려면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과 러시아의 남침을 막으려면 親中國(친중국) ? 結日本(결일본) ? 聯美國(연미국)하여 自强(자강)을 꾀해야 한다는 내용의 것이었다.이언 은 청의 鄭觀應(정관응)이 지은 것인데,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면 기술만 중요시해서는 안 되며 기술 뒤에 있는 정치제도 등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러한 영향과 자극 속에서 정부의 당국자들은 점점 개화의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즉 김굉집이 귀국한 다음해인 고종 18년(1881)에는 趙準永(조준양) ? 朴定陽(박정양) ? 魚允中(어윤중) ? 洪英植(홍영식) 등 朝士視察團(조사시찰단)(紳士遊覽團: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각종의 시설을 시찰하기 위한 전문위원의 파견이라 하겠다. 그들은 70여 일 동안 일본의 각지를 다니면서 행정기관을 비롯하여 군사 ? 교육 ? 공업 등등의 상황을 상세히 시찰하였다.한편, 청의 권고에 따라서 金允植(김윤식)을 領選使(영선사)로 삼아 양반 출신의 학도와 그리고 工匠(공장) 수십 명을 거느리고 청의 天津機器局(천진기기국)에 가서 신식무기의 제조법과 군사 관계의 기초과학을 배우게 하였다. 이리하여 세계의 대세에 따라가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표면화하게 되었다.이렇게 얻은 신지식을 토대로 해서 개화의 노선에 따라 정치개혁이 실시되었다. 정치개혁에 있어서 고종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군사제도였다. 즉 고종 18년(1881)에 과거의 구식군대인 5軍營(군영)은 이를 武衛營(무위영)과 壯御營(장어영)의 兩營(양영)으로 개편 정리하고, 그 長을 大將이라 하여 국왕의 친근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새로이 일본의 장교를 초빙 하여 다가 신식군사훈련을 가하여 別技軍(별기군)을 조직하였는데, 이 별기군은 국왕의 근위병과 같은 존재여서 특별한 후대를 받고 있었다.또 양반 자제 중 빼어난 자 100여 명을 뽑아서 士官生徒라 이름하고 신식무예를 배우게 하였다. 이리하여 장차로는 구식군대를 모두 없애려는 계획이었다. 고종은 왕권의 강화금 군졸의 행동을 지휘하게 하였다.이에 군졸들은 무기를 탈취한 뒤에 捕盜廳(포도청)을 습격하여 갇혀 있던 자들을 석방하고 별기군을 훈련하던 일본인 장교를 죽이고, 또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였다. 일본공사 하나후사는 겨우 탈출하여 인천으로 가서 귀국하였는데, 이때 공사관은 불타버렸다. 그리고는 다음날 궁성으로 달려 들어가 민겸호를 죽이고 민비를 찾았으나 민비는 겨우 몸을 숨겨 탈출하였다.고종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군졸을 배후에서 책동하고 있는 대원군을 입궐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하여 그를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금후 모든 정사는 대원군의 결재를 받아 시행하도록 명을 내리었다.이에 대원군은 재차 정권을 장악하여 일단 그 소망을 달성할 수가 있었다. 이와 동시에 군란은 진정되었다. 집권한 대원군은 군졸들의 요청으로 兩營과 별기군을 폐하고 5군영을 부활시켰고, 또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였다. 이리하여 개화정책 이전의 옛날로 돌아가게 되었다.(6) 청 ? 일의 침략행위와 열강과의 통상대원군의 재집권은 곧 보수주의와 배외정책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청 ? 일 양국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공사 하나후사는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고 유력한 육 ?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와서 정부와의 교섭에 임하였다.일본은 만일의 경우에는 전투도 사양치 않는다는 태도를 가지고,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복강)에는 混成旅團(혼성여단)을 편성하고 운송선을 대기시켜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그리고는 심지어 巨濟島(거제도)나 鬱陵島(을릉도)의 영토 할양까지 고려에 넣고 있었다. 조급하게 서두르는 하나후사와의 교섭은 정돈되었다. 최후통첩을 발한 하나후사는 인천으로 철수하였으나 예정한 군사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당시 이미 우세한 청군이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출병 소동에 가장 신경을 날카로이 한 것은 청국이었다.청은 영선사 김윤식의 의견에 따라 일본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파견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고 吳長慶(오장전개되는 상황을 저지해 보려고 一族(일족)을 규합하여 대원군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왕실종친세력의 부활을 억제하려 했다.그러나 이미 급선회하는 정치권력의 물결은 제어할 수 없었다. 더욱이 같은 안동 김씨의 일족인 金炳學(김병학), 金炳國(김병국) 형제가 대원군 쪽으로 이탈한 상황까지 벌어졌다. 결국 안동 김씨의 실력자 영의정 김좌근마저도 표면상으로 南延君 球(남연군 구)의 덕을 칭송하며 대원군 本生家(본생가)의 曾祖老(증조노), 祖老(조노)에 대하여 贈職(증직)할 것을 稟達(품달)하는 처신을 해야만 했다.대왕대비의 형식상의 수렴청정이 고종 3월에 철회가 되지만 政務(정무)의 대소사가 처음부터 대원군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그는 막강한 안동 김씨 세력 하에서 대왕대비의 聽政(섭정)이란 명목 하에 攝政이 되어 전제왕조의 재건을 위한 독재 정치를 강행함으로서 60여년 정권을 장악하던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종말을 고하게 되고 왕실의 위엄과 전제왕조의 재건이란 확고한 집권책으로 공식 직함 없는 “大院位 分付(대원위 분부)” 라는 이른바 五字風行(오자풍행)의 새로운 형태의 세도가 전개되었다.고종 3년 3월(1866)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철회함에 국왕의 親政(친정)이란 명목 아래 대원군은 더욱 확고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완전히 인사권마저 갖고 관리의 任免(임면)을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들은 하나씩 물러나면서 주요 관직을 대원군이 직접 임면한다. 고종 원년 4월(1863) 영의정 김좌근이 다음해 2월 영중추부사 김흥근이 사직하고 각 判書(판서)를 역임한 김좌근의 아들 金炳翼(김병익)도 뒤따라 물러났다. 이후 趙斗淳(조두순)을 영의정으로 김병학을 좌의정으로 柳厚祚(유후조)를 우의정으로 임면한다.대원군이 가장 고심하였던 것은 왕비 간택이었다. 부대부인 민씨가 친척인 민치록의 딸을 추천하였다. 그녀는 조실부모하고 聰慧明敏(총혜명민)하였던 것이므로 마침내 간택을 받게 된다. 그녀가 바로 명성황후이며 당시 나이는 16세, 고종보다 한 살 위였다.대원군이 정권을 종래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대원군은 노련한 전문행정가인 중인신분 가운데서 명민한 자를 골라 의정부와 육조를 비롯한 중앙관서에 배속시켰다. 대원군은 지방행정관서의 서리 층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포섭하였다. 그러나 중인 서리 층을 지배권력 강화에 활용하고 있을 뿐, 신분제도를 타파하여 능력에 따라 양반관료와 차별 없이 고관현직에 발탁하는 제도적 변혁을 꾀한 적은 없다.(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는 白雲洞書院(백운동서원)이다. 그 후 명종 때 이곳에 부임한 李滉(이황)이 건의하여 紹修書院(소수서원)이란 사액과 함께 서적과 면세전토 그리고 노비를 하사하였으니, 이것이 곧 賜額書院(사액서원)의 효시이다. 이후 이를 본떠서 전국 각지에 서원이 남설 되기 시작하였다.또한 서원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양반유생이 늘어나며, 서원의 위세로 관민을 협박하며 금품을 강요하는 비행이 자행되었다. 서원 외에도 鄕賢祠(향현사))라는 것이 있었다.서원과 향현사의 남설은 곧 지방유림의 세력신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세력의 증강을 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국가재정에 대한 막대한 결손을 초래하였다.고종 원년 7월(1863) 에 대원군은 전국서원과 향현사를 엄밀히 조사시키는 한편 그 존폐문제를 검토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고종 8년 3월(1871)에 마침내 전국의 거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는 명령이 발령되었다. 즉 1人 1院 이상으로 중복 설립된 서원과 향현사는 설혹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모두 없애고, 사액서원으로서 마땅히 존속시켜야 할 47개 처만 남기도록 하였던 것이다.대원군이 집권 후 심혈을 기울인 다른 한 가지 사업은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왕실의 존엄을 과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은 방대한 예산을 요구하는 사업이었으며, 당시 조선왕조의 재정 상태에 비추어 보면 힘겨운 일이었다. 대원군은 종친과 일반인들을 상대로 원납금을 염출케 하였다.경복궁 중건에 사용된 개인 원납금은다.
    인문/어학| 2010.12.23| 16페이지| 2,500원| 조회(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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