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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졸업논문] 레닌과 스탈린의 연속성
    學士學位 請求論文레닌과 스탈린의 연속성 고찰成均館大學校 社會科學大學政治外交 學 科홍 길 동學士學位請求論文레닌과스탈린의연속성고찰2010홍길동學士學位 請求論文레닌과 스탈린의 연속성 고찰Continuity of Leninism and Stalinism成均館大學校 社會科學大學政治外交 學 科홍 길 동學士學位 請求論文레닌과 스탈린의 연속성 고찰Continuity of Leninism and Stalinism이 論文을 政治外交學 學士學位請求論文으로 提出합니다.20xx 年 x 月 xx日成均館大學校 社會科學大學政治外交 學 科홍 길 동목차1.서론2.소비에트 연방의 붕괴3.스탈린주의에 대한 연구경향4.레닌주의가. 전위당과 조직운영의 원리에 관하여나. 민족문제에 관하여5.스탈린주의가. 권위주의적 체제에 관해서나. 민족문제에 관하여6.맺음말제1장 서 론프란시스코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고한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물론 그의 주장은 그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의 말대로 역사의 변증법적인 발전이 끝났다는 것은, 지난 10년간의 인류사의 치열함을 생각해본다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의 종언’발언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인류의 현대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시대의 폐막을 상징하는 발언으로써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발언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회자되는 것은 그의 주장의 이론적인 가치 때문이라기보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을 고한 강열한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주장은 그 주장의 합리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한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이것만큼 틀림없는 사실이었다.현대사의 상징이 이데올로기이며, 현대사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동력이 자본과 민주주의라고 보았을 때 현대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17년 10월의 볼셰비키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근대사의 가장 결정적인 두 사건이었던 프 있는 천연자원으로 인해 중요도는 그 영토와 인구보다도 더 컸다.)의 우크라이나가 떨어져나감으로써, 더 이상 소비에트 연방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직위를 포기하게 됨으로써 1917년 볼셰비키혁명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는 종결되게 된다.제3장 스탈린주의에 대한 연구 경향자본과 민주주의의 모순적인 상황을 해결하고자 시도되었던 볼셰비키혁명,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라는 유토피아 지향적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역사의 종언의 함의이다. 그것도 그냥 실패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을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었던 대실패로 종종 평가된다. 볼셰비키혁명이 발발했던 러시아뿐만 아니라 혁명에 의해서 소비에트연방에 귀속되었던 주변 민족들, 더 나아가 볼셰비키혁명이 구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회를 쫓아 형성된 전 세계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20세기의 역사는 대체로, 혹은 아주 극단적으로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착취당하는 암흑과 같은 역사로 평가된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는 한 세기를 채 넘기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영향을 미친 요인과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매우 다양한 견해를 제기하였다. 연방 붕괴당시에 표면적으로 드러났던 민족문제, 극단적으로 거대하고 방만한 관료주의의 비효율성과 억압으로 인하여 창조성, 생산력이 결여되어 있었던 무기력한 민중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조건들의 결과물인 경제적인 낙후성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소비에트 연방 붕괴당시에 실제적으로 드러났었고, 그것들이 모두 붕괴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과 관계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현상에 대한 선형적인 사고방식 혹은 단일한 인과관계론으로는 설명되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여건들과 그에 따른 다양한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것은 소비에트 연방체제의 붕괴당시, 그리고 그 이전부터 체제 내에 존재하였던 모순적로 이어져오는 소비에트 연구에서, 각 연구의 결론에는 항상 레닌과 스탈린의 연속성이 있었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고르바초프의 대대적인 개혁,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이해하는 열쇠가 스탈린주의 그리고 레닌주의와의 연속성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비에트 연방과 사회주의가 완전히 붕괴된 지 20년이 지난 현재의 연구에서도 이러한 동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제4장 레닌주의가. 전위당과 조직운영의 원리에 관해서1세기에 달하는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대내정책의 방향성은 중앙집권적인 체제이다. 이에 따라서 소비에트 연방은 그 형성의 시기에서부터 전통적으로(물론 시기마다 그 강도는 달리했지만) 사회전반을 통제하였고, 또 그로 인해서 과도한 관료제가 야기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레닌이 볼셰비키혁명 전에 추구하였던 이상적인 사회주의상, 그리고 혁명성공이후, 짧은 기간 이였지만 그가 지도자로써 소비에트 연방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펼쳤던 정책사례들을 중심으로, 대내정책 전반에 대한 그가 추구했던 바들을 살펴보고자 한다.레닌은 ‘맑스-레닌주의’ 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시피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온전히 계승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역시 ‘맑스-레닌주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시피 마르크스의 사상을 도그마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상황과 조건들(특히 러시아라는 특수한 조건)을 고려하여서 발전 계승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레닌이 마르크스와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점은, 농민에 대한 인식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산업 노동자 중심으로(혹은 단독으로)이루어질 것이라고 강력하게 예언자적으로 주장했다. 반드시 자본주의가 최종단계까지 발달한 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당시 3류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마르크스의 입장에서는 매우 요원한 일이었을 것이다.하지만 레닌은 이러한 마르크스의 주장을 넘어서게 되는데, 이른바 그는 ‘노농동맹’(勞農同盟)이라는 통일전선 이론을 주장한 것이다.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혁명을 위해서 이론적 일관성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도그마로써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자기 자신의 이론도 교리로써 주장한 것이 아니라,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한 통로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방향성을 설정해놓고,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게 대처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레닌은 이러한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전체 방향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극단적인 수단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장투쟁과 불법적인 테러 행위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민주적인 절차들 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1918년의 제헌의회 해산 , 비밀경찰의 구성 1923년 당의 분열조짐에 대한 분파의 금지 등이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레닌은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위해서는 잠시 혁명을 유보할 수 있는 대담한 유연성까지도 갖추고 있었는데, 바로 NEP의 도입이 그러한 사례이다.따라서 레닌주의의 특징을 다시 요약하자면,첫째, 기존의 자본주의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과 그 이후 사회주의사회 건설이라는 방향성을 가진다. 이 방향성보다 그 어떠한 것도 우선순위를 가질 수 없다.둘째, 이 전체 목표 혹은 방향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동원될 수 있으며, 하나의 일관된 교리적 지침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최선의 유연한 대응이 요구된다.셋째, 어떠한 극단적인 방법(폭력의 수반, 민주적 절차의 무시, 일정기간 혁명정신에서의 후퇴)도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동원될 수 있다.나. 민족문제에 관해서주로 살펴보아야 할 부분, 소비에트 연방 붕괴당시 가장 가시적인 문제였던 민족주의, 그리고 그와 관련된 식민주의 시대에 화두가 되었던 ‘민족자결’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 민족주의에 관하여 레닌이 취하는 태도는 앞서 살펴보았던 대내정책에서 나타난 유연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모든 사회주의자들의 아버지인 마르크스는 민족주를 극복하여, 러시아 상황에 알맞게 창조적으로 계승했다. 이러한 그의 창조력, 또는 그자 주요하게 생각했던 균형 감각이 레닌의 혁명이론이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비극이었던 것은 그의 후계자인 스탈린은 그의 이론을 도그마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레닌을 계승한 스탈린은 레닌주의에서 가장 핵심인, 균형감각과 유연성, 창조력이 전혀 결여되어 있었다. 균형감각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스탈린은 레닌을 기계적으로 박에 계승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리고 레닌은 민족의 잠재력을 너무 낮게 평가했다.제5장 스탈린주의1.권위주의적 체제에 관해서2장에서 논의가 된 것처럼, 전통적인 견해는 스탈린 통치기간 동안의 소비에트 연방은 동기간에 존재했던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중 최악의 국가였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기간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전통적인 전체주의 학파뿐만 아니라 이후에 등장하는 수정주의자들도 동의한다. 이 시기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기인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과도한 관료체제를 바탕으로 한 권위주의적인 폭압적 구조와 정책이다.“그 체제는, 국가권력을 독점한-때때로 국가를 사실상 대신했다-강력히 계서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단일정당-중앙에서 계획되는 통제경제를 운영하고, 단일하고 강제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를(적어도 이론상으로)그 나라 주민들에게 부과하는-에 기반했다.”스탈린이 이러한 체제를 구성하게 된 것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스탈린 개인의 잔인성과 정치적 야심에 의해서 이러한 폭압적인 구조가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그동안 제한되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수정주의자들은 시대상황적인 조건들을 스탈린주의 해석의 주요 고려대상으로 포함시키게 되었다.“스탈린주의 체제의 기원과 발전을 설명하는데 있어 그 구체적이고 복합적 사회적 요인을 여러 가지 시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스탈린 사망이후 개방된 소련의 자
    학위논문| 2013.10.16| 44페이지| 3,000원| 조회(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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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군의 전시외교
    연합국의 전시외교와 한반도1. 2차 세계대전1939년 9월1일 독일의 폴란드 침입으로부터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지적으로 펼쳐졌던 과거의 전쟁과는 달리 전 세계를 무대로 펼쳐진 명실상부한 ‘세계’대전 이였다. 독일과 영,프 연합군의 전쟁을 비롯하여,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킨 독일의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 또한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까지, 인류역사상 유례를 살펴보기 어려운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인류역사상 최대의 전쟁은 일본에 떨어진 두 방의 원자폭탄에 의해서 종결되게 된다.2.연합군과 한반도2차 세계대전의 주동자였던 히틀러의 독일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끝까지 미국과 교전하며 버티고 있었다. 이 일본을 붕괴시키는 일이 미, 영, 소로 이루어진 연합국의 마지막 과제였다. 사실상 일본의 전력과 전쟁수행여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승리는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던 상황 이였고 다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쟁이후의 상황이었다. 일본의 식민지이며, 소련과 인접해있고, 또 미국이 지원했었던 중국과도 인접해 있던 한반도가 종전직전 연합군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3.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중학교, 아니 어쩌면 초등학교만 나와도,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이야기는 알고 있을 것이다.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는 원칙적으로 주변의 강대국의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박에 없는 위치라고 말하고 있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일본이라는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국가들은 과거부터 꾸준히 한반도라는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많은 관심을 보여 왔고, 그 관심이 충돌해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여기에 전후 세계국가들의 리더가 되는 미국이 동참하게 된다. 스탈린이라는 권위주의적 통치자와 공산주의라는 다분히 위험해 보이는 체제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소련이라는 국가는 전쟁이 종결되기 전부터 이미 루스벨트의 눈에는 견제해야 될 세력으로 보였을 것이다.예나 그때나 지금이나 소련이 간절히 원하. 소련의 해양세력진출은 기껏 해봐야 불완전한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 까지 밖에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련이 얼지 않는 바다를 가진 한반도를 세력권에 넣을 경우 이야기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이것을 미합중국의 대통령 루스벨트는 가만히 놔두고 있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4.루스벨트와 신탁통치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은 그의 전임자였던 윌슨이 주장한 ‘민족 자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고, 윌슨은 민족은 자치능력과 권리를 갖지만 식민지 인민들은 장기간의 자치 수급기간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루스벨트는 그의 상관이자 전임자였던 윌슨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전후 식민지 국가에 대한 정책으로 ‘신탁통치’안을 내놓았다. 루스벨트가 주장한 ‘신탁통치’안은 식민지국가와 낙후된 국가에 자치능력을 배양하고 그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정의를 증진시키겠다는 루스벨트의 인도주의적 정신과, 신탁통치를 통하여 미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전략적인 기지를 확보하겠다는 미국식의 제국주의적 발상이 결합된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이중 구조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한반도는 여타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이 적용 되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20세기 초반의 한반도의 낙후성은 루스벨트의 ‘신탁통치’대상에 포함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이것이 루스벨트의 정책결정에 얼마나 영향력을 끼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 운동집단들은 서로간의 분열, 본토 민중들과의 연계성 결여 등의 이유로 전후 한반도를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5.전시 회담과 한반도1)영국과 미국의 회담루스벨트는 1943년 3월 영국의 외상 ‘엔소니 이든’이 워싱턴을 방분했을 때 처음으로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 때 루스벨트는 인도차이나 반도와 대만의 문제와 함께 한반도를 다국가가 참여하는 국제 신탁통치 실시할 것을 제안하였다.당시 영국과 미국은 이 문제에 있어서 서로의 의견이 상충되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비록 한반도의 문제가 영국에 직접적인주장하는 신탁통치안은 궁극적으로 낙후국과 식민지의 자치와 독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식민지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경우 영국으로서는 자국의 식민지 사업에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국의 계획은 반식민주의 정책을 통해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식민제국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앞으로 창설될 un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도처의 모든 지역을 일련의 전략 기지로 만들어 이들 미국의 영향권 내에 두려고 하였던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공동의 적을 패배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서로 연합하였지만, 자국의 국가 이익을 손상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피차간에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이 두 나라 간의 식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해서 표출되었다.2)카이로 회담한반도의 독립에 관한 첫 공식 결정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내려졌다. 1943년 12월 1일 미, 영, 중 3국은 한국을 적당한 절차를 거쳐 독립시킬 것 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3)테헤란 회담카이로 회담에 참석하지 않은 스탈린에게 회담의 결과를 알리고 이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테헤란에서 처칠과 루스벨트 그리고 스탈린이 회담을 연다. 놀랍게도 스탈린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스탈린은 아마도 신탁통치를 통해 한반도내에서 소련의 이권을 챙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4)모스크바 군사회담1944년 10월 14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 영, 소 3국 군사회담에서 소련의 극동 군사계획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대일전에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한반도의 북쪽지역까지 자신들의 작전영역으로 설정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한다.5)얄타회담1945년 2월, 미, 영, 소 세 지도자는 소련의 영토인 얄타에서 다시 회합을 가졌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한반도의 문제에 대해 원론적인 의견 교환만 나누었을 뿐, 더 이상의 구체적인 논의는 하지 않았다. 이 회담에서 미, 소 양측은 서로간의 요구, 즉,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와 스탈린의 대일전쟁 참가라는 요구를 암묵적으로 년 4월 12일, 반 정도는 예고되어 있었던 루스벨트의 죽음은 미국의 대소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온다. 루스벨트의 후임으로 들어선 트루먼 행정부가 가지고 있는 소련에 대한 시각은 루스벨트의 그것에 비해 훨씬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의 측근들은 소련의 대일전쟁 참가를 놓고 부정적인 의견들을 제출했다. 하지만 현지사령관인 맥아더를 비롯한 육군성의 의견은 소련의 참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허용하되 그로 인해 야기되는 정치적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탈린과 협상에 들어간다. 스탈린과의 협상에서 미국 측은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대한 소련 측의 소극적인 재확인을 얻어낸다.7.미. 소의 한반도 군사전략1945년 6월 18일 백악관에서 실시된 전략회의에서 미국의 주요 군부지도자들은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 데 비해 그 효율성은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 소련군에게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의 일체를 떠맡기기로 결정하고, 신탁통치라는 장치를 통해 소련에 대한 한국의 예속화를 방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한편 소련의 군부 지도자들은 대일전에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 극동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이 작전은 서부, 북부, 동부 세 방면에서 만주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이 작전 속에는 한반도에서의 작전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 작전은 웅기, 나진, 청진 등과 같은 북동쪽에 위치한 항구들을 점령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로 설정되어 있었다. 소련의 계획은 한반도를 점령하고 한반도에 자국의 위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과의 신탁통치 실시 약속이 소련의 행동에 제약 조건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지만, 이 역시 구체적인 문제까지 합의된 것은 아니므로 굳이 이에 구속될 필요는 없었다. 이러한 소련의 야욕은 1945년 6월 30일 소련과 중국의 회담에서 드러났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한국에는 외국 군대가 주둔하거나 외국의 정책이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 고 주장하였다.이러한 스하에 들어갈 소지가 큰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를 거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8.원자폭탄마지막 전시 회담인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는 영, 소, 미간에 어떠한 합의점도 찾지 못하였다. 특히 처칠과 스탈린은 여러 가지 쟁점사항에서 마찰을 일으켰는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중요한 사항은 신탁통치에 관한 처칠과 스탈린의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은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는 점이다. 트루먼이 한반도의 문제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을 보인 것은 그가 회담에 참가하기 직전에 그에게 날아온 원폭실험 성공 소식 때문일 것이다.원폭의 개발은 미국의 상황을 급변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소련의 도움 없이도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열도와 한반도에 상륙작전을 감행할 경우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예상했기 때문에 쉽사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던 미국은, 소련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한반도를 해방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폭을 개발함으로써 소련을 배제한 체 전쟁을 종결시킬수 있게 되었다. 소련이 대일본전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전후 동북아시아에서의 이권에 대해서 소련을 배려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원폭실험 성공후 트루먼은 빠르게 원폭투하작전을 전개한다. 그리고 8월 3일 이후 기상조건이 허락되는 대로 최초의 원폭을 투하하도록 지시하는 내용의 명령문이 트루먼에 의해서 승인된다.트루먼에게는 더 이상 소련과의 협상은 필요 없었다. 트루먼에게 남은 것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한국을 점령하는 일 뿐이었다. 이것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한반도에서의 세력 균형을 전제로 한 기존의 신탁통치 실시 정책에서, 한국을 확실하게 자국의 세력권 내에 두기 위한 베타적인 점령 정책으로 그 방향이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9.38선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은 소련 측에 한반도에 대한 군사계획이 없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하지만 실상은 미군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함과 동시에 한반도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사회과학| 2008.05.02| 4페이지| 1,000원| 조회(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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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닌의 사상
    Vladimir Il'ich Lenin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율리야노프’ 공식석상에서의 대외명은 ‘니콜라이 레닌’이라고 불리는 이남자는 여기앉아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익숙한 인물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20세기초 러시아 혁명당시 그가 주장했던 사상과 이론을 흔히들 레닌주의(Leninism)라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과 이론은 그의 몇가지 저서에서 잘 드러나는데 오늘 저는 그의 저서중 ‘제국주의론’과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드러난 그의 주장을 중심으로 그의 이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1. ‘무엇을 할 것인가?‘무엇을 할 것인가?’는 1902년에 발표된 레닌의 대표작으로 공산당의 조직론에 관한 고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주의자들 내에서의 ‘경제주의’ ‘교조주의’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등을 비판하고 ‘비판의 자유’ ‘자생성’을 부정하며 ‘전위당’ ‘민주집중제’등의 개념을 확립하여 분열된 사회주의자들의 역량의 집중을 주장하고 있다.그는 이 책이 씌여질 당시의 러시아 사회주의의 상황을 분열, 해체, 동요의 시기로 진단하고 ‘비판의 자유‘의 금지를 통한 이론통일과 역량집중, 전 러시아적 정치신문 발간으로 전 노동자들의 이론적 역량 강화와 혁명의 영역확대 및 유연성과 기동성 확보, 소수정예의 전위당을 통한 투쟁등을 주장하며 사회주의의 전투성을 공고히 하고 이 시기를 청산할것을 말하고 있다.이책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조직론의 모체가 되었으며, 특히 전위당과 민주집중제는 이후 모든 공산국가의 국가조직뿐 아니라 당이나 그 밖의 조직에서도 구성 및 운용의 원리가 되었다.2. 제국주의론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 즉, 자본주의붕괴의 직전 단계로 보고있다.이 책은 아주 구체적인 데이터를 근거로 들어 서구 제국주의국가들과 식민지와의 관계를 자본주의 발달과정과 연결시켜 분석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체재 내에서는 결국 부와 생산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독점될 수박에 없으며 이것이 국가간의 관계에 적용되면 결국 자본주의적 세계의 귀결은 소수국가에 의한 다수국가의 착취가 될수 박에 없다고 말하며 이것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있다.특히 그는 ‘금융자본’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독점적 생산에 의해 축적된 자본은 ‘금융자본’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금융자본’의 수출은 곧 ‘고리대금국가’화를 가져오며 이러한 차관의 도입은 정치문제의 개입으로까지 발전되며 결국 소수국가에 의한 다수국가의 착취적 관계는 지속적으로 심화된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다.한편 이러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팽창의 최종단계를 그는 세계영역의 폭력적 재분배, 즉 ‘세계대전’으로 보고 있고, 그가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종국에는 자본주의는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그것을 대체 한다, 라는 그의 주장을 추측해 볼 수 있다.3. 레닌의 국가론레닌은 국가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마르크스에 의하면 국가는 계급지배의 기관이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기관이며 계급간의 충돌을 완하 시키면서 이 억압을 법률화하여 견고한 것으로 만드는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국가에 관한 정의는 마르크스의 정의를 따르는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기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실체에 대한 개념을 정립함으로써 계급억압의 근절을 위한 혁명의 대상이 국가라는 추상적인 대상이 아닌 ‘국가 기관’이라는 구체적이 대상으로 규정되었다.레닌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재 내에서는 이 ‘국가권력의 실체’인 ‘국가 기관’이 자본가 계급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그 계급적 이익과 요구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구조화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가 어떠한 국가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자본의 손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자본가의 독재라는 것이다.결국 이 자본가의 독재에 의해 나타나는 ‘민주주의’를 레닌은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라고 말하고 있다. 자본가 계급에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지만 노동자 계급들에게는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억제, 분쇄시키는 착취적 독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법제적인 제도만을 따져, 공화제나 대의제를 다수의 지배로 보고 그것을 이룩하려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근본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계급독재를 폐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과학| 2008.05.02| 2페이지| 1,000원| 조회(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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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국의 선거제도와 한국의 선거제도
    해외의 선거제도와 한국의 선거제도영구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인 ‘존 로크’(John Locke)는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개념을 확립하였다고 평가되는 사상가이다. 로크의 이론에 따르면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과의 계약에 의거하여 지도자는 통치권을 위임받는데 통치를 잘하지 못했을 경우 이 통치권마저 철회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이러한 로크의 이론보다 2천년이나 앞서 중국의 철학자 맹자(孟子)역시 로크와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맹자는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는데, 맹자의 왕도정치에 따르면 ‘왕은 하늘의 아들로서 좋은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임무를 하늘로부터 위임받았다’ ‘라고 말하였다. 만일 왕이 실정을 하였을 경우에는 봉기하여 왕을 권좌에서 몰아낼 권리가 있다고까지 하였다. 폭군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를 물었을 때 맹자는 왕이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을 잃게 되면 국민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맹자는 국민이 첫째고 그 다음이 국가며 셋째가 왕이라고 하였다. 이런 동양의 인본철학에 의하면 민심이 천심으로 되어 있으며 국민을 하늘로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맹자의 왕도정치는 이후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동아시아의 정치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이렇듯 동서양 양문화권의 걸출한 사상가들이 ‘民’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상을 주장하였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民’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본래 인간은 자연스럽게 태어났으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탄압이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 인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안과 사상을 표출하였고, 그 결과물이 ‘民 ’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상인 ‘민주주의’일 것이다. 이 민주주의의 꽃은 ‘대의민주주의’ 이며, 대의민주주의 핵심은 ‘정당’이 될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선거’이다.누군가가 ‘Not Bullet, But B게 있다는 점이다 선거일이 되기 전에 가만히 있어도 투표용지가 집으로 날아오는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이 제도의 밑바탕에는 건국 초기헌법제정자들의 엘리트 의식이 깔려있다.2)피선거권대통령의 피선거권의 요건은 35세 이상인 자로서 출생에 의하여 미합중국 시민이어야 하고 14년간 미합중국 내에서 주소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대통령과 부통령은 동일한 주의 주민이어서는 안 된다. 2회 이상 대통령으로 재직한 자는 피선거권이 없다.3)선거과정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법적, 형식적 측면에서 보면 간접선거이지만 정치적 실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철저한 직선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직선과 간선의 혼합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미국만의 독특한 선거제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권자들은 2월에서 6월까지 예비선겆나 코커스를 통해 각 당의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할 대의원을 뽑고 여기서 뽑힌 대의원들은 7-8월 열리는 전당 대회에 참석, 대통령 후보를 선출한다.후보 지명전이 끝나면 각 당의 후보들은 상대 후보와 치열한 선거운동을 벌이고 국민들은 11월 첫째 월요일이 속한 주의 화요일에 대통령 선거인단을 뽑는다. .이들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봅기위한 투표를 한다. 이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에서 사실상 차기 대통령이 결정되며 총 선거인단 538명중 과반수인 270명을 얻으면 당선된다.4)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의 대통령은 직접선거가 아닌 간접선거에 의해 뽑힌다. 그리고 그 간접선거는 ‘선거인단’에 의해 행해진다.선거인단이란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하여 각주에서 인구비례로 선출되는 투표인단이다. 선거인단은 각주의 상, 하의원 수와 동일한 수가 구성된다.이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구가 많은 주와 인구가 적은주의 균형을 위해서이다. 미국은 각주의 연방국가에서 시작된 나라이기 때문에 직접선거를 하게 될 경우 인구가 많은 주에서 지지하는 대통령이 당선되어 주간의 세력균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이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우선은 미국의 정치제도상 법의개정이 힘들고, 또한 선거제도가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미국의 선거제도를 볼 때 선거제도라는 것은 국가의 권력구조, 정치풍토, 내지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 해당 국가의 역사는 수많은 요인들의 복합적인 산물들로 분석된다.중국중국은 건국 이후 1953년 보통선거를 정식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선거는 거수투표방식을 통한 공개적 참여로 실질적 의미의 선거라고 볼 수 없다. 1979년에 이르러 비로소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거수투표방식이 취소되고 무기명투표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또한 이때부터 차액선거를 채택해 후보자 수를 당선자 수보다 많게 함으로써 선거과정에 경쟁기제를 도입하게 되었다.1.전인대(全國人民代表大會)‘전국인민대표대회‘ 소위 ’전인대‘라고 불리는 중국의 최고국가권력기관이다. 국가의사의 결정기관이다. 각 성, 자치구, 직할시, 군이 선출하는 대표로 구성되며, 각 소수민족도 대표를 가진다. 임기는 5년이다.1)대표의 선출중국에서 전인대 대표를 비롯한 각급 지방인대 대표 선거는 국민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훈련시키는 정치사회화 수단인 동시에 정권의 정당성을 제고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16] 그러나 전인대 대표 선거는 무엇보다도 전인대 대표가 어떻게 구성될 것이며 전인대 대표와 지역주민의 관계를 규정짓는 등 대표의 구성과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전인대 대표는 공산당 중앙에 의해 선거 전에 미리 배분된다. 전인대 대표는 인구비례에 의해 배분되며 도시와 농촌지역에 차등 배분된다.[18] 이밖에도 주요 인민단체, 인민해방군, 화교, 여성 등에도 일정 수 이상의 대표가 할당된다.공산당 중앙이 대표할당제를 채택하는 이유는, 전체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이라는 상징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지만 실제 목적은 전인대가 공산당 밖의 중요 인사와 지식인, 소수민족을 정권 내로 포섭하기 위한 것이다. 즉 대표할당제는 주어진 틀에 사람을할 수 있도록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개혁은 어디까지나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전인대제도 역시,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공산당 중앙과 국무원의 역할을 보조하는 차원에 불과하다.전인대의 존재가 중국의 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개혁이 필요하다. 국민이 전인대 대표를 직접 선출하도록 현재의 간접선거를 직접전서로 바꾸어야 하고, 현재의 대표할당제와 공산당의 후보추천 및 선거운동 주도의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스웨덴1.국회(Riksdag)Riksdag라고 불리는 스웨덴의 국회는, 우리나라에 친숙한 단원제이다. 그러나 스웨덴은 100년이나 양원제국가를 유지하다가 1968년 헌법 개정 때 이를 폐지했기 때문에 양원제의 역사가 훨씬 길다.스웨덴의 국회의원 정수는 349명으로 선거구 선출의원이 310명 전국구 선출의원이 39명이다. 임기는 3년으로 조기해산이 가능하다.1)투표유권자들은 정당에서 출마한 개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에게 하도록 되어있다. 투표용지에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넣은 다음 투표함에 넣으면 된다.2)후보자 등록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자 등록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중앙선거청에 정당명을 등록해야 한다. 정당별로 한 선거구에 치ㅗ소 4명 최대 15명 이내의 후보자 명부를 신고한다. 선거구에 따라서는 한 당의 후보자가 의원 정수보다 많은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의원직을 상실한 경우를 대비해 예비후보를 미리 결정해 놓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는 보궐선거를 하지 않는다.3)투표용지스웨덴 선거제도의 특이한 점은 투표용지 공급 방식이다. 의석을 가진 정당은 중앙선거청에 주문하여 무료로 투표용지를 공급받는다. 의석이 없는 정당은 투표용지 대금을 선불해야 공급받을 수 있다. 각 정당은 공급받은 투표용지를 선거운동 조직을 통하여 유권자에게 배부한다. 투표용지 배부 자체가 자기 당 후보에게 찍어달라는 선거운동인 셈이다.이탈리아이탈리아교적 용이하여 소수정당이 난립하였고 이것이 정국의 불안을 가져왔다. 결국 국민들의 선거제도의 개선의 끝임 없는 요인에 의해 1993년 선거법이 개정되었고 정치개혁의 물꼬를 틀었다.그러나 다수대표제를 통해 당내 계파 보스들의 전횡을 막고 국민들에 의한 선택의 여지를 높인다는 다수대표제의 장점이 이탈리아의 새로운 정국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는 의문시된다. 우선 다수대표제에서 나타나는 득표율과 의석 배분간의 불일치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1994년 북부동맹이 정당명부 투표에서 8.4%만을 획득하였음에도, 다수대표에서 북부지역을 석권함으로 인해 약 19%의 의석점유율을 보인 것이 대표적 예이다. 또한 새 선거법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수대표제는 소수정당에 정당간 동맹을 강제하고 동맹체 내에서는 다시 여러 정당 또는 계파간 역관계에 따라 후보를 공천하는 등 예상하지 못한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다수대표제의 가면에 비례대표제가 숨겨져 있는 현상 혹은 다수대표제 안에 비례대표제적 원칙이 실현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대표제의 도입이 이탈리아 정치개혁에 미친 효과는 과거 후견주의에 기반을 둔 기민당 중심의 정당지배체제 청산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개혁정부는 제도의 변화만으로 완성시킬 수 없는 여러 문제들과 다수대표제 자체가 안고 있는 단점들을 보다 심도 있는 개혁의 지속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독일과거 독일의 전 신이였던, 입헌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은 제도의 운용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냈는데 이는 의회에 비해 강력한 대통령의 존재때문이였다. 대통령은 광범위한 권력을 바탕으로 비상사태선언을 남용하여 정국을 불안하게 하였고 의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또한 선거구 분할이 불합리 하게 시행됨으로써 정당체제의 분열을 촉진시켰고 나아가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전후에 제정된 독일의 기본법에서 권력의 자의적인 비재를 배제하고 국민 기본권의 불가침성을 장조한 점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1.연방의회 선거제도독일의 있다.
    사회과학| 2008.05.02| 15페이지| 1,000원| 조회(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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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우니라라 문화
    러시아의 포스트 모더니즘문학과 우리나라의 현대문학1980년대 후반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자유와 개방의 열기속에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인 소련의 소비에트 체제는 붕괴되었다. 소련의 소비에트체제의 붕괴는 많은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최종정착지의 마지막 분기점이였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중 한축이 무너짐으로써 마침내 인간은 최종정착지에 도달했고, 더 이상 인류에게 진보는 없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따라서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던 이들에 더 이상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형선고를 내림으로써 더 이상의 유포피아는 없고 단지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라고 말하는 일들도 있었다. 이렇듯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는 역사적으로 한획을 그을사건이였다.한편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의 당사자인 러시아는 어떻했는가?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는 마치 감옥에서 막 출소한 사람을 보는듯 하다. 오랫동안 억압과 부자유 가운데 진행되어온 러시아 사회는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와 해방에 방향성을 상실하고 좌충우돌하며 질서가 붕괴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현상은 페레스트로이카 초기의 러시아문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 문단에 찾아온 변화는 러시아 문화전체를 뒤 바꿀만한 것이엿다. 그 이전에는 헌법에 명시된 언론 출판의 자유가 준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 70여년간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식 문학과 비공식문학, 해외출판 문학의 구분이 없어졌다. 이때까지 검열의 장애로 작가들의 책상 서랍이나 국가의 지하창고에묻혀 있던 작품의 발굴 출판, 서바에서 출판된 것들이 대량 단행본으로 발행되는 등 한마디로 러시아 문학은 더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띄었다. 급변하는 정치 경제적 상황과 혼란이라는 배경을 다루는 새로운 작품이 나오는 대신 과거의 작가들이 작품들이 복권되고 해외에서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이 러시아 국내에서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개방과 사회체제의 변혁기에는 국민들뿐 아니라 작가들도 지성인들도 혼란스러울 것은 당연하다. 예술성이 풍부한 훌륭한 작품이 나오려면 특히 작가들은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세밀히 관찰하고 인식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회, 정치, 문학적 상황 하에서 새로운 형식주의적 경향이 드러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다.서구에서는 벌써 70-80년대 포스트모던 스타일의 문학이 유행했는데 개방 이후 러시아도 이런 경향을 직접 경함하고 있다.그러나 러시아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텍스트의 해체와 탈중심주의, 거대 이론을 지양하고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금까지 소비에트 체제아래에서의 억압과 검열로 인해 표출하지 못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듯한 모습이였다. 금기시되어 왔던 체제와 사회의 풍자와 비판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편승한 상업주의 문학 역시 성적 금기를 해제하여 독자의 호기심에 영합하여 사회주의에서는 존재할수 없는 에로티시즘, 강간, 살인, 마약, 동성애등의 해제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인다.러시아가 억압적인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도 부닌,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등과 같은 위대한 노벨상 수상 작가들을 배출시킬수 있었던것은 어떻한 외부 압력에도 자생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지탱의 근원들 즉 사상적 절대주의, 정신적 가치와 이상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소비에트 체제의 억압에 의한 반작용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적 절대주의로부터의 해방과 검열의 철폐로 인해 마치 감옥에 오래 갇혀 있던 사람이 풀려났을 때와 같은 동일한 충격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만큼 방향성을 잃고 말았다.전통과 질서는 단지 풍자의 대상만이 될뿐이었고, 흑색 비평이 만연하고 이전에 행해졌던 것들에 대한 고발 및 철학의 붕괴가 나타난다. 겉으로는 비획일화를 추구하지만, 본질상 따지고 보면 자기중심적, 풍자적, 냉소적인 잡다한 구성주의로 보여진다.이러한 문화적 현상에 따라 보이노비치로 대표되는 소비에트의 구체제를 풍자하는 작품들이 재평가되기 시작하였고, 나보꼬프 같은 독창적이고 실험적이며, 또한 금기시되는 주제들을 다루고 또한 비극적인 세계관을 담는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하지만 이러한 전통의 파괴보다는 전통을 따르며 그것을 새롭게 하려는 고급한 포스트 모더니즘을 표방하는 모습들도 존재했다.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라는 것은 결국 사회주의가 추구하던 유토피아라는 이상향, 낙원으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비극적인 인식의 과정이었다. 노벨상 수상자인 브로드스키는 이러한 비극적 인식의 과정에서 비록 유토피아에 대한 향수는 존재하지만 더 이상 소비에트적 유토피아를 추구할수 없다는 사실의 정확한 인식과 소비에트적인 거대함을 초월하는 시간의 거대함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서 현재의 저급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극복을 말하고있다.또한 안드레이 비또프와 같은 작가들은 체제나 사회현상보다는 인간의 내면의 소리를 조명하여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라야 비로소 자기를 찾으며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전통과의 단절과 급격한 사회변화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역시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2차세계대전과 해방을 전후로 해서 서구문물의 유입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격게 된다. 지극히 베타적일수 박에 없엇던 동양 유교적인 가치관이 지배적이던 사회에서 서구자본주의적 문물과 가치관이 급격하게 유입됨에 따라 한국사회역시 혼란을 격었고 또한 지금도 진행중이다.질서를 우선하며, 공동체중심주의, 또한 인정과 도덕 윤리, 가족과 같은 아날로그적인 전통적 가치관과 창의력과 개성을 우선하며, 개인중심주의, 또한 법과 이성과 같은 비아날로그적인 서구적 가치관이 혼제하여 대립하는 양상을 띄고 있는것이 지금의 한국사회다. 특히나 이것은 세대간의 대립과,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지고, 또한 여전히 동양적 전통의 가치관이 많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가치관의 제도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다보니 제도와 가치관의 괴리에서 오는 불협화음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이는 국민들의 응집력을 떨어뜨려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인문/어학| 2008.05.02| 3페이지| 1,000원| 조회(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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