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론1.서론2,“죽음”의 창을 통해 보는 세상3. 인간의 본질적 야만성 (獸性)으로 인한 죽음4. 문명의 세속화(世俗化)에 드러나는 인간의 죽음5. 사물화(事物化)된 인간의 죽음6. 삶의 죽음과 죽음에로의 삶7. 결론1. 서론최승호는 초기 시부터 최근 시에 이르는 동안 줄곧 “죽음”과 함께 살아 왔다.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죽음”을 통하여 삶을 살아온 것으로 “죽음”은 최승호의 삶을 선행하는 존재가 된다. 그에게 “죽음 이란 먼 곳의 미래도 아니며 다른 공간의 타인을 통해서 알게된 지식차원의 것도 아니다. 죽음 ”은 그의 몸 한 가운데서 생생히 살며 그의 몸은 곧“죽음”자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자신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 전체, 인간의 삶 전체가 “죽음”과 동의어를 이루게 한다.)최승호의 죽음 은 단지 인식대상만이 아닌 삶의 주체이다. 따라서 “죽음”의 힘이란 그에게서 이미 삶의 힘을 넘어선 차원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생각한 후 곧 잊고 마는 일시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며 구체적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죽음의 창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읽는다. 그가 그려내는 세상은 미물에서 인간까지, 무생물에서 생물까지 그로테스크한 “죽음”의 얼굴을 하고 있다.초기 시에서는 불안과 공포를 야기 시키는 실존적 “죽음”을 진흙소를 타고 에서부터 최근작에 이르러서는 보다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며 보편적인 “죽음”의 형태와 의미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의 시에 나타난 인간의 죽음을 다만 < 낙관론을 피지 않는> 혹은 허무주의자로만 말해 버릴 것인가? 본고에서는 최승호 시인의 “죽음”이 어떠한 형태로 전개. 발전. 승화되어 가는가를 살펴보았다.최승호 시인은 1977년 현대시학으로 데뷔, 시집으로는 1.대설주의보(1983) 2.고슴도치의 마을(1985) 3.진흙소를 타고(1987) 4.세속도시의 즐거움(1990) 5.회저의 밤(1993) 6.반딧불 보호구역(1995) 7.눈사람(1996) 8.여백(1997)이 있으며 오늘의 작가상(1982)과 김수영 문학상공을 먼 데다가 내다버리고돌아오는 장의차 안에 글썽한 눈들.수요일, 주인공을 가까운 데 내다버리고돌아오는 장의차 안에 붉어진 눈들.화요일, 주인공을 불 속에 던져버리고돌아오는 장의차 안에 붉은 눈들… ( 중략 )…월요일, 장의차 운전수가 죽어 주인공이 되니돌아오는 장의차 안에 이승의 엑스트라들 눈이 붉다.토요일, 새로운 장의차 운전수는 콧수염이 새파랗다, 새파랗지 않다.「장의의 일주일」부분 1신기해라 나는 멎지도 않고 숨을 쉰다내가 곤히 잠잘 때에도배를 들석이며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숨구멍이 많은 잎사귀들과 늙은 지구 덩어리와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나는 숨을 쉰다」 부분 1의 시 예문에서 지하철 정거장으로 가는 계단이 죽음의 계단으로, 정거장이 죽음의 동굴로, 정거장 속 행인들을 유령으로 보고 있다.시에서는 죽음의 문을 통하여 세계를 처음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놀라움, 그것은 생명의 문을 통하여 삶과 죽음을 바라보던 이전의 경우와 전혀 다른 상태를 체험, 시인은 무척 당황스럽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가 시와 같이 평상복처럼 되어버렸을 때 이전과는 달리 아무런 놀라움도 충격도 느끼지 않게 된다. 의 시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당혹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최승호 시인은 폐결핵을 앓았고 그로 인하여 죽음은 남의 것 이 아닌 바로 자기 몸의 것이다. 이런 개인적 체험 때문에도 그의 초기 시에서는 직접 체험한 자의 절박한 죽음의 실상과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할 것이다.)3.인간의 본질적 야만성 (獸性)으로 인한 죽음초기 시에서 “죽음”의 문제에 집착하던 최승호는 이후의 작품으로 가면서 인간이 가진 수성의 본질에 접근한다. 그는 인간의 몸 속에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들어앉은 수성의 덩어리를 절감하며 이로 인하여 세계가 왜곡되고 부패되는 것을 직시하게된다.나는 황색의 개들이 목에 털을 곤두세우고으르렁거리는 것을 보았다똥을 혼자서 다 먹으려고으르렁거리는 변기 같은 아가리들을개들의 시절의 욕심로울 수 없게 된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잠복해 있는 탐욕적인 수성의 세력이란 근대 자본주의와 야합한 “도시문명”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탐욕적인 수성이 근대 자본주의적 도시문명 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인간의 결핍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망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때의 욕망이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닌 심리적인 것이며 여기에 최종선 이란 없다.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욕망들「몸」부분 4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계산해 본다.「세속도시의 즐거움2」 부분 4의 시에서처럼 인간의 몸 전체가 로 세상은 가득 차고 의 시에서와 같이 곡하던 상주가 상복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하는 모습은 그 구체적인 풍경의 하나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도시문명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탐욕적인 수성이란 선, 후를 가릴 틈도 없이 서로 야합하여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간다 .이런 현대 사회의 속성을 최승호는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따라서 탐욕적인 수성의 끝을 < 죽음>이라 단정 짓는다.4. 문명의 세속화(世俗化)에 드러나는 인간의 죽음도시는 문명의 대표적 표상이다. 그러므로 도시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현실모순을 집어내어 현실극복을 위한 통과 제의적 공간이며 우리에게 “도시시”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도시적 삶을 떠나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문명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한다 기보다는 철저하게 세속화하고 우리의 실존적 구조를 왜곡시킨다. 따라서 80년대 한국현대시의 뚜렷한 하나의 흐름인 “도시시“ 가 두드러지게 문명 비판적 성격을 띠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최승호가 시도하는 어두운 명상, 도시의 일상적 경험도 중요한 자리 매김을 하게 된다.『세속도시의 즐거움』은 제목부터가 매우 역설적이다. 다시 말하면 세속적인 삶의 즐거움과 그에 대한 비판으로 이러한 역설과 이중성은 죽음을 테마로 한 시편들에서胎兒들이 녹슨 자전거를 타고엄마를 부르며 붉은 바다 밑을 달리는 밤에붉은 등 싱싱한 정육점에 걸려 있는애기 창녀의 고깃덩어리「赤身」4의 시에서는 붉은 불빛 아래서 짙은 화장을 하고 미소 짖는 밤의 여인을 붉은 등 안에 걸려 있는 정육점의 고깃덩이에 비유, 그것은 매우 충격적이며 우리의 공감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사실적 비유이다.죽은 짐승들을 뜯어먹습니다.반죽된 시체들이부풀어오르는 힘으로더워지는 몸의 날들과 자라는 털과너펄거리는 날개,더럽다고 날아오르는 인간의 돌맹이.쳇, 누가 더럽고 잔인한 것인지.죽은 짐승들을 뜯어먹습니다.죽음으로 나를 살리는 나의 異類衆生착한 짐승들,머지않아 그 빚을 그 밥값을나 또한 죽음으로 갚아야 합니다.털투성이 내 둥그런 배는누구의 무덤입니까.「대머리독수리2」4독수리는 다른 짐승의 시체를 먹음으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 확장한다. 역으로 독수리에게 먹히는 짐승은 스스로 죽음으로써 독수리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준다. 죽고 죽이는 삶의 연쇄사슬이다. 인간의 현실적 삶을 표상 하는 는 다른 짐승을 죽임으로 스스로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때문에, 라는 한 생명체의 상징임 는 바로 과 같은 삶이다. 이 시는 타락한 우리의 현실적 삶이란 결국의 모습임을 보여준다.최승호 시인은 우리사회의 현실적 삶의 양태를 죽음의 모습으로 인식하고 나아가 현실적 삶을 실체가 사라진 허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단지 물질 문명 속에 갇힌 우리의 현실적 삶이 모두 공허하고 허망한 허무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적 인식에는 죽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무한정하고 표피적인 탐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인식이 내재되고 있다.5. 사물화(事物化)된 인간의 죽음최승호의 시에 등장하는 생물들은 거의가 생명을 상실한 사물처럼 변모한다. 인간, 짐승, 풀잎 등 그려내는 생물들은 한결같이 살아있는 생물로 더 이상의 기능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사물과 같은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떠할까?일련의 연작들에서 이 모습은 구체화된다.「무인칭을 위한 회전문」3,「무인칭들의 대화」3,을 상실한 것, 그리하여 사물로 변해버린 것의 표상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삶이란 실은 그것이 소외된 죽음과 죽음의 만남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무력한 단절의 현실을 강화한다. 따라서 인간들은 생명이 부재한 을 닮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최승호는 자신이 직접 겪은 질병을 통하여 죽음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체험했기에 그의 작품에는 사물화된 존재의 또 다른 모양인 이 등장한다.여기서 유령이란 생명이 깃 든 인간 이상의 존재로 간주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작품이 품기는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사물화된 인간의 다른 얼굴로 해석될 것이다.)6.삶의 죽음과 죽음에로의 삶살아있는 것들이 숙명적으로 지닌 ,,,는 것의 의미를 죽음으로의 삶으로 본다면, 인간의 삶이란 너무도 허무한 것이 아닐 수 없다.허구렁 세상, 無의 틈새에 피어난 실존,이다.이게 뭐야지도없는 死海에서 기어나와苦海로 걸어나오는 저 胎兒 같은 것「?」 부분 3는 시인의 인생관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최승호식 세상보기의 방식에 매개되고 구로부터 자극된 상상력을 동원하는 순간 삶은 無의 잔등을 긁고 할퀴어 無에서 얻어낸 이 되고 무의 덤은 곧 무덤이 되는 것으로 삶과 죽음의 차이가 무의 덤에서 무덤으로 이동하며 그 이동거리는 제로가 된다.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거리를 인식못하는 세상사람들의 미망은 괴이하고 허망한 것들일 뿐이다.)자루의 밑이 터지면서 쓰레기들이 흩어진다. 시원하다.홀가분한 자루, 퀴퀴하게 쌓여서 썩던 것들이묵은 것들이 저렇게 잡다하게 많았다니 믿기 어렵다.위에도 큰 구멍, 밑에도 큰 구멍, 허공이 내 안에있었구나. 껍데기를 던지면 바로 내가 큰 구멍이지.「세번째 자루」3움푹한 자궁과 움푹한 무덤이아가리를 꽉 맞추고한 덩어리둥글네모난 감옥을 이룬뭐랄까,임신해서 매장까지의 길들이둥근 벽 안에서 미끄러지고 뒤집히는거대한 변기의 감옥 속에서 죽어가는나를 건져줄 그 어떤 손도 나는 거부했기에.「변기」부분 4허/무의 욕망 관계 탐색에 있어서의 를 나타내는 시들에서 표현하려는 것은 허/무의 구멍과 욕망의 구멍이다. 된다.)
이문재 시인론1. 이문재 시의 여정2. 과거지향적 그리움3. 현재의 위안인 자연4. 이문재 시의 지향점1. 이문재 시의 여정이문재는 대학 재학 시절 《시운동》4집(1982)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1988년 첫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를 펴내고 『산책시편』(1993), 『마음의 오지』(1999) 등 세 권의 시집을 냈다.『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에서는 이미지의 향연이 이루어진다. 그는 젊은 시절 즐겼을 법한 우울, 외로움, 슬픔 등을 현학적이고 정언적인 어투를 사용하여 낭만적 이미지들로 그려내보였다. 『산책시편』은 제목 그대로 산책-어슬렁거림이나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는-의 중요성을 노래하는데 이는 시인이 판단하기에 질주하는 도시의 일상적 삶에 대응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오지』에서 이문재는 농경공동체 문화에 대한 그리움을 짙게 풍기면서 가 닿아야 할 곳으로 ‘농업’을 제시한다. 그는 소박하게 인간과 자연이 합일하는 곳을 토지, 농업이라고 본 듯하다.시집을 펴낸 사이의 기간이 짧지 않고 다루는 소재나 주제가 바뀌어 언뜻 시인의 성향이 변한 것인가 싶지만, 첫 시집을 잘 살펴보면 시인이 나아가고 있는 바가 이미 예견되어 있으며 근저에 흐르는 의식은 거의 변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첫 작품에 작가의 기질이 잘 드러나는데 이문재도 예외는 아니다.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에 나타나는 정조나 풍경들을 잘 살펴보면 시적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맺음이 보이고 시인의 특성이 보인다.2. 과거지향적 그리움첫 시집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정조는 그리움이다. 그는 예전에 살던 집을 그리워하고 절대자인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옛 연인을 그리워한다.마지막으로 내가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 주곤 했다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이러는 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나는 빈같은 손이내려와 나를 번쩍번쩍 들어올릴는지―「우리 살던 옛집 지붕」부분(1, p.11-13))그는 집을 떠났지만 힘들 때마다 ‘옛집’을 떠올리고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그 집은 “지붕 근처까지 올라온 나무들”과 “울음 우는 별들로 가득하고 땅에 묻어주고 싶었던 하늘”과 “바다”와 “강”과 함께 있다. 시에서 묘사하는 하나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옛집은 어촌 한 귀퉁이의 작은 집을 떠올리게 한다. 도시와는 아득히 멀고 자연 속에 녹아든 옛집 속에서 그는 행복하였지만 그곳은 유년의 공간이고 떠나온,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성장하지 못하면서 행복은 유년에서 끝났고 과거 속 이외에서 그는 평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가 언젠가 죽어도 구원해줄 유일한 손길은 옛 집에서 보았던 “별”이지 현재의 그 무엇은 아니다. 그의 의식은 현재에 살면서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현재의 나는 한없이 부끄럽고 만족스럽지 못하다.오늘밤에도 나는 아버지의 묘등에 앉아서고등학교 때 국어선생의 목소리를 흉내내고어둠을 이용하여마음껏 부끄러워할 것이다―「이렇게 푸르른 그늘을」부분(1, p.36)그는 죽은 자들의 책을 읽고 지내며 “나는 무덤이라도 커야 한다/ 무덤 하나라도 검은 나를 힘껏 껴안아 주어야 한다”(「검은 돛배」, 1. p.72)고 외치며 자신의 찬란한 죽음을 꿈꾼다. 살아있는 자가 죽음을 꿈꾼다는 것은 생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것이며, 역설적으로 미래의 죽음은 과거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가 미래를 노래할 때조차 그 미래는 진정한 미래가 아니다.우리를 앞서 가 있는 시간이 우리들 가까이로오지 않기를 바랬지만 기다리지 않아도다가오고야 마는 시간과 시간을 접어 버리는 노을 아래의저녁들, 깨어진 병을 쓸어모으며 우리는 그 병 속에서새 한 마리 하늘로 다시 갇히고 있음을 보았다(…중략…)멀리 있던 날들이 너무 빨리우리들 가까이로 와서 저녁의 불을 밝히고 있음을알았다 내가 우리들을 위하여 할 수 있었던 것은손목의 시계를 멈추게 하는 일뿐 그런 하찮은 짓뿐―「세 번째 시집에 이르러서까지 본질적으로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라는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었다(…중략…)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밀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똥짐 지던 그 시절이미래가 되고 말았다우리 밀, 아 오래 된 미래―「농업박물관 소식-우리 밀 어린싹」부분(3, p.44-45)『마음의 오지』에서 그의 화두는 농업이다. 그는 세 번째 시집을 내면서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글쓰기는 진정한 글쓰기가 아닌 것처럼 되어버렸다”)고 고백한다. 미래를 얘기하는 이문재는 아이러니하다. 그가 제시하는 미래의 모습은 전혀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결국 그가 바라는 미래는 자연과 인간이 합일하는, 태초에 가까운 진부한 낙원이다. 이문재는 “농업을 통하여 인류 역사를 망쳐놓은 인간 중심주의를 향하여 돌멩이를 던지려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보듯 그가 도달한 낙원의 수준은 지극히 소박하다.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보는데실루엣을 단단하게 잠근 그대는 이 땅 끝에 와서어떤 맨 처음을 궁리하는가 보다, 참 그러고 보니그대는 아직 어려서, 마구 젊기만 해서이렇게 후욱― 비린내나는 끝의 비루를속수한 것들의 무책을 모르겠구나]모르겠는 것이겠구나―「해남길, 저녁」부분(3, p.40-41)땅 끝에 가자는 ‘그대’의 말을 듣고 그는 함께 내려가서 저녁 바다를 본다. 그는 해남에서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것이 이 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하고 끝에 대해 생각하지만 함께 간 젊은 이는 처음을 궁리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젊기 때문이고 그는 늙었기 때문일까? 그는 처음을 궁리한 적이 없었고 그의 삶은 늘 끝에 있었다. 그는 끝에 선 채 늘 삶에 떠밀려 살아왔고, 그래서 진정으로 꿈꾸는 모습이 시속에서 한번도 드러난 적 없다. 이문재가 꿈꾸는 낙원이 과거 속에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두 번째 시집 이후 이문재의 주된 관심이 생태주의로 자리잡았다는 평자들의 일반적 견해는 의문쪽으로 나아간 것이라 판단된다.3. 현재의 위안인 자연이문재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불화의 대상이었다. 그는 세계와 어울리거나 그안에 스며들지 못한다.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나의 커다란 옷은주머니가 작다(…중략…)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좋아하지 않는다―「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부분(1, p.77)이 시에서 그는 해에게 항의한다. 그는 그늘로 만든 옷을 받았다. 즉 그는 한번도 해에게서 따뜻한 햇살을 받아보지 못했다. 자신이 잘못이 아닌, ‘그’로 대변되는 세계의 냉대로 인해 그는 불길한 초록빛 옷을 입고 있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역시 주머니가 작아 자신이 가지고 있을 것도 사람들에게 나눠줄 것도 많지 않다. 시속에서 구두는 언급되지 않지만 구두가 젖어 있다는 걸로 보아 그는 지난한 여정을 밟아왔고 구두를 들어 해에게 보여주는 일은 이제는 햇살을 제대로 받아보고 싶다는 항의와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 읽을 수 있다.덧문을 닫고 우리들은 몸의 피를 바꾼다 소리 없이거대해지는 문 밖의 시간들이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아주 이사해 버리고 싶어 우리들은젖은 들에 남아 있는 사건과 적의들을 문 밖에내버려 둔다―「방랑자여, 슈파……로 가려는가」부분(1, p.54)그는 현재에 대한 적의를 간직한 채 다른 시간으로 탈출하길 원한다. 여기서 시간은 세계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재를 떠나 다른 세계, 그에게 호의적인 세계로 가고 싶어한다. 그의 시에는 길, 방랑자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벗어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잘 보여준다. 햇살을 비춰주지 않는 해처럼 세계는 그에게 자애롭지 않다.세계와 화해하지 못하고 불만족스런 현재를 견뎌나가는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자연이다. 이문재의 시에 유난히 풍경들이 어를 잡으러 강가로 달려가야 했다 아침에돌들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뜰에 남아 있었다 왜 돌은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일까―「돌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 것일까」부분(1, p.41)이문재에게는 순리를 따르는 자연의 변화도 노력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게 안정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돌은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비친다. 어둠은 해가 뜨기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 뒤에 숨으러 가고 아침 또한 힘겹게 뚝뚝 떨어져내린다. 돌은 단단할 뿐 아니라 둥글다는 속성-둥근 것은 끊임없는 갈고 닦아 이룬 완성된 형태이다. 이는 방랑자인 그에게 어떤 종착역으로 보이는 동시에 그 형태는 넉넉함, 모성적 자연으로 비치기에 이상적으로 제시된다-으로 인해 이문재 시에 여러번 등장한다.개구리 소리 자욱해지고 얕은 논물기분좋게 떨린다 저녁은 모낸 논 위로교회당 종소리들 띄엄 던지게 한다(…중략…)귀에 들어간 물을 빼려돌을 갖다댈 때의 따스함처럼불이 들어오는 風景―「유월-副詞性8」부분(2, p.49)그 무렵의 보리밭이라고, 중얼거려 보면 마음 한 켠 언뜻 환해진다여기에는 푸름 전혀 없는 탓내 속에 푸르름이 없는 까닭이다푸른 것들은 살의를 품은 듯있는 힘 다해 햇빛 빨아들인다살아서 푸르른 것이다 내 어려 살던 곳보리밭 이랑이랑 푸른 것들의무더기들 더운 흙속을 쑤셔대고 있었으니―「비닐우산」부분(2, p.80)『산책시편』에 이르면 이처럼 자연은 긍정적 의미를 한껏 드러낸다. 유월 저녁 논을 바라보면서 그는 그토록 바라던 따스함을 느낀다. 햇빛과 토양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푸른 보리에서 약동하는 생명을 느낀다. 이는 곧 보리와는 다른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고 현대의 물질만능적?인간중심적 문명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비닐우산」에서 그는 보리를 노래하는 데 이어 비닐우산을 쓴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보리와 비닐을 대비시킨다. 그는 “비닐 한 겹으로 하늘과 나는 막혀 있구나”라고 한탄하며 “썩어서 없어지지 않은 것이 가장
황순원 작품론Ⅰ. 서론1. 연구사 검토2. 연구 방법Ⅱ. 본론1. 종교와 유랑민 근성2. 지배계급와 피지배계급3. 타자와의 관계Ⅲ. 결론※ 참고 문헌Ⅰ. 서론1. 연구사 검토황순원은 현대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장편소설은 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가 매우 적다.) 그러나 황순원의 장편소설은 몇몇 유명한 단편 작품 못지 않은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특히 은 한국 민족의 종교성에 내재한 유랑민 근성과 기독교적 보편성을 논의한 중요한 작품이다.박진애는 의 인물형을 연구)하면서 준태와 민구, 창애와 지연 그리고 성호 등의 여러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정리하고 있지만 각각의 인물 행태를 설명하는 차원에 머물러 작품의 본질에는 다가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된 ≪황순원 전집 9 : 움직이는 城≫의 해설을 쓴 이상섭에 의하면 은 한민족은 근원적으로 유랑민 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나의 신을 갖지 못하고 현실 생활에 편리한대로 신을 번갈아 섬기는 모습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지적한다.장도신)은 에 나타난 인간 구원의 양상을 분석했다. 한국 기독교의 하나님은 현세와 내세에 복을 주는 편리한 존재로만 인식되어 있고, 확고한 주체성을 갖지 못하고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것만 좇아 헤매는 성향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민구와 준태, 창애의 삶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지연과 성호의 삶을 통해 극복의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김경희)는 황순원 장편 소설에 나타난 인물을 연구하면서 준태와 민구를 분석한다. 준태는 심리학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안정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언제나 뚜렷한 지향점을 갖지 못한 준태의 내적 갈등은 결과적으로 그를 비현실적 허무주의로 내몬다. 따라서 준태는 애정문제나 직장문제에서나 모두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인물이 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그 자신의 유랑민 근성을 이겨낼 수 없어 사망에 이르는 좌절에 이른다는 것이다.민구는 민속 연구자이나 주된 관심은 세속적 공리에 쏠려 있다. 그의 연구 행위는 절실한 내적 계기가 아 비용이 덜들기 때문이었어요. (150:4)이 진술의 주인은 다름아닌 목회자 성호의 상관격이자 은희의 아버지, 민구의 장인인 최장로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재미있다. 한국인에게 종교는 세계관 또는 개개인과 공동체의 선함을 유지시켜주는 기제가 아니라 물질적인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하나의 편리한 도구일 뿐이다. 영험이 있다면야, 또는 영험을 사는 데 돈이 덜 든다면야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미신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주변의 잡다한 일을 모두 샤머니즘과 의논하여 처결하지 않으면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최장로가 성호를 부른 것은 교인들을 이끌 방도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호적에 올릴 이름을 바꾸는 게 혹 성경에 어긋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성호의 말처럼 필요가 있다면 언제든지 고쳐도 무방한 것인데, 그런 것조차 성경에 묻고 목회자에게 답을 구하지 않으면 불안을 이기지 못한다.이런 모습은 기독교를 믿는 장로뿐만 아니라 기층민중들 사이에도 쉽게 볼 수 있다.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지 못했기에 끊임없이 주술적인 것에 매달리지 않으면 주변의 잡다한 일조차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다.손이 있는 쪽은 역귀가 따라다녀 불길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손을 가리는 사람들은이사는 물론 강아지나 고양이 새끼를 얻어온다든가 심지어는 방에 못 하나를 박는 데도날짜와 방향을 따지는 것이다. (104:29-105:1)성호 또한 민구와의 대화에서 기독교와 샤머니즘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국인의 신앙 형태를 진단하고 있다.“우리나라 사람은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 중에서도 기독교와 샤머니즘 - 기독교 대신불교라구 해두 마찬가지지만 - 이 두 사이를 항상 오가구 있어. 반 발짝 내디디면 기독교,반 발짝 들이디디면 샤머니즘, 이렇게 방황하구 있는 셈이지.……(중략)……내 기도나푸닥거리 중 어느쪽의 효험이건 보자는 게 그 여집사의 속셈인 거지.”“어쨌든 사람들이 샤머니즘에서 어떤 위안을 받구 있는 것만은 사실이야.”“일시적인 위안을 얻을상 생활의 성실함을 요구하며 유일절대자인 신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믿을 것을 첫째 교리로 삼는다. 그러나 한국에 정착한 기독교는 무당이 모시는 신들보다 훨씬 힘이 센 ‘예수 귀신’, 교회 잘 나가고 헌금을 바치며 통성기도를 하면 세속적 욕망을 모두 들어주는 샤머니즘에 불과한 위치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한국 기독교는 진정한 기독교라고 보기 힘들다.준태는 지연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신앙을 버린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약자의 신앙밖에 못 가진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중략)…한마디루 말해서이세상에서 잘 살지 못했으니 죽어서나 천당에 가보겠다는 신앙, 부자가 천당에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루 들어가기보다 힘들다는 비유에서 위안이나 얻으려는 신앙, 이러한 약자의 신앙밖에 못 가진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136:19-137:1)여기서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차이는 구별되지 않는다. 기독교나 샤머니즘이나 현세의 영광, 후세의 평안을 바라는(또는 사려는) 욕망으로 신앙을 담보하는 체계에 불과한 것이다. 준태는 통성기도 이야기를 하면서 위에 인용된 말을 꺼냈기 때문에 이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준태의 위 진술은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의 나약한 심성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것이다. 현세에서 좌절된 계급상승을 후세에 가서 이루려는 욕망이 신앙을 끌어낸다는 지적은 매우 날카로우며 맑스의 유명한 진술인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모토를 환기시킨다.2) 샤머니즘과 기독교민속연구자로 등장하는 민구는 연구자라기보다는 무당옷을 수집하고 무가를 배우는 등 개인적 취미로서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민구는 지식인이지만 보편 타당한 공동체 윤리를 강조하는 기독교 교리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또한 약혼자 은희와 장인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샤머니즘에 계속 빠져든다. 그는 원래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다가 굿판에서 무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이중적인 신앙 형태에도 아무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는 타산적인 인물이기도 하다.장도신은 민구를 가리켜 들게끔 해줘야만 더 배를 채워볼려구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게 필재의 설명이다.재미있는 것은 매와 꿩의 관계이다. 필재는 준태에게 한번은 꿩을 잡은 매가 죽기 전에 푸드덕거리는 꿩날개에 한번 얻어맞고는 다시는 사냥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도 해준다. 사실 지배자들은 피지배계급이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을까봐 겁에 질려있다는 말이다.준태는 죽기 직전 환상 속에서 꿩이 푸드덕거리는 것을 본다. 매에게 저항하는 꿩은 폭압적인 지배 관계 속에서 저항하는 민중을 상징한다. 준태가 환상을 본 이유는 그는 회의적인 지식인이지만 사회 변혁의 열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준태의 죽음을 통해 당장의 변화에는 일단 부정적이지만, 장기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내보이고 있다.3. 타자와의 관계에서 유랑민 근성과 함께 주안점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바로 현대 문명 속에서 어떻게 타자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이다. 성호는 순교자적 사랑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인물이고, 민구와 은희는 물질적인 가치에 삶의 기준을 놓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타자와의 진정한 합일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준태와 창애, 지연 세 사람에게 타자와의 합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어떤 형태로든 개인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들은 특정 종교에 신념을 두기 않았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 방식은 곧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타자와의 거리는 세계와의 거리이고 타자와의 합일은 곧 세계와의 합일이 된다. 이는 준태와 창애의 결혼생활과 지연의 생활방식, 그리고 준태와 지연의 연애관계에서 그 양태를 찾아볼 수 있겠다.1) 창애와 준태의 결혼생활창애는 원래 준태의 고교 교사 시절의 제자로 그녀의 프로포즈에 이끌려 준태는 결혼을 하게 된다. 준태는 창애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을 한 것에 자책을 하고는 있으나 그에 대한 책임을 느끼거나 대책을 세울 생각은 없다. 창데, 지연과 개들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암시하고 있다.지연에게 있어 햄릿만큼 길들이기 힘든 개도 없었다.(63:17)엘리자벳은 지연의 아버지가 친구한테서 얻어온 포인터 계통의 암캐였다. 이 개는좀 얌치가 없었다. 눈치를 보아가며 아양과 교태를 부리는 것이다. 지연이 웬만큼 기분나쁠 때는 전혀 가까이하지 않다가 낌새를 보아 달겨든다. 지금도 햄릿 대신 자기가귀염을 받으려는 것인데, 그러나 채 지연에게로 오기 전에 네로가 급히 달려와서는엘리자벳을 몸째 부딪쳐 밀어버리는 것이다. 엘리자벳이 나뒹군다. 네로는 시기심이 강했다.다른 개들이 지연에게 가까이하려면 가만있지를 않는 것이다.……(중략)……지연과 사람사이도 마찬가지 같았다. ……(중략)……비록 표현은 틀리지만 짐승으로서의 강한 애정의 한 표시로 볼 때 훈련을 받은 무슨 종의 명견보다 부족한 데가 있는 채 이 잡견에게애착이 가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63:29-64:18)어느 새 왔는지 햄릿이 벤치등받이에 앞발을 걸치고 있다. 지연이 반가워 엉겁결에 손을내밀자 햄릿은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지연이 일부러 몸을 굳혀 앞만 보고 가만히 있어본다. 좀만에 다시 벤치등받이를 건드리는 소리가 난다. 지연은 미동도 않고 있었다. 무엇이 지연의 등에 와닿는다. 햄릿의 코라는 걸 안다. 지연은 그냥 가만있는다. 그러나 다시 햄릿의 코는 와닿지 않는다. 햄릿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경계하는 눈친가보았다. 그나마도 지연은 기뻤다. 햄릿이 그만큼이라도 가까이 다가와준 것이 어디냐.(130:13)지연은 세 마리의 개를 키우는데 햄릿(이름의 상징성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없을 것이다)은 한사코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까다로운 성격의 개다. 엘리자벳은 항상 사랑을 쏟아주어야 하는 어린아이같은 성격이고, 네로는 질투가 강해 다른 개나 사람이 지연과 가까운 것을 견딜 수 없어한다. 지연은 시기심이 강한 나머지 옆집 어린애를 물기까지 한 네로를 내치지도 못하고 오히려 애정을 쏟는다. 왜냐하면 가장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은 네로이기문이다.
최승자론1. 들어가는 말2. 존재의 부정 - 근원의 상실3. 어머니에로의 회귀4. 나오는 말1. 들어가는 말시인 최승자는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이 시대의 사랑」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등장했다. 최승자, 김혜순, 그때부터 한국에 여자시인이 있었다)고 인식된 것은 수동적으로 감수하던 기존의 여성시인들과 달리 여성에 대한 억압을 스스로 들춰내고 비로소 리얼리티를 갖고 말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일 것이다.최승자 시인의 언어는 풍자하는 말이 아니라 항상 직관에 의지하는 그 지성에 피섞인 가래침이고, 육체의 파편들인 난폭한 언어들은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조직하고 검열하기는커녕 서로가 서로를 쏘아붙이는 활과 화살이었다. 폭력이자 지성인 이 시어들은 해석하고 비평할 틈도 없이 누구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으며......언어는 무엇을 지시하기 전에 사나운 물질)인 것이다.최승자의 시에는 몸이 자주 등장한다. 그 몸은 당연히 여성의 몸이다. 여성의 몸은 전통적으로 재수없고 불결했다. 하지만 시인은 꺾이고, 부숴지고, 암세포가 그득한 검붉은 피를 흘리면서,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 결국에는 그 전통적 인식을 뛰어넘어 재생되고, 재생산 하고자 욕망한다. 그 욕망은 어머니로서의 욕망이고 가해자이며 동시에 대립관계일 수 있는 남편, 아버지조차 끌어안고자 한다.시인은 지금까지 선집을 제외하고 총 다섯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본 연구에서는『이 시대의 사랑』으로부터 『연인들』까지의 시집 중 초기시를 중심으로 최승자 시에 등장하는 이러한 특징들을 통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떻게 표현되며, 그 의미의 변화를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 시인의 세계관에 접근하고자 한다.2. 존재의 부정 - 근원의 상실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마른 빵에 핀 곰팡이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일찌기 나는」(1))고, 태어나지 못한 이며 으므로 더라도 눈하나 깜짝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 나는 누구에게도 소중하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애비는 역시 전화도 주지 않았다.그는 내게 뒤통수만 보인 채하늘 목장 한가운데서 양귀비 꽃에 물만 주고 있었다. - 「슬픈 기쁜 생일」(1)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빈 방을 걸어다니죠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외롭지 않기 위하여」(1)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너당신그대, 행복너, 당신, 그대, 사랑내가 살아 있다는 것,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일찌기 나는」(1)고 다만 내 우는 것은 뿐이다. 은 이다. 그러므로 고 반복하는 것이다. 근원을 상실한 시인은 존재의 부정을 통해 내가 무언가,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와 부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는 곧 절대 권력자로서, 폭력을 일삼는다.그러나 짓밟기 잘 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잠의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손이 호미가 되고 팔뚝이 낫이 되었다(중략)인생이 똥이냐 말뚝 뿌리 아버지 인생이 똥이냐 네가 그렇게 가르쳐 줬느냐 낯도 모르는 낯도 모르고 싶은 어느 개뼉다귀가 내 아버지인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아느냐 -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1)의 에 짓밟히지 않기 위하여 나는 손을 로 팔뚝을 으로 들고 싸운다. 1970년대를 겪었던 그의 세대에게 1980년대 군사 독재는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공포와 치욕의 이중적 절망이었다. 그런데 이 70년대와 80년대는 아버지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씌어진 시 「고백」과 「Y를 위하여」에서 시인의 세계에 대한 입장, 즉 적의는 최고조에 달한다.토해놓은 내장을 이젠 도로 삼키겠어요.제자리에 다 삼키고서이쁜 플라스틱 살로 가리겠어요.(중략)죽을 때까지 당신들을 교묘히 속이겠어요.당신들이 안녕히 속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예요. -「告白」(2)나쁜 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중략)오 개새끼못 잊어! -「Y를 위하여」(2)로 명명되는 타자 혹은 자아에 대한 증오와 저주는 뒤집으면 곧 아버지/남성이라는 대명사에 대한 끌어 안음이었다. 거칠게 말해서, 박정희와 전두환에 의해 더욱 공고해진 남성 중심 사회를 겨눈 시인의 무기(낫, 호미)는 돌아와 자신을 향하면서 얼핏 자기 부정 또는 자기 모멸의 몸짓을 보이지만, 이와 같이 철저한 부정은 사실 철저한 긍정의 바람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고 하는 끝없는 부정이 행해진 부정이라는 데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내 그리움의 그림자들이짓밟히며 짓밟히며다시 일어서는 것을.집과 거리와 나무들이소리없이 흔들리며세상을 향한내 울음의 통로를 만드는 것을.꿈에도 그리운 아버지 태양이여,어머니이신 세상이여,어째서 내 존재를 알리는 데에는이 울음의 기호밖에 없을까요? -「부질없는 물음」(1)이렇게 외롭게 흔들리던 시인은 비로소 함께 상처받은 존재인 과 를 만들고자 한다. 그 길은 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얼마나 울음을 울어야 통로가 만들어 질 것인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절대 권력자에게 방법이 한 방울 눈물밖에 없다는 것에 상심한 시인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3. 어머니에로의 회귀그렇다면 울음, 눈물은 무엇인가? 그것의 물질 구성은 ‘물’이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으로 울음의 기호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인가?물은 이미지 자체가 유동적이어서 물의 속성으로 이미지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모든 생명이 물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물은 원초적 이미지에 근원하고 있으며, 물이라는 질료가 지니는 이미지는 현상적이어서 쉽게 다른 이미지로 바뀔 수도 있다. 물을 기능적으로 정의해 보자. 이는 기상학적 측면과 관계가 있는데 물은 증발과 강우의 과정을 거쳐 자연계의 순환적 구조를 드러낸다. 이를 신화문학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화와 재생의 순환적 구조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은 홍수와 범람을 통해 파멸을 불러오지만, 새로운 창조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영원히 눈먼 항구.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새들의 고향은 거기.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 「여성에 관하여」(2)여성 자신인 시인은 고 선언하듯 말한다. 는 지고 망가지고 훼손된 (「197×년의 우리들의 사랑」) 이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마른 강줄기, 죽은 바다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도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흘러가서 시에서 여성적인 ‘나’는 자주 비와 물과 동반한다.흐르는 물처럼네게로 가리. -「네게로」(1)아가야 뭘 먹고 싶으냐 술이요 알콜이요 술 빚을 누룩이없으니 그건 안 되겠구나 그런데 얘야 네 머릿속이 왜 이렇게질척질척하느냐 예 노상 비가 오니까 습기가 차서요 -「슬픈 기쁜 생일」(1)빗소리의 강물내 늑골까지 죽음의 문턱까지비가 내린다물의 房에 누워나의 꿈도 떠내려간다 -「장마」(1)요즘의 꿈은 예감으로 젖어 있다.무서운 원색의 화면,그 배경에 내리는 비그 배후에 내리는 피. -「외로움의 폭력」(1)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평화 -「사랑하는 손」(1)잠들기 전에 하늘님내 몸의 먼지를淸天의 눈물로 씻어 주세요오래된 어둠의 정액도 씻어 주시고한밤내 그냥 처녀로 두어 주세요아침이 되기 전에 하늘님내 어둠의 목숨에도한차례 폭풍우를 주시어돌아오는 아침 최초의 햇빛 속에깨끗한 새순을 내밀었으면요넝쿨넝쿨 이쁘게 뻗었으면요 -「잠들기 전에」(1)꽃잎에서 슬픔의 수액이 돋는다.(중략)허리에 감기는 비의 푸른 채찍 -「비?꽃?상처」(1)재생의 의미로서의 물의 이미지는 내고 새로운 창조의 모태로 거듭나는 것이다.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어둠 속에서 재생하는 생명을 상징한다. 은 홍수와 범람을 통해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속성이 있다. 물은 현재적 고통과 갈등의 시련기를 벗어나 비로소 새로운 자기를 만나는 죽음의 의식을 치룸으로써 다시 새 삶을 영위한다. 에게 받는 세례는 우주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소멸을, 다른 한편으로는 재생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획득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물의 속성에서 죽음과 파멸은 재생으로 연결된다.
장석남 시인론 작품론Ⅰ들어가며Ⅱ장석남의 시 창작 방법론에 대한 고찰Ⅲ나가며Ⅰ들어가며장석남의 시들은 끝나지 않은 사랑처럼 종결어미로 마감하지 않는다. 하여 그의 언어들은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언어들이며 우리들의 고향으로 가는 언어들이다. 그 언어들은 한없이 가벼워서, 그 가벼움의 힘으로 가슴속으로 나비처럼 날아 들어온다. 그의 시들은 참으로 슬프다. 슬픔의 이유는 추억과 고향 속에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의지 때문이다. 그는 세계에서 손을 떼버리고 걸어나와 버렸다. 슬픔의 힘은 과거를 부정하는 데서 나온다. 환멸의 시대에 존재의 한 쪽 끝을 담그고 있으면서 그는 현실의 꿈을 꾸지 않는다.Ⅱ장석남의 시 창작 방법론에 대한 고찰-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 뿐인데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잘못 꾼 꿈이 있었나?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들지나가는 바람이 잠시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그런 길이었긴 하여도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즐거운 상처? 그런 상처도 있는가? 쓰리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달콤하고 즐거운 상처가 과연 있는가? 그러나 장석남의 시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읽으면 아프지 않고 쓰리지 않은, 즐거운 상처가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가 없는, 느낌 만으로의 세계이지만 느낌 만으로의 세계와도 통화가 가능하고 감각의 교감이 가능한 세계가 시의 세계임을 이 반어적 진실은 은연중 보여준다. 한 번 더 느낌을 강조해도 된다면, 장석남의 시는 어떤 신선한 감각으로 혹은 속삭이는 언어로 다가온다. 상처를 말하면서도 그는 신음을 내지 않는다. 제시보다는 상호교감, 교감의 세계에의 함이다. 아파야 할 상처가 그러기에 오히려 즐겁고 감미로운 것이다. 시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에서는,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 뿐인데/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 뿐인데/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 뿐인데/잘못 꾼 꿈이 있었나?'와 같은 자문으로 스스로를 성찰하기도 하고, 그것을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그런 길이었긴 하여도/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라는 자탄을 보이기도 한다. 그가 말하는 '다시 안 올 길'이 구체적으로 어떤 길이며 무슨 길인지는 이 시에서 분명히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그것이 환희가 아니라 비애, 기쁨이 아니라 상처에 가까우리라는 것은 시의 의표에서 짐작할 수 있다.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신 일 뿐인데'가 보여주는 새로움의 환기는 무기력하게 보이기 쉬운 이 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는 행이지만, 마지막 구절,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와 같은 행은 이 시를 오랜 여운으로 남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 그것은 주체가 부재, 혹은 무한정 존재하면서 그것에 뒤따르는 파편적인 또 하나의 방법론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이 공존하는 표현법이다. 주체들이 뒤섞인 상태의 우주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과 극이 연결되는 세상의 이치를 적어놓게 만듦과 동시에 그만의 독특한 묘사 방법으로 이어진다.-배를 밀며-배를 민다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휘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배를 밀어넣고는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허공으로부터 거둔다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뵈지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잠시 머물다 가라앉고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위 시「배를 밀며」에서 시인은 바다로 배를 미는 일이 아주 드문 경험이라고 말한다. 왜야하면 그가 배를 민다고 하는 것은 예사 출항이 아니다. 백척간두와 같은 순간의 허공 속으로 힘껏, 그러나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정도로 배를 밀어냄과 동시에 그 배로부터 손을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몸으로의 시론’을 연상시키는 이 시는, 그러니까 ‘온몸으로 배를 밀기’와, 배에서 ‘손을 거두기’라는 두 면을 갖는데, 그 두 면은 시에서 사랑의 의미를 갖는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나’로부터 ‘그’를 밀어내는 것이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를 제외한 모든 만물들이 시에서 주체를 이루며 그것들은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판단 능력은 대부분이 옳은 이치에 해당하며 시적 자아는 그에 뒤쳐지게 된다. 그러므로 시인 자신이 목소리를 가장 작게 낮춘다. 그러면서 시적 자아를 제외한 대상들과 합쳐진다. 이 과정에서 시인의 내면과 행동은 자연물들에 의해 형상화되고, 그것을 통했을 때 비로소 잘 짜여진 모습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론에 있어서 주체의 부재가 필요했다.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합일이 가능하고, 합일을 통해서만 시적 자아가 표현될 수 있기에, 결국 시인은 자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배를 매며-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등뒤로 털썩밧줄이 날아와 나는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사랑은,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배가 들어와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배를 매게 되는 것잔잔한 바닷물 위에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떠 있는 배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온종일을 떠 있다위 시「배를 매며」는 멀고 먼 허공인 무(無)속으로 떠나갔다가 소리 없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돌아오는 배는 밧줄을 시인은 부두에 맨다. 시인이 떠나가는 것, 그리고 돌아오는 것, 돌아오는 배의 밧줄을 부두에 매는 것을 사랑의 행위라고 하며,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때의 구름과 빛과 시간은 고향=추억과 관계를 갖는 친족어에 속한다. 그러니까 배를 밀고, 배가 돌아오고, 돌아온 배를 매는 행위는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고향으로의 나들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런 날 시인의 머리 위에는 연필 깍는 소리를 내는 저녁별이 떠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별이 연필 깍은 소리와 연관을 갖는 것은, 배를 밀고 매는 행위가 사랑의 행위이자 시작행위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일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 시인에게 있어서 모든 언어와 사물과 동작들은 시작행위를 뜻한 것이거나 그와 근거리 관계를 갖는 것들이다. 그곳의 시간과 공기와 바람들이 모두 연장 만들기와 관계되는 것과도 같다. 자연물, 그 중에서고 가장 광활한 공간으로 시인은 향하고 있다. 과거로, 현재 진행으로 때로는 미래로 대책 없이 끊임없는 발걸음을 한다. 이 행위는 바다와 배에 대해 자기 자신을 상대적으로 작게 보는데서 기인한다. 장석남에게 세계는 큰 인식의 기준이며 그 안을 조금씩 파고드는 스스로는 작게 존재한다. 그리고 장석남의 시는 타자에게 기호와 담론으로써 거리를 유지했으며 그에 대한 해석의 몫은 독자의 것이다. 거리가 유지될수록 그 해석의 폭은 넓어지기 때문이다.-마당에 배를 매다 -마당에녹음 가득한배를 매다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끝에몇 포기 저녁 별연필 깎는 소리처럼떠서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가슴속에 쌓고 있는가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영혼혹은, 갈증배를 풀어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곧 오리라오, 사랑해야 하리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뒷모습들제 44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장석남의 는 작가 특유의 '낯설게 하기'와 '딴전 부리기'가 녹녹히 스며들어 있는 작품으로 읽는 독자에게 신선하고 감칠맛 나는 산뜻함을 선사해 준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구절이 「마당에 배를 매다」에 나오는 부분을 살펴보자.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끝에몇 포기 저녁 별연필 깎는 소리처럼떠서(...)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영혼혹은, 갈증장석남의 시가 만들어내는 공기는 아주 조용하다. 이 조용함은 그러나 우리가 정적이라고 말할 때의 공기와는 좀 다른. 잔잔한 정서적 파동으로 움직이고 있는 조용함이다. 이 조용함은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이기 때문에 피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어법이나 말투가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떠 있는 저녁 별은 우리가 처음보는 별이니 새로 생긴 별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3연의 끝 두 줄을 가령 라고 하지 않고 이라고 한 점. 그의 시인으로서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대목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