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는 어떤 나라인가?러시아 연방국이 사용하는 국기의 3색은 깨끗하고, 정결함, 하늘과 같이 푸른 광할한 평원,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흰색, 파란색, 붉은색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유라시아 횡단철도 가동의 측면에서 러시아는 향후 우리의 미래건설에 활력소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러시아의 위치는?북쪽은 북극해, 동쪽은 태평양에 접해 있으며, 서쪽은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벨로루시 등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은 중국, 몽골, 북한을 비롯해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등과 경계를 이룬다.1. 러시아는 어떤 나라인가?'러시아'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무엇인가요?무섭다.어둡다.못 산다.정치 및 경제적으로 혼란스럽다.마피아가 활개치는 치안부재의 나라이다.인권의 사각지대로서 독재 및 공산주의를 연상된다.모두 맞습니다.실재로 모두 존재했으니까요.그렇지만… 공산당 붕괴이후 태동한 민주러시아의 면모는 새롭습니다.2. 러시아는?러시아는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연방'이 되었습니다.1.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2.영토상으로 서양과 동양에 걸쳐있으며, 생김새는 서양인이나 의식구조는 동양인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나라이다.3.다양한 종류의 풍부한 자원 보유국이란 점입니다. 철, 석유, 천연가스, 석탄, 목재, 금, 아연, 한약재 등의자원이 가까운 대륙에 널려 있다.4.정신문명이 발달한 나라라는 점입니다. 세계 최대 독서인구를 보유한 나라로써 서구와는 대조적 교양과인격을 갖춘 나라이다.5.첨단 과학문명보유국이다.6.시장경제도입에 따른 혼란과 국가역량의 한계상황 속에서 국제적 자본 및 투자협력을 필요로 하는 나라이다.3. 국기를 통해 본 러시아의 상징성깨끗하고 청결함- 정신문명의 순수함과 청초함을 상징한다.- 러시아는 정교 국으로서 서구의 물질문명과는 대조적인 정신적 가치가 강조되어 내면화된 나라이다.- 세계최고의 성화가 이루어진 국가로서 국민 대다수가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하늘과 같이 푸른 광활한 평원- 하늘과 같이 푸른 광활한 평원을 상징한다.- 유라시아는 인구 밀집지역으로서 대평원으로 형성되어 있다.- 자작나무, 보리수, 단풍 및 전나무들로 푸른 자연적 경관이 조성되어 있다.아름다움- 러시아인들은 겨울철이 길고 일조량이 적은 환경으로 인한 피부색이 희고, 타고난 아름다운 미모와후천적으로 습득된 문화적 영향으로 마음씨가 곱다.4. 러시아의 민족적 특성1.동양적 오리엔탈리즘이 숨쉬는 나라라는 인상입니다. 수줍고, 겸손하며 커피가 아닌 홍차문화가 이의증거입니다.2.기독교적 신비주의가 배어 있는 나라라는 인상입니다. 서구의 실용주의에 입각한 사무적이고,이성적 풍토와는 너무도 대조적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3.전제와 권위적 정치문화를 지닌 나라라는 인상입니다. 이로 인해 다수 농민이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는뼈아픈 역사성 속에서 혁명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러시아 민족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요?1. 비잔틴제국의 문화적 영향러시아인들은 9세기 중반까지 민족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이민족의 연속적 지배를 받아 온 민족입니다. 유럽 국가들 중 후발 주자인 러시아가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바란진족의 도움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흑해를 거쳐 비잔틴제국과 교역을 하면서 비잔틴제국의 문화 전반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종교, 통치형태 및 방법, 문자에 이르기까지 실로 지대한 것이 였습니다. 더욱이 비잔틴 제국이 동양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도 피 할 수 없었습니다.2. 따따르족의 문화적 영향러시아가 건국이후 몽고의 일개 부족인 따따르족의 지배를 약 250년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몽고문화의 침투가 불가피했던 상황에서 아직도 러시아인들의 의식구조와 관습에 동양적 요소가 많다는 점을 지적합니다.3. 팽창주의 정책에 따른 개척정신18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시베리아정복 및 18세기 이후의 발틱해, 크리미아 반도, 카스피해로의 진출로 대변되는 팽창주의로 개척정신이 왕성한 나라이다4. 농업중심사회에서의 동양적 전제주의체제농업중심사회에서의 동양적 전제주의체제로 인한 사회적 모순이 수동적인 국민성과 비 민주성으로 인한 일원주의(monism)적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5. 서구모델에 의한 인위적 근대화 추진세계최초로 서구모델에 의한 인위적 근대화를 추진함에 따라 과학적 사고와 능력을 갖춘 민족이란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보다 약 200년 앞서 근대화를 추진한 경험과 성과가 우리의 젊은 학도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러시아인의 집착 ? 러시아인은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말, 술, 비밀입니다.러시아 사람들은 쉬지 않고 떠든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걸으면서 말하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하기 때문에 러시아인과 함께 거닐면서 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술은 러시아인의 즐거움이다. 술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랴."- 키예프의 블라지미르 대공 - 988년러시아인은 조석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신다. 러시아에서는 떠들썩한 술판에서 거래와 계약이 이루어지며, 꼭지가 돌도록 마시면 여자보다도 남자끼리 어울리는 걸 더 편하게 여긴다.비밀은 노골적으로 말하면 '염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러시아의 역사를 대충만 훑어 보면 외국인과 외국 기술을 체계적으로 감시하고 염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5. 한국인에게 심어 준 러시아의 인상우리민족과의 접촉은 제정러시아가 1860년대 이래 만주로 진출한 후 연해주 일대를 점령하고 군사적 항구로써의 블라디보스톡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였습니다.구 한말기의 아관파천 사건:구 한말기에 서양 세력들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발생한 '아관파천'사건은 러시아에 대한 상대적 의사소통과 신뢰의 결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러시아인들이 소유한 기독교 정신과 동양적 사고의 결과라고 본다. 당시 고종황제는 분명히 러시아인들에게 상대적 호감을 나타낸 것이다.민족분단의 후원 및 당사국:일본제국주의의 패전과 일본군에 대한 한반도에서의 무장해제 명분으로 미ㆍ쏘간의 합의에 따라 미국보다 약 한달 앞서 청진 항에 입국함에 따라 러시아인들을 대할 수 있었다.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베리아에서 유형중인 죄수들을 무장시켜 한반도에 투입 시킨 군인들이 우리에게 러시아의 인상을 각인 시켜 주었다. 당시 그들이 보여 준 행태는 기인에 가까운 것이었다냉전 기의 세계 최강국:비극적이며 묵과할 수 없는 민족상쟁의 후원자가 되어 상호 적대적 관계 속에 빠져든 시기가 50여년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가세된 동서간의 냉전상황과 쏘비에뜨체제 내에서 자행된 공포정치와 인권탄압 및 군사대국으로의 발전 면모들이 우리를 두렵게 했다.국교수립 이후의 러시아:스딸린 통치기에 고조된 전체주의도 시대정신과 상황에 따라 변화를 겪게 되었고, 급기야 발전의 한계상황 속에서 맺게 된 양국정부간의 수교와 쏘비예뜨체제 붕괴가 새로운 차원의 관계로 향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관계증진의 필요성에서 심도 깊은 연구가 요구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6. 유용성으로 본 러시아 학습의 필연성러시아 문화에 관한 학습이 필요한 이유?1. 한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측면러시아는 한반도분단의 당사자이며, 북한과는 전통적으로 군사 및 경제부문의 동맹 국가였다. 그러나 우리의 미온적 태도에 대한 반발로써 러시아는 2000년 이후 등거리외교를 가시화하고 있다. 2000년을 기점으로 러시아는 외무장관을 비롯하여, 뿌찐대통령의 북한방문이 말해 주듯이 한반도문제의 이해당사자임을 실증하고 있다.
한국한문학론(REPORT)학과:한문학과학번:이름:허난 설헌- 봄비春雨暗西池 (춘우암서지)輕寒襲羅幕 (경한습라막)?愁依小屛風 (수의소병풍)薔頭杏花落 (장두행화락)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찬바람이 장막 속에 스며들 제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요점정리)지은이: 허난 설현갈래: 한시, 오언절구연대: 조선 명종 때성격: 독백적, 서정적 ,애상적압운:幕, 落 구성: 선경(기승) 후정(전결)의 시상기: 못에 내리는 봄비 - 쓸쓸한 정경승: 장막 속에 숨어드는 찬 바람 - 이른 봄의 추위가 외로움을 더함전: 시름을 못 이기는 화자 - 시름에 잠긴 화자의 모습결: 담 위에 지는 살구꽃 - 허망하게 지나가는 젊은 날어조: 애상적인 목소리제재 :못에 내리는 봄비, 담 위에 지는 살구꽃주제: 젊은 여인의 고독과 우수, 규중 여인의 고독한 심사, 젊은 날을 보내는 여인의 고독과 우수표현: 객관적 상관물(시작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것을 나타내 주는 어떤 사물, 정황, 혹은 일련의 사건을 빌려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사물, 정황, 사건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봄비, 찬 바람, 살구꽃을 객관적 상관물로 볼 수 있다.)을 사용하여 화자의 감정을 사물에 의탁하여 표현함.특징: 效崔國輔體 (최국보의 체를 본받아) 3首 중 세 번째 작품이해와 감상왜 조선 땅에서 태어나고, 현재의 남편과 인연이 된 것을 후회하고, 남자로 태어나지 못함을 한탄했던 허난설헌의 서러움과 시적 화자의 고독한 정서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비내리는 봄날의 나른함이 홀로 지내는 규방의 적막함에 더해져 서정적 화자의 고독한 정서를 극대화시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앞 부분에서 공간적,시간적 배경을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정적 화자의 정서를 부각시키는 한시의 일반적인 시상전개 방식을 보이고 있다. 시름에 겨워 병풍에 기대어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살구꽃을 바라보는 서정적 자아의 정서가 고독함과 함께 젊은 날의 세월을 보내는 아쉬움으로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서 규중 여인의 외로운 심정을 표현한 오언 절구 한시로, 연못에 내리는 봄비와 살구꽃의 떨어짐을 배경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의 외로움을 쓸쓸하게 표현하고 있다.호민론(豪民論) - 허균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이루어진 것을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 때에 어떤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豪民)이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을 이용할 만한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고, 항민도 또한 제 살 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레,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과 오광 때문이었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 때문이었다. 당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났는데, 마침내 백성과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그쳤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저만 잘 살려고 한 죄의 대가이며,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잘 이용한 것이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계곡같이 커다란 욕심을 부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였지,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은 중국과는 다르다. 땅이 비좁고 험하여 사람도 적고, 백성 또한 나약하고 게으르며 잘아서,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 위대한 인물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또한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적도 없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때에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함에 한계가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장사할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 주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잘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여분의 저축이 있어 갑작스럽게 커다란 병화나 상사(喪事)가 있어도 조세를 추가로 징수하지는 않았다. 그러고도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삼공할 정도였다. ??우리 조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구구한 백성이면서도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을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내는 조세가 다섯 푼이라면 조정에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몇 푼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또 관청에서는 여분의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한 해에도 두 번씩이나 조세를 부과하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칼질하듯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 또한 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보다 더 심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이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 모르고, 우리 나라에는 호민이 없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근심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증하겠는가? 기주·양주에서와 같은 천지를 뒤엎는 변란은 발을 구부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만한 형세를 명확하게 알아서 시위와 바퀴를 고친다면, 오히려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요점 정리)갈래 : 논, 현대의 논설문과 같음성격 : 비판적, 교훈적제재 : 호민주제 :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각성을 촉구하고 바른 정치를 할 것을 주장표현 : 고사의 활용, 역사적 사실에서 교훈을 얻자는 타산지석의 수용 자세, 현실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구성 : 현실 대응에 따른 백성들의 3가지 유형, 호민의 위험성, 고려 시대 위정자들의 통치 방식, 위정자들의 잘못된 인식과 태도 변화 촉구(호민론의 이해)?이 글은 백성을 세 가지로 구분한 후, 그 중 호민이 가장 위험한 존재임을 역사적인 사례와 함께 경고한 정치적 논설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마음대로 부리거나 그 재물을 빼앗기만 한다면 백성들은 불만을 품거나 원망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을 이끄는 호민을 만나게 되면 행동으로 지배층에 항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백성을 오직 교화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할 때 그의 진보적인 백성관, 정치관을 잘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작품인 '홍길동전'에 잘 드러나 있으며, 작자는 지배층이 아닌 백성의 관점에서 정치를 하라고 촉구하고 있다.?그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에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작자는 백성을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항민은 일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백성들로 자기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이 그냥 따라서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면서 얽매인 채 사는 사람들이다. 원민은 수탈당하는 계급이라는 점에서 항민과 마찬가지이나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겨 윗사람을 탓하고 원망한다. 그러나 이들은 원망하는데 그칠 뿐이다. 그러므로 항민과 원민은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못 된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호민이다. 호민은 남모르게 딴마음을 품고 틈만 엿보다가 시기가 오면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호민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항민들도 또한 살기를 구해서 따라 일어서게 된다. 진(秦)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오광 때문이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황건적이 원인이었으며, 당나라도 왕선지와 황소가 틈을 타서 난을 꾸몄는데 끝내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이들은 모두 호민들로서 학정의 틈을 노린 것이다.
- 컨트리 음악 -컨트리 음악은 미국의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컨트리 음악의 탄생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한다.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 합중국이 탄생되었을 당시 그곳에는 청교도 영국인들을 비롯하여 유럽 사람들과 흑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국에서 배웠던 음악들을 각기 발전시켜 나갔으며 일정한 형식의 음악이라기보다는 전래 민요를 노래하였다. 신대륙에 도착한 그들은 서부로 이주하면서 황량한 대지를 개간하고 가꾸어 가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컨트리라는 장르로 정착되었다. 자료상으로는 미국에서 최초의 파퓰러 히트송은 이며, 1782년경에 히트하였다. 그때부터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된 미국인들은 19세기에 미국 민요의 아버지로 일컫는 스티븐 콜린스 포스터(Stephen Collins Foster 1826~1864)를 주축으로 대중음악을 발전시켰다. 한편 컨트리 음악은 민요를 기반으로 서부 개척사와 함께 노래되기 시작한 형태를 취하면서 흑인 노예들의 영향을 받은 블루스와 달리 백인 위주의 음악으로 벤조나 만돌린 같은 악기를 사용하여 불러졌다.??농장과 목장을 경영하면서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표현한 노래들이 주류를 이루던 1900년대를 지나 컨트리 음악이 정착하게 된 것은 내쉬빌에 위치한 WSM 라디오 방송국 정규 음악 프로그램인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 : 매주 토요일마다 방송되었으며, 지방 사람들의 연주 솜씨와 노래 자랑을 들려 주었던 프로그램)의 탄생과 함께 비롯되었다.??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컨트리 음악은 젊은 음악가들의 진취적인 행동으로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록 음악을 접목한 컨트리 록으로 발전되었다. 대표적인 그룹들은 마샬 터커 밴드, 오크릿 라이스 보이스, 찰리 다니얼스 밴드, 플라잉 베리토 밴드 등이었다.??그밖에도 버팔로 스프링필드,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쉬 등도 컨트리와 포크를 겸비한 사운드를 초기에 전개하다가 컨트리 록과 포크 록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70년대 컨트리 록은 포코 같은 인기 그룹을 탄생시키기도 했으나 록의 강세에 밀려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당시에 워낙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의 하드 록 그룹들이 강력한 파워를 표출하였기 때문에 컨트리 록 음악을 선호하던 팬들조차도 대세에 밀려 하드 록 음악을 듣게 되었다.??이렇듯 고충을 겪으면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 온 컨트리 음악은 인기 차트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계속 미국인들의 음악으로 유지되어 갔다.??80년대로 접어들면서 컨트리 음악은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변모하였다. 그 주역은 케니 로저스 에밀루 해리스, 달리 파튼 등이었고 그들은 이른바 컨트리 음악에 팝적인 요소를 가미한 스타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항상 변하는 것이 음악이지만 10년을 주기로 윤회하듯 인기 흐름이 반복되는 음악 특성상 컨트리 음악도 80년대 중반부터 인기가 주춤하더니 90년대 초반으로 들어와서 다시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팝 컨트리가 아닌 정통성에 입각한 작품들을 노래한 갈스 브룩스, 빌리 레이 사이러스, 팀 맥그로우 등이 인기를 얻었다.??이와 같은 변화를 겪으면서 컨트리 음악은 미국의 음악이라는 자존심을 꾸준하게 지켜 나갔으며, 현재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 많은 가수들이 활동하고 있다.1.컨트리음악이란컨트리 음악은 촌사람들의 음악, 시골음악이란 뜻이지만 대중음악분야에서는 구체적으로 미국 백인들의 전통음악을 말한다. 즉 미국 남동부에서 형성된 대중음악의 한 장르이다.컨트리는 처음에는 애팔레이션 포크로 불러져 왔으며, 유럽에서 그들이 불렀던 것과 유사하다고 해서 `친숙한 노래`(familiar tunes) 또는 산(山)지역사람들의 노래라고 해서 `마운틴 뮤직`(mountain music)으로 통했다. 이 용어는 19세기 말에 와서 힐빌리(hill-billy)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1940~1950년대에는 컨트리 웨스턴(country western)으로 불리다가 1960년대 말에 와서 western이라는 단어는 빠지고 컨트리로 불리게 되었다.2.컨트리음악의 기원신대륙이었던 지금의 미국땅은 과거에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영국 및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의 앵글로셀틱계의 많은 이주민들이 미국에 건너오게 되었는데, 그들이 소지품에는 악기뿐만 아니라 그들 몸에 베어있던 고유의 전통음악과 곡조도 자연히 들어오게 되었다. 남동부에 걸쳐 있는 애팔레이시아 산맥 지역에 정착한 초기 이주민들의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주민들의 전통음악과 곡조들은 새로운 땅에서의 고된 생활과 멀리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미래에 대한 불안, 그에 따른 신에의 귀의와 잔연에 대한 동경 등의 정서가 그 지역 및 그 시대 사건들에 대한 노래 속에 자연 흡수 되면서 당연히 새로운 독특한 사운드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를 애팔레이션 포크 또는 힐빌리라고하며 오늘날 컨트리음악의 기원으로 여겨지고 있다.컨트리 음악이 형설 될 초기의 무렵에는 직업적 뮤지션은 없었으며, 자신이나 가족들 또는 이웃사람들의 행사에서 즐기기 위하여 불리어졌고, 음악을 보존하겠다는 의식이나 노력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좋아했던 노래들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또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세대를 넘어서 전래되었을 뿐 이었다.구전 되었던 그 당시의 컨트리 음악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 기원을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가사가 변하기도 하였으며, 한 음악에 대한 제목도 옛날음악이라든지 산의 음악 등으로 다양 할 수밖에 없었다.3.컨트리음악의 전개20세기 초, 즉 1900년대 초 기타와 마돌린 같은 악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음악의 저변이 확대되었고, 1920년대 녹음기술의 개발, 발전으로 인한 음반의 출시 및 라디오방송 프로그램의 출현은 컨트리음악 상업화로 인한 발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컨트리음악의 기원은 새로운 땅 미국에 유럽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던 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1920년대 컨트리음악의 어머니와 아버지로 불리는 The carter Family와 Jimmie Rogers가 테네시주 브리스톨에 있던 Victor레코드사와 녹음계약을 하고 서면한 그 즈음에, 진정한 의미의 컨트리음악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4.그랜드 올 오프리그당시 탄생했던 방송프로는 1924년 WLS라디오방송국의 'Barn Dnace show ", 1925년 NBC의 자회사인 WSM라디오 방송국의 'Grand Ole Opry"등이 있었습니다. Grand Ole Opry는, 매주 토요일 밤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컨트리음악 라디오 프로그램으로서, 1925년 11월 28일 이후로 지금껏 방송되는 있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라디오 프로그램입니다. 1920년대말 대공황을 겪으면서 경제적 위기를 맞이한 미국인들에게 돈을 지불해야만 즐길수 있었던 음반보다 공짜로 들을수 있었던 라디오 컨트리음악프로는 그야말로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테네시주 네슈빌 어느 보험사 건물 한켠에 있었던 WSM라디오 방송국의 Grand Ole Opry 스튜디오 1930년대 밀려드는 방청객들로 인해서 더 넓은 장소로 이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정도였습니다. 한편으론 음반으로, 또 한편으론 방송으로 컨트리음악의 공급이 확대되자, 컨트리음악에 대한 미국인들의 수요도 폭발하였으며,Grand Ole Opry쇼는 그야말로 star를 갈망하는 Country-singer들의 꿈의 무대였습니다.Grand Ole Opry는 폭발적 인기로 인한 방청객의 증가로 이전에 이전을 거듭하여 마침내 1974년 내슈빌 외곽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Opry쇼는 지금까지 세계 약 1,000여개의 라디오방송사에서 방송되었으며, 현재는 공중파TV및 Cable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Grand Ole Opry는 컨트리음악의 역사를 말하면서 빼놓을수 없을 만큼 컨트리음악의 메카로 군림하여 오고 있지요.
1주차 퀴즈문제1. 날씨가 건조하여 월계수, 올리브, 소나무, 털가시나무 등 긴 뿌리와 작고 단단한 잎을 가진 키가 작은 관목들로 구성된 경관의 프랑스 기후대는 무엇이며, 어느 지역일까? 31) 서양 해양성 기후 - 브르타뉴2) 산악성 기후 - 로렌3) 지중해성 기후 - 프로방스4) 대륙성 기후 - 루아르 강 지역문제2. 다음 중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가 나타나는 지역은? 21) 프로방스 지역2) 브르타뉴 지역3) 알프스 지방4) 파리 지역문제3. 문화의 대중화를 위해 음악축제 같은 문화 축제를 기획한 사람은?1) 조르주 비도2) 앙드레 말로3) 장 발라르4) 자크 랑문제4. 프랑스어의 올바른 용법을 제정하고 논의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은?1) 코메디 프랑세스2) 혁명의회3) 아카데미 프랑세즈4) 파리대학문제5. 서머타임이 적용되는 때를 제외하고 우리 나라와 프랑스의 시차는?1) 우리 나라보다 8시간이 늦다.2) 우리 나라보다 9시간이 늦다.3) 우리 나라보다 8시간이 빠르다.4) 우리 나라보다 9시간이 빠르다.2주차 퀴즈문제 1다음 프랑스 지역과 음식을 잘못 연결한 것은?1)부르타뉴 지방 : 크레프2)알자스 : 부야베스3)알프스 : 감자 그라텡과 퐁뒤4)부르고뉴 : 에스카르고문제 2다음 중 프랑스인의 음식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1)아침식사에는 잼, 설탕 등이 등장하므로 단 것이 특징이다.2)아침식사에는 포크와 나이프, 큰 스픈 등을 꼭 사용한다.3)프랑스인에게 치즈는 우리나라의 김치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4)프랑스식 정식은 6막의 고전극에 비유되었다문제 3다음 중 프랑스 포도주의 대표적 산지에 들지 않은 곳은?1)보르도2)파리3)상파뉴4)부르고뉴문제 4다음 프랑스인의 식사 중 가장 나중에 나오는 코스는?1)부재료를 곁들인 고기2)샐러드3)앙트레4)디저트문제 5다음 중 EU나 유로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1)EU법은 각 회원국의 국내법에 우선하는 상위법으로서 작용한다.2)EU의 궁극적인 목표는 경제통합과 정치통합이다.3)2002년부터 영국간을 조성하였다.3)과거 유물들을 세심하게 배려하였다.4)이 시기에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로 발전하였다문제 3개선문을 건립한 사람은?1)루이 14세2)나폴레옹 1세3)루이 18세4)드골문제 4파리의 도로 출발점(도로 원점)을 나타내는 표석이 있는 곳은 다음 중 어디인가?1)콩코르드 광장2)빅투아르 광장3)노트르담 광장4)오페라 광장문제 5시테 섬의 우안에 상업의 중심지가 생기고, 좌안에 파리대학의 학생들 구역인 라탱 지구가 생긴 것도, 노트르담 사원의 건축을 시작한 것도, 루브르 궁전이 요새로 세워진 것도 ( )의 치하에서였다.1)필립 2세2)샤를 7세3)루이 9세4)루이 14세4주차 퀴즈문제 1다음 중 파리에 소재하지 않은 것은?1)퐁피두 센터2)루브르 미술관3)오르세 미술관4)샤갈 미술관문제 2파리의 센 강 위에 놓인 다리들 중 시인 아폴리네르에 의해 유명해진 다리는?1)알렉상드르 3세 다리2)예술의 다리3)미라보 다리4)콩코르드 다리문제 3다음 중 파리의 문화재와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연결된 것은?1)노트르담 성당 - 모리스 드 쉴리2)바스티유 - 샤를 5세3)개선문 - 나폴레옹 3세4)라 데팡스 - 오토 본 스프레켈슨문제 4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토목공학자 에펠이 건축한 에펠탑이 이제는 파리와 프랑스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그러나 건립 당시에는 이 탑이 파리의 미관을 해친다고 반대가 심했다. 다음 중 에펠탑 건축을 반대했던 사람이 아닌 것은?1)가르니에2)구노3)모파상4)이오밍 페이문제 5룻소, 볼테르, 졸라, 위고, 쟝 죠레스 등 프랑스를 빛낸 인물들이 묻혀 있는 기념물은?1)팡테옹2)노트르담3)앵발리드4)마델렌느5주차 퀴즈문제 1양배추 위에 소시지 등을 얹은 슈크르트로 유명한 지방은?1)알자스2)프로방스3)샹파뉴4)일드프랑스문제 2( ) 속에 들어갈 알맞은 것은?중세 때까지 ( ) 강 북부와 남부는 서로 다른 문화를 갖고 있었다. 북부에서는 오일어(langue d'oil)를, 남부에서는 오크어(langue 4다음 중 지방과 그 주도의 연결이 잘못된 것은?1)일드프랑스 - 파리2)로렌 지방 - 메츠3)상트르 - 오를레앙4)오트 노르망디 - 캉문제 5프랑스 혁명 이후에 생긴 행정단위로 ‘레지옹’을 제외하고 가장 큰 행정 단위는?1)데파르트망2)코뮌3)시테4)캉통6주차 퀴즈문제 1 다음 중 프랑스 지방과 관계가 없는 것은?1) 앙굴렘 - 국제 만화축제2) 도르도뉴 - 라스코 동굴3) 루르드 - 성모 마리아의 출현4)◎ 아비뇽 - 베레모 착용문제 2 보르도 출신의 문인 혹은 사상가로 짝지어진 것은?1)◎ 몽테뉴와 몽테스키외2) 파스칼과 데카르트3) 스탕달과 플로베르4) 보들레르와 랭보문제 3 프랑스의 지방분권화법이 제정된 시기는?1) 1988년2)◎ 1982년3) 1990년4) 1993년문제 4 다음중 프랑스의 광역지방과 그 주도, 그 지역 출신의 유명인사가 잘못 짝지어진 것은?1) 남부 피레네 - 툴루즈 - 툴루즈 로트렉2) 아키텐느 - 보르도 - 알리에노르 여백작3) 코르시카 - 아작시오 - 나폴레옹4)◎ 프랑슈 콩테 - 브장송 - 잔 다르크문제 5 다음 중 지방의 특산물과 관계가 없는 것은?1)◎ 알자스 - 카망베르 치즈2) 프로방스 - 올리브유3) 샹파뉴 - 삼페인4) 프랑슈 콩테 - 콩테 치즈7주차 퀴즈문제 1 중세 프랑스의 영토를 확장하고 봉건왕국을 설립한 왕조(987-1328)는?1) 메로빙거 왕조2) 카롤링거 왕조3)◎ 카페 왕조4) 발루아 왕조문제 2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에 존재한 여러 게르만족의 왕국들 중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로마화한 갈리아에 들어와서 로마문화와 융합하게 된 왕국은?1) 흉노왕국2)◎ 프랑크 왕국3) 훈 왕국4) 알망 왕국문제 3 843년의 ( )으로 인해 유럽은 지금의 프랑스 서부와 지금의 독일인 동부, 그리고 지금의 네덜란드에서 북이탈리아에 이르는 중부의 세 지역으로 분할된다. 이 조약은?1)◎ 베르됭 조약2) 스트라스부르 조약3) 메르센 조약4) 베르샤유 조약문제 4 발루아 왕조 성립과 왕위계승문제를 발단으로 1337년, 종교적 환상 등을 보여주기 위해 천사들이나 성인들을 화려하게 그렸던 미술양식은?1)고전주의 양식2)고딕 양식3)바로크 양식4)로코코 양식문제 2다음 중 들라크루아의 작품이 아닌 것은?1)메뒤즈 호의 뗏목2)키오스 섬의 학살3)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4)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문제 3다음 중 화가와 대표작품이 잘못 연결된 것은?1)다비드 -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2)마네 - 일출-인상3)쿠르베 - 오르낭의 매장4)모네 - 생 라자르 역문제 4다음 중 인상주의에 속하지 않는 화가는?1)모네2)마네3)르누아르4)밀레문제 5를 그린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는 ?1)제리코2)다비드3)들라크루아4)앵그르9주차 퀴즈문제 1르네상스 양식에 반해서 생겨난 것으로서, 순간적인 격정과 변화, 움직임을 중시하면서절대왕정이나 신의 위대함, 종교적 환상 등을 보여주기 위해 천사들이나 성인들을 화려하게 그렸던 미술양식은?1)고전주의 양식2)고딕 양식3)바로크 양식4)로코코 양식문제 2다음 중 들라크루아의 작품이 아닌 것은?1)메뒤즈 호의 뗏목2)키오스 섬의 학살3)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4)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문제 3다음 중 화가와 대표작품이 잘못 연결된 것은?1)다비드 -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2)마네 - 일출-인상3)쿠르베 - 오르낭의 매장4)모네 - 생 라자르 역문제 4다음 중 인상주의에 속하지 않는 화가는?1)모네2)마네3)르누아르4)밀레문제 5를 그린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는 ?1)제리코2)다비드3)들라크루아4)앵그르10주차 퀴즈문제 1다음 중 파리 유파(파리파)에 속하지 않는 화가는?1)달리2)샤갈3)수틴느4)모딜리아니문제 2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1917년 뉴욕 독립미술가협회에 제출함으로써 센세이션을 일으킨 화가는?1)샤갈2)달리3)뒤샹4)마그리트문제 3다음 중 화가의 특성이 옳지 않은 것은?1)앵그르 : 를 그린 화가2)피카소 : 스페인의 게르니카를 폭격한 나치의 만행을 고발한 화가3)뒤샹 : 다빈치의 에 수염을 그려 넣은 화가4)마그리트 : 에서 언어와 그림의였다.3)와토는 사랑에 도취된 선남선녀를 주로 그렸다.4)대리석 조각과 같은 이상적인 여인상을 주로 그렸다.문제 2루브르 미술관이 일반에게 공개된 해는?1)1789년2)1793년3)1889년4)1890년문제 3다음은 프랑스 미술관을 설명한 것이다. 옳지 않은 것은?1)루브르에는 고대에서 1848년까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2)오르세에는 1848년 2월혁명에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3)퐁피두 현대미술관은 1914년에서 현재에 이르는 대표적인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4)마티스 미술관이나 샤갈 미술관도 파리에 있다.문제 4다음 루브르 미술관을 설명한 것 중 옳지 않은 것은?1)유리 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이오밍 페이가 설계했다.2)드농관에는 다비드의 이 전시되고 있다.3)은 쉴리관에 전시되고 있다.4)루브르 미술관은 퐁피두 대통령 때 미술관으로 개조되었다문제 5다음 중 에 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1)1804년 12월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거행된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을 그린 것이다.2)화가는 좌우 근경을 검은 색으로 눌러주고, 중앙에 빛이 떨어지게 했다.3)화가는 등장인물을 화면 중앙에 위치시키고 화면의 윗부분은 비움으로써 보기에 편하게 했다.4)나폴레옹 황제와 황후 조세핀은 둘 다 교황으로부터 왕관과 황후관을 받아쓴다.12주차 퀴즈문제 1 다음 중 프랑스의 화가와 그의 작품, 그리고 전시된 미술관의 연결이 잘못된 것은?1) 토마 쿠튀르 : 로마인의 타락 - 루브르문제 2 다음 중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의 화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4) 쿠르베의 은 농촌의 촌부를 등장시켜 비너스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나폴레옹 3세가 무착 좋아했던 작품이다.문제 3 다음 작품의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2) 카르포의 은 1863년 오페라 하우스 장식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전시되자 민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문제 4 다음 중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이 아닌 것은?1) 들라크루아 : 키오스 섬의 학살문제 5 다음 오르세3
한시론 Report과목: 한시론담당교수:학과: 한문학과학번:이름:1. 이규보의 생애이규보는 1168년(고려 의종 22년) 12월 16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 본관은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윤수(允綬), 벼슬은 호부낭중(戶部郎中)에까지 이르렀으며, 어머니는 금양(金壤, 지금의 강원도 통천) 김씨이다. 외조부의 이름은 중권(仲權), 나중에 시정(施政)으로 고쳤는데 이름난 학자였다. 벼슬이 울진현위(蔚珍縣尉)까지 이르렀다.그는 개성에서 시공부에 열중하며 소년시절을 보냈으며 어릴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14세 무렵에는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최충(崔沖)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린 당시 최고의 사학 성명재(誠明齋)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그런데 16세, 18세, 20세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세 번 모두 낙방하고 말았으니「연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자기의 생각과 감흥을 자유롭게 읊조리는 시에만 힘쓰고 과거공부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여 스스로를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1187년 경에는 오세재의 소개로 죽림고회(竹林高會)의 오세재(吳世材)와 망년우를 맺고 그 모임에 출입하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 오세재를 제외한 죽림고회의 6명이 ‘그대의 친구 덕전(오세재)이 동쪽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는데, 그대가 대신할 수 있을까?’ 라는 제안을 하자 그는 ‘칠현이 그래 조정의 관작이어서 그 빈 자리를 채운단 말이오? 혜강, 완적이 없어진 후에 그들의 자리를 이어받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소이다’ 라고 한마디에 거절해 버렸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그는 시를 지음에 있어 무엇보다도 ‘신의(新意 )의 창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독창성이 드러나는 참신한 관점과 표현이 중요함을 늘 강조하였다. 그는 시의 본질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하며 치열하게 습작을 하고 방대한 양의 글을 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세가 되어서야 겨우 동진사에 합격한다. 그러나 시대의 여건은 정식으로 관리가 임용되는 것이 무망한 때였다. 그는 이의민 정권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해 아무런 관직도 없이 지내게 되었는데 그 기간은 10년 남짓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이 되도록 오히려 한 군현의 직임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여기서 잠깐 그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태어날 무렵의 고려 사회는 국제적으로는 북방 세력인 거란, 여진, 몽고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국내적으로는 민란이 일어나고 문신과 무신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상황에 있었다. 그러다가 1170년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난을 일으키게 되고 그렇게 시작된 무신 정권은 이규보가 일생을 마감한 다음에도 17년이 지난 1258년에야 최씨 정권의 몰락으로 종결되었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무신정권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무인들은 칼로 정권은 잡았으되 나라의 실무와 행정을 능히 이끌어 나갈 능력은 없었다. 따라서 무신정권은 귀족 문인들이 제거된 자리에 행정 문서를 담당할 새로운 실무적 식자층을 기용하게 되었고 특히 최씨 정권은 실무를 맡길 새로운 문인지식층을 보다 적극적으로 등용시켰던 바, 이규보는 그때 발탁된 ‘신진사인(新進士人)’의 대표적인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다시 그가 아직 발탁되지 못하고 관직없이 지낼 무렵으로 돌아오자. 그 무렵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바로 천마산으로 은거하며 스스로를 백운거사라 자처하면서 애써 유유자적코자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최충헌이 정권을 잡게 되고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이전의 무신 정권 당국자들과는 조금 다른 면모로써 능문능리(能文能吏)를 관리 임용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이때는 최씨 정권의 눈에 뜨이는 것이 관료로 진출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규보는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에게 천엽류화시(千葉榴化詩)를 써 바치고서야 전주목사록이라는 미관직이나마 오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첫 관직은 통판낭장과의 충돌로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한번 무직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이규보가 최충헌에게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나이 40이 되던 해였다. 1207년 최충헌이 열었던 詩會에서 이규보는 모정기(茅亭記)를 써 바쳤는데 이것이 최충헌의 눈에 들어 비로소 문한의 벼슬인 한림원에 임명된다. 그 후에도 최충헌 앞에 나가 시를 짓게 되고 나중에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시를 지어 벼슬을 구하려는 자세를 보이게 되며 이로써 벼슬을 높이는 기회를 몇 번 얻게 되어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 좌사간(左司諫)에 차례로 임명된다.그때부터 그의 벼슬길이 순탄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했다. 몇 차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기도 하고 유배되기도 하는 시련을 겪는다. 최충헌이 죽고 최충헌보다 이규보의 문학적 소양에 더 감탄하고 있었던 아들 최이가 집권하면서 바로 더 높은 관직에 소환되었으나 계속 좌천되고 유배되는 생활이 반복된다.1230년 몽고가 침입해 왔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몽고군의 억센 말발굽 아래 처참했으나 무신 권력 지배층인 최씨나 그 주변 세력들의 부귀 호사는 ‘나라를 걱정하는 수준’은 떠나간지 오래고, 가문의 융성에만 정신이 팔려 향락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규보는 관인의 한 사람으로서는 이미 현실에 타협하고 권력에 아첨하는 일면을 보이고 있었지만 시인으로서의 양심은 아직 잃지 않았던 듯 날카롭게 최씨 정권의 타락상을 지적하고 있는 글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만류하는 직언을 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던 것이다. 몽고의 2차 침입이 시작되자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고 그는 66세의 나이로 정승의 직위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힘’은 없는 명목상의 재상에 불과했다. 그는 외교 문서를 맡아 작성하였으며 이 시기 최이에 대해 전투를 이끈 지휘자로서 하염없이 훌륭한 면을 부각시키는 시를 많이 지었다.그의 글을 보면 그는 노년에 모든 것을 후회하고 있었던 듯 하다. 책을 읽고 공부만 하면 저절로 출세 하리라 믿었던 순진함, 실력만 믿고 거들거린 경솔함, 술을 마시고 호기롭게 살아온 생활자세, 마음에 있는 대로 털어 놓았던 타인에 대한 직언, 무신 정권에 대한 수치스런 타협과 자기의 재능이 이용당하고 만 것에 대한 뒤늦은 자각 등이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사직의 뜻을 밝혀 79세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는 시와 문학에 대한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열정, 직책에 대한 사명감으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문제는 근본적으로 당시 현실 사회의 왜곡된 권력구조와 닿아있었기 때문에 그가 재상으로서 했던 일이란 갈고 닦은 문필력으로 허수아비처럼 최씨 정권의 무제한적 권력을 찬미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만년에 지은 시들 속에는 이러한 죄의식, 초라함 등의 심정이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농민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하게 되어 시 속에서 농민을 대변하는 목소리, 농민의 수고에 신세를 지는 무능력하고 기생적인 관인의 목소리, 현실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74세가 되던 7월에 병이 심해져 9월에 생을 마쳤다. 현재 그의 묘는 강화도에 있다.2. 이규보의 문학1. 자연에 대해 읊은 글이규보는 자연을 깊이 있게 살폈다. 그는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진리를 찾아 시로 쓰곤 했다. 그는 도가 사상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따라서 ‘자연스러움’을 중시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풍경을 묘사한 시도 있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자연물을 차용한 시도 있다. 주시할 점은, 그는 자연을 ‘인간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래는 그 예이다.蓼花白鷺(여뀌꽃 떨기 속의 백로를 보고)前灘富魚蝦(앞 여울 물고기가 아주 많아서)有意劈波入(뜻을 두고 물결을 가르며 날아들다가,)見人忽驚起(갑자기 사람 보고 흠찟 놀라서)蓼岸還飛集(여뀌 핀 언덕 위에 도로 와 앉아,)翹頸待人歸(목 뺀채 사람 가기 기다리면서)細雨毛衣濕(깃털만 가랑비에 젖고 있구나.)心猶在灘魚(마음은 오히려 물고길 노리는데)人道忘機立(사람들은 ‘모두 잊고 서있다’라고 하네.)이 시에는 이규보의 독특한 시각을 볼 수 있다. 그가 이런 시들에서 나타내려고 한 것은 비단 ‘자연물의 실체’뿐이 아닐 지도 모른다. ‘실체를 보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비판 의식이 이 시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2. 농민들의 고난을 말하는 글이규보는 22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기는 하였으나, 반대파의 견제로 이후 10년간 벼슬 자리에 앉지 못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글들을 남겼다. 현실주의의 경향이 짙었던 그가 농민들의 고난에 관심을 쏟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新穀靑靑猶在畝(햇곡식은 푸릇푸릇 이랑에 있는데)縣胥官吏己微租(고을의 모든 관리가 벌써 조세 조르네)力耕富國關吾輩(힘써 농사지어 부국케 함은 우리네에 달렸는데)何苦相侵剝及膚(어찌 이리도 괴롭히며 살을 베 가는가)그러나 농민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로, 사대부의 입장에서만 시를 썼다는 비평도 있다. 이는 이규보가 농민이 아니었으므로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입장이었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3. 위정자?사대부에게 경고하는 글이규보는 ‘정치인’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산속에 파묻혀 은둔하는 학자보다, 자신이 획득한 진리를 현실 정치를 통해 실현해나가는 사람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의 신념에 따라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꼬집는 글을 많이 남겼다.手?剪棒?(연장 가져다가 잡초들을 제거하니)地面淨如洗(주변이 씻은 듯 깨끗해지고)??擢奇姿(기이한 자태가 훤히 드러났네)膏泥自封植(기름진 흙으로 북돋아 주고)?架仍撑?(시렁을 매어 괴어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