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Baroque) 복식1. 역사적 배경바로크(Baroque)는 스페인어의 바루카(barrucca)에서 연유된 것으로, '일그러진 진주'를 뜻한다.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균형, 조화의 세계에 비하여 유동적이고 강렬한 남성적인 감각과 더불어 기묘하고 이상한 이미지가 강조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크 예술은 절대주의의 궁정과 반종교개혁의 정신을 모체로 하여 개화한 예술로 로마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 번지게 되었다. 바로크는 궁정양식으로 장중취미를 기반으로 하여발전하였다. 풍부한 활력, 힘찬 움직임, 강렬한 감정,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을 가진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변화와 균형이 파괴된 데서 오는 부조화나 황당무계함 등을 문화적 특징으로 갖고 있다. 엄격하고 품위있는 외양으로 이지적인 감각을 지닌 르네상스 양식에 비해, 바로크 양식은 열정적이고 감각적인 기풍을 지녔다.바로크는 정치적으로 절대주의 시대에 해당되며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사상의 지배에서 벗어난 계몽사상시대에 해당된다. 사회. 문화적 배경으로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대패(大敗)하고 30년 전쟁의 발발로 결국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각 국의 경쟁적인 해외식민지 · 해외시장 개척되었으며 외교, 원거리 무역 등 활동의 범위가 매우 넓어졌다. 또한 네덜란드가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여 스페인 모직물 상공업자들이 무리한 과세를 피해 이주하였고, 공화연방국가 설립되었다.17세기 초엽 스페인은 쇠퇴하고 네덜란드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공화정의 체제를 가진 네덜란드는 유럽의 정치적 지도력을 장악했고, 프랑스는 절대왕정과 경제의 기반을 확립했다. 17세기 중엽을 지나면서부터는 정치적 권력 중심이 프랑스 궁정에서 확립되었다. "유럽제국의 모델 " 또한 "전 유럽의 군주의 찬영의 적"이 된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의 집약된 표어를 들고 안으로는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밖으로는 수차의 침략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확장, 루이 14세 시대라 일컫는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절대군주는 자신의 고전주의, 합리주의적 경향에 반대하여 17세기초 이탈리아에서 발생되어 17, 18세기에 걸쳐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유럽국가에서 전개된 건축양식으로 건축에 있어서 감각적, 역동적, 장식적 효과를 추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매너리즘 시기가 있었는데 이는 바로크로 넘어가는데 발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 양식이 극도로 발달했을 때 나타났던 건축 양식이다. 이 시기는 미켈란젤로에서 16세기 말까지로 고전적 요소의 특이한 사용, 의도적인 양식적 모순을 표현하였다.바로크 건축은 르네상스 건축에서 추구되었던 엄격한 고전적 법칙을 무시하였으며 (건축이 일정한 규칙, 형식에 의해 구성되는 고전주의 양식을 거부하였고 고전주의 건축양식의 대칭, 비례, 질서, 조화 등의 정적이고 2차원적인 건축 구성 원리를 무시) 극적인 효과를 추구하였고(관찰자의 강렬한 인상과 감동을 의한 극적 효과의 추구, 비대칭, 대비, 과장 등의 역동적이고 3차원적인 건축기법에 의해 형태 및 공간의 극적효과를 창출, 음영의 대비, 투시화법의 3차원적 효과, 척도의 변조, 화려한 장식 등의 수법을 이용) 화려한 장식이 특징으로 보인다. (호화, 조각, 공예 등을 장식적으로 건축에 적용, 일련의 곡선과 곡면에 의한 장식을 통해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형태와 공간을 창조, 범의 변형, 곡선형 코니스, 파동벽면 등을 이용하여 화려하게 장식)바로크 건축은 르네상스적 요소들을 계승, 고전적 형태를 자유롭게 변용하였고, 이성보다는 감성, 정신보다는 감각, 불규칙성, 율동감, 음영의 효과 가 보인다.성배드로 성당 광장(ITARY) 카리냐료 궁전 (ITARY)로마,1657년 토리노,1679년루부르 궁(FRANCE) 보루 비콤트의 성(FRANCE)파리 1635~42년 1657~61년성 스테판 성당(ENGLAND) 하워드 성(ENGLAND)런던 1672~79년 1707~26년*바로크의 조각바로크 양식의 조각은 건축의 일부로 건축의 내부를 장식하는 성격이 강했다.르네상스의 정연(整然)한 완결미(가 패션리더로서 17세기의 의상을 화려하게 발전시켰다.바로크 의상의 특징은 루프와 레이스의 장식의 남용이라 할 수 있다. 남성의 복장에서는 경박한 느낌을 주었으며 마치 여성복을 입은 것과 같은 양상을 띄었고, 여성의 복장에서는 화려하고 여성스러움을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하였다. 즉 루프와 레이스와 리본의 시대라 할 수 있다.1)남자 복식패드, 퍼프를 사용한 복잡한 구성으로 리슐리외의 경제정책에 의한 사치금지령과 30년 전쟁 등으로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의상을 좋아하는 경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1610년 경에는 몸에 편안하게 맞는 형태로, 1620년경이후에는 상당히 여유 있고 편안한 의상으로, 1630년경에는 네덜란드의 시민복이 각지로 보급되었다. 1650년경(루이 14세 즉위 후) 귀족풍의 복장이 다시 지배하면서 바로크 양식 유행하였고 시민복과 융합되어 성행하였다.17세기 전반부는 간편해진 푸르푸앵과 넉넉한 반바지, 17세기후반부는 귀족적 시민복인 쥐스토코르(justaucorpa)와 반바지 퀼로트(culotte)가 대표적 복식이었다.(1)푸르프앵(Pourpoint)17세기전반 네델란드 시민복의 영향을 받아 보다 간편하게 변화하였고 러프, 패드가 적어졌다. 러프와 매디치 칼라는 위스크(주름이 잡히지 않은 화려한 반원형의 레이스를 머리 뒤로 뻗치게 단 것)와 폴링칼라(하이 네크라인에 레이스가 어깨까지 내려 앉은 칼라)로 주름잡은 레이스는 주름, 무늬가 없는 수수한 레이스로, 숄더윙은 패드없이 납작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허리선에는 페플럼이 앞 뒤 4-6장으로 짧은 스커트처럼 달리게 되었다.17세기 후반 푸르푸앵의 길이와 소매부분에 큰 변화가 있었으며 길이는 볼레로 스타일로, 반소매 길이로 변하위스크 폴링칼라였다. 칼라는 스탠드칼라이며 폴링칼라를 덧붙이고 앞이 눈에 잘 띄게 앞에서 박스 플리츠(맞접는 상자주름)로 여미기도 했다. 1680년경에는 소매달린 짧은 조끼의 형태로 변하다가 쥐스토코르 속에 입혀지면서 사라졌다.1610년 : 길이가 길어지고 짧은 페플럼이 달리 푸르 금·은실을 섞어 짠 여러 가지 실크에다 자수를 놓기도 했다. 의례복으로 사용할 때는 흰색의 베스트를 착용하였고 점차 소매가 없어지고 남자신사복의 조끼로 변했다.(4)쥐스또꼬르(Just au corps)쥐스또꼬르는 몸체가 꼭 맞는다는 의미로 유럽의 남자들이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걸쳐 사용한 코트형의 상의이다. 중세 때 병사들이 입었던 실용적인 코트에 기원두었으며 1660년경 푸르푸앵이 작아지면서 그 위에 입는 코트의 성격이다. 푸르푸앵의 유행이 사라지면서 바지위에 입는 상의의 성격으로 바뀌었다.칼라는 가발이 대형화되면서 칼라의 중점을 앞으로 옮기게 되어 초기의 폴링밴드는 사라지고, 1660년대에는 목장식으로 크라바트(cravat)가 나타나 남자복장의 필수품이 되었다. 1690년대에는 크라바트의 다른 스타일로 슈타인커크(steinkirk)가 유행되었다.이것은 프랑스가 1692년 슈타인커크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생긴 이름으로, 얇은 면직물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그 끝을 쥐스꼬또르의 목 근처에 있는 단추 구멍에 끼워 넣어 늘어뜨린 것이었다.이상과 같이 17세기 남자 복장은 단추를 끼우지 않은 쥐스또꼬르를 위에 입고 단추를 끼운 베스뜨(veste)를 밑에 입어 베스뜨를 보이게 했고, 하의로서는 랭그라브(rhingrave)또는 뀔로뜨(culotte)를 입고 꼭 맞는 양말과 무릎장식인 까농(canon)을 한 벌로 착용했다.※ 크라바트(Carvatte) : 1660년대부터 남자의 목장식, 초기 30-40cm폭, 길이가 70-100cm (얇은 리넨, 카튼, 실크).에 한두번 감고 앞에서 나비모양으로 매어 주었고 1690년대에는 그 끝을 목 근처 단추 구멍에 꿰어 넣기도 했는데흰 리본의 크라바트는 쥐스토코르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면서 위용을 높혀 주었다.(5)망토(Manteau)승마나 여행할 때 주로 입었으며케이프 형의 외투나 발목길이의 긴 맨틀의 형태이다. 스페인식 외투는 옷길이가 짧고, 네델란드식 외투는 소매가 있고 풍성하게 넓은 형태가 특징이다.17세기 후반에 유행, 1625년부터 베르쥬가당(vertugadin)이 없어지면서 스커트는 인위적인 틀이 아니라 대단히 우아하고 정교한 페티코트로 풍만함을 형성하게 되어 활동적인 형태로 변화하였다. 1650년부터 페티코트를 받쳐서 부피를 늘린 비기능적 형태로 입었고 일부 지역에서 파니에(panier) 사용, 거창한 실루엣 형성하였다.버슬 스타일(Bastle style)의 개발로 스커트 앞자락을 한 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불편하여 앞은 A형으로 열어 놓거나 또는 스커트 앞의 갈라진 자락을 걷어 올려 뒤로 모아서 뒤 허리선에 집어넣어 bustle의 효과를 낸 새로운 형의 스커트가 나타났다. 이후 250년간 패션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며 특히 19세기말 유럽의 모든 여성들이 즐겨 입었다.속의 스커트를 씨끄리뜨(la secrete)라 했고 중간에 입는 스커트를 프리폰느(la friponne)라 하였고 겉에 입는 스커트를 모데스뜨(la modeste)라 했다.버슬스타일(3)칼라와 네크라인(dollar 와 Neckline)1630년경까지는 16세기에 유행했던 러프 칼라가 다른 형태의 칼라와 함께 그대로 유행하였으며 부드러운 소재로 주름잡은 칼라를 여러 겹 겹쳐 단 림프 칼라(limp collar), 스퀘어 네크라인의 양 옆에 메디치 칼라를 벌어지게 단 것, 또는 칼라 없이 가슴을 깊게 판 네크라인이 유행하였다.1630년부터는 머리 뒤로 뻗친 위스크 칼라(whisk collar)와 주름 없이 어깨를 내리 덮는 플렛칼라(flat collar)가 유행하였으며 플렛칼라는 (폴링칼라(falling collar) 또는 폴링밴드(falling band)로 불렸다.) 케이프처럼 어깨를 내리 덮는 넓은 레이스 칼라와 작은 크기의 수티앵 칼라(soutien collar)를 말하며 반다이크의 그림에서 많이 보여지기 때문에 반다이크 칼라라고도 한다.1650년 부터는 목둘레 선을 많이 판 데콜테(decolldte)현상이 다시 생기면서 속에 입은 슈미즈의 주름이 목밑에 까지 오게 하거나 많이 파진 네크라인에 레이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