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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면마견조사1
    REPORT- 나주의 면마견 -목 차Ⅰ. 머리말1.연구 목적2.연구 방법Ⅱ. 다시면 샛골나이와 목화Ⅲ. 나주 비단, 잠사주식회사Ⅳ. 천연염색Ⅴ. 맺음말Ⅰ. 머리말1. 연구 목적전남은 목화가 잘 자라는 데 좋은 따뜻한 기후를 지니고 있다. 문익점이 처음 목화를 가지고 와 재배했다는 경상남도 산청 또한 따뜻한 기후가 특징이다. 목화를 잘 재배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기후조건이 있겠지만 전남 지역에서 목화의 재배 기후 조건이 좋아 재배가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남, 곡성, 광주 등 전남 각 지역에서 목화를 재배했다. 견도 마찬가지로 재배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는 전남 보다는 우리나라 윗 지방에서 많이 재배하였다.영산포는 1975년까지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종 9년까지 조창이 있어서 주면 일대의 조세와 물산,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된 뒤 목포항을 통해 들어온 외래 문물이 영산강 뱃길을 따라 영산포를 거쳐 전남 내륙으로 흘러들었다. 1900년대만 해도 인구가 3,000여명에 이르던 영산포는 1914년 대전과 목포를 잇는 호남선이 놓일 때 영산포역이 생기면서 영산포는 일제의 조선수탈 창구의 하나가 되었다.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출입화물의 집산 시장으로 발달하였다. 일본을 주 대상으로 무역이 이루어졌다. 수출품은 미곡, 면화, 누에고치, 잡곡, 새끼, 가마니, 죽제품이었고, 수출고는 4백2만4천1백84원에 달했다. 수입은 비료, 밤, 면사포, 염장, 석유, 성냥, 주류, 일용식료품, 잡화, 농구류, 건축자재, 철기류등 3백82만3천9백19원에 달했다. 특히 영산포는 미곡 집산지로서 도정업이 유명(13개소)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된 영산포 본정통 거리는 당시 최고의 거리로 영라관이란 요정 건물과 정미소 건물 등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나주의 특산물로는 ‘나주 샛골나이’라고 불리는 결고운 무명베와 나주반(차 그릇), 나주 배가 유명하다. 쌀과 면화와 누에고치가 많이 나서 삼백 지과거에는 하나의 옷감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고, 깊은 정성을 들여야 했다. 일제강점기까지 집에서 물레를 돌리고 베를 짰었다. 그러나 현재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옷만 가득하다. 이러한 공장들이 들어서고 나일론 합성섬유가 나오면서 목화와 마를 심는 일도, 집에서 실을 만드는 일도, 옷을 짜는 일도 없어졌다. 우리는 현재 이러한 잊혀져가는 과거를 알아보고자 한다. 면, 마, 견의 과거 생산과 유통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의복 생활사를 엿볼 수 있으며, 역사의 흐름에 따른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2. 연구 방법조사기간 : 2011년 10월 22일~ 11월 27일조사지역 : 나주 신협을 중심으로 잠사와 공장터 주변 ,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조사대상 : 면, 마, 견 생산과 유통, 판매 정보를 지닌 나주 시민 중 만 50세 이상의 노인조사방법 : 인터뷰, 참고자료 및 서적 참고- 조사 지역Ⅱ. 다시면 샛골나이와 목화목화는 한해살이풀로 음력 3월 하순 경에 밭을 간 뒤, 한 줄로 씨를 뿌려 싹이 나면 잎이 서로 닿지 않을 정도의 간격으로 솎아 준다. 심는 방법은 지방마다 독특한 방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전남 나주에서는 씨를 뿌리기 전에 오줌동이에 10~20분 정도 담갔다가 건져 아궁이의 재를 묻힌 다음, 뜰에 놓고 손에다 신을 끼고 비벼서 씨앗을 말린 후 보리 골에 심기도 한다. 목화가 어느 정도 자라 잎이 5~6장 쯤 되면, 윗순을 집어 주고, 윗순에서 2~3마디의 가지가 뻗으면 또 순을 집어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음력 7월 중순경이 되면 꽃이 피고, 꽃이 지면서 열매를 맺는다. 목화의 열매는 흔히 다래라고도 하는데, 맛이 달짝지근하여 예전에는 즐겨 먹었다고 한다. 다래는 점점 자람에 따라 잎이 딱 벌어지고 그 속에서 솜이 꽃처럼 피어난다. 솜이 피어난 목화송이는 정성스럽게 따서 볕에 쬔 뒤 그늘에 말리거나 방에 불을 때서 말려 습기를 없애준다.< 우리 집이 옛날엔 둑이 들어 서기 전에 평야였는데, 개간되기도 했고, 암튼이루어진다. 8월 중순부터 목화를 따기 시작하는데, 처음 딴 목화가 가장 좋다. 볕에 말린 목화를 씨아 틀로 씨를 빼내 씨앗기를 하고 솜활이라는 기구를 이용해 솜을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인 솜타기를 거친다. 탄 솜을 말판 위에 펴놓고 말대로 비벼 고치를 만든 후 물레를 이용해 실을 뽑아 가락에 감는 실잣기를 한다. 실의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하는 무명 날기를 하고, 베매기인 풀 먹이기 과정을 거친 후 베틀을 이용하여 직물을 짠다. 예전에는 개성의 송도목과 진주의 진주목이 명품으로 날렸으나 오늘날에는 나주의 나주세목 또는 샛골목이 12승 무명으로 유명하다. 나주의 샛골나이는 흰색으로 인해 백의민족으로 일컬어지는 한민족의 옷을 풍요롭게 하며, 한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전통직물로 가치가 높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기능보유자로는 노진남이 인정받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어릴 적 베 짜는 것은 자주 볼 정도였지. 물레가 있는 집이 많았어. 그래서 한 마을에서 같이 짜고 그랬지. 짜면서 여자들끼리 밤새 남욕하고 했지 - 박신정 (72) >< 목화를 심어갖고, 밭에다. 걸 따서, 씨앗에다 앗아갖고, 탔제. 조사 갖고, 널어. 마당에다가 그래가지고 내어서 도투레에다가 감아. 베도 그걸로 했어. 베를 삶아. 삶아가지고 했어 -이점례 (86) >< 수수대와 말판 >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씨앗기 > 출처 : 네이버 블로그위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재래면과 육지면을 구분 짓는 사람은 없었고, 빨간 꽃과 하얀 꽃의 구분도 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하러 목포를 돌아다니며 육지면과 재래면을 말 했을 때,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목화 꽃의 색이 빨간색인 것은 재래면이고, 흰색인 것은 육지면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생각 안 난다는 의견과 둘 다 같이 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현재 나주에서 면을 재배하고 직조하는 사람은 샛골나이 기능 보유자인 노진남 할머니뿐이다. 노진남 할머니는 국가 기능자로 90년대 후반에 국가 여 활끈을 당겨 솜이 피어오르게 한다.3)고치말기= 탄 솜을 뜯어 말판위에 놓고 말대로 밖으로 내밀어 비비면서 고치말기를 한다.4)실잣기= 물레를 이용하여 고치에서 실을 뽑는 것으로, 고치를 잡고 물레를 돌리면서 실을 가락에 감는데 실뭉치를 뎅이라고 하며 회전속도 등에 따라 실의 굵기와 품질이 달라진다.5)베 뽑기= 뽑은 실을 가락에 감아 다시 합쳐 모아 실을 만든다.6)베 날기= 승수와 한필의 길이에 맞추어 베 날기를 하는데 열 개의 실을 한군데모아 날실을 준비한다.7)베매기= 날실을 펴서 팽팽하게 하여 여러 차례 풀을 매겨 마르면 도투마리에 감는다.8)꾸리감기= 위사준비과정으로 북에 넣어 씨실로 쓸 꾸리를 감는다.9)베짜기= 북을 날실사이로 번갈아 집어넣으면서 베를 짠후 세탁으로 불순물을 제거하고 햇볕에 말린다.Ⅲ. 나주 비단, 잠사주식회사1940년대 국내 최대 규모의 나주 양잠조합이 있었으며 나주시내에 있는 나주잠사(주)의 경우 1970년대 2천여 명의 직원이 근무했을 정도로 전국 실크의 최대 생산지였다.영산강변에 심었던 뽕나무 덕분이었다. 지명도 비단과 관련이 많다. 나주(羅州)의 '羅'가 비단이며 나주의 옛 이름 금성(錦城)과 나주의 대표적인 산 금성산(錦城山), 나주시천연염색문화관 뒷산인 잠애산(蠶厓山) 모두 비단이나 누에고치와 관련돼 있다.1990년에 전남(全南)도는 19일부터 가을 누에고치 공판을 시작, 오는 10월 20일까지 한 달 동안 1백63t의 누에고치를 수매키로 했다. 도는 올 가을 누에고치 종자 7천5백13상자를 보급, 평년작을 유지함에 따라 1백63t의 누에고치가 생산될 것으로 보고 19일부터 도내 70개 공판장에서 잠사 업체인 장성(長城) 삼양물산이 74t, 삼양견업 61t, 나주잠사가 18t씩을 각각 수매토록 하고 잠업검사와 잠업시험장에서 시험용으로 10t을 수매키로 했다.구 나주잠사는 1910년대에 양잠조합으로 건립되었다가 1954년 나주잠사주식회사로 다시 건립된 산업시설로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해방이후 1950년대에 새끼들이 꼬물거리고 있었지.. - 김귀자 (71) >< 그리고 일부분은 우리 집에서 직접 명주실을 뽑아내는 일을 했는데, 큰 솥에 먼저 누에고치를 삶어 그런데 큰 솥은 실을 뽑는 기계 밑에 놓여 있도록 장치가 되어있었어.. - 김병관 (57) >< 6.25 동란 전인 것 같다. 나는 노안에 살았는데, 잠만 자고 나면 창고로 달려가 누에 새끼들을 보어, 하루가 다르게 컸는데, 우리 집에 일을 도우시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집 대문 건너편 뽕밭에서 날마다 뽕잎을 채취해서 작두로 썰어 누에가 자라고 있는 채반위에 올려 줬었지.. -곽춘례 (75) >< 대부분의 영산강이 개간되었고, 간척지 사업이 있은 후로 국가 소유의 땅이 생김. 그것을 개간이 완료되고, 사람들에게 분배를 해줌. 그런데 가족 인원수라든가, 나주 침수지역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주었다고 함. 그래서 땅이 없는 사람도 있었음. 영산강 주변과 멀수록 땅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음. 그래서 그 사람들은 누에를 길렀어.. - 김영균 (73) >나주는 면과 마가 유명한 고장으로 조공으로도 면과 마가 바쳐진 기록이 남아있다. 위의 인터뷰에서 나타나듯이 나주 사람들은 목화와 더불어 누에도 많이 길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산강 하류 지역은 목화재배가 많이 일어나던 곳으로 유명하였고 집집마다 뽕나무 재배를 하면서 누에를 키우던 집이 나주 지역에는 많았다고 한다.< 6.25가 일어나서 인민군이 우리 집을 송두리째 차지하고 우리는 나주 시내로 돌아왔지, 아마도 그 때 우리 집 근처 뽕나무 열매는 인민군이 다 먹고 태워버려서 없어졌고 그것 때문인지 누에도 사라져 버렸어.. - 김영균 (73) >) 잠사 생산이 큰 폭으로 준 것은 지난 76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현상으로 농진원은 잠업 농에게 뽕밭 조성이나 잠구,뽕수확기 구입 등에 60%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정부에서 잠사생산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데도 농가나 생산량은 계속 줄고 있는 것은 인력 부족과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 때문으로 분석했다.나주 지역에서) >
    생활/환경| 2011.12.09| 12페이지| 1,000원| 조회(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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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마견
    문화인류학과 061617 김재영Ⅰ. 머리말 1.연구 목적 2.연구 방법 Ⅱ. 다시면 샛골나이와 목화 Ⅲ. 나주 비단, 잠사주식회사 Ⅳ. 천연염색 Ⅴ. 맺음말2011년 9월 12일 ~ 2011년 9월 16일 나주 시지를 통하여 과거 나주의 면-마-견 재배내용 확인 2011년 9월 16일 ~ 2011년 9월 26일 논문을 통하여 나주 내의 면-마-견에 관련 문헌조사 및 조사 지역 선정현 지 조 사 1차 조사 조사일시 : 2011년 10월 22일 조사지역 : 전남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조사내용 : 인터뷰 대상자 선정 및 현장조사 2차 조사 조사일시 : 2011년 11월 12일 조사지역 : 전남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조사내용 : 조사지역 현장조사 3차 조사 조사일시 : 2011년 11월 19일 조사지역 :(구) 잠사공장 터 (현) 신협 조사내용 : 노인회관을 중심으로 인터뷰 조사- 섬유의 종류- 면, 마, 견 -재배 (생산) 을 어떻게? -제사 과정은 어떻게? -제사도구는? (일제시대 전과, 후 , 해방 후) -제직과정은? -제직 도구는? -유통과정에 대해 묻기 -공장제와 기계제가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들어왔는지Ⅱ. 다시면 샛골나이와 목화전남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동당리는 나주 샛골나이로 유명한 곳으로 이 곳에는 노진남 할머니가 사시는 곳으로 전국에서 유명한 샛골나이를 조사할 수 있는중요한 조사지 이다.이점례 할머니 ( 86세 ) 목화 재배 , 개인 밭 보유 족답직기 , 물레 사용 시집와서 목화를 재배 및 직조 60년대 후반 목화재배 X목화를 심어갖고, 밭에다. 걸 따서, 씨앗에다 앗아갖고, 탔제. 조사갖고, 널어. 마당에다가. 그래가지고 물레에다 조사. 인자 또 도투마리가 있어. 그래가지고 내어서 도투레에다가 감아. 베도 그걸로 했어. 도투레로. 베를 삶아. 삶아가지고 했어. 감아가지고 삶았제. 여자들이 그거를 또 짰어. 우리들도 다 시집가서도 했어. 그렇게 해서 옷 해 입고 살았었어. 베틀에다 짜서 그것을 끊어가지고 그놈을 이제 삶아서 다래고 풀해서 만들어기도 했어. 예전에는 돈대신 베로 짜서 나가면 여러가지를 바꿀 수 있었거든. 지금은 잠 안오면 텔레비도 보제만. 그때는 잠 안오면 미영 잦는 게 일감으로 딱 정해져 있었어.박신정 ( 72세 ) 과거 직조 과정만 기억함 현재 노진남 할머니 이외에는 사람이 없음예전에는 다른사람들도 베에다가 옷을 지어입었는데 요즘은 없어. 저기 노진남 할머니만 지금도 하고 다른사람들은 안해. 옷이 다 만들어져서 나오는데 할필요가 없지. 누가 한당가. 나 어렸을 적에나 어머니가 베로 옷해서 자식들 다 입히시고 그걸로 사셧지 지금은 힘들고 해서 잘 안해. 키우는 사람들도 없고. 요즘이야 좋은 옷들이만들 어져서 나와서 편하지만 예전에는 많이 힘들었지 요즘 사람들은 옷 해 입는건 꿈에도 못꿔.힘든줄도 모르고 그냥 목화가 있는갑다 하는거지.노진남 할머니 이외는 면화 재배를 하지 않음. 과거 개인 밭을 소유하고 재배를 하였지만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재배를 하지 않음. 개인 베틀과 직조 기구를 보유하였지만 현재는 노진남 할머니만 보유 중. 60년대 이전 다시장이 열리면 집에서 베필을 만들어 판매 및 교환. 일제시대 일제의 감시 , 육지면 재배는 모름. 목포와는 달리 기계화 과정 (x)노진남 할머니 ( 80세 ) 해방되고 전쟁으로 길이 막히기 전 까지만 해도 여기서 만든 미영베가 개성까지 갔음. (진상품) 대개 일곱새 ~ 여덟새 , 노진남 할머니는 열새 ~ 열두새. 새는 무명베의 올이 촘촘한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 . 베를 짤 때 쓰는 길다란 참빗처럼 생긴 바디의 틈새 40개를 한 새로 침. 각 틈새마다 두 올씩 들어가니 8새는 640올, 12새는 960올 임 , 새가 높을 수록 상품 , 10새면 상품 , 12세는 최상품 . 베 짜는 일은 주로 겨울과 이른 봄 행해짐 , 여름엔 땀이 나서 일 하기가 힘든데다, 목화를 따고 말리는 일이 우선이었음.샛골 일대 집집마다 짠 무명베는, 다시장이 서는 날에 맞춰 무명베전으로 나옴. 목화 열근이면 무명 40자를 짬 , 20자가 한 필이며 지금 길이로터는 과정으로 이슬을 맞여 눅눅해진 다음 활끈이 솜에 닿게 하여 활끈을 당겨 솜이 피어오 르게 한다. 3)고치말기= 탄 솜을 뜯어 말판위에 놓고 말대로 밖으로 내밀어 비비면서 고치말기를 한다. 4)실잣기= 물레를 이용하여 고치에서 실을 뽑는 것으로, 고치를 잡고 물레를 돌리면서 실을 가락에 감는데 실뭉치를 뎅이라고 하며 회전속도 등에 따라 실의 굵기와 품질이 달라진다. 5)베 뽑기= 뽑은 실을 가락에 감아 다시 합쳐 모아 실을 만든다. 6)베 날기= 승수와 한필의 길이에 맞추어 베 날기를 하는데 열 개의 실을 한군데모아 날실을 준비한다. 7)베매기= 날실을 펴서 팽팽하게 하여 여러 차례 풀을 매겨 마르면 도투마리에 감는다. 8)꾸리감기= 위사준비과정으로 북에 넣어 씨실로 쓸 꾸리를 감는다. 9)베짜기= 북을 날실사이로 번갈아 집어넣으면서 베를 짠후 세탁으로 불순물을 제거하고 햇볕에 말린다.Ⅲ. 나주 비단, 잠사주식회사1940년대 국내 최대 규모의 나주 양잠조합이 있었으며 나주시내에 있는 나주잠사(주)의 경우 1970년대 2천여명 의 직원이 근무했을 정도로 전국 실크의 최대 생산지였다. 영산강변에 심었던 뽕나무 덕분이었다. 지명도 비단과 관련이 많다. 나주(羅州)의 '羅'가 비단이며 나주의 옛 이름 금성(錦城)과 나주의 대표적인 산 금성산(錦城山), 나 주시 천연염색문화관 뒷산인 잠애산(蠶厓山) 모두 비단이나 누에고치와 관련돼 있다. 구 나주잠사는 1910년대에 양잠조합으로 건립되었다가 1954년 나주잠사주식회사로 다시 건립된 산업시설로 현 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해방이후 1950년대에 건립된 것들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지는 못 하지만 나주 근 대 잠업역사를 일부 보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나주의 여러 산업 중 蠶業(잠업)이 매우 성행했다. 잠업과 관련한 시설로는 잠업전습소, 잠업조합 등 이 생겨났는데 나주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製絲(제사)공장이 2개소 있었다. 일제하 나주 시내를 흐르는 나주천 변에 있던 양잠조합 건물이 지금도 잘 남아있다. 일제가 일직접 명주실을 뽑아내는 일을 했는데, 큰 솥에 먼저 누에고치를 삶어 그런데 큰 솥은 실을 뽑는 기계 밑에 놓여 있도록 장치가 되어있었어.. - 김병관 (57)6.25 동란 전인 것 같다. 나는 노안에 살았는데, 잠만 자고 나면 창고로 달려가 누에 새끼들을 보어, 하루가 다르게 컸는데, 우리 집에 일을 도우시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집 대문 건너편 뽕밭에서 날마다 뽕잎을 채취해서 작두로 썰어 누에가 자라고 있는 채반위에 올려 줬었지.. -곽춘례 (75) 대부분의 영산강이 개간되었고, 간척지 사업이 있은 후로 국가 소유의 땅이 생김. 그것을 개간이 완료되고, 사람들에게 분배를 해줌. 그런데 가족 인원수라든가, 나주 침수지역인 사람들에게 더 많이 주었다고 함. 그래서 땅이 없는 사람도 있었음. 영산강 주변과 멀수록 땅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음. 그래서 그 사람들은 누에를 길렀어.. - 김영균 (73) 6.25가 일어나서 인민군이 우리 집을 송두리째 차지하고 우리는 나주 시내로 돌아왔지, 아마도 그 때 우리 집 근처 뽕나무 열매는 인민군이 다 먹고 태워버려서 없어졌고 그것 때문인지 누에도 사라져 버렸어.. - 김영균 (73)내가 여기로 시집온 지 50년이 넘었나? 그 때가 내가 23살 때였은게. 나 어릴 적에도 뽕 겁나 많았어. 거기서는 잠실이 있었지. 잠실? 그거 물레 짜는 방이지. 뭐여. 베알어 몰러? 그거 짜는 방이여. 거기는 함부로 못 들어갔지. 일본인들이 있었는디. 일본인 집이었을 거여 거가 아마. 거기다가 누에를 주면 돈을 줬어. 기억은 안난디. 한 채로 들고 가면 돈을 줬지. 나는 거기 못 갔어. 우리 엄마들이 다녔지. 나 어릴적인디. 여기서도 했지. 공장가서 팔면 돈 주더라고. 잠실? 여기는 잠실 없었어.. - 이복순 (74) 그때는 전국에 속칭 번데기공장이라고 하는 게 있었어요. 서독 간호사보다 월남에 간 군인들보다 더 많은 달러를 벌어들인 것이 우리나라 제사 공장이었을 것입니다.. - 한국생사수출입연합회 조동기 (58)나주 사람들은 목화와 던 나주 지역은 염색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주시 다시면에 나주시천연염색 문화관이 자리 잡은 배경들이다. 나주는 천연염색과 함께 섬유산업도 발 전했다.현재 중요무형문화제 115호 염색 장이신 정관채 어르신은 현재까지 전통방식으로 쪽을 이용하여 염색을 하고 있다. 천연염색에서 우리나라는 고유의 색인 오방색이 있다. 예부터 이러한 오방색을 이용하여 나주 샛골나이가 만든 무명베에 쪽물을 들이면 이는 최고의 진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에 의해 합성연료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천연염색은 기피대상이 되었다. 합성연료를 쓰면 간편한데 굳이 천연염색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현재는 염색 장이신 정관채 어르신을 재외하고는 그 맥이 끊어 졌다고 한다.천연 염색 방법 1) 3월 초에 파종한 쪽을 삼복 무렵부터 수확해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는다. 쪽이 잠기도록 빗물을 붓고 무거운 돌로 짓눌러 50시간을 둔다. 보통 20~25°C에서 10시간 정도가 지나면 연한 녹색, 노란색 들으로 변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쪽풀에서 색소가 분리되기 시작한다는 신호이다. 2) 50시간 정도 지나 쪽풀에서 색소가 완전히 분리되면 이때 쪽을 건져내고 채로 걸러 청록색 물만 받아 둔다. 3) 쪽물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소석회를 첨가하는데, 중요한 과정이다. 굴이나 조개의 껍질을 가마에서 이틀 동안 구우면 굴 껍질은 밀가루처럼 하얀 분말로 바뀐다. 이 석회가루를 미리 추출해 놓은 색소에 넣고 횃대로 힘차게 저어주면 이후 색소는 석회와 함께 침전이 된다. 윗물은 쪽밭에 뿌려주고 침전물은 시루에 밭쳐 고체 상태가 되도록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다. 4) 쪽대를 태워 만들 잿물을 100L 가량 붓고 10~20kg의 쪽 침전물을 넣은 뒤 25~30°C를 유지시키며 하루에 2~3회 힘차게 저으면 보름 뒤에는 대추알만한 꽃 거품이 생긴다. 보온을 위해 따뜻한 곳에 보관하여 10일 남짓 지나면 완성된 쪽 염료인 '꽃물' 이 만들어 진다. 이 꽃물에 천을 담그는 시간과 횟수에 따라}
    생활/환경| 2011.12.09| 28페이지| 1,500원| 조회(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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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지역의 면 마 견 재배 및 유통과정
    목포와 목화"목화의 고장 목포"목차?머리말?내용Ⅰ. 목화 생산Ⅰ-1 목화의 재배과정Ⅰ-2 제직과정과 제직기Ⅱ. 목포의 견과 마Ⅱ-1 견Ⅱ-2 마Ⅲ 유통의 과정Ⅳ 목포의 조면공장?맺음말?후기?머리말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옷들은 1960~70년대 들어온 것들이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우리는 이러한 섬유가 들어오기 전에 손으로 직접 실을 만들어 옷을 짰다. 서민들의 옷은 직접 가내수공업으로 목화와 마를 직접 밭에 심고 길러 실을 만들어 옷을 짰다. 뽕 밭에는 누에를 키워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옷을 만들어 입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면, 마, 견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옷감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고, 깊은 정성을 들여야 했다. 일제강점기까지 집에서 물레를 돌리고 베를 짰었다. 그러나 현재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옷만 가득하다. 이러한 공장들이 들어서고 나일론 합성섬유가 나오면서 목화와 마를 심는 일도, 집에서 실을 만드는 일도, 옷을 짜는 일도 없어졌다. 우리는 현재 이러한 잊혀져가는 과거를 알아보고자 한다. 면, 마, 견의 과거 생산과 유통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의복 생활사를 엿볼 수 있으며, 역사의 흐름에 따른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전남은 목화가 잘 자라는 데 좋은 따뜻한 기후를 지니고 있다. 문익점이 처음 목화를 가지고 와 재배했다는 경상남도 산청 또한 따뜻한 기후가 특징이다. 목화를 잘 재배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기후조건이 있겠지만 전남 지역에서 목화의 재배 기후 조건이 좋아 재배가 활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남, 곡성, 광주 등 전남 각 지역에서 목화를 재배했다. 견도 마찬가지로 재배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는 전남 보다는 우리나라 윗 지방에서 많이 재배하였다.우리가 전남 중에서도 목포를 조사지역으로 정한 데는 목포가 일제강점기 때 육지면의 첫 재배지였기 때문이다. 1906년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육지면을 들여왔다. 그 이후 육민 기반시설을 마련하였다. 목포가 상업의 중심지, 무역의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미곡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던 조선인 지주들도 목포에 자리를 잡았다. 목포가 상업의 중심지가 된 것은 미곡과 면화수출이었다. 미곡과 면화가 목포에 집산되었고 다시 수출되면서 목포항 근처에는 조면공장과 도정공장이 생겨났다.목포는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겪으면서 외국인들에 의한 수입면화가 들어오고, 갖가지 염색원료가 들어오게 된다. 면 산업은 목포에서 크게 발달하여 많은 공장지대를 만들었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역자들도 생겨났다. 70년대까지도 그 공장들은 많이 운영되어왔었다. 이후 공장들은 용도가 변하였고, 많이 철거 된 상태이지만 아직도 목포 내에는 그 터가 존재하고,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 의거해 목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번 조사에 임하였다. 하지만 면, 마, 견의 역사 변화 과정을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조사하려면 조사대상자의 나이는 최소 65세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지만 고령의 나이라 돌아가셨거나, 혹은 병상에 누워있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갔거나 또는 온 경우가 많아 조사의 어려움을 겪었다. 남아있는 자료의 부족함도 이번 조사의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의복문화를 알아가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것에 조사 의의를 둘 수 있다.?연구방법조사기간 : 2010년 11월 3일~ 11월 27일조사지역 : 목포 원도심을 중심으로 만호동, 축복동, 유달동, 용해동, 남교동, 죽동, 서산동, 온금동 일대조사대상 : 면, 마, 견 생산과 유통, 판매, 공장과 관련된 정보를 지닌 목포 시민 중 만 65세 이상의 노인조사방법 : 인터뷰, 참고자료 및 서적 참고< 조 사 지 역 >Ⅰ. 목화 생산Ⅰ-1 목화의 재배과정목화는 한해살이풀로 음력 3월 하순 경에 받을 간 뒤, 한 줄로 씨를 뿌려 싹이 나면 잎이 서로 닿지 않을 정도의 간격으로 솎아 준다. 심는 방법은 지방마다 독특한 방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전남 나주에서는 씨를 뿌리기 전에 오줌동이에 발표했다.그는“문 선생은 중국 원(元)나라 강남지방에서 목화씨 10개를 가지고 공민왕 13년(1364년) 10월 고려에 돌아온 뒤 곧 고향인 산청에 내려왔다”며 “문 선생은 목화씨 절반을 고향마을(사월리)에서, 문 선생의 후처 아버지였던 정천익(鄭天益) 선생은 사월리에서 6km 떨어진 진양 정씨 집성촌인 관정마을에서 나머지 절반을 재배했다”고 밝혔다.그는 이어 “정 선생이 재배한 목화가 성공해 10년 만에 온 나라에 확산된 것은 정씨의 큰 공이지만 그렇다고 문 선생이 목화를 첫 재배한 곳까지 잘못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최근 들어 경남 진주와 단성 지방에는 ‘정천익 선생이 단성에 살면서 목화를 재배해 배양마을이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문 교수는 또 그동안 논란이 돼 온 문 선생의 출생 및 사망 연도, 원나라 사신으로 갔던 시기 등에 대해 문헌을 정밀 분석한 결과 △출생은 1331년(고려 충혜왕 원년) △원나라 사신으로 간 때는 1362년(공민왕 11년) △귀국은 1364년(공민왕 13년) △면화 시험재배는 1365년(공민왕 14년) △사망은 1398년(조선 태조 7년)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2003년 9월 25일 동아일보 [문익점 첫 목화재배지는 경남 산청군 사월리]‘최초’ 라는 의미는 사람들에게 크게 다가온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최초의 자동차’, ‘최초의 우주선’ 등 최초는 여러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지방에 뭔가 특별한, ‘최초’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그 지방 사람들만의 자랑 일 것이다.< 재배 할 때가 고하도 뿐 아니라 신안 앞에 모두 면화를 다 했어요. 거가 재배지가 있는데 주로 무안 할 것 없이 이짝 해안지대는 목화를 그렇게 많이 심었어. 용해도 저짝으로 다 시청 있는 저 안쪽으로 다 심은 자리지……. - 문익주(76)>< 재배에 가장 여름이 길고 해풍도 닿고 그러니까 해풍 닿으면 좀 빨리 수확도 되면서 이 곡식도 갯바람 만나고 그러면 빨리 수확이 되더라고 수확이. 늦게 수확되면 늦게 된 과정이 끝나면 무명올이 감긴 도투마리를 베틀로 옮겨 다른 직물과 같은 방법으로 짜되, 실이 마르면 끊어지므로 수분을 공급해 가며 짠다.인터뷰를 통해서 씨앗기와 솜타기, 고치말기와 실잣기까지의 과정이 반복되어 열거되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 후 베를 짜는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는 분이 많지 않았다. 구경은 했지만 베틀을 직접 돌리지 않았다는 것은 일제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직기들도 사용되었고, 실을 파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에서 베틀의 사용이 오래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제직기 로는 과거 부터 사용하던 씨앗이, 솜활, 베틀), 말대(고치말이), 물레 등이 있다.< 씨앗기 > 출처 : 네이버 블로그왼쪽 사진은 씨앗기 혹은 씨아로 불리는 기구로써, 목화송이는 씨아에 넣어 씨를 빼는데 사용된다. 씨앗기 과정은 목화송이를 씨아에 넣고 손으로 돌리면 왼쪽축 밑에 소라 껍데기같이 말린 이빨이 있어 서로 반대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솜은 가락사이로 빠져 앞으로 나오고, 씨는 뒤로 떨어지게 된다. 씨를 뺀 솜은 이른 새벽에 이슬을 맞혀가며 땅에 깔아 막대로 두들겨 알맞게 녹인다.< 솜활 > 출처 : 네이버 블로그솜활, 또는 활대라고 하는 기구로, 한손으로 활을 잡고 활끈 주의에 솜이 닿도록 하여 잡은 활끈으로 활줄을 걸어당겨 진동을 주면 활끈이 규칙적으로 진동을 일으키면서 솜에 붙어있는 씨앗, 껍질 등의 잡물을 떨어 뜨리면서 솜이 부드럽게 피어오르게 된다. 이 과정을 솜타기라고 한다. 여기에 쓰이는 활은 대나무를 휘어서 만들고, 활줄은 실에다 밀을먹여 만든것이므로 줄이 매끈매끈하여 솜이 퍼지는 동시에 쉽게 떨어진다고 한다.< 수수대와 말판 > 출처 : 네이버 블로그씨를 빼서 활로 탄 솜은 말판에다 놓고 막대로 비벼말아 면통을 만드는데, 이것을 고치말기라 한다. 이때 말대는 수수대의 끝 줄기를 잘라 쪼개서 껍질을 벗겨 만든 것으로 굵기는 1cm이고, 길이는 3~4cm정도이다. 또한 말판은 솜을 쉽게 말 수 있도록 표면이 매끄럽고 반반한 것이면 어느 것이든 가능한이 되면 누에가 알을 낳는데, 알을 모아서 종이에 모아 한 장에 얼마씩 가격을 매겨 팔았다고 한다. 누에고치를 집에서 잠업할 경우는 알이 까질 때까지 종이에다가 보관을 한다. 뽕잎이 나올 때쯤 되면 누에의 성충이 나오는데 뽕잎을 먹고 자라면서 번데기가 되어간다. 번데기가 된 상태에서 하얀 고치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이용하여 실을 만든다. 이것을 명주실이라고 한다. 명주실을 베로 짜면 그것이 견이 된다. 견은 고급 옷감이었다. 견은 따뜻한 옷감이라 겨울에 많이 입었다고 한다. 고급 옷감 즉, 실크라고도 하였는데 시집갈 딸을 위해서 명주 이불을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또한 누에 잠업은 일제강점기부터 60~70년대까지 장려되어왔었다고 한다.Ⅱ-2 마목포에서는 삼을 재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여름에는 모시옷을 입어야 했기 때문에 사온 것인지, 직접 짰던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 했다.< 그 때 처녀때 만들어가꼬 내가 짜가꼬 인자 그놈 삶아서 빨아서 삶아서 빨아서 널어갖고 하얗게 너러 또 끓여서 다듬어 갖고 옷을 해 입제. 필을 팔았제. 고놈 짜서 필로 팔아. 스무자가 한 끗이거든? 스무자를 딱 짜서 끊어가지고 베틀에서 끊어. 그놈을 인자 삶아서 인자 옷 해 입을라믄 발해고 풀하고 그래서 입고. 그란디 옷을 하나 맨들라믄은, 여간 힘들어, 보통 한달, 두달 그러고 걸리제. 여름에 삼베같은 거 있잖어. 고런 것은 공력이 무진장 많이 들어. 그 당시에는 검정물이라고 물감이 있어, 천에다가 들이는 물감이여. 색색이 물감을 사다가 옷에 물들이고, 옷감에 물들일 때는 쪽 나무라고 있어, 쪽 나무를 물을 우려가지고 담그면 옥색이 되고 그랬어. - 유달동, 김동남 85세 >과거 해남에서 살았다가 현재는 목포시 유달동에 사는 김동남씨는 처녀 때 무렵 16살 때 목화 재배와 면을 짰고, 견을 했다고 한다. 마는 대마를 했는데 삼을 직접 수확했었다고 한다. 삼을 찌는데 가마솥을 이용했다. 가마솥을 짚으로 덮어 높이 쌓아 삼을 쪘다고 한다. 이 때 남자들은 짚을 이을 때 모두 모다.
    인문/어학| 2010.12.12| 20페이지| 1,000원| 조회(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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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도관광과 _ 지역주민
    증도관광과 지역주민 관광의 대상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과목명 : 관광과 문화 발표일자 : 2010 년 11 월 12 일서론 및 총괄 1. 연구목적 및 배경 2. 조사지 선정과 조사방법 3. 엘도라도와 주민들과 관계 - 지역주민의 내부갈등 - 지역주민과 외부인의 갈등 4. 맺음말조사지 선정과 조사방법 조사지 선정 2009 년 문화인류학 심포지엄 시간이 쉬어가는 섬 증도이야기 - 증도의 생태환경 그리고 문화 - 2009 년 문화와 경제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의 복식문화를 통해서 본 경제 행위조사방법 신안군 증도 문화해설사 이종화 선생님과의 인터뷰 2010 년 11 월 1 일 구두약속 2010 년 11 월 7 일 인터뷰증도의 일반적 배경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섬 : 고립성 연륙교를 건설하여 섬 관광투어 이러한 섬으로 주목받고 있는 관광지 슬로시티 , 태평염전 , 엘도라도지역주민의 내부갈등 증도는 대부분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마을의 구성원들 대다수 노인들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 일부분 민박집을 운영하는 사람도 일부분 엘도라도가 들어서면서 관광객이 많아질 것을 예상 대부분 주민들 대부분이 찬성토지로 인한 갈등 토지를 매입 함에 있어서 주민들과 갈등 본래 엘도라도 리조트가 있는 곳에는 해태공장이 있었음 ( 안문대 ) 팔기 싫었는데 대다수 주민들이 찬성하는 바람에 저렴하게 팔았다 자신이 피해자 주장 다른 주민들은 뒷돈을 받았다 하면서 주민들과의 갈등을 야기고용기회의 확대 측면 청소하시는 분 2 명 지역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한명도 없음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는것 주민소득 증대 , 고용기회의 확대 주민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 (9 월 10 일 수업내용 )순비기 박물관 순비기 염색회에서 출발 순비기 박물관 사업권을 군수가 초도순시때 약속 사업권을 따냈으나 같이 했던 사람들 중 높은 공직에 있는 사람과 연결된 사람이 이권을 가로 챔 그 와중에 순비기박물관에 화재가 남 초기 순비기 염색회를 결성한 사람들이 방화범이라 의심을 받음현재 순비기 박물관에선 순비기 염색제품 ( 스카프 , 배게 등 ) 보다 다른 특산품 , 천일염 , 김 등 돈이 되는 제품을 판매 때문에 순비기 천연염색하는 분들은 순비기 박물관에 물건을 납품하지 않는 상황 이종화 선생님 말을 빌리자면 순비기 박물관이면 순비기 관련 제품을 팔아야 하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와서 엉뚱하게 운영되고 있다 .골프장 투자유치 문제 - 리조트엔 골프장이 있어야 한다 주민 대부분이 밭농사를 짓는 상황 섬이라는 지역에서 약을 뿌리면 그 약이 비가 오거나 태풍등으로 인해 밭으로 급속하게 전파 작물들이 죽어버리는 결과 주민들의 반발슬로시티와 증도 순비기박물관 , 풀장 사업등 개인들에게 사업권을 내어주는 것 또한 문제 지역민들은 투자할 여력이 없음 전부다 외부인들이 투자 투자하기 좋은 곳 가진 사람 일부는 버티고 있긴 하지만 임야등 절대농지나 , 문중의 땅을 제외하곤 대부분 토지가 거래가 됨지역주민과 외부인의 갈등 물에 의한 갈등 섬 지역에서의 물 부족은 고질적 문제 주민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대상 그들의 소소한 이야기는 증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증도의 물 현황 생활용수 다수가 상수도 이용 농업용수 수로 , 저수지 , 방죽 , 등 상업 · 공업용수 해태공장 , 엘도라도리조트 , 태평염전 공장 , 식당 , 등으로 물 소비량이 많은 편이미지와 엘도라도 리조트가 처음에 들어와서 해수온천 , 민물이 발견되었다고 함 엘도라도 관광객들이 물을 무분별하게 사용 일주일만에 주민들 제한 급수 관광객들이 섬에서 물이 이렇게 좋다고 입소문 그러나 주민들이 제한급수에 걸리고 엘도라도 역시 지하수를 끌어다 쓰니까 물이 안좋다고 입소문 엘도라도 내부가 많이 부식이 되었다고 함 이미지로 형성된 엘도라도와 실제모습과 상충 되는 모습한옥단지 조성 문제 투기성이 짙은 관광 사업 한옥 단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외부인 사업권을 따낸 사람도 외부인 주변 길을 잘 내기 위해 주민들과 한옥단지땅을 소유 한 사람들과의 마찰쓰레기 문제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는 관광객들 증도발전 협의회 등이 있으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 내부조직이 결여와 관련 깊음맺음 말 엘도라도와 증도대교의 건설은 슬로시티 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우려할 만한 상황 육지연결은 주민들에게 굉장한 편의 ( 물류비용 감소 , 인터넷 100 메가 등 ) 섬 주민들 보다 많은 차량이 다녀감 섬주민들 2000 여명 2010 년 1 월부터 2010 년 5 월 31 일 기준 누적 차량 3700 만여대관광객이 늘어서 소득을 얻는 사람은 일부분 관광객들이 버리는 쓰레기가 주민들의 밭이나 저수지등에 무단 투기 증도내부의 사정을 외부인에게 알리기 꺼리는 모습 슬로푸드와 연결해서 고향식당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려 했으나 거절여러 인증 샷지도 터미널 증도대교 안에서버스 정류장 (2 시간 버스 기다림 ) 짱뚱어 탕이종화 선생님 인증 샷 ( 둘다 인상이 썩 ,,)감사합니다 질문은 5 분 쉬고 받겠습니다 .{nameOfApplication=Show}
    인문/어학| 2010.12.05| 25페이지| 1,000원| 조회(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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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의 목화
    인류학 특강 2목차Ⅰ. 조사를 들어가며 Ⅱ. 면의 재배와 매매 Ⅲ. 과거의 건물 이야기Ⅰ. 조사를 들어가며 (조사 지역)조사 지역Ⅰ. 조사를 들어가며 (조사 일정)1차 조사 조사일시 : 2010년 11월 3일 조사지역 : 목포시 목포 역 주변과 선창일대 (만호동, 동명동 일대) 조사내용 : 인터뷰 대상자 선정 및 현장조사 2차 조사 조사일시 : 2010년 11월 21일 조사지역 : 동명동, 만호동, 축복동, 유달동 일대 조사내용 : 조사지역 현장조사Ⅰ. 조사를 들어가며 (조사 일정)3차 조사 조사일시 : 2010년 11월 23일 조사지역 : 용해동, 남교동,죽동 일대 조사내용 : 노인회관을 중심으로 인터뷰 조사 4차 조사 조사일시 : 2010년 11월 27일 조사지역 : 서산동, 온금동 일대 조사내용 : 조사지역 사진 촬영Ⅰ. 조사를 들어가며 (질 문 지)1. 섬유의 종류- 면, 마, 견 2. 재배 (생산) 을 어떻게? 3. 제사 과정은 어떻게? 4. 제사도구는? (일제시대 전과, 후 , 해방 후) 5. 씨를 뺄 때 씨아기를 사용? 6. 씨를 안 빼고 목화솜만 가져갔나? 7. 만약 목화솜만 가져갔다면., 개인에게 팔아서 보냈나 , 아니면 조면공장, 조합에다 가져가서 팔았는가? 8. 솜을 팔 때 그 등급을 누가 매겼고,(조선인 또는 이본인) 어떻게 값을 매겼는가? 9. 제직과정은? 10. 제직 도구는? 11. 면 재배 소는 어디쯤에 있었는가? 12. 조면공장은 어디쯤에 있었는가? 13. 가마니를 이용해 삼찌는 방법등을 묻기 14. 족답직기의 이용과 언제 들어오게 되었는지 15. 씨아방을 이용했는가? 16. 왜 누에의 보급과, 왜 누에 재배과정 17. 유통과정에 대해 묻기 18. 일제 강점기 유통인 면작조합 19. 공장제와 기계제가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들어왔는지Ⅱ. 면의 재배와 매매( 인 터 뷰 )임귀진 할머니 ( 73세 ) 목화를 직접 재배 , 공동이 아닌 개인밭 샛골 물레 , 족답직기 , 도투레 사용 50년대 후반 까지 목화 재배 60년대 나일론 들어고, 밭에다. 걸 따서, 씨앗에다 앗아갖고, 탔제. 조사갖고, 널어. 마당에다가. 그래가지고 물레에다 조사. 인자 또 도투마리가 있어. 그래가지고 내어서 도투레에다가 감아. 베도 그걸로 했어. 도투레로. 베를 삶아. 삶아가지고 했어. 감아가지고 삶았제. 여자들이 그거를 또 짰어. 우리들도 다 시집가서도 했어. 그렇게 해서 옷 해 입고 살았어..( 인 터 뷰 )김동남 할머니 ( 85세 ) 목화 직조 과정 자세히 설명 씨아방에 기게를 도입했다는 이야기 일제시대 씨아방 및 재배를 안함 천이 만들어져서 들어온 이 후 직조 안함 염색 – 검정물 , 쪽나무 , 억새잎 사용 모시는 윗 지방에서 재배 베를 해서 장터에서 판매 , 필로 팜 솜만 따로 모아 파는 것은 차대기로 해서 배로 날라서 팜 인터뷰 내용 베를 해가지고 장터에서 팔아. 팔아서 돈을 해 가지고 전답을 사서 먹고 필로 팔았지.. 무자가 한 끗이거든. 베틀에다 짜서 그것을 끊어가지고 그놈을 이제 삶아서 다래고 풀해서 만들어서 팔았지. 솜만 따로 모아서 파는 것도 있었지. 판매라고 이렇게 넓은 다른 공간으로 해서. 차대기에다가 목화를 해서 배로 날라서 팔기도 했지. 인제 장터에다가 가지고 가서 팔제. 살 사람이 사가제. 생산한 사람은 가서 팔고… .( 인 터 뷰 )정오현 할아버지 ( 83세 ) 실 만들기 과정 기계화 도입으로 사라짐 먹을거리가 없어서 다래를 먹기위해 목화 재배 고관들의 착취를 기억 안동지역 모시베를 이용 모시옷 만듬 오일장을 통한 실 판매 시장 또는 중개상인에게 판매 중게상인은 공판제에 판매 개인 판매 50원 , 중개상인 40원 팜 등급을 제멋대로 매겨서 헐값에 사감 시장은 남교동 , 중앙시장 (중앙공설시장) 인터뷰 내용 좋은데도 나쁘다 하고 그러면서 40원이라고 그랬어. 그런데 살라면 팔아야지 어째. 그 당시 이녁이 소작인들이 가격을 제대로 못 받고 판거지. 제대로 팔라면 60원에 받는디 그 때, 그러니깐 중개상인들만 먹고 살만했을 것이여. 그 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깐….( 인 터 뷰 )ooo일대 근무 목화는 씨는 씨대로 솜은 솜대로 내서 공장 배분 – 족답기계 사용 솜을 가지고 와서 목포 농협에서 저울에 달아 배부 목화꽃은 빨강색과 하얀색이 나옴 해방전 후 목화 재배 및 공장 가동 목포지역 목화 재배지 X , 다른지역에서 가져옴 목화는 시골에서 사가지고 옴 인터뷰 내용 해방된 뒤로도 목화를 심었어. 육이오 전에. 육이오 후로도 목화를 심고 공장도 했어. 목포에서 심었는지는 모르고 시골에서 모아가지고 공장으로. 공장사람들이 사와. 그래가지고 돌려서 직물공장으로 보냈어. 여기 당목공장이 있었어. 만호동에. 당목공장이 베짜는데. 면화공장이 솜 공장이지…( 인 터 뷰 )문익주 할아버지 ( 76세) 인수당 한약방 광풍솜집, 복면옥, 북교솜집 등이 목포시에 있었음. 공출에서 공판으로 바뀌었음. 염색료 파는 곳의 위치를 알려줌. 누에잠업은 60~70년대에 장려. 인터뷰 내용 전라도에서 나오는 쌀을 옮기니깐 철도가 1호, 부산으로 가는 길이 국도 2호. 곡물이 제일 중요한데 전기도 먼저 들어오게 하고, 광주 호남, 이쪽에서는 대전보다도 빨리 된거야. 목포보다 광주는 더 늦게 된거지. 항구가 없으니깐. 소금은 여기 뻘에서 나오니깐. 쌀도. 목화도 문익점이 가져온 거. 여기 충무도가 처음 재배지였으니깐. 산청이 아니라 여기가 처음 재배지야… 섬인데 갯바람을 맞으면서 남쪽 따수운데가 주로 늦게까지 목화가 잘 벌어져서 피어나니깐 목화꽃이 노래도 있지만은, 여기가 토지가 좋았나봐…Ⅱ. 면의 재배와 매매면의 재배 시골지역 면의 재배 - 옷을 만들어 입기 위해 , 다래를 먹기 위해 목화꽃은 하얀색과 빨간색이 동시에 나옴 육지면의 강제화 면의 염색은 검정물 , 쪽나무 , 억새잎 등을 사용 도구들의 기계화 해방 이전과 이후 면의 재배는 지속 - 60년대 서양옷감이 들어 오면서 면의 재배는 사라짐Ⅱ. 면의 재배와 매매면의 매매 오일장을 통한 실 , 베필 판매 중앙시장(중앙공설시장) , 남교동시장 종가집에서 만들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일반 서민들은 중개상인을 통하여 판매 60원40원 정도에 거래가 되었다 - 먹고 살기 위해 40원에 판매 넓은 공간에 차대기로 솜을 모아 배로 날라서 판매Ⅲ. 과거의 건물 이야기만호동 , 과거 광품솜집과거 광풍솜집이 있던 공장 터 광품솜집은 면화공장으로, 이불 솜을 만들던 공장이다. 이불 솜 공장으로 씨와 솜을 분리하여 씨는 면실유공장으로 보냈다. 그리고 이 곳은 70년대까지 솜집으로 있었으나, 그 이후 90년대까지는 윤락업소의 숙박시설이었다. 당시 큰 화재가 있었다. 그래서 현재까지 사용을 안 하고 있었다가 슬레이트가 쳐지고 철거대상이 되었다. 현재 철거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후에 주차장 또는 다른 건물이 지어질 예정이다.광동 현 쌍방울상회, 과거 복면옥현재 광동에 위치하고 있는 쌍방울 상회이다. 이 곳은 인수당 한약방 앞에서 위로 조금만 오르면 볼 수 있다. 예전 면 공장인 복면옥이 있었다. 이 근처가 과거 목포의 원도심으로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고, 상권이 발달했던 곳이다. 그로 인해 복면옥은 목포시에서 손 꼽히는 큰 공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죽동 , 과거 북교 솜집북교초등학교 가는 도중에 화신약국 앞에 있는 과거 북교솜집이다. 앞에 있는 화신약국에서 가르쳐준 곳으로, 오래전부터 있었던 솜공장이라고 한다. 굴뚝이 아직까지도 보이고, 그 뒤 편에는 목화를 모아두었던 창고로 추정되는 낡은 창고 건물이 바짝 붙어 있다.KT 전화국 앞, 과거 면의 집산 창고현재 ABC볼링장이 된지 30년째이다. 사장님은 외지 사람으로 이 건물의 과거사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전부터도 볼링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수당 한약방에서 가르쳐준 곳으로서, 전화국 앞에 가장 큰 면화 집산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100평의 건물로 부지가 굉장히 크고 현재는 리모델링 되어있지만 뒤 편으로는 오래된 건물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인수당 한약방 맞은 편, 염색집인수당 한약방, 문익주씨에 의하면 이 건물은 염색료를 팔던 곳이었다고 한다. 고창으로 이사를 가고 그곳 국회의원까지 했었던 요재균씨가 이 염색집 쪽물, 억새, 치자를 이용해서 물을 들였지만 일제강점기때 많은 물감이 들어와 그 당시부터 색깔이 많이 다양해졌다고 한다. 현재는 건물은 임대로 나와있고, 뒤에는 가정집으로 사용하고 있다.전화국 앞, 과거 정미소 목화 집산장전화국 앞, 과거 정미소 목화 집산장과거 일제강점기 때 정미소였다고 한다. 목포지 장추상 선생님 말에 따르면, 정미소라고는 알려졌지만 목화도 같이 다루던 곳으로써 집산된 곡물과 목화를 함께 보관했다고 한다. 여기서 보관된 것을 다시 배분하여 공장으로 나누어 주었고, 일본이 가져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윤락업소,노래홀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사교댄스장, 댄스홀로 이용되고 있다. 그 앞에는 철을 모으던 곳이지만 현재는 철거되었다.축복동, 수협 옆 창고현재 축복동 평화세탁소 앞에 있는 창고들이다. 이 창고들은 선창가를 가기 전 축복동 수협 과 수산시장이 있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젓갈창고로도 이용되었었는데, 그 전 과거 일제시대 때는 말뚝을 박고 목화를 집산, 쌀 집산 창고로 이용되었다. 이 곳은 현재 일본이 말뚝 박은 곳으로 유명하여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 뒤쪽으로는 현재 가정집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유동, 구 초원호텔 앞 목화창고구 초원호텔 앞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 많은 창고가 이 일대에 있었지만, 일제의 잔재라 해서 많이 철거되고 현재는 이 건물 하나만 남아있다. 이 건물은 일본의 잔재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역사 그 자체로 인식되어 반대로 보호하자는 측면이 나와 지금은 보호되고 있다. 이 건물만 울타리로 쳐져 있고, 자물쇠로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남교동 공설시장과거 일제감정기 때 공설시장이 있던 자리이다. 여기서 과거 공판매가 실시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장의 위, 안 쪽에는 과거 오래된 창고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 창고들이 과거에 일본에서 공판소로 쓰던 건물로 추정된다. 일본식 건물로 지어졌고, 이 안 쪽은 현재도 그 상태로 장사를 하고 있다.( 공 장 터 )( 부 록 )( 부 록 )감 사 }
    인문/어학| 2010.12.05| 29페이지| 1,000원| 조회(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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