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27
검색어 입력폼
  • 창립(발기인)총회 회의록
    창립(발기인)총회 회의록1. 회의일시:2. 회의장소:3. 회의안건: 재단법인 00000 관한 건, 설립취지 채택의 건, 정관 승인의 건, 재산 및 출연내용의 건, 이사 및 감사 선 임의 건, 이사장 선임의 건, 사업계획 및예산 관련의 건, 사무소 설치장소 결정의 건,4. 출석회원(발기인): 명5. 결석회원(발기인): 명6. 회의내용: 발기인 대표 000은 법정수에 달하는 회원이 출석하였으므로 본 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알리고 회의 진행상 의장을 선임 할 것을 구한 바, 회원 전원은 일치된 의견으로 발기인 대표를 위장으로 선임한 즉, 동인은 즉석에서 그 취임을 승낙하고 개회를 선언한 후 다음 의안을 부의하고 심의를 구한다.제 1 호 의안; 재단법인 0000000에 관한 건의장은 창립에서 설립까지의 경과보고서에 기하여 보고를 하고 일동 승인 가결하다.제 2 호 의안; 설립취지 채택의 건의장은 설립취지서를 낭독하여 이의 승인을 요구한 즉 일동 승인 가 결하다.제 3 호 의안; 정관 승인의 건의장은 정관을 낭독하여 이의 승인을 요구한 즉 일동 승인 가결하다.제 4 호 의안; 재산 및 출연내용에 관한 심의의 건의장은 기부자에 의해 무상 출연한 평가액 00각각 기본재산과 보통재산으로 한다는 내용을 설명하고 그 가부를 물은 바, 발기인 전원이 이의 없이 찬성하여 이를 승인 가결하다.제 5 호 의안; 이사 및 감사 선임의 건의장은 이사, 감사를 선임하겠다고 말하고 그 선임방법에 대하여 의견을 구한바, 무기명 비밀투표로 선출하자는 의견이 일치되어 즉시 투표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이 이사와 감사가 선출되다.이 사 000이 사 000이 사 000이 사 000감 사 000감 사 000제 6 호 의안; 이사장 선임의 건의장은 이사장을 선임 하겠다고 말하고 그 선임 방법에 대하여 의견을 구한 바, 무기명 비밀투표로 선출하자는 의견이 일치되어 즉시 투표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이 이사장이 선출되다.이 사 장 0 0 0제 7 호 의안; 사업계획 및 예산, 회비관련 심의의 건의장은 같이 법인설립을 신청하오니 허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년 월 일신청인 (서명 또는 도장)귀하구비서류1. 설립발기인의 성명ㆍ주소ㆍ약력을 기재한 서류 1부.2. 정관 1부.수 수 료없 음3. 기본재산과 보통재산으로 구분하여 작성한 재산목록 1부.4. 사업개시예정연월일과 당해사업연도분의 사업계획서 및 수지예산서 1부.5. 임원취임예정자의 취임승낙서(인감증명서 첨부),이력서(반명함판 사진첨부).6. 창립총회회의록(설립발인이 법인인 경우에는 법인설립에 관한 의사의 결정을 증명하는 서류)1부.설 립 취 지 서재단법인 000000000 발기인 대표 0 0 0 (날인 또는 서명)임원취임 예정자 인적사항직 위성 명주민등록번 호주 소주요약력임기이사김철수( )545454-5454554adsdadasdsdsdadasda(우편번호:123-123)● sdadadadasd● adasdsadasd● adasdasdasda4년작성자: 재단법인 0000 발기인 대표 0 0 0 (날인 또는 서명)발기인 성명 ?주소?약력성 명주민등록번 호주 소주요약력연락처김철수( )545454-5454554adsdadasdsdsdadasda(우편번호:123-123)● sdadadadasd● adasdsadasd● adasdasdasda456-5454작성자: 재단법인 0000 발기인 대표 0 0 0 (날인 또는 서명)재산출연증서(기부승낙서)재단법인 0000000000000 설립대표자 귀하본인이 소유한 다음 재산을 새로 설립하는 귀 0000000 법인에 출연하고자 합니다.2012년 0월 00일위 기부자 (인)※ 인감증명서 첨부종별수량금액비고현금1재 산 총 괄 표재산구분수량평가액설립년도수입액취득원인비고기본재산현 금기자재주 식사 채건 물토 지답 지대 지기업(회사)채계보통재산현 금합 계작성자: 재단법인 0000 발기인 대표 0 0 0 (날인 또는 서명)기 본 재 산 목 록(2012년도)종 별 (용도별)수 량 (평)평 가 액 (원)비 고현금1계작성자: 재단법인 0000 발기인 대표 0 0 0 (날인 또는 서명)보통(운영) 재단법인 0000 발기인 대표 0 0 0 (날인 또는 서명)사업수지예산서- 2012년도 (단위: 원)수 입지 출구 분금 액구 분금 액① 회 비① 경상비인건비운영비(사무실 보증금 포함)소 계소 계② 출연금기본재산② 퇴직 적립금③ 법인세보통재산④ 목 적사업비기술개발 및 활용 연구사업소 계활용연구③ 과실소득④ 수 익사 업조사용역세미나시스템개발 연구기술교육소계⑤ 기본재산 편입액소 계⑤ 전 기이월액⑥ 차 기이월액목적사업준비금전기당기이월잉여금소 계소 계⑥ 법인세 환급액합 계0합 계0작성자: 재단법인 0000 발기인 대표 0 0 0 (날인 또는 서명)정 관재단법인 000000000제 1 장 총 칙제1조 (명 칭) 본 법인의 명칭은 “재단법인 00000000”(이하“법인”이라 한다.) 이라한다.제2조 (소재지)1. 법인의 사무소는 0000 에 둔다.제3조 (목 적) 법인은 -를목적으로 한다.제4조(사 업) 법인은 제 3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사업을 수행한다.1. 조사2. 연구3. 조사 및 연구개발4. 연구5. 조사 및 연구6. 모니터링7. 연구서 발간8. 교육 및 지원사업9. 지원사업10. 지원 및 관련사업11. 기타 법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업제5조(수익사업) 법인은 제 4조에 규정한 목적사업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그 본질에 반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수익사업을 할 수 있다.제 2 장 임 원제6조(임원의 종류와 정수) 법인은 다음과 같이 임원을 둔다.1. 이사 5인 이상 10인 이내( 이사장 1인 포함)2. 감사 2인제7조(임원의 선임)1. 임원은 이사회에서 선출한다.2. 임원의 보선은 결원이 발생한 날로부터 2개월 이내에 하여야 한다.3. 새로운 임원의 선출은 임기만료 2개월 전까지 하여야 한다.제8조(임원의 해임) 임원이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때에는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해임할 수 있다.1. 법인의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2. 임원간의 분쟁?회계부정 또는 부당행위3.법인의 업무를 방해하는 행위제9조(임다.제14조(결격 사유)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법인의 임원이 될 수 없다.1. 미성년자2. 금치산자 또는 한정치산자3. 파산자로서 복권되지 아니한 자4. 금고 이상의 형을 받고 집행이 종료되거나 집행을 받지 아니 하기로 확정된 후 3년이 경과되지 아니한 자제15(직 무)1. 이사장은 법인을 대표하고 업무를 총괄하여 이사회의 의장이 된다.2. 이사는 이사회에 출석하여 업무를 의결하며 이사회 또는 이사장으로부터 위임받은 사항을 처리한다.3. 감사는 다음의 직무를 행한다.1) 본 법인의 재산상황을 감사하는 일2) 이사회의 운영과 그 업무에 관한 사항을 감사하는 일3) 제 1호와 제2호의 감사 결과 부정 또는 부당한 점이 있음을 발견한 때에는 이사회의 그 시정을 요구하는 일4) 제 3호의 보고를 하기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이사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일5) 본 법인의 재산 상황 또는 총회와 이사회의 운영과 그 업무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이사장에게 또는 이사회에 출석하여 의견을 진술하는 일제 3 장 이사회제 16조(구성및 소집)1. 이사회는 이사장과 이사로 구성한다.2. 이사회는 정기이사회와 임시이사회로 구분하며, 이사장이 이를 소집한다.3. 정기 이사회는 매 회계연도 개시 1개월 전까지 소집하며, 임시이사회는 이사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 소집한다.4. 이사회를 소집하고자 할 때에는 회의 목적, 안건, 일시 및 장소를 문서로 명기하여 회의 개최 7일전에 구성원에게 통지하여야 한다. 다만, 긴급을 요하는 사유가 있을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제17조(이사회 소집의 특례)1. 이사장은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소집요구가 있을 때에는 그 소집요구일로부터 20일 이내에 이사회를 소집하여야 한다.1) 재적이사 과반수가 회의의 목적을 제시하여 소집을 요구할 때2) 제 15조3항4호의 규정에 의하여 감사가 소집을 요구할 때2. 이사회 소집권자가 궐위되거나 이를 기피함으로써 7일 이상 이사회 소집이 불가능 할 때에는 재적이사 과반수의 찬성으로 이사회를 소집할 수 있다. 이사장이 부의하는 사항제21조(의결권의 제한) 임원이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때에는 그 의결에 참여하지 못한다.1. 임원의 선출 및 해임에 있어 자신에 관한 사항을 의결한 때2. 금전 및 재산의 수수 또는 소송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이사 자신과 법인의 이해가 상반될 때제22조(회의록)1. 이사회의 의사에 관하여는 의사록을 작성하여야 한다.2. 의사록이는 의사의 경과, 요령 및 결과를 기재하고 의장 및 출석한 이사의 서명으로 주된 사무소에 비치하여야 한다.제 4 장 재산 및 회계제23조(재산의구분)1. 법인의 재산은 기본재산과 보통재산으로 구분하여 관리한다. 기본재산의 목록은 별지 1과 같다.2.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재산은 기본재산으로 하고 기본재산 이외의 재산은 보통재산으로 한다.1) 법인의 목적 사업 수행에 관계되는 부동산 또는 동산으로서 기본 재산으로 출연한 재산2) 기부에 의하거나 기타 무상으로 취득한 재산. 다만, 기부목적에 비추어 기본재산으로 하기 곤란하여00000장에 승인을 얻은 것은 예외로 한다.3) 이사회에서 결의에 의하여 기본재산에 편입된 재산제24조(재산의 관리) 법인의 기본재산을 매도?증여?임대?교환 또는 용도변경하거나 담보로 제공하고자 할 때와 기본재산에 관한 의무의 부담 및 권리의 포기(이하“처분”이라 한다)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제 38조에 의한 정관변경 절차를 거쳐야 한다.제25조(재원조달) 이 법인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다음 각 호의 재원으로 충당한다.1. 기본재산 및 운영재산으로부터 생기는 과실2. 후원금3. 기타 수입금제26조(차입금) 법인이 목적사업을 위하여 장기차입을 하고자 할 때에는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제27조(재무?회계운영의 기본원칙) 법인의 재무?회계는 설립목적에 따라 건전하게 운영하여야 한다.제28조(회계연도) 법인의 사업 및 회계연도는 매년 정부의 회계연도인 1월 1일부터 12월 31일 까지로 한다.제29조(예산편성) 법인의 세입 세출 예산과 사업계획은 매 회계연도 개시 1개월 전까지 편성하여
    기타| 2012.05.20| 27페이지| 2,000원| 조회(2,740)
    미리보기
  • 운보(김기창)의 생애와 시기별 작품
    Ⅰ. 들어가며Ⅱ. 본문제 1기. 일본화적 사실화의 시기제 2기. 반추상화 시기제 3기. 추상화 시기제 4기. 바보산수화 시기 (민화적 화풍)제 5기. 심상의 시기 (점·선 시리즈)Ⅲ. 나오며Ⅰ. 들어가며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한국 미술계의 가교적인 역할을 해온 작가 운보 김기창의 작품 경향에 따른 시기 분석을 통해 그의 예술관과 시대성을 반영한 작품을 알아보고자 한다.운보 김기창의 작품은 1930년 초기작에서부터 1990년대 후반의 작품에 이르기 까지 매우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변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해 나가려는 작가의 끊임없는 열정과 예술의지를 드러낸다.운보는 또한 청각 장애를 극복한 예술인으로서 그의 장애를 예술과 청각 장애인의 복지사업으로 승화시켜 청각장애인 복지기관을 최초로 설립한 인물이기도 한다.무엇보다 운보의 예술에서의 가장 큰 특징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그의 실험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초기의 그의 작품에서는 스승인 이당 김은호의 영향과 일본화의 잔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1945년 해방이후, 운보는김은호의 예술적 영역을 탈피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로 매진하여 계속적인 실험을 거듭한다. 운보는 쓰러지기 전까지 붓을 놓지 않고 침묵 속에서 살아생전 1만 5천여 점이라는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긴 점에서 그의 예술적 표현의 재료가 고갈되지 않고 늘 생각하며, 변화하는 그의 역동적인 인생관을 엿 볼 수 있다.운보 김기창의 생애와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보며 그의 업적과 영양력, 그리고 미술사적 위상을 되짚어보자Ⅱ.본문제 1기. 일본화적 사실화의 시기제 1기 운보의 작품경향은 일본화적 사실화 시기이다.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서 전통 방법을 배우기 시작한 1931년에서부터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단의 신예로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로 본다. 화단에 데뷔해 1945년 해방되기까지 십 수 년은 물론 한 사람의 작가로서의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하고는 있지만 커다란 시각에서 볼 때는 아직도 스승의 다부진 인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치밀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한 안정된 화면 전개로서 운보의 회화의 경지가 어느 선에 도달하고 있는지를 입증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었다.20세에 접어든 운보 김기창은 선전에서 12회부터 15회 까지 연달아 입선하고 24세 부터는 제 16회에서 19회의 선전에 연속으로 특선을 하여, 10회 선전 입선이후 10년 만에 드디어 심사를 면제받는 추천작가로서 화단에 등단하게 된다.운보의 생애에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해준 작품 은 제16회 선전에서 특선 겸 최고상인 창덕궁 상을 받았다. 할머니를 중심으로 세소녀와 어린동자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으로 대단히 가정적이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작품이다. 우측 화면 아래쪽에는 어머니가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 구도는 원형구도로 매우 정서적이다. 그 당시 신문에 실은 그의 소견을 보면 “이번은 제가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하였기에 지나간 어린시절의 기억을 그리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여 그 작품 속에 나오는 동자는 바로 운보 자신임의 어릴 적 모습이며 작품 내용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하지만 제1기로 잡은 그의 작품경향은 현실을 반영하는 작가 의식이나 그만의 예술관은 보이지 않고 색채나 세필적인 기교에서 일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김기창이 지니고 있는 예술적 의지, 어떤 소재나 표현도 자유롭게 구현해 낼 수 있는 장인적 요소가 이 같은 과정 속에 터득되었기 때문에 이후 일본의 영향과 스승의 예술적 영역을 탈피해 자신의 독자적 세계로 매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제 2기. 반추상화 시기김기창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일정한 카테고리와 끊임없이 관념화 할 수 있는 예술적 범주를 부단히 일탈하는 자유분방한 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기창의 왕성한 실험적 추이는 아마도 해방이후로 잡아 볼 수 있을 것이다과거 일제 치하의 조선미술전람회의 작가라는 이유로 친일작가로 매도되어 한때 자중해야했던 그에게 1945년의 8.15해방은 그의 작품 활동은 따라서 새로운 출발을 갖는 어떤 지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950년대 이르러서 운보는 당시 서양화단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서구 사조인 입체주의나 표현주의의 영향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함에 있어 적절히 이용하였다.운보작품의 제 2기인 반추상화 시기는 6.25동란과 피난시절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나타난 입체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등이 있다. 1950년대 초반에 제작된 일련의 작품 내용은 피난지 군산에서 제작한 것으로 피난시절의 가난한 일상이 모티브가 된 것이다. 길가에서 만나게 되는, 판자로 엮은 구멍가게, 사람이 모이는 장소엔 자주 등장하는 리어카의 노점상, 퇴락한 한옥의 한 모퉁이에 자리잡은 복덕방은 한 시대의 생생한 생활의 단면을 반영해 주는 내용들이다. 표현 방법에서도 해방이전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와는 다르게 단순하면서도 대상을 직선적으로 면을 분할하여 절제된 운필과 색채를 보여준다.그의 해방 후 작품에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변화의 특징 가운데 굵고 힘찬 선의 구성력을 먼저 들지 않을 수 없다. ,,등 일련의 풍속적인 내용의 그림들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굵고 힘찬 선조이다. 채색은 부분적으로 가미되었을 뿐 화면의 밀도는 강인한 선조의 탄력에서 기인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 김기창의 예술은 힘찬 선조에 의한 구성적 경향으로 더욱 풍부하게 전개되어 지고 있다.1951년 피난지 군산에서 제작 착수하기 시작해 2년 동안 그린 30점의 종교화인도 이시기의 작품들이다. 운보가 성화를 그리게 된 연유는 본래 어머니를 여의고 위로하던 한 선교사로부터 성화를 그려보라는 권유가 있었는데, 중국 일본 모두가 각기 자기 민족 고유의 방식으로 그린 성화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래서 운보 역시 줄곧 생각하다가, 실제 꿈속에서 예술의 성체를 대하고 예수의 일대기 중 중요한 장면을 한국적인 소재로 바꾸어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운보 또한 감리교 신자였고, 막대한 영향을 받은 어머니와 그의 스승 김은호 역시 장로교 신자여서 평소 딱딱한 맛을 주고 있다.김기창의 격정적인 운필의 구사는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다. 야생마의 격렬한 동세가 그대로 격정적인 국도로 나타나는 나 두 마리 황소가 싸우는 는 거대한 무게와 힘이 바로 표현을 대신해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시기에 그려진 역시 수백 마리의 참새를 화면 가득히 몰아놓아 아우성치는 참새 떼의 소용돌이는 운보 특유의 표현적 특징과 스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이다.제 2시기 반추상화 시기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운필과 여기에 어울리는 대상의 선택과 해석은 김기창 예술이 갖는 가장 본질적인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950년대와 1960년대는 작가로서의 왕성한 의욕과 자기세계로의 완성을 향해 치닫는 시기로 운보다운 세계의 여러 단면이 유감없이 발휘된 시기로 보아진다.제 3기. 추상화 시기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완전한 추상 작품이 나타나게 된다. 이시기에 운보와 우향의 왕성한 해외활동으로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미국에서의 부부 초대전, 유럽에서의 한국미술 순회전 출품 등 잇따른 해외전과 해외여행은 그의 예술의 또 다른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추상 화풍은 화선지를 구기거나 구긴 종이를 찍어 가는 방법으로 옛 이미지를 연상시며, 원, 면적인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 옛 선조들의 유산을 생각하면서 그 추상적 이미지들을 반영한 것으로 평소 한국의 전통적 소재들을 아끼고 애호하던 사상과 직결된다.이미지 연작이 보여주는 정적인 느낌에 비해 ,계열은 안으로부터 흘러넘치는 힘의 구성을 다시금 대하게 된다. 이들 작품들은 비록 분방한 표현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이미지 연작에 비하면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 단순한 심상에 머물지 않는 지시된 내용, 대상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꿈틀거리는 벌레의 모습이나 두 날개를 편 나비의 모습이나 비상하려는 이름 모를 새의 형태로 나타남은, 이들 대상성이 단순한 모티브로서의 선택이기보다는 하나의 심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이러한 관심은 내 것을 찾자는 움직임과 함께 민중의 의식 속에 높아져 갔으며 그것이 한국적일 때 더욱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김기창 예술 후반기에 가장 두드러진 변모의 양상은 이러한 민화에 대한 영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민화를 자신의 방법으로 변형해 내는 그림들을 김기창 자신은 ‘바보산수’라는 유머러스한 개념으로 이름 짓고 순수한 내면을 유감없이 드러내 놓고 있다. 1960년대 중반 미국 유학중 발병한 간암으로 아내 우향을 잃은 후 작품에 그의 모든 슬픔을 녹여버리는 듯 아니면 그의 아내 작업까지 대신하려는 듯 운보는 바보산수 장르를 일구어 나간다. 그 동안 화려한 그림들에 묻혔던 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낸 운보의 바보산수는 그의 삶의 모든 에너지를 보여준다.민화를 모티브로 하여 바보산수, 장생도, 꽃, 그리고 새 등의 시리즈를 선보이며 1975년부터 3년간 걸쳐 바보산수의 황금기를 이룬다.에 나오는 사슴이나 학의 표현은 간략하고 자유롭게 과장되어 있으며, 높은 산의 청색으로 덮인 면의 처리는 민화적인 약화로 처리되어 전통회화에서 볼 수 없는 운보만의 회화성이 돋보인다. 또한 학, 사슴 불로초, 소나무, 거북 등의 소재를 그림의 형상으로서가 아닌 글씨로 나타내어 전통회화의 현대성을 부각시켰다.1970년대 중반 조선조 민화에 대한 애정과 심취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바보산수’와 ‘바보화조’의 기조는 이미 그 이전 시기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운보의 눈에 비친 모든 대상은 반듯한 형식 속에 갇히기 보다는 제멋대로 파격 속에 놓여 있다. 마치 바보의 눈에 비친 또는 바보가 그린 듯한 그림이라고 해서 운보가 이름 붙여 놓은 이들 자유분방한 해학적 그림들은 조형의 모든 형식과 내용을 섭렵한 후, 이를 스스로 깨뜨려 나간 자유인 운보의 존재를 느끼게 해준다.1984년 작 에서는 운보의 추상적 필선이 더욱 강조되어 라고 부를 수 있는 반 미학.
    예체능| 2010.12.03| 8페이지| 2,000원| 조회(546)
    미리보기
  • 한국 근대미술과 서양미술
    한국 근대 미술과 서양 미술사조의 관계우리나라의 근현대 미술에 미친 서양미술의 영향을 평가하는 서로 다른 시각은 단순히 근대미술의 대외교섭에 대한 시각의 차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연구자의 역사관과 우리와 서양의 관계에 대한 거시적인 인식의 차이에서 온다, 더구나 근대라는 시기가 일제 식민지 시대와 중첩되는 우리역사의 특수성 때문에 서양의 영향은 일본의 의해 선택되고 변형된 형태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서양의 영향을 일본의 영향과 따로 분리해서 논하기가 쉽지 않다. 해방 이후에도 서양은 근대의 모델인 동시에 자주성에 대한 이항대립적인 타자로서 인식됐다.우선 서양미술의 영향을 두시기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는 일제강점기 이며, 두 번째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이다. 첫 번째 시기에 서양은 유럽을 의미했지만, 두 번째 시기가 되면 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이후 세계질서가 급변하고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서양은 유럽과 미국을 포괄하는 의미가 되었다.서양문물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조선의 문명개화론자들이 전면적인 수용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부터다. 서양문물의 도입은 우리 사회가 근대 문명으로 전환하는 분기점을 마련해주었다. 이후 서양의 기술뿐 아니라 학문과 문화자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곧 미술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서양미술에 대한 이런저런 소개의 글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1915년 일본의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귀국한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 첫세대가 등장하기 전까지 서양화를 직접 볼 수 있었던 화가는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초창기 화가들이 서양화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통로는 대부분 일본 유학을 통해서거나 일본에서 들어온 화집을 통해서 였다.첫 일본 유학생들은 대부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들은 그곳에서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방법으로 교육받았고 이들이 국내에 돌아와 가르쳤던 방식도 바로 그러했다.1920년대에 ‘서화협회전’이나 ‘조선미술 전람회’를 비롯하여 근대적 제도인 전람회가 활발해지자 일반인들도 서양화를 볼 기회가 많아졌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누드작품을 보고 놀란 관람자들의 모습이 신문 삽화에 실리고 전시나 서양미술에 대한 소개 글들이 신문 잡지에 실리는 등 이 시기의 인쇄매체는 서양미술에 대한 지식보급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흥미로운 사실은 1930년대 후반부터는 미술가들이 근대를 거슬러 올라가 서양의 고전미술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반 서양근대미술에 대한 급급한 호기심이 소화된 상태에서 더 근본적인 서양미술의 원류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무엇보다도 우리나라 근대 화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던 사조는 인상주의였다. 유럽의 오랜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그룹이 결성되던 1870년대 당시 인상주의 색채에서나 구성에서 전통을 깨뜨린 과격한 미술운동으로 인시되었지만 우리나라에 소개될 즈음인 1910년대나 1920년대에는 이미 역사적인 운동이 되었고, 따라서 우리나라 화가들은 인상주의적인 재현방식을 서양의 지극히 통상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이 우후죽순 소개되기 시작 한 것은 1920년대였다. 1920년대에는 여러 종류의 잡지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문예사조에 대한 소개가 많이 실렸다. 서양의 미술사조에 대한 지식의 통로는 대개 이러한 잡지나 일본에서 들어온 화집이었고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번역된 미술 용어들이 그대로 통용되었다.일제 강점기에는 서양미술에 대한 번역본이나 단행본이 한 권도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러한 단편적인 일본 화집이나 잡지를 통해서 서양미술을 이해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번역된 용어들이 비판없이 그대로 사용되었고 이것은 해방이후에도 하나의 문제점으로 남게 된다.
    예체능| 2010.10.07| 2페이지| 1,000원| 조회(335)
    미리보기
  • 로댕의 생애과 관련한 그의 작품세계
    로댕 (Rene-Fransois Auguste Rene Rodin, 프랑스, 1840 - 1917)"진정 치열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비록 당신의 입장이 기성관념과 상반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당신이 느낀 것을 나타내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처음에는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런지도 모릅니다. 얼마 안 가서 여러 친구들이 당신에게로 올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진실한 것은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에서........근대 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프랑수와 오귀스트 르네 로 댕은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 파리의 작은 골목에서 삼 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38세였으며, 하급 공무원으로 형사였던 아버지(Jean-Baptiste Rodin)와 삯바느질과 이웃집 가정부로 일하던 어머니(Maria Cheffer)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그가 14세되던 때에 국립미술전문학 교(Petite Ecole)에 입학하여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861년에 아버지가 퇴직하였기 때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건축장식, 직공 등 부업을 하면서 야간작업에 몰두하며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로댕의 자화상(self-portrait of Auguste Rodin), 1854, 연필소묘,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바로 위 로댕의 자화상은 이 장식미술학교에 다니면서 틈틈히 그린 연필소묘입니다. 그가 17세 소년기였던 시절의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이후, 사랑하는 누이 마리아의 뜻하지 않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성령회 수사로 수도원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The Thinker (생각하는 사람), 1880, bronze, 로댕 미술관 소장어느덧 청년이 되고, 그의 나이가 27세되던 해인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란 제목의 작품을 출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이 너무 생생하며 매우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고 하여 낙선하였습니다.그 뒤,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예술 방면의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습니다. 1878이 47세가 되던 해인 1884년에, 로뎅은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인 칼레(Calais)시의 시장으로부터 아래 조각작품인 "칼레의 시민"이란 작품 제작을 의뢰(依賴)받았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덧붙임으로써 오늘의 글을 마무리지으려고 합니다."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가장 잘 표현한 "칼레의 시민"1347년에 프랑스는 영국과 백년전쟁을 치루던 중이었습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시 전체가 포위되었을 때, "시민대표 6명이 칼레 시를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을 각오하고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에드워드 앞으로 출두했었던 영웅적 행동"을 기리는 기념상을 말합니다.로댕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1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당시 칼레의 시민들은 영웅적인 선조들을 아름답게 미화하여 굳센 영웅상으 로 표현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정작 로댕이 완성한 작품은 그 당시 칼레의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조각작품에 표현된 6명의 시민들은 애국적이거나 늠름한 모습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The Burgher of Calais (칼레의 시민)위에서 감상하고 계신 것처럼, 여기에 조각된 6 명의 인물들은 칼레 시의 함락에 대한 공포와 개인적 인 딜레마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기 다른 독특한 자세와 모습으로 고독하게 고립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조각품 각각의 개성과 고뇌를 담은 절묘한 발상과 예술성그래서 영웅이라기 보다는 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조각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6명의 군상은 전체적인 통일 가운데 정(靜)과 동(動)의 요소가 교묘하게 교차되어 있으며, 각 개인의 표현이 평등하게 중요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리고 로댕은 위 작품에서 파격적인 발상을 보여줍니다. 보시는 것처럼, 각 인물들을 흩어지게 배열했으며, 인물 각자의 개성과 고뇌를 각기 생생한 표정 속에 불어 넣었습니다. 이는 로댕 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절묘한 발상과 예술성이라는 평가와 찬사를 받고있는 이유조각을 그만두고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을 가졌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인 피터 주리안 데이말드(Peter Julian Eymard)신부는 로댕이 다시 조각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데이말드 신부가 보기에는 로댕은 교회에 서 활동하는 것보다 조각을 하는 게 맞는 사람이었다. 로댕은 장식품들을 조각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으며, 동물 조각가였던 안토니 루이즈 베리(Antoine- Louis Barye)의 수업에 참여했다. 동물들이 움직일 때의 정교한 근육조 직들을 훌륭히 표현했던 안토니 루이즈 베리의 작품들은 로댕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75년 이탈리아 여행은 자연으로부터의 새로운 출발로서 그가 를 제작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결혼과 전시회 개최1864 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들 오귀스트 외젠 부렛(Auguste-Eugene Beuret)을 낳았으며, 처음으로 조각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를 계기로 명성 높은 조각가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Albert-Ernest Carrier-Belleuse)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했는데, 지붕, 계단, 그리고 출입문 장식들을 도맡아 하였다. 1870 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으로 인해 로댕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의 요청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증권 거래소 건물장식들을 만들며 미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875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체류했고 1877년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칼레의 시민》, 《지옥문》, 《생각하는 사람》 등이 있다.카 미유 클로델과의 만남 [편집]카미유 클로델은 그의 연인이다. 로댕의 유명한 조각인 지옥의 문은 로댕이 1880년에 주문받았으며, 평생 작업한 작품이었다. 1881~1882년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작가인 카미유 클로델(작가 콜로델의 누이동생)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클로델은 16년 뒤 그와의 결별 후 정신이상자가 되었지만, 로댕은 , , 같은 중요한 여러 작품의 주문을 받는다. 이 중 마지막 두 작품은 거절을 당한다. 190비난이 부당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개조형예술국으로부터 주요 의뢰를 받을 경우 그러하듯이 국가에서 제공하는 작업실을 할당받은 로댕은, 샹 드 마르스 근처 유니베르시테가의 대리석 보관소에 위치한 이 작업실을 평생 동안 지켰다.로댕은 '격렬하게' 작업에 착수했고, 조형예술국 감독관들의 보고서와 정기적인 급여 지급이 증명하듯의 형태가 곧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피렌체 세례당의 처럼 문짝을 여러 개의 패널들로 나누려고 했으나 두번째 모형 시스티나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처럼 세부 구획을 배제했다. 그는 단테 시의 3분의 2를 버리고, 가장 절망적인 부분인 지옥편에 집중했다. 다양한 형태로 된 다수의 인물들 속에서 그리고 단테 자신인 등 식별할 수 있는 몇몇의 인물들만 살렸다. 이 인물들과 인물군상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모델링되었으며, 종종 건축적 요소들을 대신하면서 전통적인 기본구조를 침범했다. 로댕은 목재틀을 사용한 문짝 위에서 이 인물들을 형상화했다. 카미유 모클레르는 1918년의 저서 『로댕』 속에서 "매 순간 그는 작은 인물을 즉흥적으로 만들었다."고 언급하며 "어떤 느낌, 생각 또는 형태에 대한 재빠른 판단을 표현하면서, 그는 그것을 다른 인물들과 함께 문 속에 위치시키거나 이동시켰다. 필요하다면 또 다른 생각들을 추구하기 위해 그것을 파괴하여 파편들을 이용한다."고 썼다. 이 중 많은 인물들은 더욱 중요하고 크게 분리된 그룹들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로댕의 야심은 창조하는 것이었다(…). 은 로댕이 의도했던 인물 모두를 포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형 가까이 놓여진 판자 위에 나열되어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상들은 소위 '그의 조각 인생의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로댕 영감의 전체적인 변화를 표상한다.1884년 로댕은 자신의 계획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1885년 8월 20일의 공식적인 주문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주조를 위한 견적서를 작성했다. 그는 1885년 말엽 아니면 1886년 초반에 제작된 듯한 모형에 만족하지는 않았지만,물군상들이 제거된 의 새로운 변형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솔직히 그들 대부분은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화로운 곡선들 속에서 부풀어오르고 굽이치다가, 솟아오르고는 다시 떨어지는 홍수'의 시를 감지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오로지 로댕이 의도했던 작업 계획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형상들이 아직 에 배치되지 않았지만, 관람객은 뛰어난 구성의 장대함과, 빛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교묘하게 배치된 오목함과 볼록함이 충만한 표면에 감화되어버린다."완전히 자유로운 상상력의 뛰어난 상징이 된 이 미완성인 채로 전시되었을 때, 그것은 로댕이 세부를 완성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은 그가 심혈을 기울인 공식 의뢰작품이었을 뿐 아니라, 파리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서 결국 대중들에게 공개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는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전시회 개막 이후 로댕에게 과 같은 작은 군상들의 배치를 막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로댕의 이러한 선택은 분명 그의 태도변화 때문이었다. 에서 창을 제거하고 에서 팔 을 없앴듯이 로댕은 이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제거했다. 그는 을 너무 즉각적으로 이해시키는 모든 것을 고의적으로 없앤 것이다. 특히 을 여는 사람은 시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부르델의 말을 고려한다면, 로댕은 오목함과 볼록함 사이의 대조가 너무 과도하다고 본 듯하다. 로댕은 베네디트에게 "에는 너무 많은 구멍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고정된 팀파눔이나 테두리 또는 문짝 위로 튀어나온 형상들로 인해 너무 많은 돌출부와 함몰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닫혀 있는 채로만 존재하는 문이다. 그것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이탈리아 르네상스로부터 전수된 법칙, 즉 환상적이면서 완벽하게 명확한 특성을 보여주는 부조의 법칙을 초월하여 단테의 '지옥편'에서 분명히 제시된 비물질적인 공간, 동시에 당대인들의 가장 소란스런 꿈들도 품을 수 있는 공간을 탐색한 것이.
    예체능| 2010.07.09| 10페이지| 2,000원| 조회(544)
    미리보기
  • 키스해링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낙서화가 키스 해링 [Keith Haring, 1958.5.4~1990.2.16]1980년대를 질주한 뉴욕의 낙서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와 더불어 팝아트의 최전선에서 유쾌한 전설을 만들었던 키스 해링은 바스키아와 함께 낙서화가들 중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그 요인은 몇가지가 있는데, 낙서화가들 중 드물게 중산층 출신의 백인이라는 점과 정식으로 미술 대학을 다녔으므로 낙서화가 갖는 의미와 작품 내용을 비교적 논리적으로 인터뷰나 글을 통해 설명할 기회를 얻었고 그것을 십분 활용했다는 점 등이다. 그 는 스스로 자기 작품을 어떻게 선전해야 하는지 알았다.거리로 작업하러 나갈 때는 사진 작가를 동반하여 작업 과정과 완성작을 사진으로 남겨 그것을 책으로 출판할 정도였다.작업하는 해링 경찰이 오는 것을 살피며 낙서하다 경찰에게 잡혀가는 해링지하철역 광고벽의 낙서해링은 1970년 쯤 뉴욕에 와 첫눈에 지하철 낙서에 반했다고 고백한다.“내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전철 바퀴 위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내 눈에 비쳐졌다. 나는 즉시 지하철 낙서에 매료됐다. 드로잉의 완숙함, 색채와 스케일, 대중적 이미지, 잡힐지도 모른다는 위험, 작가와 관객의 직접적인 관계 등이 나를 사로 잡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유행에 편승하거나 그 스타일을 모방하진 않았다.1980년 나는 새로운 목적과 실체를 갖고 드로잉을 시작했다. 내가 드로잉 작업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야 했다. 즉 대중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미술이 살아있는 유일한 방법은 관객의 체험을 관통하는 것이다.미술의 실체란 상상력과 창조성, 그리고 문제와의 대결을 통해 얻어진 힘이며 그것을 바라본 사람의 눈을 통해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나는 어느날 타임스퀘어 지하철역에서 광고가 없어 검은 종이로 덮인 광고벽을 보고 즉시 백묵을 사가지고 와 드로잉을 했다. 그때 나는 그것을 일종의 취미로 했다. 그후 나는 드로잉을 위해 지하철을 자주 탔으며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드로잉을 했다.얼마쯤 지난 후, 내 지하철 드로잉들은 취미 이상의 책임감을 나에게 지워왔다.많은 사람들이 내 행운을 빌어줬고 그것을 계속하라고 독려했다.이렇게 되자 이것을 중지하기가 어려워졌다."픽토그램(Pictogram) 같은 간결한 선과 강렬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표현에서 단번에 그의 재능을 간파한 딜러 토니 샤프라치(Tony Shafrazi)는 자신의 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을 기획하였다. 해링은 이 전시를 계기로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하위 문화로 낙인찍힌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해낸 그의 그림은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그의 작품은 기호적인 특성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이해했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해링은 마치 어린아이들을 위한 만화와 같이 매우 단순한 선과 선명 하면서도 강렬한 색채로 대중에게 다가선다. 보다 즉각적이며 감각적인 그의 작품들은 보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다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듯 착각과 친근함을 불러일으킨다.해링는 거리의 담벼락, 쓰레기장에 폐기 처리된 시멘트벽에도 그림을 그렸고, 유명해진 후에는 자신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라면 어디라도 찾아가 거리 복판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비트박스를 해가며 신명나게 세상을 향해 자신의 메시지를 발산해나간 거리의 즐거운 예술가였다.그는 예술서적을 탐독하고 선배 화가들의 회고전에서 큰 자극을 받았으며, 때로는 마티스를, 때로는 레제를, 또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중국의 그림에서도 시각적 상상력을 키우는 영감을 받으면서 자기만의 예술 철학과 방식을 완성해갔다. 30대의 나이로 미술계의 떠오르는 별이 되었으며 pop shop이라는 가게도 차렸다.거기엔 아무것도 안그려진 셔츠가 그의 드로잉이 프린트돼선 5~6배의 가격에 팔렸다.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비판은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대중성과 그의 팝 샵에서 아직도 제작 판매되고 있는 제품에서 보이는 상업성 때문이다.그러나 작년에 출판된 그의 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해링은 예술적 재능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예리한 통찰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상업적 대중적 개인적 측면에 대한 종합적 해석과 당대 다른 사조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해링의 작품이 우리가 갖고 있던 미술의 상식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일 것이다활동 기간은 십여 년 남짓이지만, 해링은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고, 미래의 꿈과 두려움을 대중과 공유한 대중예술가였다. 그는 인간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고,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 존재”인 어린이들과의 작업을 가장 행복해했으며, 아동 건강, 마약과 에이즈 퇴치, 인종차별 반대를 위한 대의의 행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행동하는 미술가였다.다채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고, 반복하고, 오리고, 변형하고, 실험하고, 통합하면서 자기 내면에 자리한 소년 같은 순수함과 열정, 예술가로서의 광기와 혼란, 인간으로서의 불안과 우울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던 솔직하고도 맹렬한 미술가 해링의 특징은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참여한다는데 있다. 주로 소수 민족 등 약한 자의 편에 서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1988년에해링은 그 자신이 HIV 양성임을 알게 되었는데, 투병 생활 보다는 미국과 해외에서의 공공 프로젝트의 수를 늘려가며 열광적인 작품 활동을 해나갔다. 말년에는 자신의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고 에이즈에 관한 인식과 활동들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작품을 활용했다. .1990년 2월 16일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31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예술은 삶이나 죽음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믿었던 키스 해링은 마지막 순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그의 마지막 작품은 이탈리아 피사 시의 성 안토니오 성당 외벽에 남긴 대형 벽화가 되었다->피사 시 의 성 성당 벽화주요 작품에는 《무제 Untitled》(1982), 《앤디 마우스-뉴 코크 Andy Mouse-New coke》(1985), 《무지=공포 Ignorance=Fear》(1989) 등이 있다.
    예체능| 2010.07.09| 5페이지| 2,000원| 조회(940)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06일 수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4:42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