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개론』민주 ? 자유 ? 정의에 대한 그 열망서론4.19 혁명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의 힘으로 정부 권력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4.19 혁명을 간단히 말하자면, 부정선거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집단 시위를 시작하였는데 정부는 이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경찰에 발포 명령을 내렸고, 이에 흥분한 학생과 전 대중이 집단 항거함으로써 결국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 시키게 한 사건이었다.4.19 혁명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왜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남겨주는 것일까?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한 학생과 시민의 힘이 정의의 이름으로 승리함을 보여준 것이었다. 사실 당시의 상황은 혁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패한 정권을 쓰러뜨릴 수 있는 대중의 힘을 발휘한 것은 한국의 역사상 길이 기억되어야할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한민족의 역사상 대중이 통치 권력을 쓰러뜨린 최초의 사건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올해 4월 19일에 즈음하여 정치학 개론 수업 시간에 수유동에 있는 4.19 국립묘지를 다녀오게 되었다. 단순히 4.19 혁명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조금이나마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에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 과정에 대해서 조사하게 되었고 더불어 4. 19혁명이 가지고 있는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본론4. 19 혁명 당시 왜 대학생들이 반정부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을까? 당시 대학 사회는 군부와 더불어 정치의식의 측면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당시의 열악한 경제 환경 속에서 장래의 지위에 대해 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로써 종합해 보면, 학생들의 불만에는 정치적 부패 및 독재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직접적인 생활상의 불만들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내재해 있던 개인적인 불만이 정치 상황에 대한 도덕적 분개와 결합하여 집단적인 반정부 항거로 터져 나온 것이 4. 19 혁명이었던 것이다.3. 15 부정 선거 이후, 사실 학생들의 요구가 처음에는 “선거를 다시 하라!” 라는 의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사태를 확대시킨 것은 정부였다. 학생 항거에 대해 정부의 대응은 정책적으로 무기력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정부는 학생들의 시위를 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주라고 선언하고, 경찰력을 동원하고 폭력 진압을 시작하였다. 경찰의 폭력진압은 학생들의 분노를 고조 시켰고 이에 일반 시민들이 가세하게끔 만들었다.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고 4월 18일 반공 청년단원들이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고대생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이제 더 이상 경찰력은 시위 군중을 진압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4월 19일에 일어난 대규모 시위는 이제 부정 선거 규탄에 머물지 않고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었다. 소규모의 제한된 목표로 시작된 운동이 대규모의 전국적 정권 퇴진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었다.4.19 혁명을 조사하면서 2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첫 번째는 정부와 군부 간에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이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는 것이다.먼저 첫 번째 사실과 관련하여 당시 군이 개입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광주 항쟁의 예를 보면, 만약 군부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으로 강경 진압에 나섰을 경우 민간 세력이 정권타도에 성공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 경우 정권은 더욱 탄압적이 되고 저항 세력은 상당 기간 동안 침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군부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고 정부의 발포 요청을 거부하였다. 군이 이승만을 위해 목숨을 걸 정도의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정치적 위기 시에 군 지도자들은 정권과 정치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더구나 사태가 정권에 불리한 방향으로 기운 상태에서 군의 물리적 개입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정당화되기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들은 군이 강경 진압에 나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두 번째로 4?19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이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미 국무 장관과 주한 미 대사는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하였고, 매카나기 주한 미 대사는 이승만을 세 차례나 방문하여 이승만의 하야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일차적으로 학생과 대중의 힘으로 이루어졌지만, 미국 정부도 이승만의 몰락을 재촉하고 민주 정부의 건설을 고무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4.19 혁명이 가지는 의의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응분의 희생과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타의에 의해서 광복과 더불어 외부로부터 거저 부여된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 인식과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였고 따라서 제도를 잘 운영하지 못했으며 수호의 의지마저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부패의 모순이 얽혀서 4.19 혁명이 발생하였다.
『정치학개론』민주주의를 위한 타는 목마름으로지난 2005년 제5공화국이라는 드라마가 TV에서 방영 된 적이 있다. 드라마 제5공화국은 1979년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서부터 1988년 전두환 대통령의 퇴임까지의 정치적 사건을 다루었던 역사 드라마이다. 특히 드라마에서 다루었던 1980년 5 ? 18 사건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울분을 감추지 못하게 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거리로 뛰어 나온 학생들을 폭도라 몰아붙이고 마구 진압하는 것도 모자라 강제적으로 끌고 가서 쇠파이프로 사람을 때리는 모습은 나에게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5 ? 18 민주화 운동이라 불리는 이 운동은 과연 어떤 운동이었을까. 사실 우리는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의 모습을 자료와 영상을 통해서 밖에 알 수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사람들의 정신이 우리에게 전달되었고 우리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5 ? 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운동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여 군사 독재를 연장하려 하자, 학생을 중심으로 수 만 명의 시민들은 1980년 5월 15일에 서울역에서 계엄 철폐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오히려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발표와 동시에 학생과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결국 5월 18일 전남대생 200여명은 광주에서 계엄군과 대치하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합세한 시민들과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운동이 시작되었다.올해로 5 ? 18 민주화 운동은 27년을 맞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기억하고 광주를 찾아 추모하고 기념하기에 애쓰지만 늘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었다. 5 ? 18을 명칭 하는 말에 대해서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로 분분하기 때문이다. 5 ? 18을 혁명, 항쟁이라고도 하고, 민주화 운동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폭동 사태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그 시대를 경험했던 지배층도 존재하고, 시각에 따라 보수적, 진보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 의미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다르게 사용 되고 있어서 5 ? 18 민주화 운동의 시대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 같아 많이 아쉬운 점이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배층의 논리에 따라 5 ? 18 민주화 운동을 광주 폭동 사태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의 군부를 집권했던 세력에 의해 언론을 독점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려 했던 모습은 결코 시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시켜 주었다. 또한 보수층에 의해 혁명, 항쟁, 의거, 심지어는 무장 봉기라고도 불려 진다는 사실에 반드시 다시 바르게 정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쟁이라는 말도, 싸움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다소 전투적인 느낌이 든다. 결코 학생들과 사람들은 싸움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운동이자 작은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5 ? 18을 5 ? 18 민주화 운동이라는 확고한 정의로 정착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시대의 정신이 더욱 더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사회와 언론의 노력이 조금 더 뒷받침 되었으면 하는 바이다.한편 이번 보고서를 쓰면서 5 ? 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개인의 절대 권력을 위해서 일어났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5 ? 18 민주화 운동이 신군부 세력에 의한 독재 권력의 체제 유지를 위한 면도 분명히 있었지만 수업시간에 보았던 비디오를 통해서 미국의 영향도 어느 정도 개입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미 문화원을 방화하고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이 과연 군 독재 정권에 어떠한 의미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사실 분단 이후 우리나라는 미국의 경제원조 속에서 나라를 유지시켜 나갔다. 원조 경제는 미국에 대한 경제 종속과 권력에 의한 부의 독점화를 야기 시켰다. 뒤이은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 때의 경제 발전론은 선택과 집중의 문제에 있어서 거대 자본의 독점화와 일부 지역에 대한 편중 개발을 초래 하였다. 권력층과, 권력층과 결탁한 거대 자본은 시민들의 대립 양상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다. 사실 시민들의 의식의 성장으로, 이때까지 계속되어 왔던 독재에서 벗어나 더욱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해졌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이후 실질적인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의 신군부 세력은 이전의 독재 체제 노선을 답습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결국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간에 대립 구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역시 계속된 독재라는 것에 의해 빈번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대립이 우리나라 역사 발전 속에서 집약되어 오다가 각종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가장 날카롭고 적대적인 형태로 표출된 것이 5 ? 18 민주화 운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