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의 세시풍속 .세시풍속에서 말하는 가을은 음력 7월부터 9월까지를 일컫는다. 7월에는 말복(末伏)이 들어있고, 노염(老炎)이 기승을 부려 기후면으로는 아직 여름에 가깝다. 그러나 7월 중순 무렵이 되면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가을 기분이 들게 한다. 이 같은 가을은 수확의 계절로 가을의 세시풍속으로는 칠석, 백중, 추석, 중양등이 있으며, 입추에서 입동까지의 절기와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등의 절후(節侯)가 있으며, 놀이로는 강강수월래, 탈춤, 농악놀이등이 있다.입추에서 입동까지의 시기를 말하는 가을은 7월이 그 시작인데 7월의 명절로는 칠석과 백중이 있다.. 칠석(七夕)7월 7일을 칠석이라 한다. 이 날밤 미혼의 여성들은 견우(牽牛), 직녀(織女)의 두 별을 요배(遙拜)하여 재봉이 숙달될 것을 빌며, 문인들은 술잔을 교환하면서 이 두 별을 제목으로 시를 짓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견우성(독수리자리, 성)과 직녀성(거문고자리, 성)은 은하(銀河)라고 하는 천하의 동서에 나뉘어 서로 바라보고 있으면서 만날 수가 없는데 해마다 이 날을 당하면 오작교(烏鵲橋)로 은하를 건너 서로 만난다는 설이 있다.칠석은 원래 중국의 세속 명절로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고려 공민왕은 몽고 왕후와 더불어 내정에서 견우·직녀성에 제사하였고, 또 이 날 백관들에게 녹을 주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節日製)의 과거를 실시하였다. 그래서 옛날 서당에서는 이 칠석날이면 학동들에게 견우, 직녀를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그리고 칠석에는 옷과 책을 햇볕에 말리는 풍습이 있으니, 이는 여름의 장마철에 옷과 책에 습기가 차서 좀이 슬거나 썩기 쉬우므로 장마가 지난 이 때 햇볕에 말려두면 가을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또한 칠석날 밤에는 부녀자들이 직녀성에게 바느질과 길쌈을 하는 재주를 빈다. 이 것은 옛날 중국에서 널리 행하던 걸교(乞巧)의 풍습을 따르는 것으로 중국 송나라에서는 이것을 7월 6일에 하였다고 한다.. 백중(伯仲)백중은 음력 7월 보름에 드는 속절이며, 백종(百種), 중원(中元),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백종(百種)은 이 무렵 여러 가지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백 가지 곡식의 씨앗 을 갖추어 놓았다고 해서 유래된 말이요, 중원(中元)은 도가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상원(上元) : 1월 15일, 중원(中元) : 7월 15일, 하원(下元) : 10월 15일]의 하나로 1년에 세 번 천상의 선관(仙官)이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 데서 연유하였다. 또한 망혼일(亡魂日)이라 함은 망친(亡親)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술·음식·과일 등을 차려놓고 천신(薦新)을 드린데서 유래한 것이다.백중은 그 유래를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먼저 시기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입하(立夏)로부터 시작되는 여름은 밭매기와 논매기 등 농사일이 한창인 계절이다. 그러나 농촌의 7월은 바쁜 농번기를 보낸 뒤이면서, 한편으로는 가을 추수를 앞둔 달이어서 잠시 허리를 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기에 백중 이라는 속절을 두어 농사일을 멈추고 천신의례 및 잔치와 놀이판을 벌여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고, 더위로 인해 쇠약해지는 건강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또 다른 견해로는 불가에서 그 유래를 찾은 것으로 7월 15일에 절에서 승려들이 재를 올리며 불공을 드리는 큰 명절이 있는데 이것을 우란분회(盂蘭盆會)에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우란분회 는 범어 Ullambana'의 한자어로, 처음에는 오람파나(烏藍婆拏) 라고 표기하다가, 나중에 오람 을 우란(盂蘭) 으로 파나(婆拏) 는 그 뜻이 분(盆:항아리) 이므로 음훈을 빌려 우란분회 라고 했는데 이 것은 거꾸로 매달린다 의 뜻을 갖고 있다.그런데 우란분경(盂蘭盆經)에는 다음과 같은 불교 설화가 있다.석가모니의 제자인 목련존자(木蓮尊者)의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죄를 지어서 죽은 뒤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져 고통을 받을 때, 목련존자가 그 어머니의 영혼을 구하고자 석가모니에게 애원하여 그의 지시로 7월 15일에 오미백과(五味百果)를 쟁반(盆)에 받들어 십방대덕(十方大德)에게 공양하여 그의 어머니의 영혼을 구제하였다.이 우란분경 의 설화에 따라 우리 나라에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나 고려 때에는 7월 15일 절에서 우란분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승려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참가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하고 조상의 영전에 바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나 조선조에 와서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하여 차츰 승려들만의 불교의식이 되고 말았다.그런데, 이 우란분회 때에 백(白)가지의 꽃과 과일을 부처님께 공양한다고 하여 여기에서 백종(百種)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우란분회 때 승려들이 발을 닦아 발뒤꿈치가 하얗게 되어 백종(白踵)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지만, 그 것은 농촌에서 7월에 논과 밭매기를 다 끝내고 호미를 씻어두는 호미씻이 를 하고 나면 농부들의 발뒤꿈치가 하얗게 되어 백종이라 한다는 민간어원설을 억지로 끼워 맞춘 것으로 보인다.백중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제주도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옛날 차귓뱅 뒤에는 백중(百中)이라는 목동이 살았다. 하루는 그가 바닷가에서 말과 소를 먹이고 있는데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내려와 바다를 향하여 거북아! 하고 불렀다. 잠시 후 거북이 떠올랐고, 백중은 바위 뒤에서 계속 엿듣고 있었다. 옥황상제는 거북아, 오늘밤 석자 다섯 치의 비를 내리게 하고, 풍우대작(風雨大作)케하라. 라는 말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갔다. 그 얘기를 듣던 백중은 놀라서 언덕에 올라가 옥황상제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거북을 다시 불러내었다. 아까는 깜빡 잊어서 말을 잘 못 했다. 비는 다섯치만 내리게 하고 바람은 불지 않게 하여라. 라고 말하였다. 거북은 알았다는 듯이 물 속으로 사라져갔고, 그 날 저녁 백중의 말대로 비는 적게 오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한편 하늘나라에서 이 광경을 본 옥황상제는 대노하여 칙사에게 백중을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백중으로서도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었으나 옥황상제에게 벌을 받느니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백중의 지혜와 용기 때문에 그 해에는 대풍작이 되었고 그 가 죽은 날이면 농민들은 한결같이 제사를 지어 그의 혼을 위로하기로 했다. 이 백중이 죽은 날이 바로 7월 14일이므로이 날을 백중일(百中日)이라 한다.
소설에서의 화자란?소설에서의 화자란 작자의 피조물로서, 작자가 아니라 청자와 서사 내용 사이에 개입된 서술자가 곧 화자이다. 즉 작자를 대행하는 허구적인 대리인이다.소설에서는 작중 현실을 누가 어떤 각도에서 보았는가의 문제로서 서술의 초점과 같은 의미로 이를 시점이라고 한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각도와 입장에 따라서 그 내용은 각각 다르게 판단되듯이 시점은 작품의 주제, 인물의 성격, 그리고 미적 효과 등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점에는 크게 네 가지 시점이 있다..1인칭 주인공 시점주인공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시점을 말한다. 1인칭 시점에서는 서술자가 곧 주요 인물이 되어 나타난다. '나'라는 주인공이 있어서, '나는 이것을 보았다.', '나는 이렇게 하였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서술해 간다. 물론, 여기에서 독자들은 '나'란 것이 허구적인 인물임을 잘 알면서도 '나'라는 주인공이 실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듣는다. 독자들은 작품을 읽으면서 '이것은 진실한 이야기이다.'라는 문학적 묵계에 의해서 이 '나'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1인칭 시점은 독자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준다.이 1인칭 시점은 인물의 내면 상황, 즉 심리 묘사와 내부 묘사에 알맞은 수법이다. 따라서, 인간의 외면 세계를 객관적으로 그리는 데는 3인칭 시점만 못하다고 볼 수 있다. 서간체 소설이라든지 수기체 소설이 여기에 속한다..1인칭 관찰자 시점1인칭 관찰자 시점은 작중의 부수적 인물이 주(主)인물에 대하여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서술 형태이다. 서술자는 관찰자 이상의 역할은 없으며 초점은 주(主)인물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서술 방법은 1인칭으로 되어 있고, 주된 이야기는 관찰자의 눈에 비친 바깥 세계이다. 이 경우 주인공의 모든 것을 관찰자가 표현하기 때문에 작가는 객관성을 유지하지만, 관찰자 '나'를 통해 서술하는 초점의 전이(轉移)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작가가 주인공에 대한 관찰을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자를 통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주인공의 어떤 측면을 좀더 객관화시켜 드러낼 수 있게 하자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시점인 것이다. 그러나 관찰자의 관찰의 기회가 제한되고, 또 서술자는 일종의 해석자가 되어 작품을 설명해 갈 수밖에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1인칭 관찰자 시점은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두가 따르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끄는 시점이라고도 한다..작가 관찰자 시점작품 바깥에 있는 작가가 외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법이다. 작가는 하나의 관찰자이므로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외부적인 사실을 관찰, 묘사한다.이 시점의 특색은 극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점에 있다. 그래서 '극적 시점' 혹은 '객관적 시점'이라고도 한다. 서술자인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발화와 동작, 표정 등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독자에게 그 실상을 제시할 뿐, 거기 대해서 해설이나 평가를 가하지 않는다. 독자가 직접 작품을 분석, 해부하여 판가름하도록 맡겨 둔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서鄕歌를 보는 관점이 다른 이유는?신라의 음악이라고 하면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鄕歌이다. 하지만 이러한 鄕歌에 대한 인식이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鄕歌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는 「均如 」, 「三國史記」,「三國遺事」등의 자료를 보면 그 인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특히 「三國史記」와「三國遺事」에서 보여지는 인식의 차이는 크다고 할 수가 있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일연이 지은 「三國遺事」에는 鄕歌에 대한 언급이 많은 반면에 김부식이 지은 「三國史記」에는 鄕歌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왜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여기에서는 「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의 음악에 관한 인식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의 음악에 관한 인식의 확인이 우선시 되어야 함은 史書의 음악에 대한 기술은 편찬자의 음악에 대한 인식에 의해서 前代의 음악이 정리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겠다.「三國史記」에는 위에서 밝힌 것과 같이 「三國遺事」가 기록한 소위 신라의 음악을 대표한다는 향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반면에 「三國遺事」에는 「三國史記」 악지 부분에 수록된 여러 음곡에 대한 언급이 없다.이것은 鄕歌를 대표로 하는 신라 시대의 음악에 대한 김부식과 일연의 인식 태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문제일 것이다.김부식은 신라의 음악을 정리하면서 일연이 지대한 관심을 두었던 鄕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김부식이 생각하는 樂 의 개념에 鄕歌가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김부식이 생각하는 樂 의 개념은 궁중에서 연행되는 음악이었는데, 鄕歌는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즉 김부식은 신라 궁중에서 歌樂舞 가 종합적으로 연행되었던 것을 樂 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樂 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樂 이야말로 김부식이 생각하는 예악사상에 근거한 樂 이었던 것이다.또한, 김부식은 鄕樂 과 樂 을 구분하였는데, 鄕樂 을 樂 의 하위 단위라 하였다. 김부식이 전체 신라인을 지칭할 때는 鄕 이라는 말 대신 民 또는 國人 등의 말을 사용하였다는 점만 보아도 쉽게 알 수가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鄕樂 에서의 鄕 은 지방 또는 시골이라는 의미로 중앙의 의미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鄕樂 이란 지방의 음악 또는 사로국에 병합되기 이전의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鄕樂 이 신라 궁중에 편입되어 대단위 악기의 반주와 춤과 노래가 병행되어 연행이 될 때, 그것이 樂 이 되는 것이라고 김부식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위에서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듯이, 김부식이 편찬한 「三國史記」의 악지에 민간에서 불려졌던 노래인 민요나 鄕歌, 또는 개인적인 서정을 담고 있는 노래 등이 수록되어 있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보인다. 민요나 鄕歌, 또는 개인적인 서정을 담고 있는 노래는 악기의 반주나 춤이 수반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 樂 이 아니라는 것이 김부식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에서 김부식의 「三國史記」악지에는 신라악 중에서도 궁중에서 연행되어진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관점의 밑바탕에는 그의 역사관이 있음은 물론이라 하겠다.이러한 김부식의 인식을 현대에 이르러서는 사대주의 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물의 일면만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연이 「三國遺事」에 鄕歌를 수록하였던 것이 일연만의 인식이었다면, 「三國史記」에 수록된 樂 은 김부식의 그것이었던 것이다. 즉, 일연의 樂 에 대한 정리도 그의 불교적인 가치관이 가미된 자주성이었기에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비판 받아야 마땅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된 생각이라는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4대 개혁법안 중 국가 보안법 폐지 법안에 관해서1. 들어가며국가보안법이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한편에선 친애비의 임종을 맞이한 것처럼 통곡하고 억지부리며 역사를 거역하려는 몸부림이 있지만, 민주노동당과 새천년민주당에 이어 2004.9.9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마저 보안법폐지를 당론으로 확정하므로써 대세가 굳어지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의석수만으로도 과반을 넘기에, 주요 4개정당 중 3개 정당이 완전폐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기에, 사망선고를 내리기에 족한 가능성과 명분 모두가 확보된 상황인 것이다. 보안법의 탈날에 골병들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이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보안법의 칼날에 가로막히고 지체된 인권과 자주·민주·통일의 걸음이 어디 하루이틀·한두번뿐이었던가. 보안법이야말로, 일제가 민족정기를 훼손키위해 삼천리강토 명산 곳곳에 박아놓은 쇠말뚝과 같이 우리사회의 인권과 민주화를 저해하고 민족의 화해협력과 평화번영을 가로막는 나라와 민족의 명줄에 박혀있는 쇠말뚝이요, 뽑아내버려야 민족과 민중이 살 수 있는 암적존재였을 뿐이다. 국가안보는 허울이었을 뿐으로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파와 독재정권·군사정권을 지켜주는 법' 이었지 '민족과 민족을 지켜주는 법'이 아니었다. 하여, 죽는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역사의 오래 염원 하나가 풀리고 4천 5백만 민중·7천만겨례가 살길 하나가 새로 열리는 대전환의 기로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새로 뜨는 아침해를 맞듯 기운차게 봄·여름 땀흘린후 수확하는 가을의 들녘에서처럼 때를 놓치지 말고 반드시 결실을 보아야겠다.그러나 넋없이 기뻐하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실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나고 있다. 집권여당 내에서 선폐지·후형법 보완 이던 흐름이 폐지·보완 동시추진 으로 바뀌고 있고, 그 보완의 폭 또한 심상치 않아 형법의 국가보안법화 또는 이름만 바뀐 새 국가보안법 의 탄생을 보게될 위험한 상황으로 급변해가고 있다. 완전폐지 가 아니라 사실상 일부개정 에 불과한 방향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이렇게 시작되는 국가보안법은 통절의 우리역사가 만들어낸 시대적 산물이다. 누가 이런 목적이 있는 법률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국토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보지 않은 국민이라면, 이 국가보안법이야말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엉터리로 비춰질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 이해할 수 없는 법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분단현실이 더 고통이었으며, 이 고통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우리의 운명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분단을 배경으로 등장한 군부독재체제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도전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분단현실이 군부정권의 등장을 촉발시켰고, 분단현실을 대전제로 하는 국가보안법은 군부정권을 떠받치는 하나의 축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에 대한 반대가 곧 국가에 대한 반대이며, 국가에 대한 반대는 국가보안법의 핵심 표적이 됐다. 이른바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들이 그 해석과 판단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반정부 인사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었으며, 또 이렇게 악용되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북한하고도 전혀 관계가 없던 반독재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면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가는 모습,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다. 정권에 대한 반대가 국가에 대한 반대로 둔갑하고, 이것이 다시 친북으로 변질됐다. 국가보안법 제2조가 규정한 반국가단체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친북의 국가변란운동으로 바뀌는 것은 사실 시간문제였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법도 없을 것이다.국가보안법 제7조 1항 찬양 고무 에 관한 규정도 마찬가지다. 국가안전이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알면서도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지령을 받은 사람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또는 동조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 취지야 모를 리 없지만, 볍규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이보다 더 추상적이고 막연한 조항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마음만 먹으면 시안법은 대한민국 헌법에 반한다. 폭력활동과 연계되지 않았음에도 특정 이념 자체를 배척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사상·양심의 선택과 유지, 그리고 비폭력적 표현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사상·양심의 자유(제19조)를 침해하는 것은 물론 표현의 자유(제21조)에대한 무제한적인 제약을 가함으로써 민주사회의 근간을 부정하고 있다. 불확정 개념들에 입각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형벌의 명확한 구성요건을 요하는 죄형법정주의에 반하여 신체의 자유(제12조)를 침해하는 것일 뿐 아니라, 평화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을 일방적으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헌법상의 통일조항(전문, 제4조)에도 반한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은 폭력적 행위 여부라는 합리적 기준이 아니라 특정 사상·이념에 찬성하는지 여부라는 자의적 기준에 따라 형사처벌을 가함으로써 사상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평등원칙(제11조)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국가보안법은 개인의 인격 형성에 있어서 근간을 이루는 제반 기본권들을 침해함으로써 우리 헌법의 핵심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제10조)을 파괴하고 있다.이와 같은 반헌법적 요소에 더하여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함으로써 남북한이 주권국가로서 국제법적 지위를 갖는다는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법적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체의 자유와 안전의 권리 , 사상·양심 및 종교의 자유 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를 보장하고 있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우리나라는 1990년 비준) 등 공인된 국제인권규범을 위반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인권침해국으로 인식시키고 있다.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국가보안 법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반국가적 법률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분단과 북한의 위협에 따라 국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제한되지 않도록 시행·적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국제인권기구, 특히 국제연합 인권이사회는 대한민국 정부의 강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표현을 처벌하는 제7조의 찬양·고무·동조 등 부분과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의 신고 불이행을 처벌하는 불고지죄(제10조)뿐이다.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애초에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며, 불신고의 처벌은 인간 내면의 결정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으로서 사상·양심의 본질적 침해를 이루는 것이다. 결국 국가보안법은 범죄가 될 수 없는 행위를 범죄로 보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 규율대상이 모두 형법과 중복되고 있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필요도 가치도 없다.5.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넘어야 할 산들4·15총선 직후 운동 진영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더 없이 좋은 조건이 형서되었으며, 올해 하반기 이내에 폐지시켜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것은 일단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지지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의 개혁적 성격과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이라는 조건, 이들이 국회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다는 면에서 이런 예상을 할 수 있었고, 그런 판단은 대체로 맞아 떨어졌다. 열린우리당이 당론으로 폐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개정론을 앞세운 의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어지러운 상황은 일단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으로 정리되었다. 국회의석 과반수를 점한 열린우리당이 폐지 당론으로 정했고, 전면 폐지당론을 일찍이 정한 민주노동당이 결합하고 있으며, 대체입법론의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민주당이 합세하고 있으므로 단순 계산으로는 정기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무난할 것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안했다. 과연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자꾸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보안법 폐지로 가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은 무엇인가?먼저, 한나라당의 결사적인 반발이다. 이들의 입장들을 종합해서 보면 국가보안법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켜온 법률일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마지막 안전장치 라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보안법이 주로 대한민국 내부의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탄압하는데 악용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9월5일 발언에 대해 조중동과 문화일보, 세계일보 등은 즉각적인 반대의사를 격력하게 표명했다. 이들은 거의 선동 삐라 수준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극우 보수집단들의 여론과 행동을 선동하고 있다. 극우집단들은 9일의 1,400명의 집단 성명 발표에서 보듯이 국가보안법의 사수를 위해 총력 투쟁하는 분위기다. 이들에 국가보안법은 자신들의 지위와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이었던 것이고, 기득권을 근저에서 흔드는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에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며, 하기에 이들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격렬하게 반응할 것이다. 역시 이들은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다.셋째, 보완 또는 대체에 미련을 놓지 못하는 여당이 문제다. 국가보안법은 완전하게 폐지시키면 그만인데, 소수에 머무는 폐지 여론과 내부의 개정론자들을 핑계로 국가보안법의 흔적을 형법이나 대체입법안으로 옮기려 한다. 이에 따라 그럴 것이면 굳이 국가보안법을 왜 폐지하려 하느냐는 한나라당 쪽의 비난을 받고 있으며, 운동진영으로부터도 불신을 받고 있다. 어땠건 내부에서 조만간 결론이 날 것이지만, 반국가단체의 규정이나 7조의 찬양·고무 조항을 옮기거나 남기는 식의 보완이나 대체입법은 결국 국가보안법 문제를 다시 남기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태도는 이후에 한나라당과의 협상과정을 또 불안하게 한다.넷째, 정세 주도권을 놓치고 있는 폐지운동 진영이 문제다. 지금까지 가장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력투쟁하는 분위기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안들이 워낙 복잡하게 많은 것이문제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라크파병 문제에서는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다가 친노적으로 비추는 국가보안법 전선에 발을 곧바로 담그기가 곤란하다는 점도 있는 것 같다. 전국의 301개 단체가 결합되었다고는 해도 실질적인 힘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은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로 힘을 모으기 힘들다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가령 1백만인 청원운.
4대 개혁법안 중 과거사 규명법에 관해서1. 들어가며2004년 8월 15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59주년 광복절 기념 경축사에서 포괄적 과거청산 필요성 을 제기한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청산의 당위성과 반대론을 둘러싸고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이 부친의 전력 문제로 사퇴하는 등 하반기 정국은 과거사 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거청산 문제가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2004년 10월 국회에는 13건의 법률안이 제출돼 있는 상태이고, 9월8일에는 열린우리당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반대 속에서 국회 행자위에 제출했다.사실 5·18 관련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큰 쟁점이 되고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기까지 했던 지난 문민정권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과거청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해는 거의 없다. 가까이는 지난 16대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을 비롯하여 과거청산 4대 법안 이 논의될 때부터 국회가 새롭게 구성되면 이 문제가 전면에 부각될 것으로 예상됐다.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도쿄 재판과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부터 가까이는 남아공화국의 진실과화해 위원회 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과거청산 요구는 혁명, 전쟁 혹은 정권교체, 민주화 이후 예외없이 제기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반혁명세력 숙청, 전쟁 책임 규명, 전범재판 등의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제기되기도 했고, 과거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 각종 공권력의 반인권 범죄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 등 온건한 방식으로 제기되기도 했다.이런 사례들에 비춰보면 한국은 아르헨티나, 칠레, 남아공화국 등지에서 민주화 이후 바뀐 정권에 의해 제기된 과거청산과 현상적으로는 유사하나, 4·19혁명 직후부터 6·25전쟁 당시 학살 피해 유족들의 진상규명, 명예회복 요구가 줄기차게 진행되온 점을 생각해보면, 사회운동 방식으로 밑에서부터 제기돼왔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권 시절 의문사 유족들이 400일 이상 국회앞에서 천막농성을 해 의문사위원회 구성을 이끌어낸 일이야말로 제19조제8항, 제10항).아. 위원회가 진실규명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관할 지방검찰청 검사장의 승인을 얻어 관계기관에 통신사실에 관한 확인자료나 금융거래에 대한 정보 또는 자료의 제출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함(안 제20조제8항).자. 위원회가 구성되어 최초의 진실규명 조사개시결정일 이후 4년간 진실규명활동을 하고 4년의 범위 내에서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음(안 제22조).차. 위원회는 진실규명 사건에 관하여 각하, 기각, 진실규명 불능 결정이 부적절한 사안으로 판단할 경우에 진실규명 결과 및 사유를 국민에게 밝혀야 함(안 제25조).카. 위원회는 진실규명 조사 결과 범죄혐의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는 검찰총장에 고발할 수 있고, 고발·수사의뢰를 받은 검찰총장 등은 필요한 조치를 하고 그 결과를 위원회에 통보하여야 함(안 제26조).타. 위원회는 미리 증거를 보전하지 아니하면 그 증거를 사용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고발·수사의뢰 전이라도 관할 지방검찰청 검사장에게 압수·수색, 검증, 증인신문 또는 감정의 청구를 의뢰할 수 있음(안 제26조의2).파. 위원회의 출석요구에 응하여 임의의 진술을 한 자가 공판기일에 전의 진술과 다른 진술을 할 염려가 있고 그의 진술이 범죄의 증명에 없어서는 아니 될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고발 및 수사의뢰 전이라도 관할 지방검찰청 검사장에게 증인신문의 청구를 의뢰할 수 있음(안 제26조의3).하. 위원회는 각하, 기각, 진실규명 불능, 국민보고 결정, 고발 또는 수사의뢰한 경우 보고서의 내용을 진실규명 신청인에게 30일 이내에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하며, 이의가 있는 경우에는 30일 이내에 이의신청할 수 있도록 함(안 제27조).거. 위원회는 파견된 공무원이 위원회 업무 수행 중 명백하고 현저한 공적을 이룬 공무원에 대하여 특별승진을 요청할 수 있음(안 제28조).너. 누구든지 진실규명사건의 조사와 관련하여 정보를 제공하였거나 제공하려 한다는 이유로 해고, 정직, 감봉, 전보 등 어떠한 불이익도 받지 아니하며, 진실규명사사회의 해체를 막을 수 없다. 생과 사가 자신의 의지 밖에 있는 군사독재, 준전쟁상황에서 이러한 정의의 부재, 혹은 판단력의 마비가 가장 광범위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독재국가는 겉보기엔 유례없이 사회통합이 잘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극도의 불신을 수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감옥이나 포로수용소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불신하며, 상대방이 한눈을 팔면 남의 물건을 그냥 훔쳐가는 등 극도의 무정부 상태가 된다.그런데 때로는 사회 전체가 이 포로수용소의 확대판인 경우가 있다. 사람들은 반드시 가난 때문에 도둑질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해체됐을 때, 즉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누구도 정의의 기준을 세울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대로 해동하게 된다. 그리고 폭력이 광범위하게 자행되나 그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이러한 사회해체의 징후가 드러난다.자신의 잘못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피해를 당한 사람이 그 상처를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고, 상처를 입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인간관계는 수립되지 않는다. 결국 진실 규명을 통한 정의의 수립은 사회해체를 막을 수 있는 해독제가 된다.논어 에도 이덕보원(以德報怨), 즉 덕으로 (바르게 세움으로써) 원수를 갚는다 는 말이 있는데, 공군력에 의한 피해를 개인이나 가족의 피해로만 보지 않고 피해의 원인과 배경 규명작업을 통해 그러한 큰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나아갈 경우, 개인과 가족의 한은 공동체의 문제로 승화되어 당사자의 정신적 위로는 물론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물론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으로 보상을 해주는 일도 중요한 위로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의 규명을 현재 살고 있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것으로 만들어 왜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는지, 비극의 가해자는 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됐는지, 그리고 피해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 모두 공감하고 이해하며 공통의 지식을 만들 수 있는 기다.4. 17대 국회, 여야간 현격한 시각차친일진상규명법은 여야가 서로의 안을 갖고 절충점을 찾을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친일진상규명 조사 대상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열린우리당이 당초 단독 강행처리 방침을 바꿔 개정안 처리 시를 늦추었기 때문이다.열린우리당은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의 조사 대상을 경찰은 경시(총경)이상, 군은 소위 이상의 고등관 으로 결정했다. 경찰이나 군에서 경시나 소위 이상의 직책에 오를 정도면 친일 행위를 적극적으로 했다고 봐야 한다는 논리다.여당은 일제시대 경시 이상은 30여 명, 소위 이상은 288명을 파악하고 있다. 여기에 고등문관(군수) 이상 관리 400여 명과 지방행정기관의 장을 등을 포함하면 대략 3,000여 명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친일 문학인 70여명과 친일 교육·학술·종교·언론인 등을 추가하면 6,000여 명이 최종 조사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고 있다.이에 대해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은 행위가 아니라 직책으로 친일파를 골라내자는 것은 마녀사냥식 연좌제로 이어질 수 있다 며 위헌요소 뿐 아니라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고 비판했다.한나라당은 친일행위 조사에 대해 경찰과 군의 경우 헌병 또는 경찰로 범위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일제시대 대민업무를 직접 수행했던 일선 관리들이 반민족 및 친일행위의 주역들이라는 것. 따라서 한나라당은 경찰이나 헌병이었던 사람들을 조사 대상으로 하되 이 가운데 친일 행위자만을 가려내자 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일제시대 경찰관리가 1만 2,000여명, 군입대자가 1만 7,000여명이나 된다는 점을 들며 조사 실효성에 의문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서로 상대방의 법안에 정치적인 저의가 들어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법안에 대해 한나라당이 의심하는 것은 조사대상을 일본군 중좌에서 소위로 넓힌 것 과 언론기관을 포함시킨 것 두가지다. 전자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정치적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국내외 자료의 수집 및 분석에 국한된 측면이 강하다. 다만, 증인 및 참고인에 대한 출석요구와 진술을 청취할 권한은 인정하고 있다.한나라당은 여당 개정안이 조사위원에게 수사기관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하는 등 위헌 및 인권챔해 소지가 크다 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주장대로라면 실질적인 진상규명이 어렵다 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5. 독재정권에 봉인된 의문사들 과거사청산법등으로 접근해야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는 영화 에서 박 전대통령이 엔카 를 부르고, 여색을 밝히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 등을 이유로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사자(죽은 사람)의 명예를 훼손했다 는게 이유다.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문제가 있는 것 이라고 거들었다. 그러나 정말 죽은 자의 명예를 거론해야 할 사람은 정작 다른 곳에 있는 듯싶다. 바로 박정희 정권 18년 치하에서 죽은 사람들과 그 유가족, 동료들이다.생존 비전향 장기수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이름은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임방규씨는 5·16 쿠테타가 일어난 직후인 61년 8월 정부가 대전교도소로 비전향 장기수를 총집결시킨 뒤 특별감옥에 가뒀는데, 그때 모인 사람이 모두 789명이었다. 그런데 북한으로 송환된 장기수, 전향, 비전향 장기수를 포함한생존자, 석방 뒤 사망자 등을 합쳐봐야 200여명"이라면서 "죽은 사람 중에 얼굴만 알고 이름은 모르는 사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 등 죽은 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들은 하루빨리 옥중에서 사망한 장기수들의 애달픈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길은 아직 멀고 험난하다. 현재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를 통해 죽음의 원인과 과정이 밝혀진 장기수는 최석기, 박융서, 손윤규, 김용성, 변형만씨 등 5명뿐이다.동료 장기수들은 최근 끈질긴 노력 끝에 이들 가운데 몇몇은 교도소 공동묘지에 유골로 묻혀 있고, 또 일부는 수감 기록을 담은 신분장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밝혀내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