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세상을 흔드는 설교메리 도너번예수의 공생의 사역의 목적 그리고 설교의 목적을 누가복음 4장 18-19절 말씀을 따라 그 의미를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함이며, 둘째로는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다.누가복음 4장에서 발견되는 이 말씀에서, 예수는 분명히 전통 안에 서 있다. 예수는 새로운 말씀을 표현하기 위해서 오래된 말씀을 사용하면서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을 위해 전통을 해석 또는 재해석 하고 있다. 예수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하고 계신가에 대한 그 무엇인가를 새로운 이해로서 어떤 것이 새로 시작되고 성숙되도록 하는 가능성을 창조한다. 예수에 의해 인용된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필자가 설교의 목적을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설교의 목적은, 선지자나 예수의 경우처럼 삶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한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공간에서 성령이 일하고 교회 공동체가 그 우선순위를 돌아보고 다시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붕괴 혹은 교란이란 단어는 분명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이 단어의 의미를 중요한 것을 미루는 것으로, 혹은 짜증나게 하거나 기다림을 연장시키는 것 등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이 말과 관련된 의미들을 바꾸거나 깨부수거나 아니면 뒤엎어 이 말이 우리 삶에서 생명력을 주지 못하는 어떤 간격이나 틈 등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예수는 사실 자신의 사역을 이런 일들로 이해했다. 그는 복음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난한 자들의 세계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억압을 단절시키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고 억압을 중지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영역을 저들의 삶으로 인도해 들이고자 하였다.바로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이 변화를 기대한다. 이는 즉시 일어나는 변화일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일 수도 있다. 설교는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때로는 우리를 새롭고 도전적인 방향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통상 설교학자들은 설교를 여러 유형, 종류 및 등급으로 나눈다. 설교학자들은 종종 설교가 억압을 규명하고 도전하며 사회의 약자들의 편에 서서 행동하게 할 때 그 설교를 예언적이라고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설교가 신앙 공동체를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확신시키게 되면 그런 설교는 목양적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각각 특징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예로 든다면 예언자와 목양자 사이의 경계선이 안개처럼 흐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삶속의 여러 난제들을 명명함으로써 도전적 언어를 가져오고, 공동체가 스스로 만들어낸 종말로부터 공동체를 구언하기 위한 노력과 책망과 고발의 언어를 선포한다. 그러나 이것이 예언자들이 사용한 유일한 용어들은 아니다. 그들도 놀랄만한 희망과 위로의 말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 그들 스스로 끔찍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로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관찰자였다. 그들은 보고, 들으며, 자신들이 가진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삶의 현실들을 명명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 서론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갈리아주의와 프랑스혁명, 그리고 계몽주의에 관한 시대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의 내용을 통하여 왜 로마카톨릭의 입장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이 필연적이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1-1. 바티칸 공의회의 배경 - 갈리아주의(교황권제한주의)17세기의 프랑스에서는 절대주의가 왕성하게 번창하였다. 이 절대주의는 국왕 루이 14세(1643~1715년)에 의해 특별한 방식으로 구체화되었고, 추기경 리셸리외(Richelieu, 1585~1642년)와 마자랭(Mazarin, 1661년)에 의해 교회에 수용되었다. 이 절대주의는 교회와 종교는 국가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프랑스의 교회는 로마의 중앙 집권제와는 달리 국가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절대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왔었다.즉 프랑스의 국왕이 교황에 대한 지배를 결정한 아비뇽의 유배와 공의회 지상주의를 통해,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헌장을 반포하는 것을 프랑스가 거부함으로써 이미 준비되어 왔다. 갈리아주의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교의 신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갈리아주의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사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교회 정치적인 시각에서 볼 때 프랑스 교회의 자주성―로마로부터의 독립―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프랑스 교회의 자주성은 프랑스, 즉 갈리아 교회를 위한 특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교황 비오 2세는 1460년 공의회 지상주의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 공의회 지상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절대주의의 진행은 프랑스의 국왕들로 하여금 교회에 부단한 요구를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른바 왕의 지상권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프랑스의 국왕들은 어떤 교구에서 공석이 되어 발생하는 성직록과 공석이 되어 있는 자리를 국왕이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였다.국왕 루이 14세는 이것을해 프랑스의 국왕들이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경고했고, 1680년에 발표한 교서를 통해서는 프랑스의 국왕들이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하느님의 처벌을 받으리라고 위협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680년의 프랑스 성직자 회의는 왕의 권리 요구를 지지하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1681년 다시 한 번 더 프랑스 국왕들이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호소하였다.그러나 국왕은 1681년 성직자 전체 회의를 소집하였고, 이 전체 회의는 국왕이 요구하는 권리를 전 교구에 확대하여 적용시킬 것에 동의하였다. 아울러 이 전체 회의는 ‘갈리아의 자유’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는 주교 보쉬에(Bossuet)에 의해 정리되었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1) 교황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지 영적인 권리만을 위임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은 왕을 퇴위시킬 수 없다.2) 교황보다도 공의회가 더 우위에 있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한다.3) 오래 전부터 존속해 왔던 갈리아 교회의 특권은 계속 보장되어야 한다.4) 신앙의 문제와 관련한 교황의 결정은 오로지 전체 교회의 동의를 얻어야만 효력을 발생한다.프랑스의 대다수의 성직자들은 이른바 ‘갈리아의 자유’ 또는 ‘갈리아 4개 조항’을 지지했고, 국왕은 신학 교수들과 교회법 교수들에게 이 조항을 준수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였다. 1682년 4월 11일 교황은 교서를 통해 프랑스 성직자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는 놀랍게도 프랑스 성직자 회의의 결정의 발효를 정지시켰다. 왜냐하면 국왕은 로마와 계속해서 담판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담판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다.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가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즉 ‘갈리아의 자유’에 대해 지지를 보냈던 프랑스 교회의 다수의 주교들은 자신들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서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왕과 타협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랑스 교회를 두 적대 진영으로 분열시킨 얀세니즘과 페브로니우스주의를 통해 계속 이어졌다.1-2. 바티칸 공의회의 배경 -프랑스 혁명프랑스혁명은 사상혁명으로서 시민혁명의 전형이다. 여기서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계급으로서의 시민혁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혁명의 이념은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왕권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에 의해서 여전히 국왕친정과 신권이론(神權理論)을 받들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을 계속하였다.신권왕정 밑에서는 모든 국민이 단순히 국왕의 신하에 불과했다. 그 위에 소수의 귀족·성직자들만이 별도의 특권신분을 구성하고, 국민의 90%를 차지한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면서 우아하고 무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순은 처음부터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였다.그러한 과정에서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재정궁핍에 빠졌다.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에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臨時地租)’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귀족·성직자들은 국왕을 뒷받침하던 사법관료의 핵심인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하고 고등법원이 가진 법령심사권한을 이용해서 왕정고문부의 재정안(財政案)에 저항하였다.이렇게 왕권 내부에서 투쟁하는 사이에 재정총감 칼론과 그 후임자 브리엔이 실각하고, 88년 8월에 네케르가 재차 재정총감으로 기용되었다. 네케르는 고등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전국 삼부회를 다음해에 소집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였다.이렇게 왕권이 실추됨으로 인하여 프랑스혁명만큼 교황직이 교회안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준 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교회 질서가 붕괴된 이후 교회 재건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바로 교황직이었다. 프랑스 형명은 1790-91년 급진적 갈리아 주의에 터해, 완전히 국가에 통합된 말잘듣는 국가교회(입헌교회)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이 시도는 그러나 프랑스 교회의 분열을 야기했다. 결국 교황 비오7세가 주교단을 새로 편성하고 교구들의 구획도 완전히 다시하게 된다. 이와 같은 혼란은 결국 그레고리 교황 말기에 교황국가는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비오 9세에 이르러서는 교회는 교황국가를 상실하고 만다.1-3. 바티칸 공의회의 배경 - 계몽주의계몽주의는 이성, 즉 ‘자연의 빛을 다방면에 미치도록 하는 것으로 구습(舊習)을 타파하고자 하는 18세기에 주로 프랑스, 독일에서 전개된 사상운동이다. 특별히 신학적 분야에 있어 계몽주의는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교리 전체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교회라는 암흑에서 인간의 탈의 사상은 교회안으로 침투하여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반로마 사상이 싹트게 되었고,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 교회의 제도, 관습,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계몽주의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출판기술과 교통의 발달로 유럽전지역에 확산되었고, 계몽사상을 기저로 무신론, 자유주의, 이성주의, 자연주의, 실용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등 완전히 새로운 사조들이 발생하여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영향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2. 본론2. 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비오9세는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유럽정세를 파악하고, 세계 공의회 개최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트렌트 공의회(1545-1563)를 개최한지 약 300여년만의 일이었다. 비오9세는 각 유럽의 나라들이 교황국가로써 견고히 세워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정치, 사회, 경제 이념의 급격한 사회변화와 인근 나라들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등 자국의 야욕이 이를 가로막았다. 결국 그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공포되어 300여년간 통용되어 온 교회 법을 현실성을 감안하여 새로 개정하의,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사회주의, 가정국가 예속주의, 그리스도교 혼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자유방임주의, 교황 속권부정주의, 교권을 속권에 예속시키려는 갈리아주의, 독점국가주의, 그리고 인간사회의 종교경시사상을 진보라고 예찬하며, 신적 제도를 세속화시키고, 교회와 국가의 완전분리 및 절대적인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연주의 등이다. 이에 각계층의 많은 인사들이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의식적인 진부성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개심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교황은 오류목록의 절대적인 효력을 위한 공의회 개최 의사를 밝히고 타진하는 가운데 8명의 주교들이 교황의 무류지권 정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교황청은 1868년 공의회 소집칙령을 발표하고, 동방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영국 교회에 각각 가톨릭적 일치에로 귀의할 것을 요청하는 공의회 초청장을 발송하지만, 이는 수긍되지 않는다.2-2.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개과정공의회 개최 발표와 더불어 가톨릭 교회안에서는 지난 수년간 대립의 양상을 띠던 파가 부각된다. 한편으로는 교권을 반대하던 갈리아주의자들과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려는 자유주의파 다른 한편으로는 울트라 몬타니즘(알프스산 북방 친로마세력) 무리들과 새로운 사조에 대한 보수주의 세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결국 교황 무류성의 교의화에 각 반대의 입장과 찬성의 입장을 고수할 양대 세력으로 발전하게 된다.한편 독일의 신학자들은 이미 울트라몬타니즘의 발전 상황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대표적인 인물은 뮌헨의 신학자 이냐시오 될링어이다. 그는 가톨릭적 신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1864년 오류목록이 발표되었을때 될링어는 그 발상과 내용들이 가톨릭 교회의 시대착오적인 모순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후 될링어는 울트라 몬타니스트들의 교황 무류성 주장과 옹호에 맞서 ‘야누스’라는 가명으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적인 교도권을 반박하는 논설을 아우구스부르크 신문에 연재한다. 이 논설은 공의회 개최 직전인 1869년 7월에 교황과 공의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엄청난 잇슈.
셀 목회의 유형과 핵심오늘날 세계 도처의 교회에서 실험단계를 거쳐 정착과 확장과정에 있는 몇 개의 셀 목회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알아보며, 다양한 유형의 셀 목회를 이해하고 그 차이점을 알아보도록 하겠다.제1장 셀(Cell) 목회셀 목회는 교회를 셀 형태로 조직하고 각 셀들이 하나의 교회처럼 목회하는 것을 말한다. 셀 목회는 목회의 내용도 특이하지만, 교회의 조직이 목회지향적인 소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흔히 셀 교회라고 부른다. ‘셀 교회’(Cell Church)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목회 현장에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미국 침례교회의 목사 랄프 네이버(Ralph W. Neighbour)이다. 그가 1989년에 쓴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Where Do We Go from Here?)라는 책은 셀 교회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찾아 나선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첫째, 전통적인 교회의 한계 -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가 ‘프로그램 중심’(Program Base Design)이라는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둘째, 세계적인 인구 폭발 - 이 세대에 태어나는 수십억의 신생아들을 추수하기 위해서는 ‘단순 증가’의 개념이 아닌 ‘배가 증식’의 방식으로 전도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셋째, 지나치게 부적절한 교회의 구조들 - 기존의 교회 구조는 복음 전도와 목회에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극복하는 새로운 유형의 교회가 필요하다.네이버는 전통적인 목회방식으로는 현대 교회의 목회적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셀 교회’라는 새로운 목회 모델을 제시하였다. 셀 목회는 소극적으로는 전통적인 목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출발하였고, 적극적으로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델을 추구하는데서 시작되었다.제1절 셀 목회의 신학셀 목회는 성경과 신학적인 원칙에 기초하며,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들을 가능하면 배제하고,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의 원리를 실천하는 목회이다.1. ‘공지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아버지들은 훈련을 받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흥미 그룹 구조는 아버지들을 통해 셀 그룹을 형성하고 확장해 나간다.5. 셀 목회의 유형(3) : 열두 제자 목회(G12)열두 제자 목회는 콜럼비아의 세자르 카스텔라노스(Cesar Castellanos) 목사가 시작하여 발전시킨 모델이다. 그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구역 제도를 교회에 적용하여 수 천 명의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시켰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정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목회조직을 열두 제자 목회로 전환하였다. 그 이후로 교회는 급성장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가 되었다.열두 제자 목회는 말 그대로 한 명의 리더가 열두 명의 구성원을 모아 목회한다. 교회적으로 볼 때 최초의 리더는 담임목사이다. 담임목사와 함께 시작한 열두 명은 각각 전도하여 자기 제자 열두 명을 만들고 그룹의 리더가 된다. 이렇게 하여 모든 구성원들은 각자 자기 그룹을 갖게 된다.6. 셀 목회의 유형(4) : 부서 중심의 셀 목회부서 중심의 셀 목회는 코트디부아르 공화국 아비잔의 다이언 로버트(Dian Robert) 목사가 발전시켰다. 로버트 목사는, 서부 아프리카인들을 묶는 영적인 세력을 대적하고, 불신자들의 세계에 파고들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말씀을 연구하던 중에, 이 모델을 개발해낸 것이다. 부서 중심의 셀 목회는 셀 구성원들이 서로의 필요를 나누거나 상처를 치료 받는 일이 수월하고, 서로의 장벽을 넘으려고 노력할 것 없이 같은 영역에 있는 사람들끼리 부담 없이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부서를 중심으로 하는 셀 목회는 크게 보면 두 개의 구조로 되어 있다. 하나는 셀 그룹들이고, 다른 하나는 셀을 지원하는 부서들이다.이상에서 네 가지의 셀 목회 유형들을 소개하였다. 셀 목회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의 네 가지 셀 목회 외에도 교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또 다른 셀 목회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섬김, 청지기도표에 의하면, 전통적인 교회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교회를 구성하고, 그들이 교회 사역의 대부분을 감당하며, 대중 집회가 교회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반면에 가정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각자 교회와 사회에서 자신의 것으로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두 가지 형태의 교회는 모이는 장소에서부터 교회 사역의 내용과 구성원의 역할에 이르기까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또한 가정교회는 셀 교회와도 다른 면들이 있다. 셀 교회 역시 신약 성경의 가정교회, 곧 셀 그룹에서 그 원형을 찾고 있다. 그러나 셀 교회는 신약성경의 가정교회와 다른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셀 교회가 소그룹으로 모인다는 점에 있어서는 가정교회와 동일하지만, 전자는 지도자 중심의 소그룹이고, 후자는 지도자의 기능이 거의 없는 소그룹이다. 셀 교회는 도시문화를 반영하고 가정교회는 마을문화를 반영한다. 가정교회는 셀 교회보다 더 신약 성경의 초대교회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제1절 가정교회의 철학과 신학가정교회는 신학교, 교회 건물, 목사가 없이 유지되는 교회이다. 특히 중국의 가정교회에는 신학 연구서, 교회 조직 체계 그리고 교회법과 같은 자료들이 전무한 상태이다. 오늘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정교회에 관한 연구서 및 안내서는 몇 권에 불과하다.1. 가정교회의 철학가정교회는 ‘지도자 없는 부족’의 형태로 생존한다. 가정교회를 연구하는 이들은 교회의 사명을 성취하기에 가장 적절한 교회가 바로 가정교회라고 본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다.첫째, 가정교회는 대형집회가 허락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에 유리하다. 가정교회는, 이미 중국에서 그 진가가 입증되었듯이, 공적인 장소에서 대형집회(Celebration)를 할 수 없는 나라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다. 복음전도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 가정교회는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둘째, 가정교회는 도시와 마을문화를 모두 수용할 수 있다. 전통적인 교비해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장점들 중 몇 가지를 들면 아래와 같다.1) 가정교회는 단순히 증가하는 교회가 아니라 제자화를 통해 배가하는 교회이다.2) 가정교회는 적고 유연한 삶의 방식과 쉽게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통해 박해를 이기거나 저항하는 힘이 강하다.3) 가정교회는 교회 성장의 장벽들로부터 자유롭다.4) 가정교회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5) 가정교회는 목회적 양육의 딜레마를 깨뜨린다.6) 가정교회는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7) 가정은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장소다.8) 가정교회는 리더십의 위기를 해결한다.9) 가정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분을 극복한다.10) 가정교회는 보다 성경적이다.11) 가정교회는 비용이 적게 든다.12) 가정교회는 도시 교회를 부활시킨다.가정교회는 물론 장점만 가지고 있는 교회는 아니다. 네이버에 의하면, 가정교회는 다른 가정교회와 연계성이 약하고, 셀 교회만큼 전도에 적극적이지 못하다. 가정교회는 공격적으로 전도하지 않기 때문에 셀 교회보다 느리게 성장한다는 약점도 있다. 그러므로 네이버는 가정교회는 진정한 교회부흥 운동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심손은 가정교회가 초기에는 서서히 성장하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면 셀 교회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주장에는 모두 일리가 있다.제3장 열두 제자 목회(G12)열두 제자 목회는 본래 셀 교회의 여러 가지 모델들 중에 하나인데,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MCI(Mission Carismatic International) 교회를 담임한 적이 있는 세자르 카스텔라노스(Cesar Castellanos) 목사가 이 모델을 활용하여 큰 결실을 거둔 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카스텔라노스의 영향을 받은 오바자 탄도 스티아완(Obaja Tanto Setiawan) 목사는 인도네시아 솔로시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가족 교회’(GBI Keluarga Allah)를 같은 식으로 제자를 삼아 나간다.2. 열두 제자의 번식?먼저 한 사람의 리더가 자신의 구성원들을 제자로 삼아 훈련을 시킨다. 이 모임은 열두 명이 모두 각자 자기 셀의 리더가 된 후에도 스승으로부터 목회지도를 받기 위해 계속된다.?열두 명의 제자 중에 지도자 훈련을 마치고 전도하여 자기 제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씩 자기 제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씩 자기 셀을 만들어 운영한다. 그러면서 이전에 속했던 셀에도 계속 참여한다.각 셀은 처음부터 열두 명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두 세 명만 있어도 셀 그룹을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꺼번에 열두 명으로 셀을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각 구성원들이 동시에 동일한 훈련을 받거나 셀 리더로 성장하지 않는다. 얼마나 빨리 자기 셀을 갖느냐 하는 문제는 개인의 자질과 은사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제4절 열두 제자 목회의 지도자열두 제자 목회는 본래 모든 사람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MCI 교회에서는 교회 내의 모든 열두 제자의 최상위에 있는 열두 명을 특별히 선발하여 훈련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각자 열두 명의 제자들을 모아서 훈련하도록 하였다. 카스텔라노스 목사는 자신이 가르친 열두 명, 즉 MCI 교회에 속한 모든 열두 제자의 최상위에 있는 열두 명의 자질과 그들 아래 있는 열두 제자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어느 정도 차별을 둔다.1.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훈련 프로그램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질 때 훌륭한 셀 그룹 지도자들이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다. 이를 위해 MCI 교회에는 모든 성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들을 열어 놓고 있다. 코미스키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MCI 교회에는 열 단계의 훈련과정이 있다.제1단계(최초의 조치) : 예배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배 후에 상담자를 만나서 카드를 작성하고 적절한 동질그룹에 소속된다.제2단계(셀 그룹 안에서의 생활) : 새신자는 셀 그룹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한다.제3단계(예배교육) : 새신자는 평신도 작한다.
윌리엄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 7-11장 요약7장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하나님의 사역적 권능의 실행에 있어 하나님의 작정이 선행, 이는 모든 것 중 가장 완전하며 현저하게 신적 본성과 일치.*하나님의 작정:하나님이 자신의 전능한 능력을 통해 그의 경륜(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시겠다는 확고한 결정.(엡1:11)*하나님의 작정:하나님의 불변성, 진리, 신실성이 나타남. 불변성은 하나님의 작정이 영원토록 변역되지 않는다는 점, 진리는 하나님은 자신이 작정한 것만을 언명한다는 것(행10:10, 롬3:4-하나님의 말씀들이 다르게 언명될지라도, 그 의미는 항상 하나님의 작정과 일치함), 신실함은 그분이 자신이 작정한 모든 것을 작정한 대로 이루신다는 것에서 나타남.*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영원함. 하나님의 작정은 경륜을 포함. 하나님의 경륜:그분이 예지와 의지에 의해 이미 승인된 것을 성취하시는 최선의 방식에 대해 심사숙고하심. 경륜은 완전한 판단으로 인해 하나님에게 귀속됨.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단번에 인지하고 의도하심.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심사숙고와 비슷함. 이러한 경륜의 완전성으로 인해 제시된 목적, 그 목적에 대한 정신적 개념, 의도와 의지의 일치가 일어남.*경륜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 즉 하나님의 사역적 권능에서 현현되고 하나님의 사역들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 혹은 완전성(하나님이 본성적으로나 성급히 혹은 강제에 의해 사역하시지 않고 최고의 완전한 이성으로 사역-만물의 전형적 원인으로 선재)임.*만물에 대한 관념은 신적 본체임. 이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이해되고 피조물들에 의해 모방될 수 있는 본체로 최소한 신적 완전성의 형상이나 흔적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피조물에게서 표현될 수 있다는 것. 즉 피조물들이 신적 정신에서 사고되는 한, 이는 피조물들의 본성에 대한 관념 혹은 형상임.*분석에 의해 지식을 습득하는 인가에 있어서, 관념은 사물 자체로부터 유입됨. 먼저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 다음에 이들이 인간의 감각에 들어오고 최종적. 하나님은 단순한 예지의 지식을 통해 인식하는 사물들은 하나님의 충족성에 의해 인식. 하지만 환상의 지식을 통해 인식하는 사물들은 하나님의 사역 혹은 하나님의 의지의 작정에 의해 인식(시33:15, 사44:7)*중간적 지식-하나님의 의지의 작정 이전에 만약 이러 저러한 자유원인들이 어떤 조건을 만나면 어떤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 가설적으로 인식하신다는 상상-은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과는 부합되지 않음. 왜냐하면 중간적 지식이란 사건들이 하나님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의 일부를 대상에 의존하게하기 때문.*신적 관념은 사물에 대한 다양한 관념들만큼 다양한 형식들을 가지고 있음. 원리들에 대해서 신적 관념들은 예지라고 불림.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모든 개별적 사물을 모든 개별적 사물로 인지. 개별적 사물의 진리에 대해서 이는 지식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전지를 의미. 사물이 자신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존재에 대해서 이는 선지식이라 불림. 진리들의 상호 연관성에 대해서 이는 지혜라고 불림. 이로써 하나님은 각 사물에 어떤 것이 속하며 속하지 않는지를 인식. 실천에 있어서 지정된 전체적인 순서에 대해서 이는 신중이라고 불림. 마지막으로 실제적인 실천에 있어서 이는 기예라고 불림.*이러한 단어들은 종종 성경에서는 불완전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신적 예지를 설명하기 위해 상호호환적으로 사용되며, 상호혼동되지는 않음. 일부 신학자들이 미래의 우연적인 일들에 대해 하나님에게 귀속시키고 있는 추측적 지식이란 신적 본성과 완전성과 양립될 수 없음.*하나님의 선한 뜻이란 모든 것을 자유롭게 효과적으로 결정하시는 신적의지의 행위. 성경에서 선한 뜻이란 통상적으로 하나님 스스로 구원적 선을 원하고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지칭.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륜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경륜에 대해 선한 뜻이라는 말을 사용. 이 의지는 진정으로 지극히 자유롭다. 왜냐하면 이는 일치하지 않음.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의 행동들에 선행하고 본 행동들의 결과로서 연유되는 어떤 것을 원하실 때 동일한 것을 원하지 않고 다른 것을 원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허용될 수 없음.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지는 가변적이고 피조물의 행동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 피조물의 행동이 변화되면 하나님의 의지 자체도 변화되게 됨. 동일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된 언어형식-하나님이 원하시면 나는 이러저러한 것을 하겠다-은 항상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님. 인간이 원한다면, 하나님이 어떠한 것을 원할 것이라고 언명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함.*하나님의 의지는 가장 큰 것이나 가장 작은 것, 우연한 것, 필연적인 것, 자유로운 것 등 예외없이 모든 것을 결정함.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의지는 단순하고 또한 보편적으로 제1원인이 되지는 못했을 것임.*의지에서의 사역 방식은 신적 지식과 능력에서와 다름. 지식은 인식될 모든 것을 인식하고 능력은 모든 가능한 일을 행할 수 있기 때문. 신적 지식과 능력은 실제로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며 장차 존재할 모든 것들을 포괄함. 하지만 하나님의 의지에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원하지 않고 그가 원해져야 한다고 판단한 모든 것 혹은 실제로 일어난 모든 것을 원하심.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은 전지하고 전능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무엇이나 의도한다고는 말할 수 없음. 하나님은 원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효과적임. 하나님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데 방해 받거나 좌절되지 않음. 만약 하나님이 어떤 것을 원하시고 이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전적으로 지복하거나 완전할 수 없기 때문.*하나님의 의지는 미래의 모든 일에서의 필연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확실성만을 의미함. 하나님의 의지는 참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의지가 일정한 결과들이 일정한 원인들 이후에 일어나도록 효 않았을 것임. 이미 흘러간 날들은 결코 종결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창조의 날의 도달될 수 있었음. 따라서 창조의 행위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도구적이든, 원리적이든, 원인이 아니었고 원인이 될 수도 없었음. 창조된 모든 것은 매우 선함. 이는 창조자가 염두에 두었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 피조물의 선이란 그 사물이 지닌 용도에 완전히 적합한 것. 용도는 개별적일 수도 있고, 보편적일 수도 있음. 개별적인 용도란 어떤 사물이 그 본성상 지닌 고유한 용도. 보편적인 용도란 우주의 완전성을 위해 한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함께 보지(保持)하고 있는 용도.*모든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선으로 인해 본성적으로 그들이 연유한 하나님을 지향함. 제2의 존재는 제1의 존재로부터 나오고, 제1의 존재를 위해 있기 때문(롬11:36). 자연물들은 하나님을 지향함. 시간은 모든 피조물들과 공존함. 장소, 즉 피조물의 연장이 규정되는 공간도 역시 사물과 공존함. 시간과 장소는 엄격히 말하자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창조되거나 혹은 연관됨. 세계의 창조는 세계의 부분들에 따라 구분됨. 세계의 부분들의 창조는 동일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았고, 6일동안 부분부분 성취됨. 절대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완전한 세계의 부분들이 창조됨. 절대적으로 완전한 사물의 창조는 태초에 질료적이고 형상적인 원리들이 완전한 존재안에 심겨진 사물들에서 인지됨. 이러한 피조물들은 생성이나 소멸과 같은 본질적인 변화를 겪지 않음. 절대적으로 완전한 창조의 부분들이란 지고의 하늘과 그곳에 거하는 천사들임. 지고의 하늘이란 거룩함의 거주지로, 영원한 복락에 속하는 모든 것들로 충만한 곳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음. 이는 3층천, 최고의 하늘, 하늘들의 하늘, 낙원이라고 명명됨.*천사들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도록 창조된 최초의 완전한 영들. 천사들은 첫째 날에 창조됨. 천사들은 인지하는 이성이 너무도 탁월하여 천사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게 하시는지 또 그것들이 어떻게 창조되었는데, 몸이 먼저 예비되고 후에 영혼이 불어넣음. 인간의 탁월성은 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했다는 사실에서 나타남. 형상에 있어서는 첫째, 형상이란 어떤 것과 유사하다는 것. 둘째, 형상은 모사로서 어떤 것을 모방함으로 형성되고 구형되었다는 것. 셋째, 특정한 본성에 있어서든, 최고의 완전성에 있어서든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인간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자신의 분수대로 하나님의 최고 완전성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함. 하나님의 형상은 본래적이나 부분적으로는 본성 자체, 본성의 원리들과 완전한 결과이며, 어떤 방식으로는 본성의 행동임. 인간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내적이고 동시에 외적임. 내적인 것은 몸과 영혼의 완전성임. 몸의 완전성은 하나님의 의지에 부합되는 아름다움과 유용성의 구현에서 나타남. 영혼의 완전성은 그 불멸의 본성과 자신의 행동들에서 자유를 구가하게 하는 능력과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이에 부합되는 은사들의 수여에서도 현현. 인간의 외적 완전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다른 피조물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구성됨. 따라서 인간은 땅을 경작하고 땅의 식물들로부터 음식을 구하도록 위임받음. 여기서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주인인 인간에게 다가오게 되었고, 주인으로서 인간에게 이름들이 부여됨. 이러한 일들이 결합되어 인간의 완전성이 완성됨. 그 완전성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 혹은 신적완전성이 연원. 인간의 창조는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짐. 이렇게 창조를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은 자연의 질서를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을 알게 함.9장 섭리*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의 경륜에 일치하도록 현존하는 피조물들을 만물안에서 보존하시는 사역. 섭리는 일반적일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모든 사물에게 미침. 섭리는 여하한 원인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원인들을 결정하고 따라서 만물의 보편적이며 개별적인 원인임. 하나님의 섭리는 직접적(홀로 유일한 원인으로 만물을 보존)존됨.
1장 로빈슨의 생애해돈 로빈슨은 1931년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해돈 로빈슨은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0세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헌신적으로 양육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아들을 믿음으로 양육했지만 어머니 없는 아픔과 외로움으로 인해 어린 로빈슨은 점점 주위에 있는 질이 좋지 않은 친구들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으나 이내 잘못됨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주일학교 교사인 마이겟 선생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된다. 그는 이후 유명한 설교자인 해리 사이언사이드 박사의 설교를 듣고 설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로빈슨은 밥존스 대학교에서 학부를 마친 후 달라스 신학교와 남감리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로빈슨 박사는 항상 말하길, 강해설교는 방법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는 단일한 사고 단위가 되는 본문에서 먼저 ‘빅 아이디어’를 찾고 그것을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전개되도록 설교했다. 그의 저서들 중에서는 ‘강해설교’가 가장 유명하다.2장 성경적 설교자의 자세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써 꼭 가져야 할 자세가 있다. 첫째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높은 관점이며 확고한 성경관이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말 ‘성경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라는 말을 믿어야 한다. 로빈슨은 ‘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가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일하는 한가지 이유는 우리가 말하는 것 이면에 있는 본문의 권위와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갖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두 번째 자세는 모든 성경이 유용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을 성경상에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 본문 중에 우리가 원하는 것들만 여기저기 뽑아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무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높은 성경관과 모든 성경이 유용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세 번째 자세는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설교자들은 영혼 깊숙이 가질 때 하나님 앞에 진정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네 번째 자세는 성경을 연구하고 상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감정 뿐만 아니라, 차가운 지성,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생각을 읽기 위해 깊이 사고해야 한다.마지막으로 성경은 오늘의 문화에도 적실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기록된 것을 준 것은 우리가 앉아서 그 옛날 사람들을 판단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위해 준 것이다. 설교자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적실성에 맞게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3장 설교자의 설교준비설교준비라는 말은 두단계로 구분한다. 하나는 육적인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부분이다. 전자는 먼저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하는 문제와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설교의 내용과 설교의 방법에 관한 분류이다. 로빈슨은 설교의 내용에 대해 평소에 성경을 충분히 연구하면 설교할 내용이 생긴다고 했다. 늘 연구하는 습관이 방법이라는 것이다. 설교의 방법은 로빈슨은 의사소통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큰소리내어 준비하기를 대표적으로 말하고 있다.육적인 부분에 반하여 설교의 중요한 영적부분은 기도이다. 로빈슨은 ‘우리의 영혼이 충만할수록 고갈되지 않고 설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설교를 준비하기 전과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실행하며 그 이후에도 기도해야 한다.4장 로빈슨의 성경적 설교의 특징강해설교를 설교의 여러방식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모든 설교는 강해적이어야 한다. 강해설교 만이 성경적 설교가 될 수 있다. 로빈슨은 강해설교를 ‘문맥에 비춰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고 성령의 인도아래 연구한 결과를 성령께서 먼저 설교자의 삶에 적용하고 그 다음 그를 통해 청중에게 적용하는 성격적 진리의 제시이다’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성경 본문의 의미를 오늘날 청중에게 적용하는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