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1. 그는 누구인가?2. 업적(1) 인간적 매력으로 인재 포용 ' '능력이상' 실력 쏟게 만들어...(2) 용인(用人)의 천재 조조(3) 조조의 비정과 냉혹한 결단3. 조조에게서 배우고 싶은 점(1) 호방한 기개의 소유자(2) 엄격한 정치가(3) 탁월한 전략가(4) 위대한 문학가1. 조조 그는 누구인가?자 맹덕(孟德). 묘호(廟號) 태조. 시호는 무황제(武皇帝)라 추존되었다. 패국의 초 출생. 환관의 양자의 아들인데, 황건란 평정에 공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어 마침내 헌제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을 휘두르게 되었다. 화북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는데, 208년 손권·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싸워 대패, 이후도 그 세력이 강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승상, 213년 위공, 216년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뤄양에서 죽었다.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두 아들 조비·조식과 함께 시부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의 흥륭을 가져오게 하였다. 후세에 간신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를 재평가하는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삼국지에는 수많은 영웅이 나온다. 인덕을 가춘 촉한의 황제 유비, 수많은 인재와 비옥한 토지를 가진 오나라의 황제 손권 그리고 실질적으로 삼국을 통일한 사마 의를 비롯하여,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지략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며, ‘천한 삼분 계획’을 세운 제갈량, 최고의 무장 여포, 지/덕/무를 갖춘 삼국지 최고의 장수 관우 그와 함께 필적하는 능력을 가진 장비, 조자룡, 하북의 원소 등 수많은 인물이 있는데도 난 그를 성공한 지도자로 선택하였다.내가 그를 선택하게 된 계기라고 해야 하나. 삼국지연의에 보면은 인물 감정가로 유명한 허자강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조는 치세에는 능신이고 난세에는 간웅이다” 난 이 말이 참 좋다.그리고 다들 조조를 나쁘게만 평하는 것이 정말 싫다.중국 학자 곽말약(1끝에 터득하는 것이다. 격변기를 거친 우리나라 창업세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남이 자기에게 반하게 하려면 자기가 먼저 사람에게 반해야 한다. 조조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천부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조조가 원소에게 이기고 전쟁 뒤처리를 하는 자리에서다. 원소의 참모로서 전쟁 초에 조조를 비난하는 격문을 썼던 진림이 잡혀왔다. 그 격문은 명문장이었으나 조조에겐 매우 아팠다. 환관 출신인 조조 집안의 약점을 까발리면서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조조가 매섭게 물었다.“격문을 썼으면 썼지 어찌 그렇게 모질게 썼느냐.““제가 하는 일은 화살과 같아서 시위에 올려진 이상 날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측근들이 승상의 집안을 욕했으니 죽여 본보기를 삼자고 떠들었다. 그러나 조조는“나만 욕했으면 됐지 우리 조상까지 욕할 건 없지 않았느냐. 앞으론 나를 위해 네 좋은 재주를 써라” 하며 용서해주고 자기 참모로 삼았다. 진림은 당대의 문장가로 세상이 알아주던 지식인이었는데 그 뒤 조조를 위해 충성을 다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지식인 사회의 인심과 지지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됐다.조조는 곽가의 재주를 아껴 크게 총애했다. 곽가를 만나보고 조조는 내 더불어 천하를 도모할 사람을 만났다고 기뻐한다. 곽가 역시 내 뜻을 알아줄 진짜 주인을 만났다고 좋아한다. 그 곽가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곽가의 주검 앞에 선 조조는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통곡한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고 “여러분은 나와 같은 연배이고 곽가는 한 세대 젊어 우리의 앞날을 부탁할까 했는데 이제 그가 갔으니 누구에게 부탁할꼬” 하고 크게 탄식한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목숨만 겨우 붙어 형주로 도망 갈 때다. 그 절박한 패주 길 속에서도 씩씩하던 조조가 안전지대에 도착하여 한숨 돌리자마자 크게 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를 묻자“곽가가 있었으면 나를 이토록 참패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 라며 다시 우는 것이었다. 주위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한다.조조가 원소군을 격파한 뒤 그 잔당을 쫓로 시작은 했지만 곧 가족회사의 한계를 느낀다. 그때부터 조조는 대담한 외부수혈을 하는데 싸움에 이겨 다른 나라를 점령할 때마다 적군 가운데 좋은 인재를 발탁해 쓴다. 적군뿐 아니다. 황건적이나 산적 가운데에서도 재주가 출중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중용했다. 조조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세상의 평판이 중요해졌는데 그땐 이름 있는 명망가를 간판으로 데려다 놓는다.조조는 숨은 인재를 발굴해 낼 줄 알았다. 재주가 넘쳐 일찍 빛을 발하는 사람은 그들대로, 대기만성형의 둔중한 사람은 그들대로 조조는 잘 골라 썼다. 사마의 같은 사람은 큰 그릇이기는 하나 눈에 잘 띄지 않는 타입인데 조조는 빨리 알아보고 데려다 쓴다. 처음엔 사마의가 많이 고사했으나 조조의 거듭된 요청에 수하로 들어간다. 만약 조조 밑에 안 갔다간 목숨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 당시엔 출중한 인재를 자기편에 못 끌어오면 차라리 없애버리기도 했다. 적의 편에 가담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사마의를 자기편에 끌어왔기 때문에 위나라는 촉나라 제갈공명의 거듭된 공세를 막을 수가 있었다. 제갈공명도 천재적 군사였지만 사마의도 그에 못지않은 전략가였다. 날카로운 공명의 공세를 사마의가 둥글게 잘 막아냈다. 사마의가 없었더라면 제갈공명은 북벌의 꿈을 이루었을지 모른다. 위나라에 행운이고 촉한엔 통한이다. 공명 때문에 사마의가 그늘에 가려지지만 높은 지략과 안목, 행동력에 있어서 두 사람은 막상막하였다. 이런 사마의를 일찍 알아보고 자기 진영에 붙잡아 둔 조조의 안목은 정말 놀랍다 할 것이다.조조 밑에 사람이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 나섰다. 조조가 56세가 되었을 때 인재를 모으려고 발령한 구현령을 보면 조조의 인재관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내용을 보면 예부터 왕조를 부흥시키고 치세를 잘한 황제는 모두 훌륭한 인재의 도움을 받았다. 현인을 발견하려면 윗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현인은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다. 청렴하고 결백한 선비가 아니면 안 된다느니 하는 한가한 보고 조조에게 다시 한 번 감복했을 것이다(3) 조조의 비정과 냉혹한 결단조조가 감성적인 면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덤이지 본질은 아니다. 감성적 리더십만으론 일시적으로 인심을 얻거나 좁은 땅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천하를 차지하긴 어렵다. 부드러운 감성 밑엔 강철 같은 의지와 냉혹한 계산이 깔려 있어야 한다. 옛말에 필부의 만용과 아녀자의 인정으론 천하를 도모하기가 어렵단 말이 있다.일을 하는 데 있어서 용기가 필수적이지만 용기도 절제와 계획성이 필요하며 인정도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기업경영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크게 성공한 경영자를 보면 어떨 땐 인정이 넘치는 것 같고 어떨 땐 냉혹하기 그지없는 것 같아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 복잡한 성격이 아니면 그 많은 사람을 겁내게 하면서 승복시키고 또 좋아하게 하며 따르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마키아벨리의 은 원래 정치에 관한 명저이지만 요즘 경영학에서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권력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에는 군주는 부하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도 되고 사랑도 받는 것이 가장 좋지만, 만약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두려움이 먼저라 했다. 은의로 맺어진 관계는 배신당하기 쉬워도 보복의 두려움이 있으면 여간해선 배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외환위기 이후 도산한 많은 문제기업을 보면 기업이 기울어질 때 내부 배신이 많으며, 그런 기업일수록 경영자가 마음이 약하거나 약점이 많아 부하들을 달래주기만 하고 공적인 조직기강은 엄하게 못 다스린 경우가 많다. 배신이란 처음부터 작정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하는 수가 많은데, 그땐 예상되는 보복을 감수하기보다 차라리 은의에 눈감게 된다는 것이다.조조의 일생을 보면 따뜻한 감성도 자주 보여 주지만 아울러 비정함과 냉혹한 결단으로 점철되어 있다.동탁이 낙양에 들어와 권력을 잡았을 때의 일이다. 조조의 실력을 잘 아는 동탁은 같이 일하자면서 좋은 자리를 준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 정권유 때문이다. 장차 조씨 왕국에 장애가 되는 것은 미리 없애 버리는 것이다.조조는 평소 부하들을 엄격히 관리했다. 공식적인 감찰기구 외에 비밀조직을 두고 물샐틈없는 감시를 했다. 그 책임자로 평판이 별로 안 좋은 사람을 임명했다. 과연 그는 권력을 빙자해 횡포를 부리고 말이 많았다. 옆에서 그 사람이 저질이니 경질해야 한다고 말하니 조조는 “당신은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른다. 남의 뒷조사나 하고 비행을 캐는 일을 마음씨 좋은 어진 군자가 할 것 같은가. 다 용도가 있어서 쓰고 있으니 가만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과연 그 사람은 남의 비위를 캐고 불편한 사람 숙청하는 데 탁월한 공로를 세운다. 그러나 그 횡포가 심해지고 원성이 높아가자 비위를 문제 삼아 적당히 처단한다. 악인은 악인대로 쓰임새에 맞게 쓰고는 용도 폐기한 것이다.조조는 통치권에 관련되는 죄에는 더욱 냉혹했다. 조조는 명목상이지만 황제를 모시고 있었다. 조조는 한나라 승상이었으므로 형식상 한나라 황제 헌제의 신하다. 그러나 조조가 모든 실권을 쥐고 있어 황제는 그야말로 허수아비였다. 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분 아래 조조 군사들이 황궁을 겹겹이 에워싸고 출입자를 일일이 체크했다. 심지어 조조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황제를 직접 감시했다. 이때 위 나라는 실제 독립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형식상은 모두 한나라의 신하로서 황제를 받들어 모시는 형국이었다. 조조가 한나라의 승상으로서 천자의 이름을 빌려 천하를 호령했던 것이다.허수아비 노릇에 앙앙불락(怏怏不樂)하던 황제가 어느 날 조조를 제거하란 밀조를 내려보낸다. 옛날 황제가 권력 있는 신하를 제거할 때 쓰던 수법이다. 성공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조조는 물샐틈없는 정보망을 깔아 놓고 있었으므로 곧 발각된다. 그때 조조는 황제는 차마 손대지 않았지만 황후를 가차 없이 처단한다. 황후가 벽장 속에 숨었는데 병사로 하여금 벽장을 부수고 들어가 끌고 나가게 했다. 보다 못해 황제가 좀 인정을 베풀어 줄 수 없겠느냐고 애원해도 “만약 이번 일이 의병을
스포츠카의 역사와 디자인 (생활속의 디자인)학과 : 학번 : 이름 :목차1.스터츠 베어캣 스피드스터 (1912년 미국) 2.포르쉐 356A 스피드스터(1956년 독일) 3.MG MGA 트윈 캠 로드스터 (1959년 영국) 4.메르세데스 벤츠 190SL (1964년 독일) 5.셸비 코브라 289 (1964년 미국) 6.마제라티 기블리 SS 스파이더4.9 (1971년 이탈리아) 7.BMW 3.0 CSL (1972년 독일) 8.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 (1993년 독일) 9. 2000년 이후의 스포츠카1.스터츠 베어캣 스피드스터 (1912년 미국)1911년부터 약 20여 년간 자동차를 제작한 스터츠사의 역사는 베어캣에서 시작되었다. 1911년 5주만에 제작한 베어캣이 인디애나폴리스 500마일 경주에 참가해 11위의 성적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4리터 대배기량의 직렬 4기통 엔진을 장착한 베어캣은 스터츠社 특허의 트랜스 액슬과 3단 변속기를 사용해 기술적으로 우수한 모델이었다. 안경알 같은 원형 모노클 방풍유리가 스티어링 칼럼에 장착되어 있고, 2개의 분리된 좌석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고 좌석 뒤에 연료탱크가 가로로 놓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스터츠 베어캣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스포츠카의 대명사였으며 오늘날에는 1920년대 재즈시대를 떠올리는 상징물로 남아 있다.2.포르쉐 356A 스피드스터(1956년 독일)세계적인 스포츠카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포르쉐의 첫 모델 356은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설계한 폭스바겐 비틀을 기초로 그의 아들 페리 포르쉐의 주도하에 개발되어 1948년 선보였다. 공냉식 엔진을 뒤차축 뒤에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 기본 구조는 이후 포르쉐의 전통이자 상징이 되었다. 엔진, 변속기 등 주요 부품을 비틀과 공유했지만 성능은 한층 강화되었다. 출시 당시 회사의 재정과 시장 상황은 그리 낙관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356은 이런 염려를 단번에 잠재워버릴 만큼 열광적인 인기를 누렸다. 356은 356(1체도 더욱 깔끔하고 편안해졌다. 356이 선풍적인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3.MG MGA 트윈 캠 로드스터 (1959년 영국)1955년 9월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표된 MGA가 시장에 풀렸을 때 사람들은 이 작고 날렵한 스포츠카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로드스터가 먼저 소개되었고 쿠페는 이듬해 런던에서 발표되었다. MGA 라인의 백미라 할 수 있는 MGA 트윈 캠은 1958년 '도로상의 경주차'를 표방하며 등장했고 MGA의 마지막 버전 Mk II는 1961년 데뷔했다. MGA는 모노코크 보디가 아닌 프레임과 보디를 결합하는 구조를 지녀 비틀림 강성이 높아 우수한 핸들링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MG사는 후속 모델인 MGB부터 모노코크 보디를 채용하였다. 2세대 MGA 트윈 캠 모델에 사용된 엔진은 시끄럽고 오일 소모가 심하다는 불평 때문에 MG社는 원하는 소비자에 한해 구형 푸시로드 타입 엔진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현 시점에서 트윈 캠 모델은 희소성과 성능으로 인하여 MGA들 중 가장 인기 있는 모델로 자리잡고 있다.4.메르세데스 벤츠 190SL (1964년 독일)1952년 메르세데스 벤츠 300SL 경주용차가 각종 경주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두며 우수한 성능을 입증하자 1954년 일반 도로용 버전이 선보였다. 300SL은 멋진 자태와 뛰어난 성능으로 시선을 끌었지만, 가격이 너무 높아 일반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고성능 스포츠카를 저렴하게 구입하고자 하는 고객들을 겨냥해 나온 모델이 190SL이다. 190SL은 300SL에 사용된 스페이스 프레임 대신 용접 제작된 플로어 패널에 보디를 결합하는 '인테그랄 보디'를 사용해 원가도 낮추고, 문을 크게 할 수 있었다. 문이 작고 문턱이 높아 승하차가 어렵던 300SL의 불편을 해소한 것이다. 또한 MB 양산차 중 최초로 스윙액슬 방식의 서스펜션을 채용해 접지력과 핸들링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제동력 또한 뛰어났다. 300캐롤 셸비가 미국 포드 V8 엔진과 영국 AC ACE 섀시를 결합해 만든 코브라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양산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1923년 텍사스에서 출생한 캐롤 셸비(Carroll Shelby)는 자동차 제작자로 활동하기 전에 많은 경험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공군으로 복역했고, 덤프 트럭 판매와 석유 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으며, 양계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경험 끝에 그는 1932년부터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기 시작해 초반 몇 년 동안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레이서로서의 화려한 인생이 펼쳐지는 듯 했다. 하지만 평소 앓던 심장 질환으로 결국 레이서의 길을 포기한 그가 자동차 제작자로 변신함으로써 코브라가 탄생되었다. 캐롤 셸비는 1950년대부터 저렴한 미국 스포츠카 제작을 꿈꿔 왔다. 그러던 중 평소 흠모하던 영국의 고급 스포츠카 AC ACE의 엔진 공급자인 브리스톨(Bristol)이 AC에게 더 이상의 엔진을 공급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GM을 찾아가 엔진공급을 요청했다. 원래 6기통 엔진을 장착한 ACE의 섀시에 미국의 V8 엔진을 얹는다면 멋진 스포츠카가 탄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GM은 그렇게 탄생할 스포츠카가 당시 GM을 대표하는 스포츠카 코르벳(Corvette)의 경쟁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여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GM에서 거절당한 셸비는 다시 포드(Ford)를 찾아가 V8 엔진을 공급해 줄 것을 제안했고, 포드가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코브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코브라가 나타나는 꿈을 꾼 셸비는 새 모델의 이름을 코브라라고 지었는데, 후에 세간에서 '셸비 코브라'가 아닌 'AC 코브라'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분개했다고도 전해진다. 흔히 AC 코브라라고도 불리는 셸비 코브라는 차이름 뒤에 배기량을 cubic inch로 표현한 숫자를 붙여서 260, 289, 427 등 세 가지 모델을 만들었다6.마제라티 기블리 SS 스파이더4.9 (1971년 이탈리아)V8 엔진을 얹은 마제식을 사용한 엔진 덕에 낮은 차체의 멋진 유선형 보디의 디자인이 가능했다. 콕핏의 디자인을 새로 한 스파이더 버전은 3년 후인 1969년 소개되었다. 1970년에는 배기량을 4.7리터에서 4.9리터로 늘려 출력을 높이고 성능을 강화한 SS 버전이 등장했다. 페라리의 데이토나 모델을 겨냥했던 기블리 SS는 0-100km/h 6.6초의 기록으로 데이토나보다는 약간 느리긴 했으나, 미끈한 자태에 뛰어난 성능까지 겸비한 완성도 높은 차라는 찬사를 받았다.7.BMW 3.0 CSL (1972년 독일)BMW사는 1971년, 그룹 2 살롱카 경주에 투입할 목적으로 고성능 쿠페 3.0 CS를 기반으로 한 3.0 CSL을 개발하였다. 도어, 후드, 트렁크 리드를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하여 3.0 CS에 비해 무려 200kg을 줄였다. 엔진은 '71-'72년(2985cc/카부레이터/180 마력), '72-'73년(3003cc/인젝션/200마력), '73-'75년(3159cc/인젝션/206마력)으로 진화되었는데 전시 모델은 제 2세대에 해당된다. 3.0 CSL의 차체에는 경주차답게 공기역학적 배려가 이곳 저곳 눈에 띤다. 앞 범퍼 밑의 커다란 친 스포일러와 앞 펜더 상단에 길게 사용된 날개의 형태, 트렁크 리드의 리어 스포일러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경주에 투입된 3.0 CSL은 매우 큰 리어 윙을 장착한 모양이 박쥐를 닮았다 하여 '배트카(bat car)'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3.0 CS는 '68년 파리모터쇼에서 소개된 2800CS의 후속으로 BMW의 고성능 투어러로 호평을 받은 모델이다. '68-'75 사이에 3만 여대의 CS가 판매되었다. 3.0 CSL에서 C는 쿠페, S는 스포츠, L은 경량을 뜻한다.8.포르쉐 911 터보 카브리올레 (1993년 독일)964 시리즈에 해당되는 이 모델은 카레라 2 섀시와 '91년식 3.3리터 터보 엔진이 조합된 희귀한 혈통을 지녔다.'93년 당시 양산형 911의 주력 엔진은 3.6 자연 흡기 엔진이었고 터보 버전은 아직 개발되지 에는 터보 카브리올레 버전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이 모델은 특별 주문에 의해 포르쉐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4대의 터보 카브리올레 중 한대이다. 고객이 원하고 그것이 합당한 주문이라면 만들어 준다는 포르쉐의 방침을 잘 보여주는 예로 꼽을 수 있다. 0-100km/h 발진 가속 성능 4.8초, 최고 속도 285 km/h는 이 차의 범상치 않은 혈통을 확연히 보여준다. '63년 발표된 포르쉐 911은 40년을 넘긴 오늘날에도 건재하며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9. 2000년 이후의 스포츠카(1) 부가티 베이런 ( Pur Sang ) 불어로 순수라는 의미의 Pur와 피라는 의미의 Sang 이 결합된 이름으로 순종, 순수한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보다 순수한 베이론 그 자체의 원초적이자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기존 베이론의 엔진등을 사용하나 알루미늄과 카본 소재를 일체의 꾸밈없이 보여주는 모습은 오히려 화려한 도색보다 더욱 더 강하고 아름다운 베이론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공도에서 가장 빠른차로 불리는 베이론. 그리고 전 세계에서 단 5대만 존재하는 순수한 베이론 Pur Sang 은 순수한 질주를 원하는 자동차 애호자에게는 꿈의 자동차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다.9. 2000년 이후의 스포츠카(2)람보르기니 보르기니 가야르도는 수퍼카 메이커의 대명사격인 람보르기니에서 10여년만에 나오는 고성능 스포츠카인만큼 많은 관심과 기대가 가야르도에 모아지고 있다. 스타일링은 무치엘라고의 맥을 잇고 있다. 찬반양론이 따르겠지만 날카로운 웨지와 캠포워드, 와이드함, 짧은 프론트와 힘찬 리어는 람보르기니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작은 조절식 스포일러와 평평한 바닥은 고속 안전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가야르도의 스타일링은 이탈디자인(쥬지아로의 아들인 파브리치오가 그렸다)의 디자인에 근거한다. 아우디가 기본 디자인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무치엘라고를 그린바 있는 룩 돈버볼케가 마무리했다. 이는 마르첼로 간디니가 그리고 크라이슬러가 디자인을 수정한 디아블로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