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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행문]경복궁 답사
    어디를 갔다와서 레포트를 쓸까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가까운 곳을 결정해야 했는데 우리집은 일산쪽에 살기 때문에 떠오르는 곳은 행주산성과 경복궁 이였다. 그리곤 교통이 경복궁이 편한 관계로 오랜 만에 경복궁에 가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길 건너에는 경복궁의 입구가 보였고 나는 길을 건너 입구로 들어가는데.... 학교를 다닐때에도 통학을 하기 때문에 버스타고 매일 보다 시피 하는 이 큰 문이 바로 광화문 이였다. 그 유명한 광화문이 이 문이었단 걸 이제까지도 몰랐다니...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 이것을 보니 옛날에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광화문은 옛날에 훼손되어 복원이 됐다고 하는데 훼손되기 이전에는 광화문이 관악산은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관악산은 백성들에게 경외를 받아온 민족산 이였는데, 관악산은 풍수산 화산(火山)이여서 화(火)가 궁을 위압한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겠다는 의미로 앞에 물 짐승으로 알려진 해태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경복궁지도를 훼손시켜서 광화문 복원시에 광화문이 3.5도 기울여서 복원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광화문을 3.5도를 기울이게 함으로써 남산을 바라보게 해 놓았는데 이는 일본의 총본거지로서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세워진 조선총독부의 축에 맞춰 남산에 있던 신사인 일본신을 모시는 장소에 광화문이 그곳을 바라보게 함으로해서 조선의 상징적 건물인 경복궁이 남산의 신사와 통한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또한 바라보는 것은 모신다는 의미와 같다고 한다. 이런 애기가 생각나고나서 광화문을 보고 앞에 해태상을 보니 광화문을 다시 관악산을 보게 틀어주고 싶고 멋으로 해태상을 세워놓은줄 알았는데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하고 평소보다 새롭게 느껴졌다.그리고 나서 광화문을 통하여 들어가보니 정면에 딱 보이는 흥례문이 보였다. 예전에 왔을때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는데 철거하고 흥례문이 복원된 지는 오래 돼었지만 실제로 흥례문이 복원된 것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있었고 지금보다 훨씬 웅장하고 첩첩으로 쌓인 품위있는 궁궐을 모습을 볼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말씀이 생각이 들고나서 다시 저 잔디밭들과 공터들이 건물들로 가득 매워져 있다고 상상을 해보니 훨신 더 멋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현재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흥례문에 입장하기 위해 입장료를 내면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뭐랄까 그래도 유적이라면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서도 멋스러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빛바랜 흥례문이 아닌 선명한 색채의 흥례문을 보니 멋지긴 하지만 유적같지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복원을 다더라고 이렇게 새건물 티나게가 아니라 좀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듯하게 복원을 하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이런 생각을 가지고 흥례문을 지나서 보이는 것이 영제교였다. 영제교를 지나면서 밑을 보니 물이 흐르긴 커녕 시컴한 물이 흐르지도 않고 고여있었다. 약간의 악취도 나는 것이 미관상 참 보기 않좋았다. 물이 흘렀으면 참 괜찬았을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겨졌다. 그리고 나서 알아 보니 이곳 영제교 밑에는 금천이라는 물이 흘렀다고 한다. 경복궁은 명당에다가 지엇다고 한다만 명당수가 모자르는 점이 있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궁궐 서북쪽 물을 끌어들여 만든 것이 금천이라고 한다. 금천은 물만이 아니라 북악산의 정기를 끌어오는 구실도 했을 하였다고 한다. 아직은 복원 작업이 완공되지 않아 물이 없지만 곧 예전처럼 다리 밑에 물이 흐르는 영제교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할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그리고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근정문 계단을 올라갔다. 근정전 마당은 꽤나 울퉁불퉁하고 거칠한 돌들로 되어 있었다. 다른 곳의 바닥은 잘 다듬은 돌들로 채워놓았는데 왜 유독 근정전 앞에만 이런 걸까? 그 이유는 근정전은 정부나 왕시 공식 행사 및 외국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노인 위안 잔치를 베풀던 정전이다. 근정전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양반관리들은 보통 TV에서 보는 공복이나 상복보다 훨멀리 있는 사람까지 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얼핏 직반사된 햇빛이 근정전 안을 밝게 할 것 같지만 근정전 안을 구석구석 환하게 비추는 것은 난반사된 햇빛이다. 이것은 우리 옛집 앞마당에 굵은 모래를 깔아준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한다. 근정전에 가보니 옛날에는 문이 다 닫혀 있어서 내부는 못보고 주위만 둘러보고 온 것 같은데 이번에 가보니 문이 개방되어 있어 내부를 볼 수 있었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수조정전이며 문무백관의 조하를 비롯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법전이라고 하는데 역시 한가운데 떡 하니 어좌가 있었다. 게다가 뒤에는 일월오약도라는 병풍이 있고 천장 또한 화려한게 멋있엇다. 그리고 근정전의 뒤쪽으로 가서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을 창제할 때 즐겨 이용하였다는 천추전을 보고 사정전과 만춘전도 둘러 보았다. 역시 문을 꼭꼭 닫아 놓아 내부는 볼수 없었어 주변만 둘러 보았는데 창피하게도 문의 창호지가 손가락으로 인하여 구멍이 뚫린 것을 종종 볼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인해 아니면 장난삼아 구멍을 낸 것 같은데 이런 사람들 꼭 있는거 같다. 양심이 있는 건지 왜 이런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경복궁으로 관광 온 외국인들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 우리나라 유적지에 이러고 싶은지 물어보고 싶다.그리고 나서 강녕전으로 갔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용마루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임금 자신이 용인데 용 위에 또 용이 있을 수 없다고 해서 그렇다고 한다 어찌보면 참 거만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가구들도 별로 없었는데 난 왕의 침실이면 엄청 화려하고 많은 가구들로 꾸며놓았을 줄 알았는데 옛날에는 혹시 왕을 시해할지 모른다고 해서 뾰족하거나 다질만한 물건들은 들여 놓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내시가 숨어서 혹시나 왕비가 왕을 시해하지 않을까 해서 항상 숨어서 감시 하였다고 한다. 이런 애길 들으니 옛날 왕은 어떻게 자나 싶다. 죽을까봐 물건도 제대로 못 놓고 자는데 항상 내기들 담장에는 만수무강, 수복강녕 등 복을 비는 문자와 소나무, 매화, 국화, 대나무, 모란, 연꽃 등 갖가지 무늬로 장식되어져 있었다. 이런 담은 처음 보았다. 지금껏 살면서 담은 그냥 벽돌로 쌓거나 콘크리트로 만들어 밋밋하고 멋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엇는데 이렇게 이쁘게도 벽을 지을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경전을 뒤돌아 나가려고 하면 보물 제 810호라고 쓰인 담장의 한면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냥 벽이 중간에 조금 튀어 나온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굴뚝이였다. 십장생굴뚝이라는 안내판이 없었으면 충분히 그냥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집의 주인인 조대비의 만병장수를 위한 십장생문양이 구름 속에 떠있는 해 아래 산과 돌, 학과 사슴, 거북과 불로초, 소나무 등이 물과 어울려 오밀조밀 펼쳐지고 있었다. 꽃담도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이 십장생 굴뚝도 굴뚝답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 자경전의 굴뚝은 몇 년 전까지만해도 불을 때도 연기가 나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복원을 하면서 원래 이것이 굴뚝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지, 그저 연가만 담벽위에 덩그러니 올려 놓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을 해서 지금은 다시 손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굴뚝 구실을 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문화재 복원은 그저 보기 좋게 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복원이랑 다시 원상태로 돌린다는 뜻이다. 훗날 기록들이 전혀 없어진다고 해도 살펴보면 그 기능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문화재가 가진 분명한 자기구실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제대로 된 복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향원정으로 가니 감탄사 밖에 안나왔다. 가을이라 단풍과 함께 향원정의 경치는 그야말로 최고 였다. 연못에 섬을 만들어 거기에 정자를 세우고 다리를 놓았을 줄이야. 그런데 정자라 하면 나는 팔각정을 예상 했엇는데 향원정은 육각 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흔한 팔각정 보다 뭔가 특별해 보였고 그래서 다리를 건너 향원정 안에 들어가 밖을 내려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빨간 글씨의 ‘들어가지 마시오아두는 것이 더 멋스러웠을 것 같기도 하다. 연못주변에서 쉬다가 명성황후가 시해당했다는 장소로 향하여 갔다. 원래 이곳에는 건천궁이 있었다고 하는데 건천궁은 지금은 없어지고 명성황후의 시해당한 장소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건천궁은 지금 복구중 이였다. 이걸 보니 역시 일본인들은 정이 안간다. 비극의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지 백여년이 지났어도 사건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는 용의자만 있을 뿐 지금까지 범죄자에 대한 그 어떤 처벌도 규명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역사의 왜곡만 일삼는 일본에게 그 진실이 무엇이고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도록 하루 빨리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을 다시 가리고 규명했으면 좋겠다.그리고 바로 한달 전쯤에 45년 만에 개방한 북문 신무문으로 갔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출입을 금해서 그런지 깔끔하단 생각부터 들었다. 신무문은 항시 닫아 두었다가 왕이 어원에 거동할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열었다 한다. 청와대 마주한 신무문은 한국전쟁 직후 1954년 일반에게 공개됐으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부대가 경복궁에 주둔하면서 폐쇄돼었다. 게다가 이번에 같이 개방한 고종황제가 경복궁 북측 건청궁에 거처할 때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거나 서재로 사용하던 곳인 집옥재도 둘러 보았다. 왜 이렇게 멀쩡한 곳을 사람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못 들어오게 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조금 있으면 건천궁도 완공이 되고 태원전도 복구중이라고 한다 하루 빨리 복구가 완공 되어 조금더 완벽해진 경복궁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둘러보고 뒷문으로 들어가 아미산을 보았다. 아미산 이라고 해서 난 진짜 산 인줄 알았는데 진짜 산이 아니라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경치가 멋있기는 했지만 4개의 돌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도 굴뚝이라고 한다. 이것도 보물 제 811호라고한다. 십장생 굴뚝도 그렇고 세계 했다.
    독후감/창작| 2006.11.12| 6페이지| 1,000원| 조회(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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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1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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