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ume of NameDeachi-Dong, Seo-Gu, Seoul010.3333.3333, 02.333.3333E-mailQualificationChemical engineering student with high GPA, growing professional experience, and desire to move into consulting and management of production. Professional achievement include streamlining procedures, leading and inspecting congress from representative of students, researching corporate strategy in 회사명, and equipment setting, calibration with knowledge in 회사명. Have done 120hours a year volunteer activity since 2006. Technical proficiency includes MS Word, Excel, Power Point, and Photoshop.Professional ObjectiveTo obtain a full-time position of production management.Education학교명 University, Seoul, Republic of Korea, Feb 2006 ~ Present▶ Major : Chemical EngineeringAchieving ABEEK(Accreditation of Architectural Engineering Education ) course - 1st▶ Material science Lab. (Present : Nature Material Lab.)Professor : Gildong Hong▶ Material modification using atmospheric Ar, Ar+O2Gas PlasmaAcademic & Professional Experience회사명 Mar 2009 ~ Aug 2009Equipment Operator▶ 경력▶ 경력Representative of student congress Jan 2008 ~ Jan 2009▶ 경력회사명 (Fashion Magazine Unit), Jan 2007 ~ Jul 2007Representative▶ 경력회사명, Bank, Dec 2007 ~ Jan 2008Research Assistant▶ 경력Additional Information▶ Achieved GPA 3.9/4.5▶ Achieve scholarship every year(4times) from university and special scholarship fromRotary club (1time).▶ Achieved TOEFL score 90(IBT, 2007) and TEPS score 750(PBT)▶ Technical proficiency includes MS Word, Excel, Power Point, and Photoshop.▶ Have done 40hours a year volunteer activity since 2006 (Total 120hours/3years).▶ Interested in sports such as snow board, baseball, Formula-1 and RC(Radio Control)
- 공학도를 위한 세계문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 인류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남자 -목 차0. 머릿말---------------------31.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남자----------------------41) 카이사르 ; 돈, 사랑 그리고 권력의 중심----------------------42) 카이사르의 성장과정에서 돋보이는 몇가지 요소----------------------8① 어린 시절에 설정된 확고한 목표.② 소속 집단에 대한 자부심.③ 최상의 교육.④ 미래 삶의 환경에 대한 이해.⑤ 불굴의 의지와 신념.⑥ 때를 기다릴 줄 아는 통찰력.------------------------------------------------------------------------------------------------------------------------------------8888882. 카이사르, 그의 막강한 권력----------------------91) 집정관직 당선과 삼두 정치2) 삼두정치의 몰락과 내전으로 치닫는 로마3) 카이사르의 집권과정과 내전4) 암살, 그리고 또 다른 시작----------------------------------------------------------------------------------------91010123. 카이사르의 사생활----------------------121) 카이사르의 건강2) 카이사르와 여자3) 카이사르와 돈4) 카이사르와 동성애----------------------------------------------------------------------------------------121313134. 로마인이야기의 카이사르, 그리고 시오노나나미( 느낀 점 )---------------------5. 참고문헌---------------------1.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남자1) 카이사르 ; 돈, 사랑 그리고 권력의 중심율리우스 카이사르 바라볼 필요조차 없었지만, 남몰래 다가가서 뭔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Gaius Julius Caesar,BC 100. 07 ~BC 44. 03아이들에게는 반가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공화국에는 아직 학교다운 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가이우스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전통적으로 교육은 가장의 책임이었으며, 아버지 가이우스도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율리 씨족의 장손인 그의 집안에서 실제로 아이들의 교육을 전담한 사람은 어머니 아우렐리아Aurelia Cotta였다. 고상한 귀족 출신인 그녀는 엄격한 라틴 교육에 그리스의 영향을 가미했다. 따라서 그녀는 어린 가이우스를 위해 예술, 문화, 철학을 중요시하는 교사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대부분 자유를 얻은 노예들로서 먼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 중에 포로가 된 동양의 예술가나 과학자들이었다. 그중에는 진정한 문학가, 재능 있는 예술가, 수학자, 수사학자, 웅변 교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린 카이사르는 그들에게서 최상의 지식을 전수받았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인 천재 소년 가이우스는 가족의 야망만큼이나 왕성한 지식욕이 있었기에 그를 가르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구사하고 문학에 통달한 그는 동양 예술과 문학을 찬란히 꽃피운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노예 출신의 가정교사에게서 최고의 지식을 마음껏 흡수할 수 있었다. 수많은 수호신, 호사스런 저택, 높은 학식…. 하지만 로마에서는 전쟁이 빠질 수 없었다. 빈번히 발생하는 대규모 전쟁은 로마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도시 외곽에는 귀족 자제들이 무기 훈련과 이륜마차 경주를 하던 연병장이 있었는데, 아우렐리아는 거기서 아들에게 체육과 군사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장차 훌륭한 군인이 되는 데 모자람이 없게 했다.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미남형에 키가 큰 편이었으며 잘 발달한 근육이 매력적인 청년으로 성장했다. 선수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지만, 단숨에 티베르 강 바치는 제사를 주재했다. 그러나 근엄하고 자부심이 강한 청년은 이 경건한 순간이 대중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몇 주 후 그의 아버지는 이제 막 성년이 된 소년에게 가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긴 채 당시의 사람들이 '명부冥府'라 부르던 곳으로 떠났다. 아우렐리아는 은밀히 정세를 관망했다. 하지만 원래 술라나 벌족파(Optimates)와 같은 경향의 그녀가 평민파가 주도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마리우스는 이미 죽었지만, 킨나Lucius Cornelius Cinna가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프랑스 극작가 코르네유Corneille의 고전극 로 널리 알려진 킨나는 로마의 중요한 정치가이며 네 번이나 집정관을 지낸 인물이다. 가이우스는 망설임 없이 혼란스런 정쟁에 맹렬히 뛰어들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가 민중을 멀리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율리 씨족의 젊은 상속자는 아버지가 걸었던 길보다 더 앞선 진보 진영을 선택했다. 그는 어머니 아우렐리아가 찬성하든 반대하든 상관하지 않고 부모가 정해준 기사계급의 약혼자 코수티아Cossutia와 파혼하고,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Cornelia와 결혼했다. 카이사르는 열여섯 살에 이미 결정적으로 자신의 진영을 선택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킨나의 동지가 되었고, 술라에게는 적이 되었다. 당시 킨나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젊은 카이사르는 매우 빠르게 유피테르 제관에 임명되었다. 내란을 치르는 동안 더욱 높이 평가되었던 이 성직자의 지위는 그 누구도 그를 위협할 수 없게 하였다. 물론, 집정관의 비위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기원전 82년 동양에서 연이은 승전을 거듭한 술라는 그 덕에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벌족파의 수장인 그는 곧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고, 몇 주 후 독재관(Dictator)이 되었다. 열여덟 살도 채 안 된 젊은 카이사르에게는 오랜 시련과 고통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젊은 혈기의 카이사르가 “국가의 적들” 결단성은 훗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극단의 결단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⑥ 때를 기다릴 줄 아는 통찰력.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인생의 중요한 국면에서 섣부른 결단으로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술라와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는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렸던 카이사르의 인내심은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카이사르의 통찰력은 오늘날에도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다.2. 카이사르, 그의 막강한 권력다시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로마신전의 제사장과 군단 대대장에 선출되었으나 이어서 벌어진 스파르타쿠스 전쟁이나 히스파니아의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에도 전혀 참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전혀 무명의 대대장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는 31세에 재무관에 선출되어 비로소 로마 공직의 첫걸음을 뗀 것인데 폼페이우스나 크라수스가 기원전 70년에 공동집정관으로 당선되고 키케로가 변호사로 명성을 날린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것이다.기원전 69년 고모이자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와 첫번째 부인 코르넬리아가 죽었는데 카이사르는 율리아의 장례식에서 마리우스를 옹호하여 술라파의 적대감을 부채질했다. 이후 그는 히스파니아에서 복무하고 돌아와 기원전 65년 안찰관에 취임했고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했다. 안찰관 시절 카이사르는 대규모 검투사 대회를 열고 마리우스의 승전기념비를 다시 세웠는데 이는 그가 점차 평민층의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63년 카이사르는 37세에 로마의 "최고제사장"이 되었고 원로원 의원인 라비리우스를 37년전에 일어난 호민관 사투르니누스 살해사건으로 고발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카틸리나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는데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에 의해 주동자로 몰렸으나 유쾌한 재치로 위기를 넘기고 카틸리나에 대한 사형을 반대했다. 당시 쟁점은 비상시국일 경우 로마시민에 대한 재판과 항소권 없이 사형집행이 가능한 것인가 였는데 카이사르는 비상시국이라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그러자 카이사르파인 호민관 쿠리오는 두 사람이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결의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이튿날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고 있다고 선동하여 호민관 쿠리오의 결정을 뒤집은 다음, 원로원의 동의 없이 폼페이우스에게 칼을 넘겨주고 이탈리아의 군사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12월 10일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에 군대의 해산을 명하고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반역자로 간주한다는 법안을 내놓았고 이에 대해 호민관 안토니우스는 평민집회에서 연일 카이사르파를 선동하여 이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원로원파와 카이사르파, 양측의 긴장은 일촉즉발의 위기로 발전해갔다. 해가 바뀌어 기원전 49년 1월 1일 카이사르는 편지를 통하여 자신이 세운 갈리아에서의 공적을 서술한 다음 폼페이우스와 동시에 지휘권을 내려 놓겠다는 제안을 원로원에서 발표하였으나 대다수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강압적으로 받아들여 거부했다. 1월 7일 원로원은 마침내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했고 카이사르는 이제 공식적인 "로마의 반역자"가 되었다. 3일후인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1개 군단만을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넜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말을 남겼다.“전우들이여, 이 강을 건너면 세계가 파멸한다. 하지만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전우들이여! "주사위는 던져졌다!" 진격하라! 루비콘 강을 건너서 신들의 땅으로!”③카이사르의 집권과정과 내전루비콘 강을 건넌 이후 카이사르는 겨울을 숙영지에서 보낼 것이라는 "원로원파"의 예상을 깨고 신속하게 이탈리아 반도를 남하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최종권고" 이후 로마를 탈출해 카이사르와 합류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쿠리오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아레초를 비롯한 거점도시를 공략하게 했다. 갑작스러운 카이사르의 진군에 놀란 원로원파와 폼페이우스는 확급히 로마를 버리고 도망쳤고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자발적으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휘하에 13군단 밖에 .
스타르타 제국의 흥망테르모피어는 신화가 역사가 된 예라고 볼 수 있음. 정예부대였던 300명의 스파르타인은 승리를 확신했고 어떤 전쟁에서도 방패의 문자만으로도 승리를 확신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다. 스파르타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무사문화를 가졌다. 마지막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레오니다스는 달아나 목숨을 지키라고 전했지만, 스타르타인은 자리에 남아 모두 전사했다. tm파르타의 이런 모습이 페르시아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후 테르모필라인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는 암호처럼 의미를 갖게 된다. 청렴, 질서,화합을 이상으로 생각하고 추구하였으며 모든 그리스 문명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는 외세의 침입이 없고 질서유지와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였지만 이것을 누릴 수 있는 나라는 스파르타 뿐이었다. 이렇게 강력한 군국주의를 갖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그리스인은 이렇다 할 만한 전문적인 군인이 없었다. 하지만 북방침략자들이 자신의 선조들의 땅을 찾겠다고 내려와 스파르타를 세웠다. 원래 스파르타인은 여성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청동 조제기술로 유명했지만 어느 한 순간부터 문화생활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금지령은 메세니아 전쟁기에 내려지게 되는데 도리아인의 지역 메세니아 정복 이전까지는 다른 민족과 다른 면이 없었다.하지만 지형적인문제(2000m이상)등으로 100년정도 걸려 정복 메세니아인을 헤일로테스로 소작농으로 만들었고 이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만이 소수의 스파르타인의 국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군국주의의 시초는 리쿠르고스가 델피 신탁으로 받아온 법을 제정(신의 율법으로 아폴로가 내려줌)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정확한 피라미드 구조를 가진 스파르타 지배구조는 최상위 호모이오이10000명(지배계층), 페리오이코이5~6만(상공업), 헤일로테스로 구성이 되었다. 완벽한 전사를 만들기 위해 신생아를 판단하여 부족한 아이는 산자락 아래로 던져졌다. 지배구조는 왕 2명이 있었고, 원로회(최고법원)가 거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다.원로회는 노인집권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은 나이가든 것을 사회가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민회 실권거의 없었으며 단지 지시를 받고 원로회의 들러리를 서는 정도 부추김을 하는 형식적 모임이었다. 에포로이(최상위기관)라는 5인위원회는 누구에게든 재판회부 행사권을 가졌는데 임기를1년으로 제한했다. 모든 관리는 임기를 마친 후 항상 에포로이의 재판을 받았다. 이는 사회상이 변하지 않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스파르타 사회가 민주제는 아니었다. 스파르타사회에는 자유로움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매년 최하층인 헤일로테스를 관리하기 위해 농노들과의 전쟁선포했고 언제나 죽여도 됐다. 스파르타인 끼리는 거의 모든 생활면이 같았다. 의식주 수준과 농지도 동일했으며 시장경제가 없어서 화폐도 필요가 없었다. 금욕적인 문화를 추구했고 항상 스파르타인 사이의 평등이 우선되었다. 이런 이유로 항상 교복과 같이 같은 옷을 입고 과묵함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이런 풍습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들과 교류를 금지했으며 자신들의 관습을 온전히 지키고 싶어 했으며 알려지는 것도 꺼려했다. 완벽한 군사를 생성하기 위해 7살짜리에게 살인병기 훈련을 시작하였는데 스파르타인 1명당 12명은 상대할 수 있어야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군사학교에서 교육과 양육을 맡아서 하였고 15년동안 교육을 받았는데 죽이겠다보다는 죽겠다라는 생각으로 훈련했다고 한다. 교육방식은 대부분 약자를 밝혀내서 몰아내는 방식으로 스파르타인 간의 경쟁의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여자는 주로집에서 훈련했는데 주로 튼튼한 아들을 낳는 것이 목적이었다. 남자들은 평생 망토하나만 입고 신발도 없이 지냈는데 현재 그 지역의 날씨는 그 상태로는 얼어 죽을만한 날씨이다. 헤일로테스가 음식을 만들었지만 음식이 정말 맛이 없어 죽지 않을 정도로 먹었고 그것도 부족하게 주어서 훔치는 것이 살아남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훔치지 않으면 낙오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한 아이가 새끼여우를 잡아먹으려 잡았다가 상급생에게 걸리지 않으려고 망토에 숨겼다가 여우에게 물어뜯겨 죽었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치즈쟁탈전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훔치는 팀과 채찍을 들고 막는 팀으로 구성되어있었지만 가혹하여 죽는 아이도 있었다. 스파르타 사회는 모든 것이 경쟁이었다. 개인당 한명씩 평생토록 지도자를 가짐(예절과 훈련) 동성의 관계를 갖는 것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전쟁시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 대열을 섰다. 20살이 되면 다음 소속(15명으로 구성)으로 바꾸어 평생을 살아감 소속을 바꾸기 전에 성인식으로 헤일로테스(내부의 적)를 죽였다. 스파르타의 여자는 전 그리스에서 가장 예뻤지만 항상 서로 격리된 상태로 있었으며 국가에서 강제적인 의례적인 행사였다. 결혼은 임신이 가장 큰 목적이었으며 법적으로 전쟁에서 죽거나 아이를 낳다가 죽어야지만 비석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얼마나 군사가 최우선으로 꼽혔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예가 우수하다고 생각한 남자를 불러 자신의 아내의 방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스파르타는 결코 외부와 전쟁을 하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페르시아가 본토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여 스타르타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알라의 땅무슬림은 복종을 의미한다. 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인간의 의지를 뜻한다. 이슬람은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이지만 911테러이후 현재는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시각은 이전에도 기독교의 존재를 위협하는 유일한 종교였기 때문에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교는 증가추세이다. 이슬람교는 내부적으로 여러 종파가 존재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종파는 수니파와 시아파이다. 시아파는 전체 신자 중 85%를, 시아파10%를 그리고 기타 소수파가 존재한다. 일 예로 수피파가 있는데 이들은 몸을 회전함으로써 황홀경을 느낀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같은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코란에서는 유대와 기독교를 경전의 사람들이라 표현하는데 성서의 사람들이 나오고 자세히 서술되어있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아담과 이브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특히 구약에 나오는 사람을 모두 인정하는데 예수를 성령을 받은 예언자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예수를 신의 아들로 생각 하지 않는다. 또 성경과는 좀 다른 부분도 있는데 알라가 동정녀 마리아를 변호하는 장면이 코란에 기술되어있으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적들이 십자가형을 하려고 할 때 알라는 예수를 천국으로 불러올려서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게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아브라함을 위해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성경과 코란에서 아브라함은 신의 부름을 받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인물이다. 신은 그의 아들인 이삭으로부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른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이스마엘이다. 카바신전을 중심으로 메카가 생겨서 큰 도시가 생겨났다. 마호메트라는 예언자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했는데 우상숭배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마호메트의 아내는 하디자라는 부유한 사업가로 15살이나 어린 마호메트에게 청혼하여 결혼하게 되어 6남매를 낳았다. 이중 4명만 살아남았고 마호메트가 30세쯤부터 산에 올라 명상을 시작했고 40쯤에 환영을 사흘 동안 보았다고 한다. 이때 가브리엘천사는 마호메트에게 계시를 주었다. 문맹이었기 때문에 마호메트의 구전으로 계시를 적어냈다고한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슬람교도들이 꼭 지켜야 하는 5가지 의무중 첫 번째 샤하다(신앙고백) 두 번째는 하루 다섯차례의 예배(메카를향해)인데 동틀 무렵과 정오, 오후, 해질 무렵 마지막으로 잠자리 들 때 행하는 예배로 신에 대한 맹세를 되세기기 위한 행위이다. 이슬람교는 역사적으로 생겨난지 15년만에 이슬람을 일으키며 로마영토보다 큰 영토를 얻게 된다. 우마이아 왕조가 다스린 기간은 이슬람 영토가 최대였던 시기로 서쪽으로 모로코와 스페인 동쪽으로는 인도, 중국에 이르게 된다. 일부는 강제로 개종시켰으나 대다수는 수대에 걸쳐 이슬람을 개종했다. 자카트라는 자선활동이 세 번째 의무인데 자신의 재산의 2.5%를 기부하며 이 돈은 가난한 자에게 직접 나누어준다. 네 번째 의무는 라마단 기간에 금식 사옴이다. 동트기 2시간 전부터 해 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성행위도 안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임산부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은 제외된다. 가난한자들에게 동참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1년 중 한 달 간 모든 노력을 다해 신관의 관계에 힘쓴다는 의미이다. 유대교에서 행하는 가난한 자들과의 교류를 위해 금식하는 것과 의미가 같으며 행위로 행하는 의미를 갖는다. 라마단 이후에 음식으로 보상받는다. 후사인의 죽음으로 시아파와 수니파가 갈라졌다. 마호메트의 후계자 선정으로 불거진 일인데 시아파는 마호메트의 후손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니파는 새롭게 선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그다드는 광활한 이슬람제국의 수도이자 세계적인 도시였으며 문화중심지 역할을 했다. 특히 대수학의 업적은 십진법 지수 삼각법등을 만들었다. 이 결과로 현재 아라비아 숫자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술이 대표적인데 병원을 가지고 병을 치료하였으며 심지어 정신병까지도 의학까지도 치료했다. 예루살렘에서의 충돌로 인해 차 십자군 원정이 일어났으며 이때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또한 징기스칸의 후손이 바그다드로 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하지는 다섯 번째 의무로서 성지순례를 말한다. 신에게 가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갖는다.
라트야트라(전차축제) : 1년중 하루 축제를 하면서 수도자들이 사원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신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 전차바퀴에 깔려 죽을 경우 열반을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달려드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도 많아 인도에는 약3억3천의 신이 있다고 한다.갠지스 : 인도인은 어머니이자 여신으로 생각한다. 갠지스의 여신을 데리고 강의 발원지로 다시 올라가면 강고트리사원이라는 여신의 집이 나온다. 이 사원은 11월까지 순례자를 맞는다.고북 : 갠지스 강의 발원지로써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몸을 씻으면 일생동안 지은 죄를 한번에 씻어준다고 믿는데 이곳에는 몇 년씩 숨어 수행을 하려고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시크교 : 이슬람교 유일신사상과 힌두교의 윤회사상이 융합된 종교로서 시크교사람들은 윤회를 믿지만 실재로는 운명 개척론자들이다. 이들의 성실함과 교육열 때문에 대부분 인도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다. 헴쿤드는 평생에 한번은 와야 할 성지(헴쿤드사이브)이다.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성지순례의 목적이 달성되는데 해발 4000미터라서 공기중의 산소가 희박하다. 따라서 당국에서는 이곳의 체류시간을 4시간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이들은 수염이나 머리를 자를 수 없고 머리를 보여서도 안된다. 머리는 영혼의 상징이기 때문이다.데브프라야그 : (갠지스의 두 발원지의 물줄기가 서로 만나는 곳) 이곳부터 갠지스라고 말하는데 두물줄기가 만나는 곳을 산스크리트어로 상감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사원을 짓고 여신을 기기린다. 인도는 세계 두 번째로 무슬림이 많은 나라인데 이곳의 무슬림은 힌두교와 공존하는 작은인도라고 할 수 있다.비하르주 : 인도최대의 곡창지대로 일찍이 굽타, 마우리아왕조 또 불교와 자이나교가 모두 이곳에서 발생하였다.잘만디르 자이나교 사원 : 자이나교의 대표적인 성지로 이들은 불살생을 생활화 하고 지내는데 이들의 식사에서는 육류는 물론 뿌리채소도 금지되어있다. 이들의 불살생은 벌레한마리라도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곳 성지에는 곰테시바라(세계최고의석상)라는 나체수도승들의 기도대상이 있는데 이들이 옷을 입지 않는 이유는 옷이 모든 근심의 근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난 욕심은 전쟁, 살생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수도승은 살아있는 신으로 믿어지기 때문에 신자들은 수도승의 발에 키스하는 것으로 경의를 표한다. 오후에는 모여서 자신도 모르게 저질렀을 살생을 반성한다. 철저한 금욕주의자로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식사할 때도 벌레를 찾는 일이 중요하기에 음식을 모두 헤집어 벌레가 있는지 살핀다. 행여라도 벌레를 발견하면 그날 식사는 끝 다음날을 기다려야한다.쿰브멜라 : 6,12년마다 열리는 힌두 최대 축제로 강물에 전신에 몸을 담그는 축제로 카스트 계급의 차이 없이 몸을 담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