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로크스페인 바로크 (17-18c) 스페인의 역사에서 16 세기 말부터 17 세기를 문화의 황금기로 불린다 . 이 시기에 스페인 왕정은 유럽의 주도권을 지키는데 실패하였는데 이러한 정치적 쇠락의 시기에 스페인 문화는 흥성하였다 . 스페인은 절대군주제를 따르고 있었지만 예술이 하나의 방향으로 집중하지 않고 , 여러 지방에서 활발하고 독자적인 미술 활동이 벌어졌다 . 결렬한 종교성을 드러내는 스페인 미술에 있어서 18 세기에 이르러서는 스페인 전역에서 제단 장식이 점점 더 빽빽하고 풍성하게 장식되었으며 대칭적인 배열이 이루어졌다 . 1713 년 이후에는 궁정미술도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 작가 *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리베라 와 그의 제자인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공부한 뒤 정착한 엘 그레코 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격렬한 종교성은 스페인적인 특징이다 . 리베라 의 명암의 대비가 강한 순교도 , 스루바란 의 근엄하고 정결한 수도승 , 엘 그레코 가 그런 열광적인 종교적 법열 등은 모두 가톨릭의 나라 스페인다운 작풍으로서 스페인 회화가 매우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무리요 는 좀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신앙심을 보여 주고자 하였으며 그는 여성적인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보여 주었던 몇 안 되는 스페인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다만 , 벨라스케스 는 철저한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에스파냐 회화를 유럽적인 수준에까지 끌어올렸다 . 스페인 회화에 등장하는 명암대조법은 리발타 의 작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형태에 양감을 주기 위해 명암을 사용하여 최초의 스페인 태생 ' 테네브로소 '( 빛보다 어둠을 강조하는 화가 ) 가 되었다 .* 회화 * 엘 그레코 -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 속에서 독창적인 작품을 시작하였으며 , 선명한 색과 그늘진 배경의 대조 , 긴 열굴 표현 등의 틀을 유지했다 .리발타 - 이탈리아에서 카라바조가 처음 시작한 새로운 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무리요 - 안정감과 미감을 띤 훈훈한 화풍을 가지고 , 거리의 거지를 소재로한 작품도 많이 있다 .벨라스케스 -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으로 경건한 종교적 주제를 그렸으나 민중의 빈곤한 일상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 펠리프 4 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 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으며 왕족 · 신하 그리고 궁정의 어릿광대 · 난쟁이 등을 그린 다수의 초상화를 남겼다 .{nameOfApplication=Show}
협률사와 원각사의 실체와 올바른 역사적 이해협률의 어원은 조선시대 궁중음악을 관장해온 장악원의 음악적 활동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협률사는 궁중음악을 관장해온 장악원의 후신인 교방사(敎坊司)의 다른 이름이었고, 협률사는 당시 고관들의 출자로 이루어진 희대(연희)회사 였다.협률사 설립의 역사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고종황제 어극 40주년 칭경예식은 고종황제의 망육순과 어극 40주년의 양대 경사를 동시에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칭경예식에 참석할 외국 대사들을 인민들이 환영하는 뜻으로 민유(民遊)를 실시하기 위해 희대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공연할 예인들을 모아 교습하는 일을 참령 장봉환이 주무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괴질의 유행으로 칭경예식이 연기되는 사태를 맞아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1902년 12월에 전통적인 망육순 진언예식을 치르고, 어극 40주년 칭경예식은 두 번 연기된 끝에 1903년 가을에 조촐하게 치러졌다.협률사는 1903년 1월 이후 영업과 관련한 자체적인 문제로 문을 닫고 열기를 반복하며 영업개선을 위해 입장료를 낮추는 조치를 취한다. 그해 7월 중순에 협률사가 문을 닫았던 것은 화재로 인한 것이 아니라 국가경제 사정이 더욱 어려워짐에 따라 고종 황제가 칙령으로 협률사 영업을 가을까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협률사는 가을까지 기다리지 않고 8월 26일부터 영업을 개시 했다가 10여일 만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9월 28일에 문을 열어 이후 약 1년가량을 영업해오다가 이토히로부미의 강압으로 1904년 3월 중순경에 폐지되었다.1906년 3월 초에 다시 복설된 협률사는 이전의 초기협률사와 성격이 다른 것으로 궁내부와 건물 사용 등에 대한 계약을 맺은 사영이었다. 그런 협률사가 궁내부 소속임을 사칭하는 영업표를 발행하면서 혁파를 명한 고종의 칙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업을 계속하였다.이러한 제반 사실들이 궁내부와 의정부 사이에 오고간 문서들을 통해 확인된다.복설된 협률사의 발기인인 김용제, 최상돈, 고희준 등이 친일 관료라는 점과 협률사를 직접 운영한 것으로 밝혀진 고위 관료 현영운의 사촌 동생인 현철의 증언을 통한 정황으로 볼 때, 이때의 협률사 운영은 이토히로부미가 정책적으로 추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토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서울에 입성한 3월 2일부터 영업을 개시한 협률사의 복설 목적은 을사보호 조약으로 야기된 인민의 분노와 관심을 연희장으로 돌리고, 왕실영업을 내세워 왕실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국론을 분열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907년 12월 12일경에 경시청이 관인구락부를 연희장으로 허가하기 이전인 11월 말에 이미 “왕실 연희관 이설”이라는 명목으로 연희장으로 재개장할 준비가 선행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시청의 연희장 허가 직후 행해진 관기들의 자선 공연은 기존학계에 알려진 것과 같이 3개월이 아닌 3일간 행해진 것이었으며, 지금까지 관기자선연주회에 포함되었던 [연예장] 공연은 관기들의 [자선연주장]공연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연예장] 공연은 현영운에 의해 운영된 협률사 공연이었는데, 1908년 6월 무렵 현영운의 구속으로 정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관인구락부와 협률사가 함께 희대를 사용하였으며, 알려진 것과 같이 관인구락부는 1908년 1월 하순 남대문 쪽으로 이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 이전한 것은 관인구락부와 별도로 설치된 탁지부관인구락부 였다.현영운의 구속으로 폐지된 협률사를 대신하기 위해 당시 작가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던 이인직을 내세워 1908년 7월에 연극장 설립이 추진되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개장하게 된다. 원각사가 표방한 신연극이라는 것은 서구식의 신극이 아니라 새로운 기법을 이용한 연희 혹은 창극의 의미 였는데, 이것은 당시 연극이라는 용어가 연희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 점에서 알 수 있다.원각사 개장 직후부터 연극시찰이라는 미명으로 약 9개월간 일본에 머문 이인직은 원각사의 간판에 지나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바로 송병준이었다. 이것은 송병준이 김시현에게 “원각사를 영구유지”토록 한 것이나 안순환에게 원각사 운영을 맡긴 것과 같은 일련의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원각사에는 설립초기부터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고위관리들이 자주 출입하였고, 특히 통감부 고등관 이상의 관리들이나 심지어 총리대신 이완용 부인과 내각 관료 부인들이 가속들까지 데리고 와서 원각사 공연을 관람한 것은, 인민들의 관심을 유흥 쪽으로 유도하고 위한 것으로 보인다.또한, 원각사의 설립과 운영은 연희와 오락물에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 군대해산으로 최고조에 달한 의병정국을 타개하고, 합방을 위한 통감부의 흉계를 감추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각사에서 상연된 [은세계]와 같은 작품은 친일의 길을 걷던 문명개화론 자들의 사상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고, 구한말 사회의 부조리를 표면화시킴으로써 일제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창 극1. 창극의 성립판소리에 연극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사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역할을 분담하여 노래하는 새로운 방식이 19세기말부터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창극(唱劇)이라고 한다. 창극은 여러 사람이 배역을 분담하여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창(唱)으로 대사가 진행되는 한국 전통의 오페라로써, 한국의 전통 소리와 춤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고, 복식문화와 생활문화까지 엿볼 수 있는 종합 예술일 뿐만 아니라 창극을 통해 관객들은 한(恨), 정(情), 해학(諧謔)과 같은 한국 고유의 정서를 경험할 수 있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인 협률사가 설립되어 조선 후기 왕실의 오락 연희물이었던 기생의 춤과 노래 및 창부들의 판소리 등이 공연된 한편, 1906년 무렵에는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등 사설 극장이 설립되고 문명 개화론자와 극장 설립자 사이에서 연극에의 필요성이 증대하자 판소리 레퍼토리의 연극화가 추진되어 창극이 형성되었다.음악 연극으로서의 판소리를 구극, 구파극이라 하였던 것에 대응하여 창극은 신극, 신연극, 신파극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는 창극의 시대적 성향과 변화 양상에 따라 구극, 구파극, 신구파극, 가극 등으로 혼용되었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창극’이라 일반화 되었다. 아직도 ‘신연극’이라는 용어는 남아 있어, 오늘날 한국 근대 연극사에서 ‘신연극’라 하면 대개 창극을 가리키는 것이다. 창극이 만들어진 이유로 간접적으로는 공연 환경의 변화와, 직접적으로는 극장의 설립을 들 수 있다. 당시는 공연환경이 극장 문화양식으로 급변하는 시대였고, 동시에 모든 공연은 실내극장의 구조와 연행구조적 원리에 알맞게 제작되어야 했다. 이러한 압력은 광대들에게 일본의 가부키가 거듭나 신파가 된 것처럼, 전통연희인 판소리도 거듭나 새로운 연극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전통연희인 판소리가 무대 음악극으로 현대화 되어야 한다는 광대들의 의지에 의해 이른바 ‘판소리 개량론’, 즉 신연극운동이 대두되었으며, 그 결과 창극이 등장하게 되었다.2. 창극의 제작창극의 제작은 방법적으로는 외래극의 모방에 그친 극장 편입이었고, 시간적으로는 성급하게 전개되어 과도기적인 양식을 성립하였다. 당시의 광대들은 일본과 중국의 전통 판소리에 해당하는 조루리와 창희가 각각 일본의 가부키와 중국의 경극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서 판소리 개량의 당위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조루리와 창희가 각기 자기발전적 대안(연극 미학)을 가지고 거듭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고찰하지 않았다. 이러한 여건에서 과도기적으로 시도된 것이 ‘대화식의 분창’이었다. 판소리를 해체해서 새로운 음악극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정도로 창작적 기반이 취약한 시대였다. 우선 판소리 더늠과 아니리를 대상으로 한 분창과 대화가 창극화 방법으로 제기된다. 최초에는 주요인물 한 두 명이 출연하여 유명한 더늠을 주고받는 식의 화창을 시작으로 차차 등장인물을 늘리고, 장면을 만들고, 또한 장면을 늘리는 방식으로 판소리 한 편 전체를 공연하는 구조로 발전하였다.3. 창극의 역사-1900년대 : 창극의 형성기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인 협률사가 설립되어 조선 후기 왕실의 오락 연희물이었던 기생의 춤과 노래 및 창부들의 판소리 등이 공연된 한편, 1906년 무렵에는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등 사설 극장이 설립되고 문명 개화론자와 극장 설립자 사이에서 연극에의 필요성이 증대하자 판소리 레퍼토리의 연극화가 추진되어 창극이 형성된다.-1910년대 : 창극의 대중화이 시기의 창극은 '구연극', '구파극' 이라고 불리며 대중극으로 번성한 한편, 신파극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1915년 이전에는 광무대, 장안사, 단성사가 전통연희 공연장으로 사용되었고, 전통연희 공연장들은 이들 극장에 계약되어 창극, 기생춤, 줄타기 등을 함께 공연하였다. 1915년 이후에는 기생조합과 경성구파배우조합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 등의 고전 소설이 연극화되었다. 이들 공연은 하루에 한두 막 정도 연극화하여 여러날에 나누어 공연을 하였으며 창이 곁들여져 잡가 및 판소리 명창들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었다.-1920년대 : 창극의 근대화1920년대 초기에는 기생조합과 광무대를 중심으로 하여 1910년대처럼 고전소설의 연극화 및 희극 증심의 공연이 이루어졌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축음기 회사나 조선음악협회 등 각종 음악 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기생연주회가 사라지고 '명창대회'가 유행하게 된다. 음악분야의 번성과 가극의 출현으로, 당시의 창극 공연은 가극이라 불리게 되며 가극이라는 양식명을 내건 창극 대본이 나오고 유성이 창극 음반도 발매되기에 이른다. 한편, 이 시기에는 서양의 연극론이 우세하게 되어 창극이 연극으로서 공연되는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1930년대 : 창극의 전형화1930년대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판소리 창자들 사이에 '전통'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높아지면서 조선음률협회를 조직하여 조선 음악을 부활시키기 위해 공연방식의 병패를 시정하는 '청신운동'을 펼친다. 그리고 이를 계승한 조선 성악 연구회는 전통 보존의 의식을 앞세우며 공연 활동을 펼쳤다. 조선성악연구회는 각색 및 연출자의 주도하에 정교한 무대효과를 고려하면서 한 편의 완성된 작품을 공연하였고 창과 대사의 표현 방법을 여러 방식으로 실험하면서 창극 연행의 정형화를 꾀했다.-1940년대 ~ 1950년대 : 창극에서 국극으로해방기 및 1950년대에는 창극이 국극이라고 불렸으며, 일제하에 조선음악협회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대거 참여한 대한 국악원의 산하단체로 활동하였다. 해방기에는 국극사, 국극협회, 조선창극단, 김연수 창극단이 있었고, 1950년대에는 여성국극단이 번성했다. 여성국극은 전후의 피폐한 혼란 속에서 여성이 남장하는 데서 오는 매력과 자극적이면서도 쉬운 시대물의 개발 등을 기반으로 연극계를 석권했다. 그러나 여성국극단의 난립과 함께 레퍼토리의 빈곤이 가중되는 한편, 전통 연희에 숙련된 배우들의 절대 부족 현상이 되풀이 되고 영화 등 다른 대중오락물이 많아지면서 무대에서 멀어지게 된다.-1960~1990년대 : 여성국극의 명맥 유지와 국립창극단의 설립1960, 70년대에도 동방여성국극단, 신신여성국극단 등의 단체들이 지방을 중심으로 공연활동을 가졌고 1980년대 후반 이후 현재 까지 간헐적으로 여성 국극단의 공연이 이루어 지고 있다. 한편, 1962년 국립극장 산하의 전속단체로서 국립국극단이 창설되고, 이는 다시 1973년에 국립 창극단으로 개칭된다. 국립창극단은 제 1 회 창단 기념공연 을 비롯하여 , , 등의 정기 공연을 가졌고, 이에 힘입어 창극정립위원회가 결성되어 창극의 부흥을 꾀하였지만 국가의 장려와 후원에 힘입어 정기 공연되고 있을 뿐 관객의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86, 1988년 국가적 행사를 치르는 과정에서 창극이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극으로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창극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였다.4. 창극의 종류(1)여성 국극여성국극은 1902년 세워진 황실극장 협률사에서 대화창 형태로 시작된 창극의 한 형태이다. 여성국극이 태동한 것은 1947년으로 임춘앵, 박귀희, 김소희 등 당대의 여성 명창들이 모여 을 공연할 때였다. 이 공연의 대성공에 힘입어 48년에 5월 임춘앵, 박귀희, 김소희, 신숙씨 등이 주축이 되어 여성국악동호회 를 조직, 다음해 공연한 여성국극 은 큰 인기를 모았으며 극장마다 인파가 몰려들었다. 여성국악동호회는 그 여세를 몰아 창극계를 압도해 갔다. 이후 여성 국극이 몇 년 안에 대중예술의 총아로 떠오르자 수십 개의 국극단이 창단되었고 대도시 극장들은 사람들로 대성황을 이룬다. 이때의 레퍼토리는 거의가 야사, 설화, 전설을 사랑과 이별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주제는 사랑과 이별, 은혜와 복수,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멜로드라마였다. 60년대 중반 이후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여성국극 붐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사랑타령 중심의 소재에 안주하는 등 소재 빈곤과 후진양성 소홀도 여성국극이 쇠퇴의 길을 걷게 한 요인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여성국극은 급속히 쇠퇴했다. 반면 여성 국극의 그늘에 가려 설 땅을 잃었던 판소리는 62년 국립 창극단이 생기고 64년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든 정부의 지원과 배려로 활기를 되찾았다. 현재 원로 여성 국극인들이 여성국극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외치며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1. 생애 (BC 384~BC 322)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작은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왕의 시인인 니코마쿠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아테네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의 입학한 후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BC 344년 마테도니아의 왕 필립포스의 초청을 받아 왕자 알렉산더의 스승이 되었으며 BC 335년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왕의 도움을 받아 교외 리케이온에 도서관, 박물관 등의 많은 시설을 갖춘 학원을 세웠다. 그의 철학적 연구발전 과정은 대체로 3기로 분류된다. 제1기는 아카테미아 시대의 수학기, 제2기는 유랑시대의 과도기, 제3기는 리케이온 시대의 완숙기이다. 제1기에 그는 플라톤적인 대화편을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재에는 단편만이 남아 있다. 제2기에는 그의 후기 대작인 형이상학, 논리학, 정치학의 원형이 남아 있다. 제3기에는 현존하는 그의 모든 저작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2. 학설(1) 시학(Peri Poietikes)시학은 모두 2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다시 내용별로 정리 하면 모방에 관하여(1,2,3장), 예술의 기원(4,5장), 비극의 정의와 효과(6장), 비극의 구조(7장), 예술의 본질(허구성 8,9장), 구성에 관하여(10,11,12장), 비극의 목적(카타르시스 13,14장), 인물론(15장), 구성의 구조(16,17,18장), 사상성과 조사법(19,21,22장) 그리고 어떤 시인은 음성에 의해서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예술을 표현하는데 이런 여러 가지 예술들은 모두 율동, 언어, 화성을 이용하여 모방을 행한다. 이때 앞서 언급한 방식을 단독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혼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2) 예술의 기원시의 기원, 정확히 말하여 시극의 기원을 인간의 본능에서 찾고 있다. 인간의 세 가지 본능은 예술가의 모방본능, 훌륭한 모방을 인식하는 데 있어 느끼는 즐거움, 화음과 리듬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본능이다.3) 비극의 정의와 효과시학에서 연민과 공포감은 비극의 주된 정서이다. 공포의 뿌리는 자기보존 욕망이고 연민의 근원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관심이다.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를 알게 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때 관객도 함께 정화됨으로 인간의 가치성, 생명의 존엄성도 비극을 통해 절실히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진지한 희곡의 반복되는 중심주제는 의무의 부과이고, 그 의무를 실행하면 불가피하게 생명, 사랑, 명성, 평화를 잃게 되어 주인공은 선택의 문제에 빠진다. 비극에서 반복되는 또 하나의 중심주제는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을 '공포와 연민'을 통해 궁극적으로 '감정의 정화'를 느끼는데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한다.예술은 각기 모방되는 대상), 사용하는 수단)과 모방양식에 따라 달라진다. 비극에서 모방하는 대상은 진지한 흥미의 행위이거나 인생의 단편(그 자체로 완전하고 중대성을 지닌 사소한 것 이상의 충분한 길이와 진지함을 내포한)이다. 수단은 모든 가능한 양념, 예를 들어 멜로디나 조사법 등에 의해 맛이 돋우어진 언어라는 사실이다. 모방양식은 극적인 것 즉 관중에게 연민과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 등장인물에 의해 행동하여지며, 이 결과로 비슷한 감정을 전달함으로써 기쁨을 주는 감정완화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된다. 비극의 흥분은 우리의 감정에 기쁨을 주는 완화작용을 한다. 비극은 여섯 개의 구성요소로 분석된다. 모방된 대상과 관련진다. 비극에 적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필연성 때문이며 단순한 우발적 사고는 사건의 결과 많은 공포나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5)구성의 종류와 요소비극의 3가지 구성요소는 발견, 급전, 파토스(비극적 사건)이다. 단순구성에서는 주인공의 운명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직접 바뀌거나 그 반대가 된다. 복합구성에서는 어떤 발견의 요소가 운명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이끌게 되는 절정이나 전환점이 있는데 이것을 급전(운명의 수레바퀴를 갑자기 역전시키는 것)이라 한다. 급전의 가장 효과적인 형태는 어떤 사실의 발견과 함께 정확히 우연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급전은 종종 행위자 의도의 역전, 즉 주인공 행동의 결과가 그가 의도한 바와 반대되는 경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6) 비극의 목적, 예술적 쾌락연민과 공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장경'이라 부르는 단순한 재앙의 광경만으로도 일어난다. 그렇지만 비극의 수단을 결정하는 주요한 목표인 비극의 진실하고도 적절한 기쁨은 장경과 무관하며, 공연되지 않고 글을 읽기만 하여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의 구성과 연속성에 의해 창출되기 때문이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어떤 인물이 자기 가족의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주는 순간이다.(2)논리학아리스토텔레스는 객관적 실재가 인간의 의식 속에 반영되는 형식의 하나 인 인식을 체계화시키는 데 필요한 논리적 추리형식으로서 3단 논법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쌓았다. 또한 양상논리의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이 측면에서 그의 논리학의 의의가 최근에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논증과학이란 정의에 의해서 조정되는 특정한 유적존재를 공유의 원리를 이용하여 파악하고, 그 종류에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현상을 3단 논법을 사용하여 논증해 나가는 절차이다. 논증과학의 구조를 3단 논법을 적용하여 분석하고 3단 논법을 형식논리학에서 공리화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우선 수학적인 방법으로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나아가 이것을 경험과학에도 적용할 수 있는 논증과학 일는 힘), ④ 목적인)(目的因:그 사물 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은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자연물은 질료(matter))와 형상(form))으로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 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된다. 질료는 잠재력(potentiality)을 가지고 형상을 담고 있는 재료이며 그 잠재력을 나타나게 하는 것(actuality)이 형상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을 철저하게 관찰하였으며 그 시대의 자연지식을 남김없이 수집하고 상세히 검토하여 생물의 성장은 물론, 위치의 변화, 장소의 이동 같은 역학적 운동도 목적론적으로 고찰하였다. 지상에 있는 물체의 자연적 운동이 낙하 또는 상승의 일시적 직선운동을 하는 것과 반대로, 천체는 영원히 한결같은 원운동을 하며 이것이 그 본성에 맞는 자연적 운동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지구가 흙?물?공기?불의 4원소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는 달리, 천체는 제 5 의 원소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이 세계는 불완전한 지상부분과 완벽하고 규칙적인 천상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하였다. 운동을 이처럼 자연적인 것과 강제된 것, 지상의 것과 천상의 것으로 구분은 이후 운동에 대한 개념으로 규정되어 역학(力學)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로 인해 G. 갈릴레이?I. 뉴턴에 의해 새로운 학설이 발표된 이후에야 비로소 근대 역학의 수립이 가능하였다.(4)형이상학존재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문에 비해서 존재는 모든 사물을 통어하는 여러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제 1 철학이라고 한다. 특수학문이 특정한 존재자에 대해 그것이 특정한 종류에 속하는 범위 내에서 필연적으로 가지는 여러 성질을 밝히는 학문임에 비해, 형이상학은 그것들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사실을 성립시키는 제 1 의 여러 원리를 밝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이상학은 특수한 학문들을 두루 꿰뚫고 있는 제 1 의 원리를 탐구하는 보편학인 최고의으나 이것은 약간의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中庸)으로서의 덕(德)이 행위의 목적이다. 덕은 과잉과 과소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mesotes)'에 존재하며 이성적 활동에 따라 생기는 습관이다. 이성의 작용에는 두 가지 활동이 있다. 하나는 이론적[진리의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욕망의 억제]이다. 이에 대응하는 덕은 지덕과 행덕이다. 지덕은 이성의 적정한 활동에 따른 덕이며, 행덕은 이성이 정욕을 억제하는 곳에서 생기는 덕이다. 그러므로 덕의 행위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선의지((善意志)가 있을 때 가능하다. 정욕은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데, 이성이 적정하게 정욕을 지도할 때에 생기는 과불급이 없는 중용의 습관을 행덕이라 한다. 덕은 이 중용이 어느 정도 실현되는가에 따라 생겨난다. 예컨대 용기의 덕은 비겁과 만용과의 중용이고, 관후는 인색과 낭비와의 중용이며, 유정은 무정과 아첨과의 중용, 정의의 덕은 타인에 대한 방자한 무시와 소심한 굴복과의 중용, 온순의 덕은 냉담과 화급과의 중용의 덕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용의 덕은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개념을 초과와 부족에 대한 균제(均齊)라 하고 또 산술적인 비례중항(比例中項)으로 대표되는 것과 같은 사항 그 자체에서의 중용과 '우리들(지식층)에게서의 중용'으로 구별하여 후자를 윤리적인 덕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중용을 본성으로 하고 최선으로 하는 덕에 대하여는 초과도 부족도 악덕이 된다. 인간의 능력은 이성의 능력이며 그 완전한 실현은 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있지만, 이것은 사람에게 단지 잠깐씩만 허락되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활동에 있다. 인간의 행동을 언제나 이성적 질서에 적합한 상태로 발현시키기 위한 힘으로서, 영혼 속에 있는 지속적 상태가 기량이다. 기량은 영혼의 정동적(情動的)인 부분에 있어서는 극단다.
중세한국연극1. 군왕의 호악과 가무백희태조 왕건이 팔관회와 연등회를 열어 이를 장려한 뒤로는 해마다 그 놀이가 번창하여 갔다. 그리하여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무격놀이가 성했으며, 한때는 외래의 잡희, 잡극 및 중국 산악계의 모든 놀이가 들어와 실로 백희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고려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삼국문화의 집결체였다. 북으로는 거란과 여진의 가무잡희에접하고, 송과의 교섭으로 그곳 대성악을 받아들임으로써 후일 조선의 아악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여, 몽간의 교류와 교섭을 통해 그곳에 이미 들어가 있던 색목인(원나라에서는 서역계의 모든 인물을 색목인이라 하였음), 즉 아라비아인과 페르시아인들과 접촉하였고 중세 유럽의 사라센문화에의 접촉이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의 천문, 수학, 의학, 건축 등 학문과 예술을 포함하여 모든 기예 면에서도 자연스런 접촉이 이루어졌다.물론 고려의 상징인 청자문화와 같은 독특한 예술도 없지는 않았으나, 몇몇 국왕들은 향락에 도취하여 전통적인 가무와 함께 외래의 괴이한 탈춤 및 골계회 등에 친숙해져서 이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이와 스스로 어울리기도 했다.(1) 팔관회와 가무백희고려시대의 가무백희는 팔관회의 전부였다고도 할 수 있으니 이혜구 교수는 백희와 팔관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먼저 “그 기복하는 팔관회가 특히 천령, 오악, 명산대천, 용신의 제사의식을 갖추지 않고 국선에 의한 가무백희만으로 전행 되었느냐”고 “반문하고 나서,[고려사]에 실린 팔관회의는 행향 수하, 백희 및 예연으로 되었을 뿐 팔관회의 그런 독특한 성격을 명시하지 않느냐?”고 도리어 묻고 있다.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가무백희가 위주였음을 알 수 있다.(2) 고려문헌을 통한 왕들의 호악성과 그 당시 널리 퍼져있던 가무백희들의 실상예종은 풍류에만 능하였을 뿐 아니라 문아로도 드날려 고려 군왕 중 많은 일화를 남긴 임금이다.예종 11년 기축 4월에 왕이 서경으로 순행하자 유수백관들이 의장대를 갖추어 이를 맞이하였는데, 대악과 관현의 양부가 서로 기이함을 경쟁하여 부녀들로 하여금 치마, 또는 격구를 하게 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같은 해 12월, 궁중 나례 때에는 신하들이 좌우로 갈리어 나례로써 승부를 가리는데 왕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케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때 창우잡기와 외관, 유기들이 이에 동원되었고 거기에 구나 이외의 다른 놀이들도 두서없이 경연되었다고한다.예종 15년 10월 왕이 서경에 행행 하였을 때 마침 팔관회가 열렸는데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락의 충성을 보인 가상극이 있었다. 이는 곧 일종의 가면극인 탈춤이기도 하였다.이를 보고 왕이 몸소 감탄하여 읊은 노래가 전하니, 이것이 말하자면 현전 향가 속에 포함되어 전하는 이다.이는 다른 향가들처럼 이두문으로 되어있으며, 신,김 두 장군의 전사를 애도한 2수의 단가로 전한다.[A] 主乙完乎白乎(주을완호백호) 임금을 오롯하게 부탁하오心聞際天乙及昆(심문제천을급곤) 마음은 하늘에 미치고魂是去賜矣中(혼시거사의중) 넋이 가셔도 사이에三烏賜敎職麻又欲(삼오사교직마우욕) 세워준 역할 또 하려오[B]望彌阿里刺(망미아리자) 보라 미아리 가시덩굴 미치려及彼可二功臣良(급피가이공신량) 저기 가는 두 공신久乃直隱(구내직은) 좀 있다가 씩씩한跡烏隱現乎賜丁(적오은현호사정) 자취를 나타냈소상기 주에서 보듯 태조 왕건이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쫓겨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건의 모습과 닮은 신승겸이 왕건을 가장하여 대신 싸우다가 죽고, 김락장군이 마지막까지 분전하여 마침내는 왕건을 적중에서 빠져 나가게 하였다.그 가상극은 필시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무대는 대구 팔공산, 주인공은 신, 김 양장군, 두 장수는 검붉은 조복에 금으로 만든 지휘도를 잡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뛰어나와 뜰을 두루 한바퀴 돈다. 드디어 신장군의 용전과 영웅적인 전사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왕은 감탄하여 좌우에게 묻고, 위와 같은 [도이장가] 두수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의종조는 관악을 즐기고 산대채붕을 가설하여 잡기와 잡희로써 영일하고 이에 도취하여 향락을 일삼으며 나라 살림과 정치에는 아랑곳 하지 않아 몽고의 화를 당하고 강화도에 파천하는 사건도 일어난다. 그러나 때 마침 고려문화의 개화기에 당하여 이 나라 극희도 바야흐로 그 활로를 찾을 수 있었으나 어쨌든 의종은 사치를 일삼기로 유명한 임금으로 그의 일대에는 많은 희락관계의 사실이 전하고 있다.최남선의 전게서에 의하면 의종 6년 정월에 연등회에서 실컷 구경하고 돌아온 왕이 오히려 흥이 풀리지 아니하여 이미 철거한 채붕을 급히 부설하고 영관양부악을 모아 해가 저물도록 관악망권한 일이 있으며, 왕의 호악함을 내시의 좌우번이 경쟁적으로 영합하는데, 19년 4월에는 우번에서 채붕을 매고 갖은 잡기를 연주하는 중에 [이국인공헌지장]까지 있었고, 좌번은 유사들이라 잡희에 익숙치 못하여 군총이 덜하였다 하며, 동 21년 4월에 하청절의 잔치를 할 때에는 대악서와 관현방이 채붕과 준화를 쟁비하여 갖은 [성가지희]를 연하여 밤중에 이르고, 이어 5월에 장단 응덕정의 선유를 할 때는 주중에 채붕을 매고 여락잡희를 싣고 즐기다가 오경에 강 기슭에 올라서도 오히려 놀이를 계속하였으며, 같은 22년 3월에 서경에 순행할 때는 도처에 연락을 베풀어 온갖 놀이와 잡희로써 즐겼으며, 역시 의종 때에 예성강인들이 그 땅을 현으로 하기 위하여 왕을 그리로 모셔 기기음교를 베푸는 가운데 50여주에 채범을 달고 악기, 채붕을 싣고 제악을 연할 때 한 재인이 귀희를 하여 입에 문 불을 토하다가 배 한척을 불사를 것이 왕의 웃음을 산 일이 있었다.이를 통해 보더라도 군왕이 즐기던 놀이로서 잡기 중에는 [이국인공헌지장]을 비롯하여[성가지희]를 보는 등, 재인들의 [귀희]와 [토화희]등, 이색의 전기 구나행의 시에서 보는 갖가지 서역계의 놀이가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채붕 즉, 산대를 배에 싣고 선유하던 장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대의 권신세도가의 호악 또한 극에 달했음도 한사가의 잔치에 악공과 재인이 천 수백명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