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최종 보고서1. 주제선정▶ 2000년 말 출시된 걷다가 달리는 바퀴 달린 신발‘힐리스(heelys)’는이미 미국에서 수백만 켤레가 팔렸다. 뒤꿈치에 롤러스케이트의 바퀴가 달린 이 신발은 바퀴를 달고 시속 48㎞까지 달릴 수 있다. 바퀴를 달고 다니다가 간단한 조작으로 바퀴를 떼어내면 일반신발이 된다. 대중교통으로 집에서 회사·학교까지 30분 미만인 사람이 힐리스를 신고 움직이면 10여분만에 미끄러지듯 목적 장소에 안착할 수 있다. 또 주유소, 대형 야외 카페 등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도 힐리스를 신으면 체력을 아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힐링을 하면서 운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현대인처럼 바쁜 사람들에게는 걸어다니면서 운동까지 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할 수 있다.이러한 편리함 때문에 젊은 학생층은 물론 20~30대 남성들로부터도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에 비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부분은 부족한 면이 많아 더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현실이다. 특이한 신발의 특수성 때문에 인기를 끄는데는 한계가 있다. 이에 우리는 현재 힐리스의 마케팅 사례를 분석하고, 소비자 조사 및 매장 주인과의 인터뷰를 시도하여 힐리스의 인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마케팅 전략을 연구해 보기로 하였다.2. Heelys의 탄생{) Star from Hellys Masters (다음 힐리스 동호회)▶ 1998년 로저 아담스라는 한 중년의 심리학자는 자가 사업의 도산 후 한가지 생각에 몰두하게 되었다. 로저는 어릴 적부터 롤러스케이트를 즐겼으며, 생후 9개월만에 롤러스케이트를 탄 최연소 롤러스케이트로 기네스북에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그는 늘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걸을 수도 있고 스케이팅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까?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그의 작품이 바로 Heelys이다. Heelys는 일반 운동화와 똑같다. 그러나 한가지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발뒤꿈치에 휠을 장착함으로써 걷기도 하고 스케이팅도 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운동화반적인 신발에 비하면 안전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발로서 힐리스를 사용할 경우에는 이러한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안전상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인라인 스케이트에 비하면 적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 기회 요인(1). 레져 문화의 보급▶ 과거의 의식주를 고민하고 있던 삶에서 벗어나 현재에 와서는 의식주 문제보다는 개인과 가족의 복지 및 생활에 삶의 포커스가 맞추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주 5일 근무제 확산은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침은 물론, 우리의 생활양식(lifestyle)을 더욱더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로 변화시켜 여가형태 소비구조 가족공유시간 등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다양한 개성 발휘를 위한 여러 가지의 레져 생활이 현대인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더 이상의 단순한 레져 생활이 아닌 나만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여러 형태의 레져 문화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주말여가를 가족유대감 강화나 자기개발, 혹은 레저나 스포츠활동처럼 자신의 건강과 발전을 위해서 투자하는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2).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 추구▶ 이 상품의 시장의 기회요인으로써의 하나가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 추구이다. 이는 이 제품의 주 소비 연령층이 10대에서 20대이므로 이들의 특성을 찾아야만 한다. 여기서 힐리스라는 제품은 이 연령층이 보이는 소비형태 즉 유행에 민감하고 활동적이며 모험적인 생활을 즐기며 개성 발휘에 많은 역량을 쏟는다. 이러한 시장에 힐리스라는 제품은 많은 유리한 점을 갖게 된다. 아직까지는 대중화가 되지 않은 탓에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은 신발을 통하여 구현 할 수 있는 것이다.(3). 인라인 스케이트의 보급률 급성장▶ 현재 인라인 스케이트는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선 성인스포츠 로서 대중화돼 있다. 국내에서도 2 3년 전부터 고가 중심 인라인 스케이트가 등장,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또 공원, 광 장 및 자전거 전용도로 등이 많이 생겨나 인라인 스케이트 이 제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가 하는 것과 힐리스를 구매한 이후 이들이 자체적인 활동을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중점으로 두어야 한다. 소비자가 보여주는 자체적 활동이라는 것은 힐리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온·오프라인 상으로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TV나 타 매체 광고를 하지 않는 힐리스의 중요한 마케팅 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의 규모도 업체에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시장의 소비력도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음의 3가지 조건으로 각 세분시장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첫째. 힐리스에 대한 인식을 보면 A, B 집단에서는 개성의 추구욕이 강하다는 면을 통해 매우 긍정적 인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둘째는 적극적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집단인가? 이다. 이에 A 집단은 나름대로 또래집단을 통해 어느 정도의 유사한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이들의 관심분야는 쉽게 다른 대상으로 전이될 수 있고, 여러 집단으로 넓게 퍼져 나가기는 힘들다. 하지만 B 집단은 자신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동호회 등의 활동에도 적극성을 보여 다양한 파급효과를 누릴 수 있다.셋째. 경제력의 측면에서 시장을 측정해 보자. 힐리스의 가격을 보면 타 운동화나 레포츠 도구에 비해 비싼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힐리스가 시장에 대해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실제 소비자들에게는 가격이 높은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때문에 시장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소비력을 지니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 측면에서 보면 B, C 집단이 유리할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조건을 종합해 본 결과 B 집단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줄수 있다. 때문에 B 집단을 힐리스의 초기 런칭 시기의 target층으로 볼 수 이 있다.3) Positioning{{{{{▶ 힐리스는 위의 경쟁업체와의 포지셔닝 맵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존의스포즈화 시장과 요 생각하는가?▶ 별로 상관없다. 어차피 자기능력에 따라 정품을 사는 것이다. 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정품이외에는 관심이 없다.6. 현재 본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광고 및 여타 홍보 전략에 만족하는가?▶ 만족하지 않는다.7. 본사의 마케팅 전략(광고나 여타 홍보 전략)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TV광고나 스타 마케팅을 해주었으면 한다.8. 힐리스의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하는가?▶ 약간 비싸다고 생각은 하지만 가치에 비하면 적정하다고 생각한다.9. 힐리스의 디자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약간 뭉툭한 디자인이라 둔해 보이지만 초기 모델보다 많이 나아진 편10. 본사의 지원에 만족하는가?▶ 만족하지 않는다.11. 만약 아이들만을 위한 제품이 나온다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싫증을 빨리 내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힐리스 매장 방문용 질문지 - 1. 특별히 힐리스 매장을 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힐리스의 인기에 편승하여 충분히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2. 현재의 매출액이 과거에 비해 변화가 있는가?▶ 떨어지고 있음. 세븐이후 한창 오르다가 점점 감소3. 오르고 있다면(떨어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한순간의 인기였다고 생각한다. 꾸준히 유지해야 하는데 변화가 너무 심하다.4. 매장을 많이 찾는 연령층은?▶ 초등학생. 30대에서 40대의 아들 선물을 위한 부모님, 중고생들5. 정품 힐리스가 아닌 값싼 바퀴 달린 신발이 많이 팔리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쁘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많이 팔리고 있는데 그거 위험하다. 정품에 비해 안정성도 떨어지고 A/S도 안되고, 고장도 잘난다.6. 현재 본사에서 시행하고 있는 광고 및 여타 홍보 전략에 만족하는가?▶ 매장은 늘고 있는데 홍보전략이 부족하다. 본사에서 관리지침도 내려오지 않고 있다. 주로 동호회 위주로 하고 있다.7. 본사의 마케팅 전략(광고나 여타 홍보 전략)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대리점 홍보전략을 더욱 강화. 스타마케팅(세븐처럼..볼 수 있으며 이에 타겟을 위에서 설명한 B타입으로 한정하지 않고 2개의 타겟을 선정할 필요가 있다. 즉 다수의 표적시장을 선정하고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세분집단세분화변수AB인구 통계학적 변수심리적 변수행태적 변수소비심리10대 초중반남의 개성도 내 것으로또래집단의 문화구매욕은 강함(소비력 약함)10대 후반~20대 초반개성 추구가 강함관심분야에 대한 적극성구매욕, 소비력 모두 강함즉, 지금의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타겟은 B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대부분의 구매층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개성을 추구하는 층을 하나의 타겟팅으로 유지하고 이에 더하여 새로운 타겟팅, 즉 10대 초반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타겟팅을 하여 전략을 구상하는 것이다.차별적 마케팅 전략을 수행한다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인용 제품과 어린이용 제품을 확실하게 이원화하고 브랜드 자체를 나눔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11. 4P 믹스를 통한 마케팅 전략1) Price(가격) 전략{제품가격대기능비고브랜드 신발8만원-20만원디자인을 갖춘 일반적인 신발브랜드 인지도가 높다.인라인 스케이트10-30만원레포츠용 스케이트제품에 대한 인지도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힐리스14만원-20만원신발과 인라인 결합한 형태의 기능성 신발아직까지 인지도가 미흡하다.▶ 기존의 힐리스 제품의 가격은 14만원대에서 20만원대까지 분포하고 있다. 비교대상의 제품에 비하면 고가 전략이라고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발 가격대가 폭이 넓기 때문에 힐리스의 경우에는 이는 저가 전략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기존의 가격 정책은 고수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저가 전략이 단기간의 매출을 신장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았을 때는 이 제품의 특성인 개성 추구라는 면이나 남들과의 차별화를 간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아직까지는 제품 자체에 대한 브랜드 인지도가 없기 때문에 저가 가격 정책의 경우 자칫 잘못하면 흔히 말하는 싸구려 제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국민주주의의 위기와 그 대안(대선을 사례로)우리 나라의 정치제도는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을 말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귀속되게 하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가 행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 여기에서 ‘사회적 합의’란 만장일치의 개념이 아니라, 여러 대안들 간의 경쟁을 통해 다수의 의사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다수의 대안들이 자유롭게 나올 수 있고, 그러한 의견들이 정당한 경쟁을 통해서 의사로서 표현되고 받아들여 질 수 있는 환경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50년이 조금 넘는 역사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현재의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관심을 크게 갖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역사와 제도, 문제점 들을 정확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이 이 시점에서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현실이다.이글에서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실태를 대선과 정치와 관련하여 알아보고자 한다.한국 민주주의는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이익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대표하여 정치체제의 안정에 기여하는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닌듯하다. 여러 가지 심층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 2년마다 치러지는 각종 선거를 살펴보면 투표율은 경제적 수준이 나아질수록 역으로 낮아지고 있다. 이런 낮은 투표율로 인해 진정 국민을 대표하는 정당의 출현을 가로막고 있으며 또한 우리 사회의 기득세력과 보수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들의 투표행위는 당연히 과대대표가 되고 진보성향을 갖는 유권자는 그동안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전혀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표율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가 시민의 ‘참여’와 정당에 의한 ‘대표’에 그 핵심이 있으므로, 저조한 투표율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참여의 위기’(시민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와 ‘대표성의 위기’(정당들이 시민의 정당한 대표자인가)를 겪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투표율 감소의 원인은 젊은 유권자층의 낮은 투표율 때문이지만, 그들이 투표하지 않는 이유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부패속에서 정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당은 이런 반감을 표출할 수 있는 강력한 반대당이나 진보정당이 없다. 때문에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사람은 기득권세력과 보수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이며, 보수정당이 독점하는 형세가 되어버린다.이런 현상은 이번의 대선 투표율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번 대선의 투표율은 역대 최악이라고 한다.2.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한국 민주주의는 보수정당이 독점하는 정치구조가 지속되고 있으며, 정치는 상층계급의 일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상층계급 모임의 정당에 저항할 방법(진보정당에 투표하는 방법)이 없는 유권자들은 민주주의에서 이탈하게 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우에도 상위계층이 하위계층보다 투표율이 높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민주화 이후에 정당이 대중정당으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간부정당, 선거전문가 정당으로 남게 됐다.계급구조화의 심화와 중산층 중심 사회의 해체보수독점의 정당체제를 갖춘 한국민주주의의 결과 계급간 불평등구조가 급격히 심화되고 있다. 이와 같은 불평등 구조는 몇 가지 지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득불평등 지니계수는 민주화 이후 계속 증대되었으며, 상위재벌에 대한 경제력 집중도도 심해지고, 노동 및 주택문제는 더욱 열악해졌으며,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고 있다. 한국은 권위주의 산업화시대에 이루었던 중산층 중심의 사회구조가 양극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어, 중산층 중심의 사회가 해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교육과 계급구조화계급의 구조화를 있는 형국 혹은 시장불평등이 교육의 영역마저 지배하는 것을 방치하는 상황이 되었다.4.지방의 배제와 초집중화민주화 이후 수도권의 중앙집중화는 민주화 이전보다도 더 심화되었는데, 서울로의 초집중화 현상은 오히려 지방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사회의 해결해야할 문제로 손꼽히는 지역감정 문제 역시 중앙집중화로 인한 현상이다. 이념적?계층적 기반이 부족한 정당과 보수독점적 엘리트 과두체제 조건에서 정치경쟁은 국가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으로 나타났는데, 경쟁의 편을 가르는 구분선이 지연?학연이었다. 즉, 지역감정의 대립은 중앙 엘리트 사이의 권력을 둘러싼 경쟁의 산물로 파악해야 한다.5.냉전반공주의의 미시적 결과냉전반공주의가 영향력을 갖는 정치체제에서 서민의 이익은 대표되지 못한다. 그 결과 상층계급의 오만 및 상층계급에 대한 열망이 명품선호, 출세지향적 행태, 영어열풍, 외모지상주의, 금전만능주의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냉전반공주의가 극우보수적 사회구조와 만나면서 증오와 배제의 비인간성을 조장하고 있다.6.언론이 지배하는 한국정치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에서 언론의 역할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장관, 정치참모와 고급관료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커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언론의 자유가 의견의 자유를 넘어섰으며, 언론이 통제되지 않고 있다. 현재 한국의 여론은 선진국과 달리 동질적인 정치적 지향을 갖는 대기업 언론이 독점하고 있어, 민주주의의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7.최대 균열은 대표된 정당체제와 대표되지 않은 사회 사이의 균열한국은 사회적 기반이 없는 정치적 대표체제와 이에 대표되지 못하고 저항하고 있는 비투표유권자 사이의 균열이 크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아래로부터의 대중동원과 참여는 정치 엘리트들의 보수적 안주를 막고, 정당간 경쟁은 사회의 변화와 요구에 상응하도록 대표의 범위를 확장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정당체제의 보수성은 사회의 여러 갈등하는 이해와 의견에 따라 정치경쟁이 이루어지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정당체제를 사회적 기반과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하며,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게 하기 위해 여러가치나 제도의 보완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2007년 올해는 87년 6·10 민주항쟁 이후 20년, 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10년, 그리고 대통령선거의 해다. 개발독재에 저항하여 희망의 싹을 틔운 87년 민주화 대투쟁은 이 땅의 ‘일하는 사람들’ 역시 한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임을 선언한 소중한 ‘권리장전’이었다. 그것은 거짓의 역사(僞)가 깨지고 참된 역사(眞)가 열린, 그 출발점이었다. 이 민주주의의 길은 피와 눈물과 고통으로 일구어낸 것이다. 그러나 현 정권에 발을 담근 386세대의 무능과 참여정부의 총체적 난맥상은 평등과 연대가 넘치는 민주주의 사회, 그리고 사회진보와 한반도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불명예를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한 정권이 실패했다고 해서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시대정신이 부정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87년 체제를 통해서 이룩한 민주주의의 성과를 보다 확대하고 성숙시키는 일은 이제 진보, 보수를 떠나 우리사회 모두가 짊어진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또한 올해는 6월 민주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점 역할을 했던 6월 민주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해진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은 없을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갖는 것이고, 이러한 중요한 사건들의 집합으로서 역사가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히 중요한 사건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 예술적 혹은 과학적, 산업적 전진이나 후퇴와 같은 전환의 계기를 형성하는 사건들은 다른 역사적 사건과 비교해서 더욱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영역에서는 혁명이나 항쟁과 같은 저항적 사건이나 쿠데타와 같은 반동적 사건 혹은 국내외 전쟁 등 역사적 변곡점을 형성하는 계기들이 대표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속한다.올해의 대통령선거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중요이후 민주화운동세력이 집권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나날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지자, 민중들은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냐“ 하는 쓰디찬 냉소를 머금고 민주주의를 조소하는 비극적 희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 국민소득 2만 불의 시대를 앞두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면에, 빈곤층이 확대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심각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국민이 ‘두개의 국민’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열 명의 행복은 아흔 명의 슬픔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가 태어난 이 땅에서 끊임없이 유배된 채 빈곤의 섬에서 외롭고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돌아볼 행복함과 자부심도 없고, 희망을 가지고 바라볼 것도 없다고 많은 이들이 좌절하는 곳에 이 시대의 수난이 자리하고 있다. 800만에 이르는 ‘저임금 - 빈곤계층’이 구조적으로 고착화된 사회에서 대다수의 국민은 미래가 없다고 낙담한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김영삼 정부 그리고 10년을 맞이하는 소위 민주 정부 하에서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온 양극화의 현실이다. 민주화의 성과가 삶의 궁핍화와 함께 모독당하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국민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다. 국민 다수의 여론은 진보, 보수의 이념적 차이보다는 현실적 실용주의를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무현 정권에 기대를 걸고 지지를 보냈던 국민 대중은 개혁의 실패로 인한 실망과 분노를 역설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를 반영하듯 경제 리더쉽을 지니고 강력한 국가경영능력을 지닌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거대 프로젝트가 발표되고 있고, 언제나처럼 장밋빛 공약이 앞 다투어 제시될 것이다.그러나 구조화한 불평등 체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핵심 사안으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운 정치세력은 아무도 없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 결집하고 있는 보수진영은 노무현 정권을 좌파 한다.
중남미의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에 대하여...정치외교 4학년 김도윤※중남미의 경제개관Ⅰ.수입대체산업의 정의Ⅱ.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의 등장 배경1. 수출입 경제의 태동 (1880~1900)2. 수출입 경제의 성공과 침체 (1900~1930)Ⅲ. 수입대체산업화의 발전 (1930~1960)1. 수입대체산업화의 등장과 발전2. 수입대체산업화로 인한 사회?정치적 변화Ⅳ. 수입대체산업화의 침체 (1960~1980)- 수입대체산업화의 침체와 그 요인Ⅴ. 수입대체 산업화와 무역자유화Ⅵ. 수입대체산업화의 결과1. 한계점2. 긍정적인 효과3. 수입대체산업화의 비판4. 수입대체산업화 전성기의 끝Ⅶ. 결 론※중남미 경제 개관?? 국가수:33개국?? 면적:2,055㎢(전세계면적의15%,한반도의93.5배)?? 인구:4.7억명(전세계55억인구의8%)?? 국민총생산:1조3,000억불?? 평균인플레이션율(98년):10.2%?? 무역(98년)? - 수출:3,273억불? -수입:3,777억불?? 외자유입:570억불(98년)?? 외채현황:총6,978억불(98년)?? 실업률:7.9%(98년)?? 주요자원의세계생산량점유율:원유(11.3%),철(17.3%),구리(20.5%),은(31.8%)? 주석(20.9%),알루미늄(16.6%),니켈(11.6%)?? 세계무역에서의비중:약5.5%(98년)? cf)아시아18.4%,동유럽5.4%,아프리카2.1%,중동3.3%,미?일?서유럽64.2%Ⅰ.수입대체 산업의 정의수입대체 산업 한 나라가 기존에 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던 생산물을 국내에서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국산화하여 자급하는 경우의 산업을 말한다.발달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개발도상국 이들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는 각국의 성격은 다양하여 성급한 일반화는 허용되지 않지만, 우선 1인당 소득수준이 낮다(1,000달러인 나라부터 100달러 이하인 나라까지 있어 그 폭이 넓음). 예를 들어 선진국과 개도국(개발도상국)을 500달러를 경계선으로 하여 분류하면 개도국은 세계인구의 70%, 세계소득의 12%를 차지한주와 여타 경제 엘리트들이 아르헨티나와 칠레처럼 정부를 직접 통제하는 과두적 민주주의 또는 법과 질서를 주장하지만 지주엘리트의 이익을 옹호하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형태의 정치체제를 만들어내었다.2. 수출입 경제의 성공과 침체 (1900~1930)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외국자본의 최초 투자는 1826년 영국의 아르헨티나에 대한 것이었고 그 이전에도 식민종주국들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자본이 독립이후에도 남아있었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가 멕시코와 페루에 차관을 제공했고 1880년대에는 독일도 아르헨티나에 투자했다. 미국 또한 멕시코 광산과 쿠바 설탕 공장에 투자를 하면서 유럽과의 경쟁에 나선 것이 이시기였다.하지만 산업화를 이룬 여러 국가들 중에서도 영국의 투자가 제일 컸는데, 영국의 투자액은 1870~1913년 8천 5백만 파운드에서 1913년 7억 5천 7백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이는 40년 동안에 9배가 늘어난 것이었다. 영국 투자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아르헨티나, 멕시코, 페루, 브라질 등에서의 철도건설이었으며, 광산, 특히 멕시코, 칠레, 페루의 광산에 과감히 투자했다.이러한 영국 및 서방 국가들의 투자로 인해 중남미 지역의 경제는 성장하였으며, 과도한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하지만 이는 중남미 지역의 국가 스스로는 자신들의 지역에 투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며, 또한 대부분의 경제의 통제력이 외국자본가의 손에 있음을 나타낸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19C 말에 형성된 이러한 수출-수입의 경제성장정책은 중남미지역 국가들의 원자재/식료품의 생산을 발전 시켰으며, 이는 선진 경제에 의존하는 기형적인 성장의 형태를 만들어내었다. 비록 선진경제에 의존한 경제성장이긴 했지만, 수출-수입 모델은 성공하였으며 1900~193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이러한 수출-수입성장 모델의 성공은 사회구조에서 두 가지의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 시켰다. 첫째는 중간 사회계층의 출현과 성장이었다. 수출-수입성장 모델에서 혜택을 받았던 상인, 상점주인, 소규모 사업가들은 수입허가, 관세, 고평가 환율 그리고 핵심산업에서 정부 직접투자였다. 개별산업 육성에서 수입허가제가 사용되었다. 식량, 자본재, 중간재의 필수 상품은 특혜가 주어진 반면, 최종 소비재 수입은 수입이 어려웠다. 필수품은 특혜 환율하에서 저관세로 수입되었다. 다중환율제는 특혜 상품 지원에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높은 투자액으로 인해 민간산업이 시작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철강, 시멘트, 공공재(전기, 가스, 상하수도 등), 비행기 등의 중공업에 정부가 사업을 시작했다. 자동차, 의약, 곡물가공 등의 분야에서 새 공장들이 외국기업들과 합작 산업의 형태로 세워졌다. 외국기업은 기술을 제공하고 정부 참여는 이윤의 해외 송환을 제한했다.중남미 정부는 또한 유연한 통화 체제하에 저 이자율과 신용대출 확대를 통해 산업을 지원했다. 공기업은 전기와 철강 같은 중간재를 값싸게 공급했다. 식량 같은 필수품에서 가격 상한제는 도시 근로자들의 저임금을 가능케 했다.3. 수입대체산업화로 인한 사회?정치적 변화1930년도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침체되었던 중남미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어준 수입대체산업화는 사회?정치적인 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매우 복잡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산업자본가, 즉 산업 부르주아의 형성이다. 칠레에서 이 계층은 주로 토지 소유 엘리트 가계 출신이었으며,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에서도 이들이 전통적인 엘리트를 위협하는 도전세력으로서 대두 되었다.또한 수입대체산업의 촉진에서 국가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했는데, 중남미 지역의 국가들의 경우 19C 영국이나 미국의 자유방임정책과는 반하여 적극적으로 경제성장과 산업성장에 개입하였다. 이는 보호주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관세장벽 등을 통하여 수입제품의 가격인상을 꽤하고, 지역산업의 생산자들에게 정부가 군대에 필요한 물품을 군납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공기업을 많이 만들어 중간재를 싼값에 제공하고 고용기회를 창출하였다. 즉 정부가 경제산업 전반에 개입하여 관리하였으며, 이는 기존의 경제정책과는 중남미 지역 국가들의 산업발전은 자본집약적 기술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런 경제적인 문제점과 더불어 정치적인 문제점 또한 야기 시켰다. 수입대체산업화는 그 진행 속도가 느렸다. 이러한 느린 진행 속도는 대규모 산업화를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는 군부의 직접적인 개입을 가져왔다. 즉, 쿠데타로 인한 군부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그 동안 비토세력으로 남아있던 군부 세력이 정치권에 전면적으로 등장하였고, 이에 따라 강압적인 군부체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64년 브라질, 1966년 아르헨티나, 1973년 칠레에서 군부체제가 이루어 졌으며, 이시기 노동자들은 탄압 받았고, 파업과 노조는 철저히 감시되고 억제 되었다.이러한 이유들을 더불어 중남미 지역 국가들의 수입대체산업화는 실패하게 되었고, 이는 곧 IMF의 개입과 신자유주의의 경제 체제에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Ⅴ. 수입대체 산업화와 무역자유화보호주의가 중남미 경제에서 기본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역과 투자의 개방으로 이제 급격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예) 멕시코 FDI에서 local contents 조항 삭제, 아르헨티나 제조업에서 관료주의 없애고 투자 유치 노력.지난 50년 동안 중남미는 UN 중남미 경제위원회의 Raul Prebisch 의 기치하에 내부지향적 발전 전략을 추구해왔다. 환율과 무역에 대한 규제와 제한 - 다중환율제, 보호주의 관세, 수입허가제, 쿼터, 수출세 등- 이 무역을 제한하고 국내시장을 국내 기업에게 한정시켜주는 효과를 발생시켜왔다.목적은 국내 산업이 훗날 국제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성장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역불균형 해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발전 정책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국내와 국제 상품 가격 관계의 왜곡은 종국에 국내 소비자 효용을 감소시키고 외환을 유출시키는 비효율적 기업들만 국내 시장에서 활동하도록 만들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보호무역주의 정책들이 중남미 경제 발전 촉진에 중요한 역할도 했다. 실제로 194으로 변동환율제로 작용. 1925-1934년 사이 명목환율이 매년 변함. 이후 7년동안 고정되어 있었음.1950년부터 25년동안 고정환율제 실시. 이 기간은 인플레가 낮아서 실제 환율은 조금씩 계속 상승. 1975년경 페소화 고평가가 심각한 문제가 됨. 정부 지출 증가와 석유가 상승으로 인플레 증가. 고평가로 경상수지는 악화. 외채 증가. 74년에서 76년 사이에 외채가 110억에서 210억으로 두배가 됨. 자본 도피도 한 몫. 자본 도피가 극심해 결국 1976년 25년만에 처음으로 12.5페소에서 19페소로 평가절하.80년대 초에 고평가와 자본 도피가 다시 문제가 됨. 개방이 확대되고 석유 수출 확대, 외채 증가로 외부 쇼크에 대한 취약성이 커짐. 첫째, 국제 이자율 상승. 둘째 1981년 유가 하락. 거시 경제정책 조정보다 외채 증가를 통해 해결 시도. 빚이 520억 달러로 증가.1982년 초 더 이상 지속 불가능 상태 됨.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서 철수. 즉각적으로 70% 평가절하. 8월에 외환이 고갈되자 평가절하가 인플레 유발 피하기 위해 이중환율제 도입. 은행 국영화. 외환 통제 시작. 암시장 성행. 페소화 가치는 계속 곤두박질. 결국 미겔 데라 마드릳 대통령 취임과 IMF 안정화 프로그램으로 안정.고정 환율제 대신 이중 환율제 사용은 국내 통화에 대한 투기로 파생된 평가절하로부터 이자율과 물가를 보호해 줄거라는 믿음 때문. 경제의 생산과 자본시장을 분리하는 것.그러나 이 두 시장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 이자율과 상대가격이 두 시장 연결고리. 균형적으로는 두 가지가 동시에 평가절하 되어야 함. 따라서 이중 환율제의 장점은 단기적으로 파산을 피할 수 있고 급속한 예산적자 증가를 막을 수 있게 함으로써 단기적으로 위기 대처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느냐에 달렸다.멕시코의 경우 첫 번째 효과는 있었다. 민간 기업들이 외채 이자 갚는데 있어 통제된 환율을 적용받을 수 있었다. 국가 재정에 대한 효과는 불투명. 정부는 필수 수입품은 통제된 환율로 수입되게 함으로
국외에서의 베트남공산주의자들의 활동(1930년-35년)I. 머리말프랑스 비밀경찰 보고서의 첫 장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국외에서의 베트남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다. 베트남 혁명가들이 접촉한 사람들은 상당히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활동한 장소도 러시아에서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각국, 그리고 프랑스, 독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이들 자료를 들여보고 있노라면 드는 첫 번째 인상은 분명히 작성자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즉 외부로부터의 이념적, 물질적, 인적 지원없이는 베트남에 공산주의가 들어와서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란 점이다. 아마도 프랑스 식민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이 외부로부터의 루트를 차단하면 베트남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큰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두 번째 드는 생각은 베트남인 동포에 의한 것이든 ‘국제 공산주의자’에 의한 것이건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관점은 선입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베트남공산당이 자신의 이념과 조직을 견고하게 하고 대중을 동원하며 식민당국에 대항하는 활동을 해야 했던 장소는 바로 베트남이며 그 주체는 바로 베트남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문제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국내활동과 국외활동 중에서 어느 것이 베트남혁명에 공헌했느냐는 총론이 아니라 어느 부분에서, 어느 시점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 각자가 역할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각론의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공산주의가 베트남에 도입된 초기에 재외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명확한 이론적 기반과 전략적 전술과 조직적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계속 지원해 줄 수 있는 세계공산주의 운동, 특히 소련과 중국공산당, 그리고 식민 본국에 일정 정도는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프랑스 공산당과도 긴밀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이러한 재외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자산은 위기의 시기에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건설된지 얼마 되지 않아 1945년혁명 이전에 있었던 최대의 노동자 파업와국과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지역을 이른다. 아마도 상해에 본부를 두고 있는 중국공산당의 남부지부로 주로 광동, 광서, 운남, 복건지방의 공산조직과 적군, 노동조합을 관할한 데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함께 남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99%이상이 남부출신 중국인으로 남양에서의 중국인 공산주의자들도 지도하다 보니 말라야, 인도차이나, 네덜란드령 인디스, 사이암, 그리고 필리핀의 공산당원들과도 긴밀한 접촉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남양국이 중국공산당 중앙에 직접 책임을 지는 기구였는지, 중국공산당 중앙의 하부 조직으로서, 남부 중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휘하는 하나의 ‘남양국’과 동아시아국의 하부 조직으로 동남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또 다른 하나의 ‘남양국’이라는 이중의 구조와 명령-지휘 계통을 가졌었는지, 아니면 중국공산당 중앙에서는 독립하여 바로 코민테른의 동아시아국 직속기관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보다 확실한 것은 남양국이 코민테른의 ‘정식’ 상설기구는 아니었으며 국가 단위에서의 공산당의 창설이라는 이 시기의 과제를 담당하기 위해 과도기적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응우옌 아이 꾸옥이 1930년 초 베트남공산당을 통일한 연후에 남양국의 책임자로 홍콩에 정착하여 말레이공산당과 사이암공산당 창당을 주재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홍콩이 동남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는 주무대가 되었다.제3인테내셔널 동남아시아 조직범태평양 노동조합서기국 동아시아국중국공산당(본부: 상해)남양국(홍콩)운남 광동 광서 복건 성위원회 남해공산당3. 동남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독립과 동남아시아 코민테른 네트워크의 붕괴남해공산당은 싱가포르에 본부를 두고 ‘남양’(구체적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암,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령 북 보루네오, 말라야 그리고 미얀마를 포함)에서의 중국인 활동지역과 중국인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남해공산당은 코민테른이 부르조아-민족주의자들과 연합을 포기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강조하던 할권으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싱가포르는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1930년에 응우엔 아이 꾸옥이 탄생에 개입한 인도차이나공산당, 사이암공산당, 그리고 말라야공산당은 모두 코민테른의 싱가포르 지부(남양국)에 소속하여 지도와 명령을 받아야 했다. 인도차이나에 한정하여 보면 응우옌 아이 꾸옥은 인도차이나공산당이 동남아시아에 초점을 두는 남양국보다는 동북아시아에 초점을 두는 동아시아국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두 번째 문제는 조직적으로는 어느 정도 분리되었을지 모르지만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이 ‘토착화’되려면 너무 먼 길을 가야했다는데 에 있었다. 사이암공산당은 다수의 중국인 공산주의자와 소수의 베트남인 공산 조직의 연합이며 말라야공산당은 말라야에 있는 모든 공산조직과 당원으로 흡수 통합했다고는 하지만 절대 다수의 중국인 집단에 약간의 인도인이 들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정이 휠씬 나았다고 볼 수 있는 베트남공산당은 창당 당시 당원의 3분의 1이 중국인이었다. 지역국 공산당으로 편입된 중국인과 베트남인들은 그 지역의 공산운동보다는 자신의 민족 공산운동에 관심을 두었다. 이로 인해 현지인을 충원하는 일은 어려웠고 현지인의 ‘소외’는 피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응우옌 아이 꾸옥은 말레이공산당원에게 말레이어를 배우고 말레이 사람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 공산주의자로 충원하라고 격려했다. 말레이공산당은 바사(Bassa)와 같은 유능한 현지인을 충원하는 등 말레이 사회에 공산주의 선전을 강화했으나 말레이 사회와 말레이인에게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사이암에서도 비슷한 충고가 있었으며 말라야에서와 같이 별반 효과가 없었다. 말레이인들 사이에 민족주의의 발전(Tan Malaka movement, Kaum Muda movement)이 공산당 운동과 연결되기에 어려운 요인들이 많았다. 기존의 말레이공산당이나 중국인의 당에서 완전히 독립된 ‘진정한’ 말레이공산당을 창당하려는 시도가 라만(Rahman Audul Rahman(B 열성을 보였던 이는 홍 선)(Le Van Phan, Vo Tan Anh)이었다. 그를 통해 베트남 밖에서 기능했던 연락체계와 재외 베트남 공산지도자들의 당시 활동과 관심을 조명해 볼 수 있다. 홍 선은 일본에 있는 끄엉 데(Cuong De)의 재정지원으로 1930년 9월 운남에 도착했으나 1931년 1월에 체포되어 그 해 7월까지 구금되어 있었다. 1931년 7월 운남포(Yonnanfou)를 떠나 미얀마를 거쳐 1931년 9월 사이암에 이르렀다.) 1931년 9월에 사이암에 도착한 홍 선은 1932년 3월 20까지 반 동(Ban Dong)에 머물면서 사이암 공산집단을 재조직했다. 60여명에 이르는 재사이암 베트남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통합 조정하고 있었던 응오 찌인 꾸옥(Ngo Chinh Quoc)과 응오 찌인 혹(Ngo Chinh Hoc)을 통하여 재 사이암 공산주의자들을 조직하는데 힘을 쏟았을 것으로 보인다. 홍 선이 마주한 사이암에서의 베트남 공산주의 조직은 거의 붕괴되어 있었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만이 활동적이었다. 따라서 응우옌 아이 꾸옥이 건설해 놓은 베트남 조직을 활성화하는 것이 시급했을 것이다.그리고 1931년 말에서 1932년 초에는 소비에트운동 실패 후 사이암령 라오스로 도피해온 대 여섯 명이 나콘(Lakhone)에 인도차이나공산당 하 띤 성위원회를 재건하고 사이암에 있는 베트남인과 접촉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재사이암 베트남공산주의자들의 예 띤 소비에트가 실패로 끝난 이후 거의 초토화된 베트남 중부의 공산운동을 활성화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홍 선도 1932년 초 이들을 격려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홍 선에게 시급해 보였던 일은 국제 공산운동과 연계를 확보하는 일이었던 듯하다. 아마도 레 홍 퐁을 만났을 수 있었고 그와의 만남이 사이암에서의 일보다는 중국공산당에 접근하는 일이 전체적인 전략에서 더욱 중요했을 지도 모른다. 먼저 홍 선은 사이암공산당의 ‘중국인 사무국’에서 소개장을 받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중국공산당 중앙이 다루도록 했다.) 홍 선이 중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에 받아들여진다면 처음 얻어지는 중요한 결과는 아마도 후자가 말라야와 사이암에 있는 공산조직과 연계를 재확립할 수 있다는 것일 게다. 그리고 쩐 응옥 자인이 중국공산당 중앙과 직접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면 모스크바 유학생의 중국 내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을 것이다. 7월에 내려진 이 결정은 차일피일하다 9월에야 전달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중앙으로 들어가려고 상해에 왔던 홍 선과 쩐 응옥 자인은 9월 25일 체포되었다. 홍 선은 베트남에 압송되어 곧 처형당했다. 쯔엉 프억 닷은 그 후에도 약 6개월이 넘게 광서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와 베트남군인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척하다 1933년 4월에 체포되었다.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혁명가들은 중요한 두 지도자를 잃었을 뿐 아니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쯔엉 프억 닷도 피했다. 부이 하이 티에우와 레 꾸옥 봉은 끄엉 데가 일본학교에 그들을 입학시켜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남경으로 돌아왔다. 한구에서 선전을 주도하고 있었던 쩐 다이 도(Tran Dai Do)도 쯔엉 프억 닷이 약속한 바 있었던 중국공산당 중앙의 격려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응우옌 티 카이는 남경에서 홍콩으로 다시 한구를 전전하고 있었다. 응우옌 반 탐은 홍콩, 상해, 남경를 오가고 있었다. 이는 모두 응우옌 아이 꾸옥이 홍콩정부에 의해 추방당한 후 싱가포르에 머물면서 러시아로 갈 방도를 찾고 있었던 1933년 초의 재중국 베트남혁명가들의 상황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개인적인 역량을 이용하여 재조직에 나섰으며 여전히 남경에서는 부이 하이 티에우, 레 꾸옥 봉(Ly Tri Hoan)이, 한구에서 다이 타인(Dai Thanh)과 쩐 다이 도가, 홍콩에는 응우옌 티 카이, 상해에서는 리 응 투언이 연락망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1933년 말까지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이에는 중국공산당의 상황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왕명이 1931다.)
■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는 강대국?학우 분들은 아니지만, 북한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남한이 반쪽의 땅으로도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는데 북한의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민족성이 결합되면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까?물론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일단 사상이 통일이 되고, 민족의 번영과 발전에 이바지하며, 경제적으로 궁핍한 북한주민을 구제 및 북한의 마이너스 성장 극복, 국제적인 위상의 상승 등 이를 위해 내세우는 통일의 장점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하지만 위와 같은 상황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단순하게 체제적인 통일의 합일점을 이루어 낸다고 해도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은 너무나도 멀고도 험합니다.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통일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현 상황에서의 통일은 흡수통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지요. 앞의 글에서 언급한 독일의 예를 가깝게 적용을 시켜봅시다. 북한주민들의 체제변화에 대한 혼란가중과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악화, 부실한 북한경제를 남한이 전적으로 부담해야하는 상황이 일어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통일의 과정만큼 통일 이후의 해결해야할 상황 역시 쉽지 않음을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아무튼 위에서 말한 장밋빛 미래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의 경제자립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는 것이 더 옳은 정책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해외 강대국의 대표, 미국남북 외교에 있어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은인의 나라, 현재는 반목이 계속되고 있는 미국입니다.미국을 빼놓고 남북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 합니다. 과거 자유주의를 대표해 공산주의와 대립했었고, 6.25 전쟁을 주도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하지만 미국이 대북정책이라고 표명할만한 커대란 틀은 어디에도 잡혀있지 않습니다. 물론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비난한 사건은 유명합니다만 그러한 꾸짖음 이상의 무엇은 없다는 것입니다.인터넷을 찾아보면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은 찬성하니 반대하니 말들이 많습니다만, 미국행정부는 세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역할을 보여주는 것을 우선할 뿐, 단순히 통일의 찬반여부로 단순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어쨌든 이러한 이유가 한국정부와는 다른 대북정책을 낳게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한의 대통령선거에서 어느 성향의 정당이 정권을 잡는 것이냐 대해 미국의 주요 언론사들이 대서특필을 하고, 최근 이루어졌던 6자회담에서도 미국은 대화 우선보다는 북한이 보편타당한 기준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판단하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한반도의 영향력 행사에 따른 미국의 접근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나라로는 북한의 혈맹이라고 불리었던 중국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외 납치문제를 극성스럽게 다루는 일본이나 이제는 예전에 비해 영향력이 많이 축소된 러시아 역시 한반도의 통일과정에 빼놓을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 국가라 하겠습니다.※ 한반도 통일의 과제이제 한반도 통일의 과제에 대한 제 의견을 피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북한은 둘 다 통일을 원하고 있으며 실제 그러한 과정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하지만 해외국가들의 영향에 따라 한반도 통일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나라에 긍정적일수도, 부정적일수도 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견지해야 할 점은 이러한 해외국가들의 영향력을 분석하여 우리나라에 유리하도록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북핵6자 회담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나라만의 자체역량만으로는 통일은 불가능하며 타 국가들의 이해관계에서 통일의 과정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현 시점에서 통일이 되었을 때 남북한이 얻는 이득은 경제적 이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짐이 될 뿐이니까요.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북한의 부실한 경제적 상황을 남한이 모두 받아들인다면 IMF사태로 부실해진 국가가 극복해 내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