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면서형편이 어려운 집안에 아들이 둘 있었다. 그들의 부모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워 어쩔 수 없이 입양을 결정한다. 첫째는 장남이라 보낼 수 없어 둘째를 입양 보냈는데, 둘째가 성공을 해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현재 쇼핑의 중심지, 금융허브라 불리는 ‘홍콩(香港)’의 이야기다. 홍콩은 영국에 입양 보내진 아들인 셈이다.엘리자베스 여왕은 말했다. ‘중국을 먹는 자가 19세기를 지배한다.’ 이 말은 중국이 서양 열강의 먹잇감으로 안성맞춤이었다는 뜻이다. 커다란 영토와 그 영토를 가득 메운 인구는 서양인에게 있어 매력적인 시장으로 보였던 것이다. 영국은 가장 먼저 그 매력적인 열매를 맛보려했다. 결국 영국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그 중 하나가 지리상으로 무역의 최적지인 홍콩의 할양이었다. 홍콩의 할양이란 그 당시 중국에게는 굴욕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 조치는 고맙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에게 있어 홍콩의 할양과 반환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앞으로 전개될 본문에서는 아편전쟁을 중심으로 한 홍콩의 의미 변화와 홍콩의 발전, 홍콩의 반환 이후의 모습도 살펴볼 것이다.Ⅱ. 홍콩의 할양(割讓)1. 아편전쟁의 발발과 남경조약(南京條約)중국시장은 ‘해금(海禁)’이란 단어로 서양인의 무분별한 출입과 교류를 제한하고 있었다. 문물교류는 오직 청조가 허가한 광주에서만 가능했다. 또한 청조에서 인정받은 광동 13행이라는 특허상인들만이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중국은 교류를 통해 부를 쌓기 시작했는데 가장 고객이었던 국가가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 내에서 중국의 수출품인 차(茶)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이 좋은 품질을 자랑하던 면포는 중국인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영국은 막대한 양의 은을 중국에 쏟아 부어야 했다. 게다가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영국의 효자상품인 면포생산이 활발해지지 못하자 영국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국은 중국으로 유입되는 은을 되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식민 청조에서는 은의 입초가 역전되었다.아편이 국가적, 사회적 문제가 되자 청조는 아편 금지령을 내려 문제를 해결하려했으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따라서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아편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임칙서는 약2만 상자의 아편을 몰수해 바다에 던져 태워버렸다. 그러자 영국은 중국의 태도를 문제 삼아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임칙서는 파면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흠차대신 기선(琦善)은 영국의 몰수아편의 배상, 홍콩섬 할양 요구에 동의했다. 이 사실에 격노한 도광제(道光帝)는 기선을 파면시켰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고 무력으로 이길 수 없었던 중국은 광주화약(廣州和約)을 맺게 된다. 그러나 영국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조건의 조약을 위해 중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영국군은 남경가까이로 진격해왔고 남경함락 직전인 1842년 8월에 중국은 영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렴하여 남경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홍콩의 할양, 5개 항구의 개항, 공행제도 폐지, 배상금 지불 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남경조약의 대부분 조항이 불평등한 내용이지만, 특히 홍콩의 영구할양은 중국에게 치욕스러운 내용임에 틀림없다. 할양이란, 자기의 살과 같은 영토를 떼어서 타국에 넘겨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영국은 홍콩을 욕심냈던 것일까?2. 할양 전, 홍콩이 가지는 의미홍콩은 광동성의 동남부 주장강(珠江) 하구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홍콩은 다도해 중앙에 위치하며, 해안선이 발달되어 있었다. 또한 수심이 깊고 태풍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쾌속선이나 군함이 정박하기에도 좋은 천혜의 항구다.홍콩은 소금과 향목업(香木業)이 발달했었다. 홍콩에서 향나무가 수출되는 항구를 향항(香港)이라 불렀는데 나중에는 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홍콩은 향항의 광동식 발음으로 서양에서는 이 발음을 서양식으로 표기하여 홍콩이 된 것이다.본래 홍콩은 중원과는 다른 양자강 이남지역과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때 중원의 상인, 죄해 시대인 15세기에 이르러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의 서양 국가들이 홍콩을 교역의 장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홍콩은 서양과 중국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서양인들은 중국과 교역을 하기 위해서 중국에 대한 경의와 충성을 표해야했다. 중국의 오만한 태도와 제한된 무역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중국 해안가의 섬이나 광동이 무역중심지로 대체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 주변의 섬들을 탐색하던 중 홍콩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홍콩은 교역장소의 확보, 해군력을 위한 해군기지 확보, 거대한 무역중심지로의 가능성, 법과 질서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영국은 이 기회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아편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홍콩을 할양받는데 성공 할 수 있었다. 영국은 남경조약을 거쳐 1843년 5월 26일 홍콩을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했다.하지만 영국인들조차도 홍콩의 눈부신 발전을 예견하지는 못했다. 처음에 영국은 홍콩을 척박한 돌산으로 취급해 홍콩점령을 결정했던 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을 파면하고 헨리 포팅거(Henry Pottinger)를 상무감독으로 파견했다. 파견된 포팅거는 홍콩이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니 보유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홍콩의 발전가능성을 인정한 영국정부는 홍콩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1843년 1월, 영국 정부는 최초로 홍콩을 ‘직할식민지(直轄植民地)’로 결정하고 포팅거를 홍콩총독 겸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그런데 특이한 점은 중국이 홍콩의 할양에 대해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홍콩할양은 남경조약의 내용 중에서 단연 눈에 밟혔을 내용이었지만, 중요한 쟁점으로 인식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광제는 비밀리에 홍콩섬 한 곳을 영국의 창고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의 관점에서 홍콩할양은 천자가 야만인에게 베푸는 호의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 홍콩의 성장영국은 거점으로 자리매김 했다. 1858년 아편무역이 합법화된 이후로 인도, 영국, 중국 삼각무역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또한 홍콩은 서양 곳곳에서 필요로 하는 중국 노동자계층인 ‘쿠리(苦力)’를 해외로 수출하면서 노동력의 무역 중심지 역할도 했다.항만시설과 도로 등의 인프라가 구축되자 홍콩은 국제 중계무역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광주에 공급하기 위한 물자를 실은 선박들은 종종 홍콩항에 머물렀다. 1856년에는 중국 수입품의 4분의 1, 수출품의 3분의 1이 홍콩을 경유했다. 1860년대에는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홍콩은 중계무역항으로 호재를 맞았다.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거나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홍콩의 경기는 호황을 누렸다. 반면, 미국 남북전쟁이 종결된 직후에 영국으로의 면화공급이 활발해지자 홍콩의 중개무역은 감소했다. 이제 홍콩은 중국과는 다른 판도를 달리게 된 것이다. 중국의 정세와 움직임을 같이 한다기 보다는 서양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홍콩의 중계무역이 발달하자 동시에 금융업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1845년부터 1865년까지 홍콩에는 11개의 은행이 설립되었다. 초반에는 환전업무로 이익을 도모하던 은행들도 점차 업무를 다양화했다. 은행업뿐만 아니라 보험업도 발전하면서 20세기에 홍콩은 뉴욕, 런던, 파리와 함께 4대 국제 금융시장으로 발돋움했다.홍콩의 근대 공업은 다소 늦은 편이었다. 1880년대 쿠리무역 쇠퇴와 공업으로 인한 경쟁국들의 성장은 홍콩을 공업국가로 한 발 다가서게 만들었다. 특히 홍콩의 공업은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가진 중국이라는 노다지가 있어 더욱 유리했다. 중계무역항인 홍콩은 선박관련 공업의 발달은 물론 시멘트, 제지, 방직공업 등도 성장했다. 이후 경공업을 비롯해 수많은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홍콩은 이제 중국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국가가 되었다. 홍콩의 각 산업은 국제정세와 큰 연관을 갖게 되었으며, 세계 경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국가 중에 하나가 되었다. 홍콩의 경제 발달을 정하는 단계다.둘째, 1860~1900년대 중계무역항으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단계다. 이 시기 홍콩은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이용하여 상당한 경제적 이윤을 남겼다.셋째, 1900~1950년대 공업이 발달하는 단계다. 중국의 원료와 노동력은 홍콩이 공업국으로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넷째,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의 홍콩은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홍콩은 지금도 금융, 관광, 무역도시로 성장하고 있다.이 시기 홍콩은 중국인에게 열망하는 존재와도 같아졌다.Ⅲ. 홍콩의 반환(返還)1. 1997年 7月 1日중국은 과거 서양과 체결했던 불평등 조약에 의거해 홍콩영토를 할양했던 것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홍콩의 문제를 절대 급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덩 샤오핑(鄧小平)의 등장이후 홍콩문제는 종종 화두에 올랐다. 덩 샤오핑은 ‘일국양제(一國兩制)’의 방향으로 홍콩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는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설립해 홍콩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관리하도록 한다. 홍콩의 현행 사회·경제제도와 법률, 생활방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현행언어·문화가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홍콩의 자유항과 국제 금융도시로서의 지위도 계속 보장될 것이다.’라고 말했다.중국과 영국 양측은 홍콩 반환 문제를 놓고 1982~1984년에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언제나 막다른 골목으로 작용한 내용은 1997년 7월 1일 이후 영국이 홍콩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중국은 절대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고 의견을 표명한 바 있었다. 대신 홍콩의 대부분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영국을 설득하고자 했다. 영국은 중국정부에 1997년 이후에도 홍콩이 번영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중국은 홍콩의 번영이 비단 영국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도 홍콩의 번영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홍콩을 사이에 둔 양국 간의 첨예한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에 중국의 일부 대학생
목 차Ⅰ. 서론Ⅱ. 명·청 시대의 경제와 상업 발달⑴ 명·청 시대의 경제⑵ 상업과 상인Ⅲ. 해금정책과 복건상인⑴ 명·청 시대 해금정책⑵ 복건지역과 복건상인Ⅳ. 결론참고문헌Ⅰ. 서론송 중엽 이후 중국의 경제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농업의 발전과 잉여물자는 자연스레 시장의 형성으로 이어졌고, 상업은 중국의 경제를 논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 되었다. 명·청 시대 중국의 상업 활동은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활발했고, 덕분에 상품경제의 발달을 가져왔다. 대규모 자본을 가진 상인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각자의 지역적 기반을 토대로 활동 영역을 키워나갔다.명의 상인들은 송대 이후로 정비된 교통로를 토대로 원거리 무역을 통해 이윤을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외로 가는 바닷길은 달랐다. 명 정부는 송대처럼 해외 무역을 적극 장려하지 않았다. 명은 해금(海禁)정책을 통해 철저히 외국과의 교역을 통제했다. 다만, 조공무역만을 인정했을 뿐이다. 명의 뒤를 이은 청조의 초기에도 해금정책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 이상 바닷길은 상인의 자유로운 항로가 되지 못했고,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성장해오던 복건(福建)지역 상인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복건상인들은 이윤을 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공무역 형태에서 벗어난 사무역의 형태로 사업 방향을 조정했다.본 고에서는 명·청 시대 경제와 상업발달에 대해 개관하고, 해금정책과 그에 따른 해상무역의 변화를 복건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명·청 시대의 경제와 상업 발달⑴ 명·청 시대의 경제송대에 나타난 인구 증가와 토지의 집중화는 송의 경제적 발전을 가져왔다.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잉여생산물이 증가했고 더불어 시장이 활발해졌다. 시장은 도시를 낳았고, 도시와 도시 간의 물자 수송의 편의를 위해 교통로도 자연스레 발달하게 되었다. 상인들은 발달된 교통로를 통해 도시와 도시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송대의 이와 같은 발달은 명·청 시대의 상업 발달에 초석이 되었다.명천하군국리병서(天下君國利病書)』에는 ‘상인들이 쌀을 싣고 오기 위해 배들을 이어 대었다’)라는 말이 적혀 있을 정도다. 명대의 경제성장과 상업발달은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청대에는 농업과 상품작물 발달로 인한 지역의 변화가 나타난다. 경제적 변화는 상인들이 빈번하게 이용하는 무역로를 바꾸어 놓았다. 명대에는 장강 중류지역이 쌀 생산을 도맡아왔다면, 청대에는 장강 상류지역의 쌀 생산이 장강 하류지역에서 요구되는 쌀을 충당했다. 청대 강남지역이 쌀 생산대신 이윤이 많이 남는 상품작물을 재배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호광지역과 사천(四川)지역의 쌀을 강소(江蘇) 등의 강남지역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명대 무역로가 남북방향으로 활발했던 반면에 청대 무역로는 동서방향으로 빈번해졌다.수공업에서도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청대의 수공업은 명대보다 발달하게 되었다. 건륭(乾隆)시기에는 상인들의 광물 채굴을 권장하여 채광업과 제련업이 발달하게 되었다.명·청 시대의 경제와 상업은 도시 발달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러한 도시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북경(北京)이나 남경(南京)과 같은 대도시가 있다. 둘째, 면직물 생산지인 송강(松江), 견직물 생산지인 항주(抗州)와 같은 수공업으로 유명한 도시들이다. 셋째로 천진(天津)과 같은 특산물의 집산지, 넷째는 대외무역의 중심인 광주(廣州)나 영파(寧波)와 같은 연해지역이다. 청대에는 남경에서 직조기를 통해 생산된 비단과 공단은 전국으로 판매되었으며, 북경은 전국 각지의 특산물이 집중되는 무역지가 되었다.명 중기 이후부터는 지방도시가 발전한다. 하남(河南)의 주선진(朱仙鎭), 호북의 한구진(漢口鎭), 강서(江西)의 경덕진(景德鎭)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 지역은 농업지역에서 점차 상품작물 재배지역으로 변화해나갔다. 명 말에는 이러한 도시들이 약 50여개가 되었고, 청 초기에는 도시나 읍 모두 번화하게 되었다.명·청 시대의 경제발전은 상업발달의 원동력이 되었고,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상방(商?)’이다.상방은 상인 동업조합으로 당대와 송대 사이 시기에 출현하여 ‘행(行)’이라 불렸으며, 명·청 시대에 크게 성행했다. 상방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면, 지방상인 조직인 본방(本?)과 외지상인 조직인 객방(客?)으로 볼 수 있다. 업종별로도 방을 나누곤 했는데 남방의 화물을 운반하는 조직은 남화방(南貨?), 북방화물을 운반하는 조직은 북화방(北貨?), 견직물에 관련된 조직은 주포방(綢布?), 차잎과 관련된 조직은 차엽방(茶葉?) 등으로 불렸다. 상방은 상인들의 숙박시설 겸 교류의 장 역할을 하는 회관(會館)을 설치해 상인들의 편의를 도모하기도 했다. 상방은 각자의 가격에 대한 규율과 양에 대한 수칙을 가지고 있었으며 강제성을 가지고 엄격하게 다루어졌다. 보통 상방은 결성과 해산을 종종 반복했지만, 역사적으로 10대 상방이라 불리는 영향력 있는 조직은 장기간 유지되었다.10대 상방은 산서(山西)의 진상(晉商), 안휘의 휘상(徽商), 섬서(陝西)의 섬상(陝商), 강서의 강우상(江右商), 절강(浙江)의 용유상(龍遊商)과 영파상, 강소의 동정상(洞庭商), 산동(山東)의 임청상(臨淸商), 복건의 민상(?商), 광동(廣東)의 월상(?商)이 그들이다. 이들은 다시 하나의 상방에서 몇 개의 소상방으로 세분화되기도 했다. 상방은 이름에 드러난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했지만, 하나의 상방이 한 고장을 차지하란 법은 없었다. 그 예로 양주(?州) 등의 도시에서 휘상과 진상은 제염사업을 두고 경쟁관계 속에 있었다.명·청 시대의 상방의 형성은 상인세력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보여주는 예다. 상인 계층이 하위계층이 아닌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계층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Ⅲ. 해금정책과 복건상인⑴ 명·청 시대 해금정책명·청 시대 경제 발달은 중국 내의 무역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중국의 대외무역은 얼마나 발전시켰을까? 사실 명·청 시대 대외무역은 해금정책(海禁政策)이란 장막에 가려져 발전하기 어려웠다. 해금은 하해통번지금(下海通番之禁)의 준말로 명·청 시대 연안지역과태로 전환되었다.) 조공 무역만을 정상무역으로 인정하고 이외의 모든 무역은 사무역, 밀무역으로 규정하여 해금으로 다스렸지만, 밀무역업자들은 해금정책에 반항이라도 하듯 사무역을 진행해나갔다. 더 나아가 중국을 떠나 동남아시아로 이주를 하여 밀무역에 관여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자 국가가 인정한 조공무역과 사무역 사이에 대항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미 중국 상품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고 있었으며, 일본 상인과 유럽 상인들은 해금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국 상인들의 욕구에 따라 밀무역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또한 조정의 입장에서 대외무역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달콤한 이익이 그리웠다. 당시 은납화가 일반화된 중국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은으로 거두어들이고 있었는데, 은광을 개발하고 있던 일본이나 무역에 대한 대금을 은으로 지불하는 유럽 상인의 조건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결국 1567년 융경제 때, 복건의 장주항(?州港)에서의 무역을 허가하게 된다. 그리고 1684년 강희제 때에 와서 해금정책은 붕괴되고 말았다.청조 초기에는 해금정책이 실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조가 입관(入關)한 후에 반청세력과의 마찰이 생기면서 해금정책도 시작되었다. 반청세력은 바로 복건지역에 거점을 둔 정성공(鄭成功)세력이었다. 청초 순치제는 정성공 세력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해금령과 천계령을 반포했던 것이다. 순치 12년에 반포된 해금령은 화물을 실은 대형선박이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외국 상인과 무역을 하는 것, 해적과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어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업에 사용하는 소형선박은 해금령에 해당사항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만으로는 정성공 세력을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순치 18년에 연해민을 내지로 이주시켜 정성공 세력과의 접촉을 예방하는 천계령을 실시했다. 이는 정성공 세력을 어느 정도 결박시키는 역할을 했다.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들이 발생했다. 천계령으로 인해 연해민들의 생계가 어려워졌으며, 은 수입이 감소해 구매력이 저하되었다.금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대의 해금은 조공무역을 통한 국가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청대의 해금은 해양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⑵ 복건지역과 복건상인복건지역은 인구는 많고 산지로 이루어져 토지는 좁아 대표적인 식량부족 지역에 속했다. 복건 지역민은 다른 지역에 비해 토지가 부족하여 농사만으로는 형편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좁은 면적에서 높은 이익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상품작물을 재배했다. 복건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 생산품은 사탕수수와 설탕이었다. 또한 복건은 비단으로도 유명했다. 원료는 다른 지역에서 수입하고 가공을 복건에서 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복건은 설탕과 방직업으로 유명했다.복건 각지의 수공업은 지역특산품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다상(茶商), 지상(紙商) 등의 전문상인도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특산품을 통해 용암상인(龍巖商人), 상항상인(上杭商人), 영안상인(永安商人) 등이 출현할 수 있었다.하지만 복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따로 있었다. 복건지역은 해상교통이 편리한 연해지역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해상무역이 발달하였다. 해상무역은 다소 위험하기도 했지만, 이윤이 가장 많이 남는 사업에 속했다.복건 천주(泉州)지역에는 송대부터 시박사가 있어 해상무역에 유리했다. 명대 초반까지도 시박사는 존재했다. 그러나 홍무7년 해금정책의 실시로 사실상 복건지역의 경제는 급격하게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해금정책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사무역은 복건지역 전체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장주(?州), 월항(月港), 혜안(惠安), 동안(同安), 안해(安海), 복주(福州), 천주부(泉州府) 등은 사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진 복건의 도시였다. 그 만큼 복건지역의 경제에서 사무역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복건지역 해상무역의 중심은 일반 상인과 유력자들이었다. 일반 상인들은 비슷한 상인들끼리 모여 공동으로 배를 만들고, 상품을 구매하여 상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이들은 해당 관료들로부터 탄압을 받고, 신사(紳士)층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않았다.
Ⅰ. 들어가며중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택동(毛??)과 그가 벌였던 사회주의 운동은 지금의 중국을 만드는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분열된 중국을 다시 하나로 통일한 중국의 지도자였다. 현대에도 모택동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국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그러나 모택동이 행했던 모든 계획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가 빚어낸 많은 업적들 가운데 문화대혁명은 가장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운동으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은 보통 1966년부터 1969년까지 3년을 가장 전형적인 혁명 기간으로 본다.문화대혁명은 반우파 투쟁의 일환으로 좌파에 반대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조치를 취했던 운동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희생되었다. 물론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이 순수한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반면 문화대혁명 때문에 중국이 비판의식이라는 한쪽 눈을 도려내 사회주의의 좋은 점만 보는 외눈박이가 되었던 건 아니었을까?본고에서는 모택동과 문화대혁명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대혁명 이전 시기와 문화대혁명 시기를 나누어 중요한 사건을 위주로 전개하고자 한다. 문화대혁명 이전 시기는 모택동이 실질적으로 공산당 내 정권을 잡게 된 시기부터 여산회의 시기를 다룰 것이고, 문화대혁명 시기는 혁명의 시작 배경부터 초기 3년 시기까지 서술하고자 한다.Ⅱ. 문화대혁명 이전 시기⑴ 2만 5천리의 대장정1934년 10월, 국민당의 압박에 공산당은 강서성(江西省)의 서금(瑞金)으로부터 서쪽으로 이동해야했다. 공산당과 함께 이동할 홍군(紅軍))의 숫자는 총 8만 6천명이었다. 홍군의 조건은 매우 열악했으나 고군분투하여 다행히 국민당과 군벌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2만 5천리를 길을 걸었고, 모두 11개의 성과 17개의 강, 18개의 산맥, 62개의 마을을 지나고 나서야 대장정을 끝마칠 수 있었다.) 대장정은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당과 공산당의 대결뿐이었다.공산당은 1945년 말부터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을 색출해 청산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협력한 자의 죄 값을 따진 후에 재산몰수는 물론 처형까지 단행했다. 재산몰수 과정에서 민중의 토지에 대한 욕구가 드러났고, 이에 대응해 농민에 대한 토지를 분배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은 공산당을 지지하게 되었고, 국민당과의 대립을 첨예하게 만들었다. 내전의 분위기가 흐르자, 미국에서는 국민당 쪽에 군사적 원조에 나섰다.1946년 6월 26일 장개석은 진격을 결정했고, 7월에 양당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의 시작과 함께 국민정부에서 대량으로 화폐를 발행하여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자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자 국내 경제에는 심각한 인플레현상이 발생했다. 대폭동과 반내전·반기아를 내세운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국민정부는 탄압으로 대응했다. 국민들의 실망감은 이내 국민당에 대한 신뢰추락으로 이어졌다. 내전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나자 공산당 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8년에 들어서자 상황은 공산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국민당의 상황이 어렵게 되자, 1949년 1월 1일 장개석은 총통에서 물러나게 된다. 국민당은 공산당과 교섭하려고 했으나 공산당 측에서는 무조건 항복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한다. 국민당이 이를 거부하자 공산당은 진격했고, 국민당은 쫓기듯이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해 12월에 장개석은 대만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국민당의 대패였으며, 공산당의 대승이었다.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천안문(天安門)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한다. 북평(北平)을 북경(北京)으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오성홍기(五星紅旗)를 국기로 하고, 의용군행진곡을 국가로 결정했다.) 또한 모택통을 주석으로 하는 중앙인민정부위원회를 결성했다. 이튿날, 소련은 중앙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모택동정부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토지를 비롯한 국내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시도했다. 농업에서는 지주제를 고쳐 평등한 토지, 농촌의 빈부격차를 발생시켰다. 덕분에 농업생산력이 빠르게 증가했지만, 중국 내에서는 빈부격차를 우려하기도 했다. 농업의 발달은 수공업의 발달까지 이끌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제1차 5개년계획으로 중국인민의 생활은 이전에 비해 풍요로워졌다. 국내 노동자수가 증가했고, 임금도 향상되었다. 농업중심이었던 경제가 공업과의 비율을 맞추어가고 있었다.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고 생각한 모택동은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이란 구호를 내세워 누구든 자기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음을 말하며 정치적으로 내부 보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몇몇 지식인들의 소극적 의견이 피력됐으나 이 분위기는 점점 확산되어 그 동안 당에 억눌려 표현하지 못했던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불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론 등을 통해 당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당은 노선을 바꿔 불만을 가진 이들에 대한 반격을 가했다. ‘우파(右派)’라는 이름을 붙여 많은 이들을 하옥시켰다. 간혹 죄가 없는 사람들이 섞여 박해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우파청산의 다른 편에선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⑷ 대약진(大躍進)운동과 인민공사(人民公社)모택동은 레닌의 공산이론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다. 따라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본가나 지주 계급에 대해 적극적으로 탄압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회주의 국가의 모습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의 결과는 경제적으로 고립된 공산주의 국가의 경제적 낙후라는 오명을 가져왔다. 모택동은 농업과 공업, 과학과 문화 모든 것을 발전된 사회주의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또한 경제적인 부흥은 우파적 성향을 잠재우는데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제도 있었다. 대약진운동은 기술개혁운동과 대규모 건설사업 등을 통한 경제적 발전을 하자는 것이었다.먼저 공업 분야에서는 철강 산업의 발전을 목표로 시행되었다. 기존의 생산량을 두 배 가까이 증가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중공업을 중시하는 경향아지기수였다. 결과적으로 대약진운동은 경제발전의 기본원칙을 무시한 비정상적인 운동)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온 것이다.⑸ 팽덕회(彭德懷)와 여산회의대약진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무렵, 모택동은 국방부장 팽덕회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 내용은 대약진운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로 긍정적 평가도 있었으나 비판과 지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택동은 이 편지를 여산에서 열린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 안건으로 올린다. 이 개인적인 편지로 인해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수정하려는 목적에서 개최된 여산회의는 우파 기회주의자를 비판하는 성격으로 탈바꿈되었다. 결과적으로 여산회의에서 팽덕회와 그를 따르는 집단은 우파로 비판을 받았으며, 팽덕회는 국방부장 직에서 해임된다. 이 일로 모택동에 대한 어떠한 비판이라도 하는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우파로 간주해버리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언론에도 영향을 미쳐 누구도 모택동을 비난하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여산회의의 여파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는 국가는 발전할 수가 없었고, 결국 모택동의 오류는 아무런 재제도 받지 않고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진다.Ⅲ. 문화대혁명 시기⑴ 문화대혁명의 도화선1961년 ‘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연극이 공연되었다. 해서파관의 작가는 오함(吳?)으로 북경시부시장 직을 맡고 있었다. 해서는 황제에게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해서파관은 명나라 때 청렴하기로 유명한 관리 해서를 배우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는 모택동이 오함에게 요청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해서파관의 내용이 요문원(姚文元)과 장춘교(長春橋), 강청(江靑)에 의해 수정된 후에 1965년 11월 요문원의 이름으로 ‘문회보(文匯報)’에 실리면서 문제가 되었다. 요문원은 오함의 해서파관이 단순히 청렴관리 해서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가정제(嘉靖帝)를 모택동으로, 해서를 팽덕회로 빗대어 쓴 내용이라고 했다. 동시에 모택동이 여산회의를 통해 팽덕회를 해임시킨 것을 비판했다. 해서파관의 내용은 삽시간에 중국으로 퍼져나제로 해결하려고 해야지 이를 정치투쟁으로 확대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모택동을 지지하는 세력에서 팽진은 좌파를 비난하여 혁명을 막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모택동은 문예공작에 대한 좌담회 기록을 작성했다. 내용은 그 동안 방관했던 문예계에서도 반사회주의적인 요소에 대한 투쟁을 해야 한다고 적었다. 동시에 오인소조를 해체시켰다.이러한 상황에서 모택동은 사회 분위기를 완벽한 사회주의의 성격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래서 전개된 것이 문화대혁명이었다.⑵ 문화대혁명의 전개문화대혁명은 1966년을 시작으로 본다. 5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통지를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문화대혁명이 전개된다. 통지문에는 팽진을 비롯한 오인소조를 해체하고, 새로이 조직된 구성원들로 하여금 문혁소조라 칭하고, 문화대혁명의 지휘본부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5월 16일에는 학술, 교육, 신문, 문화, 출판계의 부르조아 반동사상을 청저하게 비판하면서 문화영역 내에 존재하고 있는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시키겠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것이 5·16통지다. 또한 모택동은 당내와 정부, 군대, 문화부문에 있는 부르조아지적 성향을 가진 일원을 색출하여 비판하고, 깨끗하게 씻어내겠다는 다짐을 내보였다. 특히 지식인층은 무산계급이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여 지식인을 부정적 대상화했다. 이는 특히 지식인층에 자본주의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를 동요시키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식인의 제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월 25일 북경대 철학과의 섭원재(?元梓)등 7인이 학장과 대학의 당위원회 등을 반사회주의자로 공격한 대자보를 붙였고, 6월 1일에 모택동이 이와 같은 행동을 지지하는 발표를 했다. 6월 6일에는 인민일보에 무산계급의 신사상,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을 만들자는 내용이 실렸다. 문화대혁명은 국민의 캠페인과 같은 형식으로 뒤바뀌어 학생들로부터 교수와 교직원들이 공격당하는 .
Ⅰ. 서론고대 이집트인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다신교로 대표되는 신앙일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자연현상에 대해 제각기 신을 만들어냈고, 자연현상과 동식물을 모두 숭배했다. 특히 농업이나 천체, 하늘 또는 동물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고, 새나 동물 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신은 삶과 죽음, 부활, 사후세계에 있어 이집트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존재였다. 그들의 신앙은 이집트 신화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집트 신화는 이집트인들의 생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집트의 신화는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아닌 이집트인들의 정신관이 깃들어있는 이집트 문화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집트 문화의 기반인 이집트 신화는 단순히 문화를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 신화에는 이집트 신화에 출현하는 신들이 다른 신으로 등장한다. 이름은 다르지만 신이 가진 성격이나 신을 나타내는 상징물은 두 문화 사이의 관련성을 암시하고 있다.본 고에서는 이집트 문화와 역사의 주축이 되었던 이집트 신화를 살펴보고, 그리스 신화와의 연관성을 찾아보고자 한다.Ⅱ. 이집트 문화와 신화1. 고대 이집트 문화나일강 유역에서 시작된 이집트는 고도의 발달된 문화를 가진 고대국가였다. 이집트 문명은 오늘날에도 그 발달 정도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인정을 받고 있는 문명이다.이집트는 홍해와 지중해, 사막으로 둘러싸여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는데 이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이집트를 막아주는 방어막 역할을 했다. 덕분에 이집트의 독자적인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사회적으로는 엄격한 신분제를 가진 계층적 사회였다. 이집트에서는 왕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으며 그 아래에 소수의 귀족, 성직자, 상류층, 평민과 노예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라오’는 이집트의 왕을 칭하는 단어로 파라오는 신의 대리인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라오의 사후에는 그가 신이 된다고 믿어졌다. 생전에는 ‘호루스(Horus)’로, 사후에는이라는 내세관을 반영한 것이다.왕을 신으로 여기고, 자연과 농업에 관해서도 신과 결부지었으며 죽음에 관해서도 신과 연관지었다. 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 속에 신화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집트의 신화는 어떤 내용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2. 고대 이집트 신화⑴ 창조신화① 헬리오폴리스의 창조신화태양신을 숭배하던 도시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는 주로 고왕국의 제3~5왕조 시대에 태양신을 숭배했다. 사실 헬리오폴리스의 종교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제5왕조 파라오인 ’우나스(Unas)')의 피라미드 내부 벽에 새겨진 문서에 근거하여 추정한 것이다.)헬리오폴리스에서는 천지와 신들의 창조가 ‘완전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아툼(Atum)’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아툼은 입에서 남성을 가진 공기의 신 ‘슈(Shou)'와 여성을 가진 습기의 신 ‘테프누트(Tefnut)’를 뱉어냈다.) 둘 사이에서 대지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여신 ‘누트(Nout)'가 태어난다. 둘은 쌍둥이 남매로 태어났지만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데 ‘슈’가 그 둘을 떼어놓게 되면서 하늘과 땅이 분리된다. ‘게브’는 땅에 눕혀지고, ‘누트’의 배는 ‘슈’에 의해 받쳐져 공중에 떠있으며 하늘의 지붕을 이룬다. 이 때문에 하늘의 신 ‘누트’는 발가락 끝으로 발돋움을 하고, 손가락 끝을 대지에 대로 있는 엎드린 자세를 취하게 됐다. ‘게브’와 ‘누트’사이에서는 ‘오시리스’, ‘이시스(Isis)', '네프티스(Nepthys)', ‘세트(Seth)' 네 형제가 태어나게 된다.Atum(완전한 자)↓Shou(男, 공기의 신) ─ Tefnut(女, 습기의 신)↓Geb(男, 대지의 신) ─ Nout(女, 하늘의 신)↓Osiris(男, 사자의 신) ─ Isis(女, 양육의 신), Seth(男, 악의 신) ─ Nepthys(女)[표1, 헬리오폴리스의 구신계]② 헤르모폴리스의 창조신화'헤르모폴리스(Hermopolis)'는 치료, 지혜,을 흐르게 하거나 태양이 뜨게 하는 등의 일을 했다.)이 밖에도 헤르모폴리스에는 네가지 창조신화가 더 존재한다.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는 설과 지혜의 신 토트가 알을 낳았다는 설, 물 위의 연꽃에서 태양신 라가 태어났다는 설, 연꽃에서 나온 풍뎅이가 소년으로 변했는데 그 소년이 흘린 눈물이 인류의 시초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상징남신 이름여신 이름혼돈, 물NounNaunet무한, 창공HehHauhet암흑, 어둠Kekkauket불가시성AmunAmaunet[표2, 헤르모폴리스의 여덟 신]③ 멤피스의 창조신화'멤피스(Memphis)'는 초기 왕조와 고왕국 시대의 정치·종교적 중심지였다. 멤피스의 창조신화는 이미 정착된 헬리오폴리스의 신화에 대응한 신도시 멤피스의 우월성을 위한 신화였다. 따라서 멤피스 신화는 헬리오폴리스의 구신계와 헤르모폴리스의 팔신계를 합쳐놓은 듯하다. 멤피스 신화는 제25왕조 ‘샤바카(Shabaka)왕’이 발견한 파피루스 문서에 기록된 내용에 근거한다.)멤피스의 고위신이자 지배자인 ‘프타(Ptah)'는 만물의 창조자로 여겨진다. 프타는 건립자라는 의미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태어난 신이 아닌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했던 신이다. 그의 아내는 파과외 재생의 신 ‘세크메트(Sakhmet)'이다. 멤피스 신화에서 프타는 그의 혀로 눈과 아툼, 나우네트를 만들었으며, 아툼이 다시 슈와 테프누트를 창조했고, 다시 이들 사이에서 ‘게브’와 ‘누트’가 나왔다.⑵ 왕권신화대지의 신 게브와 하늘의 신 누트 사이에 태어난 네 명의 형제들은 다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오시리스는 이시스와의 사이에서 호루스를 낳고, 세트와 네프티스도 부부가 된다. 그러나 이시스를 사랑한 세트는 오시리스를 질투하여 그를 제거하고 권좌에 오르려했다. 세트는 오시리스를 죽여 14조각으로 나누어 이집트 전역에 흩어지게 했다. 이시스는 네프티스와 호루스의 도움을 받아 오시리스의 시신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오시리스는 영생의 존재로 부활하고 지하세계의 통치자가 된다. 아들 호루스는 삼촌인 세트와의 결투위해 필요한 일정한 의식과 주문을 외워야했다. 그러한 의식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자의 서’이다. 사자의 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사후의 삶을 완전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한 200여개의 주문’)이라고 한다.사자의 서 125장은 ‘영혼의 재판’이라 불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죽은 자는 오시리스와 여러 신들에게 죄를 심판받는다. 이 심판은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매달아 놓고 깃털과 비교하는 형식으로 행해진다. 만약 깃털보다 심장의 무게가 무거울 경우에는 ‘아무트’라 불리는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이러한 절차는 죽은 자의 신인 ‘아누비스(Anubis)'가 주관했고, 이 심판 내용에 대해서는 서기관인 토트가 기록했다.한 때 이러한 의식은 파라오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왕족과 중산층, 일반인들에게까지 보편화되었다.⑷ 우주관의 신화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을 통해 그 나름의 독자적인 우주관을 정립했다. 이 우주관 역시 신화와 연관되어 있다.특히 이집트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태양신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태양이 뜨는 모습이나 지는 모습을 태양신의 여러 가지 모습에 비유해낸 것이다.태양신 라는 인간의 세계를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 12시간 동안 배를 타고 아포피스의 공격을 피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데, 이 때문에 낮과 밤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포피스(Apophis)'는 하늘에 사는 커다란 구렁이인데 이 구렁이가 태양신이 탄 배를 뒤집어 놓게 되면 일식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별은 시간을 측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별은 영생으로 가는 죽은 자의 상징이었으며, 이는 축복을 의미하기도 했다.이집트인들은 세계가 거대한 대양으로 덮여 있으며, 정 중앙에 나일강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나일강이 범람했다가 다시 줄어드는 현상을 대지가 새롭게 부활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로 연관지어 생각했다.Ⅲ. 이집트 신화와 그리스 신화와의 관련성1. 이집트 신과 그리스 노스와 결혼하여 12명의 ‘티탄(Titan)’과 외눈박이 ‘퀴클롭스(Kyklops)’3형제와 거인 ‘헤라콘케이르(Hekatoncheir)’를 낳았다. 이후 가이아는 남편인 우라노스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우라노스는 가이아가 낳은 흉측한 자식들이 싫어 그들을 빛이 닿지 않는 가이아 몸 속 깊은 곳에 가두었다. 이에 가이아는 자신의 자식인 ‘크로노스(Kronos)’와 함께 우라노스에 맞서기로 했다. 가이아는 거대한 낫을 크로노스에게 주었고, 크로노스는 이 낫으로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라 바다로 던졌다. 가이아는 다시 권력을 되찾았고 우라노스를 쫓아냈다. 최초의 부부인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만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하늘과 땅은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그리스 신화의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이집트 신화에서의 게브와 누트를 연상시킨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자의에 의해서 이별을 택한 것이지만, 게브와 누트는 타의에 의해 헤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크로노스는 마지막 아들인 ‘제우스(Zeus)’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제우스는 가장 강력한 존재로 등극하였고, 그와 동시에 올림포스의 12신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시대가 시작된다.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는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로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신화의 ‘아문(Amun)'과 동일시한다. 이집트 신화의 아문 역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Hera)'는 결혼과 출산, 가사의 여신이다.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로 올림포스의 왕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이기도 하여 올림포스의 여신 중 최고의 여신으로 여겨진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신화에서 오시리스의 아내로 등장했던 이시스가 헤라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남편 오시리스 죽자 남편의 유해를 찾아다니며 남편을 부활시킨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과 그 상황에서도 호루스를 키워낸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지닌 여신이다. 이 때문에 이시스는 고대 이집트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에서도 숭배되었다.또한 농업의 여신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