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안락사의 일반적 논의안락사는 ‘조용하고 안락한 죽음을 야기시키는 행위’라고 옥스퍼드는 정의하고 있다. 웹스터 새국제 사전은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사람을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고 죽여주는 행위나 관행’이라고 정의한다. 의학적으로 안락사는 ‘환자에 대한 동정심에서 유발되어 불치의 병이 악화되고 있는 환자를 빠르고 편안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행위’로서 의사 조력 자살과는 다르다. 의사조력 자살은 ‘환자가 자신이 죽음에 이르도록 과다 사용할 수 있는 약물을 의사가 처방하거나 조언하는 행위’이다. 자살은 임박한 죽음을 가속화 시키는 것이기 보다는 갑자기 생명을 중단하는 행위이고, 자살의 경우 자살하는 자만이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유일하고 독특한 원인이다. 이에 반해서 안락사는 환자의 생명을 종식시키는 행위에 의사가 직접, 간접적으로 혹은 적극적, 소극적으로 관여한다.우리나라의 경우 2001년 4월 대한의사협회는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환자나 가족들이 치료중지를 요청할 경우, 의사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의사운리지침을 제정키로 결정하고 최종안 마련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2년 5월, 사망에 임박한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지침을 발표해서 논란이 있었다.위의 지침에 대해 심정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다. 고통스런 삶을 마감하길 원하는 회복불능 상태의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계속하는 것이 오히려 비인간적으로 비쳐진다. 어는 누구도 갖가지 인공적인 기구에 의지한 채 식물적인 차원의 삶으로 연명하고 있는 자신의 미지막 모습을 상상하길 원치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으며, 생과 사에 대한 결정권은 환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그보다 더 기본적인 권리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의사에게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며, 환자가 원하지 않을 때에는 치료를 하지 말아야 할 의무도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안락사에 대해 반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자연사 시점을 넘긴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것 또한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닌가?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모든 종류의 안락사를 허용할 수 없으며, 시술자에 초점을 맞춘다면 허용 한계선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소녀 가장에게 수술비를 마련해주기 위해 누군가를 죽인 경우에도 현행법상 살인되가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비록 환자를 고통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또는 회복이 가능하지 않은 말기 환자를 대상으로 안락사를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안락사 그 자체가 살인행위라면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를 흉기로 살해한 강도에게 살인죄를 물어야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안락사를 적극적인 안락사(active euthanasia)와 소극적인 안락사(passive euthanasia)로 분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이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살인을 의미하는 적극적인 안락사를 금지해야 한다는 데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또한 환자에게는 품위있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의사에게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의무 및 환자가 원하지 않는 치료를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살인에 해당하지 않는 소극적인 안락사를 금지해야 하는 이류를 찾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그러나 살인의 경우가 아닌 소극적인 안락사를 금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안락사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살인에 해당하는 적극적인 안락사와 살인의 경우가 아닌 소극적인 안락사를 판별해줄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 한, 일선 의사의 입장에서 위의 두 안락사를 판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의회 윤리지침은 약물주입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경우는 금지하고 있으나, 치료를 중지하는 경우는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안락사와 소극적 차이에 두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유발시키는 적극적인 행위를 하는 경우를 허용될 수 없는 안락사로(살인에 해당되는 적극적인 안락사로), 그리고 위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경우를 허용될 수 있는 안락사로(살인에 해당되지 않는 안락사로)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그럼 이제 안락사가 사회 문제화 되기 시작한 것부터 논의해 보자.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던 퀸란(C.Quinran)양은 갑자기 원인 불명의 혼수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인공 호흡 장치, 항생 물질 투여, 고단위 영양 주입 등으로 식물인간 상태로 생리적 생명만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의 회복 가능성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그 비참한 상태에서 비인간적 삶을 사는 것보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잃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더 낫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부모는 주치의에게 그녀가 편안히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인공 호홉 장치를 제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요청은 거부 되었다. 퀸란 양의 뇌는 인간 고유의 사고 기능은 하지 못하나 생명적 기능 즉 각종 순환 기관 조종 기능은 하므로, 그녀의 주치의에 따르면 그녀는 의학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생명체를 건강하게 보존시키는 것이 의사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그녀로부터 인공 호흡기를 떼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후 퀸란의 아버지는 뉴저지 주 법원에 제소했으나 여전히 불가 판결을 받자, 연방 대법원에 상소하여 각종 생명 유지 장치 제거의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이 두 개의 상반된 판결들은 그 후 심각한 윤리, 도덕적 논쟁들을 불러 일으켰다.2. 안락사의 긍정적 견해삶을 포기한 중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의사에 따르면 안락사의 찬성 또는 반대라는 극단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약물이나 어떤 처치에 의해서, 의료기기의 사용으로 생명을 상당히 연장시킬 수 있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이럴 경우에 의사가 가장 직면한 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나아가 실행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는 고통을 감소시켜 주는 것과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것 사이의 갈등으로 생긴다.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은 안락사의 오용 가능성과 안락사의 생명 존엄성 훼손 가능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안락사를 시인하는 것이 치료를 본업으로 하는 의사의 의무와도 모순되고,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은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이 병에 대한 오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고 그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동안에 새로운 치료법을 발명할 가능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안락사를 찬성하는 입장에서 볼때, 의사들이 삶을 포기한 환자의 뜻을 존중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안락사를 찬성할만한 요소로는 고통, 심적 괴로움, 불치의 병, 치욕적 삶 등이 있다.만약 어떤 환자가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그의 죽음은 어차피 불가피한데 나중에 죽는 것보다 지금 죽는게 낫지 않을까? 예컨대 가족들이 환자의 소생을 희망할 수 없고, 또 그에게 도움이 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들 자신도 환자가 받는 만큼의 고통과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또한 의료비가 하늘로 치솟을 만큼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에 그 환자의 가정이나 재산이 파괴될 것이다.치료 거부 의미의 안락사를 허용하는 경우에, 환자의 생명 구제에 그 한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환자의 생명을 몇 주간 연장시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 더나아가 치료 수단들이 너무 많은 비용들을 쓰게 하거나 그것들이 화학 요법에서 가끔 일어나는 부작용을 일으킬 경우에, 그런 의미의 안락사는 인정 될 수 있다. 특히 성인의 안락사는 그 당사자 자유 의사에 따라 정당화 된다고 전제할 수 있다. 임종에 가까이 이른 사람은 사회적 도의와 책임을 수반한다지만 고통스럽게 오래 끄는 죽음과 덜 고통스럽게 빨리 죽는 죽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들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데는 별 차이가 없다 도의와 책이을 이행할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안락사 논의에서는 그런 것에 관해 논의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심한 고통과 쇠약으로 더 이상 사회적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만큼 뇌까지 전이된 암 환자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락사는 자기의 신체는 자기 스스로 처분할 수 있다는 권라의 소관사로 여겨진다. 그래서 안락사의 선택은 합리적인 선택, 즉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의 선택과 삶의 가치의 합리적인 긍정으로 옹호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선택에 있어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상태의 악화로 합리적 삶이 불가능할 때 더 이상 살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자 아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성인의 안락사는 결정의 합리성과 자신의 삶을 결정할 자율성이 보장될 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3. 안락사의 부정적 견해종교계에서는 신이 창조주이므로 신만이 생명과 죽음에 관해 지배권을 가지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에 대해 어느 정도의 권리는 갖지만 어떠한 이유에서도 그의 의사가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데까지는 참여할 수 없다. 어떤 인간이 의사에 의해 타인을 죽이는 것을 금하는 도덕, 윤리적 규범이 항상 있어 왔듯이, 한 개인의 의사에 의해 자기를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금해야 한다.사회적으로 쉽게 안락사를 인정하면 즉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쉽게 허용하면, 안락사를 남용할 위험성이 많다. 만약 소생할 희망이 없는 어떤 환자를 구원해 주기 위해 그를 죽인다면, 이는 뒤로 어떤 사람이 귀찮고 쓸모없는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허용하는 선례로 사용될 수 있다. 적극적 안락사를 반대하는 근거를 생명의 존엄성과 무고한 자의 살인 금지라는 전통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환자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뤄지는 적극적인 안락사는 살인이므로,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환자 외의 다른 사람들에 의한 적극적인 안락사가 허용된다면,이 역할의 담당자는 담당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이다.
1. 쉴러의 시에서 사내가 베일을 벗기고 본것은 무엇인가?이 베일을 들어올리는 자는 진리를 보게 될 것이다?“그것 뒤에 무엇이 있든 간에! 나는 그것을 들어 올릴 것이다.”(그는 그것으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나는 진리를 졸 것이다.” 볼 것이다!긴 메아리가 비웃듯 그 뒤를 따라 울려 퍼집니다.( Friedrich von Schiller,「베일에 가려진 사이스상」中)누구나 그러하듯이 호기심은 행동의 구체적 실행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사내 역시 자신의 무한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내는 진리를 보기 위해 베일을 들어 올린다고 하지만 그 베일은 결코 함부로 들어 올려선 안되는 것 이었다. 안된다기 보단 들어 올려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베일을 벗기고 만다. 그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일까?그는 자신의 죽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토록 많은 갈등과 번민 속에서 베일을 벗기기로 감행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죽음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존재인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진리는 無 그 자체 였던 것이다."나는 존재했던 것과 존재하는 것, 그리고 존재할 것의 모든 것이다. 어떤 죽는 자도 일찍이 나의 베일 아래에 숨겨진 것을 경험한 적이 없다."진리란 추구 할수록 끝없는 나락에 빠지게 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파우스트적 인간과도 상충하는 개념이다.「신학, 철학, 법학, 의학 등 모든 학문을 탐구해도 마음에 충족을 느끼지 못해 한탄하던 파우스트는 절망한 나머지 독배를 든다. 그러나 부활절 종소리에 다시 삶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된다. 그 때 파우스트는 자기를 찾아 온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에게 자신의 모든 지적, 물적 욕망을 채워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미 메피스토텔레스는 신으로부터 파우스트를 이러한 방법으로 유혹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였다.」사내에겐 진리를 한 겹 차이로 가리고 있는 베일이 메피스토텔레스와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이 베일은 투명하게 진리를 비춰 보일 듯 말듯 가리면서 사내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 시키는 것이다. 파우스트에게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릴 만큼 지식의 갈구는 중요한 것 이었다. 사내 역시이 베일을 걷어 올리고 결국 그 무한한 지적 호기심은 죽음으로서 보상 받는다.2. 사내는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진리에 의한 희열을 느끼지 않고 왜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했는가?그가 바로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고 겪었는지 그의 혀는 결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여원히 그의 삶의 즐거움은 사라졌고 깊은 탄식이 그를 일찍 묘지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고통이 있을지어다.”이것은 그에게 줄기차게 질문을 던지며 매달리는 자들에 대한 경고에 찬 그의 말이었습니다.“고통이 있을지어다, 죄를 짓고서 진리에게로 다가서는 자에게.진리는 그에게 결코 기쁘지 않을 것이다.“( Friedrich von Schiller,「베일에 가려진 사이스상」中)그는 왜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진리를 보았음에도 희열을 느끼지 못하고 죽어 갔을까?이는 오늘날에도 세인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일으키며 여러 가지 해석을 낳게 한다.사내는 베일을 벗기면 진리가 쉽게 눈앞에 드러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 보이는건 싸늘한 시체로 변한 자기 자신의 모습.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왕성한 생명력으로 가득 찬 그에게 그 모습은 충격 이상이었다. 그 모든 노력이 헛되이 되었고 인간 본연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리란 도저히 알 수 없음을 깨닫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오만한 히브리스의 죄를 지어 네메시스의 처벌을 받은 것 이다. 결국 진리는 인간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미지의 영역이었다.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은 아버지 헬리오스에게 태양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게 되고 스틱스 여신에게 맹세코 소원을 다 들어 주겠다고 한 헬리오스는 결국 승낙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에톤의 무지와 오만방자함이 제우스의 분노를 사게 되고 결국 제우스의 벼락에 맞아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