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그룹 리더의 한국 비하 발언’ 에 대한 대립과 갈등의 사회 담론- ‘애국적 광기의 비극’ - (진중권)최근의 인기 그룹 리더의 이른바 ‘재범 사태’로 불리는 사건이 이슈화 되면서 사회 담론을 생성 하고 있다. 20초 초반의 미국 교포의 연습생 시절에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인터넷 한국 비하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다. 혹자는 ‘제2의 유승준이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나’라며 철저히 이 문제에 대해서 당사자의 책임을 요구하는 단계로 까지 가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 죄송하다는 사과와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서의 하차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로 일단락 지는 듯 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동적 비판과 함께 팬클럽을 중심으로 너무 가혹한 처사 이며 다시 한국에서 활동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다음 아고라의 청원을 중심으로 한 운동?과 함께 ‘재범 사태’를 대중문화의 대립과 갈등으로서 담론화 시키고 있으며, 한층 더 격화된 갈등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비단 한국 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 교민 사회 에서도 충격을 금치 못한 문제로 이슈화 되고 있다.연예인 하면 우리는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도 엄연한 사람이다. 개인 사생활은 철저히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팬들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팬들은 더 많은 지지와 사랑을 보낸다. 연예인인 공인으로서의 발언과 평범한 일상생활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마땅히 구분 되어 져야 한다. 후자의 색이 더 짙은 문제를 가지고 전자의 문제로 확대 해석한 경향이 있지 않나 쉽다.미국 문화에 익숙한 연습생이 한국문화에 대한 적응은 쉽지 않았을 듯하다. 문화는 상대주의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기본 상식이 돼버린 지 오래이다. 자문화 중심이 아니라 상대 문화 에 대한 이해와 배려 가 조금 부족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 이 없지 않다. 지금 한국은 다문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비단 재범 사태의 문제뿐만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와 새터민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접근하고 있다. 이번사건은 그러한 문제도 아니지만 마치 속지주의를 고수 하여 문제를 해결한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인기 그룹의 가수의 인터넷 게시판에 적어 놓은 소위 친구와 하는 ‘속말’ 격의 글이 무슨 권위가 있어서 큰 문제인 듯 쟁점화 시키는 언론의 책임을 오히려 더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PD 수첩에서 조사한 문제의 발언은 분명 ‘속말’이 분명 하였다. 전문가의 분석의 의하면 ‘어린아이같이 재미 삼아 이야기 하고 있다.’ ‘주로 흑인들이 쓰는 속어 가 많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한국의 비하 발언이라기보다는 미국과 다른 문화적 배경 인 한국문화에 대한 적응의 어려움과 미국 과 다른 한국의 다른 점을 보면서 개인적 취향과 견해로 이런 점이 싫다 하는 것을 너무나 크게 한국 비하 발언으로 몰고 간 격이 없지 않다. 소속생 신분의 시절에 ‘속말’격의 말을 한참 인기를 얻고 촉망 받는 연예인을 한순간에 매국노로 전락 시키며 한국사회에서 쫓아내 보내는 언론을 보면서 우리사회의 문제를 엿볼수 있었다.
민족주의 폐기해야할 대상 - 민족주의는 사기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국민 교육헌장 중에서)이렇듯 우리에게 민족이란 개념은 친근하지만, 너무도 정의내리기 어렵고, 소싯적에 주입식으로 교육받아온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만보산 사건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민족, 민족주의의 개념부터 살펴보고 나가야 할듯하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에 따르면 민족이란 공통적으로 생각하거나 경험한 것을 토대로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민족주의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념에 의해서 생성된 근대적 산물이란 것이다.잘못 생성된 민족주의는 한때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고 가기도 했다. 그 예가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 의 군국주의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그리고 일본천황 등은 자기 나라를 강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배층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민족주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전 시기의 프랑스의 민족주의의 반동화 와 맞물려 유럽에서의 민족주의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우리나라에서의 민족주의라 함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해방과 독립을 의미하는 저항적 민족주의 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민족의 해방은 타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격렬한 투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주목해야 될 것은 다른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의 시작은 지배계급에서부터 나온 국가 이익을 위한 보수적 민족주의 이었는데,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지배계급이 아닌 진보적 성향에서 나온 민족해방을 위한 민족주의 란 점이다. 보수적 성향의 지배 계급들은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는 친일파들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민족주의의 이미지로 인해서 민족주의란 애국, 진보, 해방 등으로 상징 되며,긍정적의미로 해석되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식민지 시대가 아니다. 해방 후 보수 계급의 성향의 친일세력들은 친미세력으로 그대로 남아 있게 되고, 이들이 행한 남한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공하게 되면서, 뒤늦게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서 식민지 시대 때에 요구되던 민족주의는 더 이상 요구 되지 않는다.일제 식민지시대 에는 빼앗긴 조국을 통해 우리의 뿌리와 역사를 찾아가면서 민족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나오게 되는 책들이 ‘한단고기’와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등을 들 수 있다.만보산 사건은 일제의 침략을 위한 교묘한 계략이었다. 순진한 민족애를 이용하여 민족주의의 피해자 겸 가해자로 전락 시켜 버렸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민족주의가 지배 권력에 의해서 이용될 수 있으며, 오도된 민족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민족주의는 정체성을 찾고 단합하여 힘을 한곳으로 모아 어려움을 헤쳐나 갈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배 권력의 의해서 정치적으로 그밖에 목적으로 이용된다면 앞서 말한바와 같이 오도된 민족주의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고, 민족주의라는 무기로 또 하나의 제2의 더 큰 만보산 사건을 일으킬 뿐이다.제주도 4.3 사건을 보면서 ‘친미 반공’으로 차려입은 민족주의를 볼 수 있었다. 이 또한 기득권 세력들(친일파)의 정치적 목적을 띠고 나왔으며 최근까지도 반공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 내에서 부당하게 정권을 잡은 세력에게 입지를 강하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민족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현재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는 것은 다분히 폐쇄적인 시각이다. 우리나라에서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국제결혼 가정의 증가 이에 따른 혼혈아의 문제를 민족주의 의 입장에서는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배척하려는 구시대적 사고를 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몇 해 전 일어난 조승희 총기 난사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교포이지 한국국민이 아니다. 법적으로도 미국시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려고 했고, 촛불과 종이컵을 보냈다. 인도주의 차원에서라기보다는 한국 사람들에게 깔려있는 민족주의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되어진다. 아이러니 할 일은 미 언론에서는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당신들이 왜 사과 하나며 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성공한 스포츠스타인 하인스 워드가 과연 한국 사회 속에서 혼혈인으로 자라났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 하였을까? 저임금으로 한국경제를 위해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왜 배척당해야 할까? 민족주의란 관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상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문화생활보고서]한국불교미술박물관조계사와 불교중앙 박물관을 둘러본 뒤, 나는 인사동과 삼청동 일대를 걸어 다니기 시작하였다. 인사동 일대의 골동품 가게를 둘러볼 겸 해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표지판하나가 눈데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등록번호 와 함께 한국 불교 미술 박물관, 나는 아마도 국립이나 공립으로 운영되는 박물관이겠지 생각하였지만, 개인 박물관이었다. 비싼 관람료와 비싼 관람료와는 걸맞지 않는 박물관의 내부 시설과 관리를 보면서 다녀온 것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사립박물관은 국립이나 공립에 비해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 물품들을 전시해놓고선 관람료를 지불한다. 국립에 비해 비싼 관람료도 문제지만, 부가적인 설명이나 시설들이 미흡하기 그지없다. 좁은 박물관과 그만큼 적은 유물들을 관람하고선 더 비싼 관람료를 받고 있었다.전시실은 크게 제 1전시실과 제 2 전시실 그리고 제3전시실, 4전시실 로 구성되어 있었다.1층 제1전시실에서는 사찰의 대웅전(大雄殿)을 연상시키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격조 높은 불화, 조각, 공예품 등 다양한 불교미술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영산회상도, 삼장보살도, 풍경/반야용선대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불교 중앙 박물관에서 보았던 탱화들과 비교해 봄직 하였다. 개인 소장품치고는 아무 손상 없는 유물들이었다. 오히려 불교미술 중앙 박물관에 있던 유물들이 손상이 되어있던 유물들이라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으나, 손상이 없는 유물들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2층 제2전시실은 불교회화실로서 잔잔한 기풍이 살아있고 작품성이 뛰어난 조선시대 불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 제3전시실은 불교조각실로서 중생의 염원을 담아 조성된 불상과 재미있는 모습의 나한상 등이 전시되어 우리나라 불교조각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전파주의를 통해서 본 사회현상대륙에 부는 한류(韓流) 열풍전파주의는 사물(물질적이든 아니든)이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한 민족에서 다른 민족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전달되는 과정을 중시한다.전파주의로 본 한류열풍을 해보자 한다. 전에 본 주술과 종교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답사에 대해서 써 보려하니, 마을지 조사가 아니라 지표조사반 으로 답사를 가서 힘들겠다 싶어, 전에 교양 과목시간에 재미있게 들었던 한류열풍과 본 과제의 내용이 맞아 떨어져 조사하게 되었다. 한류 열풍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분의 말씀을 참고로 동시에 그 당시의 그분이 되어 어떻게 해서 한류열풍이 불게 되었는지 그리고 중국인들의 반응을 통해서 한류열풍을 해석한다.한류열풍이란 1990년대 말 동남아시아에서 일기 시작한 한국 대중문화의 열풍으로 이러한 한국 대중문화의 열기를 표현하기 위해 2000년 중국에서 언론에서 붙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어디서든 들어봄직한 말 일 것이다.우리나라와 중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까웠지만 개방화와 국교수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먼 서방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국교수립 이후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한국을 인식함에 있어서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나타내면서 본격적인 한류 열풍이 시작 되었다.|중국으로 건너가다|1990년 중반까지만 해도, 여의도의 증권회사에서 평범하게 근무하는 직장인이었다. 어느 날 중국에 계시는 친지분이 연락 이와 라디오 방송국에서 한시간정도의 한국 음악을 소개 하는 프로그램을 맡았다고 했다. 같이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회사에 대한 싫증이 나던 차에 또 어린 시절부터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쉽게 버릴 수 없는 유혹이었다. 초등학교시절에 한번쯤 가보고싶어하는 나라이름을 대라하면, 또래 애들은 미국이나 구라파의 영국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중국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직장동래와 상사와 부인 까지 무모한 일이라고 말렸다. “중국어 할 수 있냐?” 그러지 말고 일 년 정도 휴직계 내고 들어가 보고, 안되겠다 싶으면 다시 들어오라고 말하였다.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어서 고마웠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잘 일이 풀리지 않으면, 쉽게 들어오면 된다고 생각해버려, 일을 더 그르치는 결과만을 가져올게 뻔하였다. 결국 고민 끝에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남아 잇는 모든 것을 다 처분하고 부인과 함께 그리고 두 어린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알게 되다|한 시간 정도 라디오 방송국에서 음악을 들려주는 일을 하게 되었고, 그와 관련하여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악들도 알게 되었다. 대부분 조용한 발라드 곡을 좋아하였다. 한국의 노래들을 소개하여주면서, 색다른 한국음악을 전해주면 어떨까 시도해 보았다. 짧지만은 한곡씩 한국에서 유행하던 댄스곡들을 소개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부터서 회사로 편지가 오게 되었다. 한국의 색다른 장르가 그들의 감춰진 또 다른 감성을 움직이게 한 게 분명했다. 제목은 잘 모르겠는데, 빠르고 경쾌한 노래를 들었다. 끝나가는 시점에서 들었다. 또 들려주라는내용의 편지들이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더 자신을 가지고 한국에서 유행하는 음악들을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직원에게 방송국 삼사에서 방영하는 음악프로그램을 모두 비디오테이프로 녹음하라고 지시하였고, 가끔씩 한국에 와서 레코드가게와 음악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한국에서 유행 하는 음악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당시 대만가수들의 발라드가 유행하였는데, 발라드만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에게 색다른 음악을 제공한다는 것은어찌 보면 큰 무리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시도를 통해서 한국 음악의 특수성에 자연스레 관심을 기울이게 되지 않았나 유추해 본다. 점점 더 많은 반응들이 편지로 오게 되었고, 더 많은 곡들을 소개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청취율이 올라가게 되었다. 한국은 그 당시만 해도 빠른 댄스 가 유행하였다. 김건모의 노래 박미경의 노래 중국에서 도 반응이 좋았다. 그 당시 한국에서 직원이 보내준 비디오로 유행하는 음악을 간파 할 수 있었고, 갑자기 아이돌 그룹이 선을 처음 보게 되었다. 전사의 후예, 캔디 등의 노래를 선보이면서 선풍적인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눈여겨보면서 틀림없이 중국에서도 이 노래를 소개해야겠다고 맘먹게 되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하였고, 또 다시 들려주라는 요청의 편지가 쇄도 하였다. 중국인들이 좋아 하는 음악을 알게 되었고, 점점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벌써부터 중국인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음반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국 최고의 음반사를 찾아 다녔고, 음반을 내자고 설득해도,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외국가수가 많이 음반을 팔아봐야 3만장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인기 있는 가수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직 생소한 음반을 소개해봤자 이득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곳의 음반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음반사 마다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한국 음악을 소개할 수 없다고 보았다. 끈질기게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집안으로 초대하여 식사도 대접하고 하여, 결국은 음반을 내자는 계약에 성공하였다. 이와 중에도 한국을 오가면서 기획사를 찾아가면서 )h.o.t의 앨범을 중국에 내자고 제안했고, 탐탐치 않는 반응 속에서, 밑져야 번전 아니냐는 식으로 계약을 성립시킨다.그러나 또 하나 당면한 문제가 있었다. 중국은 한국과 달라 개인이 판권을 가지는 게 아니라, 중국 문화부가 판권을 가지고, 사용권만을 개인이 가진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또 문화부에 들락날락 하면서 문화부 담당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대접을 하면서, 판권을 따내었다. 이렇게 해서 계약이 성립되어지고, 앨범 발매만을 앞에 두게 되었다. 앨범이 판매되기에 앞서 중국 북경시내, 상하이시내 레코드 가게를 돌아다니며, 앨범을 홍보 하러 다니게 되었다. 여러 가지의 홍보 전다지를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았다. 앨범 재킷은 한국에서 판매되는 앨범의 재킷을 따라가지 않고, 중국인들에게 호감이 가는 스타일의 재킷을 고심 끝에 사진을 고르고 골라서 앨범의 재킷으로 쓰게 되었다, 결국 날짜가 다가와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앨범을 많이 팔 것을 예상하였으나, 기대와는 달리 빠른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매일 북경시내의 레코드가게를 돌아다녔고, 중국은 3만장 이상의 앨범이 판매되는 즉시 해적판이 나돌기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원들에게 지나가다 길거리에서 해적판이 나오게 되면 바로 연락하라고 하였다. 이는 해적판을 낼만 한 가치가 있을 만큼 앨범판매고를 올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쪽 방면의 정보란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시장의 선호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해적판이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앨범의 반응도가 좋다는 결과였다. 직접 해적판 앨범을 구입하고 비교해 보니 앨범과 함께 화보집이 함께 들어있었다. 많은 중국 학생들이 싼 가격에 해적판을 많이 구매 하리라 보았다. 며칠 후 전화가 한 통화 오게 된다. 음반사에서 외국가수로서는 경이적인 기록이라며,10만장을 돌파하였다고 전화가 오게 되었다. 성공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주저 않아 있을 수 없었다.
생애사(Life history)-어느 한 창작 판소리꾼의 삶-구술사 중심으로조사 배경힙합과 발라드로 대표되는 대중음악에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판소리를 대중음악보다 가까이 하기에는 일반적으로 어렵다. 이런 와중에 대중가요처럼 인기를 끌며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인 창작 판소리가 있다. 게임의 시나리오 와 판소리를 접목시켜 탄생한 박태오의 이다. ‘또랑 광대’로 자칭하는 이들은 왜 창작판소리를 하게 되었는가?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고 창작판소리에 무엇을 담아내고 있는가? 어느 한 창작판소리꾼의 삶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창작판소리의 길로 가게 된 배경과 바람직한 창작판소리 길을 살펴보고자 한다.정유숙△ ○아버지 어머니△ △ △ ○ 정유숙큰오빠 둘째오빠 막내오빠*판소리 인간문화재 성우향 선생 사사[춘향가][심청가]*창작판소리[눈먼부엉이]작창*전주산조예술제[또랑깡대 콘테스트]대상*전주세계소리축제[창작판소리사습대회]버금대상*민요연구회 20주년 기념작 민요뮤지컬[붉은점아리따]주연*FM라디오 국악방송 2003년을 빛낸 젊은 국악인 선정 **경기도 실학축제 창작판소리[허난설헌전] 출연*현 안산문화원 판소리 강사*현 판소리연구원 [하늘땅소리사랑] 대표생애사 텍스트선생님 판소리는 언제부터 배우셨고, 무엇이 판소리의 길로 오게 만드셨습니까?일반 사람들은 판소리 하면, 전라도 지역에서 명창이 많이 나와 으레 전라도 사람만이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강원도에서 태어나서 강원도에서 판소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전라도와는 인연이 없는 분들이시다. 두 분 모두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들로 모두 개방적이셨고, 그 시대 사람들치고는 많이 열려있던 분들이셨다. 내가 판소리의 길에 빠지게 영향을 주신 분들은 나의 부모님들 보다는 나의 오빠들이었다. 위로 오빠들 3분이 계셨고, 나는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부모님들이 북에서 내려오시게 되어서, 졸지에 남한 사람이 되어버려서, 친척도 없고 어디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서 각자가 알아서 일을 처리하며 살아가느라 다들 독립적이고 각 분야에서 알아서 살아가고 있다. 큰오빠가 내가 판소리를 접하게 되는 동기를 가장 많이 제공해준 사람이다.당시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큰오빠는 대학을 다닐 때였는데, 문화운동을 많이 하러 다니시고, 꽹과리를 집에서 계속 쳐 대서 처음에는 그렇게 듣기 싫었던 게 들으면 들을수록 푹 빠져들게 되었다. 왜 오빠가 꽹과리에 푹 빠져 사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내가 푹 빠지니까 이해가되었다. 오빠는 그 당시 활동에 영향을 받아 지금도 그 방면 쪽에서 일을 하시고계시며, 서로 연관이 있는 게 있어 도움을 주고받고 하고 있다. 지금은 원주 민속연구회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내가 판소리 길에 직접적으로 빠져들게 했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원주시 중, 고등학교 연합 청소년 문화 동아리가 만들어 진 것이다. ‘바람터’ 라는 이름의 동아리로, 예부터 마을에 아이들이 잘 노는 곳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다. 하여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니 누구든지 와서 함께 할 수 있는 모임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80년대 중후반 큰오빠와 둘째 오빠 막내 오빠 모두가 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되어 버렸고, 어머니께서도 성당에 다니시면서 그 당시 신부님께서도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신 신부님이라서 어머니는 이런저런 이유에서 사회를 읽는 눈이 있으신 분이었다. 오빠들이 학생운동을 하고 있는데, 말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리라 본다.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도 어느 정도 반대 하셨지만, 막지는 않으셨다. 아버지의 반대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아들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서 나온 반대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나는 고등학교를 다녔었고, 학교에 대한 흥미보다는 내가 하는 “바람터”의 일에 더 빠져 있었다. 이런 저런 행사에서 공연도 하고, 소풍만 가면 앞에 나가서 노래를 해야 했다. 내가 판소리의 길에 들어섰던 것도 어찌 보면 이런 이유에서 엿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의 문제는 소리만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특히 고3때는 진로상담을 받을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만다 선생님께서는 공부하는 방향으로 자꾸 나를 설득시키셨다. 원주 땅에서 무슨 판소리를 하느냐며, 정신적 혼돈이 있는 것 같다며 공부하라며 재촉하셨다. 혹 관심을 말하면, 일시적 관심일 뿐이라며 다음에 다시 상담하자고 하셨다. 며칠 후에 자율학습 시간에 담임과 상담이 있었다.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대학안가겠습니다. 판소리 하겠습니다.” 말하고 나와 버렸다. 그리곤 책가방을 싸고 학교를 나왔다. 비가 왔다. 엄청 많이 오는 날이었다. 평소 같으면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그날따라 비가 많이 왔다. 비를 흠뻑 젖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학교에 가면 나는 이제 남들과 같이 공부에 열을 올릴 필요가 없어졌다. 학교에서는 이제 나를 대학안가는 학생으로 인식하였고, 맘 편히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남들은 자율학습을 할 때 나는 텅 비어있는 미술이나 무용실 체육관을 가서 혼자 소리연습을 했다.오빠가 자주 듣던 판소리 테이프를 나도 듣게 되고 막 따라 불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큰오빠가 알아봐주신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고, 월세 방에서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소리공부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인간문화재이신 성우향 선생님께 소리 공부를 배우게 되었다.성우향 선생님을 자주 찾아뵈십니까?성우향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춘향가 사랑가를 부르면서 입신양면 해야 하는데, 내가 그러지 못해서 찾아뵙지 않고 있다. 2000년 까지 배우다가 벌써 안 찾아 본지 6년이 되었다.자주 듣던 소리도 김명곤 선생님의 금수궁가라는 창작판소리였다. 원주에 있을 때 자주 듣던 판소리 이었다. 재미있고 해학적이며, 사회비판이 잘 들어있어 좋았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창작판소리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고등학교 시절 공연을 많이 하러 다녔는데. 원주의 성당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였다. 봉산 탈춤을 입시제도와 학교교육의 비판적으로 공연하였는데, 때마침 길을 지나가다가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공연하고 거기다가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의 공연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다음날 그런 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교무실로 불려가야 했었다. 또한 어머니도 이런 일로 학교 교장실에 불려가야 했었다. 교장실에서 나온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빨리 교실로 가봐 네 잘못이 없어” 하시곤 울고 있는 나를 달래 주었다. 어머니는 항상 나를 믿어주시고 가장 큰 힘이 되시는 분이다. 어머니를 존경한다. 자랑스러운 분도 아닌데 내면에 강직함을 가지고 계신다. 저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내버려 주시는 분이시다.서울로 올라온 뒤에 10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들게 공부를 했다. 5시 반에 일어나서 일을 나가고 중간에 살짝 빈 시간에 잠깐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와야 했고, 다시 또 일을 해야 했다. 일은 안 해본 게 없었다. 영업 사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수금하러 다니기도 했었다. 아르바이트형식으로 이일저일 하면서 지냈다. 아는 사람을 통해서 사무직으로 일하기도 했었다. 일하면서 틈틈이 소리를 내며 일을 하였다. 그러고 보면 혼자 소리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는데, 밖에 손님이 들어와야 하는데 소리를 듣느라 못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소리를 내어야 했었다. 시간과 장소에 관계가 없이 소리를 연습 할수 있는 시간만 있으면 연습을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