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내용 먼저 살펴본다면, 본서에서는 장로교회의 역사적 배경과 그때 그 시대와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슈가 되어지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도 다루어지고 잘못된 신앙의 모습들을 교회 역사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들을 드러냄으로써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밝히 드러내는데 있어서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1장에서는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교회의 정의를 내리는데 있어서는 다른 서적들안에서 볼 수 있는 내용들도 익히 볼 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지금이나 그 때나 동일하게 교회의 어두운 면들과 낯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다.이런 상황 속에서 저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의해서만 교리들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기준이기에 이에 따라서 진위를 판단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시대는 더욱 악해져만 가고 있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가야 할지, 이 숙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평생의 숙제인 듯 하다.2장에서는 예루살렘 공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왜 예루살렘 공회일까? 본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당시 교회의 역사나 정치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안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의 중심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예루살렘 공회’이다. 교황주의자들, 감독주의자들, 및 장로회주의자들은 교회정치가 항상 지녀야할 방식과 태도에 있어서 예루살렘 공회는 교회정치 지침으로 삼을 만한 몇 가지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다.많은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만이 교회의 문제들을 처리해야 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이외의 모든 것은 아무리 보기 좋고, 타당성이 있어 보일지라도 사람의 생각과 손을 거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정확무오한 것은 오직 성경 뿐이다.세상은 지금 세상의 법을 따른다. 따라서 교회가 따라야 할 법은 성경 뿐이다. 교회는 이외에 어떤 규범이나 표준에 매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의무보다 명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3장에서는 사도신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로마교회의 교리이다. 사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작성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성립될 수 있는 건전한 사도적 교리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도신경이 어떤 합당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작성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모든 조항들의 참됨과 정확성은 영감되지 않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결과적으로 권위가 없는 문서이기 때문에 사도신경도 다른 표준들에 의해서 판단되어져야 한다고말하고 있다.사도신경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모태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공예배 시간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의심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책을 접하면서 사도신경도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사도들이 썼다고는 하지만, 영감되지 않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이제야 생각을 해보게 된다. 생각을 했다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우리가 생각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다룬 것이다.4장은 사도적 교부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다섯 명이다. 바나바, 헤르마스, 클레민트,. 폴리갑 및 이그나시우스. 이들은 성경의 진품성, 신뢰성, 그리고 정통성을 증언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자들이다. 이것이 그들의 주된 가치이다. 그러나 하나님 바른 말씀 가운데 안내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사도들을 대신하거나 그들을 이어서 지침으로 삼을만한 그 어떤 것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교부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과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야 함은 충분히 필요한 조건이지만,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장로교회사, 역사신학 서평2015210248 이영민5장은 사도적 교부시대의 이단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지주의, 마니교, 가현주의를 볼 수 있다. 마니교는 인간 본성을 연구하는 자들에게 매우 유용하고 교훈적인 가르침 몇 가지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것도 순수한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중요한 교훈은 아니다. 단지 신적 진리체계에 대한 약간의 빛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가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를 부정하였고, 육체의 고난도 부정하였다. 더 나아가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요한복음의 서론은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참된 인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와 가현주의자들의 이단성을 들춰내고자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교회에 가입한 사람들 사이에서 영지주의 원리를 가장 분명하고 온전하게 발전시킨 것은 독신주의와 수도권 운동이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현대의 이단들과 연계하여 이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서게 될 때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을 삼아야 할 것이다.6장은 2,3세기의 교부들에 대한 내용이다. 본서에서 다루는 교부들로는 저스틴 마터, 이레니웃,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 오리겐, 터툴리안, 카플리안 이다.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탁월한 저작을 남기고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들 역시 완전치 못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성경에 비추어서 볼 때 그릇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살펴 볼 때에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한다.7장은 첫 2세기 동안의 교회에 대한 내용이다. 로마 가톨릭 교부들은 만장일치 의견을 따르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경을 결코 해석하지 않는다는 의무사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설명들 말고는 성경적인 진술들에 대한 교부들의 만장일치의 의견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8장은 교회의 헌법에 대한 내용이다. 사도시대에는 감독정치가 없었다. 감독정치는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에 그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 단지 장로와 집사직의 역할에 걸맞는 어떤 명칭이나 호칭이 필요했다. 교회의 업무들에 대한 실질적 운영에 도입에 있어서 점차 발전함으로 감독, 추기경, 수장,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는 호칭이 확산되었다. 만일 이것들이 사도들이 제정하여 준 것에 엄격히 고정되어있던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사도들이 사용한 용어들을 변경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흐름으로 감독정치는 교회 안에 새롭게 성경에 입증되지 않은 서열을 소개하였다. 교회 안에 직분자들이 순차적(집사, 안수집사(권사), 장로)으로 세워지는 것 또한 이러한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직분이 존재한 이유는 교회 안에서 직무상의 차이였을 뿐, 자신들의 권위, 권세를 행하려는 서열싸움 때문인 것이다.9장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구별된 위격을 지니고 있지만 신적인 본성과 본질이 같다는 이 교리는 너무나 독특한 특징을 가진 기독교 교리이다. 이 독특한 특성을 지닌교리를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자들 대부분은 당연히 초대교회의 증언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고 믿는다. 니케아 공회 측면에서 살펴봐도 더 확고하게 ‘예수는 아버지의 품속에서 나신,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같은 혹은 성부의 본체에서 나신 분이시다’ 라고 선언했다.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반드시 정확하게, 바르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 부분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이단에 빠지게 되는 모습을 여럿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을 토대로 반드시 명확하게 정립하고 넘어가야 한다.10장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기독론의 한 부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사람이었다는 것도 가르친다. 성경은 더 나아가서 독특하고도 명확하게 선언하기를 그의 성육신, 즉 그가 육체를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는 그의 인성이 신성과의 연합 속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영원한 분으로 계셨으나 때가 되어 인성을 취하시고, 그로 인해 사람이 되신 것이었다.
예배와 예전,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서평2017-2『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서평1. 요약교육은 우리의 욕망을 겨냥하고 우리의 상상력을 훈육하며 우리가 세상을 지향하게 하는 형성의 과정에서, 우리가 그것에 관해 생각해 보기도 전부터 이미 몸을 비롯한 우리의 전인에 영향을 미친다.책은 배움이 어떻게 예배와 연결되는지, 어떻게 형성과 제자도의 실천을 이루는지 강조하면서 온전한 기독교 교육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인간은 근본적으로 욕망하는 피조물이다. 때문에 인간을 궁극적으로 예전적 동물로 이해하는 철학적 인간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배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믿는 동물이 아니라 예전적 동물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동물이다.인간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동물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말과 같다. 사람이라는 것은 곧 사랑하는 존재라는 말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룬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궁극적 사랑이다. 이런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혹은 종교적이면서 고대적인 언어를 사용하자면,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다. 내 삶을 아래로부터 형성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다. 나의 열정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내가 욕망하는 대상,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이나 욕망이 인간됨의 구조적 특징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곧 사랑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에게는 사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같은 것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를 구별시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가다.우리가 세계를 지향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사랑이라는 정서적 질서를 통해서다. 이 사랑이 세상에 대겨누어지는 방식은 우리의 사랑을 형성하고 빚어내며 방향 짓는 실천을 통해서다.예전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결정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궁극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대상, 우리가 충성을 맹세하는 대상, 어떤 면에서는 모든 관심을 압도할 정도로 우리가 몰두하는 대상이라는 뜻이다.예전이라는 말을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 까닭은 다양한 문화적 실천과 의례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세속적 예전은 우리의 상상력을 붙잡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의례적 실천으로 이끌어감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같은 의미에서 기독교 예배는 이런 잘못된 형성과 잘못된 방향 설정에 대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전적이고 형성적이며 교육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예배의 실천은 본래적인, 창조될 때 부여된 하나님에 대한 욕망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종교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고, 우리의 열정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경쟁하며,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전망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제도라는 뜻이다. 이런 제도들은 그저 우리에게 오락이나 교육을 제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를 특정한 사람으로 만들기 원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 신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첫쨰로 인식의 순간, 즉 예전으로서의 문화적 실천과 의례를 인식하는 것이다.우리는 몸을 지닌 정서적이며 예전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과 욕망은 우리의 상상에 영향을 미치는 의례와 실천에 의해 형성되며 통제된다. 이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형성된 습관을 우리 안에 새겨 넣는 일종의 자동적 과정인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런 습관은 적응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속적 예전과 관련된 의례는 일종의 교육, 우리의 마음과 사랑에 대한 훈련이다. 교육은 교육에 국한되지 않으며 예배는 교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속적 예전이 욕망의 교육으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것조차도 여전히 우리의 종교적 본성을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신념이나 ‘영적’ 메시지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것조차도 궁극적으로는 궁극적인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며 우리의 사랑을 형성할 의도를 지닌 실천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세속적 예전은 우리의 욕망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이 특정한 목적을 가리키고 겨냥하며 지향하게 한다.우리는 우리 마음이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습관이나 성향을 우리 안에 아로새김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식을 통해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이끄는 물질적 실천, 즉 예전에 의해 영향을 받고 형성되는, 몸을 지닌 정서적 피조물이다. 간단히 말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실천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천 안에는 우리의 욕망과 행동을 방향 짓고 인도하며 형성하는 사회적 상상이 내재되어 있다.따라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기독교의 사회적 상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세계관은 오랜 인지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상에 초점을 맞출 때, 문화 비판 탐지기는 그저 사상이라는 영상이 스크린에 깜빡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실천을 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눈금이 조정된다.예배는 기독교 신앙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너무 자주 교리를 요약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을 정의하려고 한다. 교과서와 교리, 신학자들의 이론적 설명에 눈을 돌리는 대신,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바를 검토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기독교 예배라는 실천을 읽어 냄으로써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사회적 상상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자 한다. 기독교 예배 참여는 교리의 공식화와 세계관의 명확한 진술보다 선행한다. 예배하는 삶은 이미 제자리에 있는 일군의 인지적 신념의 표현이나 적용이 아니라 세계관의 원천이 되는 셈이다.역사적 기독교 예배는 근본적으로 형성적이다. 왜냐하면 이 예배는 몸다 더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지적이기보다는 정서적이며, 이는 모든 기독교 예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계관 형성에 대한 예배 실천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욕망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존중한다는 말이며, 동시에 의례에 참여할 수 있지만 이론적 성찰에는 참여할 수 없는 이들의 성장을 위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의 모습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교리에 대한 예전의 우선성을 기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교리와 신념,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예배의 실천이라는 집합체로부터 생겨난다.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표현’ 이나 ‘예증’ 이 아니라 그 모체다.기독교 예배에 관해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점은, 그것이 대단히 지상적이고 물질적이며 현세적이라는 사실이다. 예배에 임하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다. 기독교 예배는 몸과 분리된 천상의 영혼이 참여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의 중요한 가르침인 피조물의 선함을 개념적으로 주장하기 전에 이러한 이해는 교회의 예배 안에서 재현되고 수행된다. 하나님이 현세적이며 지상적인 것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은 피조물과 물질성이 우리가 피해야 할 유감스럽고 한탄스러운 조건이 아니라 선물로 받아 누려야 할 선이라고 인정하신 하나님의 실행이다. 또한 예배에서 우리는 피조물의 선함에 대한 종말론적이며 영원한 긍정으로서 몸의 부활을 고대한다.모든 기독교 예배는 사실상 하나의 실천적 모순이다. 왜냐하면 예전적이거나 성례전적으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모든 기독교 예배는 불가피하게 물질적이며 육체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예배는 언제나 물질을 통해 의미를 만드는 사건이며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불가피하게 성례전적이라는 말이다.기독교 예배의 물질성 안에는 하나님이 물질성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며 자연 세계는 언제나 자연 이상이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기’ 자연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환원론적 자연주의 모두에 대한 거부다.교회의 예배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임재가 있는 독특하게 강렬한 자리다. 우리는 이 실천의 열정적인 본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즉, 예배의 일차적인 목적은 “내가 느끼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예배의 목적을 욕망의 교육으로 축소해서도 안 된다. 예배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그분을 위한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그분을 위한 것이다.예배의 물질적 조건과, 실천에 대한 참여의 결과로 나타나는 형성을 강조하는 것은 예배를 자연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성육신적 본성에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즉, 예배는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짓는 재료였던 물질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매개된 만남이다. 그리고 그 물질 안에서,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은 행동하신다.우리는 기독교 예배가 정치적이기도 하다는 의식, 즉 예배가 우리를 또 다른 도시의 시민이자 오실 왕의 백성인 독특한 사람들로 구별시켜 주고 그런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는 의식을 잃어버리고 있다.우리는 그저 예배당에 와서 예배로의 부름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이 행동이 암시하는 바를 엿보았다. 이 부름에 응답해 모이는 우리의 행위에는 인간 번영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관한 암묵적이 이해가 내재되어 있다. 참으로 인간이 되는 것은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우리가 예배하기 위해 십자가 아래로 모이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야 할 책무와 사명을 이행하지 못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실패 때문이다. 우리는 모임으로써 예배로의 부름에 응답한다. 이 부름은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라는 창조의 부르심에 대한 반향이자 갱신이다. 그리고 우리는 문화를 만드는 일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사는 사명을 완수한다. 이렇게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명을 잘 이행하기 위해서는 창조주와의 언약적 관계 안에서.
선지서. 예언서 연구를 읽고책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다른 구약개관의 책들보다는 예언서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게 다룬 것 같다. 살펴본 각 장들도 성경 각권을 들어가기 전에 전체적으로 선지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어떻게 보면 선지서의 개론적인 부분을 살펴본 것 같다.저자는 선지자 사역의 원류로 모세로 보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 경영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다.본서에서는 성경의 근거를 통해 모세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가운데 위치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면 모세 이전의 사람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위치에 있지 않았는가?반박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고, ‘모세 이전의 인물들은 왜 언급되지 않을까?, 굳이 뺀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읽는 독자는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세가 더욱 특별한 이유를 내용적인 부분에서 언급을 하지만, 모세 이전의 인물들과 비교해서 왜 모세만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였는지를 언급해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선지자들의 직무를 말하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선지자들을 말하기를 ‘신정의 공무원’ 이라고 말하고 있다. 딱 적절한 표현인 듯 하다. 신정통치를 받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에게 공포하고 세상의 법이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면 지금도 이런 삶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며, 세상과 교회의 괴리감을 느끼곤 한다. 이 현실적인 괴리감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 평생의 고민, 숙제가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더욱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공부할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무엇보다 본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는 부분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펼쳐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언 말씀의 실천 부분을 성령의 활동으로 깊이가 있지는 않지만, 명확한 개념(내면화, 보편화, 정의, 사랑, 평화 등)을 통해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신약에서 구약으로 단순한 점프(?)가 아닌, 구속사적 관점으로 순차적으로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근세 및 현대교회사 과제. 복음주의 미국역사 서평.Ι. 내용요약1장. 복음주의 정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복음주의자는 복음의 사람들로,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복음주의에 대해 기초적인 설명은 가능하지만 복음주의 운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복음주의 운동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다양해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다른 여러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복음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 중에 하나는 그들이 다른 여러 교파들, 심지어 서로 상반되는 신학적 견해를 소유하고 있는 교파들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복음주의 교회들은 개별적으로는 존재해왔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복음주의 교단은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주의가 지닌 다양성을 고려해 볼 때, 복음주의자들은 공통점을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복음주의자들은 서로 간에 공통점 보다는 오히려 많은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다.복음주의는 역사상 가장 생명력 있는 기독교 운동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엄청난 다양성 속에서도 부유함을 지닌 사람들이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서로의 문화적 경계들을 넘어서는 소중한 가치를 많이 공유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일종의 운동으로 교회나 교파를 의미하지 않는다. 복음주의는 공동의 목표인 복음증거의 목적을 위해 함께 사역하는 기독교인의 연맹체이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 개인이나 전체를 통제하는 정해진 규칙이나 규율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복음주의 운동의 중심은 그 운동이 성장하거나 변화함에 따라 조금씩 이동한다. 그리고 복음주의 연맹을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음주의 운동은 자발적인 참여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한편, 현대 복음주의자는 다른 기독교 단체들과 구별된다. 그 이유는 복음주의 운동이 18세기 문화적 배경, 즉 하나의 왜곡된 토양으로부터 나타났기 때문이다.2장.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현대 복음주의는 지금부터 300년 전 세상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초유의 영적 운동에서부터파송되었는데 이러한 놀라운 선교 사역은 당시 많은 목회자를 감동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중부 유럽에서 발생한 경건주의 운동은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상대적으로 경건주의가 강한 지역에서 부흥 운동이 발생했다. 중부 유럽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할레대학교에서 프랑케에게 수학했던 진젠도르프였다. 진젠도르프를 통해서 모라비안들이 선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모라비안들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영국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이었다. 영국에서 부흥운동의 빛이 된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사역 아래서 회심을 체험했다.영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여러 지도자가 대각성 운동 기간에 많은 활약을 펼쳤다. 이 기간 동안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설교자는 국제적으로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조지 휫필드일 것이다.휫필드는 7,500회에 걸쳐 설교했으며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미국에서 휫필드만이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많은 미국인 동료들과 함께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가장 주요한 복음주의자로는 회중교회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를 들 수 있다. 휫필드와 스코틀랜드의 뛰어난 여러 복음주의자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에드워즈는 대각성 운동의 신학적 천재로서 짧은 시간에 명성을 떨쳤다.대각성 운동이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는 1740년대 초반이다.69 대각성 운동은 세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정통주의 개시교인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롭고 참된 다문화적 운동을 형성하면서 이제 세계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얼만 지나지 않아 대각성 운동은 복음 전파에 종사하는 전도자들에게는 오랜 시간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해왔던 경계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3장. 새 부대 만들기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교회 사역을 유지해주는 제도화된 기관들을 필요로 하면서도 이러한 현실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고상한 영적 운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계획, 조직, 여러 기관의 협력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종교시장은 해체되었고, 새로운 종파들이 이전에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비기독교 전문가들이 자주 지적하는 것처럼 복음주의자들은 항상 그들의 신앙을 상품화하는 데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왔다. 이러한 기존 질서의 해체는 종교의 자유시장을 만들어냈으며 여기에서 복음주의자들은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이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긍정적인 영향만을 주었다고는 볼 수 없다. 신앙을 상품화했다는 데에서부터 벌써 시작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대각성 운동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에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는 미국의 영적 생활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무기력했고, 계몽주의가 강조했던 합리성의 영향과 독립전쟁을 통해 사람들은 이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 더욱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어 서부 개척과 이주로 인해 국내 전도와 교회 개척에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에서 새로운 국가원동력이 될 수 있는 영적 갱신을 주도할 수 있는 부흥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러 복음주의 지도자의 노력으로 인해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미국에서 다시 부흥을 일으키고자 기독교 지도자들이 노력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과연 제2차 대각성 운동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제1차 대각성 운동은 칼빈주의에 기반해서 에드워즈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으로 보았다. 이와 반대로 제2차 대각성 운동은 신학적으로는 알미니안주의로 죄인이 자신의 회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칼빈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역사에서 이러한 알미니안들의 역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지금까지 복음주의 운동에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알미니안들은 제2차 대각성 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많은 감리교인이 부흥 운동을 주도하면서 복음주의적 실천의 모습을 향상시키는 데에 헌신했다. 하지지게 된 선교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의 선교방식과 같이 관료후원적 종교개혁자들은 이른바 고백주의 방식으로 선교를 이해했다. 즉 종교개혁자들은 세속 권력의 도움을 받아 그 관할권 내에서 당시 영적 혼동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개신교 신앙을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사역을 추구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거나 비기독교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려했다. 복음 사역자들이 국경 밖의 다른 지역과 나라에 가서 목회를 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초기 개신교인은 대체로 다른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물론 현재 복음주의자들은 선교에 대해 다른 기준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당시에 개신교 안에서 선교를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다거나 복음을 전파하고자 유럽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청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은 근대 선교 운동의 길을 닦는 역할을 감당했다.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 지역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이전부터 개신교 세계는 거대한 규모의 해외 선교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경건주의자들이 이 계획을 실행해서 18세기 초반, 선교에서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다른 여러 동기도 있었지만 많은 청교도 개척자는 인디언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후손들로 가나안 땅에서 추방된 이후에 흩어졌던 “10개의 잃어버린 지파”로 보았기에 그들의 구원은 곧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일어날 이스라엘의 회심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천년 왕국에 대한 기대와 함께, 청교도들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해안에 정착하자마자 곧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비록 청교도들이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계획적인 거대한 캠페인을 벌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수십 년간 복음의 씨앗을 인디언들에게 지속적으로 뿌렸다.선교지에서 그들의 고상한 목표와 여러 열매에도 불구하고, 일부 개척자들은 자신들이도를 폐지했다. 하지만 노예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인종차별은 이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복음주의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비록 복음주의가 차별없는 교회연합을 추구한다고 해왔지만 실제로는 인종차별로 인해 흑인은 자주 복음주의 조직과 기관에 참여하는 것이 제한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흑인 노예들에게 복음은 아주 느린 속도로 전해졌다. 실제로 1720년 이전까지 복음전파 사역은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예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데 지연되었던 주요한 이유는 노예주인이 복음 사역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노예 주인은 기독교 세례에 대해 영국 법률에 따라 노예들을 죄의 올무에서 해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인에게서도 해방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결국 노예 주인은 복음 주의자들이 노예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또한 상당수의 복음전도자들은 세례가 노예들에게 육체적인 해방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욱 순종적이고 복종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해서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복음전도자들은 노예들을 일에서 멀어지게 하고 거만하게 하며 오히려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 통제하기 힘들다고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염려를 가진 노예 주인에게 상당수의 복음전도자들은 복음이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하다고 주장하면서 노예들에게 접근했다. 이는 교회 역사의 비극중의 하나이다.일부 복음전도자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속하셨다는 내용을 절대 설교하지 않기로 노예 주인과 약속하기도 했다. 요약하면, 복음전도자들이 노예 주인과 맺은 이러한 잘못된 약속들은 그들의 설교를 왜곡시켰고 노예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주인을 위한 가짜 복음으로 복음을 전락시켜 버렸다.하지만 대각성운동 기간과 그 이후에는 모든 상황이 호전되었다. 약속 1740년대에서부터 미국의 복음설교자들은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래 전부터 흑인 기독교인은 여러 인종이 함께 모인 여러 부흥회에서 권면과 대표기도를 하했다.
선교역사, 도시선교전략 서평1. 내용 요약1장. 도시 선교학의 현황과 필요성한국의 도시 선교적 상황을 보면, 한국의 도시선교는 아직 미약한 수준이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도시가 성장하고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시대에는 교회가 세워지기만 하면 대부분 경험하였다. 그러나 도시선교라는 말 자체는 그리 흔한 말은 아니었지만, 한국의 도시선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현재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급격한 도시 이주와 인구성장 그리고 전 세계적인 인구이동으로 교회는 선교학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도시사역을 함에 있어서 많은 전략들이 제시되어 있고 많은 프로그램들이 각 교회별로 시행되고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입각해서 수고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성장 지상주의, 물량공세, 성경과는 괴리감이 있는 프로그램 지상주의가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음을 목격한다.2장. 도시에 대한 사회 문화적 이해도시를 이해하는 것은 도시선교를 이해하고 도시선교의 전략을 세우는 데 필수적이다. 도시를 이해함에 있어서 도시학자들이 도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도시와 대칭되는 개념은 촌락이다. 도시는 주택, 상가, 공장, 관공서, 오피스, 빌딩 등이 빼곡이 들어차 있고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비좁은 지역에서 분주히 사는 ‘일하는 장소’의 신식을 갖게 한다. 이에 비해 촌락은 농가, 경지, 삼림지, 어촌 등 넓고 넉넉한 공간에 많지 않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생활하는 시골의 의미를 지닌다.도시를 정의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접근이 있다. 하나는 인구통계학적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기능적 접근이다. 루이스 워스는 “도시는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개인들이 모인 비교적 크고 인구밀도가 높고 영구적인 주거지” 라고 정의했다.기능적 정의는 도시가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도시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궁정의 위치나 정치 행정의 위치와 같은 정치적 기능을 포함한다.도시는 시, 도회지, 도읍 등의 개념과 동일하거나 유사하다 되고 만다. 연결망과 제도들이 유기적으로 조직화되면서 사람은 자동으로 조종되는 비행기에 탄 것처럼 도시로 자연스럽게 이끌려오게 된다. 현상적으로 도시 집중화는 정부, 교육, 의료보험, 정보, 여가, 거래, 산업, 복지 등이 집중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도시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도시주의가 발달한다. 도시의 생활양식은 과거 부족사회의 생활양식과는 다른 점이 많다. 복잡한 환경 속에서 도시인들은 선택적 적응이라는 생활양식을 따르게 되었고 이는 도시인들로 하여금 이웃에 대해 일에 덜 혹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즉 도시화의 결과로서 개인주의라는 도시성이 발생하게 되고, 이것은 결과로서 개인주의라는 도시성이 발생하게 되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사회구성원 간의 갈등을 유발하고 무관심 혹은 적대의식, 범죄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따라서 도시인의 도시성을 이해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도시인의 세계관 고찰이 선행되어야 하고 심도 있게 연구되어야 한다. 현대 도시인의 세계관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복음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도시사회는 부족사회나 농경사회의 세계관과 다른 점이 많다. 도시사회는 복잡하고 이질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집합이다. 결정 세력도 집단에 의해 결정이 아닌 개인 결정에 기대한다. 진리는 농경사회보다 더 축소되어 대단히 개인적인 것으로 보고 진리를 보편적이거나 심지어 집단적인 것으로 삼는 데 많이 주저한다. 따라서 도시인들의 세계관의 특징은 ‘개인주의’ 라고 말할 수 있다.또한 도시에서는 성스러운 것이 세속화되고 일관되고 안정된 삶이 혼란과 무규범의 삶으로 바뀐다. 따스한 개인관계들이 합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익명성으로 바뀐다. 이와 같은 도시인들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성경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도출됨을 알 수 있다.도시화는 도시인들을 개인주의적으로 만들었고, 개인주의는 도시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한다. 도시인들은 많은 낯선 사람들과 접하게 되면서 자신에 대한 방어 자세를 취하게상황과 필요에 맞는 성육신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총체적 사역은 실제필요와 기본필요가 함께 하는 사역이다.박탈감과 빈곤은 범죄를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인구 집중으로 야기된 도시의 사회구조, 직업구성, 생활양식의 변화 뿐 아니라 공해, 주택난, 빈곤, 범죄와 같은 각종 도시문제 중에서 범죄는 도시인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는 심각한 사회문제로서 매년 증가하는 추세이다.범죄 행위의 주체는 인간 개개인이지만 개인의 내적 속성보다는 그 지역의 환경요인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세계의 도시화, 전 국토의 도시화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을 보면 마치 도시화가 인류를 잠별의 길로 이끌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도시가 많은 문제점을 가치고 있다 해도 교회는 선교적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 21세기 선교는 도시에서 판가름난다는 것을 기억하고 도시라는 상황을 이해하고 도시 속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도시로의 성육신적 전략을 숙고해야 한다.3장. 도시선교에 대한 성경적 이해선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활동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적 도구를 세우셔서 그분의 선교계획과 선교대상과 사역지를 발견하게 하시고 선교사역을 수행하게 하신다. 이러한 선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교에 대한 용어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선교의 개념을 광의적 그리고 협의적 의미로 정의할 수도 있다. 광의적 의미란 주체로서 삼위 하나님의 주재권을 강조하면서 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말씀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복음증거의 삶이다. 협의적 의미는 실제적 의미인데 교회의 파송을 받아 타문화권의 불신 종족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하고그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케 하여서 선교의 책임을 다하는 교회로 세움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이다.모든 신학의 출발점이 신구약성경 말씀인 것처럼 선교에 대한 온전한 이해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가능하다.구약성경를 통해 교훈을 현재와 미래에 반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전략을 배움으로 오늘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도시사회에서 어떤 방향과 전략으로 도시를 선교할 것인지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역사는 크게 세 가지 방향, 즉 순환론적 사관, 직선사관, 절충주의적 사관에서 연구되어 왔다. 기독교의 사관은 직선사관 즉 구속사관이다.그러므로 선교사관 역시 구속사적 선교사관이 된다.선교역사와 교회사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 교회사는 기독교회가 교리적, 조직적으로 발전, 성장, 쇠퇴하는 것을 기술한다. 그러므로 주로 기독교회의 핵심부의 발전과 성장을 중심으로 기술하게 되므로 초기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출발하지만 이후로는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교회들의 역사를 기술하게 되고, 18-19세기 이후에는 미국교회들의 역사를 기술하게 된다. 이에 비해서 선교역사는 교리적, 조직적 발전보다는 지리적 팽창을 중심으로 역사를 평가 서술하게 된다. 이에 따라서 교리적 발전을 이룬 사건보다는 지리적 팽창을 가져오게 된 사건과 인물, 새로운 지역으로 교회가 전파되는 방법과 교회가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전략 등에 주로 관심을 가진다.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택하셔서 도시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택함을 받은 사역자들은 자신의 모든 안위와 편안함을 포기하고 지역의 주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다시금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과거 신앙의 선배들처럼 온전한 성육신적 선교를 실행해야 한다.5장. 다양한 도시에서의 교회개척과 성육신적 선교전략한국사회의 도시 형태는 다양하다. 이와 더불어 교회를 개혁하는 유형도 여러 가지가 있다.첫째, 사역자와 교인들을 내보내서 교회를 개척하는 유형, 이것은 모교회가 지교회를 세우는 경우이며, 현재 한국교회의 개혁 유형 중에서 가장 성공률이 높은 개척 형태라고 할 수 있고 가장 권장할만한 유형이다. 이 유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교회가 건강하고 성 목회자의 목회철학은 철저히 성경적인 바탕 위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 중심의 순수 교회개척은 단점도 가지고 있다. 인적, 물적 자산이 목회자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물론 개척 멤버를 확보한다면 훨씬 더 큰 동력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인적자원, 물적자원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교회가 자립하기까지 많은 기도와 인내 그리고 수고가 있어야 한다.한국에서의 개척교회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이 시각은 여러 가지 개척에 대한 부정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약 5분의 4의 불신자들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개척의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다.대형교회들은 많은 영적, 물적, 인적자원을 통해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의 성도들까지도 흡수하여 더욱 대형화되고 있다. 반면 작은 교회들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인적, 물적 자원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과거 한국교회는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무너진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사회 통합의 순기능들을 많이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 자체의 분열과 사회에 본이 되지 못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사회에서 신뢰를 많이 잃었다. 교회가 순기능적인 점보다는 역기능적인 점이 더욱 부각되었다.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들은 전도의 측면에서 악영향을 끼치고 대형 교회나 작은 교회들 모두에게 부정적인 교회의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해서 흥미를 잃고 교회를 떠나는 일이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다.오늘날 보다 좋은 문화적 환경을 제공하고 외부적으로 보기 좋은 교회로 성도들이 집중되는 것은 자아실현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개척의 어려움이 있다 해도 교회개척은 계속되어야 한다. 교회개척은 최고의 선교전략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개척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준비로 무엇을 해야 하나, 첫째, 교회 개척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투철해야 한다. 개척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상황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