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Schumann(1810~1856)슈만은 페르디난트 힐러의 연습곡에 관하여 라는 글에서 음악교육가로서 세가지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나열된 순서가 중요도의 순서이다.1: 꽃= 시적인 내용 마음을 위한 것 정신2: 뿌리= 화성적 선율적인 내용 또는 귀를 위한 것 형식과 주기 구성3: 열매= 기계적인 내용 손을 위한 것이러한 중요도의 위계질서는 1.정신을 위한 문제 2.작곡을 위한 문제 3.연주를 위한 문제로 볼 수 있다.이는 음악 실제보다 사고를 더 중요시한 것을 드러낸다. 슈만에게서 정신이란 숙고하는 정신이 아니라 영감을 느끼는 정신이다. 그는 작곡에서 여러번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말한다. 최초의 착상이 가장 자연스럽고 좋다. 분별력은 틀리지만 감정은 틀리지 않는다 고 말한다. 이런 생각을 했던 그의 음악은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이러한 음악적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생애와 함께 음악적 경향을 살펴보았다.1. 성장기의 정신적 문제로베르트 슈만은 독일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음악적인 재능과 서정적인 소질은 어머니에게서, 문학적 소질은 문필활동과 더불어 서적 출판업을 하는 부친과 문호집안 출신인 조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그의 음악성은 7세정부터 주위의 주목을 끌었다. 12세때 오라토리오 등을 작곡하는 한편 하이네와 만나기도 하는 시인 지망생이기도 하였다.교양있는 유복한 가정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슈만은 명랑한 소년이었으나 15세에 부친과 누이와 사별하고 뒤이어 형과 형수의 죽음을 잇따라 겪은 다음부터 점차 과묵하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다.극심한 우울증으로 4층 창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고 이미 고등학생이었을때 슈만은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생기가 가끔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미 가끔 거의 정신 착란의 상태에 빠지곤 한다...]아마도 이때부터 시작된 슈만의 평생의 지병인 신경증은 부친으로부터의 유전일 가능성이 크다. 17세때부터 쓰기시작한 일기속에서 슈만은 자신이 정신이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자주 토로하고 있다. 또한 그는 18세경에 이미 환청을 경험하고 독살과 죽음, 특히 금속으로 된 물건에 대한 공포감등 심각한 정신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2. 음악가로써의 시작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슈만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 법과에 입학한다. 그 후 하이텔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자신의 진로를 음악으로 결심하게된다.슈만의 주요 피아노 작품인 과 은 이 시기에 만들어 진 것이다. 다시 라이프치히에 돌아와 유명한 피아노 교수었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슬하에서 지내기 시작한 슈만은 본격적인 음악가로써의 시작에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친 연습으로 손을 다치게 된다. 오른손 넷째 손가락을 다치자 피아니스트가 될 꿈을 단념하고, 이때부터 작곡과 평론만을 지향하여 등의 피아노곡을 작곡하였으며, 34년에는 등을 내놓았다.또, 음악 평론가로서 당시 음악계의 형식적이고 상투적이며 보수적인 경향을 깨뜨려 음악계의 공기를 혁신시키려고 애썼다 J.크노르, L.슝케, 비크 등과 함께 잡지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Musik》를 발행하여 펜을 들고 자유롭고 새로운 음악의 발전을 위해 옛사상과 대결하며 낭만주의의 새바람을 불어넣었다.3. 클라라{슈만의 생에에서 빠질 수 없는 그의 연인 클라라는 스승 비크의 딸이었다. 비크는 이들의 관계는 이들의 관계를 완강히 반대하며 절교할 것을 단호히 말하였다. 아직 이름었는 음악가인 주제에 감히 당시 천재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높았던 자기 딸과 결혼 할 수 없다고 하며 슈만을 내쫑았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주위의 도움으로 사람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어갔고 그러던 끝에 두사람은 마침내 결혼 문제를 법에 호소하기로 한다. 1839년 7월 라이프치히 재판소에 부친의 부당한 처사를 말하며 아버지의 동의 없이도 결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서류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듬해 8월 결혼해도 좋다는 허가서가 통보되었고 클라라의 21세 생일 전날 결혼식을 올렸고 이때 슈만의 나이 30세였다. 이 사건들은 슈만의 내면을 쉬기의 심연에까지 잠기게 함과 동시에 거기에서 일어나는 결정적인 힘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나온 걸작들이 말해주고 있다.4. 피아노 작곡시대, 가곡의 해.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1839년 까지를 피아노 작곡시대로 볼 수 있는데, 문학에 심취해 있었던 그는 문학작품으로부터 영향받은 피아노 작품들을 작곡한다. 『아베크(Abegg) 변주곡』, 『파피용(papillons) 『파가니니 연습곡』, 『다윗 동맹원 무곡』, 『카니발』, 『크라이슬러리아나』, 『어린이 정경』, 『노벨레텐』 등이 모두 그러한 것들이다. 그는 시(문학)나 음악의 목표는 서로 같으며 단지 그 방법만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 곡들 중에는 소품적이고 시적인 것이 많다. 반면에 소나타 f#단조, f단조, g단조, 『BACH 테마에 의한 6개의 푸가』, 그리고 4개의 푸가들은 전통적 형식을 배우면서 나타난 곡들이다. 『교향적 연습곡』은 피아노의 음향을 오케스트라의 그것처럼 확대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가곡의 해(1840년)이전까지 거의 피아노곡만 작곡하던 슈만은 부인 클라라와 결혼하던 이 해에는 갑자기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생에를 통해 작곡된 가곡 의 반 수인 140여편의 가곡들이 둑이 무너진 듯 쏟아져 나왔다. 너무나 길었던 겨울 뒤에 드디어 이루어진 클라라와의 결혼이 작곡가의 입을 열게 만든 것이다. 후에 작곡된 가곡들은 결코 이 가곡들이 가진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두개의 『리더크라이스』(Liederkreis"노래묶음"의 뜻), 『미르테 꽃』,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의 연가곡들이 작곡되었는데, 거의가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다. 꿈꾸는 듯한, 여린 그의 가곡선율은 마치 피아노를 위한 성격소곡에 가사가 붙여진 듯하다.그리고 이듬해에는 교향곡에 전념하여 제1번과 제4번의 2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다시 42년에는 실내악으로 전향하여 3곡 의 현악4중주곡 피아노4중주곡(작품 47), 피아노5중주곡(작품 44) 등의 고전적 폴리포니 (polyphony:다성음악)와 낭만적인 서정이 곁든 중요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5. 이 후의 음악활동과 죽음.43년 L.F.멘델스존 의 초청을 받아 신설 음악원의 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4개월에 걸친 아내의 러시아 연주여행 에 동행하여 정신과 육체적 건강의 악화로 전지 요양을 권유받았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아내 클라라와 동행 연주 여행을 할 때면 사람들이 클라라의 음악성만 인정해 주어 그가 많이 좌절했다고 한다. 44년 라이프치히를 떠나 드레스덴에서 리더 타펠 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50년에는 힐러의 후임으로 뒤셀도르프의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다.여기에서 《라인교향곡》으로 알려진 제3교향곡, 첼로 협주곡 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쓰여졌다.평론으로는 마지막 것이 되지만, 53년에 젊은 브람스를 소개한 《젊은 길》이 슈만의 명성을 남긴 논문이다.그의 정신장애의 징후는 이미 33년경 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44년경부터는 창작력이 왕성한 시기와 우울증에 빠진 시기가 서로 교차 되어 나타났으며, 54년 2월 심한 망상에 사로잡혀 라인강에 투신했으나 다행히 구조되어 그 후 부터 교외의 엔데니히정신병원에 수용되고, 56년 여름 2년간의 투병 끝에 46세로 세상을 떠났다.슈만은 생전에 사람들에게 그다지 인기 있는 존재가 아니였고, 그의 음악 또한 썩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살아있는 동안 별로 햇빛을 보지 못한 작곡가 중에서도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슈만이다.{정신병원에서의 마지막 자필악보6. 슈만의 음악은..슈만에게서 중요한 것은 시적인 것 이였다..슈만은 소년 시절부터 쟌 파울이라든가 호프만등의 문학작품을 가까이 함으로써, 낭만적인 환상을 풍부히 하고 감정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이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하여, 그 의 음악은 자연 낭만적인 시정이 넘치게 되었다. 따라서 슈만의 음악은 순수한 음악적인 구성보다는, 시적으로 노래를 하고 자기의 낭만적인 환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분석적으로 밝힐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고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 이었다.그래서 슈만은 같은 시대의 리스트나 바그너처럼 기교주의나 화려한 외면을 꾸미는 방향에는 공감을 갖지 못했고, 오히려 바하나 베토벤, 슈베르트 등으로 이어 내려온 전통에 입각한 자기 나름의 방향에서 창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멘델스존을 높이 평가하고 브람스에게 호감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