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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청사기
    도자기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 시대마다 추구하는 미의 기준에 따라 변화되는 미감이 도자기에는 추상적으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쓰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게, 대량으로 만들어야 하는 속성 때문에 시대의 공통적인 아름다움이 실용적으로 디자인화 된다. 이렇게 당시의 조각이나 회화에서 보이는 특성들을 엿볼 수 있는 도자기들 중 조선시대의 양대 주류 가운데 하나인 분청사기에 대해 알아보았다.분청사기(粉靑沙器), 당시 왕조의 교체 과정으로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장인들의 미의식이 자유롭게 표출되어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다.분청사기라는 용어는 1930년대에 한국미술사 연구의 선각자이신 고유섭(1904~1944)선생이 표면이 백색을 띠며 유약을 바른 후 전체 색조가 회청색을 보인다 하여 새로 이름 지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이다. 이 말의 뜻은 ‘청자에 분(粉)을 발라 장식한 사기‘이며 본질적으로 분청사기는 청자라고 할 수 있다(조선시대에는 사기(沙器)와 자기(磁器)를 혼용하였다고 한다).고려 말, 고려청자(高麗靑瓷)의 전통을 바탕으로 등장한 분청사기는 조선 전기 200여 년 동안 만들어 지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기점으로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분청사기는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성립이라는 격변기에 고려청자의 잔영으로 존재하면서 신흥 왕조의 활기찬 시대상을 반영하여 청자(靑磁)나 백자(白磁)와는 전혀 다른 경지의 도자 세계를 이룩하였다. 조선 왕조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유교문화의 상징인 백자의 발전에 따라 분청사기는 쇠퇴와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차츰 왕실의 비호에 힘입은 백자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분청사기도 점점 백자화되어 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는데 특히 장식 기술이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개발, 사용되면서 참신하고 대담하며 질박하면서 역동적인 특유의 미학이 이루어진다.이런 분청사기의 변천시기를 좀 더 체계적으로 나누어 보면 4단계로 구분되는데 발생기, 발전기, 쇠퇴기, 소멸기로 나눌 수 있다.발생기( 관아, 일반민들도 사용했던 민족자기라고 볼 수 있다.제2기 발생기는 1390년부터 1420년으로 고려청자 상감무늬의 퇴화된 여운과 그 변모를 느낄 수 있다. 분청사기의 인화기법이 발생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연당초문이 변형, 변모하는 동안 인화기법이 대접의 중심문양으로 등장하였다.전기(발생기)의 양상을 보이는 가마터가 전국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고려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의 문란과 관요로서의 고려자기 요업이 이미 그 정형을 잃었음을 의미한다.14세기 요업이 전국으로 확산된 이유로 공양왕3년(1391)에 금속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자기와 목기를 사용하여 습속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초에는 분청사기 이미 실용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전국 확산에 따른 제품의 저질화로 세종3년에는 공비(工費)에서 그릇 밑에 장명(匠名)을 써넣도록 하는 진언을 하고 있다. 이후 1420년경부터는 질이 향상되는 것을 볼 수 있다.-1-발전기(중기)는 1420년경부터 1480년경으로 발생기와 같이 제1,2기로 나눌 수 있다.제1기는 발전기로 1420년부터 1450년. 선상감, 면상감, 인화, 박지, 조화기법 등 다양한 기법이 발전하였으며 분청사기의 특질이 뚜렷해 졌다. 태토가 밝아지고 유약이 투명해져 안정감을 보이며 맑고 투명한 그릇을 만든다. 이 시기의 상감분청사기의 경우 전성기의 고려청자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한편으로는, 명(明)왕실에 보낼 정도의 수준급의 백자를 생산해냈는데 이는 인화기법이 그릇전면을 메꿔 백자같이 화려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하기도 하였다.제2기는 성숙기로 1450년부터 1480년으로 인화기법이 대접무늬의 구도 완성 및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1470년 전후하여 상감기법에서 탈피하여 도화서의 전문화가가 붓으로 무늬를 그린 청화, 청화백자가 제작되면서부터 지방의 분청사기 요업은 그 빛을 잃고 광주분원의 영향을 받아 지역적 특색을 보이는 계룡 산록의 청화분청사기로 나타났으리라고 보고 있다.쇠퇴기(후기)는 1480년경부터 1540년경으로 귀象嵌粉靑沙器), 인화분청사기(印畵粉靑沙器), 박지분청사기(剝地粉靑沙器), 조화분청사기(彫花粉靑沙器), 철화분청사기(鐵畵粉靑沙器), 귀얄분청사기, 덤벙분청사기 이렇게 일곱 종류로 나눌 수 있다.상감분청사기(象嵌粉靑沙器)는 고려의 독창적인 기술인 상감기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써, 문양의 음각선에 백토와 자토를 메워넣고 유약을 발라서 구워낸 분청사기이다. 14세기 연당초문을 비롯하여 운학문의 퇴화형, 퇴화된 포류수금문 같은 무늬가 새겨진 그릇들이 15세기 초기이며 조선적인 초화문, 당초문과 같은 활달한 무늬들이 1420년대 이후 상감 분청사기무늬의 내용이다. 상감기법에는 면상감과 선상감이 있는데 분청사기는 문양이 백색 위주로 되어 있는 면상감에서 특징을 보이며 박지기법으로 발전해 갔다고 볼 수 있다.옆의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분청사기상감쌍어 문매병(粉靑沙器象嵌雙魚文梅甁)으로 높이는29.7Cm, 입지 름 4.8Cm, 몸통지름 17Cm이다.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기형(器形)과 문양이 조선식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매병으로,어깨의 곡선에는 아직 고려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다.입을 잘못 수리하여 고려 성기(盛期)의 매병 입과 큰차이가 없게 되었다. 기면(器面)을 5단을 나누고, 몸체에 주문양을 배치하고 어깨와 허리 아래에는 그 부위에 맞는 종속문을 배치하였다. 어깨 위쪽에는 변형된 연판문(蓮瓣文) 띠를 돌렸고 그 바로 아래에 당초무늬 띠가 있다. 주문 양대인 몸체의 4면에는 백상감한-2-연주문(連珠文)으로 둘레를 장식한 두 겹 원을 그리고 그 안에 흑상감 파도 무늬를 배경으로 물고기 두 마리씩을 상감했으며 원 바깥에는 우점문(雨點文)을 바닥에 깔고 학 네 마리를 상감했다. 허리에는 좁은 구획 안에 초화문(草花文)을 넣었고 아랫도리에는 연판문(蓮瓣文) 띠를 장식하였다. 이 매병의 복잡한 문양 구성은 기형과 더불어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반영한다. 유약은 옅은 푸른 빛을 띤 청자유에 가까운 분청유(粉靑釉)인데 부분적으로 산화된 곳이 다를 뿐이지 백토를 감입한다는 의미에서 인화기법은 넓은 의미로는 상감의 법주에 넣을 수 있다. 15세기 초반에는 큼직한 단독 문양이 뚜렷하게 시문되었으나 점차 문양이 작아지고 지면을 빽빽이 채우는 쪽으로 발전하며, 15세기 중엽 경에 최고의 수준을 보인다. 푸른색이 약간 나는 유약을 씌워 정결하면서 신선한 기운이 넘친다. 왼쪽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명분청사기인화문마상배(銘粉靑沙器印花文馬上杯)이다. 외반된 구연과 유연한 기선(器 線)을 갖춘 잔에 높은 굽이 달린 마상배(馬上杯)는 중국 원시대에 백자로 많이 만들어지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후기의 청자나 조선시대 전기의 분청사기와 백자에 그 예가 많은 기형 이다. 이 마상배는 내외 구연하에 당초문대가 있으며, 여타의 여백은 인화로 채웠다. 내저 중앙에는 '삼가(三加)'명이 있으 며, 외측면 세 곳에는 '인(仁)' '수(壽)' '부(府)'가 각각 원문(圓文)안에 백상감되어 있다.『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나오는 기록을 참고하면 '삼가' 는 경상남도의 '삼가(三嘉)'라는 지명(地名)으로 추정된다. 옅은 회청색 의 유약이 전면에 입혀졌는데 유약은 잘 녹아 광택이 있으며 빙렬(氷裂)도있다. 밖으로 벌어진 굽은 따로 만들어 붙였으며 접지면(接地面)의 유약을 닦아내고 내화토(耐火土)를 받쳐서 구웠다.박지분청사기(剝地粉靑沙器)는 회색의 태토로 된 그릇 표면에 백토를 바르고 문양을 그린 다음 문양 이외 여백의 백토를 모두 다시 긁어내어 문양은 백토색이 되고 여백은 회색의 태토색으로 나타나 대비를 이루는 분청사기이다. 이와 조화기법은 중국의 자주요(磁州窯)에서도 유행한기법이나 우리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듯하며, 면상감에서 자체 발전되어 이루어졌다고 본다. 박지기법은 주로 호남지방에서 특색을 띠며, 무늬에는 모란, 연화, 물고기, 잎 등의 소재가 많으며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필치 때문에 독특한 현대 감각을 준다.조화분청사기(彫花粉靑沙器)는 백토분장 후에 원하는 무늬를 음각으로 긁어 무늬를 새기기 때문에 회화적인각지게 마무리되었고 굽은 안정감 있으며 굽과 몸체가 붙은 부분을 둥글게 파서 돌렸다. 입 부분과 굽, 몸체의 아랫도리를 제외한 전체에 귀얄로 백토를 바른 후 목과 윗몸체에 각각 두 줄씩을 돌리고 윗몸체에 그어진 두 선으로부 터 뻗어나오듯 아래위로 파초문(芭蕉文)을 넣었다. 몸체 아랫도 리의 백토 분장(粉粧)이 끝나는 부분에도 음각선을 한 줄 돌려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다.철화분청사기(鐵畵粉靑沙器)는 얇게 유약을 발라 백토분장 위에 철분의 안료(顔料)로서붓으로 그림을 그린 종류이다. 이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공주 계룡 산록에서 발전하였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경기도 광주의 청화백자의 영향으로 판단되며, 광주의 청화백자는 전문 화원이 무늬를 그린 것인데 비하여 계룡산 분청사기의 그림은 비 전문가의 그림이므로 천진난만한 필치가 나타나 있다.왼쪽사진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는 분청사기철화당초문호(粉靑沙器鐵畵唐草文壺)의 사진이다.이 항아리는 15세기부터 줄곧 만들어져 온 기형(器形)이지만 대체로 입이 크고 몸체가 둥글게풍만해졌으며 굽은 낮고 작아졌다. 대접을 엎어놓은 듯한 뚜껑이 갖추어져 있다. 전면에 귀얄로 백토를 발랐고 뚜껑 입 부분에 두 줄, 몸체 위아래에 각각 한 줄씩 백토를 긁어 선을 그었으며 뚜껑과 윗몸체에 초화문(草花文)을, 몸체 중간에 변형된 당초 무늬를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것을 볼 수 있다. 다양하고 자유자재로 변형된 무늬를 소탈하고 거칠것없는 필치로 그렸고 매우 거친 태토가 군데군데 드러나 보이며 귀얄로 백토를 바를 때 생겨난 표면의 결이 함께 어울려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얇고 투명한 유약이 씌워져 중기의 특성을 띄고 있다. 철화 분청사기 가마는 충청남도의 공주 대덕 지역인 계룡산 기슭에 흩어져 있었다.귀얄분청사기는 돼지털 또는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 만든 귀얄이라는 도구에 백토를 뭍혀 그릇 표면에 칠한 분청사기이다. 붓 자국의 생동감이 생생하며 분청사기 변천 과정에서 대체로 후기에 많이 보이고 있다.덤벙분청사기는 백토를 탄으나
    예체능| 2006.11.24| 7페이지| 1,000원| 조회(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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