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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원형의 디지털 콘텐츠화에 대한 견해
    문화 원형의 디지털 콘텐츠화에 대한 견해현재 우리나라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우리 문화 원형의 디지털 콘텐츠화 사업이 활발히 진행중이다. 이 사업은 2002년부터 추진해오고 있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다양한 분야의 우리 문화 원형을 디지털 콘텐츠화하여 문화콘텐츠산업의 소재로 제공하고 이를 토대로 문화콘텐츠 창작의 활성화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이 사업은 산업적 측면에서의 경제적 효과를 노리는 본래의 목적 달성뿐만 아니라 전통에 대해 은연중에 깔려있는 많은 이들의 부정적인 인식에 대한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 아닐 수 없다. 지난 날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 시절 주입된 식민사관과 더불어 해방 이후 우리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오늘날까지도 문화적으로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통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모습들이 내재되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역사와 함께 현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전통에 대한 그릇된 태도는 조속히 해결해야할 우리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었는데, 최근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기술과 정보 통신망 등 IT 산업 전반에 걸친 훌륭한 인프라를 보유하게 되면서 이를 통해 문화콘텐츠산업의 발전을 추구함과 동시에 전통에 대한 많은 이들의 그릇된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이러한 동기로 추진된 문화 원형의 디지털콘텐츠화 사업의 모습들은 매우 긍정적이다.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디지털콘텐츠의 기술력을 통해 ‘재미’라는 요소를 도입할 수 있게 되면서 역사와 전통에 무관심한 다수의 일반 대중들까지 아우르며 게임,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각종 디지털콘텐츠들은 창작의 활성화를 지원하고 문화 산업의 경제적 부를 창출하고자 하는 이 사업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해가고 있다.하지만 문화 원형의 디지털콘텐츠화 사업에 이러한 긍정적인 모습들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창작의 과정에서 역사와 전통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완벽한 고증을 통해 전달하지 않고, 보다 나은 ‘재미’의 추구를 위해 일정 정도의 왜곡이 발생되는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이는 역사와 전통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반 대중들이 왜곡된 모습들을 접할 때 역사와 전통의 본래의 모습을 망각한 채 왜곡된 모습들을 ‘사실’로써 인식하게 된다는 데에서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대중들이 문화콘텐츠들을 접할 때 서비스되는 문화콘텐츠들이 왜곡된 것인지, 사실 그대로의 모습인지 구분해 낼 수 있을만한 수준의 역사적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왜곡되는 부분들을 완전 통제하여 ‘재미’라는 요소를 포기한 채 문화콘텐츠를 대중들에게 보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변의 확대를 통해 일반 대중들의 전통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근본적인 사업의 목적을 망각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2008.02.07| 2페이지| 1,900원| 조회(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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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연 이승만에게 국부의 자격이 있는가?
    서론일반적으로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성립된 근대 민족국가들의 사회형성과정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다. 이는 각 나라들이 제각기 다른 역사와 환경을 통해 독자적인 사회 변화를 추구하며 그 과정에 있어서의 전형적인 틀을 허락하지 않은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한국은 서구와 같은 자본주의 발달과 민족 국가 수립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일본에 의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폭압적 지배와 수탈을 동반한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강점은 우리의 반만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단절을 가져오고 말았다.이렇듯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국가와 민족이 처한 심각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많은 이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바로 이 시기에 무장투쟁과 외교력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힘쓴 공로로, 해방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기억되고 추앙 받았던 대표적인 인사들로 꼽을 수 있다.그러나 해방 이후와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던 당시의 이승만의 행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연 그를 일컬어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는지, 그 부분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져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사람에 대해 내려진 일단의 평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의 피력과 함께, 이승만이란 인물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을 지적해보고자 한다.본론해방을 맞이한 사람들은 남녀와 유?무식을 가릴 것 없이 두 가지의 공통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첫째는 공평하게 사는 새 나라가 세워질 것이요, 둘째는 모든 친일세력에 대한 응분의 응징이었다. 1945년 12월 27일 미국?영국?소련이 결정한 5개년 신탁통치 실시가 발표되자마자 즉각 전국적으로 반탁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것은 첫 번째 기대가 무너지는 데 대한 민족적 자각의지의 표현이었음과 동시에, 또 다른 외세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민족적 결의가 응집된 외세배격 항거였다. 일본에게 억눌린 36년 간의 암흑의 세월에서 벗어난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람들 앞에 새롭게 다가온 5년 간의 신탁통치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간판만 뒤바뀐 또 다른 식민체제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김구와 이승만, 두 사람의 차이는 신탁통치 반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김구의 반탁은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이승만의 반탁은 자신의 집권을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려 한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의 소산이었다. 김구는 역사적 대의명분의 길을 택했고, 이승만은 반역사적 소아이익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집단의 속내를 읽어 내지 못한 채 외세배격으로서의 반탁에만 열을 올린 대중들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다리놓기를 시도한 이승만이 사욕(집권욕)을 채우는데 결과적으로 큰 힘을 실어주고 만다.반탁의 동기가 어찌됐든 좌익진영의 찬탁과 우익진영의 반탁이 엇갈리는 소란 속에서 이승만 중심의 남한정부 단독수립 소식이 싱가포르 통신을 통해 들어온 것이 46년 4월이었다. 이윽고 이승만은 마침내 6월 3일에 남조선만이라도 즉시 자율적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그 유명한 정읍 발언 을 하기에 이른다. 김구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발언은 곧 민족분단의 획책이었다. 같은 민족이 서로 상대되는 이념을 내세워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민족분단을 야기시킨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김구와 이승만은 서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이와 같은 통일론의 갈등은 김구와 김규식 중심의 민족적 낭만주의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파의 현실주의와의 대립이었다. 이같은 갈등 속에서 김구가공산주의자나 여하한 주의자를 막론하고 외곽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도덕을 가진 한민족이지 이민족이 아니므로... 동족과 친히 좌석을 같이하여 여하한 외부의 음모와 모략이라도 이것을 분쇄하고 우리의 활로를 찾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라며 미?소 양군의 철수와 남북지도자간의 협상에 의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게 되었을 때, 이승만 중심의 단정수립파는남북회담 문제는 세계에서 소련의 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시간연장으로 공산화시키자는 계획으로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 지도자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회담을 지금도 주장한다면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 이라며 김구 등의 남북협상론을 도의적 관념론으로 비판했다.이에 대항해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민족사적 입장에서의 정도(正道)를 제시함과 함께 이승만과는 상반되는 권력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김구와 이승만의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는 임정 초기서부터 이미 나타났다. 김구는 임정의 경무국장으로 출발해서 노동국총판, 내무총장을 거쳐 국무령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다시 국무위원이 되었다가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인물이 임정 청사의 문 파수 를 자청했는데 반해, 이승만은 자질 시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아닐 경우 임정에의 참여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그가 수반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다. 이는 미국의 고문 정치를 상정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mandate)를 청원하는 이승만의 태도 때문이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로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이 선발되었을 때, 워싱턴 국무성에서 이들의 출국을 불허한다. 이들을 한인 대표로 인정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승만은 느닷없이 한국위임통치 청원서를 발송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의열투쟁이나 의병전쟁은 부질없는 짓이었고 불평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혈기지용을 억누르고... 내로는 교육과 교화에 힘쓰고 외로는 서양인에게 우리의 뜻을 널리 알려 동정을 얻는 것 이 우리가 할 일의 전부라는 것이었다. 이에 신채호는 김원봉, 이극로, 장건삼 등 54명 연서의 성토문을 발표해 조선이 미국 식민지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식의 요구라고 단언하였다. 요컨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마저 팔아 먹으려 한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외교를 통한 독립획득이라는 외교론 쪽이 우세하여 이승만이 임정의 수반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미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감안한 조처였다. 이에 분개한 신채호 선생은 임정과 관계를 끊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등을 돌리고 만다.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미국에서 상해 임정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얼마 머물지도 않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 미국 교포들이 모금해준 독립자금을 이승만이 유용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는 가운데, 조선 민족의 이름으로 미국 정부에 낸 위임통치 청원서 문제가 계속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탄핵재판소가 개정되었고, 이승만은 대통령직 파면 선고를 받았다. 당시 탄핵 심판서의 내용을 보면 상해의 임정에서 근무하지 않고 무풍지대인 미국에만 앉아 있는 근무태만과, 대통령에 피선된지 7년 임에도 임시대통령의 선서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행정을 집정하지 않았고 각원들과 볼목하여 정책을 세워보지 않았다. 또한 대미 외교사업을 목적하고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가지고 국무원과 충돌하였고, 아무 때나 자의로 법령을 발포하여서 질서를 혼란하게 하였으며, 정부의 처사가 자기 의사에 맞지 않으면 동지자들을 선동하여 정부에 반항하였고, 미국의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재미 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들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단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제출하지 않아 재정 범포가 어느 정도까지 달하였는지 알지 못하게 하였다는 등의 탄핵 사유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그런 이승만이 해방과 함께 미국의 힘에 얹혀 민족의 영웅이 되어 귀국해서는 민중 앞에 군림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대한 공방이 치열해졌을 때 이승만은 임정의 법통을 부인하는 공개연설을 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는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정통성을 앞세웠다. 또한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은 본인의 친미성향을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드러내기 위한 자리였다. 이승만은 국회, 정부 수립에 대해 감사할 대상을 열거했다. 첫째는 하나님 , 둘째는 미국, 셋째가 국민이었다. 평생을 한국의 조지 워싱턴 을 꿈꿔왔던 그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에 터져나온 감사의 변은 의례적인 것일 수 없었다.이승만에게 기독교는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실력집단이었다. 그는 지정지미한 정치법도와 인애자비한 도덕교화의 근본이 되는 기독교라는 인식에 근거해 근대 서구의 문명부강의 근원이 기독교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승만에게 문명부강의 서구 근대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은 그에게 인간의 극락국 이었으며 남의 권리를 빼앗지도 않을 뿐더러 남의 권리를 보호하여 주기를 의리로 아는 나라였다. 그 근거는 미국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나라이자 크고 광대한 나라이기에 구태여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이승만의 허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해방초기에 건준을 대표하는 여운형, 임정을 대표하는 김구, 공산당의 박헌영은 해방이 되자마자 김구는 중국 중경에서, 여운형과 박헌영은 각각 서울에서 건국강령이라든가 또 다른 이름으로 정치설계를 공개했다. 그런데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판단으로 작성한 그것들이 기막힌 일치점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세 사람 모두 토지개혁 단행과 친일파나 민족반역자 처단을 내세운 것이 그것이다. 그것도 각각 열 가지 정도씩 되는 항목 중에서 그 두 가지를 맨 앞으로 내세워 첫 번째, 두 번째 항목으로 자리잡은 것과 그것을 실행하려는 방법까지 일치한다. 무상몰수?무상분배로 하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은 엄중처단하여 일체의 정치참여를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세 사람이 보인 일치점은 현실을 직시한 필연의 결과였다. 그런데 그런 필연의 결과를 무시한 채 확실하고 분명한 정치태도를 표명하지 않은 무정견한 약삭빠른 기회주의자가 미군정과 한민당에 이중으로 업혀 결국 정권을 탈취했다. 이런 인물이 바로 이승만인 것이다. 해방 삼년만에 그가 했던 토지개혁이라는 것도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형태를 취해 친일지주들의 배를 더욱 불려주었으며, 그런 친일파들을 처단하는데 있어서도 반공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감싸주기에 급급했다.
    사회과학| 2008.02.07| 4페이지| 1,900원| 조회(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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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이열전을 읽고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백이(伯夷)열전을 통해 ‘천도(天道)’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성인들을 통해 검증된 의인(義人)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과 불의를 대표하는 도척(盜蹠)과 같은 자의 삶의 모습의 비교를 통해 ‘천도는 공평 무사하며 항상 선인의 편이다.’라는 믿음이 적용되지 않는 모순된 세상의 이치를 개탄하며 ‘천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단지 ‘천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함께 밝은 존재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동도자(同道者)’가 될 것에 대한 주문을 통해 올바른 삶의 방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하지만 본인은 ‘천도’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천도’라는 개념에 대해 너무나도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 탓에 발생하는 오류라고 보여진다. ‘천도’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오늘날 많은 이들이 부르짖는 ‘정의(正義)’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그러자면 사마천이 던진 의문과 직결되는 백이와 숙제(叔齊)의 삶에 대해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들은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아들로써 부친 사후 부친의 유언과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왕위 계승의 전통이 상충되는 상황에서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나라를 버리고 타국의 백성이 되는 길을 택했다. 실제 역사 속에선 큰 문제없이 둘째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아 국가를 다스려 나갔지만, 만약 왕위 계승 과정에서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발생하여 자칫 온 백성이 휘말린 내전이 발발했을 경우 그 과정에서 죄 없이 죽어나간 백성들 입장에서도 백이와 숙제를 일컬어 의인(義人)이라 할 수 있었을까?또한 폭정을 일삼으며 민심을 저버린 은나라를 치려는 주나라 무왕을 가로막은 일 역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주나라 무왕이 백이와 숙제의 말을 듣고 폭군에 의해 핍박받는 많은 백성들을 저버린 채 인(仁)과 효(孝)라는 개념에만 얽매여 은을 정벌하지 않았다면, 당시의 어지러운 상황 하에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희생이 뒤따랐겠는가?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굳은 의지와 절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백이와 숙제의 이러한 태도는 현실을 망각하고 자신들만의 신념을 ‘정의’라 내세우며 시대의 변화를 거스르고자한 무지몽매한 행동일 뿐이다. 작은 것에 얽매여 보다 큰 것을 보지 못한 비좁은 소견이 낳은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우리 역사의 조선조 수구 꼴통 유학자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이래도 과연 백이와 숙제에게 ‘천도’를 걸었던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지, 성인의 입을 빌려 세상에 알려졌다 하더라도 ‘의인’이란 칭호를 붙일 수 있을지, 분명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회과학| 2008.02.07| 1페이지| 2,400원| 조회(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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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종조 북벌의 진실
    서론1649년 5월, 두 번의 전란을 야기하고 아들, 며느리, 손자를 죽이는 등의 숱한 정치적 과오를 범하며 군주로서의 자질 부족을 여실히 보여줬던 인조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 뒤 요절한 소현세자와 세손인 11세의 소현세자의 아들을 대신해 부왕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된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조선 제 17대 국왕 효종으로 즉위한다. 문(文)의 나라이자 사대부의 나라인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군사력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숭무주의(崇武主義)를 숭상하며 지향했던 군주가 등장한 것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영웅호걸을 찾아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그 계획은 부왕 즉위 시에 조선이 당했던 국가적인 치욕을 씻어내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강력한 왕권의 확립과 더불어 차남으로써 갖고 있는 가계 계승에서의 약점을 극복하여 자신이 왕통을 이은 사실에 대해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목적 때문이었다. 이렇듯 다양한 목적들을 일거에 이루고자하는 과정에서 설계되고 추진된 대외정책이 바로 북벌(北伐)인 것이다.숭무주의자 효종 주도의 북벌추진효종은 자나깨나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 않았고, 청에서 보낸 인질생활을 왕가의 치욕으로 여겼다. 때문에 힘이 없어 보냈던 8년간의 심양에서의 볼모생활을 통해 국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문(文)보다 무(武)를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에서 보낸 8년 동안 만주의 심양과 요동의 지형 지물, 북경의 형세와 청군의 편제, 조련 수준도 등을 누구보다 세밀히 관찰했다고 실토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효종의 북벌정책은 무력을 통한 정벌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이에 따라 사실상의 북벌계획은 군비확충이었다. 군비강화를 통한 북벌계획은 1652년(효종 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나, 실은 효종 즉위 초부터 왜군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청의 감시를 피해 성을 수축하고 군사와 무기를 정비하는 등 이미 비교적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효종 즉위 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청의 특별 칙사 6명이 파견되며 북벌계획이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때 영의정 이경석이 나서 모든 책임을 덮어쓰며 조선과 효종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었고, 이 경인의 변 이후 김자점을 첩자로 지목한 효종이 그를 삭탈관직하여 유배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친청세력의 제거가 이루어져 이후 효종은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에 전력할 수 있게 된다.① 중앙군과 지방군의 개편효종은 먼저 수도권 중심의 중앙군을 증강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우선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개편하여 군사를 증강하였다. 어영청 군의 정원은 7천여 명이었는데 2만 1천명으로 늘리고, 훈련도감 군의 정원 5천여 명을 두 배로 늘리는 계획도 추진하였다. 어영청 군사에게는 군보(軍保)를 지정해 생활비를 지원하게 하였고, 훈련도감 군에게는 다달이 봉급을 지급하였다. 군사는 시험을 통해 선발했으며, 정기적인 시험에서 성적이 불량하면 처벌을 받았다. 어영군의 증강 후 왕의 친위병인 금군의 군사력을 육성하였는데 이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 당시 금군의 수는 600명이었으나 효종은 이들 전원을 기마부대로 만들어 전투력을 증진시키고자 하였다. 기마부대는 산지가 많은 조선에서는 큰 효용성이 없지만 자신의 친정 시에 만주의 드넓은 벌판에서 그 쓰임새가 많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 큰 재정적 부담에도 불구, 1천명 규모로의 인원 확충과 훈련장을 마련하는 등 금군의 증강을 강력히 추진하였다.한편, 효종은 지방의 군사정비도 소홀하지 않았다. 지방군은 영장제도(營將制度)와 노비추쇄제도(奴婢推刷制度)를 통하여 정비했는데, 중앙군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효종은 10만의 정예군만 있으면 북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지만 두 차례의 전란으로 황폐화된 조선에서 1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도, 그만한 인력을 충당하기도 어려웠다. 이에 각 관청 노비대장에 등록된 19만여 명의 노비 중 실제 납공(納貢)하는 노비 2만 7천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16만여 명을 군사로 충당하려 한 것이었다. 실제로 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을는 사형에 처하겠다며 노비추쇄제도의 시행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지만, 당시는 이미 신분제가 해체되어 가는 시기라 누락 노비의 상당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러한 정책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② 무기 체계의 개편군제의 개편과 함께 효종은 무기 체계의 개편에도 힘을 기울인다. 기존의 무기 체계를 총포 위주로 개편하였는데 총포 제작에 필요한 목재와 화약의 보급, 제조 장인에게 지급되는 급료 등 소요되는 엄청난 경비를 감당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는 한편, 세금의 종목도 늘려 군수 경비를 마련하고자 했다. 총포 제작의 책임은 주로 박연을 비롯한 귀화 네덜란드인들이 담당했다. 이들은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군사들에게 전술과 총 제조법을 가르쳤다. 이들에 의해 제조된 신식 무기인 자모포(일명 불랑기포) 등의 화력은 제 1, 2차 나선 정벌에서 위력이 여실히 입증되어 무기 체계의 개편이 성공적인 투자였음을 실전에서 증명하며, 동시에 청나라 진영의 허실을 파악하고 그들의 무기 체계를 관찰하며 그간 훈련시켜온 조선군의 전술적 능력을 시험하려는 조선 측의 숨은 의도 또한 충족시켜 북벌의 전초 단계에서 자신감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다.③ 관무재?열병식 거행관무재(觀武才)란 조선시대 무과 시험의 하나로서 임금이 친히 열병(閱兵)한 뒤에 치르는 시험을 말한다. 효종은 조선의 문약해진 군사체제를 강하게 비판하며 일개 서생들이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가장 큰 폐단으로 꼽았다. 따라서 관무재를 적극 활용한 것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함과 동시에 무사들의 기량 시험과 군사훈련을 통한 새로운 인재 선발의 목적을 띄고 있었다. 효종은 관무재의 합격자들을 지방 수령으로 제수하여 문신 일색인 지방수령을 무신으로 바꾸어 임전체제를 공고히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문신들의 반대로 지방수령을 상으로 내리고자 하는 뜻은 이루지 못한다. 관무재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문신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관무재를 매년 실시하였고, 다각도에 걸친 노력을 바탕으로 갖춰진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자 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론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효종이 기르고자 했던 정예병 10만은 보병이 아니라 포병(砲兵)이었다. 게다가 조선 포병의 우수성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나선 정벌에서 청군을 압도하며 입증된 바 있다. 더구나 청나라는 겉으로는 견고해 보여도 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지배층은 만주족이지만 중하위 관료를 비롯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한족이었다. 1/170에 불과한 만주족은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중화사상을 지닌 피지배층 한족이 만주족에 대해 민족감정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조선이 북벌을 감행했을 때 각지에서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저항이 일어나고 또한, 요동지역에 포로에 잡혀있는 많은 조선군과 백성들이 합세하면 보다 수월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효종의 계산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대륙 제패 후 군사적인 면에 소홀했던 청의 정책은 1674년(현종 15년)에 한족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남방 지역이 큰 혼란에 빠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때 유생들이 북벌의 상소를 올렸을 정도로 조선군이 힘만 갖추고 있다면 북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북벌계획의 위기이처럼 정력적으로 추진해온 효종의 북벌계획은 민심의 이반과 더불어 전면적 위기를 맞게 된다. 효종은 즉위 초 자신의 북벌론을 함께 추진할 세력으로 반청산림(김집, 송시열, 송준길)을 지목하였으나 북벌정책 추진 과정에서 소중화 사상에 입각한 북벌론을 제창하는 그들과의 방법의 차이로 인해 산림세력이 정계에서 잠시 물러난 틈을 타 자신의 뜻에 부합되는 인물들로 북벌진영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박서, 원두표, 이완 등이 중용되어 효종의 북벌계획의 실행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하지만 무신에 대한 차별을 타파하고 그들을 중용하여 임전체제를 갖추고자 했던 효종의 의도는 오랜 기간 문치주의적인 정치구조의 틀 속에 갇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사대부의 나라를 지향해온 조선에서 집권세력인 문신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신들의 위에 올라서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사대부들의 의심과 더불어 효종이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에 많은 재정적 부담에도 강행했던 군제?무기 체계의 개편과 부역이, 잦은 흉년과 지방관들의 가렴주구로 근근이 살아가던 지방 농민들에게 크나큰 타격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해 민심마저 효종에게 등을 돌리기에 이른다.이는 반드시 효종 자신의 당대에 북벌의 꿈을 이루고자한 조급함에서 추진한 정책의 부작용이었으나 효종은 안타깝게도 민심 이반의 향배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오히려 문신들에게 북벌반대의 구실만을 제공해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각종 재앙이 거듭되어 민심이 더욱 흉흉해지자 결국 효종은 자신이 주도하는 북벌의 추진에 한계를 느끼고, 방법은 다를지라도 북벌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자 산림세력들에 대한 양보를 결심하게 된다.스러져간 북벌의 꿈효종은 본래 자신의 군비확장에 비판적인 산림세력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자신이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만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산림세력을 불렀다. 효종이 산림들을 다시금 부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간의 재위기간 동안 이들 사대부의 지지를 받지 않고는 북벌이고 내정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이들의 영수인 송시열과의 관계가 향후 북벌추진의 관건이었고, 때문에 강력한 성격의 효종이 굴욕을 감수하고 산림에게 군사권과 인사권을 내어준 이유는 자명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송시열은 소중화 사상의 신봉자이자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자로써 그가 제창하는 북벌의 목적은 명을 다시 섬기고 청과의 국교를 단절하는 것에 있었다. 효종의 현실적인 북벌과는 상반되는 명분적, 제한적 북벌론이었던 것이다. 효종의 절대적인 양보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자신들 산림의 이익을 위해 효종의 뜻을 받들길 거부한다. 이에 효종은 조선사회에서 금기시 되어있는 신하와의 독대를 통해서라도 송시열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북벌을 지속하고자 노력하지만 독대 후 불과 두 달만에 의문의 죽음으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한 많은 다.
    사회과학| 2008.02.07| 5페이지| 1,900원| 조회(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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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황제 암살사건
    음모와 책략의 한계 - 시황제 암살사건때는 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 말엽, 전국 7웅 연?조?제?위?한?초?진에 의해 유지되어 오던 중국의 기존 질서가 해체되어 가던 시기였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이러한 기존 질서의 붕괴는, 7웅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인 진나라의 왕 정(政)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 전토의 통일을 달성하여 자신의 손으로 새롭게 시대적 질서를 재편하고자 제후국에 대한 정복사업에 여념이 없었다. 제후국들의 땅을 조금씩 잠식해가던 진나라는 결국 삼진(三晉, 조?위?한)과 제, 초나라를 모두 병합하고 마지막 남은 연나라를 공략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진왕 정의 통일사업이 막바지에 다다른 이 즈음, 진과 맞서던 연나라의 태자 단(丹)은 어린 시절 진왕 정과 함께 조나라에서 인질생활을 하며 깊이 사귄 벗이었다. 우애 있게 지내던 두 친구는 정이 조나라와 진나라의 관계 악화로 조나라에서 도망치듯 떠나게 되면서 헤어졌다가, 단이 진나라에 인질로 가게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단의 예상과는 달리 진왕 정은 확연히 달라진 둘의 입장 차이를 거론하며 옛 친구에게 심한 모멸감을 안겨주었고, 이에 원한을 품은 단은 본국으로 도망쳐 정에 대한 보복을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단은 연나라로 돌아와 오만한 옛 친구에 복수할 방도를 생각하였으나, 나라가 약소하여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 품은 개인적 원한뿐만 아니라 국가가 처한 위기상황까지 타개해야 했던 연의 태자 단은 사부인 국무(鞠武)의 주선으로 연나라의 은사(隱士)로 이름난 전광(田光)선생을 만나 대책을 논의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전광 선생은 태자 단에게 형가(荊軻)를 소개하여 일을 도모할 것을 권하고, 형가를 찾아가 태자 단에 협력할 것을 주문한 뒤 기밀 유지를 위해 스스로 자결한다.진왕의 암살에 동의한 형가는 진왕에게 가까이 근접하기 위한 미끼로 진왕 정이 황금 1,000근과 만호의 식읍(食邑)을 내건 채 수배 중인 번어기(樊於期)의 목과 연나라 옥토인 독항(督亢)의 지도를 단에게 요구한다. 번어기는 본래 진나라의 장수로, 성품이 강직한 탓에 진왕과의 언쟁에서 굽히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다 진왕의 미움을 사 온 집안이 몰살당한 채 도망하여 연나라에 망명한 인물이었다. 형가는 단이 자신의 요구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자 직접 번어기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를 승낙하여 그 자리에서 자결한 번어기의 목을 취해 돌아오게 된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미끼 두 가지가 모두 마련되고, 여기에 더해 천하에서 가장 예리하다는 서부인(徐夫人)의 비수를 구입하며 암살을 위한 준비가 일단락 되게 된다.형가에겐 필요한 것은 이제 거사를 함께 할 믿음직한 동반자뿐이었다. 태자 단이 수소문 끝에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연나라의 이름난 용사를 추천하여 조수로 삼고자 했으나, 형가는 그를 애송이 취급하며 자신의 옛 벗인 노구천(魯句踐)과 함께 할 것을 고집했다. 노구천을 기다리며 오랜 기간 출발을 미뤄왔던 형가는, 진나라 장군 왕전(王?)이 이끄는 군대가 연나라 남쪽 경계까지 이르렀다는 보고를 접하고 다급해진 태자 단의 의심에 격분하여 진무양을 데리고 진나라로 떠나게 된다. 떠나는 형가를 배웅하는 일행이 자리한 역수(易水) 강변에서, 형가는 마음을 터놓고 어울리던 벗 고점리가 타는 축에 화답하여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하는 노래를 한 수 지어 부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나라로 떠난다.연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진나라에 도착한 형가는 천금이나 되는 예물을 진나라 왕의 총신(寵臣)인 몽가(蒙嘉)에게 내주었다. 미리 준비해온 미끼에 대한 진왕 정의 반응이 기대 이하일 경우,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낭패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이 공작이 효과가 있었는지 진왕 정은 형가 일행의 방문을 크게 기뻐하며 함양궁(咸陽宮)에서의 사신 일행 접견을 허락한다. 진왕의 암살을 실행할 조건이 비로소 갖춰지는 순간이었다.접견 당일, 형가는 번어기의 목이 든 함을 받들고, 진무양은 독항의 지도가 든 갑을 받들고 차례로 나아갔다. 허나 어전의 계단 밑에 이르러 진무양이 안색이 변하며 겁에 질려 있자, 이에 형가가 대신 나서 사죄하며 상황을 수습하여 진무양을 대신해 지도를 진왕에게 바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형가가 진왕의 명에 따라 계단을 올라 지도를 바치니, 진왕 자신이 직접 지도를 펼쳤다. 지도가 완전히 펼쳐지는 순간 지도 속에 숨겨놓은 비수가 드러났다. 비수가 드러남과 동시에 달려든 형가는 왼손으로 진나라 왕의 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쥔 채 진왕을 찔렀다. 그러나 진왕이 놀라 몸을 당겨 피하는 통에 비수가 몸에 닿지 못하고 소매만을 잘라냈다. 위급한 상황을 맞이한 진왕은 소지하고 있던 칼을 뽑아 반격하려 했으나 워낙 급박하게 일이 벌어진데다 칼이 너무 길어 뽑지를 못하고 형가의 추격을 피해 기둥 사이를 돌며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는 철통같은 법치국가였던 진나라에서 어전에서의 무기소지 금지와 왕의 부름이 있기 전엔 신하들은 어전에 오를 수 없다는 법이 있었기에 가능한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사회과학| 2008.02.07| 2페이지| 1,900원| 조회(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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