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미아(크림) 전쟁 (Crimean War, 1853~1856)I. 서론크림 전쟁은 1853~1856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사르데냐 연합군 사이에 크림 반도와 흑해를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이다. 농노제의 모순이 격화되고 지식인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고 있던 니콜라이치세의말기에, 러시아의 후진성을 여지없이 드러내주는 사건이 바로 크림 전쟁이다.II. 본론1. 크림전쟁의 배경나폴레옹 전쟁 이후 대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러시아는 부동의 항구인 서쪽바다와 동쪽바다를 차지하여 더 이상 진출할 곳이 없어지게 된다. 러시아의 야망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서쪽과 동쪽을 지나서 기울어가는 세력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향하게 된다.당시 터키의 영토였던 북사이프러스에는 그리스인과 터키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남하 정책의 일원으로 그리스가 가진 전략적 위치와 터키의 와해를 노리던 러시아는 북사이프러스의 상황을 이용하고자 그리스 독립운동을 돕게 된다. 당시 그리스 독립운동의 지원에 대한 러시아의 대외적 명분은 러시아 정교와 뿌리를 같이하는 그리스 정교를 지원하고자 함이었다. 이로서 러시아는 터키의 반감을 사게 된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1829년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조약으로그리스의독립을보장시켰고, 다뉴브 지역의 군사력을 증강시켰으며, 1833년의 **운키아르-스켈레시(Unkiar-Skelessi) 조약으로보스포러스와다아다넬즈해협을점령함으로써남하정책의토대를다져갔다.*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조약러시아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간섭하여 1828년 발칸에 군대를 보냈으나 터키군의 뜻밖의 저항에 고전하다가 1829년 8월 이스탄불 북서부의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을 점령하였으며, 9월 14일 이 도시에서 휴전조약을 맺었다.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흑해 해안의 캅카스(코카서스)와 도나우강 하구(河口)지방을 차지하였다. 그밖에도 터키황제의 종주권하에서 그리스가 사실상의 독립을 누릴 것과, 터키 영토 내의 몰다비아·왈라키아·세르비아가되었다. 이들 조약에 의해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에 있는 로마 가톨릭 시설에 대한 보호권과 팔레스타인에 있는 성지들의 감독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도 그리스정교에 관해 이와 유사한 특권(*쿠츠크 카이나르지 조약)을갖고있었다. 그리스정교의 신도 수가 계속 증가해 로마 가톨릭 교도의 수를 훨씬 능가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성지관할 문제도 그리스정교로 넘어가게 되었다. 사실상 그리스 정교로 넘어간 성지관할권을 나폴레옹 3세가 다시 되찾기 위해 1851년 5월 라 발레트(La Valette)를 콘스탄티노플에 특사로 파견해 터키 정부에 성지관할권을 요구했다. 1852년 12월에 터키정부는 프랑스의 모든 요구를 수락한다. 터키의 수락을 러시아로써는 묵과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그리스정교의 기득권 회복과 이에 관한 새로운 조약의 체결을 위해 1853년 2월 맨시코프(A.S.Menshikov)를 특사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3월 사이프러스 섬 동쪽에 있는 살라미스까지 해군을 출동시켰다. 러시아가 5월 말 다뉴브 공국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점령을 선언하자 영국의 지원을 받은 터키 정부는 10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해 크림전쟁이 시작되었다.2)러시아 정부문제 - 러시아의 남진정책의 소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러시아는 1840년대에 들어오면서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활동을 보면 1830년 이래로 오데사(Odessa)등의 흑해의 항구들을 통한 무역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보리수출은 1840년에 1832년에 비해 수출량이 2배 증가하였다. 1843년에는 페테르스부르크 소재 종교 아카데미에서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에 신부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오스만제국 내정에 대한 간섭이 자주 일어났다. 이와 같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정치, 경제, 종교적인 팽창의 결과로써 영국, 프랑스와 충돌하여 크림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3)영국 정부문제 - 영국이 중근동 지방의 경제적인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해석 또한 존재한다. 러교교회를건립할권리를갖게되었고이교회를위해러시아정부는터키정부에요구들을제출할권리를획득하였다(이 조항의 해석이 크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3. 크림전쟁의 경과전쟁 초기에 전세는 러시아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1월에는 러시아의 함대가 소아시아의 투르크 기지를 공격하여 초토화시켰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흑해로 진입했다. 1854년 2월 양국은 러시아에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서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반응이 없자 3월 영국과 프랑스군이 전쟁에 돌입했다. 영?불?투르크 연합군은 발칸 반도, 흑해 북부 연안, 카프카스 지방의 세 방면에서 러시아 군을 압박해 들어왔다.그때 니콜라이가 우방국이라고 믿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보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점령해 버렸다. 그리하여 발칸 반도에서는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에 완충지대가 형성됐다. 동쪽의 카프카스 지방은 산세가 워낙 험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이기에는 부적합했다. 자연히 전투는 바다에서 벌어지게 됐다. 영불 연합군은 곧 바다를 장악하고, 흑해는 물론, 발트 해, 백해, 베링 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러시아 해안에서 함대와 요새에 공격을 가해왔다. 러시아 해군의 목제 범선은 연합군의 증기선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해안의 러시아 요새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연합군은 마침내 결전장소로 크림 반도를 선택했다. 크림 반도의 남서해안에는 러시아 흑해함대의 사령부 세바스토폴요새가있었다.당시의 세바스토폴 전경1854년 9월 14일 프랑스, 영국, 오스만 투르크의 연합군 6만 명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크림 반도에 무사히 상륙했다. 연합군은 알마 지역에서 조우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이어 러시아 흑해 함대의 함대본부인 세바스토폴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세바스토폴은 오랜 세월 동안 군항이었기 때문에 도시 자체가 하나의 요새였다.연합군에 비해 전력의 열세를 스스로 인정한 러시아 해군은 세바스토폴 만에 자국의 함정을 침몰시켜 항구를 봉쇄하는 한편, 육상의 러시아군은 주민들을 독려해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가간의 요새 방어전에 들어갔다. 이격의 최선봉에 섰는데, 이들은 사다리와 목제 범을 휴대했다. 그들의 목적은 요새에 벽에다 발판을 설치해 아군이 요새 안으로 쉽게 침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외인부대 하사관 발리즈가 이끄는 대원들이 적의 빗발치는 탄환을 무릅쓰고 모든 난관을 물리치며 요새로 통하는 발판을 구축했을 대, 연합군의 주력 공격부대가 도착했다. 물밀 듯이 쳐들어간 연합군에 의해 그날 저녁 요새는 함락되고, 한밤중에 러시아군은 세바스토폴을 포기하고 철수했다.전선에서는 많은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50만을 넘긴 사망자들의 대다수가 전사자라기보다는 병사자였다. 전선마다 전염병이 돌아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갔고, 부상병들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나이팅게일과 자원 간호사들이 새로운 형태의 야전병원을 세워 헌신적으로 부상병을 치료한 것이 바로 이 크림 전쟁에서였다. 크림 전쟁의 내막은 몰라도 나이팅게일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렇게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시킨 크리미아 전쟁은 1856년 3월 30일, *파리조약의체결로종전을맞았다.경찰통치의 중심지주였던 러시아 군대는 허수아비임이 밝혀지고, 관료들의 무능력과 부패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후진적인 농노제와 비효율적인 관료체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서유럽과의 경쟁은 고사하고 러시아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농민폭동은 더욱 잦아지고 각계에서 개혁여론이 비등했다. 크림 전쟁의 패배는 주저주저하며 구체제에 안주하려던 러시아의 지배층에게까지 일대 각성을 촉구했다. 러시아는 패전의 계기로 근대화를 지향하는 운동이 일어나, 1861년의 농노해방을 비롯하여 일련의 개혁사업이 추진되었다.*파리강화회의 - 영국, 프랑스, 러시아, 터키, 사르디니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대표들로 구성된 파리강화회의(1856년 2월 26일~3월 30일)가 이루어졌다. 3월 30일 체결된 파리 강화조약에는 보 조약과 3개의 의정서(해협, 흑해 해군, 올란드 관계)등의 문서가 부속돼있다. 파리 회의에서 결정된 중요 사항르크 유역에서의 자유 운행을 허용치 않으려 했으나 열강의 반대로 부딪쳐 후퇴하였다. 그런데 다뉴브 강 문제를 관할할 국제위원회의 구성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 연안국들이 그들만의 위원회의 회원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모든 파리 회의 참가국으로 다뉴브 강 유럽 위원회를 설치하되 이 위원회는 다만 다뉴브강의 흑해 입구 문제만을 관장하고 2년 후에는 해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해체된 이후에는 다뉴브 강의 연안국, 즉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뷔르템베르크 , 바바리아 등으로 상설적인 다뉴브 강 위원회를 설치해 모든 문제를 관장토록 하였다. 각국은 또한 다뉴브 강의 자유 운행이 보장됨에 따라서 다뉴브 강의 흑해 입구에 2척 이하의 경군함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터키가 이 함정의 해협통과를 인정토록 하였다.6)해협문제: 1841년 해협조약이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터키는 외교임무를 가진 경군함 그리고 다뉴브 강의 흑해 입구에 유지될 경군함의 통과를 인정토록 하였다.7)올란드의 비무장: 이 섬을 비무장 함으로써 영국은 언제나 이곳을 경유해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의 합의인 이 문서는 파리 조약의 부속의정서 중의 하나였다.8)터키의 영토보전과 독립의 보장: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은 파리 회의가 폐막된 이후 4월 15일 터키 관계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에서 3국은 파리 강화조약의 어떠한 위반도 전쟁원인을 구성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문제는 유럽 전체의 문제가 되었으며 따라서 러시아의 우월한 지위는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9)터키의 유럽 공법질서에의 편입: 유럽 열강과 오스만 제국의 접촉과 교섭이 수 백년 전부터 있어 온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파리 조약 제 7조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유럽 공법질서의 혜택을 받게 됐다고 규정되어 이슬람 국가가 정식으로 유럽 국제법의 주체가 되었다.10)해양법 관계: 파리 회의 참가국들은 4월 16일 다음과 같은 해양법 관계의 선언에 서명하였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