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언어의 지각과 이해인지심리학은 왜 언어에 주목하는가?인지심리학은 인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의 실체와 그 이용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의 지식 중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언어지식”이다.언어지식의 습득과 사용을 이해하는 것은, 지식 일반의 습득과 이용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지심리학의 한 분야이다.언어는 일종의 기호체계이다.기호와 대상의 관계는 임의적이며 불연속적이지만, 기호의 궁극적 목표는 의미의 전달에 있다. 기호는 그 수가 유한하지만, 연결규칙의 반복 적용에 의해서 무한한 언어 표현을 만들어 내는, 엄청난 생산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런 언어 표현을 통해서 인간은 시간적?공간적 한계를 초월하여 생각하고 소통할 수 있다.언어지식은 여러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음운, 형태, 어휘, 통사, 의미 등의 영역이 그것이다.언어에는 여러 종류의 단위들이 사용되는데, 이들은 위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음소-음절-단어-구-문장-담화언어심리학의 연구 영역은 크게 이해, 산출, 습득으로 나눌 수 있다. 이해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글말이나 입말로부터 산출자의 의사를 파악하는 과정이며, 산출은 자신의 의사를 글말이나 입말의 형태로 표현하는 과정이며, 습득은 이해와 산출에 필요한 언어지식을 체득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Chomsky는 언어능력과 언어수행을 구분하였다. 언어능력은 토박이말 사용자가 가지고 있는 언어지식과 언어적 직관을 가리킨다. 언어수행이란 실제로 의사전달이나 문제해결의 장면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지식의 사용을 다룬다.인지심리학은 일차적으로 언어수행을 대상으로 하지만, 언어능력에 대한 이해 또한 필요하다.인간의 인지능력은 수많은 단원/모듈 -전문화된 처리 장치-의 집합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언어의 산출과 이해도 다양한 모듈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1. 언어와 사고언어의 연구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언어라는 형식과 언어가 담는 내용 간의 복잡한 혹은 복합적인 관계에 있다.인지과정과 언어과정은 서로 독립적인 것일까?사고한다는 것은 혼자서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인지치료의 창시자인 Aaron T. Beck은 우리의 감정과 사고는 내적 언어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하였다.말과 글은 문화적인 테두리 안에서 습득되며, 필연적으로 문화적인 특성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언어,인지,문화라는 복잡한 삼각관계에 직면하게 된다.1)언어, 인지 그리고 문화지구상에는 6,912개의 서로 다른 발음, 철자, 문법체계가 있는 셈이다. 더구나 어떤 사물을 가리키기 위한 어휘 세분화의 정도도 매우 다르다. 또한 언어에 따라 문장의 구조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언어 간의 이러한 차이 - 음운과 철자의 차이, 특정 유형의 대상을 가리키는 어휘의 차이, 언어의 문법구조의 차이 -는 언어 사용자의 인지와 사고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2) 언어상대성 가설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사고에 결정적 차이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언어상대성가설이다. 이 가설은 Sapir와 Whorf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두 사람은 언어가 인간의 의지와 사고를 결정한다는 언어결정론과,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인간의 사고도 달라진다는 언어상대성 가설을 제안하게 된다. 즉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인간의 사고가 결정될 수도 있고 변화될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언어상대성 가설을 검증하는 연구들이 주목한 것은 언어에 따라서 색명의 개수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Sapir-Whorf의 가설에 따르면, 다니족의 색 표현 단어는 두 개뿐이기 때문에 그들이 색상에 대한 사고를 할 때에는 두 유형의 색상에 대한 사고만이 가능하다.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두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3) 언어가 지각과 기억과정에 미치는 영향언어와 인지 혹은 사고의 관계에 관한 언어상대성 가설은 색상 지각과 기억이 언어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히는 연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만약 언어가 색상의 지각을 결정한다면 색상 어휘가 풍부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빈약한 문화권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수행을 보여야 한다.Rosch의 연구는 이를 반박하였다.이는 색상 어휘의 세분화가 색상 지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색상 지각은 색상 어휘의 세분화 정도(즉, 언어특수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체계의 민감성(즉, 보편적인 인지과정)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Sapir-Whorf의 언어상대성 가설과는 일치하지 않는 결과이다.하지만 언어상대성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도 있다. Ellos는 자극으로 자연색을 사용하지 않고, 생소한 시각적 패턴을 사용하였다. 그는 생소한 시각적 자극에 임의적 명칭을 부여하였는데, 어떤 조건에서는 시각 자극 하나하나에 고유한 명칭을 부여하고(고유 명칭 조건), 다른 조건에서는 모든 자극들에 단 하나의 명칭만 부여하였다(통일 명칭 조건). 그리고 자극에 대해서 아무런 명칭도 부여하지 않은 조건도 있었다(통제 조건). 실험은 세 조건에서 시각 자극이 얼마나 잘 재인되는지를 비교하는 것이었다. 실험의 결과 고유 명칭 조건의 참가자가 통일 명칭 조건의 참가자에 비해서 시각 자극을 더 정확하게 재인하였다. 자극들을 서로 다른 명칭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서로 다른 자극들을 하나의 통일된 명칭으로 기억하는 경우에 비해서 재인이 잘 되었다. 즉, 자극 대상을 가리키는 어휘의 세분화가 기억에 영향을 미쳤다.특정한 범주를 가리키는 단어의 유무가 지각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언어상대성 가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Kay와 Kempton은 타라후마라 인디언 언어와 영어를 비교하였다. 실험의 결과 영어 사용자는 언어적 차원에 근거하여 반응하지만, 타라후마라 언어 사용자는 물리적 차원에 근거하여 반응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떤 범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지각 대상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다.또한 기억색이라는 현상도 언어가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 준다. 단어에서 연상되는 색깔은 그 단어와 함께 기억한 대상의 색깔에 영향을 미친다.이상에 소개한 연구 결과들은, 언어의 특성이 색상의 분류와 기억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즉, 언어 차이가 인지 과정에 영향을 끼친다는 언어상대성 가설을 부분적으로 지지한다.4) 언어특수성과 인지보편성앞에서 언어와 색체 지각의 관계, 그리고 언어와 기억의 관계를 살펴보았다.지각과 기억이 아니라 좀 더 고차원적인 사고와 언어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단어는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현상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단어 한 개로 불가능하고 여러 단어들을 나열하여야 하며, 여기에는 규칙이 있다. 단어들을 배열하는 규칙, 즉 통사규칙이 그것인데, 가장 기본적인 통사규칙 중 하나가 어순이다. 지구상에는 수천 개의 언어가 존재하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기본 어순은 네 가지에 불과하다. 지구상 언어 중 약 80%에서 주어는 문장의 처음에 위치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어떤 행위는 행위자에 의해서 시작되며, 피행위자에게 작용하게 된다. 행위자와 피행위자 간의 인과적 관계는 행위자가 선행하고 피행위자가 후행하는 시간적 순서로 변환가능하다. 따라서 어순을 정할 때에 행위자를 피행위자보다 앞에 두는 인지 혹은 사고의 원리에 맞추는 것이 유리할 것이고, 그 결과 대다수의 언어에서 주어가 문장의 처음에 오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어순에는 보편적인 인지특성이 반영되어 있다.앞서 논의했던 색명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작용한다. 색상의 명칭이나 수는 언어에 따라 다르지만, 색명을 사용하는 데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그리고 특정언어에서 보이는 단어의 많고 적음 혹은 단어의 분화 정도는 모두 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언어 발달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사고는 언어보다 먼저 나타난다. 언어의 특수성보다는 인지의 보편성이 앞선다. 하지만 인지 과정은 언어를 통해 더 정교해진다. 언어는 복잡한 세상 정보를 체계화하고 추상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세분화와 정형화는 대상이나 행위의 범주화, 논리적 추론, 판단, 의사 결정 등의 심적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과정에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특성이 반영된다.또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인지 혹은 사고 과정 중에는 언어와 무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모든 사고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Barsalou에 의하면, 언어는 사고의 내용이 아니라 사고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사고의 본질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사고의 효율성을 변화시킨다. 즉, 효율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그는 효율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개념이 중요한데, 개념의 형성에는 특정한 문화의 힘이 작용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문화가 개념의 형성과 개념의 언어화에 작용하고, 이것이 사고효율성의 바탕이 된다는 주장이다.언어는 성격-개인에게 특유한 사고 방식과 행동 방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까?영어를 사용할 때에는 영어 문화권의 보편적 성격에 가까워지고, 스페인어를 사용할 때에는 멕시코 문화의 보편적 성격에 가까워지는 것이 관찰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언어가 성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을 내리면 그것은 성급한 것이다. 적절한 해석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서 특정한 문화 스키마가 활성화되고, 문화 스키마에 따라서 사람들이 사고하고 행동했다고 보는 것일 것이다.
매스컴과 대중문화(지상파TV)Ⅰ) 서론Ⅰ. 방송의 개념방송에 대한 정의는 나라마다 또는 연구하는 학자마다 약간씩 표현을 달리하고 있다. 먼저 우리나라의 방송법 에서는 방송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방송’이라 함은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편성 또는 제작하여 이를 공중(개별 계약에 의한 수신자를 포함하며, 이하 ‘시청자’라 한다)에게 전기 통신 설비에 의하여 송신하는 것으로서 다음의 각목에 해당하는 것을 말한다.ㅡ 지상파 방송 : 방송을 목적으로 하는 지상의 무선국을 이용하여 행하는 방송즉, 방송이라 함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시사 등에 관한 보도, 논평 및 여론과 교양, 음악 오락 연예 등을 공중에게 전파함을 목적으로 방송국이 행하는 무선통신의 송신을 말한다. 방송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은 협송의 단계를 거쳐 개송의 단계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텔레비전이 점차 다채널 TV를 거쳐 미래에는 개인용 사이버 TV로 진화되리라는 예측과도 연관된다. 결국 방송의 개념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방송매체의 발달과 사회적 변화에 따라 그 영역과 개념이 변화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방송의 역사※▶한국 방송의 시대적 흐름역사 연구에서 필수적인 작업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 구분은 방송사 연구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다른 분야사의 시대 구분과 마찬가지로 과정인 역사를 시간적으로 절단할 수 있느냐는 것과 상호 의존적 현상을 하나의 독립된 현상으로 떼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 현상을 일시 정지된 것으로 가정하고 다른 변인들과 절연시켜 시대별로 구분하는 것은 복잡한 현상을 질서정연하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 방송 역사를 보다 정확히 설명하기 위한 시대 구분의 기준은 무엇이야 하는가? 그것은 방송 역시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해 왔기 때문에 방송의 흐름을 역사와 함께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고 타당하리라고 본다.(1)인에 대한 전쟁과 황국 신민화 수단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는 총력방송심의회 등을 두어 방송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VOA 단파 방송 사건을 계기로 우리말 방송은 더욱 위축되었으며 결국 다수의 방송인들이 체포되는 등의 숱한 수난을 겪으면서 제2방송은 그 특색을 살리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이 종반에 접어들자 우리말 방송인 제2방송은 공지 사항만을 전달함으로써 공지 방송화 되기에 이르렀다.(2) 미군정기의 방송(1945~1948)해방이 되자 미군정은 방송국을 장악하고 조선방송협의회 현업부서(방송 제작 및 편성부)를 떼어내어 공보부에 예속시킴으로써 우리나라 방송이 장차 국영 방송의 틀을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9월 16일 미군사령부는 수도 서울의 명칭을 경성에서 서울로 개칭하고, 경성중앙방송국도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6년 3월 29일 미 군정청은 공보국을 공보부로 확대하면서 서울중앙방송국을 공보부로 흡수했다. 미군정은 우리나라 방송 제도를 일시적이나마 일본식 공영 방송에서 국영 방송으로 전화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군정청 공보부가 방송을 직영한 것이 국영 방송의 모델처럼 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방송 국영화 논리의 타당성을 제공해 준 셈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 격동기였던 만큼 자연히 보도 방송이 중요시되면서 보도 기자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뉴스는 하루 다섯 차례(오전 6시 30분, 11시 30분, 오후 4시 30분, 7시, 9시) 고정 편성되었고, 외신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되는 단파 방송을 번역해서 보도했다. 취재 기자의 이름이 기사 앞에 붙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편성 면에서도 1946년 1월부터는 미국의 소리(VOA) 우리말 방송이 매일 아침 6시 30분부터 15분간 중계되기 시작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미국 상업 방송의 편성 기법인 15분 단위 편성 제도가 도입되면서 기본 방송 순서라는 것이 생겼다.(3) 제1공화국 시기의 방송(1948~195. 특히 기독교 방송은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과감한 보도 활동을 함으로써 청취자들로부터 절대적인 호응을 받게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독자적인 보도 기능을 수행하였다.1956년 5월 12일에는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KORCAD 텔레비전 방송국(HLKZ-TV)이 개국하였다. 그러나 당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직 성숙되지 않은 환경에서 면밀한 타당성 검토 없이 텔레비전국이 탄생하였기 때문에 그 앞날은 그리 밝지 못하였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도입되게 된 계기는 KBS에 RCA제 기기를 납품하던 사람의 과욕과 한국 방송 시장의 잠재력을 너무 과대 평가한 RCA측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대부터 텔레비전 기술을 연구하고 시장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1952년 텔레비전을 개국한 일본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마침내 개국 1년 만인 1957년 5월에 HLKZ-TV는 한국일보에 양도되어 이름을 대한방송주식회사(DBC-TV)로 바꾸어 재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1959년 원인 모를 화재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HLKZ-TV는 재정난에 허덕이면서도 3년 가까이 이 땅에 텔레비전의 존재를 알렸고, AFKN-TV(1957. 9. 15) 발족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으며, 국영 텔레비전의 태동을 촉진하고 우수한 제작진을 양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KBS-TV의 조기 개국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1959년 4월 15일 주식회사 부산문화방송국이 주파수 1,035㎑, 호출 부호 HLKU, 출력 1㎾로 개국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국내 자본에 의한 민간 상업 방송이다. 개국 초기에는 하루 6시간 30분 동안 방송하다가 1960년부터는 방송 시간을 9시간 10분으로 연장하였는데 대부분이 가요와 경음악 위주의 오락 중심 편성이었으며 재정난을 덜기 위해 광고 방송을 도입하기도 했다. 특히 부산문화방송국은 중계차를 도입하여 보도 방송을 강화하던 중 1960년 3월 15일의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데모와도에 방송 센터를 신축하였다. TBC도 서울 서소문(시청근처)에 있던 종래의 방송 시설이 협소해지자 여의도에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방송 센터 건립에 착수하여 1980년 9월에 완공하였으나, 70일 후에 방송 통폐합으로 KBS에 인도되어야만 했다. 한편 MBC는 1969년부터 서울 정동에 현대적인 사옥을 갖고 있었으나 제작량의 증가와 컬러 텔레비전에 대비해서 여의도에 방송 시설을 두기로 하고 1986년에 방송 센터를 건립하여 뒤늦게 여의도 시대에 합류했다.동양방송(TBC)1964년 서울에서 개국되었던 민영방송. 중앙일보가 겸영(兼營)한 민간상업방송의 하나로 동양방송 산하에는 동양라디오·동양텔레비전·동양FM 등이 있었다. 통상 TBC(TongYang Broadcasting Company)로 불렸다. 전반적인 방송기본방침으로 ‘밝고 건강하고 감동적인 프로그램 제작, 빠르고 정확한 보도’를 내세웠다.〔동양라디오〕1964년 5월 9일 우리 나라에서 다섯번째의 라디오 방송국으로 개국하였다.1964년 1월 6일 서울 태평로1가에 연주소(演奏所)를 설치하였으며, “라디오서울방송은 민간방송으로서 국민과 더불어 사회의 공공복지 증진과 민족문화 발전에 창조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국민경제의 번영을 촉구하는 데 공헌한다.”는 방송헌장(放送憲章)을 제정하였다.1964년 5월 9일 정오부터 하루 20시간의 정규방송을 개시하면서 ‘우리는 전진한다.’, ‘우리는 창조한다.’, ‘우리는 듣고 보고 표현한다.’, ‘우리는 증언한다.’, ‘우리는 자유의 화신.’, ‘우리는 평화의 역군임을 선언한다.’는 요지로 개국을 선언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 세번째의 민간상업방송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개국 당시 기획실·총무부·업무부·방송부·기술부 등 1실 4부로 출발하였으며, 프로그램의 편성비율은 보도 9.9%, 사회·교양 21.4%, 연예·오락 28.7%, 음악 40.0%로서 종합편성보다는 중점 편성을 기본 방침으로 채택하였다.특수청취자 계층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여 국내 최초의 심야방송으로 주로 젊은층을 대상관, 후원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전국시도대항 국민학교빙상대회, 경호(京湖)역전마라톤대회, 대통령배쟁탈전국고교야구대회·쌍룡기쟁탈 전국고교농구대회 등의 스포츠행사와 중앙음악콩쿠르·신춘중앙문예·왕위전·방송가요대상 등 일반 문화행사가 있었다.1980년 11월 14일 한국방송협회의 임시총회에서 현 상업방송체제의 공영방송체제로의 전환 등을 내용으로 하는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채택함에 따라 그 해 12월 1일 한국방송공사에 흡수, 통합되어 KBS 라디오 제3방송으로 개편되었다.〔동양텔레비전〕1964년 12월 7일 우리 나라에서 첫번째의 민영상업 텔레비전방송국으로 개국했다. 1964년 7월 22일 서울은 충무로 1가에, 부산은 대교동 1가에 연주소(演奏所)를 설치하고 8월 31일 첫 전파발사시험을 하였으며, 12월 7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신세계백화점에서 개국하였다. 이때 서울국은 주 36시간 10분을, 부산국은 주 29시간을 방송하였다.‘보다 빨리, 보다 널리, 보다 풍부하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화·자유·번영을 구가하는 명랑한 민주사회의 건설, 신속하고도 정확한 보도전달과 올바른 여론조성으로 민주언론창달, 건전하고 명랑한 연예오락을 제공하여 국민에게 희망과 활기를 주고, 상공업계와 국민간의 교량적 임무에 충실하여 산업경제 부흥과 소비대중의 복지향상을 촉구한다.”는 방송목표를 선언하였다.개국기념 〈버라이어티 쇼〉와 특집방송극 〈초설 初雪〉은 당시까지의 생방송 위주의 방송을 탈피하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녹화 테이프를 통하여 방송되었다.1965년 8월 15일 ‘동양텔레비전(DTV)’이 ‘중앙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JBSTV)’로, 11월 17일에는 ‘주식회사 중앙방송’으로 다시 변경하여 중앙라디오와 병합하고 12월 5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동 중앙매스컴센터로 이전했다. 1966년 8월 15일부터 회사명을 다시 ‘주식회사 중앙방송’에서 ‘주식회사 동양방송’으로 개칭하였다.1966년 5월에는 〈한국의 전설〉과 1968년 6월에는 〈전설의 고향〉2%F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