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과 마카오목 차1. 홍콩의 자연·지리적 환경2. 홍콩의 역사 연표3. 중·영간의 홍콩 반환 협정4. 반환협정 후 중·영의 갈등6. 홍콩 반환의 의의1. 마카오 자연·지리적 환경2. 마카오의 역사 연표3. 포르투갈인의 정착 과정4. 마카오 반환협정5. 마카오의 역사적 공헌6. 마카오 반환의 의의1. 홍콩의 자연·지리적 환경홍콩은 홍콩섬(76km²), 구룡반도(11km²), 신계(984km²) 및 란타우섬 등을 비롯한 240여개의 크고 작은 주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홍콩의 총면적은 1,070km²로 서울의 1.8배이며, 최북단에는 선전강이 선전만으로 흐르고 있으며 홍콩과 마카오 사이의 거리는 약64km이다.지형은 구릉이 많고 경사가 심하기 때문에 경작이 가능한 지역은 10%정도에 불과하다. 단지 구룡반도의 서북부지역인 캄틴하, 선전하 유역에서만 평지를 볼 수 있다. 북부에는 큰 하천이 없어 물 부족이 심각하다. 1945년 이래 홍콩섬과 구룡 해안의 매립으로 홍콩의 면적이 16㎢가 증가하여 상업지구·항만·주택용지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홍콩섬 서쪽에 있는 빅토리아봉과 동쪽에 있는 노스포인트산 등을 비롯한 수많은 구릉들은 대부분 화강암 또는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반이 단단하여 고층 빌딩군이 많다.기후는 아열대 몬순 기후대에 속해 있어 1년 내내 무더운 날이 많고 연중 22∼23℃정도의 기온이 계속된다. 강우량은 연평균 2,160mm 정도인데 6∼8월에 1,000mm 이상이 집중적으로 내린다.2. 홍콩의 역사 연표19세기 초 영국은 왕실에서 시작한 중국차의 수입량이 초과되어 은이 유출되자 무역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인도의 동인도 회사를 동원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였다. 청나라가 과다한 아편수입으로 황폐해지자 흠차대신 임칙서가 1천 4백여 톤의 아편을 바다에 쳐넣었다. 이에 대응하여 1840년 영국의 파머스톤 외무장관은 중국이 영국 상인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구실로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중국과 난징조양을 체결하였다. 이 후에도 영국은 애로호 사건을산업, 전자, 시계 인쇄업 등으로 확산1950년대 중국이 홍콩에 대한 할양조약이 불평등이라고 문제제기1956 구룡폭동1967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이 홍콩에 대한 수도 공급 중단1970 홍콩에서 외국 금융기관에 대한 각종 규제 철폐1979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표명으로 홍콩이 세계적인 금융센터, 무역중계항으로 성장1979. 3. 등소평이 홍콩총독과 홍콩 반환 문제를 첫 논의1982. 7. 97년 이후 중국이 홍콩에 대한 주권을 회복한다고 선언1982.10. 중·영간 홍콩반환 1차 회담1984. 4. 중·영 홍콩반환 13차 회담1984. 9. 26.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자오쯔양-대처 간의 1997년 7월 1일 반환과 향후 50년 간 자치 약속 협정 서명 (중국은 이에 대해 공산주의 체제와 중국 외교의 승리, 식민지배의 종식이라고 평가함)1984.12. 19. 홍콩반환 중·영 공동 성명, 홍콩반환협정 조인1989. 6. 4. 천안문 사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1990. 4. 4.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홍콩 특별행정자치구 기본법 통과, 홍콩 첫 정당 설립1991. 6. 영국 인권법 통과1992. 6. 등소평이 남순강화로 경제개혁 역설1993. 7. 홍콩 반환을 위한 예비 운영위원회 설립1994. 8. 중국 1997년 주권 반환 후, 입법원 대체 구상 공개1995. 9. 홍콩 최초의 민주 직선 입법의원 선거서 반중세력의 민주당 압승1996. 1.26. 예비운영 위원회를 대신할 홍콩특별행정구 준비 위원회 발족1996. 3.31. 홍콩 정청이 홍콩인들에게 영국 여권 발급 마감1996.12.11. 초대 행정장관 등젠화 선출1997. 1. 주중국영국영사관 발족1997. 2.20. 홍콩특별행정구 초대 내각 명단 발표, 홍콩특구 최고법원 설치1997. 3.14. 중국 전인대에서 홍콩 기본권의 3개 조항 등 인권법 규정 폐지1997. 4.21. 홍콩 주둔 중국인민해방군 선발대 40병 도착, 영국 총영사관 영국 비자 발급업무 개시1997. 5.18. 북경∼홍콩 특급 직통열차된다는 것은 현실적이 아니라며 주권반환을 공식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등소평은 홍콩 문제가 ‘1국가 2제도’로 해결된다면 국제적으로 유익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언명하게 된다.결국 1984년 9월 26일 중·영 양국은 북경의 인민대회장에서 홍콩반환에 관한 합의문서에 가조인하고 공동성명 및 후속문서 3건을 발표하였다. 이 합의문서에는 21세기 전반의 홍콩은 ‘1국가 2제도’를 취하여 50년간 현상은 변하지 않고 홍콩인들이 홍콩을 통치한다는 3원칙이 들어있다.등소평은 마카오 문제도 홍콩과 같이 할 것임을 표명하였고 중국 외교부는 대만의 경우에도 통일 후 홍콩과 마찬가지로 ‘1국가 2제도’를 적용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1985년 5월 27일 중·영 양국은 북경에서 홍콩반환에 관한 비준서를 교환하고 합의문서가 정식으로 발효되었음을 선포하였다.4. 반환협정 후 중·영의 갈등반환합의문서에 의한 반환 후 홍콩에는 거의 독립적인 특별행정구가 설치되며, 향후 50년간 자본주의제도와 생활방식을 그대로 유지하여 사회주의체제로의 전환을 서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이 임박하면서 중·영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노골화된다. 이것은 홍콩을 150년이나 지배해 온 영국이 반환 후에도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는데 대해, 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중국 측의 강력한 반대에서 비롯되었다.홍콩의 마지막 총독인 크리스 패튼이 부임하면서 홍콩의 민주화를 위한 정치개혁과 신공항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는 데서 대립은 날카로워졌다.민주화를 위한 정치개혁으로 홍콩에 확고한 민주주의를 심어 놓고 영광스럽게 홍콩에서 철수하려는 영국에 대해, 이것은 공동성명과 기본법에 어긋나는 것이며, 민주화의 구실을 통해 중국대륙에 정치적 혼란을 야기 시켜 강력한 중국의 출현을 견제하려는 식민지 통치적 야욕이 들어있는 것이라고 중국은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 민주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홍콩 당국의 의회인 입법국 의원의 선출에서 현재보다 훨씬 더 직접선출의 비율을 늘리려는 것이었다.이에 중국은 식민지 통치자가사적 사실과는 반대의 성격을 갖는다.또 중국은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잃었던 홍콩을 다시 찾게 됨으로써, 거의 한 세기 반만에 치욕의 역사를 뒤로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지루하고 고된 한 세기 반만의 현대사에서 국내적인 경제발전과 함께 이룩한 외교적 성취인 것이었다.장기간 중국의 역사에서 서안과 북경 등의 중원은 항상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서구의 침략을 받은 이래 그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국가인 일본, 한국, 싱가폴, 타이완 등이 경제적으로 보다 더 발전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가장 먼 남쪽 변두리 지역인 홍콩이 외래문화의 영향 속에서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도 처음 있는 일로서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것이었다.더구나 수 천년간 자기 문화의 자존 속에 도취되었던 중국의 변방도시가 그들이 무시했던 서방세계의 문화적 영향 하에 전혀 다른 형태로 변모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것은 서양문화와 중국문화가 접촉하여 융합되고 성장한 것으로 중요한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1. 마카오의 자연·지리적 환경1. 자연·지리적 환경마카오는 중국 3대 강의 하나인 주강 삼각주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통치를 받았던 작은 반도이다. 행정적으로는 관동성 중산현의 남부에 위치한 마카오 반도는 북으로 관갑을 경계로 하여 광동성 주해시와 접해 있으며 면적은 약 7.49km²이며, 타이파 섬은 마카오 반도의 남쪽에 있으며 2.5km와 4.5km에 달하는 두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타이파섬과 쿨로와네섬은 2.2km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다.마카오와 홍콩까지의 거리는 대략 65km이며 광동까지는 145km이다. 기후는 아열대성에 속하며 따뜻하고 습기가 많고 강우량도 적잖다. 연평균 기온은 22.3℃이고 1월 평균 기온은 14.5℃이다. 강우량은 매년 평균 1999.8mm로서 5∼9월까지가 우기이다.2. 마카오의 역사 연표1513 최초로 포르투갈인이 중국에 내항1553 포르투갈 사람들은 상업으나, 정청과 마카오중화총상회사이에 장개석 정권계 중국인의 활동을 비합법화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져 위기를 벗어남1967 총독 N.de Carvalho 마카오로부터의 철수제의, 중국 측 간접적 거부1974 반환제의, 중국 거부1974∼75 중·미, 중·영관계의 호전으로 포르투갈 정부는 통치책 전환, 실질적인 중국지배 하에 현상유지를 기도1975 포르투갈 군대 철수1976. 2 포르투갈 본국의 정변 후 공화국 신헌법에 의해 마카오의 특별지위를 승인, 실질적인 자치정부를 갖는 것으로 됨1979. 2 포르투갈과 중국 국교 수립1980. 3 마카오 총독 중국 방문, 6월 습중훈 광동성장 마카오 방문1986. 6 북경에서 양국간 반환협상 시작1987. 3.23 마카오번환협정 합의1987. 4.13 중국 포르투갈, 마카오문제에 대한 공동성명 조인3. 포르투갈인의 정착 과정1474년 포르투갈 국왕 찰스 5세와 항해사 콜럼버스는 중국과 교역을 하면 엄청난 부를 얻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방해로 중단된 실크로드를 대신하여 동방의 신항로를 탐색하기로 한다.1517년 동아시아 말라카 해협 등을 장악한 포르투갈의 안드라데 사령관은 함대를 동원해 광주지역을 침략해 둔문을 점령하고 중국 주권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 때, 포르투갈 인들은 해안 지역에서 약탈행위를 하고 양민을 매매하는 등 폭력을 사용하여 중국 사람들의 분노와 반감을 사게 되었고 결국 첫 번째 침략은 실패하고 말았다.이 후, 그들은 중국 연해에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적 활동을 벌이는 한편 중국 관원들을 매수하여 1535년에는 결국 마카오가 개방되었다. 그리고 1553년에는 중국 관원 해도부사 왕백을 뇌물로 매수하여 마카오에 거주하는 것을 허가 받았다.이런 식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포르투갈 인이 마카오에서 무역과 상륙을 허가받고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건물을 지었다. 그러자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점차 집을 지으며 부락을 이루었다.포르투갈 인들은 1557년부터 1564년 사이 약1였다.
중국과 미국의 외교목차1. 중·미 관계 간략사 : 제2차 세계대전 ~ 1970년2. 중·미 외교의 시작 : 핑퐁 외교로 국교 수립까지 1979년 1월 1일3. 전략적 협력 관계 약화 : 1990년 대 초4. 대립·견제의 관계 시작 : 1990년 대 중반5. 전략적 동반자 관계 : 1990년대 후반6. 전략적 경쟁자 관계 : 2000년 대7. 중·미 관계 전망1. 중·미 관계 간략사 : 제2차 세계대전 ~ 1970년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은 영국과 일본에 이어 중국에 대하여 주도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패색이 완연한 가운데 미국은 유럽과 함께 아시아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핵심은 중국 대륙이었다. 명분은 중국을 소련 공산주의로부터 방어하여 중국과의 우호와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미국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일본과 싸우는 장제스의 국민당에 대하여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확대하였다. 미국은 대 일본전쟁에 장제스를 지지하는 소련을 끌어들였다. 소련은 얄타협정을 근거로 중국공산당을 원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1945년 8월 14일 체결하였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함께 항일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국민당 정부는 대중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미국은 국민당 지도층이 부패하고 무능하며, 전쟁은 미국에 맡기고 자기들은 공산당과의 투쟁에서 이기려는 생각뿐이라는 것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미국은 국민당이 머지않아 치를 공산당과의 대결에서 열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국민당을 지원하는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미국은 무조건 손을 떼는냐, 국민당을 도와 중국공산당을 섬멸 하는냐, 아니면 양측의 타협을 도모하느냐를 놓고 타협을 선택하였다.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게 패망할 때까지 20억 달러 상당의 원조를 제공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한편, 1944년 패트릭 헐리 육군 소장을 충칭에 파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립정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생각은 그 후 한낱 꿈에 그치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미국이 모택동의 미국 방문 제안을 거절한 것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분기점이 되었다. 이후 중국은 소련식 계획경제 모델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한국전쟁을 게기로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였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이로부터 30년이 지나고 나서였다.2. 중·미 외교의 시작 : 핑퐁 외교로 국교 수립까지 1979년 1월 1일1970년대 이전까지 중·미 양국의 적대 관계는 계속되었다. 특히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UN가입을 방해했다. 게다가 1950년부터 대만에 군대를 파병하여 보호했다. 그러나 중·미는 확장하는 소련의 패권주의 위협에 대처하고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응하며 자신의 불리한 입장을 개선하기 위해 1969년부터 서로 접근을 시도하기 시작했다.미국 닉슨 대통령은 1971년 7월 6일 중국을 세계 5대 슈퍼 경제대국으로 인정하고, ‘대항의 시기는 지나고 담판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인식하에 중국의 힘을 빌려 소련의 확장을 막고자 하였다. 중국은 1970년 4월 나고야에서 개최된 제 31차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미국 팀을 초청하여 양국 관계 개선에의 희망을 표시했으며, 닉슨은 곧바로 20년간 양국 간의 무역을 금지해온 법령을 해제했다.1970년 10월 1일 중국의 건국 기념일에 모택동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방의 붉은 별] 저자인 에드가 스노(Edgar Snow)를 초청하여 천안문 성루에서 함께 기념행사를 치루면서 미국에 대한 손짓을 은밀하게 보냈다. 마침내 중국의 우방인 파키스탄의 주선으로 1971년 7월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전보좌관 키신저(Henry Kissinger)가 비밀리에 방중하여 닉슨의 중국방문과 양국 관계정상화를 위한 준비 작업을 주은래 총리와 마쳤다.그리고 제 3세계 국가들의 도움으로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중화민국)을 대신하여 UN상임이사국 대표로 가입하였으며, 1972년 2울 21일 닉슨의 역사적인 중인 자세가 변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중국정부의 무력진압 행동과 미국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미국 내 여론 동향 때문이었다. 중국이 천안문 시위에 참여한 학생과 지식인들을 무력을 통해 진압하자, 미국은 중국내 인권문제를 제기하면서 중국에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992년은 미국에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 해로서 미국 내에서 반중국적인 여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였던 클린턴은 중국 정부를 ‘악마집단’으로 비난하기까지 했다.이로써 1991년 말까지 중국과 미국 사이에는 고위급 지도자 방문에 단절되었으며, 중국내 인권문제, 무기수출문제 그리고 무역역조문제 등으로 중·미관계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89년 초 아버지 부시 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뒤 거의 2년만인 1991년 11월이 돼서야 비로소 베이커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였다.이 기간 동안 중·미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으로 제기된 것은 중국내 인권문제였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부터 중국에 최혜국 대우를 부여해 주었으나, 1990년부터 중국내 인권 상황을 고려하여 대중 최혜국대우를 1년 단위로 연장하기 시작하였다. 미국행정부와 의회는 천안문 사건 당시 체포된 정치범을 석방하지 않으면 중국에 대한 무역 최혜국대우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미국의 대대만 첨단무기 판매와 중동지역에 대한 중국의 핵기술과 미사일 부품 수출 의혹도 중·미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1992년 9월 부시 미대통령이 대만에게 150대의 F16 전투기 판매를 결정하자, 중국은 미국의 결정을 비난하였다. 파키스탄, 이란, 시리아 등에 대한 중국의 핵기술과 미사일 부품 수출 의혹도 중·미관계 진전을 저해하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미국무부와 의회는 알제리, 파키스탄, 시리아 등 국가에 대한 중국의 핵기술과 지대지 탄도미사일 수출 의혹을 제기하고, 대중 첨단기술 수출 중단조치를 취하면서 중국에게 미사일 확산 방지 노력에 참여해상에서 수색하였고, 2000년 베이징올림픽 개최 안을 지지하지 않았다. 1994년에는 대만과 고위인사 교류 허용, 대만의 국제기구 가입 허용 및 주미 대만대표부의 지위격상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대대만 관계 강화조치를 취하였다. 이데 따라 리덩후이 대만 총통의 미국방문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미·대만 단교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대만 최고위급 지도자의 방미였다는 점에서 중·미관계를 수교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변화시켰다.이처럼 1990년대 중반 중·미 사이에 이해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통해 새로이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1993년 초 부터 미국에서 ‘중국위협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부상이 미국의 이익과 세계 안정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당시 미국에서는 구매력을 기준으로 중국의 경제력을 평가하면서 중국경제가 세계 3대국 수준에 도달하였고, 2010년 내지 2020년경에 이르면 미국을 초월하여 세계 최대 경제대국을 부상하게 될 것이라는 다소 과장된 평가들이 제기 되었다. 나아가 중국이 경제력을 신장하게 되면 이를 군사력 증강에 투입하게 됨으로써 동아시아 안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새롭게 부상하는 세력 또는 강대국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전제조건을 갖춘 국가는 대외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현상타파적 성향을 보인다는 현실주의적 관점으로 중국을 평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중국을 파악했던 미국 학자와 정부 및 의회 지도자들은 중국의 강대국 부상을 경계하면서 중국에 대한 개입정책보다는 봉쇄정책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한편, 중국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세계 신질서 구축을 주장하는 동시에 주변국가와의 선린관계 강화를 적극 모색함으로써 미국의 압력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중국은 냉전종식 이후 국제질서가 기본적으로 평화와 발전의 양대 특징을 보이면서 발전하고 중국을 적대시하는 봉쇄정책보다는 ‘포괄적 개입정책’을 공식 대중정책으로 추진하였다. 중국 역시 군부와 보수파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압력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미국과 마찰을 벌여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과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아래 미국에 대해 “신뢰를 강화하고, 마찰을 줄이고, 협력을 확대하며, 대결을 벌이지 않는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결국 중·미는 1993년 이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지도자회의 시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관계정상화의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인권대화와 군사안보대화를 통해 안보적 신뢰를 모색하는 동시에 최혜국대우 부여 문제와 무역원조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협상을 통해 해소하였다.5. 전략적 동반자 관계 : 1990년대 후반1997년과 1998년에도 중국과 미국은 대만문제, 미·일동맹 강화 문제, 인권문제 및 중국의 대이란 핵기술 수출문제 등으로 긴장이 조성되었으나, 장쩌민의 미국방문과 클린턴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점차 갈등이 완화되고 협력분위기가 확산되었다.1997년 초 중·미관계는 미국이 대만에 F16 전투기를 제공하기 시작하고 일본과 동맹관계를 강화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하였다. 특히 미국이 일본과 신안보협력지침을 채택하고, 일본 주변유사시 일본자위대의 활동범위를 대만해협까지 확대할 수 있는 여지를 갖추게 됨으로써 중국은 극도의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미국이 UN 인권위원회에 중국인권 결의안을 상정하고, 티벳문제 담당 특별조정관을 임명하여 티벳 소수민족의 종교자유를 요구하는 등 중국에게 인권압력을 가하였던 점도 중·미관계를 긴장 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아울러 미국은 이란에 대한 중국의 화학무기와 핵기술 수출이 중동지역의 안정을 저해하고 있다면서 재중 첨단기술 수출금지정책을 지속하였다.그러나 중국과 미국은 갈등보다는 협력을 중시하는 양상을 보였다. 중국은 “이해를 증진하고, 합의를 확대하고, 협력을 발전시하였다.
SK사태를 통한 분식회계에 대하여-대우전자 분식회계 사건 판례 첨부-I. 사건 개요1. SK 사태 요약참여연대가 최태원 SK회장을 비롯해 그룹 임원 3명을 배임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부당 내부거래에 대한 내용이었다. 최태원 회장이 자신이 보유한 워커힐호텔 지분(48.21%)을 SKC&C와 SK글로벌에 각각 40.70%, 7.51%로 나눠, 비싸게 넘겼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최 회장은 검찰로부터 2천억 원대의 배임 혐의를 받았다. 실제로 최 회장이 SKC&C에 워커힐호텔 주식을 팔 때 사용한 방법은 주식스왑)이었다. 최 회장은 2002년 3월 말 보유 중인 워커힐호텔 주식 325만주(40.7%)를 SKC&C에 주당 4만495원에 팔았다. 대신 SKC&C가 갖고 있던 SK(주) 주식 646만주(5.08%)를 2만400원에 사들였다. 이를 통해 최 회장은 SK(주)의 지분을 5.20%로 늘리며 최대 주주가 됐다. 하지만 검찰은 SK(주)의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비상장사인 워커힐호텔의 주식가치를 과대평가하여, 800억 원가량의 이익을 챙겼다고 설명했다.반면 SK그룹은 워커힐의 주식은 비상장 주식이고, 거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 가치를 평가할 만한 기준이 없었다고 반론했다. 이면계약과 부당 내부거래 혐의로 수사를 하던 검찰은 우연치 않게 SK의 분식회계 장부를 확보하게 된다. SK사태의 핵심이 발견된 것이다. 결국 검찰은 2003년 3월 11일 SK글로벌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 짓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분식회계 규모는 1조5천억 원 수준이었으며, 이는 20여 년 동안 축적된 것이라는 내용이 골자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따라 외형 성장을 추구해 오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태는 SK(주)의 경영권 문제로 비화되었다. 결국 SK사태의 큰 줄기는 JP모건과의 이면계약, 워커힐과 SKC&C의 주식 스왑, 분식회계 3가지가 발단이 됐고, 향후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2. 분식회계 관련 등은 2002년 1월 SK글로벌의 2001년도 회계결산을 하면서 채권은행이 발행해준 채무잔액증명서를 위조해 1조 1881억 원의 은행채무를 누락시키고 1,500억 원 상당의 허위매출채권을 만들어 이익을 부풀리는 등 1조 5,587억 원 상당의 분식회계를 한 혐의이다.3. 분식회계의 의의 및 보호 법익분식회계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분을 발라 곱게 칠하는 회계방식이다. 이는 기업의 비용이나 부채는 줄이고, 이익과 재산 규모는 과장하여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식회계는 이익을 축소시켜 탈세를 목적으로 하거나, 반대로 이익을 부풀려 주가를 높이거나 회사채 금리를 낮추고자 할 목적으로 많이 이용된다.분식회계에 대하여 형사적 제재를 가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보호법익)은 협의로는 투자자와 주주의 재산권이며 광의로는 건전한 자본시장 육성에 있다.4. 분식회계에 대한 형사상 책임상법상으로 회사의 업무집행자 및 이사·감사·감사인 등은 영업상의 재산 및 손익의 상황을 명백히 하도록 회계 장부를 작성해야 하며(상법 제29조 제1항), 만약 이를 부정작성 또는 부실기재한 경우에 당해 자들에게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의 제재를 하게 되어 있다.(상법 제635조 제1항 9호)그러나 상법상의 이런 과태료의 제재는 그 정도가 경미하기 때문에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서는 이를 과태료가 아니라 형사벌로서 징역형과 벌금형을 과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분식회계와 관련하여 “기업은 내부회계관리제도에 의하지 아니하고 회계정보를 작성하거나 내부회계관리제도에 의하여 작성된 회계정보를 위조·변조 및 훼손하여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5. 민사상 책임추궁 가능성상법상으로 업무집행사원·이사·청산인 등이 상업장부를 작성할 의무를 부담하며, 이를 작성하지 않거나 부실기재한 때에는 법령위반행위로 보고 회사 또는 제3자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하고 있는 상법 규정이 적용될 수 있다.(상법 제399조, 제401조, 제567조)따라서 SK사건의 경우 분식회계와 관련하여 당해 이사들은 상법 제29조4조에 대한 위반 여부를 판단하고, 위반사실이 확인된 경우에는 상법 제399조에 의거하여 회사 및 제3자에 대하여 연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게 된다.II. 주요쟁점◆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서 요구하고 있는 내부회계관리제도에 따라 회계장부를 작성하였는 가.◆ SK와 투자자들의 재산권이 침해되고, 최태원 회장 등이 개인적으로 이득을 취하였으며 이들에게 불법이득의 의사가 있었는 가. ( 경영판단의 원칙에 의한 행위인가.)◆ 법의 집행이 법익을 보호하는 것인가.-법의 집행이 진정 법익을 보호하는 것인가-SK사건의 분식회계 문제는 검찰이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 의거하여 민사적 책임추궁보다는 형사상 책임추궁을 전제로 그 위법성) 여부를 판단하고자 하고 있다. 따라서 SK의 회계장부 작성자가 고의로 내부회계관리제도를 운영하지 않았거나 운영하더라도 작성된 회계정보를 위조, 변조 및 훼손한 경우에는 형사상 책임을 부담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위법행위에 대한 법집행을 하기에 앞서 그 보호법익이 무엇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은 제정목적이 기업들의 회계투명성을 제고하고 금융기관이 신용위험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볼 때, 그 보호법익은 협의로는 투자자와 주주의 재산권이고, 광의로는 건전한 자본시장 육성에 있다.하지만 기업들의 시장행위에 대하여 위법성 여부만을 판단하는 경우 자칫 잘못하면 보호법익은 고려하지 않고 법집행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SK사태에서 과연 분식회계와 관련하여 검찰이 수사함으로써 보호하고자 했던 법익이 투자자와 주주의 이익, 그리고 자본시장의 발전이었는 가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SK사태가 주식시장 붕괴와 우리 기업들이 외국 기업들로부터 적대적 기업매수의 대상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결과적으로 해당 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검찰의 수사가 현실에서 법익을 보호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체 주식시장 투자자의 재산과 국내기업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기업의 회계투명성을 제고하여야 하는가는 논쟁이 된다.- 경영판단의 원칙-경영판단 정보에 근거하여, 이해관계 없이, 그리고 성실히, 회사의 이익에 합치한다는 믿음을 갖고 회사의 경영에 관한 판단을 한 경우에는 그 판단이 적절하지 못한 판단이어서 결과적으로 회사에 대하여 손해를 초래했더라도 그러한 판단을 한 이사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원칙이다.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경제상황의 변동과 기술진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위험을 적극적으로 받아 줄이는 경영을 촉진하기 위하여 경영활동 위축방지와 경영사항을 판단할 만한 지식이 법원에 부족하다는 이유로, 또는 단순한 경영상의 판단 잘못을 임무해태)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주의의무 위반 시에도 경영판단에 속하는 한 면책된다고 하는 견해가 다수의견이다.그렇다면 SK회장이 순수한 경영판단을 하였다면 면책되어야 하는 가. 이사들의 경영 판단에 경영판단원칙을 인정하면 면책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거기에 명백한 불법이 있다면 예외가 될 수 있다. SK사태에서 재벌기업의 경영자는 자신의 행보 및 자세가 국가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여 깨끗하고 책임 있는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어디까지가 경영판단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되고 기준이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경영판단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SK 회장의 경영판단이 순수한 경영판단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된다.III. 관련 판례◆ 관련 판례 선정 이유1. SK사태 판례 확보의 어려움2. 유사 사건 : 대기업의 분식회계3. 비교적 최신 판례-대법원 2007.10.25. 선고 2006다16758,16765 판결 【손해배상(기)】〈대우전자 분식회계 사건〉【판결요지】[1] 증권거래법 제186조의5, 제14조에 의하면 사업보고서 중 허위의 기재 또는 표시가 있거나 중요한 사항이 기재 또는 표시되지 아니함으로써 유가증권의 취득자가 손해를 입은 때에는 당해 사업보고서의 제출자인 법인과 그 이사 등은 위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고, 같은 법 제186조의5, 제16조에 의하면 위 손해배상책임은 그 청구권자가 ‘당해 사실을 안 날’ 효력이 발생한 날부터 3년 내에 청구권을 행사하지 아니한 때에는 소멸하는 바, 여기서 ‘당해 사실을 안 날’이란 청구권자가 사업보고서의 허위기재나 기재누락의 사실을 현실적으로 인식한 때라고 볼 것이고, 일반인이 그와 같은 사업보고서의 허위기재나 기재누락의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청구권자도 그러한 사실을 현실적으로 인식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2] 주식거래에서 대상 기업의 재무상태는 주가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고, 대상 기업의 사업보고서의 재무제표에 대한 외부감사인의 회계감사를 거쳐 작성된 감사보고서는 대상 기업의 재무상태를 드러내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로서 일반 투자자에게 제공·공표되어 그 주가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주식투자를 하는 일반 투자자로서는 그 대상 기업의 재무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사업보고서의 재무제표와 이에 대한 감사보고서가 정당하게 작성되어 공표된 것으로 믿고 주가가 당연히 그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었으리라는 생각 아래 대상 기업의 주식을 거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 략 -[7] 허위공시 등의 위법행위로 인하여 주식 투자자가 입은 손해의 배상을 구하는 사건에 있어서 자금사정이나 재무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알려진 회사의 주식을 취득하였다는 사정은 투자자의 과실이라고 할 수 없고, 또한 재무상태가 공시내용과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정상주가를 형성하기 전까지 주가가 계속 하락하였음에도 그 중간의 적당한 때에 증권을 처분하지 아니하고 매도를 늦추어 매도가격이 낮아졌다는 사정은 장래 시세변동의 방향과 폭을 예측하기 곤란한 주식거래의 특성에 비추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과실상계의 사유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상주가가 형성된 이후의 주가변동으로 인한 매도가격의 하락 분은 일반적으로 허위공시와의 인과관계 자체를 인정할 수 없어 손해배상의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고 그 경우 그 주가변동에 관한 사정은 손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이 단계에서 주식의 매도를 늦추었다는 사정없다.
저운임 운송시장-저가항공사에 대하여-목 차I. 저가항공사의 의미II. 저가 항공사의 등장 배경III. 저가항공사의 특징IV. 기존 항공사와 저가항공사의 비교V. 외국 저가항공시장 현황VI. 국내 저가항공사VII. 국내 저가항공시장의 전망I. 저가항공사의 의미저가항공사란 기존 시장에서 형성되어 있는 운임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수준으로 운송서비스를 제공하는 항공사를 총칭하며, 엄밀한 의미에서 저운임 항공사를 의미한다. 저운임이란 기존 운송 상품의 가격수준에 50∼60% 수준 또는 그 이하를 말한다. 저가 항공사는 주로 정해진 국내의 지역을 중심으로 정기 또는 부정기로 운송하는 지역항공사나 중·단거리 노선을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커뮤터항공에서 출발하였다.II. 저가항공사의 등장배경1. 잠재적 시장의 독점적 지위 확보새로운 노선의 개설은 잠재적인 항공수요를 창출하는 효과가 있다. 경쟁시장일수록 공급과잉과 공항의 혼잡 등 제약요인이 많은데 비해 노선의 부재로 인해 여행수요를 흡수하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철도, 차량 등 육상운송이나 해상운송 등을 대체할 수 있는 저렴한 운임으로 독점적인 운송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여행상품에 대한 구매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2. 고객욕구의 다양화와 시장세분화그동안 항공사들의 마케팅전략은 비교적 표준화된 좌석의 제공을 전제로 하여 동일상품을 대상으로 하는 운임의 차별화에 의존하였다. 운임의 차별화는 동일한 상품에 대하여 고객들에게 각기 다른 가격으로 구매하도록 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고객의 수요가 여행목적이나 문화적 배경 등에 따라 욕구가 다양해지고, 운임수준에 민감한 여행자 계층의 비중이 증가함에 따라 가격탄력성이 높은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세분화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3. 틈새시장의 활용그 동안 가장 효율적인 노선망으로 인식되어온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 시스템은 지속적인 항공교통량의 증가로 인해 공항의 혼잡, 환승에 따른 출발·도착의 지연, 공항 이용료의 상승 등 적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라 혼잡한 허브공항 대신 교통량이 적은 두 지점 간 노선을 틈새시장으로 하는 네트워크 전략의 효율성을 인식하게 되었다.4. 원가 절감조직의 혁신을 경영의 효율화, 인터넷 판매의 강화를 통한 영업지용의 절감, 그리고 중·단거리 노선을 대상으로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원가를 줄일 수 있는 서비스 항목의 축소 또는 생략 등을 통해 원가를 절감하고 가격경쟁력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III. 저가항공사의 특징1. 제한적인 서비스제한적인 서비스란 무료로 제공되는 기내식음료의 부가적 서비스, 마일리지의 적용과 같은 상용고객우대프로그램 등의 생략, 최소한의 공항 서비스, 좌석배정의 생략, 단일화된 좌석등급과 단순한 운임체계 등을 통해 기존의 항공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생략·축소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기내의 대부분의 서비스는 유료로 제공되며, 이용실적에 대한 보상으로 제공되는 마일리지 적용되지 않는다.2. 높은 가동률투자와 영업비용의 측면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항공기에 대한 가동률을 극대화하는 경영전략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안전운항이 허용되는 범위에서 기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항공기의 유휴시간을 가능한 줄이고 혼잡공항보다는 공항이용이 원활한 중·소 공항을 대상으로 운항하며, 지상조업을 효율화하여 회항시간을 단축하는 스케줄과 노선전략을 널리 활용한다.3. 낮은 단위생산비용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는 좌석 또는 항공편의 단위당 운항원가를 최소화하기 위해 저가항공사들은 규모의 경제를 최대한 이용한다. 항공기의 노선배치와 유지관리, 운항승무원의 교육훈련과 스케줄링 등의 효율화를 위해 보유기종을 단순화하거나 인건비 및 영업비의 절감을 위해 여행사 등의 판매 대리점 대신 자사의 영업조직만을 통해 마케팅을 전담한다. 예를 들어, 세계 최대의 저가 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항공은 모든 노선에 취항하는 기종을 B737로 단일화하고 있으며, 유럽의 이지젵은 자유화된 복장의 객실승무원이 기내청소 등 지상조업의 일부를 겸하고 있어 인건비를 절감하고 있다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확보한다. 좌석판매는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만을 이용한 예약과 전자발권을 이용함으로써 판매수수료와 영업·발권비용 등의 유통비용을 줄이며, 정비유지와 지상 조업 등도 외주에 의한 아웃소싱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운항과 마케팅 등 최소한의 단순화된 조직을 운영한다.IV. 기존 항공사와 저가항공사의 비교구분기존 항공사저가 항공사서비스다양한 기내의 부가서비스좌석등급의 다양화특정고객층에 대한 고품격서비스기내부가서비스의 생략탑승수속의 생략단일화된 좌석등급운항대형여객기 중심의 운항국내외 허브공항 중심의 취항다양한 네트워크, 제휴 노선망 활용단일기종의 항공기 운항중·소 공항 중심의 취항지점 간 노선의 운항수익성브랜드 제고를 통한 수익확대차별적 운임전략을 통한 수입극대화부대사업 등을 통한 수입의 다변화항공기의 가동률 극대화중·단거리 틈새시장의 수요창출인터넷 판매로 유통비 절감조직적정규모의 전통적 조직운영다양한 서비스제공을 위한 교육훈련다양한 제휴의 활용조직의 단순화·슬림화본사중심의 집중적 마케팅조직제휴의 배제 및 적극적인 아웃소싱마케팅노선별·좌석별·계절별 탄력적인 운임전략다양한 욕구의 모든 고객집단을 대상CRS, 판매대리점, 인터넷 직접판매 등 다양한 유통채널 활용계절별 탄력적인 운임전략가격탄력성이 높은 관광여행자집단을 대상인터넷에 의한 직접 판매 중심의 유통채널에 의존V. 외국 저가항공시장 현황1. 미주1971년 B737 여객기 3대로 운항을 시작한 사우스웨스트 항공사는 기종의 단일화와 지방 공항을 이용한 단순한 국내노선전략, 마케팅의 혁신 등을 통해 지속적인 시장 확장에 성공을 거둠으로써 오늘날 세계 10위권 이내의 정기항공사로 성장하여 대표적인 저가항공사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사우스웨스트 항공사는 설립 후 31년간 연속 흑자를 기록하였으며, 2004년 말 현재 B737 기종만으로 1일 평균 2,900편으로 미국 내 60개 노선을 취항하고 있으며, 주로 500마일 이내의 단거리 지점 간 노선을 취항하고 있다.이밖에 A320을 단일 기종으로 하는 제트블루메리칸트렌스 에어, 아메리카 웨스트 항공, 프론티어 항공, 스프리트 항공 등 약 20여개 항공사가 미주의 간선과 지선에서 저운임 운송시장을 형성하고 있다.2. 유럽1985년 아일랜드를 거점으로 한 라이언 에어가 처음으로 설립되어 단거리 국제노선에서 점진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대표적인 저가항공사로 시장지위를 확보하였다. 그 후 1995년과 1996년에 이지제트와 드봉에어가 영국에서 설립되어 전유럽시장을 대상으로 취항을 시작하였으며, 이어 버진익스프레스가 브뤼셀에 설립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독립적인 형태의 저가항공사 외에도 기존 항공사의 자회사형태로 설립된 영국항공의 고우항공과 KLM의 버즈항공 등이 시장방어를 위해 저운임시장에 진출하였다. 또한 에어 링거스의 경우, 2002년 국적항공사의 지위를 포기하고 저가항공사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는 2004년 현재 약 60여개의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으며, 유럽지역 내 정기노선의 약 24%를 차지하고 있다.VI. 국내 저가항공사1. 한성항공(1) 설립국내 제 3 민영항공사로써 국내 최초로 지역민영항공사이기도 하다. 청주시 및 충청 대학교와 업무 협약을 맺어 2004년 3월에 충청지역항공추진사업단 (가칭 충청항공)으로 설립되었다. 시작의 어려움을 딛고 2004년 11월 (주)한성항공으로 태어나게 된다.한성항공은 대한민국 최초의 단거리 전문항공사이자 지역민영항공사로써 청주공항 활성화와 중부권 관광산업의 발전, 중부권 시민의 고용증대 및 중부권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2) 보유 항공기항공기는 ATR72-200(프랑스 ATR사)을 4대 보유하고 있으며, ATR72-200의 최대 승객좌석은 72석, 최대순항속도 572km/h, 최대항속거리 2000km이다. 이 기종은 터보프롭항공기로서 유럽 및 미국 단거리 항공기로 널리 이용되고 있으며, 연비가 제트기 보다 우수하고 활주거리가 짧아 중, 소 공항에 이착륙이 가능하다. 682대가 단거리용으로 생산되어 많은 항공사에서 경제성과 안정성이 검증된 기종이다.(3) 노선 및1,900원이며 주말(금∼일)은 39,900∼65,900원이다.2. 제주항공(1) 설립양대항공사의 독과점 및 고비용구조에서 비롯된 제주도민의 경제적 부담과 관광객 감소에 따른 지역경제 침체가 가중되자 제주도가 직접 출자하여 설립하게 되었다. 2004년 9월 제주도의 항공사업 파트너로 애경그룹이 선정되어 2005년 1월 애경그룹이 75%, 제주도가 25%를 출자하여 민관합작 법인 형태인 (주)제주항공이 설립되었다. 2005년 8월 정기항공사업면허를 획득하여 2006년 6월 5일 첫비행을 하였다.(2) 보유항공기Q400(Pratt and Whitney Canada Corp)은 제트기 속도 및 안락함의 제공과 경제성을 지닌 터보프롭 기종이다. 지역항공시장을 위해 설계된 항공기로서 현재 전 세계적으로 여러 지선과 간선에서 제트기를 대신하여 운항되고 있다.최대운항속도 667km/h, 최대좌석 78석, 최대항속거리 2,552km로 지역항공사 및 저가 항공사에 높은 수익 창출기회를 제공한다.Dowty 사의 복합형 육깃(six-bladed)프로펠러는 소형 프로펠러에 비해 높은 추력과 낮은 소음을 제공한다.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신소재 이용으로 좀 더 바깥쪽 날개의 프로펠러 장착이 가능하여 소음레벨을 감소시킬 수 있다.(3) 노선 및 운임제주∼김포 노선과 제주∼김해 노선에 취항하며 운임은 주중 39,900∼51,400원이며 주말은 45,800∼59,100원이다. 제주항공 역시 탄력운임을 적용하는데, 주중운임, 주말운임, 성수기운임으로 운영하고 있고 좌석은 등급 없이 Mono Class로 운영하고 있다.3. 영남에어(1) 설립(주)영남에어는 부산,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민영항고사로써 건설교통부로부터 2007년 11월 부정기항공 운송사업 면허를 취득함으로써 제주항공과 한성항공에 이은 국내 3번째 저가 항공사가 되었다.(2) 보유 기종네덜란드 Fokker사에서 제작한 Fokker-100이며, 터보프롭이 아닌 제트기종이다. 최대 수용인원은 120명이며, 순항속도 861km/h,
중국의 리더 후진타오제1장 후진타오의 뿌리●후진타오는 공식적으로 1942년 안휘성 적계출신으로 되어있으나 실제 상해에서 태어나 강소성 태주에서 자랐고 명나라 때 왜구를 정벌한 호종헌의 후손이다.●1948년 상해에서 생활이 어려워진 가족이 태주로 이사를 왔고‘소영업주’로 신분판정을 받아 후진타오는 대학진학과 공산당 입당을 할 수 있었다.●정치적 판단 때문에 공식적으로 태주에 대한 언급을 피하지만 고향을 잊어버린 건 아니다.●1959년 태주시 최고의 성적으로 명문 청화대학 수력학부에 입학한 엘리트 학생이었다.제2장 청화대학 시절●1959년 9월 11일 상경한 후진타오의 꿈은 정치가가 아니라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었다.●1964년 9월 대학시절 천안문에서 열린 국경절 축하퍼레이드에 참가해 모택동 주석을 처음 보았다.●대학시절 노래와 춤 솜씨가 좋고 용모가 수려해 주목받는 존재였다.●북경 출신 엘리트 관료집안의 유영청과 연인이 된다.●청화대학에서 정치 지도원 시절에 처음 정치 투쟁을 경험하고 괴로운 패배를 맞보았다. 언동을 신중히 하는 것이야 말로 불패의 자리에 서는 것이라는 철학을 깨닫는다.제3장 감숙성댐 건설시대●1968년 12월 감숙성에 위치한 수력부 직속 제4댐 건설국으로 전출된다. 유영청과 가까이 있으면서 댐 건설현장에 근무하게 된다.●중국지도부에서 권력투쟁이 있을 시기에 후진타오는 멀리 떨어진 서부에서 생활고를 견디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1970년 1월 813지국장의 비서로 발탁되어 정치가로서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이는 출신의 문제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유영청과 결혼하여 황화 근처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사회생활이 불안정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후진타오는 멀리 떨어진 감숙성의 댐 발전소에서 머물며 평화롭게 지낸다.●건설위원회 부주임 장연청의 제의로 위원회 주임실 전속비서가 되어 감숙성 건설위원회로 전근가게 되고 이는 후진타오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장연청은 후진타오를 관도에 오르게 한 최초의 은인이다.제4장 상승기류를 타고●197~1976년 격동의 시절에 중국 정계에서 멀리 떨어진 감숙성에서 일하고 있던 후진타오는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명문대학 출신의 젊은 엘리트이고 사무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인간관계도 좋은 후진타오에게 1980년은 정계에서 출세코스를 밟기 시작한 해이다.●1981년 가을 후진타오는 호요방의 집을 찾아 첫 만 남을 가지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가까이 지내게 된다.●1982년 9월 1일 제 12차 전대에서 후진타오는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제5장 호요방이 맡은 적기●1981년 후진타오는 중남해 호요방의 자택에 가까이 살면서 그가 자기 인생의 큰 스승이 될 것으로 예감한다.●청년단 제2서기에 취임한 후 후진타오는 지방시찰 전 미리 비서를 통해 지방의 청년간부에게 접대를 하지 않도록 연락을 시켰다.●후진타오는 인간관계가 좋고 예의바르며 친절하지만 왕조국은 주위 사람들에게 예의가 없고 교양도 없어 악평이 뒤따랐다.●1984년 12월 나이 42세 때 후진타오는 정식으로 제1서기에 선출되어 외교활동에 매진하였다.●1984년 12월, 후진타오는 호요방 공산당 총서기와 강서성의 공청성을 방문하게 되는데, 호요방의 가식 없는 성격, 성실한 인품, 진지한 업무태도, 유머 등을 접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제6장‘빈곤과 무지의 땅’에 부임●1985년 7월, 42세 후진타오는 전국 최연소 지방성 공산당 서기로 귀주성에 부임하였다. 빈곤한 지역으로 전출한 것을 실망하지 않고 성실한 업무로 지역 사람들의 호평과 호요방의 신뢰를 얻게 된다.●후진타오는 귀주의 궁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를 발전 시켜야하며 무지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티베트 출신 고승인 판첸라마에게 후진타오는 종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보이고 소수민족을 존중하는 말을 해 호감을 준다.●은사 호요방의 실각 후, 일부 지방에서 벌어진 대규모 호요방 비판 캠페인을 후진타오는 대대적으로 전개하지 않았다.제7장 티베트 소요 진압●후진타오가 티베트자치구 제6대 공산당서기에 뽑힌 것은 그의 정치인생에서 중요한 후진타오는 단호한 결정과 과단성 있는 행동 등으로 등소평의 눈에 띄어 그의 추천으로 모택동의 뒤를 잇는 네 번째 후계자로 내정된다.제8장 한 치 앞이 어두운 정계●후진타오는 적을 만들지 않고 누구에게도 본심을 밝히지 않는다.●강택민의 전면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쩡칭홍은 후진타오의 라이벌이다.●후진타오는 중국 서부, 청년단, 청화대학이라는 세 이력의 관계자로 파벌을 만들어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그의 담화를 통해 그의 정치이념을 살펴보면 1. ‘3개의 대표’를 공산당 기본이념으로 한다. 2.리더의 청렴결백을 강조한다. 3.국제경쟁에 참가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 4. 다극화는 세계의 지속적 평화의 기초가 된다. 5.대만 문제는 중국의 내정 문제이며 양측의 중국인에게 맡겨야 한다.제9장 후진타오의 측근●영계획(최측근), 오관정(대학 동창), 장학충(외눈박이 동지), 송덕복(군출신), 염해왕(중앙은행의 실력자), 이극강(중앙위원), 장경려(민간인 사령관), 왕서성(대학 동창), 장복삼(사법장관), 서영개(운남성지사), 전총명(신화통신 사장), 이원조제10장 세계가 본 후진타오●후진타오는 국제금융, 경제에 지식이 풍부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실무에 철저하고 그의 전망은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하다.●정치적 민감한 부분에는 말을 삼가지만 미국의 패권주의와 양안문제에는 단호한 입장이다.●천수이벤 총통은 후진타오를 공산당과 독재정치의 충실한 지지자라며 비관적인 입장이다.5월 1일 노동절 하루 전날, 나는 북경에 있었다. 노동자계급이 최고로 여겨지는 중국의 노동절은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실제로 가서 본 중국에서 자본을 축적한 계급은 최고의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모두들 자본을 쫓아 움직이기에 바빴고 마구잡이식 성장 지향주의로 인한 그 결과물들이 아직 견고히 다져지지 않은 뒤죽박죽 무질서적인 사회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이 정도까지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바로 등소평의 정치 이념과 소신,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치 지도자의 정치 이념과 정책은 아직까지는 공산당의 힘에 눌려있지만 자본주의에 빠져든 인민들은 민주화 의식이 고취 될 것이 분명하고 앞 만보고 내달린 자본주의식 성장은 각종 사회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다. 지금까지의 성장이 일단 성공적 이었다면 앞으로 부딪치게 될 사회문제들, 넓게는 공산당의 독재에도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잠재된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것은 중국의 앞으로의 과제다. 곧 이 과제들을 풀어나가는 역할과 능력은 중국의 지도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곧 후진타오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후진타오의 정치 이념과 가치관 등 후진타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고 그러면서 중국의 전망을 진단해보기 위해 이 책을 읽어보기로 하였다.이 책을 읽기 전 후진타오에 대한 나의 느낌은 일단 외모가 수려한 신사라는 점과 카리스마였다. 책을 읽은 후 박정희 전대통령 같은 카리스마는 못 느꼈지만 인민군을 사열하는 후진타오의 사진에서 대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느꼈었다. 그리고 중국 인민들은 저런 지도자를 모시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어보니 후진타오에 대한 나의 느낌은 50% 정도 적중한 것 같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후진타오를 토대로 나의 생각을 정리하자면,첫째, 공산당과 독재정치에 충실한 보수파라는 것이다. 특히 전임 지도자를 충실히 따른다는 것이다. 그 근거를 보면 후진타오는 강택민의 ‘3개의 대표’를 공산당 제 16회 총회의 기본이념으로 한다고 하였다. 반대파가 잡지에서 ‘3개 대표’에 대한 이의를 게재하자 관할 부서에 휴간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는 공산당 독재 하에서만 가능한 언론 통제이고, 강택민에 대한 지지와 계승을 표명한 것이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 자체가 공산당에 충실한 것이지만 티베트에서 소요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은 공산당의 독재의 힘이 있기에 가능 했던 것이다. 그리고 티베트인 간부들에게 한족과 티베트인의 일치단결과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다.둘째, 매력적인 인품의 소유자이다. 그 특징을 몇 가지 말하자면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성실한 업무로 지역사람들과 호요방의 신뢰를 획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메모를 보지 않고도 계속해서 말을 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고 이야기가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평가했다. 또 청년당 중앙 간부시절 지방시찰 전에 미리 비서를 통해 지방의 청년간부에게 접대를 하지 않도록 시킨 일화를 보면 그가 권위적이지 않고 청렴결백한 성품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그 외, 친절하고 부하의 의견을 수렴하고 부하에게 화를 내지 않는 등 책에 나와있는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세 번째로 적을 두지 않으며 약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원만한 인간관계로 적을 만들지 않았으며 상대에게 미움을 사는 경우가 없었다. 적과 약점이 없는 것은 그의 인품에서 기인하겠지만 나는 그가 자신의 훗날 정치적 약점이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식견과 능력을 갖췄다고 본다. 상대에게 약점이 될 만한 말은 절대 하지 않으며 민감한 부분에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고 신중했다. 그 예로 그는 천안문 사태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나라 안팎의 복잡한 배경이 있었다고 인정을 했지만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언급을 피했다. 그리고 옛 근무지 감숙성을 공식 방문할 때 옛 직장은 일부러 방문하지 않았다. 기념비 건립 등 물의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려 했지 때문이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을 피하는데 이는 태주인이 지도자로부터 뭔가 혜택을 바라는 것을 방지하는 의도로 보여 진다. 그리고 권력을 승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방문 중 언행을 신중히 한 것은 국내로부터의 비판을 피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넷째, 후진타오는 말단 조직부터 근무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감숙성의 국장급 간부로 근무했고 지방 공산당 서기로 귀주성에 부임하여 3년 반 만에 평균수입 200원 이하의 빈곤인구를 22%에서 7%로 감소 시켰고 취학연령의 아동 입학률을 85%에서 90%까지 상승시켰다. 그리고 티베트 자치구 공산당 서기로 취임하여 소요사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