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방 직후의 친일 진상규명 활동1945년 광복을 맞은 이후 신생 대한민국의 가장 큰 과제는과거 일제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린 친일파들을 숙청하여 왜곡되고 말살된 민족 정신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 군정의 포고령에 의해 일제하 행정기관의 관리들이 그대로 임용되어 쓰이면서 친일파 청산은 시작부터 다소 불안한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그럼에도 친일파를 숙청하고 민족 정기와 국가 정통성을 바로 잡으려는 각계각층의 노력과 국민적 열망에 힘입어 친일 진상규명 활동이 시작되었다.1945년 10월 26일에 천도교 대의원회의가 친일파 최린을 출교 처리했고 11월 9일에는 미 군정청 특사와 강원도 각 군 대표들이 친일 관리 숙청에 합의했다. 12월 5일에 조선 공산당이 연합국에 보내는 성명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숙청을 결의했으며, 12월 10일에는 대한독립협회가 민족반역자 규정을 발표했다.1946년 1월 30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소집요강에서 선거권, 피선거권 박탈규정(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을 정했고, 2월 4일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심사위원회 등 전문위원회를 설치하였다. 2월 13일에는 경기도 경찰부의 내부 숙청으로 악명높은 고등계 형사 출신 김성점이 구속되었고 2월 17일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규정을 발표하였다.1947년 1월 22일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지방선거 행동강령 중 친일파에 대한 규정이 발표되었고, 4월 14일에는 경성법조회의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규정안이 발표되고, 6월 12일에는 북조선노동당이 미, 소 공동위원회 공동결의 6호 답신안에서 친일파 규정을 발표했다. 7월 2일에는 과도입법의원의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 전범 관련 특별법률조례가 발표되었다. 1948년에는 대표적인 친일 진상규명 서적인 민족정경문화연구소의 ‘친일파 군상’이 출간되었다. (해방 직후에 친일파의 죄상을 밝혀내고 연구한 서적은 위의 ‘친일파 군상’을 비롯, ‘민족정기의 심판’, ‘반민자 대공판기’, 진행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반민특위’이다.1948년 8월 5일에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9월 7일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법안은 9월 29일에 공포되고 반민족행위조사 특별위원회의 구성동의안이 가결되었다. 이른바 ‘반민특위’의 출범이었다. 10월 1일에서 11일까지 10명의 조사위원이 선임되었는데 그 자격은 ‘국회의원 가운데 독립운동의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지키고 애국의 성심을 가진 자,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였다.10월 23일에는 반민특위 1차 위원회가 조직되고 곧이어 무장조직인 특경대가 창설되었으며1949년 1월 5일에 반민특위 사무실을 개소, 업무에 들어갔다.반민특위는 지방에서도 활동했다.(친일파가 서울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따라서 각 지방의 조사부를 신설하였는데 도 조사부 책임자, 조사관, 서기는 각각 도지사, 국장, 주사와 대등한 서열이어서 상당한 파워가 있었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중앙 조사위원들과 지방 조사관들이 친일 혐의자를 샅샅이 가려내면 특경대가 잡아들여 특별검찰부에 넘기고 특별재판부의 재판이 열리게 되는 식이었다. 특별검찰부를 이끌었던 특별검찰관은 국회의원 5명, 법조계 2명, 일반사회분야 2명으로 배분되었다. 특별검찰관장은 당시 검찰총장인 권승렬이었으며 특별재판부장은 당시 대법원장인 김병로였다. (그야말로 막강 진영이다!!)화려하게 스타트를 끊은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을 제 1호로 잡아들였으며 13일에 최린 체포, 25일에는 노덕술을 체포했다.(용감무쌍한 특경대원들 앞에 친일파 노덕술의 쌍권총도 무력했다...) 2월 7일에는 최남선, 이광수가 체포되었고 도합 682건의 사건을 취급하였다. (특위 조사관들의 조사와 일반 시민들의 투서, 제보가 함께 이루어졌다.)그러나 애초에 반민법이 3권 분립에 어긋난다며 공포를 거부하기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2월 15일에 반민처벌법 개정의 필요성을 특별담화로 발표해 반민특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하려 했던 것이 있다. 다행히 백인태가 자수하여 미수에 그쳤다.(숨겨진 양심...) 또한 5월 말에서 6월 초에 일어난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인해 특위 활동에 적극적이던 소장파 의원들이 대거 체포되는 바람에 특위는 추풍낙엽의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특위활동 방해의 클라이막스는 뭐니뭐니해도 ‘6.6 사건’ 이라 할 수 있다.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특위활동 반대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 들통나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당하자 그 보복으로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내무차관 장경근의 사주를 받고 1949년 6월 6일 아침 7시에 남대문로 2가의 특위 사무실에 난입한 것이다.‘친일 세력의 친위대’ 경찰. ‘친일 청산의 돌격대’ 특경대. 이들의 한판 승부(?)는 경찰의 완승으로 끝났고 서슬 퍼런 기관단총 앞에 특경대는 낙화처럼 스러졌다.그날 특위의 주요 서류들은 모조리 압류되었으며 특경대원과 직원 등 수십 명이 은팔찌를 차고 오랏줄에 묶여 끌려갔다.(시민 3명이 직원 면회하러 왔다가 같이 끌려갔다.)국가의 공권력이 국민의 여망을 받든 국회의 결정을 짓밟은 것이다. 아무튼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반민특위의 ‘총구’ 특경대가 그렇게 최후를 맞음으로써 특위의 해산은 초읽기에 들어갔고 곧 공소시효기간을 1년 1개월이나 단축한 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8월 22일에는 폐지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특위는 정식 폐지되었다.(특위의 전적은 취급건수 682건 가운데 재판종결건수 38건, 체형 12건 가운데 집행유예 5건.그러나 감형, 재심청구, 공소시효만료 등으로 처벌받은 친일파는 하나도 없었다.)2. 현대의 친일 진상규명 활동반민특위가 아련한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후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각계각층에 뿌리를 내렸고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도 친일 진상규명은 더 이상 사회의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가려내 심판대에 세우려는 시도는 여지없이 거센 저항을 받아 분쇄되었기 때문이다. (문민정부 등장방 후 첫 공식행사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학술대회’를 열어 친일파 청산문제를 본격적인 논의의 장에 올려놓았으며, 1997년엔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들의 재산몰수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2002년 2월 28일에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여야 국회의원 모임’이 관련 전문 인사와 함께 광복회가 조사, 선정한 700여명에 이르는 친일파 명단을 심의를 거쳐 발표했다. 8월 14일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실천문학사, 민족문제연구소가 일제하 `문필보국`이란 명목으로 친일에 앞장섰던 대표 문인 42명의 명단을 공개하기로 했다. 또한 서울대 친일잔재 청산위원회가 서울대 출신과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던 친일인물 12명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친일 진상규명 활동 중에는 단연 문학 분야가 선두를 달렸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가 ‘한일문학의 관련양상’을 통해 심도있는 접근을 시도했다.사학 분야에서도 강동진 교수가 1920년대에 민족주의자들이 친일파로 변질되는 과정을 조명한 ‘일제의 한국침략 정책사’를 펴내었고 백기완 등 12명이 저자로 참여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나와 친일 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1991년 ‘제 2의 반민특위’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친일 연구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 연구소의 대대적인 학술, 출판 활동에 의해 해방 후 활동한 정, 관계의 친일파 명단이 거의 완전하게 정리됐다. 한상범 소장은 1991년 ‘역사 비평’에 ‘한국 법학계를 지배한 일본 법학의 유산’을 발표하기도 했다.종교 분야에 관한 연구도 진행되어 불교 쪽에는 임혜봉 스님이 교단 내 친일과 항일을 정리했다. 개신교와 관련해 최덕성 교수는 ‘한국교회의 친일파 전통’을 발표했다.김삼웅 선생은 1992년에 3권의 ‘친일파‘ 시리즈 출간을 시작으로 친일연구가인 정운현 씨와의 공저 ’친일 연구’를 비롯, ‘친일정치 100년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역사를 움직인 위선자들’, ‘사료로 보는 20세기 한국사’, ‘한국현대사 바로잡기’ 등 왕성한 출판 활동으로 친일파들의 과거사에 대한 논쟁이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 언젠가는 반드시 거쳤어야 할 일이 지금 일어난 것이다.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규명과 반성은 후대에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앞으로의 발전에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성원으로서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기에 왜곡되거나 조작되지 않은 철저한 과거사의 규명은 반드시 필요하다.과거사 규명의 가장 큰 타깃은 우선 친일파와 그 후손일 것이다. 해방 후 이어진 좌, 우익의 대립으로 친일 청산은 뒷전으로 미뤄졌고 오히려 그들이 대한민국의 지도층으로 부상함으로 민족 정서와 국가 정통성에 타격을 입었다.친일파 청산의 사령탑으로 여겨진 반민특위 또한 친일 잔재의 굴레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니 반민특위의 수뇌부 상당수가 일제시기 법관, 관리, 친일 협력자로 밝혀졌고 조사위원의 자격을 완벽히 갖춘 ‘순종’ 은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실패한 것은 친일세력의 방해도 있었으나 특위 내부의 모순과 문제점도 그 이유였다. 지금 친일파 청산과 과거사 규명을 내세우며 활동하는 정치인들도 헌병 조장의 아들, 특별고등경찰의 딸로 밝혀지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으니 그야말로 ‘도둑이 도둑을 잡는’ 모순이 아닌가?친일파를 철저히 숙청해 민족 정신을 바로잡고 국가의 정통성을 세웠다 하여 국내 진보세력들의 칭송을 받는 북한 역시 친일 잔재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부주석), 남로당의 2인자 이승엽(당 중앙 비서), 갑산파의 거두 박금철(당 부위원장), 국내파의 김오성(당 중앙위원) 등이 일제에 전향한 전력을 갖고 있었으며 초기 북한의 군당과 리(里)당 비서들 중에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사상범 수사를 통해 공산주의 이론을 약간 습득해 공산주의자 행세를 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그렇다면 친일파를 완전히 청산하는 것은 ‘강철로 된 무지개’ 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이를 악물고 친일 반역도당(?)들을 일망타진, 발본색원해야 할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왜냐하면 친일파도 친일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