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동벌이(黨同伐異)-“누구 편이냐” 패를 지어 상대를 배척- 맹목적 정치인 팬클럽① “누구 편이냐”재작년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말로 교수들이 뽑은 대표적인 사자성어가 ‘당동벌이(黨同伐異)’였다. 교수 신문은 필진과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 등 교수 162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2004년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정리할 수 있는 고사성어로 19.8%가 이를 꼽았다고 한다.‘당동벌이(黨同伐異)’는 후한(後漢)의 역사를 다룬 『후한서(後漢書)』 「당고열전(黨錮列傳)」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중국의 후한 시대 황제의 외척과 환관이 득세하면서 무조건 같은 파벌의 편을 들고 상대 파벌을 배격했던 역사적 상황을 빗댄 표현이 ‘당동벌이(黨同伐異)’다. 그 결과 후한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교수신문은 연초부터 정치권이 정파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 것이 배경이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대통령 탄핵이나 행정수도 이전, 국가보안법.언론관계론.사립학교법.과거사규명법 등 4대 개혁법 개정을 둘러싼 여야 대립에서 당리당락만 보였을 뿐 상대를 설득하는 논리나 합리적인 대화는 없었다는 것이다.우리 사회에서 대표적인 식자(識者)층인 교수들이 이런 고사성어로 우리 사회를 현상을 지적한 것에 대해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고 찬탄해야 될까?우리 사회에서의 교수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따라서 그들의 현실 진단은 많은 국민들의 사유의 틀과 방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지적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지성이 아니라 냉소성이다. 또한 어느 한 부분 부분을 강조한 나머지 전체 사회 현상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당동(黨同), 즉 같은 생각과 처지의 사람들끼리 무리 짓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당장 우리 사회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금방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자기와 다른 무리를 대하는 방식은 시대가 지나면서同伐異)’라는 말은 절반은 타당하고 절반은 부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나아가 ‘당동(黨同)’이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타당한 나머지 절반조차도 하나마나한 평가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말이 언론에 노출되고 각광받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인간사회의 보편적 현상과 그 현대적 적응 방식에 부적응하고 있다는데 있다. 사회생활 특히 정치적 영역처럼 첨예한 인간관계가 대립하는 곳에서는 ‘당동(黨同)’은 당연한 현상이다. 당동 현상 자체를 부당하다고 진단하는 그 자체가 인간사회의 보편적 현상을 부정하는 부당한 주장이다.문제는 ‘벌이(伐異)’라는 부분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다름을 인정할 때 꽃을 피울 수 있다. 이는 인류의 역사적 경험에서 얻어진 진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립의 당사자 입장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하여 제도적으로 다름의 인정을 요구하는 체제가 다름 아닌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② 정치인 팬클럽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치인 팬클럽이야말로 ‘당동벌이’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한때 정치인 팬클럽은 “낡은 정치를 바꾸는 한국 정치의 희망”으로 상찬되었다. 재미와 참여로 무장한 네티즌의 정치 참여는 자발성과 네트워크성을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치문화의 탄생으로 인식되었고, 그 본질적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정치인 팬클럽의 맹목적 지지와 과잉 애정, 그리고 경쟁 정치인에 대한 배타적 발언은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자신들이 좋아하는 정치인을 위해 인터넷이든 거리에서든 지지를 표명하고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나누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지만 경쟁 정당이나 정치인의 아픔을 조롱하고 그들의 성취를 폄훼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만 옳다.”고 콩깍지 낀 소리만 한다면 배타적인 독선일 따름이다. 과도한 정치적 욕망을 해당 정치인에게 투사한 채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이 아니면 안 랑’과 ‘박사모’, ‘시민사랑’과 ‘명박사랑’, 그리고 ‘정사랑’ 등으로 이어지면서 끝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짐짓 사랑의 순결함으로 정치판의 불결함을 정화(淨化)하려했을 터이지만 그 정성은 가상하나 나의 사랑으로 상대방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이 ‘사랑’이란 말이 한국 정치의 낯익은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은 사적이며 은밀하다. 차가운 이념이나 공적인 정책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교감과 정서적 교류가 중요하다. 이성보다 감성, 실재보다 이미지가 더 깊이 요구된다.정치인과 유권자는 인격적으로 연결되어 강력한 정서적 동일성의 원리가 작동한다. 여기서 ‘제도로서의 정치’가 실종되고 일종의 ‘정치의 인격화’ 현상이 발생한다. 과거에 ‘선생님’을 비난한다고 싸움했다는 일이 지금은 팬클럽 게시판에서 더 과격하고 지능적인 방법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도 그 까닭이다.인격화된 정치에서 ‘사랑하는 이(정치인)’의 고통과 성취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어렵다. 공적인 비판도 사적인 비난으로 오해하기 쉽고, 정당한 질책도 외부로부터의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사소한 비판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이 인격화된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일부 박사모 회원의 반박(反朴) 의원들에 대한 가혹한 비난이나 노사모의 노무현 친위대 논란은 정치인 팬클럽이 한국 정치의 퇴행적 습속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한국의 팬클럽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사랑’이란 이름의 문패를 내려야 한다. 사랑은 맹목적으로 흐르기 쉽고 과잉을 통해 그 숭고함을 자랑하지 않는가.동병상련(同病相憐)-장애인 문제에서만은 예외이어야 할 동병상련의 법칙-북핵 사태에 대한 한국&중국, 북한&이란① 장애인 문제에서의 동병상련국도변에서 ‘낙석 주의’ 표지판을 볼 때마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쩌라고?’ 같은 개그적 의문이 절로 생겨난다. 차의 속도를 늦추고 조심스럽게 가라는 것인가, 아님 돌이 떨어지기 전에 쏜살같은 속도로 지나치라는 것인가, ’ 푯말은 그 사고를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는 행정기관에게 최소한의 면피의 근거가 된다.아직도 우리나라 행정기관의 일처리 방식에서 ‘낙석 주의’식 태도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얼마 전 양팔장애가 있는 여성이 어렵게 통과한 운전면허 기능시험이 물거품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기능시험을 통과한 뒤 1년 안에 도로 주행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학과시험부터 다시 치러야 하는데, 서울의 한 지자체가 예산부족과 사고가 날 경우 보험처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도로주행 연습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지자체는 전국을 통틀어 한대밖에 없다는 족동차(두 발만으로도 운전할 수 있는 장애인 특수차량)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전용연습장에서 연습을 해 기능시험에 합격한 장애인의 처지에서는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서울시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으면서도 주행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지자체의 실천의지가 부족하다는 게 장애인 단체들의 주장이지만, 10년 전부터 국내 최초로 장애인운전 연습장을 개설하고 시각장애인 축구장 운영 등 다른 곳보다 더 장애인 복지에 신경을 써왔던 해당 지자체의 심정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다른 자식들이 거북해 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아예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다른 며느리들에 비해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다소 억울한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동권과 같은 최소한의 기본권을 확보하려는 장애인들의 절박함 앞에서 그런 억울함은 사치에 불과하다. 족동차를 구비하고 무료 기능교육까지 했으니 주행교육에 필요한 특수 차량은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의 답변은 낙석주의 표지판과 다르지 않다. ‘장애인들의 인권보호와 사회적응을 돕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자동차 운전면허 취득이라고 생각 한다’ 는 해당 지자체의 지론이 진심이라면 ‘목마른 사람이 우물파라’ 는 식의 태도는 옳지 않다.2년 전 국내에서 처음으로 족동차를 만든 이는 두 다리를 못 쓰는 지체1급 장애인이다. 그는 20여 년 전에 자신이 운전하기 위해하려고 애쓰는 것을 본 직후다. 돈벌이가 되지도 않는 일에 2년의 시간과 1억5천만원의 비용을 들였다. 나는 장애인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사회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는 속담이나 ‘동병상련’의 고사성어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건전지가 없어 방치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하다. 그런 시계를 가리켜 그래도 시계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정확성은 있는 셈이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부조리극이다.장애인 문제에 관한 영역에서는 동병상련의 감정법칙이 통용되지 않을 수 있어야 성숙한 사회다.② -1. 북핵 사태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동병상련한반도에 밀려든 핵구름은 과연 어떤 기상이변을 초래할 것인가북한의 핵실험 강행이 몰고 온 엄청난 파장에 동북아가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관련국들의 손익계산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 그리고 열강들의 물러설 수 없는 기 싸움이 팽팽하게 전개되면서 한반도가 또다시 거대한 격동에 휘말리고 있다. 일단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이 과거 중국. 러시아와 함께 형성했던 '북방벨트'에서 거리를 둔 채 홀로 서 있는 듯한 양상이다.마찬가지로 한미일 3각 공조 틀에서 얼마 전부터 거리를 두려 해온 한국의 경우 미국과 일본의 압박 공세 속에 더욱 고립위기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다.특히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을 응징하려는 미국이 예상보다 공격적으로 나오면서 한국은 고심하고 있다. 유엔 결의가 나오면 이를 준거로 대북 정책 전반을 다시 살펴보겠다고 약속한 터여서 어떤 형태로든 결과물을 내놓아야 할 처지다.북한을 축으로 한 중국과 러시아 관계도 급변하고 있다. 군사행동을 배제하긴 했지만 북한에 엄청난 충격을 출 경제제재가 망라된 안보리 결의안에 두 나라도 찬성했다.여기에 중국은 이미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화물검색을 강화하고 은행창구에서 대북 송금을 제한하는 등 실질적인 제재에 착수한 상태다.상대적으로 북중간 틈새를 파고든 러시아도 조만간 미국이 대북 제재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다.
서론- 물음(“인간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본론- 제기 가능한 여러 입장과 그에 대한 반박1. 종교적 입장- 신의 명령(1) 신이 내리는 상벌(2) 신에 대한 숭배와 믿음(3)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2. 보상의 차원(1) 자기 이익- 합리성(2) 내면의 행복감(3) 양심에의 충실3. 집단에 속해 있는 구성원(1) 상호간의 이익(2) 도덕이 지닌 상호.주관적인 가치4. 단지 ‘옳기 때문에’결론- 나의 종합적 입장과 답변에 대한 한계=>‘인간’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삶은 당위성을 지닐 수 밖에 없다.*물음(인간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요즘과 같이 성공과 성취, 효율성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산출과 결과에 의해 행위가 평가되는 것이 상식인 세상에서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까? 우리들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가끔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어렵고,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성실하기 위해 행복, 심지어는 생명까지 희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도덕을 간단히 거부해버리고 무도덕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가?“인간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이 물음은 도덕 그 자체에 대한 일반적으로는 전제되어 있는 것에 대한 물음이다. 이는 도덕적 관점 바깥에서 물어지는 도덕적 관점에 관한 물음이다. 그러나 도덕적 관점이란 무엇인가? 도덕판단의 보편화 가능성이 윤리를 윤리 아닌 것과 구별하게 해주는 특징이다. 윤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개인적 관점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관점을 취하는 불편부당한 관망자의 관점을 취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견해가 받아들여진다면, ‘인간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나는 왜 보편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질문은 개인적 행위근거를 넘어서서 보편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 판단에 근거해서만 행위할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1. 종교적 입장- 신의 명령(1) 신이 내리는 상벌이러한 질 말하지 않고 “이것은 선하기 때문에 신이 명령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이러한 추론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신이 *을 명령하는 어떤 이유가 있고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을 하도록 신이 명령하지 않아도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을 선하다고 생각했다면 신이 명령하든 하지 않든 그것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을 하는 이유는 사실상 신의 명령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을 하는 것은ㄴ 그것이 선하다고 당신이 생각했기 때문이지 명령했기 때문이 아니다. 신은 옳은 것의 창조자가 아니라 일종의 격려자이고, *은 신의 명령과 관계없이 옳다고 할 수 있다.(2) 신에 대한 숭배와 믿음당신이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까닭은 상벌 때문이 아니라 신은 사랑하고 숭배해야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숭배와 존경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가 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확실히 해야 하고, 다음으로 그 사람이 내린 명령이 그 자체로 선한가를 확실히 해야 한다. 같은 말이 신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사랑과 존숭감을 가지고 신의 명령에 복종하지만 우리가 믿는 신이 사랑과 숭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이 먼저 결정되는 경우에만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3)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도덕적 행위에 대한 종교적 입장에서의 또 다른 대답이 있다. “신은 우리와 세계를 창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존재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그가 바라는 대로 행위 해야 하는 그의 피조물로서만 존재할 다름이다.”)그러나 이러한 논증에는 결함이 있다. 어떤 존재가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용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 같은 능력의 사용이 선하다 든가 또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복종을 받을 응분의 자격을 갖추려면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선해야 한다.2. 도덕적 보한 오해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브래들리는 이를 유려하게 표현했다.왜 내가 도덕적이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 도덕이 나에게 이익이 되겠는가라는 의미로 물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럴 때 덕의 즐거움에 대한 모든 칭송은 안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덕의 즐거움이 악에게 있을 수 있는 모든 쾌락보다 높을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덕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덕의 쾌락을 이유로 덕을 추천할 결심을 할 때, 우리는 도덕적 관점을 포기하는 것이며, 덕을 비하하고 매매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자기이익이라는 이유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유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이익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옳은 행위가 당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당신은 그같은 행위를 하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같은 행위를 해야하는 이유는 아니다. 부도덕한 행위라도 당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익이 된다는 것이 행위의 이유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2) 내면의 행복감위 입장의 한 변형으로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B.C. 427~347)은 그의 고전적 저서 에서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로 위에 제시된 이유가 그리 합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선에 대한 보상이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악하다고 오해를 받는 선한 사람은 지극히 불행해 질 것이며 선하다고 여겨지는 나쁜 사람은 지극히 행복할 것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스스로가 선하다는 인식과 함께 그에 따른 감정적인 만족을 갖지만,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유덕한사람으로 오해할지라도 여전히 불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자기가 선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행복하다.대중의 평가에 따른 도덕적 보상의 개념을 거부하면서 플라톤은 다른 방식의 -내면의 행복감-으로 도덕적 보상을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다음의 구수 있고 설령 알려진다 해도 여전히 행복하다.윤리적으로 행위하는 것과 충족된 행복한 삶을 사는 것과의 연관성에 대해 논의 해보자.자비심과 동정심은 다른 사람들과 친근하고 호의적인 관계를 맺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으묘, 그러한 관계없이 실제적인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해서, 적어도 어떤 윤리적 기준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러한 기준에 따라 개방적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남을 속이는 부정직한 삶은 언제나 발각의 가능성이 지평을 흐리게 하는 은밀한 삶이기 때문이다. 윤리적 기준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한 기준에 맞추어 살지 못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 것 같다. 아니면 적어도 기준에 맞추어 살았을 때보다 덜 행복한 것 같다.그러나, 우리의 성격과 우리의 행복에 대한 전망을 연결시키는 이러한 주장은 가설이상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매우 다양해서, 어떤 종류의 성격이 행복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어떠한 변화도 모든 인간존재에 타당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또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의 쾌락 이상의 의미를 추구하며, 의미있는 것으로 보이는 일을 함으로써 충족감과 행복을 발견한다. 만약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의 행복외의 어떤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기로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획득했을 경우에도, 행복 그 자체는 여전히 우리에게서 벗어나 잇음을 발견할 것 같다.(3) 양심에의 충실자기이익적인 이유의 반대에 대한 한 대응은, 보다 중요한 것은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행위의 내용, 즉 실제적으로 행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도덕는 사회적 삶의 산물로서 사회구성원들에게 공통되는 가치를 갖도록 고무하는 기능을 한다. 양심에의 충실은 공동체의 관점에서 볼 때는 특별히 유용한 동기이다. 양심에 충실한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사회의 가치관을 받아들인다면, 언제나 사회가 중히 여기는 것을 향상시키고자 할 것이다. 게다가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동기로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하면 우리는 그같은 게임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게임을 하는 데 최선의 수단-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최선의 수단-이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지구에서 함께 산다는 점에서 되도록 다른 사람의 목적 추구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목적은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체제를 찾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살아가려면 우리 모두는 어떤 규칙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규칙-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복지를 존중하고 그들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규칙- 은 상호간의 이익을 낳는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러한 규칙을 준수해야만 하는 이유이다.대부분의 경우 규칙이 통용되는 집단에서는 규칙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모든 구성원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집단 구성원으로서 정직하게 사는 것은 그 행위를 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신뢰할 것이기 때문이다.그렇지만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당신 개인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예로 당신이 왜 도둑질을 해서는 안되는가? 생각해 보라. 그 까닭은 당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 집단의 사람들 전체 이익, 말하자면 ‘일반 이익’에 위배되기 때문이다.구성원들이 일정한 규칙을 지키는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더 낫다는 것을 일단 이해하면, 우리 개인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왜 이러한 규칙에 따라 행위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도덕은 자기 이익에 따르는 것을 억제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 모두에게 똑같이 이익이 되는 그런 원리의 체계다. 물론 도덕 규칙을 따르는 것이 자기이익을 따르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도덕 규칙을 따르는 것이 자기이익과 일치한다면 도덕과 자기이익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을 수 없고 자기이익을 억제하는 규칙을 가질 필요도 없다,. 따라서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도덕적이라 함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야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이익을 보는 경우에는 언제나 .
허준(許俊)의 작품 연구? 작가 허준(許俊: 1910- ? )☞이효석, 이태준, 최명익 등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당대최고의 소설가로 평안북도 용천 출생. 중앙 고보, 일본 호세이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와 만주 신경 생활을 거쳐 북한에서 김일성 대학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1935년에 시 를, 1936년에 단편 를 에 발표하여 등단한 그는 해방기의 현실과 인간의 내면 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한 작가였다.1945년 해방 후에는 좌익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주요 작품으로는 , , , , , 그리고 작품집 (을유문화사, 1946)이 있다.▷ 잔등(殘橙) ◁? 핵심정리◈갈래: 중편소설◈배경: 시간-해방 직후공간-만주, 청진등지◈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의의: 해방을 맞이하는 태도에 대한 새로운 조명◈주제: 식민지 시대의 분노와 복수심, 해방의 감격과 무질서를 뛰어넘는새로운 인간정신의 모색? 등장인물◎나(千): 화가. 지성인. 징용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내면적 성격의 인물.해방이 되자 만주 장춘에서 회령, 청진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두 가지 태도를 경험한다.◎방(方): ‘나’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 친구. 사교적. 행동적인 인물☆소년: 뱀장어를 잡아 일본인에게 팔지만 돈 많은 일본인들을 알아내어 한국인에게알리는 것이 본업=> 일본인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을 대변하는 인물.☆할머니: 국밥 장수. 일찍 남편을 잃고 외아들이 독립 운동을 하다가 옥사함. 아들의 일본인 친구도 죽는 데에서 일본인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는 인정 많은 인물☞ 패망한 일본인들의 거지 행색에 오히려 동정과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인물.? 구성◎발단: 친구인 ‘方’과 함께 장춘에서 청진으로 향함.◎전개: 열차를 놓쳐 ‘方’과 헤어짐.◎위기: 수성강 둑에서 뱀장어를 잡는 소년을 만남.◎절정: 청진역에서 국밥 장사를 하는 할머니를 만남.◎결말: ‘方'과 함께 다시 군용 열차로 청진을 떠나 서울로 향함.? 줄거리해방 후, 광복의 열기와 착찹함고, 독립 운동을 하던 아들마저 일경에 잃은 사람이다. 그런 불행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난민들에게 너그러울뿐더러, 일본인들에게까지 원한과 저주를 넘어 관대하고 동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인간 희망의 넓고 아름다운 시야’를 발견한다.‘나’와 ‘방’은 다시 군용 열차로 청진을 떠난다. ‘나’의 머릿속에는 국밥집 할머니의 잔등, 뱀장어를 잡던 소년의 잔등이 흐린 불빛으로 새겨진다. ‘나’는 해방된 조국에서 이국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남행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해와 감상1. 작품의 제목으로서 갖는 ‘殘燈’의 의미‘국밥 장사를 하는 할머니와의 만남’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할머니는 젊어서 일제에게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해방 직전에 잃게 된다. 그러면서도 쫓겨 가는 일본인 무리에게 따뜻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늦게까지 국밥집을 연다.☞할머니의 담담하고 조용한 삶 자체☞할머니가 보여준 ‘인생에 대한 애정’, ‘휴머니티’2. 해방직후(1945-1948 무렵) 발표된 다른 작가의 작품과 비교해서 드러나는‘허준의 현실 인식 태도’보통 당시 작가들이 ‘해방이 가져다 준 감격에 대한 흥분’ 속에서 작품을 형상화 한 것에 비해 허준은 냉정한 관찰자의 위치에서 해방기의 혼란을 그늘지고도 허무의 색채가 가득한 세계로 그려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해방 뒤에 다가올 분단의 시대를 작가가 미리 감지한 것은 아닐까..3. ‘길’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내용적 측면+형식적 측면= 해방 후 주인공과 친구 ‘방’이 장춘~청진~서울로 귀국하는 과정+ ‘길’이때 ‘길’은 해방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서 당시 해외동포의 귀환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탁류 ◁? 등장인물◎현철: 군청에서 일하는 지식인으로 자기 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도피하려는 성격과 허무주의적 성격이 강함. 조용하고 차분함.◎순이: 현철의 부인. 기생이었다가 현철을 만나 그의 아내가 됨. 현철과 반대의 성격을 지니 고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다.◎채숙: 초등학교 4학년으로 현철대대로 내려오던 갖바치 일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면서 산다. 하루는 철이 마루에서 손톱을 깎고 있는데 숙이 아버지가 와서 숙이의 탈 많은 학교생활을 이야기한다. 철은 숙이 아버지의 조리있는 말솜씨에 내심 놀라며 당분간 숙이를 학교 보내지 말라고 제안을 한다. 그러나 숙이 아버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철은 위안의 말을 찾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헤어진다. 그 뒤 철과 숙이는 자주 낭암대에서 손을 잡고 산책을 한다. 철은 숙이의 어른스러운 말투와 자신을 향한 마음에 놀란다. 그러나 철의 부인인 순이가 질투를 하여 집을 김씨네로 옮기게 된다. 집을 옮긴 뒤에도 철은 숙이를 만나고 순이는 더 걱정을 하게 된다.김씨네 집에는 보통학교 여선생도 같이 살고 있는데 순이는 그 여선생과 철이의 관계도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철에게 관계를 털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고 자신을 비하시키면서 철에게 결말을 내라고 한다. 철은 자신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자리를 피한다. 순이는 여선생과 숙자 어머니가 있는 방에 들어가 여선생을 은근히 떠보려 한다. 여선생은 운동회에 쓸 당목을 끊어 경성 여관에서 박아온다고 나간다. 순이는 그 여선생을 따라가서 경성여관에 들어가는 철이처럼 생긴 남자과 뒤이어 들어가는 여선생을 보게 된다. 사실 그 남자는 숙자 아버지였는데 오해한 순이는 집에 와서 소동을 부리게 된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철이는 순에에게 편지와 퇴직금을 준다는 위임장을 써놓고 떠나버린다. 다음날 일어난 순이는 철이가 떠난 것을 알고 칼을 들고 여선생에게 간다.? 이해와 감상1. 철이와 두 인간관계주인공 현철은 소시민 지식인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에 대한 믿음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있다.1) 아내 ‘순이’와의 관계철은 기생인 순이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구원받고자 했다.-->> 철 : 순이 =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 구원하는 사람그러나 철은 그것이 실패였음을 깨닫는다.철은 순이가 보이는 단순성, 세속성으로 뿐이었다.2. 작가가 말하는 ‘허무’와 비극적 결말이 의도하는 바- 소설 속 지식인의 허무는 지식인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 특정한 시대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임으로 해서 어쩔 수 없이 지니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인 허무의식을 말한다.-비극적 결말을 통해 인간에 대한 비관은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성을 이야기 하면서 존재의 허무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한다.▷ 습작실에서 ◁1) 줄거리나는 동경유학생이다. 나는 동경의 번잡한 하숙집을 마다하고 학교에서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 한적한 시골집에 세를 얻어 살고 있다. 집주인은 긴자에서 잡화상인가를 하는 아들과 어느 시골에서 중학교 교원노릇을 하는 작은아들을 둔 노인이다. 부자간이지만 의탁할 뜻이 없는 듯 내가 들어있는 집과 똑같은 집 세 채를 지어서 거기서 들어오는 세만으로 지내 가는 분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노인과 친해진다. 나는 방학이 되어도 집에 가지 않고 일본에서 산장으로 스키를 타러 가기로 했다. 스키를 타러가기 전날, 노인 방에서 차를 마시고 논다. 그 방에는 '인욕(忍辱), 무무명 역무무명진(無無明 亦無無明盡)'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스키를 타러 간 나는 아무래도 마음이 안 좋아 다시 내려가겠다고 하다가 모리 씨의 만류로 스키장에서 설을 보낸다. 그리고 나서 나는 동경으로 들어가는 기차 본선 속에서 내가 묵는 집주인의 둘째 아들을 만나 그의 아버지가 임종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이걸 좀 보아주십시오. 이것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준 파출부에게서 부쳐 온 아버 지의 유서입니다. 내 형도 임종은 지키지 못한 모양입니다."그가 내 무릎 위에다 꺼내 놓은 편지를 나는 사양 않고 손에 들었다.2) 작품이해허준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세계는 허무주의적 색채가 농도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그의 등단 작품인 가 허무 의식이 깔린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 주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그 후 에 발표된 와 에 발표되기 시작한 의 연작 형태 소설에서도 허무 의식과 고독감이후로 이어지는 노인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서술의 의미를 말하는 듯,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고독의 문제가 중심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바로 이 고독의 문제가 이 작품의 주제이다. 작가는 자신의 모습과 흡사한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서 생활에 파묻히거나, 생활문제에 급급해 하지 않는 생활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삶의 방식과 그 방식의 삶에서 나타나는 고독의 문제를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이 작품은 또한 특별한 사건이나 행위 없이 나와 노인과의 교제와 노인의 죽음을 통해서 느끼는 심리를 그리고 있다. 또한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면서 고백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통해 심리주의 소설의 모습에 접근할 수 있다. 심리소설이란, 인간 내면의 심리적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어 관찰과 묘사를 주로 하는 소설인데는 특별한 사건을 서술하기보다는 주인공 '나'와 셋집 노인과의 교제와 노인의 죽음을 둘러싼 주인공의 심리적인 상황이 중심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주인공 '나'가 지식인이며, 지식인의 자의식과 고독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심리 소설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3)심화학습노인의 죽음은 자신처럼 젊은 시절의 다분한 광기마저 서린 고독- 이는 자신과 남과는 무엇인가가 다른 것이 있으며, 또 있어야만 한다는 자존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독이라는 것이 또 스키 산장에서 쉽사리 타인과 합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는 허망한 것이 아닌 그야말로 스스로 욕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면서 그 삶을 참아 내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삶으로부터의 도피도, 그렇다고 삶에 대한 악착함도 아닌 '체관' 속에서 나온 고독인 것이다. 이러한 고독은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관계를 회피하지도 않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충실함이라 할 것이다.노인이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 두 줄의 글 '인욕'과 '무무명 역무무명진'이라는 불경의 한 구절이 그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이 작품에서 나타난 개별자로서의 인간 및 역사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은 인간으로서의 인
『내가 직업을 선택하고 준비하면서부딪히는 개인적 어려움과 대처방안』=개요=1. 대학의 name value- ‘지방대’2. 이 길이 나의 적성에 과연 적합한가?3. 무혈전쟁- 고학력 취업난4. 구체적인 정보 부족5. 고용상의 성차별- 여성이라는 꼬리표6.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불안감1. 대학의 name value- 지방국립대취업의 문제를 몸으로 부딪히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취업준비하면서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온다면 아마 선뜻 지방대생이라는 현실적 감점요인이라고 내뱉을 것이다.내가 정보에 무지한 탓인지 아니면 정말 철저하게 모를 수밖에 없었던 사실인지 얼마 전 뉴스를 보면서 실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보도 내용인 즉 취업난에 허덕이는 학생들이 공평한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였다.기업들이 소위 명문대 인기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만, 취업설명회를 열고, 가산점을 부여하며 원서를 준다고 하니 중하위권 및 나와 같은 지방대생들에게는 더욱 절망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다.졸업을 앞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에는 공개채용보다는 수시채용이 이루어지는 추세라 그로인해 고위 명문대 인기학과 학생들에게는 채용담당자나 모교선배들이 와서 원서를 돌리거나 스카웃 제의를 한다고 한다.물론, 어찌보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고급인력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호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학벌주의가 심해지고 너도나도 자격증 취득에 매달리니 자격증의 희소성도 떨어지는 추이다. 게다가 늘어가는 편입생에 텅텅 비는 지방대의 문제까지......,우선 가장 시급한 것은 한국기업들의 채용방식에서의 문제점을 시정하는 일이라 하겠다. 단지 학벌이나 주위 환경적 조건을 따지기 보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채용체계를 갖추고 정부 또한 이에 협조해야 할 것이다. 학교들 역시 학생들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과 든든한 지원을 갖춰 나가야 할 것이다.그리고 그에 앞서, 무엇보다 나 스스로 나의 value를 업데이트 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기업이 요구하는 어학실력이나 학점, 자격증, 인턴 경험이나 특이한 경력사항 등 나만의 경쟁력을 튼튼히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2. 나의 적성과 맞는 일인가?? 적성찾기 혼란말 그대로 적성이란 ‘알맞는 성질’, ‘직업에 관한 개인의 적응능력’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취업전쟁이라는 말이 난무할 정도로 취업이 어렵다하니, 실제적으로 요즘 대학생들에게 적성을 찾아가기란 배부른 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적성에 관계없이 오래갈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나 취업 그 자체에만 급급한 실정이다. 그래서 주위 절반이 넘는 친구들은 자신의 학과와 무관하게 혹은 자신의 적성은 따져 보지 않고 공무원 준비에 매달린다.그리고 삼성을 비롯하여 대기업은 대부분 인적성검사라는 명목 하에 검사를 실시하고 있는데 고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준비생들이 인적성검사를 위해 엄청난 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적성검사인지 반문하고 싶다.고교시절에는 대학입시에, 대학에서는 자유와 해방감에, 적성 찾기에는 무심했던 나 자신을 탓하는 동시에 우리 학생들에게 적성에 대한 교육을 뒷전으로 밀어놓았던 교육시스템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실제로 현재 나는 내 적성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그에 맞는 직업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때때로 과연 정말 내 적성에 맞는 일인지 의문스럽다.많은 대기업 입사자들이 회사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중간에 회사를 나오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자신의 적성을 잘못 찾은 결과라 하겠다.나 자신 개인에 대해 잘 알고 내 안에 있는 잠재력들을 깨워 그것들을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나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데 실패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3. 무혈전쟁- 고학력 취업난총칼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취업준비생들은 소리 없는 전쟁을 하는 중이다. 경기 악화와 무분별한 고학력 교육의 성향으로 소위, 우리는 취업전쟁을 겪고 있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에 비유될 정도로 취업의 문이 좁은 것이 현실이다.내가 준비하고 있는 기업 역시 1년에 1-2번 정도의 기회가 전부이고 몇 명 선발하지도 않는 실정이다.이러한 실정을 잘 보여주듯 심각한 실업난에 허덕이던 2004년 취업시장에 수많은 취업관련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예로 ‘토폐인-토익폐인’, ‘유턴족-사회생활을 하다가 학교로 돌아오는 부류’, ‘에스컬레이터족-편입학을 반복하며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부류’, ‘체온퇴직-체감 정년이 36.5세’ 등 웃지못할 현상이다.사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5년 후쯤에는 심각한 고령화현상으로 인해 취업난이 아닌 ‘인력난’이 생겨날 것이라고 한다. 그 5년 후 세대가 아닌 나로서 이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얻고자 하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당연하고도 막막한 답뿐이다.4. 구체적인 정보 부족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을 옮기는 데 가장 힘들었던 점 1위가 취업정보부족(19.9%)을 꼽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면서 정보의 중요성이 실로 크다는 것을 나 또한 몸소 체험하였다.대학입학을 앞두고 합격자 발표가 낫을 때, 나는 서울의 모 학교의 문헌정보학과와 지금 학교의 국어국문학과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하였다. 이유인 즉, 학교는 서울의 그 학교를 원했지만 문헌정보학과라는 생소함 때문이었다. 대학 입학 후 한참이 지나서야 문헌정보학과에 대해 안 나는 땅을 치고 후회했던 것이 사실이다. 대학 결정에서의 실수는 바로 정보부족 탓이었다.그런 배후 경험을 지닌 나는 다시는 정조 부족으로 인한 같은 실수를 취업의 문에서 거듭하고 싶지 않다.그러나, 지방대라는 이유로 수도권 기업의 채용관련 정보들을 충분히 얻을 수 없다는 문제들을 또 겪고 있다. 실제적으로 많은 취업관련 박람회들이 개최되고는 있지만 우리 학교 내에서는 거의 드문 실정이고, 얼마 전 SSAT에 관한 설명회도 학생들의 이러한 불만으로 인해 열렸다고 알고 있다. 학교나 지역사회, 정부에서 고루 학생들을 위한 타 대학과의 연계연합 취업설명회, 정보수집, 다양한 취업 강의, 프로그램 마련 등의 노력을 기우려 주길 간절히 바란다.나 자신 역시 학교나 다른 단체에만 의존하고 기대할 것이 아니라, 정보화 시대인 만큼 조금만 노력하면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인터넷과 대중매체를 십분 활용하고 주위의 선배의 조언이나 친구와의 정보교환을 통해, 공공 혹은 사설 취업기관을 통해 많은 정보들을 수집하고 그에 따른 대응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5. 고용상의 성차별- 여성이라는 꼬리표나는 이제까지 여성으로 살면서 그다지 불편하다거나 불행하다거나 차별대우를 당한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내가 여성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해하며 살아 왔다. 고용상의 성차별은 나에게 거의 처음이자 아주 큰 벽으로 다가왔다.한국의 남녀고용평등법 제2조에서 ‘차별’은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성별, 혼인 또는 가족 상의 지위, 임신 등의 사유로 합리적 이유 없이 채용 또는 근로조건을 달리하거나 기타 불이익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모집채용에서 승진, 정년에 이르는 노동의 전 과정에 걸쳐 합리적 이유 없이 남녀를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그러나 실제로 모집채용 시 성별직종분리는 승진에서의 차별로 이어지고 있고 여성에게만 연령, 혼인여부 등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동일자격(학력 및 경력) 임에도 직급차별이나 고용형태 차별이 있고, 직무수행과는 무관한 신장, 체중, 안경착용유무 등의 신체적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행태이다.
“열린 유교의 품에 안기는 날을 꿈꾼다.”솔직히 유교라 하면 딱 떠오르는 수식어는 ‘고루하다, 재미없다, 현대 사회와는 너무 괴리감이 크다, 구시대의 버려야 할 유물, 갑갑하다’ 등의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 뿐이였다. 이는 나만의 경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내 나이 또래가 가지는 생각일 것이라 확신한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여기면서도 완전히 유교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 지금부터 무엇이 우리가 유교를 타도해야 할 구습정도로 치부하게 만들었는지, 실제 유교의 본질이란 무엇이고,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그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인지 나의 짧은 소견을 펼치고자 한다.지난 100여년 남짓 우리 역사는 개화와 근대화의 폭풍우로 유교를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의 억압윤리로 규정하고 타파해야 할 낡은 질서로 여겨왔다. 그 결과 사회의 표면에서는 유교적 전통문화의 옷을 깡그리 벗고 서구적 근대문화의 옷을 입고 있고 있다. 그렇다고 사회의 내면에서조차 전통문화의 알맹이인 누런 몸뚱이가 서양 사람들의 몸뚱이마냥 하얗게 변한 것은 아니다. 수천 년 전통의 유교문화를 단절시키고 새로 수용한 외국문화로 대체해버리기에는 그 전통의 뿌리가 너무 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안팎으로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우리가 유교에 대해 등을 돌리는 것은 유교사상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유교를 전통의 사회에 입각해 해석하고 결론지음으로 인해 현대사회와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우리가 현대 21세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면 유교는 여전히 조선 시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공존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오늘날의 한국 유교는 현실적으로 21세기를 살아가면서도 아직도 조선시대에서 지키던 전통의식의 굳은 껍질을 둘러쓰고 있다.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隨時變易)거나 시대와 대세를 알아야 한다(知時識勢)는 변혁의 논리는 유교의 기본인식이다. 그러나 시대에 따른 변혁은 판단의 지혜와 결단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하여 전통에 안주하고 구제도를 묵수하는 태도는 관습과 제도의 권위에 순응하는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현대 한국유교는 전반적으로 볼 때 자기변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폐쇄성과 보수성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유교는 전통을 묵수하는 가운데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의 한국유교가 과연 근대화의 거친 물결에 휩쓸려 익사하는 것으로 끝나서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고 말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오늘의 한국유교는 마치 거친 물결에 전복할 듯이 기울던 배가 다시 안정을 찾고 순항하듯이 현재와 미래에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가장 확실한 사실은 전통사회와 현대사회 사이에는 제도와 삶의 양식이 엄청나게 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전통유교는 그 형식의 전면적 변혁이 없이는 그대로 현대사회에 다시 살아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한국유교의 현대화는 전통양식의 과감한 탈피와 현대적 자기변혁의 구현으로서만이 가능할 수 있다.유교의 현대화를 위한 방법은 곧 현대사회의 요건에 적합하고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율성을 갖도록 변화, 재창조하는 것이다.그를 위해서는 유교이념의 재해석이 급선무이다. 누구나 제시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방법인 동시에 가장 어려운 방법이다. 유교의 제도와 행동규범은 봉건적 지배체제에서 민주적 평등체제로 변혁되어야 한다. 전통은 그 본질이 변혁과정의 축적이지 화석화된 형식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통제도는 우리가 참조할 자료는 되지만 언제나 지켜야 할 모범답안을 제공할 수는 없다.앞서 말했듯이 유교자체를 전면 부정 할 수 없다. 당장 옷을 맞춰 입더라도 우리의 체격치수에 맞게 맞춰 입어야 하고, 나무 한 그루를 심더라도 토양에 맞추어 묘목의 품종을 선택하고 물과 비료를 주어야 한다. 이처럼 유교전통을 우리의 체질적 기본요건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