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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태후와 근대중국 평가A좋아요
    Ⅰ. 서론Ⅱ. 서태후의 성장 배경과 성격1. 성장배경2. 이화원과 사치욕3. 잔인함과 권력욕Ⅲ. 서태후와 근대 중국정치1. 함풍제 시기의 서태후2. 동치제 시기의 서태후3. 광서제 시기의 서태후1) 청일전쟁2) 무술변법3) 의화단 사건4) 신정Ⅳ. 서태후에 대한 평가1. 긍정적 평가2. 부정적 평가Ⅵ.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청나라 말기의 여걸 서태후. 그녀는 3천년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서 황제를 제쳐두고 실권을 장악해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몇 안되는 여인 중 하나였다. 그녀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극히 낮은 유교 사회에서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회적 장벽을 넘어 중국대륙과 남성을 동시에 지배하나 희대의 여장부였다. 서태후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녀를 알 수 없으며, 그녀를 모르면서 중국의 근대사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혼돈의 세계에서 꿈을 키웠고 모순된 현실 속에서 정치를 배우고 결국 권력을 장악했다. 그래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은 영욕으로 점철된 근대 중국의 역사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서태후. 제국주의 열강의 대륙 침략이 시작된 때로부터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멸망하기 전까지 50여년 동안 3차례나 수렴정치에 나서 독단과 전횡으로 제국의 붕괴를 재촉한 역사의 이단자. 미천한 하급관리의 딸로 태어나 불같은 집념과 탁월한 지략으로 권력의 정산에 올랐고, 피의 숙청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과시한 철의 여인.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 백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은 5천명이나 되는 궁녀와 환관을 이끌고 온갖 사치와 음욕으로 세상을 농락한 에고이스트.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을 이기지 못해 한여름 밤 등불에 뛰어든 한 마리 불나비처럼 산 정열이 여인. 서태후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녀를 한나라의 여후(呂后), 당나라의 측천무후(側天武后)와 함께 중국의 3대 여걸로 평가하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함께 근대사의 3대 여왕이라고도 한다.)서태후의 정식해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그녀가 어떻게 권력에 접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녀가 대단한 야심가였다는 점에서 계획적으로 황제에게 접근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며, 그 점과 관련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녀가 고향 안휘성에서 황제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소패를 연주해 황제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그녀가 황제의 측근에게 선물 공세를 펴 황제에게 접근 할 기회를 얻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미모와 총명함으로 호색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가장 확실한 권력의 줄을 잡게 되었다.2. 이화원과 사치욕만권력을 장악한 서태후는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된다. 중국 사치 향락사의 핵심요소는 정원, 식사, 연극 등 세 가지로 이야기 되는데, 이 중 어느 면에서나 서태후는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和園)이다. 1888년 북경 교외 만수산(萬壽山) 기슭 곤명호(昆明湖) 부근의 풍광 뛰어난 곳에 엄청난 돈을 들여 화려함을 집결시켜 놓은 듯한 별궁 이화원을 조경했는데, 여기에다 전기도 끌어들이는 등 과거 어느 황제의 정원보다도 훨씬 쾌적하게 조성했다. 이를 크게 흡족해 한 서태후는 엄동설한에 자금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 외에는 모두 이곳에서 지냈으며, 곤명호의 버드나무 새싹이 날 때부터 잎이 질 때까지 이화원에 머무르며 정무를 살필 정도로 이화원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대단하였다. 이화원을 건조하는 데는 2천만 냥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이것은 1874년에 창설된 세 개의 해군용 군사비를 유용함으로써 충당되었는데, 당시 열강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고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서태후의 식도락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이 방면에서 이름을 날린 건륭제도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서태후 전용 부엌에는 항상 수백 명의 요리사들는 잔인한 방법들이었던 것이다.그녀는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가난 속에서 보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그녀는 애인을 버리면서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막연히 궁궐에 들어가면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꿈꾸었던 것이다. 어린 날 서태후의 꿈은 모호한 것이었지만 궁궐에 들어간 후 그 꿈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주와 미모로 황제 함풍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태후는 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고 일약 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황제 옆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으로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황제(동치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수렴청정으로 온갖 권력의 맛을 다 본 서태후에게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평생 자라지 않고 어린 황제로 있어주기만 바랬던 아들이 성장한 것이다. 발을 걷어 내고 정치 현실에서 떠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었다. 게다가 성인이 된 아들은 슬슬 황제의 권위를 세우려 하고 며느리마저 다루기가 쉽지 않은 명문가의 딸이었다. 아들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해야 할 어머니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권력욕 앞에서는 아들이든 아니든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다. 더불어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한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홍등가에 드나들며 열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린다.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서태후에게 동치제는 이미 아들이라기보다는 권력 다툼의 라이벌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를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두며,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도록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손자라는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어졌을 뿐, 실제로는 서태후 1인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물론 명목상의 지위는 동태후가 서태후보다 높았지만, 그녀는 성격도 나약한 데다가 교육을 받지 못해 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래서 신하들이 올리는 문서는 서태후가 먼저 읽은 후 그 뜻을 말로 전해주었다. 이런 상황이니 신하들과 국정에 관해 논할 때도 서태후가 주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고, 또 많은 경우 서태후는 동태후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아 일을 처리했다. 이로 인해 권력은 자연히 서태후에게 집중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정책적으로 억눌려 왔던 환관들의 공헌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 환관들은 서태후의 눈과 귀가 되어 궁중 내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그녀의 손발이 되어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또한 서태후는 그들의 충성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 환관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권력을 장악한 서태후는 공친왕과 함께 제도개혁을 통한 부국자강에 힘썼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사개혁이었다. 이전까지 청조는 정부요직을 만주인으로만 충원했는데, 그것은 우수한 문화적 역량을 가진 한인들을 국가 발전에서 배제시키고 오히려 한인들의 불만과 반감만 초래했다. 이런 이유로 서태후는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 한인 관료들을 등용해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1864년에는 드디어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했다.태평천국을 진압한 후, 청제국은 유럽의 군사기술, 군대편성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제국통치 체제의 재건을 꾀했는데, 이러한 서구문명도입 운동을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대체로 1860년대부터 1890년대의 청?일 전쟁이 일어날 때 약 30년 동안 추진된 자강(自强)운동이다. 따라서 자강 운동 또는 동치제와 광서제 때에 전개된 운동이어서 ‘동광신정(同光新政)’ 또는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도 부른다.) 또 이 시기에는 열강들도 청조에서 주전론을 펴던 숙순 등의 인물이 사라졌기 때문에 청나라와 화해하고 협 다투어 청조를 하이에나처럼 물고 뜯었다. 우선 독일이 교주만 조차권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에 대한 본질적인 할양 쟁탈전이 벌어졌다. 한 국가의 요구는 다른 국가의 요구를 자극했고, 결국 1년도 채 안되어 많은 영토가 열강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고 외국 관리가 통치하는 조차지가 되어 있었다. 열강의 침탈은 영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의 많은 전비와 배상금으로 재정적 곤란에 허덕이는 청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그 대신 각지에서 철도 부설권과 광산 채굴권, 기타 산업경영권 등을 얻어냈다. 그 결과 중국 경제는 점차 제국주의 세력에 지배돼갔으며, 그에 따라 중국의 식민지화도 한 걸음 더 진척되었다.청일전쟁의 패배는 중국인들에게 이전의 다른 패배보다 훨씬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게는 산업화에 뒤지고 근대적인 과학기술이 낙후해 패한 것이고, 따라서 그 패배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오히려 그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이후 청이 이른바 ‘양무운동’의 기치 하에 수십 년에 걸쳐 부국강병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18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에 유학생을 파견해 군사와 산업, 운수와 통신 등 여러 방면에서 근대 문화를 도입하고, 특히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많은 투자와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로부터 문화를 배워간 ‘작은’ 일본에게 완패 당했다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에 일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중화(中華)를 자처하며 선민의식에 안주해왔던 중국인들에게 그것은 충격과 분노와 함께 국가적,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2) 무술변법(戊戌變法)과 서태후청일전쟁 이후의 국가의 위기 상황에 나타난 사람이 강유위였다. 그는 매우 급진적인 개혁론자였다. 그는 서양의 사상과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과학기술과 물질만을 모방하는 데 그친 양무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구태의연한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정치인과 관리들이 국리민복보다 사익을 탐해 부패와다.
    인문/어학| 2007.11.10| 21페이지| 2,500원| 조회(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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