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法黨과 舊法黨의 대립과 갈등Ⅰ. 당쟁 발생의 배경1. 중앙관직체계와 당의2. 사회경제의 변화3. 돈으로 산 평화Ⅱ. 王安石의 신법추진과 갈등1. 神宗과 王安石2. 王安石의 新法3. 新法黨과 舊法黨의 대립Ⅲ. 新法의 추이와 대립의 격화1. 宣仁太后의 섭정과 新法黨의 퇴출2. 哲宗代 이후 당쟁의 변질3. 당쟁과 北宋의 멸망Ⅳ. 新法黨과 舊法黨 갈등의 의의Ⅰ. 당쟁 발생의 배경1. 중앙관직체계와 당의宋代 당쟁의 배경 중 하나는 관료제도이다. 그 중 송대에 실시된 과거제도는 당쟁 발생의 필연성을 제공했다. 송대에는 과거의 최종시험인 전시를 통과하면 진사가 되어 관료의 자격을 주었다. 하지만 최초에는 選人이라 하여 관료견습생이 되었다가 2~3년 수습 기간을 마친 후 비로서 관원이 되었다. 그런데 관원이 되는 과정에서 고위 관료의 보증이 필요했다. 이 때의 고위 관료는 이 후에도 연대책임을 져서, 보증을 받은 사람이 어떠한 중대한 과실을 범하는 경우 그 보증이도 그것에 연좌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특별히 밀접한 관계가 맺어졌고 이후 정치행동을 함께하며 파벌을 형성했다. 결국 이러한 파벌이 붕당 형성의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파벌이 이후 新法黨과 舊法黨을 나누는 기준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송 건국 초기부터 있던 江南人에 대한 華北 지방인들의 인식적인 측면이 오히려 이후의 송대 붕당의 근원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송이 북중국을 점유하고 있던 後周의 판도를 이어 받아 남방의 제국을 평정하고 통일되었기 때문에 송 초기에는 화북관료들이 중앙관료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남중국을 한 단계 낮은 지방으로 간주하였는데, 그 결과 강남관료들은 江外人, 南人 등으로 부르며 배척했다. 그런데 문제는 강남 지방 출신의 관료들이 송 초기부터 증대된다는 점이다. 북송 중기에 이르면 강남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관료가 중앙 정계에 진출했던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화북관료들보다 진보적이었으며 계산에 뛰어났기 때문에 재정분야에서료사회에는 이미 당쟁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원인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구조적인 측면까지 다양한 형태를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중앙 정계의 원인 외에도 사회경제적인 원인, 그리고 대외적인 요인이 이후 신법의 추진을 불러왔고 이는 결국 당쟁을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2. 사회경제의 변화송 건국 이후 100년은 이전 중국 역사상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던 시기였다. 적극적인 강남개발은 생산의 증대를 불러왔고 통일제국이라는 단위가 거대한 물류 시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 당의 제도를 계승하여 보강한 정도였던 사회경제정책은 시간이 흐를수록 한계를 드러냈고 100년이 지난 신종대에 이르면 사회경제적인 모순이 곳곳에서 문제를 발생시켰다.8세기 兩稅法 제정 이후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가 일반화되었고 토지를 집적한 신흥지주층, 토지를 잃은 소작인층이 형성되는 한편 그 중간에 두터운 중소 자작농층이 존재했다. 이들은 그 유동이 굉장히 심했는데 무산자로 전락한 자가 끊임없이 있으면서도 유산자로 상승하는 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지주층 · 자작농층 · 소작인층, 그 밖의 계층의 구성비가 극단적으로 변동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또한 송대는 농민의 토지소유를 기준으로한 지배체계를 구축했다. 이를 바탕으로 주객호제와 오등호제를 제정해서 국가에 대한 다양한 세역 부담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들이 내는 세금은 송의 주요 세정 수입이었고 결국 송의 존립을 지탱하는 기반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자작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1세기 중반 이후 대토지 소유가 늘어나면서 송의 기반이 되었던 중소농민이 몰락하였고 이는 송의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된다. 여기에 대토지 소유자가 자주 자기의 토지를 숨기는 등의 행동을 통해 소유지를 불분명하게 만들면서 호적의 혼란과 조세의 결손을 불러 국자재정을 악화 시켰다. 여기에 직역의 과중함도 점차 큰 문제가 되면서 농업노동의 불균형을 불러왔고 이는 곧 생산의 저하와 이어졌다.상업에 있어서도 북송 중기에 이르면 문제 지속된다. 하지만 이는 송의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외교였다. 세폐라 하였지만 이는 조공적인 의미가 강한 것이었다. 북송의 대외정책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038년 이원호가 송으로부터 이탈하여 국호를 대하라 하고 나라를 세운 것이다. 송은 이에 100만에 가까운 군대를 서북일대에 투입하는데 7년이라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 전쟁으로 송은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송도 문제였지만 서하 또한 송과의 무역이 불가능했으므로 물자가 결핍해져갔다. 그래서 양측은 1044년 강화조약을 체결하는데 여기서 송은 또 다시 세폐로 은 5만냥, 비단 13만필, 차 2만근을 지급하고 국경에 무역장을 개설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다.요 · 서하와 맺은 강화는 엄청난 양의 세폐를 매개로 맺어진 조약이었다. 결국 이러한 세폐는 송에 있어서 지속시켜서는 안 될 문제였다. 이러한 세폐가 지속된다면 결국 재정적인 문제를 야기할 것이 불 보듯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인 이상으로 북방 민족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가 송에게 큰 문제였다. 특히 요와 송의 대등한 입장에서의 외교관계는 화이론 그리고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송의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는 신종이 강경한 대외정책의 의지와 연결되며 왕안석이 추진하는 부국강병책의 요인으로도 작용했을 것이다.Ⅱ. 王安石의 신법추진과 갈등1. 神宗과 王安石왕안석의 등장과 신법추진은 그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신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왕안석과 신종은 어떻게 정치적 파트너가 된 것일까?신종대에 오면 송은 안팎으로 여러 가지 문제, 특히 재정 문제가 심각했음은 앞서 살펴보았다. 20세에 황제에 오른 청년 황제 신종은 이러한 송의 난관을 강력한 개혁정책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다. 특히나 거란과 서하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청산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한 외교정책은 군사력 강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 군사력 강화는 재정의 확충이 아니면 역시나 힘든 을 윤택하게 하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이루어냈다.시역법 - 이는 상인을 위한 법이었다. 당시 대상인들은 조합을 조직하여 시장을 독점하면서 대자본으로 물가를 조작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했고 이에 대조적으로 중소상인들은 피폐해져만 갔다. 더군다나 고리대금을 통해 중소상인이 대상인에 속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개봉에 시역무란 관청을 설치하고 지방의 주요도시에도 분국을 설치해서 중소상인에게 저리자금을 융자하면서 시장가격의 안정과 상품유통의 원활을 도모했다.농전수리법 - 농전수리법은 관과 민이 일체가 되어 대규모 황무지개간과 수리관개 공사를 수행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증대를 꾀하는 것이었다. 특히할 만한 점은 관리와 민간인을 불문하고 농경기술 및 수리개발에 대한 의견을 구한 후 실력 있는 사람을 관료로 특채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수리학이 발달했다. 공사비용은 농민으로부터 각출했지만 부족한 경우에는 청묘전을 융자하기도 했다.모역법 - 당시 북송에서 역법의 폐단은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였고 역법 개정은 정치적인 쟁점이었다. 이에 왕안석은 지방관 시절의 경험을 통해 기존의 차역법을 폐지하고 모역법을 시행했다. 특히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아전 등의 아역은 희망자를 모집하여 근무하게 한 후 급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대체 했다. 대신 차역을 부담하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재산에 따라 면역전을 징수하고 차역이 면제되던 관호와 사관 · 상인들에게도 조역전을 징수했다. 이에 덧붙여 흉작 등 불시의 지출에 대비하기 위해 면역전 징수에 관잉전을 부가했다. 모역법은 신법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그 시행이 매우 신중했다. 이에 개봉부에서 먼저 시험 시행 후 정식으로 시행한다. 모역법의 핵심은 대지주의 토지겸병을 막고 중소지주들의 차역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생안정 정책은 구법당 인사들도 인정하는 것이었다.보갑법 - 보갑법은 국민개병제를 기본으로 한다. 당시 국경지방에는 의용병이 있었는데 이들은 지역의 농민들을 훈련시킨 것으로 금군보다 유용했다. 왕안석은 정규군을 점차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능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시각이 차이가 있었다. 신법당은 ‘경륜’에서 찾았는데 그들은 도덕적 가치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공리를 추구했다. 반면에 구법당은 이를 타락한 것이라 비난하고 정명을 정치능력의 근본원리로서 내세웠다. 여기서 명은 신분과 지위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치제도에서 도덕적 행동 및 질서가 행해질 수 없으며, 어떤 훌륭한 국정운영도 올바른 정치수완보다는 편의주로 기울고 말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신법당과 구법당의 이념의 대립은 孟子 에 대한 평가에도 이어졌다. 맹자 를 유가경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당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문제로 송대에 들어서면서 신법당과 구법당간의 논쟁에까지 휘말려들게 되었다. 신법당의 경우 맹자가 이상적인 주의 옛 제도를 부활하여 기존제도를 개혁하려 하였으며, 또한 정치가라면 소홀해서 안 되는 백성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 중시한 철학자였다는 점에서 맹자를 매우 존숭하였다. 하지만 보수파의 경우 맹자 가 유교적 전통에서 벗어난 이단사상이며 제자들의 윤색으로 견강부회된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맹자 는 이러한 이단성과 견강부회로 인해 도덕적 판단과 신분질서의 원리에 대한 확고 부당함이 결여됨으로써 편의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이다.두 당파 간에는 이러한 정치적 이념의 대립 이외에도 대조적인 면이 많았다. 특히나 정치 · 사회적인 배경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앞에서도 살펴봤다 시피 당쟁이 배경 중에는 강남 출신의 관료 진출에 따른 화북인들과의 대립이 있었다. 이는 신종대에도 이어지는데 강남 출신 관료 대부분이 신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 확대와 이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화북출신 관료로 구성된 구법당은 이를 번번이 제한시켰다. 보수 세력이었던 구법당의 경우 인척 · 붕우 관계 등으용했다.
日本 中世時代 倭寇의 활동- 한반도 연안에서 활동하던 倭寇를 중심으로 -< 目 次 >Ⅰ. 日本 中世時代 倭寇의 의미Ⅱ. 倭寇의 발생과 그 원인Ⅲ. 한반도 연안 지역에서의 倭寇 활동Ⅳ. 倭寇의 소멸과 세력의 변화Ⅰ. 日本 中世時代 倭寇의 의미와 발생원인古代로부터 동아시아는 정치 · 경제 · 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연결의 통로는 바다였으며 해로를 통해 물적 · 인적 교류가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그 중일본의 경우 섬이라는 특징 때문에 바다를 통해서만 이러한 교류가 가능했는데 이러한 특징 때문에 日本은 일찍부터 해상활동이 활발했고 더불어 해적의 활동 역시 빈번했다. 이미 중세 이전부터 일본인 해적은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 출몰하였고 倭寇라는 명칭으로 역사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흔히 왜구라는 개념은 일본열도에서 발생하여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약탈하는 해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인 의미에서 왜구가 무조건 일본인 해적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왜구가 가장 먼저 출현하는 시기는 三國時代부터이다. 하지만 三國史記 나 ?廣開土大王碑?에 등장하는 왜구는 단순히 일본인 해적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군사집단에 가까웠다. 그들은 연안에 상륙하여 내륙까지 진출하였으며, 新羅의 수도였던 경주를 포위하거나 황해도 인근까지 올라와서 高句麗를 위협하는 군대였다. 中國에서는 元末明初 이래 사용된 왜구라는 용어가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일본의 대륙침략행위에 대한 일본의 다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왜구라는 이름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왜구의 의미가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일까? 왜구라는 용어를 해적 · 해구라는 용어로 사용한 것은 그런 행위의 피해자에 의해서일 것이다. 일본의 문헌사료에서 일본의 해적은 奈良時代부터 등장하지만, 平安時代를 거치고 중세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臣秀吉이 해적금지령으로 소멸될 때까지 한반도와 중국으로 활동 영역을 확대단이 단순히 약탈집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 말부터 등장하는 왜구 역시 해상 도적으로만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공통적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대외관계 내지는 대외교역이 국가 통제 하에 있었다는 점이다. 즉 대외교역은 엄격히 국가관리 하의 공무역만이 허가되었을 뿐이고 사사로운 무역 내지 상행위가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에 거역하는 무리들은 권력자나 국가권력의 입장에서는 해적과 다를 바 없었고 실제로도 해적 취급을 받았다. 이와 같이 해적에는 일반적인 의미에 가장 가까운 약탈 행위를 하는 무리들뿐만 아니라, 불법으로 상행위를 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왜구 역시 순수한 해적과 불법적인 상인을 구분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또한 상인들 역시 자신의 화물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는 것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상행위를 통제하는 권력자 혹은 국가가 이들을 해적과 구별하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이처럼 廣義로서 왜구가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만큼 일본 중세시대, 고려 · 朝鮮 그리고 元 · 명에서 인식하는 왜구 역시 통상적으로 약탈행위를 하는 해적뿐만 아니라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밀무역을 행하는 일부 해상 상인 집단 역시 왜구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Ⅱ. 倭寇의 발생과 그 원인왜구의 본격적인 활동은 1350년대로 파악된다. 이 시기 왜구는 狹義로서의 의미, 즉 약탈을 위한 해적이라는 의미가 강한 집단이었는데 밀무역상인 역시 포함하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구 활동의 원인으로는 일반적으로 왜구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의 출신지가 對馬島, 壹岐島, 松浦 지방 등과 같은 일본 서부의 島嶼지방으로 이곳의 지리적 환경이 대외교역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생존 자체가 힘들었고, 당시 일본이 南北朝 내란기로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발달된 항해술에 의존하여 한반도나 중국 대륙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고려나 중국과의 정상적인 무역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약탈적인 침구행위를 벌이게 되었다는 전부터 해적 집단이 존재했다. 헤이안 시대에 瀨戶內海를 이용한 상업유통과 해역 주민들의 열약한 생활환경에서 해적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내해 주변에 근거를 두고 있던 소영주들과 주민들이 생활고와 사회적 불안을 타파하고자 스스로 무력을 갖추고 재물획득을 목적으로 활동한 것이다. 平氏 정권 시기에는 송과의 정식 국교가 열리고 唐船이 오가게 되면서 권력을 쥐고 있던 평씨 정권이 불법적인 해상세력을 적극적으로 제압하면서 해적활동이 잠시 주춤하기도 했다. 하지만 肥前國 松浦郡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松浦黨이 헤이안 시대 말부터 중앙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약탈을 하는 해상세력으로 활동하면서 다시 해적의 활동이 보이기 시작한다. 鎌倉幕府 이후에는 상업유통은 발달했지만 열악한 환경이 지속되면서 자력구제의 방법으로 약탈이 더욱 활성화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과거에 유행하였던 선박의 탈취, 공물의 약탈, 선원의 살해 등과 같은 해적의 만행이 다시 행해졌고, 오히려 유통권의 장악을 목표로 하는 재지세력들이 해양활동에 가세하면서 九州와 세토 내해의 해적세력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 왜구로 전환되어 갔다.다음으로 정치적인 요인을 살펴본다면 권력에서 배제된 ‘海上 武士團’이 왜구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해상 무사단’은 가마쿠라 막부 성립 이전부터 일본 열도 연안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는 군사 조직이었는데 ‘源 · 平의 전쟁’에서 수군으로 동원되어 중앙의 권력 싸움에까지 참가하게 되었다. 이후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源?朝의 죽음으로 막부가 혼란에 빠지면서 이것을 기회로 公家 권력을 회복시키려는 後鳥羽上皇의 의도가 막부 토벌로 가시화 되는데 이때 일본열도의 정국은 ‘承久의 亂’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公家의 편에서 싸운 무사들의 대다수가 내해의 영주와 토착세력 즉 ‘해상 무사단’이었는데 公家가 패배하면서 이들 세력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때문에 해적으로 횡행하였으며, 일부가 왜구로 전화되었던 것이다.Ⅲ. 한반도 연안 지역에서의 倭寇 활동해적들의 행위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밝혀주는 사료로 9세기부터 1반적인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富를 얻기 위해 해로를 통해 운반되는 물품을 약탈하고 이를 자신들의 생업 기반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규모 해적뿐만 아니라 해상에서 유통을 장악하고 교역의 이익을 독점하려는 재지세력도 있었는데 이들은 생활고나 사회 불안 등과는 무관하게 부와 재물의 축적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해적이었다.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일본 중세시대의 해적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전의 해적이 일본 열도 내해에서만 활동했던 반면에 12세기 이후 왜구가 발생하면서 활동영역이 일본 외의 지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다.한반도 지역에서 활동한 왜구는 ‘13세기 왜구’와 ‘경인년 이후 왜구’로 나눌 수 있다. ‘13세기 왜구’는 현재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이나 도서 지역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庚寅年 이후의 왜구’는 忠定王 3년(1351) 130척의 대선단으로 현재 인천 부근의 자연도와 삼목도까지 올라와 침구하였으며, 恭愍王 원년(1352)에는 개성에서 지척인 교동도까지 대규모 선단으로 몰려왔다. 그 뒤 왜구 집단은 현재 평안북도 의주 부근이나 함경도 북청 일대 등 한반도 전역은 물론 중국에서까지 출몰하였다. 왜구는 행동양식에서도 변화를 보이는데 ‘13세기 왜구’가 남해안 지역을 약탈하고 물러났던 것에 반해 ‘경인년 이후의 왜구’는 철퇴하지 않고 연안 도서에 체재하거나 내륙 깊숙이까지 침입하였다. 이처럼 심화된 왜구의 침입양상은 지방행정을 마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연해지방을 無人지대로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왜구의 약탈행위를 넘어선 행동은 고려의 외교와 내정의 전 부문에 걸쳐 폐해를 끼쳤고 국가 존립 자체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그리고 왜구가 행한 약탈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들이 행한 약탈품이 일본 내의 시장에서 유통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내에 약탈품이 유통되었다면 지속적인 침입이 있어야 하지만 대규모 약탈 이후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잠잠해지는 현상을 보면 대다수의 약탈품에 대한 소비가. 倭寇의 소멸과 세력의 변화일본 중세시대 전반에 걸쳐 활동한 왜구는 豊臣秀吉의 일본 국내의 해상권 장악을 위한 ‘해적 금지령’과 함께 소멸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 과정 중에 해상권 장악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는데, 특히 세토 내해의 장악은 군수물자의 안전한 수송로 확보와 군사적 공략의 해상 교통로 확보라는 것으로 직결되므로, 당시에 국내통일과정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왜구가 소멸되는 환경이 조성된다. 왜구가 처음 발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 제한적인 대외무역이었는데 명에서 海禁 정책을 완화하면서 왜구가 소멸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명의 해금정책 철폐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사무역을 허용했으나 조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통일 이후 적극적으로 대 중국 무역을 추진하면서 왜구 소멸 배경의 미흡한 면을 보충하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과의 안전한 통상 교통로의 확보를 위해 1588년 해적금지령을 내렸고, 1592년에는 해외로 도항하는 선박에 朱印을 주는 주인선 제도를 발령했다.이처럼 왜구의 소멸을 주도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수군으로 전환시키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통해 자신 세력의 수군전력을 극대화 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일반적인 수군보다 오히려 왜구 · 해적 집단이 갖고 있던 항해 기술 · 실전 전투력이 훨씬 뛰어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실전에 강한 세력을 흡수 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의 수군이 한층 강화 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왜구 · 해적 집단이 보유하고 있던 뛰어난 해상기술로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하게 함으로서 효과를 배가 시켰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왜구 집단은 대륙침략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활용될 가치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를 통일한 이후에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의 재편성을 노렸는데 이를 위해서는 조선 혹은 명에서 활동했던 왜구를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여 이들을 활용하는 것이 꼭 필요한 된다.
江戶時代의 國學思想- 日本 近代時期 天皇制의 등장 배경 -Ⅰ. 머 리 말Ⅱ. 國學思想 발생의 배경Ⅲ. 本居宣長의 학문과 國學의 성립Ⅳ. 近代 天皇制의 등장 배경Ⅴ. 맺 음 말Ⅰ. 머 리 말天皇制는 日本의 역사 전개과정 속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일본은 古代時代에 천황제를 만들어 자신들의 군주로 삼았고 이후 현재까지 천황제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개 과정 가운데에 무사들에게 정국운영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천황은 단지 상징적인 군주의 이미지만을 갖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허울뿐인 천황의 모습은 일본의 中世와 近世時期로 불리는 기간 동안에 해당되는데 천황은 이 동안 京都에 갇혀 지내다 시피 해야만 했다. 그러나 明治維新을 기점으로 천황의 역할은 이전과는 달라진다. 유신지사들은 尊王攘夷論을 내세우며 천황의 권위를 다시 고대의 절대적인 것으로 돌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러한 천황우월주의가 유신지사들에 의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근세시기를 전후로 하여 일본 사회에 있던 國學思想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본고에서는 이러한 국학사상이 어떠한 경위로 형성되었으며 그것의 전개, 이후 일본의 근대시기 천황인식을 만드는데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Ⅱ. 國學思想 발생의 배경일본의 근세를 연 德川幕府는 그 사상적 기반이 단일한 사상적 체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諸藩들의 자치권을 인정했던 막부는 중국과 같이 과거제도를 통해 통일된 정치이론을 전국에 전파하지 않았고, 체계적인 정통이론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막부는 朱子學에 관심을 갖고는 있었으나 그와 동시에 다양한 사상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유로 주자학적 질서에만 입각하지 않은 세계관을 뿌리내릴 수도 있었다. 한편 中華體制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세계관은 明朝의 쇠퇴와 滿洲族의 발흥에서 오는 일본의 국가적 위기도 사상적 동향에 크게 영향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만주족에 의한 淸의 건국과 中原 석권은 일본인에게 中國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의식을 강화시킴과 더불어 蒙古의체현자로 자리매김하여 現人神으로 존재하며, 역성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萬代一系의 천황을 근왕의 도로 지켜온 일본이 중국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이 논리의 맥락은 초역사적 · 통시적인 일본의 상징적 군주로 천황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당시 쇼군을 한시적인 군주로 이해하고 있었음도 나타내는데 쇼군의 권력 역시 천황에게서 위임된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막부의 내부에서도 발생하여 1788년 쇼군의 보좌가 된 老中 마쓰다이라 사도노부(松平定信)는 쇼군에게 대한 봉서에서 “고인도 천하는 천하의 천하로,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일본의 국토는 조정으로부터 떠맡겨진 것이니, 절대로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쇼군이 되셔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직분인 것입니다”라 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근세 이후에는 현실적인 권력의 관계에서 밀려나 있던 천황의 입지가 다시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Ⅲ. 本居宣長의 학문과 國學의 성립국가의식과 천황에 대한 존숭의 인식이 강해지면서 근세 일본에서는 ‘국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학문적 기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江戶時代의 대표적인 국학자라 하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라 할 수 있다. 노리나가는 일본이 태양신인 아마테라스(天照)가 태어난 나라를 들어 일본의 우수성을 다음과 같이 논했다.스메라오미쿠니(皇御大國)는 입에 담아 말하는 것도 황송한 신의 선조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가 태어나신 나라이며, 만국에 비해 뛰어난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점에 있어서 현저하다. 나라라고 하는 나라는 이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은덕을 입지 않는 나라가 없다.노리나가는 이처럼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존귀한 스메라오미쿠니라고 칭한 것은 전 세계에 은혜를 베푸는 무상지존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가 태어나신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다른 나라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은혜를 입고는 있지만 태양신의 출신지는 아니기 때문에 일본과 차별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노리나가 황통을 전했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노리나가 이후의 일본 신국사상은 다른 나라에 일본이 우위에 있다는 논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노리나가의 신국사상은 후에 근데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이어지게 된다. 神國이라는 의식뿐만 아니라 노리나가는 천황제를 찬양하며 천황 존숭의식도 보였다.일본은 신이 다스리던 시대부터 군신의 구분이 일찍이 정해져, 군주는 본래 진정으로 고귀한 분인데, 그 고귀함은 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혈통에 의한 것이다. 신하 중에 아무리 덕이 있다 해도 바뀌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대대손손 언제까지고 군신의 지위가 바뀌는 법이 없이 분명하다.위 자료에서 보이는 노리나가의 주장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은 神國이기 때문에 신의 뜻에 따라서 정해진 군주에 의해, 인위적인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자연스럽게 통치가 되고 평화가 유지되었다는 논리다. 즉 노리나가는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만듦으로써 천황의 통치는 합당하며 고정불변의 자리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천황제에 대한 찬양은 천황의 권위가 강력했던 고대를 이상화하고 그 때로 되돌아가자는 復古主義로 연결되었다.노리나가의 국학사상은 여기서 고대를 이상화하는 과정에서 일본 신화의 우수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신화에 대한 언급은 일본이 神國이며, 천황이 태양신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구체화 시켜주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古事記 에 기록되어 있는 신화를 근거로 하여, 그 신화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노리나가는 일본 신화의 객관성에 대하여 외국의 신화는 와전되거나 위조된 것이나 일본의 신화만큼은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태고의 전설이 각국에 있다고 하지만, 각국의 전설은 정확하지 않다. 혹은 일부를 와전시키기도 하고, 혹은 함부로 위조해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다. 한자가 통용되지 않는 나라의 전설도 대개 그러할 것이다. … 일본의 전설은 모든 외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진실을 올바르게 전한 것으로, 오늘날의 세계와 인간의 모습, 11神代의 세계의 분위기에 부합되어 음도 순박했다고 주장했다. 또 그러한 연유로 문자가 없이 ‘言靈’에 의해서 신화가 구전 되었다는 점을 들었다.노리나가의 국학사상은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그는 일본의 고전을 중심으로 다른 나라의 고전을 해석하여 위치시킴으로써 神道에 세계종교적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노리나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만국의 조국’ · ‘태양신의 태어난 나라’라 하여 일본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고, 더불어 일본과 다른 나라의 차별을 강조했던 것이다. 아츠타네의 이러한 사상은 국학의 정치사상과 신도의 세계종교화를 통해 祭政一致論을 대두시킬 수 있는 논리를 제고하기도 했다.지금까지 살펴본 마부치로부터 이어지는 노리나가의 신국사상과 존왕사상, 그리고 다시 이를 발전시킨 아츠타네의 국학사상은 이후 후기 미토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이러한 인식들이 남아 근대 천황제 이데올로기로의 발전까지 계승되었다.Ⅳ. 近代 天皇制의 등장 배경근세시기 국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국학사상은 이후 근대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확립에 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국학사상은 미토학으로 이어져 더욱 구체화되고 강화되었다. 특히 미토학은 國體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국체라고 하는 의미는 언어적으로는 ‘나라의 체질’이라는 의미이고 문화적으로는 만세일계의 황통과 무궁한 神則을 핵심으로 구성된 일본 고유의 고대정신을 뜻한다.미토학파으로 이어진 국학사상은 이러한 국체를 지키는데 힘쓰게 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당시 서양세력의 진출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외국선의 연안 출몰의 빈도가 더해져가면서 대외적위기감이 심화되어 갔는데 이러한 위기의식은 全日本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일본적인 것, 일본적인 것은 절대적이라는 개념을 만들 필요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尊王은 절대적 가치 추구로의 행동 논리가 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즉 일본에 대한 일본인 스스로의 인식이 국체를 보호하기 위한 존왕은 절대적 · 당위적인 것이며 밖으로는 존왕양이론은 전일본을 대상으로 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공간적인 제한이 없었다. 결국 막번체제 내에서 소외 받았던 지방민들 역시 막번체제의 문제점을 인식시키면서 당시 체제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후 王政復古에 의한 메이지 유신, 그리고 강력한 천황제의 부활은 근세 이후 전개되어오고 강화되었던 존왕양이론적 내외인식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Ⅴ. 맺 음 말근세 이후 중국의 王朝交替期에 일어났던 중화사상의 쇠퇴와 서양문물의 흡수로 일본은 자국의식을 강화하게 되었고 더불어 막부에 의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던 천황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국가의식과 천황에 대한 존숭 인식이 점차 강해지면서 ‘國學’이라는 학문적 풍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로 대표되는 국학은 일본을 神國으로 인식하고 천황의 권위가 불변하는 절대적인 것이라 하였으며 고대로부터 전해져 왔던 신화를 통해 그 근거를 찾으려 했다. 이러한 국학사상은 노리나가 이후 미토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서양세력의 진출이라는 국가 전체의 대외적인 위기의식 속에 더욱 확고해져만 갔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견고해진 국학사상은 메이지 유신 때 천황이 다시금 정치의 일선에 등장하는데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일본의 오랜 무사통치 시기 천황은 고대의 절대적인 군주가 아닌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천황의 상징성은 모든 권력을 행사했던 막부마저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천황의 존재는 근대 이후에도 이어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은 형식상이기는 했지만 고대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권력을 되찾게 되었다.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배와 함께 천황의 권력은 사라졌지만 현재까지도 천황은 일본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앞으로의 일을 쉽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천황이라는 존재는 일본에 남아 일본인들의 자국 인식에 바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今井淳 · 小澤富夫, 송휘철 외 역, 논쟁을 통해 본 일본사상 ,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1.朝尾直弘 외, 이계황 외 역, 새로 쓴 일본사 , 창작과4.
‘溫達說話’를 통해 본 高句麗의 사회경제상Ⅰ. 머 리 말Ⅱ. 三國史記 의 ‘溫達傳’ 내용Ⅲ. 溫達을 통해 본 6세기 高句麗의 모습Ⅳ. 맺 음 말Ⅰ. 머 리 말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렸을 적부터 ‘바보온달’의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바보로 놀림 받고 볼품없던 溫達이 平岡公主를 만나 하루아침에 출세를 하고 장군이 되어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의 여부를 떠나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가의 눈에 온달의 이야기는 단순히 흥미를 일으키는 옛 이야기가 아니다. 온달설화는 자료가 극히 부족한 고대사에 있어서 당대의 모습, 특히나 高句麗의 사회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사료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본고에서는 온달의 이야기를 통해 當代의 고구려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온달설화의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三國史記 列傳의 ‘溫達傳’ 내용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역사성을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경제상의 모습을 추론해 보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사회경제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당시 정치상황이나 대외관계에 대한 논의는 배제하도록 하겠다. 또한 단순히 ‘온달전’의 내용만을 기초로 한 추론이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와 본고가 갖는 한계는 同學들과 함께 논의를 통해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Ⅱ. ‘溫達說話’의 내용1. 三國史記 ‘溫達傳’ 내용온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삼국사기 의 열전 5권에 실린 ‘온달전’이 유일하다 시피하다. 온달전의 내용은 크게 온달과 평강공주의 만남과 온달의 활약상으로 나눌 수 있다. 다음 사료는 온달전의 내용 중에서 사회경제적인 모습을 반영한 부분을 추린 것이다.a.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b.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놀리며 말하길 “너는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반드시 사대부의 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 바보 온달에게 보내야 겠다.”고 왕은 항상 말했다.c. 딸의 나이참지 못하고, 산 속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가지러 간 듯한데 오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f. 이에 값비싼 팔찌를 팔고 농지와 집, 노비와 소 · 말, 그리고 용품을 사서 살림살이를 갖추었다.g.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길 “시장 사람들의 말은 사지 말고 반드시 국마 중에서 병들고 쇠약해 내놓은 말을 골라서 사세요.”h.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했다.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는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i. (온달은) 말을 타고 달리는데 항상 앞에 있었고, 사냥으로 잡은 동물 또한 많아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와 성명을 묻고는 놀라 이상하게 여겼다.j.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산의 벌판에서 싸웠다. 온달은 선봉이 되었는데 힘을 다해 싸워서 목을 벤 것이 수십 급이었다. 여러 군사들이 이긴 틈을 타서 맹렬히 공격해 크게 이겼다. 전공을 평가할 때, 온달을 첫 번째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사람이 내 사위다!”고 하며, 예의를 갖추어 온달을 맞고 관작을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가 날로 더해갔고, 위엄과 권세가 매일 높아졌다.2. ‘溫達傳’의 분석과 역사성온달전의 내용은 대부분이 설화적 색채가 강하다. 하지만 新羅에게 빼앗긴 鷄立峴과 竹嶺 以西의 지방을 회복하고자 신라군과 阿且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로 추정된다. 구체적으로 온달과 평강공주의 만남과 온달의 성장 부분은 허구적인 설화였던 반면 고구려의 會獵 서술부분 이후 온달의 활약상은 역사적인 사실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온달의 이야기를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설화가 하나의 가공된 이야기로 꾸며진다고 해도, 그 설화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은 그 설화가 형성될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온달의 설화도 마찬가지 인 것이다. a사료에서 명시하다 시피 온달은 인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Ⅲ. 溫達을 통해 본 6세기 高句麗의 모습1. 溫達과 平岡公主의 혼인삼국시대는 각 나라마다 확고한 신분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신라의 骨品制가 가장 특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데 고구려와 百濟의 경우에도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을 나누는 신분제가 확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달과 평강공주의 혼인은 확고한 신분제가 자리 잡고 있던 고대사회라는 인식의 틀에서 분명 특이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5部 귀족들간 혼인이 이루어졌고, 신라에서도 朴 · 昔 · 金 3성간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백제도 마찬가지로 왕실과 眞氏 · 解氏 등 왕비족만이 혼인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분내혼을 원칙으로 하는 사회에서 온달과 평강공주의 혼인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온달과 평강공주의 혼인은 크게 두 가지 가능성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먼저 설화에서 보는 것처럼 온달이 미천한 출신이 아닌 귀족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온달은 고구려 귀족사회에서 고급귀족으로 알려진 가문의 출신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하급귀족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우선 그가 평민이라 할 수 없는 이유는 大兄이라는 관직은 아무리 공적이 뛰어났더라도 귀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달이 이처럼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용모를 깎아 내리거나 그의 행적이 미천했음이 기록되어 전하는 것은 그가 당시 고구려 귀족사회에서 이단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온달은 당시 고구려 사회가 지켜오던 왕족의 通婚圈 밖에 있는 존재였고 당시 귀족들에게 질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귀족들의 시기가 그의 대한 기록을 부정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두 번째는 당시 고대사회의 혼인풍습이 신분적인 제약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시기는 다르지만 신라의 학자였던 强首가 6두품의 지배층 신분을 가졌음에도 피지배층이었던 대장장이의 딸과 결혼했던 점, 설화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나 백제에서 마를 캐다가 홀어머니를 봉기록을 통해서도 당사자들의 의사가 상당히 참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 平岡公主의 賣買활동온달은 평강공주를 만나기 이전 배고픔에 나무껍질을 벗겨서 먹을 저도로 가난했다. 하지만 평강공주가 가지고 온 금팔찌를 팔아 땅과 집, 노비, 가축, 기물 등을 사서 일약 부자가 된다. 이 내용은 설화적인 부분이지만 평강공주가 금팔찌를 팔고 필요한 것들을 사는 모습이 주목된다. 특히나 자유로운 매매 활동은 6세기 고구려의 경제분야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만하다.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친 시기 한국사는 커다란 사회변동을 일으켰다. 특히나 4세기 이후 철제농기구의 보급과 牛耕의 확대, 수리 시설의 확충은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는 잉여 노동력과 잉여생산물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곧 물자의 교환을 촉진시켜서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도 함께 불러왔다. 특히나 이전 공동체에 의지했던 개별 가호의 경제력이 자립되었고 이는 사적 소유도 촉진시켰다.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변화의 모습은 온달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평강공주가 사유물인 황금을 파는 것은 개개인의 사적 재산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또한 자유로운 상행위 역시 생산력의 발달과 구조적으로 국가가 이를 제도화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황금의 쓰임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고대사회 초기에 황금은 부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최고 신분층의 권위와 위엄의 상징물이었다. 신라 逸聖尼師今 11년(144)에 민간에서 金銀珠玉의 사용을 금지했다는 점은 당시 이러한 귀금속의 사용은 특정한 사회신분층에만 한정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온달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황금은 더 이상 권위의 상징이 아니었다. 온달설화에서 평강공주의 금팔찌는 매매의 대상이었다. 즉 황금이 교환가지를 갖는 재화로 그 기능이 달라진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이야기인 서동설화에서도 역시 황금의 가치가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었던 점은 당대 삼국의 사회에서 황금이 꽤나 중요한 경제적 가장 세력으로서 활약한다. 그렇다면 바보라 놀림 당하던 온달이 어떻게 고구려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우선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귀족사회의 변화를 들 수가 있다. 長壽王의 平壤遷都 이후 다양한 신진세력이 고구려의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특히 대외전쟁이 확대되고 사회분화가 심화되어 가던 때에 신진귀족들의 정치적 진출이 많아졌는데 온달도 그 중 한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온달은 대형의 지위에 오르고 왕의 사위가 되는 등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를 미루어 보아 온달을 비롯한 신진 귀족세력이 평원왕대에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신진 귀족세력의 중앙 정계로의 진출은 기존의 귀족연립체제를 붕괴시키고 지배층 사회의 변화를 불러 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이처럼 온달로 대표되는 신진 귀족세력이 급부상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인 부와 당시 고구려의 인재 등용 방법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반민 층의 계급분화는 부민층의 성장을 가져왔는데 온달이 평강공주의 조력으로 부를 쌓았던 것도 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에만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지배체제의 개편을 꾀하던 왕권이 관료체제의 확대 과정에서 이들 세력을 포섭함으로서 정치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고구려에서는 ?堂이라는 교육기관을 통해 일반평민들에 이르기까지 무예와 유교적 소양을 교육 시켰는데 이를 통해 교육된 인재는 온달처럼 수렵행사나 대외전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Ⅳ. 맺 음 말지금까지 온달전이 어떠한 내용이며 그 것이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단순히 흥미 있는 이야기 거리의 의미를 넘어 온달전은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6세기 고구려 사회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내는 자료임에 틀림이 없다.온달과 평강공주의 혼인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 사회의 결혼 풍습을 유추 해 볼 수 있었고, 평강공주가 금팔찌를 팔고 .
Ⅰ. 실크로드와 유목제국1. 실크로드(1) 용어의 기원과 개념의 확장‘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고안하고 학계에 정착시킨 인물은 독일의 지리학자였던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1833-1905)이었다. 1877년부터 출판한 중국(China) 이라는 책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교통을 개관하며 고대 중국과 그리스ㆍ로마 문화권 사이의 교섭이 주로 비단의 교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인도 혹은 서방으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실크로드(die Seidenstrassen)’라고 명명하였다.리히트호펜은 이 명칭을 복수형으로 사용하였는데, 중국과 서방을 연결하는 비단교역로가 하나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한서(漢書) 에 그 당시 서역에 이르는 길을 돈황 근처의 양관과 옥문관을 지나 선선(?善)에서 북상해 투르판, 카슈가르를 지나 파미르 고원을 넘어 페르가나 계곡으로 들어가는 북도와 선선에서 알친산맥의 북록을 따라 서행해 야르칸드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ㆍ파키스탄 북부나 아프간 지방으로 들어가는 남도 두 가지로 적고 있다.1910년 미국학자 허만은 실크로드의 서쪽 경계를 인도가 아닌 시리아까지 확장할 것을 제의하였다. 동방에서 흘러온 생사(生絲)와 견직물들의 최종 집하지가 바로 지중해 동부 연안의 시리아였기 때문이다. 또 서쪽 끝을 로마라고 하거나 경주와 일본의 나라는 각자 동쪽 동착지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좁은 지역이나 루트를 가리키던 실크로드라는 말이 점점 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초원 루트, 사막 루트, 해양 루트를 포함하여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크로드’라는 범위와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2) 실크로드에 대한 새로운 이해실크로드에 대한 학술적 연구와 탐험은 주로 유럽인들이 주도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Sven Hedin), 영국의 오렐 스타인(Aurel Stein),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독일의 르 코크(A. von 차이가 없었지만 청제국에 와서는 외몽골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지배했고 지금의 중국은 청제국의 영역을 거의 대부분 물려받았다.이러한 현상에 있어 대ㆍ소중국이라는 국면의 사이에는 격렬한 혼란과 분열의 시기가 존재했다. 즉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고 불리는 통일과 분열의 국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동시에 그 통일의 상태는 다시 대ㆍ소의 국면 변화를 되풀이했던 것이다. 우선 주목해야할 사실은 대ㆍ소를 결정지은 것은 중국 남방에서의 축소ㆍ팽창과는 무관했다는 점이다. 중국에 어떤 왕조가 들어섰든간에 남방의 영역은 축소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대ㆍ소중국의 변화는 중국의 북방과 서방에서의 영역이 어떻게 변동되느냐에 따라서 결정지어졌다.(4) ‘대중국’의 기원과 실체3세기 초 한나라 붕괴 후 6세기 후반 수당제국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북방 유목민이 대대적으로 남하해 이주하면서 중국은 약 350년 이상 대혼란기를 경험하였다. 그들은 화북 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에 농ㆍ목 복합적 성격을 지닌 ‘호한융합(胡漢融合)’ 정권을 세웠고, 한인 귀족들은 남쪽으로 쫓겨 내려가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독자적인 왕조를 건설하였다. 이렇게 해서 소위 오호십육국과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화북 지방은 3세기 이상 북방 유목민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동안 그들이 한화(漢化)된 이상으로 한인들도 호화(胡化)되었다.혼란기를 종식시키고 수당제국을 건설한 장본인들은 ‘관롱집단(關?集團)’으로 이러한 ‘한화된 호인’, 혹은 ‘호화된 한인’이었다. 당 황실의 시조 이초고발(李初古拔), 이매득(李買得) 부자는 선비의 이름을 갖고 있었고, 이매득의 손자 이호(李虎)는 서위의 우문태(宇文泰)에게서 대야(大野)라는 선비족의 성을 받았다. 그의 아들 이병(李丙)은 선비족 부인을 맞아 당 고조 이연(李淵)을 낳았다. 그의 부인 역시 선비족이었고 아들 태종 이세민(李世民)과 선비족 황후 사이에서 고종을 낳았다. 당나라 황실이 선비족 출신이라 말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한대불리었던 여러 집단가운데 ‘몽올실위’라는 집단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8세기 당시의 몽골초원의 패권은 위구르가 가지고 있었다. 9세기 무렵이 되면 위구르 제국은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위구르는 내부분열이 있기도 하였고 840년 북방의 키르기즈의 공격이 결정적인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위구르의 붕괴는 몽골초원이 비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렇게 빈 몽골초원에 먼저 타타르부족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란의 발흥은 몽골의 성장을 저해하였다. 그런데 거란역시 붕괴하여 마침내 몽골의 이주가 본견적으로 진행되었다.(2) 칭기스 칸 등장 이전의 몽골사회몽골인들은 몇 개의 커다란 정치적 블록에 속하게 되어있는데, 이 블록은 당시 ‘울루스’라고 불리었다. 몽골인들의 동일한 부계혈통을 소유한 오복이라고 불리던 씨족이 있고, 이 씨족들이 모여서 울루스를 구성하게 된다. 칭기스칸을 예로 들면 그는 보르지긴이라는 오복이었다.12세기까지 몽골초원은 여러 유목부족들이 혼재되어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기존의 친족조직은 급속히 분열되어 다른 씨족으로 편입되는 등 사회적 분화가 거듭되었다. 여기서 종례의 평등한 유목사회에서 사회계층이 분화되어 귀족 평민 노예로 나눠지게 되었다. 칭기스칸은 분열되어버린 친족적 구성원리를 천호제라는 제도로 재편하였다.(3) 혼돈의 초원12세기의 몽골초원에는 다양한 울루스들이 존재하였다. 가장 서쪽의 알타이산맥 부근의 투르계 울루스인 나이만이 있었고, 몽골초원의 가장 중심부인 오논강과 케룰렌 강에 유역에는 케레이부족이 있었다. 그리고 케룰렌강의 더 동쪽에는 타타르 울루스가 있었다. 이 외에도 초원과 삼림의 경계지역에는 오이라트와 메르키트라는 울루스들이 있었다. 당시 몽골은 몽골초원의 동북방 변두리에 거주하였던 작은 집단이었다. 몽골부족은 11세기부터 오논강을 따라 몽골초원으로 들어왔고 삼하의 발원지(오논?케룰렌?톨라라는 강의 발원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의 여러 울루스들의 치열한 대립과 전쟁은 몽골울루스 역시 피할 수 없었고 그들 역시 휘말리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구육이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도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표현이 보인다. ‘예케 몽골 울루스’는 몽골비사 에도 보이듯이 그 전부터 사용되던 ‘몽골의 모든 백성’을 의미하는 ‘카묵(qamugh) 몽골 울루스’ · ‘쿠르(kur) 몽골 울루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처음부터 일종의 국호로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 일종의 국호로 인정되어 한자로도 ‘대몽고국’이라고 번역되어 사용되었다.(7) 천호제? 조직방법1206년 ‘건국’ 직후 칭기스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몽골 울루스를 구성하는 95개의 천호를 조직하고 그것을 지휘할 88명의 천호장을 임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호는 다시 백호로, 백호는 십호로 나누어 천호와 마찬가지로 각각 백호장과 십호장을 임명했다. 그리고 95개의 천호는 크게 3개의 만호로 묶어 무칼리 휘하의 좌익만호는 만주와의 경계인 흥안령 방면에, 보오르추 휘하의 우익 만호는 중앙아시아와의 경계인 알타이 방면에, 보로굴 휘하의 중군 만호는 몽골리아 본진에 배치했다.? 특징칭기스 칸이 조직한 천호들은 신생 몽골국의 근간이 되는 사회 · 군사 조직이었으며 장차 정복전의 수행에서도 군사력의 핵심을 담당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외형적으로 봤을 때 천호제는 흉노 이래로 대부분의 유목민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십진제적인 원리에 의한 보편적인 사회 구성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내적인 측면은 이전과는 다른 혁명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오랜 동안의 부족 전쟁을 통해 기존의 씨족 · 부족 체제가 와해되었고 그 결과 1206년 만들어진 천호들은 상당수가 혈연집단이 아니었으며 천호장 역시 충성의 대가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조직은 칭기스 칸에게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주었다.1206년 이전, 12~13세기 몽골리아에는 이미 동질적인 혈연 집단으로서의 ‘씨족’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호 이전에 있었던 ‘오복’이나 칭기스 칸이 자무카와 전쟁을 벌일 때 휘하에 있었던 ‘익’이 보르지긴 일족을 중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1211년 3월 쿠릴타이의 결정으로 금에 대한 원정이 그 해 봄부터 시작되었고 개전의 명분은 금나라가 과거 칭기스 칸의 조상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전쟁이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금은 북방 여진족 정권답게 쉽게 굴복하지 않았고 견고한 성채를 공격하는데 몽골의 기마군이 힘을 쓰지 못하면서 결국 1214년 초 양측은 화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칭기스 칸은 황실 여자와 황금, 비단 등을 공물로 바치겠다는 합의 내용을 믿고 몽골리아로 회군했다. 그러나 몽골군이 돌아간 직후 금은 수도를 황하 이남, 현재의 개봉으로 옮기고 합의한 내용을 따르지 않았다. 결국 1215년 전쟁은 재개 되었고 금이 포기한 황하 이북 지역은 몽골군의 공격에 폐허로 변해 버렸다. 전쟁은 금의 끈질긴 저항으로 장기화 되었고 칭기스 칸이 서방 원정을 위해 소수의 군대를 제외하고 철수하면서 칭기스 칸의 중국 원정은 중단된다.(3) 칭기스 칸의 서방 원정1218년 금에 대한 원정이 진행되던 때에 중앙아시아로 보낸 몽골의 사신단이 오트라르에서 몰살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호레즘에 의한 것이었고 칭기즈 칸은 보복 전쟁을 단행한다. 칭기스 칸은 북중국에서 작전을 수행할 소수의 군대를 제외한 모든 몽골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원정을 시작했다. 이 원정에는 그의 네 아들과 주요 장군들이 모두 참가했으며 동원된 병력의 수는 15~20만 정도로 추산되며, 1219년에서 1225년까지 6년에 걸쳐 계속되었다.이 원정으로 이슬람의 신흥 세력이었던 호레즘은 멸망했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번영하던 많은 도시들이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몽골군은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일부는 흑해 북안까지 진출해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들 지역에 대한 지배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전군을 그대로 철수 시켰다.(4) 칭기스 칸 원정의 의미칭기스 칸은 어디까지나 유목 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