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p 생각해볼 문제Contents 신세계 백화점 점포내부 관리전략 1 이마트 점포내부 관리전략 2 구매후 부조화의 발생과 해소 3신세계 백화점 점포내부관리전략 1. 판매원의서비스교육 조회 시 , 직원들의 명찰에 만원을 꽃아 넣는다 . 그리고 “ 불친절 하다고 느끼신 고객님은 뽑아 가셔도 좋습니다 ” 라는 문구를 덧붙인다 . 직원들은 돈을 뺏기지 않기 위해 친절한 태도로 고객을 대할 것이며 이를 통해 고객 은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 . 2. 남성고객을 위한 공간 마련 여자친구 , 아내의 쇼핑중독에 지친 남자들을 위한 휴식공간 or 흡연공간 을 만든다 . 흡연 구역 앞에 담배 냄새를 제거하기 위한 향수 샘플들을 디스플레이 해놓는다 . 이는 남성 고객을 위한 에티켓 서비스 임과 동시에 향수 구매를 유도 할 수 있다 . .신세계 백화점 점포내부관리전략 3 . 고객의 지친발을 위한 마사지 기계설비 매장 휴식공간 내에 고객들의 발 마사지 를 위한 기계 를 설치 한다 . 이는 쇼핑으로 지친 고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 VIP 고객 만을 대상으로 운영 해도 좋다 . 4. 쇼핑을 위한 최적의 분위기 조성 - 음악 : 빠른 템포의 음악 보다는 느린 템포의 음악을 튼다 . - 점포 내 색상 : 강한 원색 ( 빨강 , 노랑 ) 보다는 시원한 파스텔 톤 ( 푸른색 , 녹색 등 ) 으로 구성한다 . - 향 : 기분을 좋게 하는 민트향 , 라벤더 향 등을 사용한다이마트 점포내부관리전략 에스컬레이터 공간을 디스플 레이 공간으로 활용하여 , 스낵 , 물티슈등 소비자가 소비계획에 두지 않은 물품들을 진열하여 , 충동적으로 사게끔 유도한다 종종 시식코너에서 판매원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대로 시식을 못할 때가 많은데 , 시식대를 판매원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 시킨다 . 매장이 너무 넓어서 종종 사고자 하는 제품이 어디에 진열되어 있는지 찾느라 애쓸 때가 많은데 , 이를 위해 매장내에 제품위치검색대 를 설치해놓는다 구매를 더 쉽고 빠르게 시식을 눈치안보고 합시다 에스컬레이터 옆 공간을 활용한 진열구매 후 부조화의 사례 (1) 1 부조화발생 아이폰 3GS 를 구매한 뒤 5 일 후 아이폰 4 의 출시 소식이 나와 환불절차를 밟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 었다 . 2 해소하기 위해 나는 ? 1) 아이폰 4 의 스펙 및 사양과 내가 구매한 3GS 의 차이점 이 무엇인지 찾아보니 카메 라와 디스플레이의 해상도 , 속도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 했다 . 2) 하지만 사용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합리화 를 하였다 . 3 해소하기 위한 기업의 노력 . 애플은 아이폰 4 출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폰 4 에서만 실행 가능한 어플과 프로그램 을 3GS 에서도 실행 / 구동할수 있는 IOS 를 업데이트 시켜 주었다 . 즉 , 아이폰 4 출시 이후에도 지 속적으로 3GS 에관한 업데이 트를 실시 하여 부조화를 상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구매 후 부조화의 사례 (2) 해소하기 위해 나는 ? 해소하기위한 기업의노력 부조화 발생 삼성생명에서 통합 보험을 가입 한 뒤에 , 너무 섣부르게 가입한 것은 아닌지 , 보험을 가입 함으로 써 얻는 보장보다 재테크를 함으로써 얻는 혜택이 더 큰것 은 아닌지 고민이 되 었다 . 보험 가입 후 계속해서 삼성생명 / 삼성화재 광고에 나오는 유명 모델을 보면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상품을구매했구나 ’ , ‘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구나’ 라는 심리적 안도감을 얻었다 2) 증권이나 금융전문가 에게 내가 한 선택이 옳은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 광고로써 고객에게 심리적 안도감 제공 증권이나 금융과 같은 상품은 소비자가 판단 하기 어렵고 자신의 재산 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 므로 소비자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실제 수익률 이 높다는 외형적인 성능 보다 광고를 통해 심리적 안도감을제공한다 .Thank You!{nameOfApplication=Show}
일본의 물가변동과 그 원인@전후 일본성장의 배경전후 일본경제의 고도성장과정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전반적인 흐름에 따라 전후 경제, 고도성장기(1956~72), 구조조정기(1973~85), 버블경제형성기(1986~) 등으로 구분된다.1. 전후의 일본의 경제 일본제국주의가 패망 후 일본은 심각한 식량위기와 각종 사회? 경제적 문제 등이 분출하여 심각한 사회혼란을 초래하였고 이러한 빈곤은 악성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미군정은 일본경제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경제안정을 위하여 군벌에 의해 지배되었던 일본 제국주의경제체제를 시장경제로 환원 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재벌해체, 농지개혁, 노동개혁을 추진한다. 이러한 개혁에 따른 일본경제의 변화는 미국의 점령정책에도 변화를 주어 지원정책으로 전환한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아 생산회복을 가속화하기 위해 석탄 및 철강 생산에 중점을 두었다. 그렇게 가속화 경향의 일본경제의 회복에는 한국전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경제는 전후 제도개혁과 한국전쟁에 의한 특수에 의한 성장에 힘입어 세계시장으로부터의 고립과 봉쇄를 탈피하여 점차 세계경제에 통합되는 개방체제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2. 고도성장기(1956~1972) - 일본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한 시기로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하게 된다.3. 버블경제 형성기- 과도한 부동상 투자가 일어나던 시기. 기업의 부동산 구입-부동상의 가치상승-이를 담보로 더욱 많은 자금대출-다시 부동산 구매의 레버리지가 일어나며 버블경제가 시작.@고도성장기 일본의 물가이시기 일본은 완전고용의 달성과 도매물가의 안정, 재정균형이라는 이상적 상태를 이룩한 시기이다.1. 고도성장기 초반 일본의 물가안정에 이유는 노동력 과잉으로 인한 임금상승률이 높지 않았고 이로 인한 구매력의 빈약함에 그 원인이 있다.2.1960년대 후반에 1970년대 초반 임금이 상당히 높아졌으나 생산성이 그것을 웃돌며 물가상승을 억제시켰으며 이로 인한 도매물가의 안정은 수출경쟁력을 가져와 일본의 고도성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도성장기 속 위기 석유파동일본은 석탄을 잘라 버려 자국의 에너지 개발을 방폐해 중근동의 염가의 석유에 의존해, 이것을 대량으로 소비해 고도성장 경제를 실현했기 때문에, 석유 위기의 타격은 심각했다. 당시 일본은 벌써 세계 최대의 원유 수입국이며, 석유의 99·7%를 수입에 의존하고, 그 중 88%가 중동에서 수입했다 비축도「4일분 」에 지나지 않았다. 미키 부총리는 급거 중동을 역방해 아랍 집합의 자세를 나타내, 경제 협력을 약속한 것으로 원유 공급 삭감을 면했지만, 석유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인플레는 한꺼번에 가속, 심각한 불황에 돌입했다. 석유 관련 제품을 중심으로 급등하는 물가는 「광란 물가」라고 불려 또 74년은 전후 처음의 GDP 마이너스 성장(▲1·2%)이 되었다. 석유위기는, 일본의 가격 체계와 코스트 구조를 크게 변화시켜, 석유 의존·에너지다소비형 산업의 기반을 흔들어, 무역 구조나 산업구조의 전환을 강요하게 되었다. 석유 위기와 광란 물가로,「일본 열도 개조 계획」은 막혔다. 급사한 아이치 재정부 장관의 뒤를 이은 후쿠다 재정부 장관은 긴축적인 마크로 경제 정책을 취했다. 타나카의 정치적 라이벌 후쿠다로서는 인플레 대책이 득점이 된다. 전후 좀 더도 긴축적임 74년도 예산으로, 열도 개조 관련 예산에 대사를 기발한. 결과적으로 전후 최대의 불황을 어쩔수 없게 여겨졌지만, 석유위기아래에서는 그 이외의 선택사항은 곤란했다. 그러나 국내 불황은 수출의 집중호우적인 확대를 불렀다. 74년의 수출은 545억 달러와 전년대비50%나 증가, 그 후도 계속 증대했다. 그런데도 경상수지는 73년부터 75년까지 적자이며, 특히 74년은 47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원유 가격이 4배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에너지 수입 코스트는 급증, 석유 수입 대금의 부담증가는 GNP의 약 3·8%에 이르렀다.@2차 석유파동1차 석유파동의 심각했던 물가상승 현상과는 달리 2차 석유파동은 비교적 안정적인 물가상승률을 보임.1차 석유파동 대와는 다르게 협력적 노사관계로 물가상승-임금상승-물가상승의 악순환 고리를 끊음.기업은 가격인상요인을 억제하고 구매자는 구입을 유보하며 물가의 상승을 막았고 통화량 역시 1차 파동과는 다르게 안정되며 물가 상승의 억제를 가져옴.@1980년대 이후 물가의 안정기석유가격의 안정-1985년 12월 opec총회에서 가격유지정책을 포기하고 “플로트시대”에 들어간 것이 원유가격의 대폭적인 하락을 가져옴.엔고와 제조업에서의 생산성 상승-엔고로 수입재 가격하락, 엔고를 초래한 것은 생산성 상승이었으므로 물가안정의 궁극적 요인은 일본 제조업의 생산성 상승이라고 할 수 있음.임금상승률이 노동생산성의 상승률을 넘어서지 않았음현재 이 같은 물가 안정세가 근 20년째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우려할 수준이 되었다.@유통합리화와 경쟁을 통한 물가의 안정일본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나타난 급격한 엔고 현상은 국내외가격차 확대와 물가불안을 초래함과 동시에 일본의 고비용 경제구조를 고착시켜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우선 빗장을 풀어 물가안정을 유도하고 나섰다. 보고서는 “글로벌화 진전과 엔화 강세로 개도국으로부터 값싼 제품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일본-아시아 국가간 국제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며 “개도국 제품의 역수입은 일본 제품과의 경쟁을 유도하여 물가를 낮추게 되었다”고 지적했다.또 일본정부는 규제완화를 통해 ‘고비용 구조 해소’와 ‘물가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다. 보고서는 “‘쇠고기 수입쿼터 철폐’(1991년), ‘특별석유법 폐지’(1996년), ‘전기·도시가스·전화통화료 인하’(1998년) 등 규제를 완화 또는 철폐하는 동시에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경쟁을 촉진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소비자물가를 낮추기 위해 ‘쌀 판매 면허 완화’, ‘수입맥주 면허 완화’, ‘식품위생법 완화’, ‘담배판매의 자유화’, ‘편의점의 의약품 판매’, ‘대규모소매점포법의 단계적 완화’ 등을 시도했다.세번째, ‘유통합리화’를 통해 폐쇄적인 유통시스템 고리를 끊었다. 당시 일본의 복잡한 유통체계는 외국기업의 일본시장 진출을 어렵게 해 물가수준을 높이고 있었다. 보고서는 “‘인터넷쇼핑’, ‘통신판매’, ‘방문판매’ 등 점포가 없는 유통업태를 통해 유통경로를 단축시키고, 이를 통해 물가하락을 유도했다”고 밝혔다.이와는 별도로 일본정부는 1988년부터 미국, 유럽 주요도시와 도쿄의 국내외가격차 실태를 지속적으로 조사·공표해왔다. 특히 1993년 11월부터 1994년 7월에 걸쳐 통상산업성 산하 ‘내외가격차 문제연구위원회’를 설치해 12회의 집중적 심의를 통해 국내외가격차 구조를 명확히 하는데 힘써왔다.@물가안정을 넘어 디플레이션을 우려현재 일본의 물가는 안정화를 넘어 하락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한 경기침체로 인해 디플레이션의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며 하토야마 정권은 실제로 디플레이션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경제 호황기에 과도하게 증설된 생산시설 때문에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발생하며 실질 물가가 하락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는 다시한번 장기불황으로 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정부는 각종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있지만 실효는 미미한 상황이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본의 물가는 향후 5년간 평균 0.6% 떨어지고 2018년까지 연평균 0.4%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화 시대와 문화한국인의 일본인식 일본인의 한국인식@이 주제를 선정한 이유일본학과 재학생으로 마침 한국과 일본간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참 유익하다고 생각되었고 평소 흥미도 있는 주제였기에 이 강의를 선정하게 되었다.가깝지만 멀다라는 특수성이 존재하는 한일 양 국가의 서로에 관한 인식을 살펴봄으로써 그 특징을 이해하고 앞으로 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 할 수 도 있었던 시간이었다.@내용정리1. 한국인의 일본인식일본 일본인 하면 무엇이 먼저 연상되는가? – 1995년 전후 50주년을 맞이하여 요미우리 신문사가 실시한 아시아 7개국(한국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여론조사.한국을 제외한 5개국의 경우-궁정적 어휘가 대부분(근면, 첨단기술, 유복, 예절바름)한국의 경우-긍정적인 어희(근면, 성실, 친절, 예절, 질서) 도 있었으나 부정적인 어휘가 더 상위를 차지(식민지 지배, 제2차 세계대전, 간사, 야비, 잔인)@또다른 설문조사 내용일본인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긍정적 어휘(친절하다, 폐를 끼치는걸 싫어한다, 예의바르다, 꼼곰하다, 차분하다)부정적 어휘(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다, 가식, 거만, 뒤통수친다, 정이 없다)역시 긍정적인식과 부정적 인식이 공존*이중적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그 이유는 역사적인 체험과 기억 때문.2. 일본인의 한국인식일제강점기 일본인의 한국인식-무관심, 멸시, 차별, 하등한 존재1990년대까지 한류이전-기분 나쁨, 무관심과 무지, 멸시, 무시한류이후- 싸고 맛있고 가깝다,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이웃국가일본인의 한국인식 역시 역사적으로 변천해왔지만 무관심과 무시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외국인이 한국인과 대화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 중 하나가 일본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과 관련된 일이라면 우선 큰 소리부터 쳐놓고 들어가는 한국인 성향을 가리키는 이야기다. 실제로 겪어본 외국인이 한 말인지 아니면 우스갯소리로 누가 지어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다만 우리 국민의 인식에는 일본을 실제보다 격하하려는 심리가 깔려 있음은 분명하다한·일 관계의 역사와 특수성을 잘 모르는 외국인으로서는 한국인이 무얼 믿고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기를 쓰고 달려드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외국인이 보기에는 세계최고수준의 과학 기술과 경제력을 갖춘 일본은 이미 선진국 대열에서도 저만큼 앞서나가 있는 버거운 상대인데도 말이다.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듯 한·일 양국관계의 바탕에는 친밀감과 함께 우월감과 혐오감 등 복잡한 인식이 깔려 있다.부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인이 일본인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일본인들 역시 한국인에 대해 성격이 급하고 거칠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최근 일본 교과서 해설서의 독도 영유권 명기 문제로 양국 관계가 다시 악화되자 한국인의 분노가 거세게 타오르고 있다.심지어 경제교류를 포함한 양국 관계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과격한 반응까지 나왔다.하지만 국제관계에서 실리를 외면하고 명분이나 감정을 앞세우는 접근은 금물이다.특히 한·일 양국처럼 산업구조가 맞물려 밀접한 기술 및 인적 교류가 필요한 국가간 관계에서는 일시적 감정을 배제한 냉정한 계산이 요망된다.양국간 통상은 지난해 이미 300억달러에 육박한 심각한 대일무역역조로 특징지어진다.극일의 열망이 우리나라 발전을 앞당긴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 따라 잡아야 할 거리가 많이 남아 있다.일본과의 교류에 따른 득실을 계산하면 아직 한국이 얻을 게 훨씬 많다는계산이다.일본은 그 자체만으로 1억2000만명의 거대 시장일 뿐 아니라 한국산의 우수한 경쟁력을 입증할 수 있는 세계의 관문 시장이다.대일 수출을 확대함으로써 일본 시장 점유율을 늘려나가야 세계를 향한 경쟁에서도 우위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민족적 분노와 감정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진정 이기는 길인지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한국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NHK에서 공개된 후, 겨울연가 신드롬으로 일본전국이 욘사마 붐으로 우리가 이용하는 전철 안에도 포스터가 게재되었다.그리고 일본에서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여행지도 한국이 1위가 되고 한국 김치, 요리도 일본 젊은 여성들에게 유행이 되고 있으며, '한국'이라는 글자가 일본 곳곳에서 급격히 눈에 띄게 되었다.드라마의 열풍이 일본 중장년층의 한국의 이미지를 재고 시켰다고 한다면, 현재는 한국 영컬쳐의 상징인 아이돌 그룹의 일본 진출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이전 멸시와 조롱 무시의 대상이던 한국 문화가 일본 젊은이들의 동경과 열망의 대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생각보다 그 파급력과 영향력이 큰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점이다.이렇게 대중문화적 파급력이 커지면서 과거 한국이 문화개방을 하며 우려했던 문화 잠식현상이 오히려 일본에 일어나고 있는 점이 놀랍다. 일본 대중가요계는 한국아이돌에 잠식당할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며 온종일 티비에 나오는 한국드라마 홍수에 이곳이 한국인지 일본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그밖에 한국에 대한 관심도가 전례 없이 증가하면서 한국여행이 해외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고 김치가 한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반찬으로 선정되는등 흡사 예전 미국을 강타했던 영국문화를 일컫던 잉글리쉬 인베이젼이 연상되기도 한다.일본에서 한국인식을 과거 우리들은 '나쁜'이미지로부터 시작했는데 요즈음은 '좋은'이미지로부터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에 놀라기도 하고 복잡한 기분이다. 왜 복잡하냐고 하면, 물론 한국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다른 것이 당연한데 한국에 대한 인식은 아직 주관적인 부분이 많고, 객관적인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한국인식이 높아졌다는 것이 '유행'만으로 끝나지 않도록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우리 모두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코리아 인베이젼’이 일회성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도록 치밀한 노력과 계획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양국간의 서로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으나 역사적 특수성과 영토문제 등으로 인해 순탄치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허나 그 어느 때 보다 현재 양국의 관계는 변화의 가능성이 크며 역사적 인식이 많이 희석될 후대에는 더욱더 친밀한 관계로 발전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인도 사상의 이해1. 인도사상에서 슈루띠 전통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하여슈루띠 의미아리아인들이 처음 인도에 들어선 것은 B.C. 15세기 경이었다. 이들이 인도 북서부 펀잡 지방에 정착한다. 이어서, 인도로 들어온 아리아인들에 의해 새로운 종교형태가 주도적으로 형성되게 되는데, 이는 '베다'문헌의 집성으로 시작되었다.슈루티(Sruti)는 아리아인들이 작성한 '베다(Veda)'문헌에 대한 총칭이며, 이에 근거한 종교형태를 말한다.중요성베다는 고대 힌두교 이해에 있어 핵심적인 문헌일 뿐만 아니라 이후 힌두교의 전개과정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문헌이다. 베다는 지혜를 뜻하는 말로 넓은 의미로는 어떤 특정한 책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B.C. 13세기 경부터 약 2천여 년의 기간에 걸쳐 작성되고 기록된 문헌에 대한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베다 중 가장 오래되고 이후 힌두교사에 미친 영향력면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이 '리그베다'이다.슈루띠 전통의 중요성은 이 리그베다가 정립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각각 '리그베다'시기, '브라마나'시기, '우파니샤드'시기가 나타나며 이러한 인도의 종교관과 세계관이 변화 발전하게 되는데 근간은 베다이며, 이를 총칭하는 슈루띠 전통은 모든 인도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2. 브라마니즘에 나타난 우주관인 전변설과 후기 우빠니샤드들에 나타나기 시작한 가현설을 비교 논하시오.브라마나에서 전기 우빠니샤드 까지 등장한 전변설은 태초에 어떤 절대자 혹은 근원적 힘 에 의하여 우주가 생성 · 유지된다는 생각이다. 즉, 브라만 그자체가 변하여 우주가 만들어졌으므로 ‘브라만이 결국 우주’ 라고 말하고 있다. 우주는 물론 세계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브라만의 숨결에 지나지 않으며, 이로부터 현존하는 모든 것은 절대신(브라만)으로부터 나왔으며 브라만만이 유일의 실재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반면 후기 우빠니샤드에 나타난 가현설은 깨달음에 따라 달라지는 우주관으로 볼 수 있으며 브라만에 의해 우주가 창조 된 것은 맞지만 그것은 환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이것은 현상세계의 모든 차별성과 다양성을 무지 때문에 나타나는 환상으로 보며 브라만 혹은 아트만만이 실재임을 주장하는 견해로 브라만을 세계의 원인으로 간주한다.3.상키야 철학에 나타난 물질세계의 진화 과정과 해탈을 위한 방법을 설명하시오.인도 전통에서는 상키야 철학이 인도 철학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상키야 에서는 불교와 같이 세계를 苦로 보며 이 고를 극복하는데 주목적이 있다.하지만 상키야 에서는 불교에선 인정하지 않는 정신이라는 실재를 인정한다. 또한세계의 존재 원리를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개의 원리로써 설명한다.이 중 ‘물질’은 상키야에서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이 물질은 정신을 제외한 모든 현상의 모태와 같은 것이다. 이 물질들은 끊임없이 해체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이 물질은 사트바,라자스,따마스가 균형을 이루며 존재하다가 특정 요소가 지배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 분명한 형태를 가진 존재로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이 균형상태가 무너지고 형태가 유출되는 이유를 상키야에서는 ‘정신’이라고 하고있으며 물질은 이 정신의 해방을 위한 목적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정신과의 접촉으로 물질은 내적 균형상태를 잃게되며 제일 먼저 라자스가 흔들리고 이 라자스의 동요로 사트바와 따마스가 뒤따라 움직이며 물질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상키야 철학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이성(붓디)과 정신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에서 이루어 지며 붓디를 중심으로한 인식과 행위가 의미를 잃게되면 정신은 본래모습(평형)으로 머물게 되는데 이를 상키야 철학에서는 해탈이라 한다.이 해탈은 지식(깨달음)을 통해 가능하며 깨달음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라기 보단 깨달음 자체 속에 해탈이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 ‘수행’이 필요하다고 본다.4.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사상에 반영된 자아관과 그에 대비되는 불교의 무아설에 대해 비교 설명하시오.우빠니샤드의 원뜻은 사제간에 ‘가까이 앉음’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이에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도 의미하게 되었으며, 옛날부터 천계문학으로서 신성시되었다. 인도의 정통 바라문철학의 연원으로서, 그 후 철학 ·종교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개개의 우파니샤드는 통일된 사상을 한 사람의 작자가 일정한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긴 세월에 걸쳐 편집 ·정비하였다고 생각되며, 베다 및 브라마나의 제식만능주의에 대한 반발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불교흥기를 촉진한 사상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중에는 신 ·구의 잡다한 사상이 섞여 있으며 전체로서의 통일이 결여되었지만 그 근본 사상은 만유의 근본원리를 탐구하여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빠니샤드의 자아관이다.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 독도의 영토분쟁 역사지금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일본과 한국 사이에 민감한 독도영유권 분쟁을 일으킨 기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안용복사건'. 울릉도뿐 아니라 독도를 마치 자신들의 영토인양 탈취해온 일본인들에 대해 안용복이 이를 저지하려고 일본에 건너가 직접 담판을 내걸은 기록이다. 두 번의 도일활동을 통하여 안용복은 당당히 일본에 대하여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돌아왔다.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의 불법 도벌이 계속되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10월 25일자 칙령 제 41호로써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한 건"을 반포하고 관보에 게재한 후 울릉도에 대한 총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칙령 제41호 제2조에 울도군의 구역이 울릉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獨島)까지 관할하는 것으로 명시하여 독도에 대한 관활권을 근대법상의 행정 조치로 확인하게 된다.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의 전략상의 가치를 더욱 절실히 느끼고 일본 해군성은 울릉도와 독도에 망루를 설치한다. 해군성이 독도에 망루 설치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중에 시마네 현에 거주하는 나까이요오사브로라고 하는 어부가 독도에 대한 독점적 어업허가 출원 의사를 해군성에 타진하게 된다. 일본 해군성은 이 청원을 검토, 결국 일본정부는 1905년 1월 28일 내각 회의에서 편입하기로 의결하고 시마네 현에 지시하여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써 편입을 고시하게 된다. 이에 울릉군수 심흥택이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리나 사실상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아무런 힘을 발휘 할 수 없었다. 그 이후에 일제에 의해 우리의 모든 주권이 박탈당하게 됨으로써 독도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영토와 민중들은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1945년 일본 패망 수 연합국 최고 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 '약간의 주변 지역을 정치상 행정상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데 관한 각서' 즉, SCAPIN 677조를 일본 정부에 지령하게 되는데 독도는 아예 을 선포하게 된다. 일본인 이에 대해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평화선을 선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독도를 포함시켰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정부에 항의를 하여왔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분쟁의 시작인 것이다.1965년 한일어업협정이 타결되었으나 이는 평화선을 사실상 포기하는 식의, 명백히 한국측에 불리하게 적용되는 협정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자국 영해에 대한 주권을 방기한 채 당면의 경제적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에서의 차관 도입을 위해 평화선을 두고 흥정을 하였던 것이고, 한국의 수산업계는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독도에 관한 양측의 주장? 한국의 주장1) 독도, 서기 512년부터 한국영토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병합될 때부터 한국의 고유영토가 되었다.2)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서기 1737년,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당빌(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전도』에도 독도(우산도)가 조선왕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3) 일본 고문헌과 일본 고지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기록-1667년의 일본 관찬 고문헌 『은주시청합기』에도 울릉도와 독도옆에 '조선의 것'이라고 글자를 써 넣었다.4) 17세기 말 일본정부,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1696년 일본정부는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및 독도) 고기잡이를 엄금했다.5) 19세기 일본 메이지 정부 공문서,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확인-일본 외무성의『 일본외교문서』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부속으로 되어있다'라는 실증자료가 수록되어 있다.6) 일본 내무성,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일본내무성은 시마네현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임이라고 결정하였다.7) 일본 최고국가기관(태정관),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결정-일본 태정관 또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심득(心得, 마음에 익힐 것)할 것'이라는 훈령을 내무성에 내려보냈다.8) 19세기말 대한도 누락-미국은 일본의 맹렬한 로비로 인해 '對일본강화조약'에서 독도를 누락하고 말았다.14) 유엔군, 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1950년 유엔군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여, 한반도와 함께 방위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의 주장1) 15,16C 독도에 대한 지식과 이용도 일본이 많다. 반면 한국은 거의 없다.● 우리의 반박일본은 한국이 울릉도, 독도에 대한 空島(섬을 비게 함) 정책을 실시함으로서,사실상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조선의 공도정책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의 포기가 아닌 통치 방법의 하나임은명백하다. 고려시대에는 동북여진 해적들의 노략질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뭍으로 도망 나왔으며, 조선시대에는 왜구들의 침입으로 인해 사람이 거의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조선 세종 때(1419)에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거주로 인한 왜구들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조선 태종 때부터 공도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종 때의 '우산무릉등처안무사' 라는 직함과 3년에 한차례씩 '수토관이란 관리를 파견했던 것은 실효적 지배의 포기가 아닌 통치 방법의 하나임이 명백하다.2) 17C 이후 독도는 일본이 실효적인 지배를 하였다.돗토리현 요나고 시립 산잉역사관17C부터 독도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자료전시.1618년 죽도 도해면허 사찰 사본.● 우리의 반박일본은 1618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오오다니와 무라카와 두 가문에게 울릉도 연해에서 조업해도 좋다는 '도해면허'를 허가하였으며 그로부터 약 80년동안 울릉도 주변 어장에서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근거로 원래부터 독도는 일본 땅이었다고 주장한다.이에 대해 한국측은 "주인(朱印) 을 하사하면서 이것을 가진 어부들로 하여금다케시마 (울릉도) 지역에 출어하게 했다" 고 일본측 자료는 언급하고 있는데여기서 "주인" 이란 외국 무역을 공인하는 증명서이므로 일본이 다케시마 (울릉도)를 외국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으며 만일 국내에안용복을 부단 국제 문제 야기자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또한 그의 행적에 대해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므로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한다.이에 대해 한국은 그의 진술이 허위이기 때문에 극형시켜야 한다고 논의한 것이 아닌 정부의 허락없이 일본을 다녀왔다는 이유였으며, 안용복의 도일 활동기록은 일본측 문헌 ('조선통교대기','통항일람' 등)에서도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안용복의 대일 행적으로 인해 일본 막부가 인바슈(현 '도또리' 현)에문의한 죽도(독도) 문제에 대해서 인바슈는 "죽도는 인바슈, 호키슈의 부속이아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독도가 일본영유로 인식하지 않았었음을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다.5) 1905년에 '국제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 하였다.● 우리의 반박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를 국제법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한국점령을 '독도강탈'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1904년 8월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부서에 일본인 재정 고문과 외국인 외교고문관을 두게하는 것을 내용으로하는 일본에 의해 강제된 '한,일협정서'가 체결 되었다. 이로서 대한 제국은 실질적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일본은 당시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독도에 러시아 군함활동을 정찰하기 위한 망루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의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업사업가가 일본 정부에 독도에서의 강치등 어로의 독점권을 대한 제국 정부로부터 얻기위해 일본정부가 교섭해줄 것을고려하고 있는 도중 독도를 정찰기지로 이용하려는 일본 해군성의 요구에 의해 결국 "량고島(독도)를 일본정부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빌려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게 된다. 결국 일본 각의와 내무성의 검토를 거친 후에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를 '다케시마(죽도)' 라 부르고 일본영토에 편입시키게 된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편입" 이라는 것은 스스로 독도가 이전에 일본영부터 분리하는데 대한 각서'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로부터 분리되는 지역에 포함되었지만, 1952년 4월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조약' 에서는 분리되는 지역으로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이다.최근에 밝혀지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5차 협상까지는 '독도가 한국 땅으로 명시' 되었지만, 일본의 미국인 고문인 시볼드의 " 이 섬에 기상과 레이다 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미국의 국익차원에서 고려될 수 있으며미국무부에 독도를 일본땅에 명시할 것을 건의"한 결과로 결국 독도가 한국땅이란 명시'가 빠지게 되었다. 이는 우방으로서의 미국이 아닌 철저한 미국의 국익차원에서 독도를 고려한 미국의 자세와 일본의 치밀한 계획의 합작품이라 할 것이다.또한 미국의 독도시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 1948년 6월의 무고한 울릉도 어부들을 살해한 "독도폭격사건"일 것이다. 독도를 미공군의 사격연습장으로 지정해 폭격연습을 하던 중 우리 어민들을 무고하게 살해했건만, 은폐하려했던 미국의 모습은 그들의 철저한 국익에 근거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주변국의 입장1) 미국의 입장미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한일 간의 갈등이 분쟁으로 비화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미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자신의 패권을 한미일이라는 삼각 동맹관계를 통해 유지해 왔다. 한국과 일본 어느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만약 한국이 이러한 동맹관계에서 벗어나 북한이나 중국 측으로 기운다면, 미국의 대 동북아시아 전략은 근본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측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군재배치 등을 통해 한국을 미국의 영향권 아래 계속 묶어두려 한다. 이는 분명 중국의 부상을 ‘타깃’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도 문제를 보는 미국의 입장은 매우 신중하며 중립적일 수밖에 없다. 한일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입장이다.2) 중국의 입장중국 측에서도 독도 사태의 전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철저히 중립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