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목차Ⅰ. 들어가며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 ? 분석1. 편찬 배경 및 과정2. 내용 및 서술방법3. 사관 및 역사적 의식4. 사학사적 가치와 한계Ⅲ. 나가며Ⅳ. 참고문헌Ⅰ. 들어가며한국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매우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는 사서(史書)이다. 이 두 책은 편찬된 시기가 비슷하다. 하지만 구성과 편찬자의 사관이 투영된 서술형태 등의 성격에서 보면 공통점과 함께 큰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두 사적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 ? 분석1. 편찬 배경 및 과정사서는 그것을 서술하는 편찬자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또한 서술자의 사고에는 당시 시대의 흐름과 상황, 사상이 녹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한 역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편찬될 당시의 배경을 우선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김부식이 1145년경에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를 알아보자. 이때는 고려의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른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또한, 거란 격퇴 이후 강렬한 국가 의식이 고조되었었다. 김부식이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시기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일어나고 진압된 시기였다. 그는 갈등과 분열을 국가멸망 원인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당시 사회모순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후세에 역사의 교훈을 주기 위하여 역사 편찬은 불가피하였다고 생각되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주도하에서 11인에 의해 편찬되었다. 이 책은 많은 서적들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가장 많이 참조한 것은 현재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이다.)『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살았던 13세기는 격동기였다. 무신란이 일어났으며,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침입이 있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일연은 민족자주의식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그리고 후대인에게 민족혼을 강렬히 심어주기 위하여 『삼국유사』를 편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전의 『삼국사기』에 나타난 유교적 정치사관은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정신사관적 역사의식에 입각한 책을 짓고자 했을 가능성도 크다.이러한 배경 하에서 『삼국유사』는 많은 서적을 인용하여 편찬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추단해 볼 수 있는 기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2. 내용 및 서술방법『삼국사기』는 편찬한 동기와 목적 및 그 성격의 방향을 제시한 「삼국사기를 바치는 글」과 본기 28권, 연표 3권, 잡지 9권, 열전 10권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사마천의 『사기』와 같이 본기, 열전 등을 중심으로 하는 기전체 형식으로 편찬되었다. 그 중 본기 분량을 전체의 절반 이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열전 위주의 중국문헌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술방법에 있어서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로 임했다.) 이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려는 객관적 서술자세를 말한다. 즉, 전통적인 역사서술 방식에 의해서 서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신화나 설화 등 비경험적인 것들은 실려 있지 않다.『삼국유사』는 전 5권에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권에 따른 항목의 순서는 왕대순으로 되어 있고 내용은 전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책의 제목의 유사(遺事)가 말해 주듯이 흩어져 있는 자료를 모아서 채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자료에 대한 불만스런 과제들을 보완하는 뜻에서 『삼국유사』라 했던 것 같다). 서술하는데 있어서는 다양한 성격의 사료들을 선별하여 인용하고 그에 대해 편찬자의 의견을 덧붙이는 태도를 유지했다.) 아울러 다양한 설화를 실었는데 주로 불교적인 색채를 띠었다. 이는 세속의 보잘 것 없는 민중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을 동정하고 드높이려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3. 사관 및 역사적 의식위에서도 말했듯이 『삼국사기』는 독창적인 창작물이 아니라 국가의 주도하에서 편찬된 책이다. 때문에 『삼국사기』의 지(志)의 서론, 그리고 열전의 인물평가 등과 논찬 등을 통해 그의 역사관을 찾을 수밖에 없다. 김부식은 문벌귀족의 역사가로 전통적인 기층문화와 체질이 다른 유교주의 사관과 중국 중심의 사대적 사고방식에 의해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뿐만 아니라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도 함께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당시 거란 및 여진과 전쟁한 뒤라서 강력한 국가의식이 대두된 시기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삼국사기』의 자아의식은 열전에 나타난, 순국한 인물의 투철한 국가의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열전에 등장한 69명 중에서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이 21명이었고, 34명이 통일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지 유교정치 이념의 실현만이 아니라 국가의식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부식은 신라 출신이기에 『삼국사기』의 대부분의 내용을 보면 삼국의 고구려, 백제, 신라 중 신라의 내용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본기 28권 중에서 고구려에 10권, 백제에 6권 그리고 신라에 12권을 배당하여 3국에 공평히 안배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신라의 내용이 현저히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예로 『삼국사기』의 열전에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주었던 김유신에 관한 내용을 3권으로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김부식이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영웅주의사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단순한 개인주의적 역사관이 아니라, 멸사봉공의 의무와 도리를 강조한 공적 덕목을 제시함으로써 국가의식을 강조하려는 것이다.)이에 반해 삼국유사는 승려인 일연에 의해 편찬되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즉, 불교를 멀리 퍼뜨리고 불교에 대해서 정리하려는 의도를 갖고 이 책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몽고의 침략 등으로 혼란해진 사회를 불교의 힘으로 재건하려는 그의 뜻이 책에 나타나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누락되었던 불교의 문화유산, 기록, 불교적 고대 설화와 야사를 많이 수록하였다.『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사관의 문제를 언급할 때 제일 중요한 내용으로 언급되는 것은 이른바 신이사관(神異史觀)문제이다. 이것은 일연이 한국사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아 위만조선과 삼한이로 이어지는 체계를 세우고, 유구한 역사적 전통과 신이함을 자랑스럽게 기록했기 때문에 야기된 문제이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 중국과 동일한 시기였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역사의 유구성이라는 면에서도 중국과 동등하다는 자부심을 키워준 것이다. 다음으로 불교문화사관이 나타난다. 일연의 불교적 신이사관은 그 저변에 신라가 곧 불국토였다고 하는 그의 불국토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유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사로서 독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위에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을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그 예로 신라사의 시대구분에 있어서 『삼국사기』의 것을 가져온 것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해 일연이 취한 태도는 비판 · 극복의 관계였다기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면서 나름의 신이사관을 전개한 것으로 판단된다.)4. 사학사적 가치와 한계『삼국사기』에 나타난 김부식의 역사의식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유교적이며 사대적인 사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범람하는 중국문화 가운데에서 우리 현실에 대한 강렬한 자아의식과 투철한 국가의식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무조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김부식은 정부주도하의 관찬이라는 전통 역사편찬의 모델을 정착시켜 선초의 『고려사』등 역사편찬에 기틀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그는 전통사학에 초석을 놓는 역할을 하였으며,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 국가의식이라는 기준을 강조하였다는 사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목차Ⅰ. 서론Ⅱ. 본론1. 최근 3개월 간 서울권 집값의 추이2. 서울권 집값의 전반적인 상승 원인- 양적?질적으로 부족한 주택 공급- 투기성 매매3. 서울권집값 변동의 다양한 현상과 그 원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따른 다양한 반응- 강북 지역 집값의 상향 현상- 신도시 집값의 하향 현상4. 서울권 집값의 신(新)양극화 현상5. 서울권 집값 상황이 초래하는 문제점- 상승 시, 수요자의 부담과 반대쪽의 상대적 박탈감- 하강 시, 부동산 투자의 침체6. 해결책 마련과 실현 가능성Ⅲ. 결론 및 비평Ⅳ. 참고자료Ⅰ. 서론요즘 항간에 회자되고 있는 주요한 몇몇 이야기들 중에 ‘서울지역 집값의 변화’ 가 있다. 물론 이는 몇 년 전부터 뉴스와 신문에서 단골로 소개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정부가 분양가 상한제이니 뉴타운개발과 같은 다양한 부동산 정책을 내세우며 서울지역의 집값을 내리기 위해서 힘쓰고 있다. 그러면 서울권 집값이 정부가 규제를 할 정도로 오른 이유와, 더불어 최근 3개월 간 서울권 집값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으며 이에 따른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Ⅱ. 본론1. 최근 3개월 간 서울권 집값의 추이위의 그래프를 보면 일주일 간격으로 변화양상이 나타날 만큼 서울권은 집값이 매우 예민하게 변화한다. 최근 3개월 간 서울권 집값(매매값)의 추이를 보면 서울지역은 대체로 소폭 상승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같은 서울 지역 안에서도 지역구에 따라 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최근 노원구를 중심으로 한 강북 지역의 집값이 강세를 보이면서 진행되고 있으나 강남권은 재건축을 중심으로 최근 약세로 돌아서는 분위기다. 3월초에서 중순에는 송파구를 중심으로 하락했다. 최근 매수문의가 줄었고 재건축 규제완화 시기도 불투명해지면서 가격이 하향 조정되는 분위기다. 반면, 수도권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최근 들어 소폭 오르고 있는 추세이다. 신도시의 경우, 수도권과 마찬가지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있지만 0% 아래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으로 서울권에는 점차 지방에서 이주해오는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 증가량이 옛날에 비해 크지는 않지만 여전히 서울권으로의 진입은 계속 되고 있다. 그런데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전입에 따른 수요에 공급이 맞추어지지 않으니 집값 상승의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시장원리에 의한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그리고 비단 양적인 문제에서의 측면보다 질적인 측면도 원인으로 작용한다. 서울권에는 오래되어 낙후된 아파트가 상당히 많다. 때문에 좀 더 질적으로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하는 심리로 인해 시설이 더 좋은 집을 선호하다보니 이 또한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 집값 상승을 불러왔다고 판단된다. 실례로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약 5년간 서울 강남의 집값이 오른 이유를 재건축 규제가 강화되어 상대적으로 강남에 주택공급물량이 줄어듦으로써 집값 상승을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낙후된 건물에 대한 재건축이 어려우니 새로 짓거나 더 좋은 곳으로 수요가 몰려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투기성 매매요즘은 ‘서울에 집 한 채만 있어도 부자다.’라는 말이 많이 쓰일 정도로 집값이 옛날보다 많이 상승하였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부동산 투자에 많은 관심이 있으며 실제로도 부동산 규모가 엄청나다. 시장에 투자의 손길이 활발하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가 활발하게 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투자의 의미를 넘어선 ‘투기’의 목적으로 부동산 시장에 뛰어드는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다. 금적인 여유와 자금이 있는 사람들 중 일부가 투기를 함으로써 집값이 상승하였는데 이는 정작 집이 필요한 수요자들에게 부담을 안겨주고 있기도 하다. 실례로 서울의 한 의사는 아파트를 무려 30채나 사서 이익을 늘리기도 했다. 자신의 돈으로 아파트를 더 산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냐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는 실수요자에게 피해를 안겨주는 방법이기에 투기성 매매는 처단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3. 서울권집값 변동의 다양한 현상과 그 원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따른 다양한 반응서 있다. 이처럼 시장원리와 상황에 맞지 않는 규제적인 정책은 정부의 의도와는 다른 반응을 가져오기도 한다.- 강북 지역 집값의 상향 현상)올 3월 들어 강북 지역의 집값이 상향 곡선을 그리며 고공행진 하고 있다. 위의 표에서도 보듯이 증가추세에 있는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모두 강북권이다. 그동안 강남과의 가격 차이로 상대적 소외감을 느꼈을 강북 주민들에게는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강북 지역의 집값이 왜 상승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고, 이러한 현상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자.부동산 전문가들은 ‘정부의 과도한 규제가 강북 집값을 올리’는?부작용을 낳았다고 진단한다. 분양가상한제 시행으로 재개발 관리처분이 집중되면서 이주수요가 몰렸고, 대출규제로 소형아파트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으며, 강남에 대한 집중규제로 투자수요가 강북으로 몰렸다는 것이다.?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대다수 전문가들은 서울 강북 지역에 몰린 재개발·뉴타운?사업이 강북 집값을 끌어올린 원인으로 지목한다.?함영진 부동산써브 부동산연구실장도 "지난해 초부터 강북지역은 전세 가격이 상승하면서 매매가도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왔다"며 "재개발·뉴타운 지역이 몰려 있어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집값 상승이 확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대출규제로 인해 강북 중소형아파트에 수요가 몰린 것도 한 가지 원인이다.?6억원 이상의 아파트를 구입할 경우 DTI 적용 대상이 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강북 중소형아파트 매입이 늘었기 때문이다.?함 실장은 "소형아파트에서 중대형아파트로 갈아타려는 사람들은 물론 내집마련을 하려는 서민들이 대출규제로 자금 마련이 여의치 않자 강북 중소형아파트로 몰리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며 "결국 강북 집값 강세는 대출규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임대사업이 각광을 받으면서 임대사업자들이 강북 중소형아파트에 몰린 것도 집값 상승에 영향을 줬다.?이에 반해 집값 담합은 큰 변수가 아니라는 의견이 많았다.?김규정 부동산114 차장은 "도시)의 아파트 값과 안양시 동안구(평촌신도시)값 등이 크게 하락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같은 기간 동안 서울 전체 집값이 4.8% 오르고, 경기도 전체 지역이 2.7% 오른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신도시 가운데서도 인기가 높았던 분당, 일산 등의 하락폭이 상대적으로 더욱 컸다. 눈에 띄는 점은 인기 고가아파트로 꼽히던 대형 아파트의 가격 하락폭이 크다는 점이다. 특정 아파트에 따라서는 13%까지 하락한 것도 있다.지난 2006년까지만 해도 1기 신도시는 서울에 비해 저렴한 주택가격과 쾌적한 환경을 장점으로 앞세워 수도권 수요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신혼부부 등의 젊은 층부터 노령층까지 도심보다 주거환경이 월등하다는 평가를 잇따라 내놨고, 이들의 대체 주거지역으로 떠올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1년동안 신도시 아파트 값이 맥을 못춘 이유로는 먼저 지난 2006년까지의 급등세로 가격이 너무 많이 오른 점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대출규제 등이 가해지면서 수요가 끊겼다. 2006년까지 오버슈팅(과열급등) 양상을 보였다가 이후로는 다시 시세 상승을 이끌만한 호재가 없었다는 분석도 있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단지 노후화’가 있다. 지은 지 16-18년이 되면서 신도시가 가진 매력이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또한 2기 신도시 등에서 값싼 아파트가 나온다는 기대감도 작용하고 있다. 분양가 상한제를 통해 저렴한 아파트를 내놓겠다는 정부정책이 나오면서 1기 신도시 주택의 주수요층이었던 30-40대가 내집마련 시기를 늦추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서울도심의 재생사업(재개발/재건축 등)을 통해 서울 강북지역 주거환경이 크게 개선되는 모습, 그리고 향후 주거, 교통환경 등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다시 서울을 쳐다보는 수도권 거주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서울중심의 직장생활 등으로 인한 교통상황 및 원거리라는 점에서 불편한 점이 주요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리 수도권이 교통이 발달하고 서울로의 접근이 가까워도 서울 지역의접근성이 낮은 수도권 지역, 신도시 집값은 하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지역에 따라 변화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면 하강하는 쪽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가 쉽다. 같은 서울권 안이지만 오르는 쪽을 보고 있으면 허무감과 허탈감이 느껴질 것이다. 우스운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집값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서울권 사람들은 실제로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수요자들이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집을 구하고 싶지만 집값이 상승하면 선택 폭이 좁아지니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하강 시, 부동산 투자의 침체집값이 하강하게 되면 시장에서 부동산 투자가 줄어들어 경기가 침체될 우려가 있다. 투자가 활발하게 일어나면 시장의 원리에 따라 매수와 매도가 원활하게 일어나서 경기가 안정되거나 발전할 수 있다. 정부의 극심한 규제가 집값의 하강을 초래하게 되면 부동산 시장이 우울해질 염려가 있으니 되도록 강한 규제는 지양하는 바이다.6. 해결책 마련과 실현 가능성-도심 재개발활성화를 통한 주택공급확대정부가 서울도심재개발 활성화를 통해 주택공급을 늘릴 계획이다. 서울시는 최근 역세권의 용도지역을 제3종 주거지역(용적률 250%)에서 준주거지역(450%)으로 상향조정하고 여기에 공공시설 기부채납에 따른 용적률 인센티브 50%를 추가해 최대 500%의 용적률을 주기로 했다. 대상지역은 은평, 상계, 북아현, 신림, 등 16곳이다. 그리고 서울시 중화, 방화, 노량진, 신정 등 뉴타운지역도 개발할 계획에 있다.하지만 도심재개발은 적지 않은 부작용이 뒤따른다. 개발계획으로 땅값이 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개발에 따른 이주수요로 전셋값 집값도 요동친다.?게다가 도심재개발이 주택공급확대 효과보다는 기존 세입자를 변두리로?쫓아내는 문제도 있다.??도심재개발을 통해 주택공급을 늘리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가장 큰 걸림돌은 땅값 상승이다. 서울의 땅값은 매년 큰 폭으로 뛰고 있다. 국토해양부가 최근 발표한 지가 동향에 따르면 서울은?2006년 9.17%,다.?
Ⅰ. 서론Ⅱ. 본론1. 흑사병의 정의와 증상2. 중세 이전의 흑사병3. 중세 시기의 흑사병1) 흑사병의 발생 경로2) 흑사병의 전파와 파괴력3) 당시 유럽인들의 반응4) 흑사병이 중세 시기에 미친 영향과 결과4. 중세 이후의 흑사병5. 연구과제Ⅲ. 결론Ⅳ. 비평Ⅴ. 참고문헌Ⅰ. 서론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많은 병으로부터 치료와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치료약이 없는)에이즈나 각종 암 등의 병들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대다수의 병들이 의학으로써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기 전, 비위생적인 상황에 있었던 전근대 시기에는 각종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전염병의 대표적인 예, ‘흑사병’은 당시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것은 사회적?경제적?문화적인 기반을 흔들어 놓을 만큼 강한 파괴력을 지닌 병이었다.우리들은 흑사병이 지니는 역사성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은 흑사병의 발생과 진행, 그것의 영향력 등이다.Ⅱ. 본론1. 흑사병의 정의와 증상흑사병 또는 선(線)페스트는 주로 쥐에게 잘 걸리는 질병으로서, 감염된 쥐에 기생하는 벼룩을 통해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다.) 페스트의 증후는 열이 높이 오르고, 손발이 쑤시며, 가장 전형적으로는 임파선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이런 증후의 질병은, 물론 이미 영양실조로 허약해진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반드시 목숨을 앗을 정도는 아니다.발생 초기의 선(線)페스트는 머리, 겨드랑이, 사타구니로 병균이 침입하여 온 몸에 심한 열이 나면서 떨리고, 2~3일 후에는 정신을 잃고 죽게 한다. 폐(肺)페스트는 균이 허파에 침입하여 폐렴과 비슷한 증후를 나타낸다. 피를 토하고 고열을 나타내며 죽는다. 대부분 발병한 지 24시간 이내에 사망하게 되는데, 이 페스트를 흔히 ‘흑사병’이라고 한다. 이유는 사망 직전에 피부가 흑색이나 자색으로 변하고 선 페스트에 비해 사망률도 하였고 성채에 올라가 지붕을 떼어낸 뒤 시체들을 그곳에 던져 넣기도 하였다. 큰 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위기를 잘 헤쳐 나갔다. 8월이 끝나가면서 흑사병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질병 자체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14세기 대륙과 대륙을 이동하여 또 한 번의 큰 흑사병이 창궐하게 되었다.3. 중세 시기의 흑사병1) 흑사병의 발생 경로중세 시기의 흑사병의 발생 근원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으로 중국에서부터 몽고제국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어느 지역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1334년, 남부 지역에서 흑사병이 전래된 질병으로 보고 있다. 쿠빌라이 칸 이후 이 남부지역에까지 몽골 세력이 미치게 되었다.문제의 흑사병은 바로 이때부터 아시아 대륙을 거쳐 유럽대륙을 넘기 시작했다. 몽골 세력의 강하고 넓은 시장 세력으로 인해 유럽과의 접촉이 많았던 것이 화를 야기하게 되었다. 중국의 상품(비단, 향신료 등)이 유럽으로 많이 수출되었는데, 그 교역기지에는 인구가 매우 밀집되어 있었다. 이는 페스트균이 번식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페스트를 옮기는 쥐벼룩들이 무역상들의 무역로를 따라 유라시아로 진출, 유라시아의 기독교 공동체를 깔끔하게 쓸어버렸고, 계속해서 서부로 이동하여 킵차크 칸국의 수도에 타격을 주었다. 여기서의 페스트균이 제노바 상인을 통해 유럽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후 유럽은 흑사병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2) 흑사병의 전파와 파괴력유럽에서 최초로 흑사병 희생자가 발생한 곳은 시실리의 ‘메시나’였다. 열 두 척의 제노바의 무역 상선이 1347년 10월에 이탈리아 말단에서 메시나해협을 거쳐 시실리의 메시나항에 입항했다. 그들은 아시아 상인들과의 정기적인 무역의 결과로 향료와 비단을 싣고 동쪽, 아마도 흑해에서부터 항해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흑해의 크림반도)에서 몽골과 유럽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배가 입항한 지 며칠 안 가서 메시나 시민들은 병들어 죽기사들의 시체를 성벽 안으로 날려 보냈다. 카파 성 안에는 이탈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성을 탈출하여 흑해를 거치는 지중해 항로를 따라 고국 이탈리아로 피난갔다. 이 때, 그들과 함께 흑사병균이 유럽으로 옮겨 들어 왔던 것이다. 1347년에는 이탈리아 전역이 페스트에 휩쓸렸다.)그 해 말에 페스트는 프랑스의 지중해 항구인 마리세이유에 도달하였고, 급속히 교황청이 있던 아비뇽으로 전파되어 불과 몇 주일 사이에 추기경단의 반을 쓸어갔다. 1348년에는 페스트가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다. 예컨대 흑사병으로 인해서 당시 5만에 육박하던 피렌체 시의 인구는 무려 5분의 1로 줄어 들었고, 파리 시의 인구는 15만에서 5만이 죽었다고 한다. 1349년 가을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가 전역을 휩쓸었다.) 1350년에는 아이슬랜드와 러시아에 이르는 북유럽 전역이 페스트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흑사병의 파괴력은 실로 놀라웠다. 사망률은 극도로 높았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전염된 도시의 인구 가운데 반이 죽었다고 한다. 병이 확산되어 감에 따라, 도시 밖에 세워진 공동 묘지에 시체를 묻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물론 과정의 여지를 감안하고, 페스트의 마수가 뻗치지 않은 지역이 몇몇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유럽 총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죽어버렸다고 여겨진다.흑사병은 흔히 가난하거나 허약한 사람들을 주로 희생자로 삼았다. 스스로를 잘 지킨 부자들은 질병을 피해 가거나 가난한 여인을 사서 흑사병에 지나 간 집에 거주케 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우리는 질병의 계급성을 엿볼 수 있다.)페스트는 흑사병 이후에도 여러 세기 동안 심심하면 유럽에 출현하였고, 특히 최초의 발생 이후 50년 동안에는 여러 번 대규모로 재발하였다. 1400년의 유럽 인구는 흑사병 이전의 인구에 비해 3분의 1에서 2분의 1 가량 감소하였다. 물론, 인구감소는 15세기 초반에 중단되었고, 15세기 후반에는 인구가 서서히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하지만 . 그러나 더 보편적이었던 현상은 전반적인 공황과 도덕의 붕괴였다. 가족이 가족을 버리고 병자를 돌보는 자는 거의 없었다. 어느 누구도 페스트의 원인을 알지 못했으니 공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빠리 대학의 의학부는 1348년 역병이 1345년에 토성, 목성, 화성의 세 혹성이 이례적으로 물병자리궁에 모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끔찍한 유언비어는 누군가가 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미움받던 개인 및 집단들이 수원(水源)에 독을 풀어 고의적으로 페스트를 확산시켰다고 고발되었다. 특히 누구보다도, 중세 내내 기독교도의 히스테리에 불가피하게 희생되어 왔던 유대인들에게 의심이 집중되었다. 1348년 페스트가 확산되고 있을 당시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교황 클레멘트 6세는 유대인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페스트의 피해를 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페스트의 책임이 있을 수 없다고 분별 있게 지적한 포고문을 반포하였으나, 이에는 아랑곳없이 1349년에도 유대인 학살이 그치지 않았다.흑사병의 파장으로 색다른 종교적 광신의 형태도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채찍질 고행자들은 페스트가 죄많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아주 비상한 수단을 통해서만 페스트의 무서운 마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여러 무리의 남녀 광신자들이 함께 모여 반나체 상태에서 서로에게 채찍질을 해대면서 몰려다녔다. 그들의 고행 방법은 기독교에서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기본적인 금욕주의와 합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349년 10월에 교황은 이를 불법으로 선언하였다.4) 흑사병이 중세 시기에 미친 영향과 결과흑사병이 지나간 유럽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이 변화되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흑사병이 가져온 경제적 결과에 대해서 자신있게 하나의 결론으로 해명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도시별, 산업별, 개인별로 모두가 흑사병의 영향을 다르게 받았다. 브뤼지는 쇠퇴하였으나 안트워프는 번창하였다. 영국의 수출은 은 대다수 농민들로 하여금 힘겹고 단조로운 삶을 본질적으로 변화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끔 하던 옛 관습의 속박을 깨부수었던 것이다. 비록 농민 봉기가 대부분 실패하였지만, 서유럽에서 차츰 농노제가 사라져 가는 계기가 되었다.흑사병은 또한 교회의 역할과 권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주었다. 교회의 권위는 흑사병 때문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교회가 질병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흑사병이 프로테스탄트교의 출현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4. 중세 이후의 흑사병유럽의 인구는 17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13세기의 수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페스트가 마지막으로 발생한 것은 영국의 경우 1665년의 유명한 런던 대역병(the Great Plague of London)이었고, 유럽 전체로 볼 때는 1720년 마르세이유에서였다. 그러한 역병은 보건이나 의술의 발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페스트균을 보균하는 까만 쥐가 다행히도 18세기에 다른 종류의 갈색쥐에게 축출당한 덕분에 종식되었다.)5. 연구과제- Q: 유럽에서 쉽게 퍼졌으면서 왜 유럽 내의 유대인들에게는 쉽게 전염되지 않았는가?- A: 중세 당시의 유럽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유럽과 많이 달랐다. 좁은 지역에 많은 인구가, 특히 도시의 경우는 인구 밀집도가 높았고 또한 상당히 비위생적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 그래서 페스트균을 보균한 쥐가 쉽게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서에 나오는 말씀대로 정결케 하는 예법에 따라 몸을 자주 씻어 병에 대한 예방력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전염병이나 나병 환자는 가족이든지, 아니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격리시킴으로써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Q: 흑사병이 장기적으로 유럽 전역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가?-A: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역사가는 1350년 이후 한 세기 동안 총교역량이 크게 감소하였다는 데 동의한다. 분명, 인구의 격감은 상품의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