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7
검색어 입력폼
  • 신라의 삼국통합과 재평가
    신라의 삼국통합과 재평가Ⅰ. 머리말Ⅱ. 신라 통합의 배경1. 국외정세2. 김춘추의 외교정책Ⅲ. 통합전쟁1. 백제의 멸망과 9년전쟁2. 2차 9년전쟁 - 당 축출 전쟁의 승리Ⅳ. 삼국통합에 대한 해석과 평가1. 신라 삼국통합의 조건2. 삼국통합에 대한 평가Ⅴ. 맺음말Ⅰ. 머리말신라가 당 세력을 끌어들여서 삼국통합을 이룬 것에 대해 그 동안 많은 역사가들의 혹평이 있어왔다. 그러나 신라로서는 당시 국제관계를 최대한 이용하여 나라를 지킨 것이다. 당시 신라 ? 고구려 ? 백제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따라서 신라로서는 삼국관계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당과 동맹을 맺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김춘추의 외교적 수완과 정치적 역량에 대해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신라의 통합은 불완전한 것이었다고 하여 만주를 잃고 한반도를 통일한 것에 불과했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와 함께 발해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신라의 삼국통합으로 토지와 인민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을 통일한 것인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면서 삼국의 토지와 인민들을 모두 통합한 것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신라는 신라였다. 단지 백제 ? 고구려를 멸한 후 신라는 토지와 인민이 늘었고 지배조직 또한 확대 ? 발전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삼국통일이라는 말 대신 삼국통합이라는 말로 논문을 써나갈 것이다. 당시 신라인들은 백제와 고구려를 같은 민족이라는 테두리로 이해하지 않았고, 이들에게는 삼국 통합이 그 현실적 삶을 위협하는 주변 국가들을 정벌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에 신라의 삼국 통합에 대하여 현재 우리의 역사해석이 아닌 당시 신라인들의 관점,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근본적인 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서 논문에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합할 당시의 여러 가지 배경과 김춘추의 활동을 살펴보고 신라의 삼국통합을 재평가하고자 한다동맹(羅濟同盟)을 맺어 공동전선을 취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신라는 지증왕(智證王, 500 - 514) ? 법흥왕(法興王, 514 - 540)대를 거치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지증왕은 우경(牛耕)을 시작하고 수리시설을 확충하여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는 한편 마립간(麻立干) 대신 왕(王)호를 사용하고 지방의 주군제(州郡制)를 정비하였다. 뒤를 이은 법흥왕은 율령의 반포와 병부 ? 상대등의 설치,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불교의 공인 등을 통하여 체제정비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532년에는 김해의 본가야(本加耶)를 병합하였다.신라의 본격적인 정복사업은 진흥왕(眞興王, 540- 576)대에 시자고디었다. 그는 551년 백제외 연합하여 한강유역의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에 2년 뒤에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하여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에 격분한 백제의 성왕(聖王, 523 - 554)은 대가야군과 합세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管山城) 전투) 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는 께어지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백제의 복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진흥왕은 562년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한 이후에도 계속적인 정복사업을 단행하였으니 그것은 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에 세워진 순수비에 잘 나타나 있다.이러한 가운데 7세기로 넘어오면서 백제의 신라에 대한 복수전이 더욱 심해졌다. 이 복수전은 위덕왕(威德王, 554 - 598)과 무왕(武王, 600 - 641)대에도 계속되었지만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의자왕은 신라의 서쪽 지역 40여 성을 빼앗고 642년에는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성주인 품석(品釋)과 그의 아내를 살해하였다.2. 김춘추의 외교정책신라 내부에서는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이 태동하고 있었다. 김유신은 일찍이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항복해 온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金仇亥)의 증손자였다. 물론 귀순의 대가로 이들 일가는 진골대접을 나타났다. 그러나 이 모반사건은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오히려 사륜계열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고 선덕여왕대에 김용춘의 아들인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은 이들 신흥세력을 더욱 부상시켰던 것이다.국내적으로 이러한 상황 속에 김춘추에게, 딸과 사위 품석이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김춘추가 고구려로 가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에 간 김춘추는 보장왕(寶藏王)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출병의 대가로 죽령 이북의 땅을 할양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간접적인 거부의사를 표명하였다. 고구려와의 연합에 실패한 김춘추는 오히려 그 곳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뇌물을 주면서 구원을 요청한 대신(大臣) 선도해(善道解)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했다.사지(死地)에서 돌아온 후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게 선덕왕 16년(647) 구귀족 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을 진압하고 새로이 진덕여왕(眞德女王)을 즉위시킴으로써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권의 안정을 되찾은 김춘추는 이제 왜(倭)와의 연합을 위해 왜국으로 향했다. 당시 일본은 다이카(大和)정권이 성립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당(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맺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던 당은 632년 고표인(高表仁)을 일본에 파견한여 다이카 정권으로 하여금 신라에 군사지원을 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당시 친백제 정책을 취하고 있던 다이카 정권의 소아씨(蘇我氏)는 이를 거절하여 이후 20여 년간 국교가 단절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645년에 이러르 소아씨를 제거하고 들어선 다이카개신(大和改新) 정권은 당과의 관계개선을 원하였다.이러한 상황에 편승하여 김춘추는 646년 신라에 와 있던 고향흑마려(高向黑麻呂)의 제안을 받아들여 647년 일본에 군사협력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다이카 개신정권이 이 요청을 수락하는 대신 김춘추는 당과 일본을 중재하여 관계개선을 주선하여 준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연합군이 출동한 것은 660년이었다. 당의 소정방(蘇定方)은 1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백제로 진격해 왔다. 이와 동시에 신라에서는 김유신이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전장으로 출동하였다. 이들은 날짜를 정하여 양군이 합류해 사비를 치도록 되어 있었다.한편, 나 ? 당 연합군의 침입을 맞게 된 백제의 내부사정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즉위 초기에 활발한 정복활동과 유교진흥책을 썼던 의자왕은 말기에 접어들면서 환락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왕의 잘못을 지적하던 성충(成忠) ? 흥수(興首) 등이 오히려 유배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는 와중에 당군은 백강(白江 ) 좌측 언덕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넘게 되었다. 백제로서는 막아야 할 요충지를 모두 빼앗긴 것이다. 이에 의자왕은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660년 백제는 결국 사비성의 함락과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이에 당은 백제지역에 5도독부(都督府)를 둠과 동시에 의자왕을 비롯한 1만 2천명의 백제인을 포로로 삼아 돌아갔다.백제인들은 백제의 부흥을 위해 거세게 항전하기 시작하였다. 각 지역에서 200여 성에 달하는 백제유민들이 항거한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세력을 떨쳤던 것은 임존성의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주류성(周留城)의 복신(福信) ? 도침(道琛)이 이끄는 부흥군들로 이들은 사비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등 당과 신라의 군대를 자주 괴롭혔다. 특히 복신과 승려였던 도침은 일본에서 왕자 풍(豊)을 모셔다가 왕으로 삼아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하였다. 그러나 663년 주류성도 나 ? 당 연합군에게 함락당함으로써 백제의 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즉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해인 661년 당은 소정방으로 하여금 서해를 건너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군은 6,7개월이나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이들의 공격을 효 하나만을 두고 그 밑에 7주(州) ? 52현을 두었는데 그 도독으로 당의 관리를 임명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왕문도(王文度)가 웅진도독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죽자 유인궤(劉仁軌)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신라는 강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당은 신라까지도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라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해버렸다. ) 이에 대해 신라는 물론 백제의 유민들도 강한 반발을 하였다. 그러자 얼마 후 당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보내는 한편 신라의 문무왕과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당의 번방(藩邦)이 되어 서로 화친한다는 내용의 맹약을 맺게 하였다. 이 또한 신라가 옛 백제지역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책략이었다.고구려를 멸한 뒤에는 그 땅에 9도독부를 두고 그 밑에 42주(州) ? 100현(縣)을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설치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이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다. 아마도 이 안동도호부는 그 명칭으로 보아 옛 고구려지역 뿐 아니라 백제 ? 신라까지도 통할하기 위한 것이었지 않나 한다.이러한 당의 술책에 대해 신라는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우선 신라는 안승을 자신이 거느리고 온 4천여 호와 함께 금마저(金馬渚)에 있게 하고 그를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이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당과 결탁된 백제군을 막아내기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또 직접 옛 백제지역에 군사를 보내 공략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품일(品日) ? 천존(天存) ? 군관(軍官) 등의 장군이 출정하여 각각 백제의 63성 ? 7성 ? 12성을 점령하였다. 급기야는 사비성까지 함락시켜 여기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한편 고구려지역에 대해서도 검모잠이나 안승의 부흥운동을 지원해주는가 하면 고연무(高延武)가 당군을 공격할 때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행동에 당은 무력침공을 계속하였다. 특히 675년의 침략이 절정이었다. 이 때 당의 설인귀(薛仁貴)가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문훈(文訓다.
    인문/어학| 2011.06.10| 8페이지| 1,500원| 조회(295)
    미리보기
  • 올바른 역사인식과 갑오농민전쟁의 재평가
    올바른 역사인식과 갑오농민전쟁의 재평가한국근대사1. 머리말역사는 인간 삶의 총체를 다루는 것이다. 좁은 의미의 역사는 기본적인 삶의 단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민족이나 국가가 그 단위가 되는 것은 근대의 일이다. 우리가 ‘한국사’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한국이라는 범주로 카테고리를 만들어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역사는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것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나 민족이 주된 역사의 단위가 되는 현상이다. 근대 이후에는 국가체제가 일원화되지만 국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세계 관계를 빼놓고는 파악할 수가 없다. 식민지 지배나 침략, 전쟁 등의 예를 볼 때도 자국 내의 역사만으로 그 나라의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자국 내의 역사만 중시하고 외적 요인을 제외시키는 것은 근대 민족주의, 제국주의 역사관에 바탕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대 구분의 용어에 있어 ‘근대’라고 하는 개념은 당대 사람들의 삶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와의 차이를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는 서양의근대를 가장 완성된 사회로 보고 합리화시켜, 자생적으로 근대국가를 이룬 나라는 몇 안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세계사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이를 법칙으로까지 만들어버려 일부지역에서 일어난 것을 보편적인 역사발전법칙으로 인식하게 한다.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 인식은 인간의 삶 존재 자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실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역사학은 시작되어야 하며 바로 보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논리가 정교화되고 체계화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삶을 진지하게 자세히 살펴서 그에 따르는 문제들을 바로 알고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이 있는 만큼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다.2. 올바른 역사인식자본주의 국가들이 팽창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적인 것으로는 체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제국주의나 독점자본주인식은 일국사적이고, 근대적인 서구 역사학은 총체적인 역사학에서 후퇴하고 있다. 이는 서구적인 근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다른 것은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 대입시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로는 아시아, 아프리카를 제대로 볼 수 없다.그렇다면 한국인은 우리역사를 어떻게 인식해왔는가. 근대적인 서구 역사학의 흐름에 따라 서구역사발전의 논리를 보편적 역사발전과정으로 수용해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입시키거나 발전적, 주체적 인식에 따라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세계사적 발전 논리가 한국사에도 그대로 관철된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근대 자본주의 체제 확립 이후 근대사회의 발전에 부합하는 사상은 부르주아적인 사상으로 그 변혁주체 또한 부르주아적이다. 한국사회도 부르주아적인 사회발전을 지향했다고 생각하여 부르주아 혁명, 시민혁명을 한국사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한국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부르주아적인 변혁운동만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됨에 따라 개화파, 개화사상이 중심이 되는 변혁 운동이 근대사의 중심이 되어왔다. 또한 서구와 다른 아시아를 설명하기 위한 특수성론을 쫓아서 우리 역사를 인식하려는 틀도 한 맥락을 이룬다.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면서 조선후기 사회는 정체되지 않은 격동의 사회라 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는 중세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이고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근대적 요소들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근대로의 움직임이라고 평가되는 개화파의 변혁운동은 사회모순을 인식하고 바르게 극복하는 것과는 배치된다. 이들은 서구적 근대를 지향하고 있지만 모순을 올바르게 극복하지 못하고 농민들을 함께 수용하지 못하였다. 또한 자주독립을 외쳤지만 제국주의 침략을 도와주는 한계를 지닌다. 이보다는 갑오농민전쟁과 같은 민중적인 운동과 실학파의 사회개혁운동이 더 합당한 실천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북한역사학에서는 해방 후 초기 마르크스 ? 레닌의 고전을 학습하여 한국전쟁 후 애국주의를 매개로 하면서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마르크스 역사급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혁명, 시회주의 사회로 어떻게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는 정체론적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지만 실천측면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역사학은 민족정신, 민족의 얼을 통해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이처럼 한국의 근대사를 인식하는 데에 많은 노력들이 있어왔지만 이는 크게 서구적 근대인식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실상을 바로 인식하고 존재 자체를 바로 보는 것에서부터 역사학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듯하다. 이론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끼워 맞추는 데에 급급해서 인간의 삶에 중심을 두지 못하고 있다. 근대의 역사인식은 가치를 먼저 생각하지만 그 가치는 존재에 부합하지 않는다. 올바른 역사인식은 가치가 아닌 존재 자체, 실상을 바로 알고 바로 보고자하며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3. 갑오농민전쟁의 재평가올바른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다시 말하기 위해 서구중심의 역사인식과 이론과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관에 따라 잘못 평가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보편적으로 반봉건 ? 반외세의 근대 지향적 민족운동으로 규정된 갑오농민전쟁은 과연 그 사실 자체로 봤을 때에도 그러한 성격을 지닐 수 있을까.갑오농민전쟁이 근대와 연결되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5 ? 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자신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군사 혁명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상징적 자원을 한국의 역사 속에서 찾고자 했다. 그는 우리 역사의 낙후성을 강조하고 그러한 구체제를 뒤엎는 국민 혁명, 민족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맥락 위에서 박정희는 프랑스 혁명, 중국 혁명, 메에지 유신 등을 중요하게 부각시켰고 한국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이 그러하다고 하였다. 군사 정권의 관점에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 조정과 제 2공화국 정부를 동일시하고 농민군을 구데타 세력과 동일시하려는 상징 조작에 이용되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려웠다. 갑오농민학자들은 갑오농민전쟁의 근대성을 찾는 데 열을 올렸고 반체제적 성향의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은 반침략 ? 반봉건적 특징을 열성적으로 강조했다. 동시대의 문서에 의해서 복원되는 가난한 선비 전봉준은 개화를 접하지 못해 ‘근대’, ‘혁명’, ‘개화’ 등의 말을 알 리 만무했다. 대원군의 밀지에 따라 청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축출하려고 2차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에게는 전통적인 문명 중심인 중국과 일본이 동질적인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에 의해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대원군, 고종에 대한 충성심을 내세웠던 전통적인 양심적 지식인 전봉준은 혁명가로 변모되었다.갑오농민전쟁을 반봉건 ? 반외세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론과 가치에 사실을 끼워 맞추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갑오농민전쟁은 봉건 제도를 제대로 깨뜨리려는 움직임들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농민들은 양반 지주의 땅을 빼앗아 균등하게 나누려 하지 않았다. 폐정개혁안 12개조 가운데 포함된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케 할 사”라는 대목이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농민군이 토지문제에 관해 어떠한 개혁구상을 갖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는 폐정개혁안의 평균분작 조항의 해석보다는 농민군 대중의 실제 행동을 중심으로 고찰해야 한다. 당시 유력한 접주 중에서는 중소 지주들도 꽤 많이 있었고 요호 부민층이 많았던 농민군 지도부와 빈농층이 많았던 농민군 대중이 이에 대한 일치된 견해를 갖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농민전쟁이 아직 미완인 상태에서 농민군 지도부가 토지 문제를 전면화시켜서 다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농민군 지도부는 중앙권력을 손에 넣지 못하고 있었고 전라도 지방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농민들은 기존의 행정 제도를 마비시키지도 않았다. 농민들이 설치한 집강소는 농민 자치 기구였으나 무력하게나마 관권이 형식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또 집강소가 일시적으로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경우도 많았다. 읍락에 집강소가 설치되지 못한 지역도 있었다. 집강소가 직접 행정을 도맡아 땅으로 먹고 왕의 옷을 입으니 국가가 위급한 것을 앉아 볼 수만은 없다’ 고 하고 ‘선왕의 유민이라 어지 올바르지 않게 왕에게 반역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천지간에 살아 숨 쉴 수 있겠는가’ 라는 등의 표현을 통해 유교적인 충(忠)을 표방하고 있다. 농민군 측이 1차 봉기 당시 무장에서 발표한 포고문에는 국왕 고종은 자애함에도 불구하고 권신들이 국왕의 총명을 가리고 사리사욕만을 취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민군은 국왕 고종 개인에 대한 충성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자체에 대한 충성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농민군 지도부의 국왕,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농민군 지도부의 정치의식은 유교적 관념이 강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치변혁은 부패 탐학한 민씨 정권의 축출과 대원군의 복귀, 국권을 침탈한 일본군과 그에 의지하고 있는 개화파를 축출하는 것을 뜻하였을 뿐, 조선왕조나 국왕에 대한 도전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농민군 측의 요구는 대체로 집권층과 지방관의 제도적 혹은 제도외적 가렴주구 행위를 중지하라는 것에 집중되고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중세적 수취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집권층과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농민층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농민군 지도부를 형성한 일부 요호 부민층은 수탈로부터 벗어나 성장하고자 했고 영세 농민들도 역시 수탈로부터 벗어나 소생산 농민으로서 자립하는 길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중세적 수취제체 그 자체에 대한 거부를 하지는 않았다.갑오농민전쟁의 반외세적 성격에 관해서도 농민군은 왜와 청을 같은 침략적 외세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차 봉기 당시 농민군은 외국상인들의 도성설시와 내륙행상을 금단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농민군은 청국상인에 대해서도 일본상인과 같은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청국에 대해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2차 봉기에서는 청국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협공할 것을 계획한 대원군다.
    인문/어학| 2011.06.10| 5페이지| 1,500원| 조회(145)
    미리보기
  • 신라 골품제의 기원과 사상적 기반
    新羅 骨品制의 基源과 思想的 基盤Ⅰ. 머리말Ⅱ. 신라골품제의 기원1. 사로육촌(斯盧六村)의 계급구성2. 사로소국시대(斯盧小國時代)의 신분제3. 진한소국정복기(辰韓小國征服期)의 신분제Ⅲ. 골품제 형성의 사상적 기반1. 사로국(斯盧國)성립기 및 3성 교립기(交立期)의사상적 기반(基盤)2. 김씨(金氏)왕계 확립기의 사상적 기반Ⅳ. 맺음말Ⅰ. 머리말신라시대의 신분제도인 골품제(骨品制)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오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많은 부분에 있어서 실체가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의 성과로서 오늘날 우리는 골품제(骨品制)가 단순히 지배층의 신분제도(身分制度)로서 혈족의 존비(尊卑)에 따라서 출세만이 아니라 혼인, 가옥의 규모, 의복의 색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의 전반에 걸쳐 이를 규제했음을 알 수 있다. 골품제(骨品制)는 6세기 초부터 400여년간 비교적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으나 실체가 알려진 바에 비해서 그 성립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것은 골품제(骨品制) 자체가 신라가 발전하며 오랜 기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자리 잡아 갔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수세기에 걸쳐 신라의 기본 신분 제도로서 자리를 잡았으므로 골품제(骨品制)의 연구는 신라의 정치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고대 한국사회의 사회체제를 이해하는 데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신라의 국가 형성 ? 발전과정에 나타난 시대구분에 따라 사로6촌시대, 사로국시대, 진한소국 정복기의 신라시대의 세 시기로 나누어 골품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정리하도록 한다. 또한 골품제가 법제적으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작용한 사상적 기반을 알아봄으로써 제도적 측면 이외의 성립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신라골품제의 기원1. 사로육촌(斯盧六村)의 계급구성사로 6촌이 촌락(村落)사회단계에 있던 시기의 계급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석묘(支石墓)가 주목된다. 지석묘는 권력자의 탄생을 나타내 주는 기념물이라고 보는 견해에 따르면, 지석묘를 분석함으로써 지배계급과 금성 ? 월성 ? 계림을 비롯한 경주 시내의 고총고분이 있는 지역이 모두 포함되었다. 이 지역은 신라 국가형성이 왕실세력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특히 혁거세(赫居世) ? 탈해(脫解) ? 알지(閼智) 등을 시조로 하는 왕실세력들이 이곳에 자리 잡고 그 세력을 펴나갔다.한편 종래의 6촌은 새로운 지방통치구획으로 편제되어 6부가 되었다. 6부에는 사로 6촌에 살았던 씨족집단들이 계속 그 세력을 유지하였고 6촌장 계통의 후예들이 6부의 지배세력으로 남아있었다. 6부인들은 종래 마을의 규모를 확대시켜 읍락의 단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에 반해 정치중심구역에는 이주민계의 박(朴) ? 석(昔) ?김(金) 3씨족으로 이루어진 왕실세력이 점차 수적으로 증가하고 국가통치와 관련된 인원들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사로소국시대 지배세력의 혈족조직에 대해 살펴볼 때 박 ? 석 ? 김의 3씨족은 혁거세 ? 탈해 ? 알지를 시조로 모시는 이주민집단이 사로지역에 정착한 후 각기 독립된 씨족집단으로 발전하여 간 것이다. 여기에서 이주민 계통의 3씨족 집단과 사로 6촌장의 후손들인 6씨족집단은 서로 혈연적인 연관이 없는 집단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주민 계통의 집단은 6촌장계통의 주민들보다 신분적으로 한 단계 높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주민계의 주민들은 서로 세력연맹을 맺고 왕실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는데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거주지 자체가 정치중심구역으로 되어 있어 사로국의 지배세력 중에서도 상층신분을 구성하였다.이주민계 왕실세력 밑에는 6부의 지배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종래의 사로 6촌장계통의 후손들이었다. 이 시기 이주민계 상층신분의 성원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6부 지역까지 이주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6부 지역에는 종래의 계급구성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사로 6촌에 있던 씨족장 ? 가계장들은 이주민세력과 6부의 일반주민들 사이의 중간 지배층이 되었다고 보여진다.중간지배층이 살던 마을 이외의 취락에 살던 사람들은 그보다 밑의 신분층. 이들은 전쟁에 당하여 서로 의논하여 합의에 다다른 연후에 가부(可否)를 결정지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제적 왕권이 아직 성립되기 이전의 시기에 있어서 대외적 항쟁의 응집력은 이러한 족장회의의 합의를 거쳐서야 나올 수 있었던 것이며, 화백회의는 이러한 족장회의체의 유물(遺物)이라 할 수 있다. 각 성씨집단의 연맹을 통하여 지배체제를 이루었던 신라에 있어 이러한 족장회의체의 기능은 더 적극적인 데에 있었는데 그것은 연맹장의 선출이다. 기본적으로는 연장자(年長者)를 연맹장으로 선출하였는데 연장자는 단순히 연령적(年齡的)으로만이 아니라 부족의 전통을 전수하고 연맹체의 결속을 유지하는 데 상징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졌다. 이렇게 연맹장을 중심으로 하여 연맹결속을 강화하는 그 배후에는 족장회의체가 있어 여기에서 연맹장을 선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하고 때로는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3성씨족의 성원 수가 늘어나자 왕실세력이 정치중심구역에서만 생활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또한 왕실세력의 숫적 증가는 3씨족 사이의 대립과 갈등, 세력다툼을 유발하였다. 각 성씨집단이 이주시기를 달리하여 각기 특정한 지역에 정착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독립적인 경제단위를 형성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러한 경제적 독립성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어서 각 부족간의 교환을 통한 상호 보충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3성씨집단이 지배골족으로서 성립된 상태에서 이들 간의 경쟁은 두 부족이 연결함으로써 나머지 한 부족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양상으로서 나타났다. 그러한 부족간의 연결은 혼인을 통하였으며, 이를 살펴보면 1~3대(代)에는 박(朴)과 김(金)이, 4대에는 석(昔)과 박이, 5 ? 6대에는 박과 김이, 그리고 11~13대에는 김과 석이 연결되고 있는데 이것은 나머지 성씨에 대한 견제의 방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씨집단들 간의 연결은 비교적 취약한 것이어서 연결관계는 수대(數代)를 계속하지 못했다. 이러한 일련의 결과 왕위가 박씨족, 석씨족, 김씨족의 차례 따른 거주지의 구분과 계급구분이 신라시대에 들어오면 점차 혈연적인 원리의 중요성을 잃게 되고 따라서 촌락사회단계 사로 6촌 주민들의 후손이 가지고 있던 계급제가 점차 국가의 정치적 ? 행정적 조치에 의하여 새로이 편성되기 시작한 신분제로 바뀌게 되었다고 보여진다.그 밖에 3 ? 2 ? 1두품은 부(部) ? 리(里) ? 방(坊)의 밑에 살던 일반민에 해당하던 존재들이 편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동질적인 성격이 많았던 신분으로 평인신분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이 국가를 위해 일할 때에는 관등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상한은 3 ? 2 ? 1두품이 각각 달랐으며 4두품이 오를 수 있었던 상한인 대사(大舍)보다는 낮았다고 여겨진다. 부(部) ? 리(里) ? 방(坊)의 지배세력은 일정구역 안에서 살았는데 4두품보다 낮은 두품의 성원들에게는 동 지역의 지배세력들이 행정적 ? 신분적 영향력 보다는 혈연적인 영향력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혈연관계에 의한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어 행정적 ? 신분적 구분으로서의 두품구분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국가에 대한 임무나 존재형태가 같은 3 ? 2 ? 1두품은 구별 자체가 필요 없게 되어 부(部) ? 리(里) ? 방(坊)의 지배세력인 6 ? 5 ? 4두품 밑의 평인으로 존재하게 되었다.신라가 진한소국들을 정복하는 과정에 새로이 복속한 소국의 주민들은 어떻게 신분이 편제되었을까. 우선 피정복소국들도 사로국과 같은 신분조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왕이 거주하던 정치중심구역과 각 촌 지역이 있었는데, 왕실집단은 상층지배신분을 구성하였고 촌장들의 후손들은 하층지배신분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소국이 신라에 정복되면 왕은 왕경으로 옮겨가서 살게 되고 종래 소국 지역에는 과거의 방계왕실세력 집단이 남게 되어 점차 토착 세력화하였다.) 촌장계 세력 또한 촌을 단위로 한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계속 남게 되었다. 기존 소국 지역에 거주하게 된 이들은 왕경인과는 달리 골제나 두품제에는 들 이전의 토착적 전통신앙(傳統信仰) 안에서 찾아야 하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사로 6촌의 장과 연맹왕국단계까지 왕위를 교위하였던 박 ? 석 ? 김 3성 집단이 공히 천명하였던 천신신앙(天神信仰)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박혁거세 건국신화를 보면 이미 6촌장들이 천강자(天降子)의 직계 후손임을 천명하여 촌락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합리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혁거세 또한 천신신앙을 재천명하며 사로국의 건국시조로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이후 새로 유입되는 석씨 집단이나 김씨 집단 모두 동일한 유래를 가진 천신신앙을 소유하였고 왕실 구성원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가운데 3성 집단은 동일한 사상적 연원을 가진 6촌장의 후예들과는 구별될 만한 종교적 ? 사상적 위상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3성 집단은 모두 천신신앙과 구별될 만한 선진적인 종교 사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혁거세에게는 수신족(水神族)인 알영(閼英), 탈해에게는 해신(海神)인 적룡(赤龍), 알지에게는 수신족(樹神族)인 백계(白鷄)와의 연관성을 갖게 함으로서 3성 집단은 단지 하늘에서 어떤 산에 하강했다는 것에 그치고 있는 6촌장의 탄강설화와 차별상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원시종교에서 출발한 천신신앙과 다를 바 없는 사상적 연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신을 능가할 수 있는 종교적 권위를 제공하지도 못했다.이에 신라 왕실은 사상적 ? 종교적 차원의 차별이 아닌 제도적 측면의 차별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시조묘(始祖廟) 의례가 지닌 또 다른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 제 2대 남해왕(南解王)은 시조 혁거세를 주신으로 모신 시조묘를 설치하였는데 역대 왕들은 즉위 의례로써 이곳에 친사(親祀)하여 왕위 계승을 인정받았다. 이는 사로국 소속 각 집단의 대표자들에게 제사를 주관하는 왕실을 인정하고 그에 복속한다는 약속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시조묘에 친사한다는 종교적 권위를 통해 신라 왕실의 위상을 6촌장보다 상대적으로 고양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시조묘에
    인문/어학| 2011.06.10| 9페이지| 1,500원| 조회(242)
    미리보기
  • 히포크라테스와 의학
    히포크라테스와 의학Ⅰ. 머리말Ⅱ. 생애1. 코스의 히포크라테스2. 테살리아의 히포크라테스Ⅲ. 의학1. 히포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의학2. 히포크라테스와 코스학파3. 히포크라테스와 의학Ⅳ. 사상Ⅴ. 맺음말Ⅰ. 머리말예수보다 5세기 앞서 태어난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오랫동안 의술의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화적인 생애와 방대한 분량의 저술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의사 히포크라테스와 코스학파의 제자들이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으로 전해온 60여 권의 총서 모두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대 문헌학자들에 의해 널리 밝혀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히포크라테스의 사상과 의학적 이론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극히 단편적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총서에 근거하여 히포크라테스에 대해 연구하고자 했던 방법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의학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왜 히포크라테스를 따라다니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의 의학적 이론들을 복음서라도 되는 양 수긍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오늘날에도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통해 양심선언을 하는 많은 의사들의 형식적인 관례로써가 아니라 히포크라테스가 진정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더불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의학뿐만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히포크라테스의 사유(思惟)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로 한다.Ⅱ. 생애에 대한 고찰'코스의 히포크라테스,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 당시에는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이 꽤 흔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름난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를 다른 의사들과 구별하여 이렇게 불렀다. 여기에는 그에 대한 두 가지 정보가 담겨져 있는데 하나는 그가 태어난 곳이고, 다른 하나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신에서 비롯된 그의 가계와 관련이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코스 섬에서 태어난 뒤 나중에 그리스 반도의 테살리아(Thessalia)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사료와 기록들은 그의 흔적에 대해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 아들이자 손자인 히포크라테스는 전통을 지켜 가정에서 의술 교육을 받았다. 당시 의사의 가정에서는 십중팔구 기본적으로 구술과 실습을 통해 가르쳤을 것이다. 그렇지만 히포크라테스는 수련기에 자신의 가문에 전해 오는 기록들을 접하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도 의술에 대해 글을 썼는데, 아마 외과 수술을 다룬 듯하다.친족들에게서 의술을 익힌 히포크라테스는 먼저 고향에서 진료를 시작했으며 결혼도 거기서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결혼해서 세 아이를 낳았다. 테살로스와 드라콘(Dracon)이라는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들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히포크라테스에게서 의술을 익혔다. 히포크라테스의 딸은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폴리보스(Polybos)와 결혼하여 아스티팔라이아에서 조용히 살았다.히포크라테스는 코스에 있을 때 이미 의사로서의 명성을 얻은 듯하다.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는 압데라 사람들이 정신 이상이 되어 간다고 생각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를 치료하기 위해 타소스(Thasos)섬의 맞은 편 트라키아(Thracia)해변에 있는 도시 압데라로 불려간다.코스 출신 의사의 명성은 그리스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Xerxes)의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1세는 병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 고칠 수 없었던 유행병을 히포크라테스가 퇴치해 주기를 바랐다. 헬레스폰토스(Hellespontos)의 총독인 히스타네스(Histanes)가 히포크라테스에게 보낸 것으로 보이는 편지가 아직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히스타네스를 통해 전달된 이 초청을 히포크라테스는 도도하게 거절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히포크라테스는 코스 섬에서 지내던 초기에 이미 명성을 크게 떨친 것이 분명하다.2. 테살리아의 히포크라테스히포크라테스는 그의 부모가 사망한 직후 섬을 떠났다. 코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간 히포크라테스의 여정은 지방 유학생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의술로 이에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전의 사제 대신 조리사를 의학의 기원으로 꼽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류의 경험에 근거하여 발달한 요리술 이야말로 의술의 원천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음식의 섭취를 통해 생명이 유지될 수 있으므로, 충분한 영양분을 맛있게 섭취할 수 있도록 하는 요리기술이야말로 건강을 유 지시키고 증진시키는 절대적인 요소라고 판단하였다.그렇다면 그리스 의술의 원천이며 경험과학이라 부를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 학파나 크니도스 학파가 등장하기 이전의 그리스 의술은 어떠한 상태였을까.와 의 저자 호메로스(Homeros)는 그의 서사시에서 이렇게 말하 였다.“의술은 현재 고도로 발달하였다. 주문을 외움으로써 지혈시키는 것 이외의 모든 의술 행위에서는 미신적 요소를 가하지 않은 대단히 합리적인 창상 요법이 시행되고 있다.”당시 의사는 가수?예언자?조선 기술자와 함께 인간을 구하는 직업인으로서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다. 인간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올림포스신들 중에도 파이에온(Paieon)이라는 시의(侍醫)가 있었다. 군진 외과 이외의 의사들도 진통제와 치사약을 사용하는 데 능숙하였 다. 호메로스의 시속에는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이 기록되어 있어, 기원전 9세기경 그 리스에서는 군진 외과와 창상 요법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전쟁이 의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일상생활의 필요에 의하여 발달한 요리 기술 역시 일찌감치 미신에서 탈피하여 경험에 바탕을 둔 기술의 축적이 있었 던 것으로 생각된다.한편 주문을 외워 질병을 치료하는 당시의 습관을 없앤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 다. 신전의학(신전에서 행해지는 의술)이 뿌리 깊게 남아 있어, 의신 아스클레피우스 (Asclepius) 신전이나 이와 유사한 신전과 밀착되어 신비적 위선이나 기만성을 가지면서 의술의 주도권이 신전에 있었기 때문이다.그 시대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의학도 마술적 또는 종교적 관행이나 신앙, 그 리고 운동 수 있다.그러나 히포크라테스는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에만 깊은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가르침을 통하여 코스의 의술 전승에 특별한 영예를 가져다주고, 의술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널리 보급시켰다. 이러한 보급은 의술의 전승 과정에서 발생한 진정한 혁명이라는 평을 받는다. 처음에는 오로지 아스클레피오스 가문 안에서만 전승되어 오다가, 가문 밖에서 선발된 학생들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이전에 학교를 연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학교가 전에 없이 넓은 범위로 확대된 것은 히포크라테스 때부터이다.아스클레피오스 가문 밖에서 제자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먼저 스승이 확실한 보장을 해 주지 않는다면 의술 교육 개방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아스클레피오스 가문 밖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하는 제자를 선발할 때 실행된 는 새로운 학생의 임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 의 핵심적 기능은 의술을 소유한 가문의 특권과 이익을 그 지식을 소유하게 된 순간부터 다른 가족들에게도 지켜 주려는 것이었다. 이 는 원래 한 가문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만 전승되어 오던 의학적 지식을 외부 사람들에게도 개방한다는 의미를 지닌 의술의 변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개방이 일어난 이유는 가문 안에서 코스의 의술을 이어받으려 하는 사람의 수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외부인들도 수련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 한 대목은 의술의 가족 전승을 보장받으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데, 가문 밖에서 들어온 제자는 만약 스승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경우 스승의 아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기꺼이 수련을 시켜 주어야 한다.코스의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이 아닌 히포크라테스의 제자 가운데 가장 가까운 인물은 폴리보스였다. 그는 히포크라테스가 테살리아로 갈 때 이미 스승의 딸과 혼인한 상태였다. 그는 히포크라테스 총서에 포함된 이라는 저술의 저자로 남아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코스 출신인 것은 아니었다. 아주 먼 지방에서도 히포크라테스의 명성을 듣 동쪽 도시로 옮겨가면서 끝이 나고 말았다. 코스의 의사들이 모두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의 일원이었던 것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모든 의사들이 반드시 아스클레피오스의 전승에 따라 수련 받았던 것도 아니다. 아무튼 코스 학파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헬레니즘 왕조와 마케도니아, 페르가몬(Pergamon)과 같은 도시들에게 자리를 내줄 무렵 그 우월성을 상실했다.3. 히포크라테스와 의학히포크라테스의 그 의사로서의 기질과 능력은 가문에게 물려받았다고 해도 그 사유의 끝을 모르는 깊이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다. 이 무한의 깊이는 그의 의학과 접목되어 그에게 질병을 단순하게 보지 않도록 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는 모든 질병과 인간 그리고 자연을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올바른 생각으로 의학에 몸담을 의욕이 있는 사람은 먼저 사계절이 어떤 방법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계절은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같은 계절일지라도 환절기에는 온도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이다. 또한 따뜻한 바람과 추운 바람이 있고, 모든 지역에 공통적으로 부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지역에 따라 특이한 바람이 있고, 모든 지역에 공통적으로 부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지역에 따라 특이한 바람이 불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한편 물의 성질도 고려하여야 하는데 물은 맛이나 무게가 달라지면 그 성질도 크게 달라진다.???이는 그가 쓴 논문 중 공기, 물, 장소에 대한 부분이다. 이는 동양의 이론과 흡사한 점이 매우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미 기원전의 그리스학자는 어설프지 않은 자연에 대한 이론을 내놓았다. 이론 중 일부는 지금의 사고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으나 대부분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도를 가지고 있다.또한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한 히포크라테스학파는 위와 같은 관점의 일환으로 요리 속에서 의술의 맹아를 발견했다. 의술의 출발은 환자의 상태에 맞는 식이요법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환자의 식다.
    인문/어학| 2011.06.10| 13페이지| 2,000원| 조회(315)
    미리보기
  • 신돈의 인간관계에 대한 연구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의 지인(知人)들-신돈의 인간관계에 대한 연구1 . 머리말2 . 혈연관계3 . 집권 후의 지인(知人)들4 . 인간관계를 통해서 본 신돈의 몰락 이유5 . 맺음말1. 머리말신돈(辛旽. ?-1371)은 고려 말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정권을 장악한 승려, 개혁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일개 승려가 왕의 사부가 되어 권력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의문점을 제시한다. 무엇이 그를 권력의 중추로 올라서게 했는가. 집권 후 그의 권력을 더욱 강하게 만든 힘은 무엇인가. 왕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그의 권력이 한꺼번에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 동안 연구된 신돈에 대한 내용은 그에 대한 수많은 의문점을 찾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신돈의 집권과 개혁, 몰락은 그의 주위 환경과 연속적?인과론적으로 맞물려 있지 않을 수 없고,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배후를 연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필자는 신돈의 인간관계를 통해 그의 삶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고찰하고, 기존의 연구에서 부각되어 다루어지지 않은 신돈의 인간적인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혈연관계를 살펴보는 일은 그의 출신과 성장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공민왕?여러 공신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가 몰락한 이유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신돈의 집권과 개혁, 몰락에 대해 ‘왜 그렇게 했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에 대한 의문점을 제시하면서 논의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2. 혈연관계신돈의 출생에 관해서는 『고려사』의 내용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신돈은 영산인(靈山人)인데,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에 있는 옥천사(玉川寺)의 비(裨)였다. 어려서 승(僧)이 되어 법명은 편조(遍照)라 하고 자(字)를 요공(耀空)이라 했다. 어머니가 천했기 때문에 그의 동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 거처했다.위 기록을 보면 신돈은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천인이 되어야 하고, 노비가 승이 되지 못한다는 법에 따라 승려 동생인 판사(判事) 강성을(姜成乙)이 보인다. 이로 보면 신돈에게는 다른 아버지 강씨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강성을이 판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강씨의 집안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강씨가 신돈의 어머니를 언제 취했는지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신돈 출생 전후로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돈이 실각될 무렵에 강성을이 판사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강씨는 신돈이 출생하기 이전의 다른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타당성이 있다면 어머니는 천한 신분이었을지라도 신씨와 강씨가 상종할 만큼 적어도 미모나 귀품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신돈이 실각할 때 두 살 난 아들과 판사 강성을, 신순(辛純), 신귀(辛貴)을 처형하고 신올지(辛兀之)를 장류하였으며 신돈의 처와 첩도 적몰(籍沒)하여 관비(官婢)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신돈은 처와 다수의 첩을 두었고 두 살 난 사내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민왕 4년에 「二月乙未鷲城府院君辛裔死」(고려사 세가 권 38) 라는 기사로 보아 신돈 출생지의 부원군을 신씨가 맡을 정도로 신돈의 주변에는 관계(官界)에 진출한 유력자뿐만 아니라 많은 신씨의 친족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3. 집권 후의 지인(知人)들신돈이 등용될 당시에 공민왕은 오랫동안 왕위에 있는 사이에 일찍이 많은 재상들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세신대족(世臣大族)은 친당(親黨)의 뿌리에 얽히여 서로 엄폐하였으며 초야신진(草野新進)은 자기의 행동을 가식하여 명망을 얻어서 귀하게 되면 자기 가문이 한미함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大族)과 혼사하는 등의 유학자 중심 관료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국왕권이 약화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초월하여 독립 독행할 사람을 얻어서 크게 등용함으로써 과거의 폐단을 혁신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공민왕은 신돈을 총애하여 중책을 맡기고 국정 전반에 결쳐 자문을 구했으며 개혁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공민왕은 신돈에에 세심하고 출세할 욕심이 강하였으며 남을 칭찬하거나 헐뜯기를 좋아하였다. 신돈이 그의 집에 기숙하고 있을 때 신돈에게 처녀 두 명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란은 신돈의 심복이 되었으며 김보, 이춘부, 임군보, 박희는 신돈과 친근하여 관직을 얻었다. 기현은 신돈이 그의 집에 기숙할 때 그의 처에게 주부(主婦) 노릇을 시키는 등 신돈에게 아부하였다. 이수산, 한방신, 안우상, 이금강, 지룡수, 양백연, 김달상, 이운목, 장필례, 이선 등은 신돈에게 친근하게 대하여 금위 제조관(禁衛題調官)이 되었다. 감찰대부 손용은 날마다 신돈의 집으로 찾아 가서 무슨 일이나 일일이 부의했으며 신돈이 마루 위에 앉아 있으면 손용은 출입할 때마다 마루 아래에서 부복(俯伏)했다. 곽의는(郭儀)는 매양 시속 명절 때에는 술과 찬을 장만해 가지고 영산(靈山)으로 가서 신돈의 아비 묘에 제사를 지내 주고 그 묘지기를 시켜 신돈에게 전하게 하였으므로 신돈은 그를 불러다가 벼슬을 주었다. 조사겸은 신돈에게 아부하여 퇴물을 많이 받아먹었으며 오일악은 봉급을 사취한 혐의로 제명되었다가 신돈에게 붙어서 다시 벼슬을 얻었다.) 김문현은 그의 아버지인 밀직사(密直事) 김달상과 김군정이 신돈의 부덕(不德)을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장차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한 것을 신돈에게 고하였다. 이에 신돈은 김달상 등을 죽였으며 김문현은 신돈의 문객(門客)이 되었다.)신돈정권에 참여하여 신돈의 개혁에 공감하고 협력한 인물로는 이색을 중심으로 한 신흥유신을 들 수 있다. 공민왕은 세신대족과 초야신진ㆍ유생이 서로 연결되어 당파를 만드는 것이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개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개혁방향에 동의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세신대족을 비롯한 기존의 정치세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위에서 새로운 세력을 창출하기만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이점에서 당시의 신흥 유신들이 주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이색을 비롯한 신흥유신들이 신돈정권에 참여할 수 있는 격분하였다. 또 신돈의 정치적 지위가 강화되면서 여기에 제동을 걸려는 반대세력의 저항도 있었다. 이승경(李承慶)은 신돈에게 ‘나라를 어지럽힐 중놈’이라고 하였으며 정세운(鄭世雲)은 요승(妖僧)으로 인정하고 죽이려고 하였다. 밀직 제학 이달충(李達衷)은 여러 사람들이 모인 좌석에서 신돈에게 ‘술과 색이 과도하다’고 하여 신돈이 파면시켰다.) 후에 이달충은 신돈의 비행을 고발하는 다음의 한시를 남겼다.괴상함 마지하고 요사함 내닫는 늙은 여우어찌 손 안에 다투어 활 당기는 것 알랴위세를 범에게서 빌리니 곰도 떨고아첨스러이 사내 되니 부녀자가 쫓는다누런 개 파란 매도 참으로 꺼리는 것이니오계닭 흰 말이 이 또한 무슨 죄 있나듣건대, 너도 죽어서 머리를 고향으로 둔다 하더니이미 성 동쪽의 공중 도로에서 보았구나)지도첨의 오인택(吳仁澤)은 경천흥, 목인길, 김원명, 안우경, 전 밀직 부사 조회고, 판개성(判開城) 이회필, 평리 한휘, 응양 상호군 조린, 상호군 윤승순 등과 비밀히 의논하여 ‘신돈은 간악하고 교활하며 음흉해서 남을 참소하고 중상하기를 좋아하니 임금께 아뢰고 하루 속히 제거하여야 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중 범탕(梵?)을 파견하였는데 범탕 등이 행성으로 갔을 때 여러 재상들은 모두 일어섰는데 신돈은 홀로 앉아서 접빈의 예가 없었다.이에 범탕은 크게 노하여 힐책하였다. 이제현(李濟賢)은 ‘신돈은 골상(骨相)이 옛날의 흉인(凶人)과 유사하니 가까이 하지 마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전밀직 부사 김정(金精)은 김흥조, 조사공, 유사의, 김제안, 김구보, 이원림, 윤희종 등과 함께 신돈을 죽일 음모를 하였다. 명덕태후 홍씨는 공민왕 15년의 연회에서 신돈의 집권 책임문제로 공민왕을 힐책하는 등 신돈과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홍씨의 외척인 김원명은 신돈이 반역을 모의한다는 투서를 왕에게 바쳐 신돈이 제거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한편 덕령공주가 태후를 위해 문예부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신돈이 왕을 따라 들어오자 태후는 앉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에 신돈 반열에 앉아 있지 않고 감히 전하와 더불어 나란히 앉아 그 거리가 몇 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놀라 뛰어 흉흉하지 않는 이가 없사오니, 대체 예란 상하의 계급을 구별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이온데, 진실로 예법이 없다면 무엇으로 군신이 되며, 무엇으로 부자가 되며 무엇으로 국가를 다스리겠습니까? 성인이 예법을 마련하였음은 상하의 명분을 엄격하게 하여 그 꾀가 깊고 그 생각이 먼 것이었습니다. 적이 보옵건대 신돈은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나라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임금을 없애버릴 마음이 있으니)... (하략)이 상소문을 올린 것을 빌미로 이존오는 유배를 가게 되고 결국 분을 삭이지 못하다가 유배지에서 객사하고 만다. 이들 뿐만 아니라 신돈에 의해 축출되고 관직에서 밀려난 수많은 이들도 앙심을 품었다.4. 인간관계를 통해서 본 신돈의 몰락 이유신돈이 급격하게 몰락하여 축출되는 데에는 공민왕의 신임을 잃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 공민왕은 원래 의심이 많고 사람을 잘 시기하는 성질이 있어 자기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그 권세가 너무 강해지면 제거해 버리는 성향이 있었다. 신돈집권기가 지속됨으로써 신돈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집단이 형성되는 것은 공민왕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비록 신돈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왕이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였으며, 공민왕은 신돈의 권력이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보이면 언제든지 거두어들일 차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신돈이 사심관제를 부활시켜 5도 사심관이 되려고 하자 공민왕의 신임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또한 기근으로 백성들의 곤궁화가 심하고 명의 건국으로 국외정세도 변화되자 공민왕은 친정 선언을 하였다. 신돈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해왔던 공민왕이 신돈을 숙청하여 국내외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왕권을 유지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을 본다면 신돈에 대한 공민왕의 신임과 친분도 그를 이용하려는 왕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돈이 왕의 신임을 잃은 데인다.
    인문/어학| 2011.06.10| 6페이지| 1,500원| 조회(123)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8
8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4
  • A좋아요
    2
  • B괜찮아요
    2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14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6:11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