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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무라이를 통해 본 일본
    Ⅰ. 서론어느 나라든지 독특한 특징이 있지만 일본은 같은 한자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 중국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 많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지금 현대 일본의 문화도 그렇다. 고대에는 분명 중국-한국-일본 순으로 문화가 전해졌었는데, 왜 유독 일본은 도중부터 다른 길을 걸었을까. 그 이유에는 다른 요인도 많겠지만, 그 중심에는 단연 사무라이의 문화가 있다. 동아시아권에서 무인계급에 의한 이런 긴 통치를 경험한 사회는 일본 외에 어디에도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잠시 무인계급이 지배했던 걸 제외하면 전무후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한자문화권이고,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공유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사회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우리나라와 중국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영향력은 지금의 일본사회에도 깊게 침투해있다. 일본이 동아시아권에서 결정적으로 혼자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침략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전환점인 메이지 유신 또한 좋든 싫든 간에 사무라이들의 역할이 컸다.비록 사무라이가 현대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 현대 일본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사무라이 문화는 과거의 일본뿐만 아니라 현대, 그리고 미래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큰 키워드인 것이다.Ⅱ. 본론1. 사무라이의 출현과 그 배경⑴ 사무라이란?헤이안조 천황 정부의 궁정귀족들이 교토에서 세련된 문화생활을 즐기던 9세기에서 10세기경 무력의 소유를 특징으로 하는 집단이 출현했다. 그들은 ‘쓰와모노, 모노노후’, ‘부시’, ‘사부라이(侍)’등의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사무라이는 이 중에서 사부라이가 변한 것으로 귀족을 시중드는 남자를 가리킨다. 사무라이란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기능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직능집단이었다. 그들은 군사전문가로서 명확한 자기정체성을 갖는 일본 최초의 사회집단이었다.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사무라이의 완전한 발전 형태는 토지를 소유한 무인으로 토지와 농업 생산물의 지배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급이었던 무사들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상 덕분이었다.⑵ 사무라이의 경제적 특징고대 말기에 토지사유화가 진행되면서 지방의 일부 농민들은 한층 더 자립적이고 부유해졌다. 이들이 진화해 마을의 영주가 되었는데 특히 헤이안 시대의 정부가 사유를 인정한 대상은 새롭게 획득한 토지뿐이기 때문에 이들은 토지를 개간한 사람들의 계급에서 발전한 ‘개발영주’이다. 헤이안 후기에 몇 차례 대반란과 폭동이 겹쳤기 때문에 개발영주들은 스스로 토지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사가 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학계가 주장하는 사무라이의 출현으로 이들은 후에 귀족 소유의 장원까지 차지하게 된다. 이것은 사무라이 계급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된다.⑶ 사무라이의 군사적 특징사무라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를 선두로 11세기 경 사무라이 무사들은 독자적 위계구조를 가진 정치조직을 구축하였다. 사무라이 문화 발흥 이전에도 군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무라이의 특징은 독특한 위계조직 및 전문 무사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왕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무라이 문화만의 큰 특징이고 현대 일본 문화까지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다. 귀족 세력을 배경으로 이중 권력 구조 속에서 그들만의 권력기반과 문화, 정체성을 구축했기 때문에 그들은 후에 권력을 잡은 후에도 문신 귀족이 되지 않았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인 우리나라나 중국이 무(武)보다는 문(文)을 중요시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무라이들이 갖고 있던 것은 글이 아니라 힘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폭력은 권력이자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 하는 수단이었다.2. 사무라이의 발전과 역사⑴ 사무라이의 위계구조무사 계급의 후손들은 헤이안 시대 후기에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들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자신들 나름의 고귀한 혈통을 내세우며 고대 일본의 국가조직 속에서 정당한 무사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존경했고, 중앙정부와도 연결되어 있 있었다. 이 조직망은 하나의 지도자를 필두로 나머지 무사들이 부하로서 충성을 다하는 구조인데, 이러한 수직적인 조직관계는 사무라이를 고용인에서 지배계급으로 변모시킨 핵심적 요인이었다. 그전까지 무사들은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보호자-피보호자의 관계에 놓여있었으나 12세기 후반부터 사무라이 주군-신하 관계를 만들어냄으로서 그들만의 강력하고 견고한 연대를 만들어냈다.⑵ 최초의 사무라이 정부, 가마쿠라 막부끈끈한 연대를 바탕으로 사무라이들은 12세기 후반,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이끄는 동국 일대의 유력한 사무라이 연합이 다이라 호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적으로 그들이 지배하는 최초의 정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유일정권은 아니었지만, 후에 천황군과의 싸움 후에 분명히 막부세력이 강했던 것만은 확실하다.가마쿠라 막부는 사무라이들의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여 공인함으로써 지방정부기관과 교토의 장원 영주에 대하여 사무라이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사무라이들은 여전히 토지의 소유권 확보를 위해 고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지에 대한 고유권의 공인은 쇼군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던 최대의 특전이었다. 이러한 막부의 권력을 배경으로 막부의 직속 가신들은 장원제를 침식하여 지배력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막부에 소속된 직속 가신들은 소속되지 않은 사무라이들에 비해 우위를 획득했다. 덕분에 주요한 가신들은 자신들의 제법 큰 자신들만의 조직을 가질 수 있었고, 애초에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이 동국의 주요 사무라이의 연합이어서 동국의 주요 사무라이 영주의 동맹이 그 기본 토대였기 때문에 가마쿠라 정부의 기능은 이들 독립적인 사회조직간의 ‘국제관계’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것이었다.⑶ 사회구조 해체와 재편성의 무로마치 시대가마쿠라 막부 붕괴 뒤 사무라이 조직 내부의 연합이나 동맹에 전략적 계산이 개입하는 경향이 점차 두드러졌다. 무로마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보다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해 군신제도를 통해 한 명의 수장을 따르는 단결된 수직관계로서 사무라이 계급을 구축가신들이 늘 지방분권적 성향을 띠고 있었으나 장원 토지소유 제도와 쇼군과 가신의 주종관계라는 두 원리가 각 사회집단의 위치를 설정해주었었다. 하지만 무로마치 시대에는 두 원리 어느 쪽도 제 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내야만 했다.14세기의 권력구조가 불안했던 상황을 반영한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의 연합이 지방 사무라이 사회에 출현했다. 하지만 어떠한 집단도 사무라이의 토지권리를 보증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했으며 황실의 영향력 또한 무로마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더 쇠약해졌다. 황실의 권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장원토지소유 제도의 법률적 기반이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원 기반의 토지소유가 쇠락함에 따라 장원소유자의 토지지배력도 점점 약해졌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기본 틀을 뒤흔드는 사태이기도 했다. 소유를 공인할 제도가 힘을 잃자 사무라이 집단뿐만 아니라 무장한 사원까지 가세해 서로 토지소유권을 획득하기 위해 다투었고 사회 전체가 해체와 재편성을 반복했다.그러한 혼돈의 무로마치 시대 말, 막부의 주요 가신끼리 싸운 오닌의 난 이후 막부의 권력과 권위가 약해져 그 후, 전국이 100년 이상에 걸친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100년을 전국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에는 지역 권력자들이 약해진 중앙권력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지역의 사무라이 집단을 다시 하나의 피라미드로 재편성함으로써 지역의 조직체로 자립해 나갔다. 이 집단들이 바로 100년간 내전을 벌이게 되는 주체이다.⑷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가, 에도 막부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다이묘를 일시적으로 통합하여 센고쿠다이묘(지역의 유력 사무라이)들 사이의 혼란스러운 내전이 종식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마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국가형성의 기반이 되는 수많은 제도를 도입했다. 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정치적 통합은 최종단계에 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맹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다이묘 연합군으로 양분했다.더 이상 그에게 도전할만한 세력이 없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는데 성공했고, 도쿠가와 막부가 지역의 다이묘들을 따르게 하여 거대한 피라미드의 중심에 섰다.도쿠가와 막부는 에도 막부라 하여, 이 시기의 정치적 통합과정에서 비사무라이 집단의 지배 하에 있던 무력은 강제적으로 해체되었다. 이는 많은 사회집단으로부터 자신의 이익을 주장할 무력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비사무라이 민중의 비무장화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 민중의 보호자는 사무라이뿐이라는 뜻으로 사무라이는 하나의 명예로운 신분계급이 된다.중세 수세기 동안 사무라이는 자신의 토지와 재산을 지키고 선조 대대로 계승해 온 이에 내부의 유대를 강화하여 자립성을 지켜 왔지만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막부 정부가 사무라이의 위계구조를 확실히 정립하기 위해 월급처럼 녹봉이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은 초기의 귀족에 고용된 무사들처럼 국가에 고용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어서 정부의 규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립적이었던 사무라이들이 에도 시대에는 주군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에도 막부의 이 확고부동해 보이는 구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할 수 있었고, 에도 막부가 존속하는 동안에 그 체제를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경제는 이 지배의 틀에서 힘차게 성장했고 그 결과에 따른 사회발전과 사회구조가 막부를 위협하게 되었다.⑸ 메이지 유신과 사무라이 신분의 폐지19세기말, 무능한 막부에 불만을 품은 자들에 의해 막부가 무너지고 근대 개혁인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였는데, 이때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신정부는 지배신분인 사무라이의 특권을 폐지했다. 여기에는 세습의 녹봉과 치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무라이는 더 이상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계급이라는 개념이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사무라이라는 신분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근대국가 건설에 공헌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과거의 사무라이들이었다. 사무라이 특유의 명예정서가 메이지 초기의 지도자들 사이에니다.
    인문/어학| 2015.10.09| 5페이지| 1,000원| 조회(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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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케토리모노가타리』 속 달 - 달을 꺼리는 사상(忌む月)을 중심으로 -
    『다케토리모노가타리』 속 달- 달을 꺼리는 사상(忌む月)을 중심으로 -1. 서론헤이안 시대에 쓰여진 일본 최초의 모노가타리 『다케토리모노가타리(竹取物語)』는 전승 신화의 기초를 한시나 불전의 요소로 각색했다고 평가받는 작품으로 달을 매우 중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다. 『다케토리모노가타리』 속에서 달이란 모노가타리의 시작을 제공하는 이향(異)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달을 보는 것을 꺼리는 부분은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달의 이미지와는 달라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달의 보편적 특징을 바탕으로 전 세계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나라별 혹은 지역별 문화의 차이로 어느 한쪽의 이미지만이 부각되는 점은 흥미롭다. 그동안 『다케토리 모노가타리』 가 전승 신화에 기초해 한시나 불전의 요소로 각색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달을 꺼리는 사상 또한 여성의 월경과 달을 결부시켜 달을 터부시한 민속적 요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설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문헌적 증거는 거의 없다. 따라서 본고는 달을 꺼리는 사상의 유래를 『다케토리모노가타리』 성립 이전의 문헌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우선 본론에서 일본의 고전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달의 대표적 몇몇 이미지를 살펴본 후, 『다케토리모노가타리』 속 달의 이미지와 비교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결론에서 작자가 어디서 영향을 받아 달을 꺼리는 부분을 썼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다케토리모노가타리』가 이후 여러 작품에 동일한 달 이미지가 등장하는 등 그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다케토리모노가타리』의 달 이미지 고찰은 일본 문학 연구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2. 본론(1) 일본 고전 문학 작품 속 달달은 고전 작품 속의 많은 자연 소재 중에서도 매우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만요슈(万葉集)』에만 200여수의 작품이 달을 언급할 정도로 달은 매우 중요한 문학적 소재이다. 별을 소재로 한 작품이 5수에 불과한 점만 비교해 보아도 고대 일본인들이 달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임성철, 『일본고전시가문학에 나타난 자연』, 보고사 p38그런 달이 일본 고전 문학 작품 속에서 다뤄지는 몇몇 이미지 중 대표적인 몇 가지 정리해보고자 한다.우선 가장 많이 발견되는 달의 이미지는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의 달이다.この夜らは さ夜更けぬらし 雁が音の 聞こゆる空ゆ 月立ち渡る 『万葉集』 第十, 2224白露を 玉になしたる 九月の 有明の月夜 見れど飽かぬかも 『万葉集』 第十, 2229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로서의 달은 일본 뿐 아니라 중국과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는 가장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달의 이미지이다.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의 달은 낮에는 볼 수 없는 어두운 밤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소재로서 다뤄져왔음을 알 수 있다.다음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달이다.くらきよりくらき道にぞ入りぬべきかに照らせ山の端の月 『拾遺和歌集』, 第二十, 1342天橋も 長くもがも 高山も 高くもがも月夜見の 持てるをち水 い取りて 君に奉りて をち得てしかも 『万葉集』 第十三, 3245달의 이지러졌다가 다시 재생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상서로운 불변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불로불사의 신앙도 이러한 달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다음은 죽음의 이미지로서의 달이다.あかねさす 日は照らせれど ぬばたまの 夜渡る月の らく惜しも 『万葉集』 第二, 169去年見てし秋の月夜は照らせれど相見し妹はいや年離る 『万葉集』 第二, 211죽음의 이미지를 가진 달은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상지만 일본 고대 문학에서는 상당히 등장하고 있다.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닌 여러 작품에서 발견되는 공통적 특징이 일본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은 이것이 일본 고유의 사상이라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일본 고대 문학 작품 고유의 죽음 이미지로서의 달은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 꺼려지는 달 이미지 즉 금기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中西進, 『万葉のことばと四季』, 角川書店, 1986(2) 『다케토리모노가타리』 속 달『다케토리모노가타리』 속에는 바로 이러한 꺼려지는 달의 이미지가 나온다. 바로 가구야히메(かぐや)가 달을 쳐다보자 이를 옆에 있던 사람이 똑바로 쳐다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는 부분이다.かやうにて、御心を互ひに慰めたまふほどに、三年ばかりありて、春のはじめより、かぐや、月のおもしろういでたるを見て、つねよりも、物思ひたるさまなり。在る人の、「月の顔見るは忌むこと」と制しけれども、ともすれば人間にも、月を見ては、いみじく泣きたまふ。리노우에 마사후미(李家正文)는 달을 불길하게 보는 사상을 일본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불전을 통하여 일본에 전래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李家正文, 「月見を忌む思想について」, 『國學院雜誌』877(院大, 1986), p.12이러한 사고는 앞에서도 서술했듯 한국과 중국의 다른 문헌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독특하며, 일본 고유의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달을 보는 것을 꺼리는 사상이 얼마나 일반적이었는지는 확인하기 힘들지만, 당시 일본에 이러한 풍습이 존재했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또 이러한 사상은 헤이안 시대 문학에서 여러 차례 나타나며, 토속 민속 신앙적 요소가 섞여 달을 보는 것을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관념이 생겨났을 것이라는 가타기리 요이치의(片桐洋一)의 해석도 일본 고유의 사상임을 뒷받침한다. 片桐洋一, 『日本古典文全集〈8〉竹取物語伊勢物語大和物語平中物語』(小館, 1972), P.63月をあはれといふはいむなりといふ人のありければひとりねのわびしきままにおきゐつつ月をあはれといみぞかねつる 『後撰集』, 二六八四老人どもなど『今はいらせたまひね』月見るは忌みはべるものを 『源氏物語』, 第四十九帖 宿木이처럼 달이 불길한 이미지로 수용되는 사례는 적긴 하지만 일본 고전 문학 속에 확실히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가 달을 꺼리는 사상의 최초를 『다케토리모노가타리』로 보고 『다케토리모노가타리』의 내용적 특징과 결부시켜 토속적 신앙과 중국의 영향이 합쳐진 결과라는 해석을 했지만, 이전 문헌 자료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적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이 중국의 영향이라기보다 당시 일본인들만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그 유래는 일본 문헌에서 찾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발견되는 최초의 사례는 바로 『니혼쇼키(日本書紀)』의 달 생성 신화이다.이자나기가 세 자식들에게 말하였다. "아마테라스노오미카미는 타카아마노하라를 다스려라. 츠쿠요미노미코토는 해와 짝지어 하늘을 다스려라. 스사노오는 바다를 다스려라."고 하였다. 아마테라스노오미카미가 하늘에 가서 츠쿠요미노미코토에게 말하기를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에 우케모치노카미라는 신이 있는데 가서 보고 오라."고 하였다. 츠쿠요미노미코토가 명을 받아 우케모치노카미에게 가니 우케모치노카미가 육지를 보자 입에서 쌀밥이 나오고, 바다를 보자 입에서 크고 작은 생선이 나왔으며, 산을 보자 동물들이 나왔다. 우케모치노카미는 이것들을 모두 차려서 츠쿠요미노미코토에게 대접했는데 츠쿠요미노미코토는 입에서 나온 더러운 것으로 대접하였다 하여 화를 내며 우케모치노카미를 죽였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노오미카미에게 보고하자 아마테라스노오미카미는 매우 화를 내며 ‘너는 악신이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며 츠쿠요미노미코토와 밤낮으로 나누어 교대로 거주하였다. 伊諾尊勅任三子曰。天照太神者、可以御高天之原也。月夜見尊者可以配日而知天事也。素鳴尊者可以御滄海之原也。旣而天照大神在於天上曰。聞葦原中國有保食神。宜爾月夜見尊就候之。月夜見尊受勅而降。已到于保食神許。保食神乃廻首嚮國。則自口出飯。又嚮海則廣狹亦自口出。又嚮山。則毛毛柔亦自口出。夫品物悉備。貯之百机而饗之。是時月夜見尊忿然作色曰。穢哉。鄙矣。寧可以口吐之物敢養我乎。拔劒擊殺。然後復命。具言其事。時天照大神怒甚之曰。汝是惡神。不須相見。乃與月夜見尊一日一夜隔離而住。일월분리(日月分離) 신화로 잘 알려져 있는 이 부분을 살펴보면 달의 신인 츠쿠요미노미코토는 해의 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명령을 받는 하위 존재이다. 이는 해와 달을 동등한 지위로 인식했던 한국의 사상과는 달리 달을 해에 종속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일본 고유의 사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우케모치노카미를 죽임으로써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미움을 받는 츠쿠요미노미코토의 모습에서 달이 죽음의 이미지와 꺼려지는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츠쿠요미의 요미(夜見)는 황천(泉)과도 음이 통하므로 달의 신은 황천의 세계 즉 죽음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井上光貞. 『日本の史 (1) 神話から史へ』, 中央公論社, 1965, p.46
    인문/어학| 2015.10.09| 5페이지| 1,000원| 조회(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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