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에 대한 여정「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고혜능, 나가르주나, 아렌트, 이리가라이…. 모두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들이었다. 1학기 때는 대학에 와서 마냥 좋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나의 스무 살을 즐겼다. 그러나 2학기가 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문득 내가 올바르게 살고 있는 것인지, 내가 너무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지 많이 궁금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게 되었다. 고민이 많은 시기이기에 나에게 와 닿는 부분도 많았다.과거나 미래는 단지 우리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현재에 사는 우리는 페르소나를 벗고 자신의 맨 얼굴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여기에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있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애써 벗자마자, 맨얼굴이 아니라 새로운 페르소나를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잊지 말자! 맨얼굴이 없다면, 페르소나를 쓰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pp. 32-39) 살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단 한 번도 숨기지 않고 거침없이 표현한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때로는 정말 울분이 터지지만 꾹 참아야 할 때가 있고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타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서인지 이 소단원이 내게 많이 와 닿았다. 잠시 책을 덮고 남들에게 보이고 있는 나의 페르소나는 어떠한가? 그리고 그 페르소나 이면에 있는 내 맨얼굴은 건강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은 내 성격이 일명 ‘시크’하고 털털하다고 한다. 나는 자존심이 굉장히 센 사람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자존심 상해서 말을 안 할 때도 많고 타인의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그러나 내가 그런 모습을 애써 남에게는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가끔 겉으로 표현을 못하지만 내 속이 타들어갈 때가 많다. 이것은 내 맨얼굴이 타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는 남에게 보이는 나의 페르소나가 나의 참된 모습이라 생각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페르소나를 무작정 벗어 버릴 수는 없다. 아이에서 청소년, 그리고 어른의 단계로 넘어가면서 깨달은 중요한 사실중 하나는 솔직하고 정직한 행동이, 즉 맨얼굴을 들어낸 그 행동이 항상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잘난 척 하는 사람, 무례한 사람 이라는 소리를 듣고 때로는 답답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지금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p.27)” 라고 말했다. 페르소나와 맨얼굴, 이 두 개의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할 것이다.나는 욕심이 많은 편이다. 내가 잘한 것은 인정을 받아야 하고 내가 그 사람에게 해준 만큼 돌려받아야 한다. 이런 성격 때문에 나 스스로도 많이 지칠 때가 있다. 나는 해준만큼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우울해지곤 한다. 데리다는「주어진 시간」에서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p.166) 라고 말했다. 설레는 사랑과 진정한 행복은 어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것에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선물은 불가능한 교환을 의미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내가 너무 ‘내가’ 베풀었다는 것에 얽매여 힘들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얽매임을 버릴 수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생각은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사랑과도 연결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알고 있으면서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것일까?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한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나의 희생을 알아 달라는 욕망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알아달라고 하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요즘 지하철 패륜남이니 패륜녀니 하는 사진과 영상들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많이 게재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큰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어 온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렇게 도덕과 예의가 무너졌나에 대한 많은 질문과 대답들이 오갔다. 우리나라는 버스나 지하철에 노약자석이라는 특별한 좌석이 있다. 이러한 노약자석이 있는 나라는 세계에 몇 되지 않는다. 노약자석은 나이가 드신 어른이나 임산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며 일부 외국인들은 한국문화 중에서 가장 놀라운 문화 중에 노약자석을 꼽기도 한다. 나는 이 제도가 가끔 불편하기는 하지만 올바른 문화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지만 때때로 과연 이런 제도가 윤리적인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윤리란 타인에 대한 주체의 애정이나 배려, 그리고 주체의 자율적인 결단을 전제해야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p.139) 라며 이 제도의 윤리성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즉 제도 자체가 타인에 대한 자율적인 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이 제도는 취지에 상관없이 윤리적 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다음의 사례를 통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XX녀, XX남 사건은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역으로 노약자 지정석이나 일반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를 야단치며 그 자리에 앉는 나이든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럴 때면 젊은이들은 쫓긴 듯이 자리를 뜨곤 하는데 이 모습은 진정한 배려가 아니다. 자리를 양보한 것은 나의 자율적인 행동이 아닌 제도에 의한 타율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절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섬세한 감수성과 애정이 필요하다. 노약자석이라는 맹목적인 예절과 제도가 아닌 자율적으로 노인, 나아가서는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 한 것 같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다는 것의학과 문학 을 읽고Ⅰ. 의학과 문학의 줄거리Ⅰ-1) 의학과 문학의 만남이 책은 문학과 의학의 만남을 다양한 각도에서 서술하고 있다. 과거에 의학은 자연과학의 하나라는 고정된 패러다임에 근거 하고 있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인체가 질병이나 질환을 가졌다는 이유로 환자를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환자의 질병에만 몰입하는 사고를 키웠고 의학이 지나치게 비인간화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의학의 자연과학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모든 교육과정이 전문적이고 단선적이고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다. 이것은 과학성과 전문성이란 측면에서 분명히 많은 장점을 갖지만 의학을 적용하는 의료 현장에서는 사회가 바라는 의료의 인간적 측면을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필자는 말하고 있다.의학에서 문학이 이용되는 이유는 문학을 위한 문학교육만은 아니며 현대 의학과 의료에 대한 반성과 의사소통 기술과 기록에 대한 훈련 등 의사로써 의사소통을 용이하게 하기위한 것만도 아니다. 문학은 사회와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의상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가장 용이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분야가 바로 문학이라는 실용적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Ⅰ- 2) 문학속의 의학의학과 문학, 뭔가 동떨어진 분야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 가지 신화에서부터 SF 소설까지의 예로 보여주고 있다. 의학 방면에서 중국 신화 전설의 상상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x-ray나 심장 이식 수술을 행한다던지 여러 가지 의학적 상상력을 고대문학 속에 담아낸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간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직접 뇌수술을 했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의학적으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주사기, 사이렌, 아폴로 눈병 등의 용어는 그리스 신들이 의학에서도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병명들이 매우 많다. 우리가 즐겨보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의사는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전통적인 의사상인 전문 지식으로 환자를 돕는 사람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인술을 베푸는 사람이기도 하고 대안적인 의사상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는 대중이 공유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이미지는 허구일망정 현실보다 더 큰 파급력을 드러낸다. 따라서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은 의사사회의 부정적 이미지는 현실세계에서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의사는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가 이제껏 등장했던 부정적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임으로써 이미지를 개선할 수도 있다. 중국 전설, 그리스 신화 그리고 SF 문학에서의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필자 '서홍관'은 시와 의학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시와 의학의 관계는 크게 의사가 쓴 시를 다루거나, 의학에 종사하지 않는 시인이 의학에 관해 쓴 시를 다룰 수 있다. 질병의 고통을 쓴 시도 많고 질병으로 인해 얻은 새로운 깨달음에 대한 시도 있다. 때때로는 의사에 대한 불신과 분노에 관한 시도 있다. 김광섭 시인의 시의 후기에는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는데 “의사 한 사람이 되기 위해 환자 천 명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명언이 있다. 그것으로 만 명, 십만 명을 살리기 위한 명분이 설까” 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나에게 훗날 의사가 되었을 때 의료사고를 단순히 시행착오로 여겨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의사나 의과대학생이 시를 읽는 것은 인간의 질병과 의료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세계적으로 의사는 많은 문학작품에 등장하지만 각 나라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각기 다른 역사 속에서 달랐던 의사의 사회적 위치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Ⅰ- 4) 의학속의 문학필자들은 의사이자 동시에 문학가로 살았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크게 체호프, 벤, 라블레, 세르반테스였다. 체호프에게 있어서 문학과 의학의 첫 만남은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으로 시작되었고 그는 “환자의 생활환경과 습관을 파악하고 평범한 인간의 내밀한 이면을 포착하는 일, 개별 증상의 특성과 경과를 살펴봄으로써 병의 전모를 밝히는 일”에서 능숙했다. 온갖 계층의 사람들을 접할 뿐만 아니라 이들의 내밀한 생활상을 시시콜콜한 구석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이 체호프 문학 속의 생생한 인물들을 창조해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것이다. 의사시인이었던 벤은 물질이 도달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세계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현실의 적나라함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냉정하게 표현한다. 벤은 의사로써 볼 수 있는 광경을 시로 표현하면서 시대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담았다. 라블레는 웃음이 효과적인 심리요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문학 역시 그에게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위안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료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로 유명한데 정신분석에 관해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의학도만이 할 수 있는 상황의 묘사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Ⅰ- 3) 의료기술의 윤리의사는 소설속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흔한 직업중 하나이다. 의사들은 사회에 잘 적응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이며 우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그것은 아마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생명을 다루기 때문인 것이다. 그 때문에 의사들은 환자에 대한 인권을 존중하고 윤리를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주체적 의지로 운영되는 완벽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 오늘의 현대 의학이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의미와 본질을 망각하고 그저 선진화된 의료기술에만 의지하여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는 지에 대한 문제이다. 의사는 기어코 환자의 질병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해서 그것을 치료하려고 하는 것이다. 환자의 병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그 환자의 개별성에 달려있는데 요즘 의사들은 보편성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설적 명의인 편작은 ‘망진’을 최고의 진찰술로 꼽았는데 필자는 편작의 망진을 보편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환자의 개별성을 파악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하였다. 아마 이 개별성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문학과의 결합이 도움이 될 것이다.의료기술이나 생명공학이라는 말에 있어서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왜곡된 과학자상이 드러나는 소설로는『지킬박사와 하이드』, 『모로 박사의 섬』등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런 문제는 대중과의 의사소통이 결여된 것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대중에게도 보고하고 그에 대한 승인이나 보완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활성화 해야할 것이고, 대중들은 좀더 기초과학이나 생명공학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이런 오해는 사라질 것이다.Ⅰ-4) 의과대학에서의 문학교육문학은 의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의학자를 양성하는 의과대학에서의 문학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이미 선진국의 대학들은 의과대학 교육과정에 문학적 구성요소를 넣기 시작한지 오래 되었다. 하버드 의대에서는 ‘작문의 과정’ 강의를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고 의대에 들어가기 위한 중요한 관문인 MCAT에서도 다양한 인문학적 시험이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필자는 마지막에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실시되고 있는 의학 개론 시간의 예를 소개하며 의학 교육에 문학과 예술의 접목이 의료인의 전문성 발달을 도울 수 있는 강력한 학습 도구임을 말하고 있다.Ⅱ. 책에 대한 고찰 및 느낀점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시 쓰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고등학교 때 대한화학회에서 주최하는 화학시화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흔히들 시라고 하면 사랑, 한 등에 대해 쓰는 것이 다반수라 생각하는데 어떻게 화학을 주제로 시를 쓰느냐하는 고민을 많이 하곤 했었다. 그 때의 느낌을 되살려서 이 책을 읽어보았다. 아직은 예과생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의학을 공부할 학생으로서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해보게하는 책이었다. 흔히 의대생이라고 하면 무슨 문학책을 읽겠느냐는 의문이 든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문과?이과로 나누어 수업하기 때문에 구지 의대생이 아니더라도 이과 학생들은 독서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 의학전문대학원은 대부분 공대나 이과대를 졸업한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다른 나라 의대 시스템을 보면 반드시 자연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도 의대에 쉽게 진학한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나서 알았다. 심지어 불문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들어오다니 놀라웠다. 현대 학문이 점점 간학문적 추세를 따르고 있다고 배웠는데 아마 의학 분야도 ‘자연과학’만으로 뭉친 학문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학문들이 연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인 듯하다. 의학이 폐쇄적인 성향을 버리고 다른 학문과의 연계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전문직 직종인 ‘의사’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의사라도 환자를 살릴 수 없다면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Ⅰ. 서론(Summary)인기작가의 소설이 아닌 비주류 인문학 도서가 한국 도서시장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다. 단순히 한국의 도서시장을 비꼬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도서시장의 편협함은 이미 널리 알려진 문제였다. 아마 현 한국사회가 그만큼 불공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샌델은 정의(正義 justice)를 크게 세 측면에서 접근한다. 행복, 자유, 미덕이 바로 그것이다. 행복은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에 바탕을 두고 있다.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창했다. 이에 따르면 극한 상황에서 3명이 부양가족도 없는 소년 1명을 죽여서 생명을 부지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3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전체 공리가 높아진다고 보는 것이다.자유는 계약의 자유가 기본이다. 이것은 로크)와 칸트)에 철학적 바탕을 두고 시장경제에 널리 이용된다. 이에 따르면 플로리다에서 가격폭리를 취한 사람들이나 할머니에게 변기 수리비로 몇 년 간 연봉을 챙기려던 배관공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1강). 그러나 칸트의 도덕론(5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들은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했다. 인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정언명령이고 인간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 가언명령인데, 칸트에 따르면 가언명령은 원천무효다. 또한 계약은 할머니와 배관공의 경우에서 보듯이 강제성이 전혀 없었더라도 지식격차가 문제인 경우가 많다. 자유계약이 늘 자유롭게 이뤄지지는 않다는 말이다.존 롤스(John Rawls))는 에서 정의를 위의 두 측면 곧 행복과 자유로 정의(定義)한다(6강). 자유를 존중하되 자유에 대한 제약은 다수의 행복을 기여하는 쪽으로만 한정되어야 한다는 취지다. 그 해결책으로 그는 ‘무지의 장막’이란 가상 실험을 소개한다.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도 누군지 모른다는 가정 하에 선택하게 되면, 사람들은 황제도 노예도 아닌 평등한 민주 시민으로서 이성적인 선택을 한다는 주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샌델은 미국사회에 적용하여 정의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이 레포트에서는 한국 사회에 있었던 통큰 치킨 논란과 군대 문제, 일본의 사죄 문제에 대해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와의 접점을 찾아 논하려고 한다.Ⅱ. 본론Ⅱ-1. 자유시장에서의 정의란 무엇인가? - ‘통큰치킨’ 논란3강과 4강에서는 자유주의와 자유시장 및 도덕에 대해 논하고 있다. 자유시장이란 시장활동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배제된, 즉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된 시장을 일컫는다. 자유시장에서의 가격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점에서 결정된다. 이는 가격이 정부에 의해 임의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결정됨을 의미한다. 자유시장 경제의 생산활동은 더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현대사회는 대부분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정부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 신자유주의 시장이라고 불린다.그러나 자유시장은 공정한가에 대한 문제는 ‘정의’를 둘러싼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다. 자유 시장에서 자발적 교환을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길이며 자유시장이 거래하는 둘 모두의 이익을 증진시키면서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자유시장 옹호주의자들은 자유시장은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교과서적인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론과 현실은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있다.실례로 얼마 전 이마트에서 피자를 시판해서 성공한 후, 롯데마트 에서는 6개월간 준비해왔던 치킨 판매를 시작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었다. 성공한 가장 큰 요인은 ‘싼 가격’이었다. 가격은 시장에서 가장 큰 경쟁력을 가지는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 치킨장사를 하는 영세상인들은 “롯데마트에서 시중 가격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가격을 정해 판매행위를 함으로써 영세상인들이 곤란에 빠진다면 공정사회를 외치는 정부가 나서 규제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비난했고 ‘계사오적’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면로 운영되는 치킨가게의 가격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소비자 및 소비자단체들은 여론조사에서 “프랜차이즈 치킨업체의 유통구조를 개선하여 관행을 뜯어고치고 싼 값에 좋은 상품을 구매해야 할 소비자의 권리를 누리고 싶다.”고 주장하면서 대다수가 통큰치킨을 옹호했다.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발적 교환을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길이며, 자유시장에 간섭하는 법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하며 공리주의자들은 “자유시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게 시킬 수 있다.”고 말하며 자유시장을 옹호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개인의 자유는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따른다. 그리고 이 조건을 만족할 때에만 전체 공리가 높아질 수 있다. 위와 같은 경우에는 대형업체가 소비자를 위해 가격을 낮춘다는 명분을 내세운 체 영세상인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은 공정과 상생에 어긋난 상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은 전체의 공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 볼 수도 있다. 가격경쟁에서 대형업체와 영세상인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당연히 평등이 완벽하게 구현된 사회는 없다. 그렇다면 평등이 어느 정도나 구현되어야 시장에서 강제가 아닌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과연 통큰치킨 규제는 사회적 차원에서 정의로운 행위였을까? 어떤 조건이어야 자유시장이 정말로 자유로운건지는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다. 통큰치킨 논란에서는 어디까지가 자유시장에 맡겨야 하는지, 적절한 규제가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며 거기서 최선의 정의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Ⅱ-2. 자유와 의무사이의 갈등 - 한국의 군(軍) 문제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관심이 없었던 군(軍) 문제에 대해서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은 분단이라는 불가피한 상황과 인구가 적다는 이유로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의 일정 이상 나이의 남성이라면 건강상의 문제가 없는 한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 나는 이 징병제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Ⅱ-3. 집단적 책임의 의무 - 일본은 왜 사죄를 해야하는가?다음은 7강에서 소개된 일화이다. 백인 셰릴 홉우드는 가난한 홀어머니 아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전문대에 이어 캘리포니아 주립대를 졸업했다. 그녀의 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명문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에 지원했다. 성적이 우수했지만 그보다 성적이 못한 유색인종에 밀려 불합격했다. 그녀는 역차별에 항의하여 소송을 냈다. 결과는 패소였다. 이 문제는 미국에서 소수집단우대정책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고 집단적 책임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이끌어내었다. 그 후 9강에서는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하는가” 즉, 집단적 책임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서 논하였다. 7강과 9강을 읽으면서 내가 바로 떠올린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였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한국 사람들은 발끈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정의’의 논리로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일본을 매우 싫어했다. 그 이유는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부당하게 점령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민족을 노예처럼 핍박하고 유린했으면서도 제대로 된 공개 사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99엔을 배상했다는 뉴스를 보고는 매우 경악했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한국이 배상과 사죄를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만 왜 일본의 현세대가 우리에게 배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말한 적이 거의 없다. 이 책은 왜 일본이 한국이 과거사에 대해 공개 사죄를 해야 하며 또한 적절한 경제적인 배상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제시해 주었다. 우리가 사죄를 요구하면 친일파 및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왜 21C인 지금에 와서 다 지나간 과거를 끄집어내어 동북아의 평화적인 분위기를 흐리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이미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서는 과거의 조상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왜 책임이 없는 자신들이 사죄를 하고 배상을 해야 하는지수 있다. 미국에서는 이민정책에 대해서 연대 의무가 나타난다. 국가가 자국민에게 외국인보다 더 많은 것을 당연히 제공해야 하고 이민 오는 사람에게는 그 혜택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반만년동안 한민족이었다는 이유로 연대감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문제는 연대가 우리사람만 챙기는 편애인가라는 것이다. 연대 의무라는 것은 집단 이기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대 의무로 인해 타인보다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더 특별히 생각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저자 샌델은 연대와 소속의무는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로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 중에서는 내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는 일은 자기의 조국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배상해줄 수 없다.” 는 식의 일본의 태도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과거사를 들추는 행위는 한국과 일본의 미래의 관계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뿐더러 지금의 일본인들은 우리민족을 위안부로 동원한다거나 징용한다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연대 의무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지금 일본은 엄청난 경제대국이다. 그렇기에 일본국민들은 일본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 자부심은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도덕 감정이다. 자기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된 자아로 느끼게 하며, 우리는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한데 묶여있으며, 우리를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서사에 연관된 사람들이다.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것은 자부심과 동시에 수치심이라는 윤리와 집단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이룬 업적으로 지금의 일본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이룩해놓은 것을 단지 그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사죄다.
Ⅰ 자유의 의미Ⅰ-1.고전적 사회 그리고 자유와 귄위에 대한 고찰.자유에 대한 학문적 고찰은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시민사회로 나아가면서 집중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밀의 ‘자유론’을 보면 본래 자유에 대한 개념은 자유와 권위의 싸움을 통해서 인지 되어 왔다고 한다. 이러한 자유를 지키는 행위는 고대에 있어서는 일반 백성 또는 일반 백성들중의 어떤 계급과 정부 사이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자유라는 것은 정치적 지배자의 압제에 대한 보호를 의미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체제의 변동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선거를 통한 통치자를 내새우게 되었고 자유란 단순한 정부에 대한 갈등의 투쟁 도구 이상이 된 것이다.당시 사회사상가들이 들고 나오는 자유라는 개념은 자연상태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자유를 자연상태라 규정함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자유에 두게 된다. 결국 사회를 생각하게 될 때에도 사회를 위해 자유를 최소한 통제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자연법의 범위 안에서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데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며 또한 자기의 소유물과 자기의 몸을 마음데로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상태는 방종과는 차별화 되는데 사람들에겐 자연법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법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을 비롯 자연법을 지킴은 물론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해 응징을 해야 하는 의무도 부여하고 있게 된다. 그 후 인간들이 국가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 때에 자유를 잃게 되지 않냐는 반론이 있다. 이에 대해서 로크는 국가 상태에서도 자유가 존재함을 일정한 권리를 국가에 위임함이 개인에게 여전히 놓여 있다는 것에서 증명한다. 또한 그 국가 구성 후 태어나도, 개개인은 성인이 되면 자신에게 맞는 정치체계를 택할 자유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선택할 수 있는 정치체계 폭의 한계가 있. 또한 이미 사회라는 것이 구성되어 있어 개인이 본래의 자연상태로 돌아가려 할 때사회의 일반적 이익과 대립되는 경우가 있는 바, 이러한 경우 자유는 더 이상 자기 중심성을 유지할 수 없다. 즉, 자유는 남의 권리 및 자유와 상충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사되며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자유는 간단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명확한 해석일 것이다. 즉, 자유는 내가 목적을 선택하고 그것을 달성할 권리는 가지며, 타인의 의도적인 방해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유는 목적을 달성할 역량이나 힘을 지니고 있으며 자유의지를 발휘해 목적을 선택하고 달성할 수 있음을 뜻한다.정치적 자유는 국가와 관련된다. 즉 어떤 국가가 국민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얼마나 잘 보장해줄 수 있는지와 관련이 있다. 국가는 자유를 보장하거나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할 수 있으며 자유를 빼앗을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모든 국민에게 얼마나 자유의 억압을 최소화하고 있으며 자유의 보장은 최대화하고 있는가에 따라 국가를 평가할 수있다. 우리가 요즘 말하는 민주주의는 보통 자유선거, 자유 언론, 시민적 자유, 자유 시장, 종교의 자유, 정부기관들 사이의 균형과 견제 등의 제도를 통해 자유를 극대화하는 통치 형태로 간주 될수 있다.자유라 하면 우리 헌법에서는 나열 하는 신체의자유, 거주이전의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주거의자유, 사유재산, 통신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학문예술의자유, 출판의 자유 등을 흔히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자유의 의미가 여기에 나열된 자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동안의 자유에 대한 정의도 학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정의가 존재한다. 자유가 무엇인지 단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종교, 또는 사상에 따라 자유를 다르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과 죽음조차 자유롭지 않으며 사르트르는 자유는 형벌에 불과하고 결속과 앙가주망이 참자유라고 했으며, 불가에서는 죽음도 대자유라고 했고, 도가에서는 문명과 욕망의 자유를 거부하고 자연인으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프로를 가지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뜻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국가가 공인한 종교인 국교(國敎) 이외의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을 위반하는 자는 이단자로서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와 같은 부당한 제도에 대항하여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고, 그 투쟁이 정신적 자유를 확립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국가에 대하여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고, 또한 특정한 종교에 대한 특혜나 차별대우를 철폐하도록 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 얻어진 결과이다. 한국의 헌법 제20조에서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개인의 내심의 작용인 신앙의 자유를 그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무언에 대한 신앙은 때로는 교리로 형성되어 보급되기 마련이며, 또한 동일한 교리를 신앙하는 자는 그들끼리 서로 모여 종교단체를 결성하고, 공동으로 종교적 행사를 영위하며, 선교(포교)활동을 하기도 한다. 종교의 자유는 이와 같은 신앙, 종교적 행사, 종교적 집회 ·결사, 선교활동 등을 행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지지 아니할 자유, 즉 무신앙의 자유, 종교적 행사 및 종교적 집회 ·결사 또는 선교활동 등을 강제받지 아니할 소극적 자유까지 의미한다.4) 결사의 자유집회의 자유(集會의 自由)는 인권으로서의 자유권의 일종이며, 어느 특정한 의제에 찬성하는 집단이 정부 등의 제한을 받지 않고 특정한 장소에 모이는 자유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표현의 자유의 일종으로 이해되고 보호된다.결사의 자유(結社의 自由)는 자유권의 일종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든지 단체(또는 결사)를 결성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단체에 가입하거나 탈퇴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단체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함된다.집회와 결사의 자유(集會와 結社의 自由)로 묶어서 다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양자의 차이는 집회가 특정한 장소에 일시적으로 모이는 행동을 제약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라면, 누군가가 이 권리를 보장하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모든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즉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권리로부터 도출되는 그 자유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다.4) 비(非)정의정의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사회를 유지하고 구성하는 공정한 도리이다. 정의를 도덕회계(moral accounting)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면 평안이 부의 한 형태로 간주되고, 해악이 부의 탈취로 이해되는 은유적 체계가 된다. 즉, 정의는 가해자에게 벌을 주는 것이거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배상하도록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의와 자유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물리적 해악이나 경제적 해악, 사람의 권리에 대한 침해 등 해악을 끼치는 사람을 처벌할 때, 정의는 해악과 위협,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장려하는 필수적인 억제 장치로 간주된다.따라서 정의는 자유로운 사회의 자유를 위해 필요하다. 따라서 비(非)정의는 자유에 대한 억압이다. 처벌이나 보상의 실패, 또는 엉뚱한 사람의 처벌과 같은 비정의는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고한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직접적인 해악을 끼치도록 방치하고, 또한 이 해악을 저지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명백한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Ⅱ-2. 자유에 대한 억압이 아닌 경우1) 자연 및 본성우리는 자연 세계 법칙의 제약을 받는다. 우리는 갑자기 몸이 사라지거나 동시에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그런 자유를 꿈꾸지 않으며 이것을 우리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은 해악을 끼치고, 저항할 수 없는 힘을 행사하고 우리의 재산을 빼앗을 수도 있으며 일상적인 생활을 불가능 하게 할 수도 있다. 자유에 대한 억압의 원인이 자연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이것은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2) 경쟁세계에 있는 모든 자원은 희귀하다.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인 것이다. 한 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행동함으로써만 아니라 행동하지 않음으로써도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를 끼치는 것과 도덕적 의무를 위반하는 것을 동일시 하는 것, 그리고 도덕적 의무를 사회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진술을 보게 된다. 어느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는 비용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의 보호 내지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클 때 해악방지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밀이 공리주의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공리주의적 배분적 정의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 해악의 원리는 해악방지의 원리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3) 해악 방지의 원리의 적용 사례Ⅲ-2 자유론에서의 기타 자유제한의 원리1) 온정적 간섭주의행위자 자신의 선을 위하여 강제를 사용할 수 있다는 온정적 간섭주의에 대해 밀의 자유론과의 연관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온정적 간섭주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의가 가능하다. 첫째, 오로지 자율이 제한받는 사람의 보호만을 이유로 어느 사람의 자율을 제한하는 행위가 인정된다는 뜻이다. 자율존중의 원리를 자선의 원리(principle of beneficence)를 능가하는 경우이다. 둘째, 첫째보다는 약화된 어느 사람의 원망이나 의도적 행위가 충분히 자율적인 선택에서 도출된 것이 아닐 경우 자선적 이유로 이를 능가할 수 있어 온정적 간섭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오토바이 운전자의 헬멧 쓰기, 자동차 운전자의 및 탑승자의 안전벨트 매기, 자살기도의 법적 처벌을 하도록 명령하는 법 등이 있다. 온정적 간섭주의는 분명한 자유의 침해이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당화 될 수 있다. 첫째, 어느 사람에게 간섭으로 인하여 해악을 방지하거나 혜택을 주는 것이 그 간섭으로 인하여 야기된 독립성의 상실과 침해당한 느낌을 능가하는 경우이다. 둘째, 어느 사람이 자율적인 선택능력이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는 상태에 놓인 경우이다. 셋째, 유사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간섭행위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