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달/력??1. 우리나라 24절기계 절절 기날 짜특 징계 절절 기날 짜특 징봄입춘(立春)양력 2월 4일봄의시작여름입하(立夏)양력 5월 5일여름의 시작우수(雨水)양력 2월18일봄비가내리고싹이틈소만(小滿)양력 5월21일본격적인 농사의 시작경칩(驚蟄)양력 3월 5일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깸망종(芒種)양력 6월 5일씨뿌리기춘분(春分)양력 3월20일낮이 길어지기 시작하지(夏至)양력 6월21일낮이 연중 가장 긴 시기청명(淸明)양력 4월 5일봄 농사 준비소서(小暑)양력 7월 7일여름 더위의 시작곡우(穀雨)양력 4월20일농사비가 내림대서(大暑)양력 7월23일더위가 가장 심한 시기가을입추(立秋)양력 8월 7일가을의 시작겨울입동(立冬)양력11월 7일겨울의 시작처서(處暑)양력 8월23일더위가 가고, 일교차 커짐소설(小雪)양력11월22일얼음이 얼기 시작백로(白露)양력 9월 7일이슬이 내리기 시작대설(大雪)양력12월 7일겨울 큰 눈이 옴추분(秋分)양력 9월23일밤의 길어지기 시작동지(冬至)양력12월22일밤이 연중 가장 긴 시기한로(寒露)양력10월 8일찬 이슬이 내리기 시작소한(小寒)양력 1월 5일겨울 중 가장 추울 때상강(霜降)양력10월23일서리가 내리기 시작대한(大寒)양력 1월20일겨울 큰 추위2. 국경일국경일(國慶日)의 의미‘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따라 공휴일이며,‘대한민국구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서 전국민이 국기를 다는 날로 정하고 있다.우리나라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이 있다.명 칭날 짜특 징3 ? 1절양력 3월 1일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에 알린 날이다.제헌절(制憲節)양력 7월17일1948년 7월17일에,대한민국 헌법 공포를 기념하는 날이다.광복절(光復節)양력 8월15일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한국이 독립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에 따르면 단오에는 약초를 캐고, 재액을 예방하기 위하여 쑥으로 만든 인형 ·호랑이를 문에 걸었으며, 창포주 ·웅황주(雄黃酒)라는 약주를 마셨다.추석음력8월15일"가위"라는 말은 신라때 길쌈 놀이인 "가배"에서유래한 것으로 "길쌈"이란 실을 짜는 일을 말한다. 신라 유리왕때 한가위 한달 전에 베 짜는 여자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베를 짜서 한달뒤인 한가윗날 그동안 베를 짠 양을 가지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은 것에서 "가배" 라는 말이 나왔는데 후에 "가위"라는 말로 변했다. 추석이 되면 한더위도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철로 접어든 때이다. 추석 무렵에는 넓은 들판에 오곡이 무르익어 황금 빛으로 물들며 온갖 과일이 풍성하다.4. 역사 1월명 칭날 짜특 징김상옥의사종로경찰서폭탄투척양력 1월12일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 김상옥 의사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상하이에서 의열단으로 활동하던 김상옥은 1922년 12월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왔다. 종로경찰서에서 폭탄이 터지자 일본 경찰과 신문 기자 등 7명이 죽거나 다쳤다. 일본 경찰은 즉시 검거에 나섰으나 김상옥은 후암동 매형의 집으로 피신했다. 이틀 뒤 일본 경찰은 후암동에 들이닥쳤고 김상옥은 치열한 항쟁을 펼치며 도피했다. 홍제동 동지의 집에 은신했지만 1월 22일 결국 일본 경찰에게 발각됐다. 1000여 명의 일본 경찰은 은신처를 포위한 뒤 특공대를 투입했다. 김상옥은 3시간에 걸쳐 일본 경찰과 사투를 벌였고 15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많은 인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김상옥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일의식을 보여주었다.정월 대보름음력 1월15일정월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을 말하며 설, 추석과 함께 대표적인 우리의 명절로 세시풍속 행사가 가장 많이 집중된 때이다. 정월 대보름날은 보름 즉 15일 가운데 그해 첫 번째 드는 큰 보름날이라는 뜻이며 한자말로는 도교의 영향을 받아 상원(上元), 원소절(元宵節)이라고도 부른다. ‘보름’이라는 명칭은 ‘밝음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에 알린 날이다.삼짇날음력 3월 3일음력 3월3일을 '삼짓날'이라고 하는데 상사,원사,중삼 ,상제라고도 하고,또 '답청일' 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삼월 삼짓날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 정도로 알고 있지만, 옛날에는 이 삼월 삼짇날은 봄의 큰 명절이었다. 삼월 초순을 봄의 명절로 삼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오랜 옛적부터 있어온 풍습이었는데,후세에 와서 이 삼월 초사흗날을 '삼질'이라하여 특히 봄을 즐기는 명절로 정하게 된 것이다. '삼질'이란 말은 '삼일'이라는 말의 발음이 변한 것뿐이다. 이 날에는 교외로 나가서 봄을 즐기며 노는 잘로 정해져 있었으며,궁중에서도 크게 봄놀이 잔치를 벌였다. 신라나 가락이 나라를 세웠을 때의 전설을 보아도 미금을 뽑아 받드는 일은 3월 초에 하게 마련이었다.4. 역사 4월명 칭날 짜특 징제주4?3사건양력 4월 3일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식목일(植木日)양력 4월 5일일본 식민지로로부터 광복된 다음 해인 1946년 정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날(문무왕 17년 2월 25일)과 조선의 성종이 선농단(선농단)에서 직접 논을 경작한 날(양력 4월 5일)을 기원으로 해서 식목일을 정했다. 따라서 식목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농림 사상이 깃든 매우 뜻깊은 날이다. 또 계절적으로도 나무를 심는 기간이어서 이날을 식목일로 정하게 됐다.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양력 4월13일1919년 3월을 전후하여 모두 7개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임시 정부를 세워 일본에 대한 강력하고 조직적인 독립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민족적 의식은 높았으나 식민지 통치하에서 더구나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 지역간에 원활한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없었다.그 후 각 단체들은 협의를 통해 통합 작업을 추진하여 1919년 9월민주화운동 기념일양력 5월 18일전두환의 독재정치에의해 1980년 5월 16일,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시위가 확대되는 걸 막기 위해 전국에 군대를 배치시키고, 광주에도 군대가 배치되었다. 광주시민들은 이에 항의했지만 군대는 학생과 일반 시민 등 광주에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하지만, 광주에서의 시위는 더욱더 거세졌다. 1980년5월 27일, 광주 시위대는 진압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실패했지만, 이어서 일어난 6월 민주화 항쟁에 영향을 주어,6월 민주화 항쟁을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4. 역사 6월명 칭날 짜특 징현충일(顯忠日)양력 6월 6일기록을보면 고려 현종 5년 6월6일에는 조정에서 장병의 뼈를 집으로 봉송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농경사회에서는 보리가 익고 새롭게 모내기가 시작되는 망종일이 가장 좋은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동안 현충일 추념식의 성격이 6.25전몰용사를 추모하는 행사를 잘못인식되어왔다.6.10민주항쟁기념일양력 6월10일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 경찰의 박종철 고문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부상당한 사건등으로 발단된다. 6월 10일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으로 서울도심에서 민주화 시위가 있었다. 6월 26일 이후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전국 37개 도시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6월 29일 정부에서는 6·29 선언을 발표하였고, 전두환 대통령이 물러났고,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투표하여 뽑을 수 있게되었다.6.10만세운동양력 6월10일1926년 6월10일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을 잇는 전국적·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주동자는 사회주의계의 권오설(權五卨),김단야(金丹冶),이지탁(李智鐸),인쇄직공 민창식(閔昌植),이용재(李用宰), 연희전문의 이병립(李炳立),박하균(朴河均), 중앙고보의 이광호(李光鎬),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여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라고 하며, 다음날 새벽에 비가 내리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때의 비를 '눈물 흘리는 비', 곧 '쇄루우(灑淚雨)'라고도 한다.이 이야기는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한대(漢代)의 괴담(怪談)을 기록한 책인 《재해기(齋諧記)》에 이러한 이야기가 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7월 7일 저녁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졌던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자연적인 현상에서 성립되었다.황산벌 전투양력 7월 9일황산벌 대격전, 660년 7월 9일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인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쳐들어오자, 계백장군은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지금의 충남 연산벌에서 싸움을 한다. 이 싸움에서 계백장군은4차례나 나.당연합군을 크게 무찔렀으나, 결국엔 전사하고 말았다.4. 역사 8월명 칭날 짜특 징손기정 금메달양력 8월 9일1936년 손기정 선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일장기를 달고 참가한 손기정 선수가 2시간 29분 19초 2라는 당시로는 경이적인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 한민족의 나라잃은 울분을 달랬다. 손선수에 이어 남승룡선수 역시 3위로 입상하여 마라톤 한국의 위세를 전세계에 과시했다. 이 손선수의 마라톤 제패는 전 한국인의 가슴마다에 민족얼을 일깨우고 조국광복의 열망을 일게 한 계기가 되어 급기야는 일장기 말소사건이 발생케 하였고 동아일보는 8월 27일자로 4번째의 무기정간을 당하는 진통을 겪었다.경술국치(庚戌國恥)양력 8월29일한일 병합 조약은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와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멸망하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도 한국인이다학교명/ 학과명학 번/ 이름논문『다문화가정 자녀의 교육 실태와 교육적 비전』,『영유아기 자녀를 둔 다문화가정 어머니의 양육 스트레스』을 읽고 이것을 기반으로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Ⅰ. 들어가는 말Ⅱ.1. 다문화 가정의 교육실태2. 다문화 가정 어머니와 자녀의 교육 스트레스3.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앞으로의 비전Ⅲ. 글을 마무리 하면서※ 참고문헌Ⅰ. 시작하는 말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과거 지역적 여건상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가 형성되었고 농업 지대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부터 많은 공장들이 입주하였고, 현재를 전국규모의 경공업지역(특히, 섬유공업지역으로 이제는 영남내륙공업지역보다 앞서가고 있다)으로 변했다. 또한 공장의 입주와 더불어 교통의 인프라가 형성되고,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수는 7,000명이 넘는다. 외국인 노동자가 ‘칠 천’이다. 통계상 합법적으로 등록된 외국인 수만 칠천 명 이라면 불법 외국인 노동자와 국제 결혼자의 수를 더하면 약 만 명이 못 미치는 숫자가 나올 것이다.이러한 경제적 변화 속에서 ‘다문화 가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러한 변화는 다만 ‘포천시’의 변화 많은 아닐 것 이다. 한국 사회가 어느덧 ‘이주민 백만’의 시대를 살고 있고, 그 증가는 점차 가속화 될 것이다.이로 인해 우리 나라는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언어가 공존된 사회로 변화 되어가고 있고 거기서 발생하는 다양한 인권 문제를 동반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의 노동문제, 결혼 이주여성의 출산 ? 양육문제 ? 다문화 가정의 자녀교육문제 ? 미등록 외국인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이번 감상문에서는 ‘이방인’ 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점이 있지만, 교육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다문화 가정의 실태’와 ‘다문화 가정을 둔 어머니의 양육 스트레스’에 대한 감상을 말하도록 하겠다.Ⅱ. 다문화 가정의 교육의 실태와 다문화 가정 어머니의 자녀교육스트레스한국사회는 급변화 하고있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5천년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이 깨져가면서 우리사회가 급격하게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통계상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분포는 여성결혼이민자 61,478명, 외국인근로자 40만 명, 탈북자가 1만 명에 도달하였다. 이들 자녀가 초등학교 취학연령에 이르면서 국제결혼여성 자녀의 교육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하게 되었다.구 분외국인근로자결혼이민여성다문화가정자녀외국인43만 7,727명14만 4,385명5만8,007명외국인 간 비율49.1%16.2%6.5%전체비율▶ 2007년 전보다 23.3% 증가▶ 전체 주민등록 인구 (4,935만 5,153명)의 1.8%위의 표에 의하면 한국이 급격하게 다문화 사회로 들어감을 알 수 있다. 이들 국제결혼여성 이민자는 주로 농촌을 중심으로 하여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통계에 의하면 농촌총각 중 40%가 베트남, 조선족, 필리핀 등의 외국여성과 결혼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외국인 근로자의 수가 40만 명에 육박하면서 외국인 근로자 자녀수가 급증하게 되었으며 이들 자녀가 취학연령에 해당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있음에 따라 점차로 국제 결혼여성 자녀의 교육적 소외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다.1. 다문화 가정의 교육실태2003년도 초?중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된 이후에 불법체류 외국인 근로자 자녀의 경우에도 학교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다). 학교안 1,500여명의 외국인 근로자 자녀는 학교적응의 양상에 있어서 앞에서 제시한 국제결혼 가정의 자녀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소외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실정이며, 그 원인은 첫째, 언어능력 부족으로 말미암아 학습부진의 정도가 심각)하며, 둘째,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며), 셋째, 집단 따돌림 등으로 건강하지 못한 정신적 충격을 경험)하고 있다. 외국인 아동이 학교에서 겪는 언어적 문제가 56%를 차지하며, 이로 인한 낮은 성적이 16%, 따돌림, 구타, 교우문제가 20%, 생활수준의 차이가 4%를 차지하고 있다.국제결혼여성 자녀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국내아동과 학력 및 언어구사능력의 격차가 크기 때문에 국내아동에 비하여 심리적 열등감을 가지기 때문이다.2. 다문화 가정 어머니와 자녀의 교육 스트레스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응과정에서 겪은 스트레스는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측면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 지금까지 결혼이민자 여성들이 경험하는 스트레스는 주로 문화적응 스트레스에 집중이 되었다. 그러나 결혼이민자 여성들 중에서 복합적인 지위와 역할 획득을 통해 다중적인 정체감을 형성해야 할 경우 특히 어려움이 크므로 낯선 문화에서 기혼여성으로 적응해야 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녀들을 양육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가중된 스트레스를 받을 것으로 생각된다.특히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 다문화가정 어머니들은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고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산부터 시작해 스트레스는 발생한다. 다문화가정의 어머니들은 가족과 지역사회에 대한 적응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한 사회적 지원 없이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 상당한 심리적 고통을 받고 있다.또한 출산이후 양육과 교육상의 문제로 연결되는 한국어능력 부족으로 한국어 학습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는 자녀의 언어발달과 기본학습능력에 상당한 지체를 가져와 다문화가정의 주요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었다.자녀가 성장을 하면서도 겪을 문화적 차별에 대한 걱정은 계속 된다. 이러한 스트레스의 원인은 한국에서 본인들이 겪은 차별과 피해의식이 녹아있다는 점이다.다문화가정 어머니들은 자녀가 초등학교 취학 전에 기본학습 능력을 습득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다.3.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앞으로의 비전1) 다문화가족의 2중 국가 정체성 교육프로그램 지원국내에 외국인의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다양한 기관에서 실행하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의 단체 또는 기관은 외국인 또는 외국인자녀에 대한 한글과 한글문화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지엽적인 수단에 불과하며, 한국어를 안다고 하여 한국사회에 심정적으로 통합될 수는 없다. 이의 증거는 재미 또는 재일 한국인 교포의 의식구조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재외 한국인 교포는 어떠한 경우이든지 모국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특히 이민 1세대 부모는 자녀에게 어떠한 경우이든지 모국어인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지 거주 한국인 교포단체의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일본의 대학입학시험에 한국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으며, 이결과 재외통포 한국인 2세에 대한 한국문화 정체성교육이 한결 용이하게 되었다.다문화가정 부모가 가장 절망하는 부분은 자녀가 한국에서 송공할 가능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선진국의 경우 하층자녀는 공부할 의사와 능력이 있다면 다양한 장학금이 지원되며, 대학교육이외에도 다양한 기술교육 기회가 제공되어 자신의 소질에 합당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다문화가정 자녀는 상대적으로 한국인 자녀보다도 학업성적이 현저히 낮기 때문에 장학금 혜택을 받기도 대단히 어려운 실정이다.2) 국제결혼여성 자녀에 대한 미래비전 제공국제결혼여성 자녀의 미래비전은 국제적 지역전문가로서의 진로이며, 이를 위하여 영어 및 부모국가의 언어를 가장 우선적으로 학습해야 한다.하계방학 중 재외동포자녀와 함께하는 집중적인 영어학습은 국제결혼여성 자녀에게 학습동기부여와 동시에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계가가 될 수 있다.
개화기 근대학교의 출현갑오교육개혁기(1880~1910)0000전공/000-목 차-Ⅰ. 머리말Ⅱ. 사회적 배경Ⅲ. 근대학교의 등장1) 정부에 의한 학교설립2) 전?현직관료와 황제 측근세력에 의한 학교설립3) 상인 및 유지에 의한 학교설립4) 요호?부민?유생 층에 의한 학교설립5) 선교사들에 의한 학교 설립6) 계몽단체?학회 에 의한 학교설립7) 불교와 천도교 종단의 학교 설립Ⅳ. 근대학교의 교육내용Ⅴ. 근대학교의 교육사적 의미Ⅵ. 맺음말※참고문헌Ⅰ. 머리말1880년대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조선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 시기이다. 조선의 유생들은 오래전부터 서학서나 양무서를 통해 서양의 산업발달과 정치, 외교적 교섭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서학을 접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다. 1880년대를 전후로 한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 침략, 일본의 무력 도발, 그리고 국경지대인 러시아의 군사적 출돌 등 국가 안보상의 위기의식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근대교육이 시작 되었던 1880년대부터 1910년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정부와 일반 국민들의 근대적 교육개혁을 위한 노력이 어떻게 등장하고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고, 학교설립의 목적을 살펴볼 것이다.Ⅱ. 사회적 배경근대교육의 맹아(萌芽)19세기 후반 한국사회는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변화는 내적으로 거듭되는 농민반란, 천주교의 전파, 동학운동의 확산 등으로 국가의 기강과 질서가 현저히 흔들렸다. 또한 외세의 침략이라는 외부적인 것이 결합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외세의 침략은 전통적인 사회체제와 사상까지도 송두리째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이러한 변화의 초기에 정부와 지식인들은 외세를 배격하고 국정을 쇄신하는 위정척사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 정책은 조선조 500년간 지속된 강고한 성리학적 의식과 대외적인 위기의식으로 인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875년 9월 운요호 사건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영어와 일어를 교육하였으며, 여기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정부의 자강 추진 정책에 실무자로서 활약하였다). 영국인 할리팍스가 학교운영의 책임을 맡았으며 두 사람의 중국인 교사가 영어를 담당했다. 동문학은1886년 9월 23일 육영공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육영공원은 근대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한 한국정부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근대교육기관이다.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학생을 뽑았는데, 좌원은 젊은 현직관리 10명을, 우원은 아직 급제하지 못한 유학 20명을 선발하였다.수업연한은 3년이었으며 교육내용은 영어를 주로 하여 수학?자연과학?역사?정치학?경제학 을 가르쳤다. 미국인 교사들이 통역을 두고 영어로 강의했으며, 교과서도 영어로 된 것을 사용하였다. 1889년에는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을 특별과에 응시토록 하여 관리로 등용하였다. 이후 육영공원은 양반 자제인 학생들의 무사안일한 학업태도, 국가의 재정지원의 미흡, 정치적 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설립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점차 부실화되다가 1894년 폐교되어 영어학교로 개편되었다).Ⅲ. 근대학교의 등장이러한 정국 속에서 새로운 교육은 계속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학교의 설립은 근대적 국민교육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서구의 학문과 기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조선정부의 동도서기론적 개화정책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리하여 1880년대의 이들 학교는 기대할 만한 교육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발전된 의미의 ‘학교’ 보다는 자신들이 속해있는 위치나 단체에서 이익을 위해 세워진 경우가 대부분 이었기에 서로의 연계성은 찾아볼 수 없다.1) 정부에 의한 학교설립조선정부는 1895년 2월 국민교육을 위한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였다. 뒤이어 근대적인 국가?국민교육체제를 위한 각종의 학교 관제와 규칙을 제정 공포하고, 한성사범학교(1895)를 필두로 일반 국민교육기관으로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 주요도시에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899년에는 수업 연한 7년의 중학교를 설립하였다.그리고 가장 민감한 사람들로 정부의 교육정책에 발맞추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중앙의 실력자들이 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4가지 이유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①첫째, 개항 이후 국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현실적으로 재래학문이 아닌 서구의 실상학문인 법률?경제?기술 등에 밝은 관료의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②둘째, 이들은 구래의 봉건적인 양반지주제를 주축으로 새로운 자본가적인 지주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려 하였으므로 이를 위한 인재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③셋째, 누구보다 사회경제적 변화를 신속하게 감지할 수 있었던 이들은 현실적으로 재래의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실상학문을 알아야 새로운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계속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④넷째, 신교육과 학교설립을 명분으로 정치적 실력자와 유대관계를 맺으려 한 경우도 있었다고 보여진다).국내의 신식교육기관과 외국유학 등을 통해 신학문을 수학한 인물들을 교사로 하여 지배층 자제들을 모야 교육하였다. 이들 학교는 정부의 새로운 시책이나 사업계획에 따라 정부와 약정하고, 특수학과를 설립하여 실무관료의 양성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사립학교 출신자를 위한 특별조치를 얻어내기도 하여 그 학교 출신의 관리직 진출을 도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대표적인 학교는 흥화학교?광흥학교?낙영학교(한성의숙)?중교의숙(시무학교)?사립법률학교?광성학교(광성상업학교)?우산학교?사립철도학교 등이 있다.3) 상인 및 유지에 의한 학교설립문호개방과 대외통상의 확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사회적 유력인사 외에도 상인과 지방의 유지들 이다. 이들 상인세력이 외세와 주로 부딪히는 곳은 개방지(開放地)?개시장(開市場)?난거지(難居地)?개항장(開港張)등으로 일컬어지는 통칭 개항장이다. 개항장은 외국선박이 도착하고 외국상품이 들어오고 외국어와 외국의 풍속과 복장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이 곳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설정되고 치외법권이 인정되어 부분적으로는 외국의 식민 신분질서의 파괴로 부를 축척하고 신분향상을 꾀하는 자가 늘었다. 서당 등을 설립하여 자제교육을 하던 지방의 요호(饒戶)와 부민(富民)층은 개항과 기독교의 유입,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변화된 사회상황에 발맞추어 새로운 학문으로 자제를 교육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확보하고자 하였다.정부에서는 재정난으로 지방의 교육을 등한시 했기에 지방의 요호?부민층은 스스로의 교육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에 자제들을 보내거나 자신들이 기금을 모아 학교를 설립하고 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였다.한편 지방사회에서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가난한 교학자로서 만족하던 유생들은 정부의 보조 하에 유학실력을 바탕으로 신학문을 다시금 익혀 학교를 설립하여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문중심의 교육을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학교에서도 한문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5) 선교사들에 의한 학교 설립조선정부는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과 먼저 외교 관계를 맺은 후 다른 열국과도 수교를 하였다. 개방정책에 따라 문화적, 인적, 상업적 교류를 대폭 허용하였으나 기독교의 전래만큼은 엄금하였다. 정부는 미국 개신교 선교사의 전도행위를 금한 뒤 입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전도는 금하되, 개신교의 교육 및 의료사업은 허가하였다. 이후 한국의 근대 교육 발전과 학교의 설립의 눈부시게 발전하였다.이들에 의해 사설 영어 강습소, 여자기숙사가 등장하였고 이 기관은 나중에 각각 경신학교?정신여학교?배재학당, 그리고 이화학당 등 개신교계 신식 학교로 발전하였다. 구교와는 달리 개신교는 조선 정부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였기 때문에 선교사업은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급속히 팽창하였다. 선교 사업의 양적 팽창은 파송된 선교사들 자신도 놀랄 정도라고 기록되었다). 이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적어지면서 그 범위를 넓혀 지방도시로 그 범위를 확산시켰다. 1894년 평양의 광성학교?숭덕학교?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하여 동래?인천?재령?목포?원산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서북협성학교? 대성학교?오산학교등으로 한국 근대 민족주의운동의 핵으로 기여하였다.7) 불교와 천도교 종단의 학교 설립사립학교 설립은 불교?천도교 등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 의해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불교는 억불정책에 의해 산중불교로 변하여 세속에서의 활동이 억제되어 왔다. 그러나 문호개방 초기에 이동인?탁정식?이윤과?차홍식 등 일부 승려들이 개화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에 원흥사에 불교연구회를 조직하교 ‘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 출신의 한용운이 한국 불교가 친일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상황에서 박한빙?자용성?자초월등과 적극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명진학교 교육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동학운동세력의 일부가 정부의 탄압을 벗어나기 위하여 진보회?일진회 등을 조직하고 친일세력화 하자 1905년 12월 1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라 개칭하고 친일세력을 축출하였다. 이어 손병희는 흥화학교?보성학교 등을 비롯하여 각처에 사립학교에 지원금을 제공하고, 경영난에 부딪히고 있던 보성학교?동덕여학교를 인수하여 민족 자강교육에 기여하였다).이 시기의 모든 사립학교 설립과 교육이 민족자강 교육구국만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청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인들은 동아동문회 등을 조직하여 한국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고 일본어와 상업관계 학문을 교육하며, 친일적세력을 양성하였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친일 매국단체들이 일본의 교육침략에 협조하고 종교계 학교와 기타 사립학교들도 국민 교육 내지 민족교육을 외면하는 사태가 생겨남으로써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Ⅳ. 근대학교의 교육내용보통교육국민보통교육을 위해 마련된 학교는 한성사범학교와 소학교이다. 국민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된 한성사범학교는 그 편제를 본과와 속성과로 나누었다. ① 수업연한은 본과 2년, 속성 6개월이다. ② 학령은 본과 20세 이상 25세 이하 이며, 속성은 22세이상 35세 이하로 규정하였다. ③ 교과목은 수신?국문 및 한문?역사?지리?수학?물리?박물?화학?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