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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산외암마을 및 월성향단
    호남대학교 건축학과 아산 외암마을차례 1. 외암마을의 위치 2. 외암마을의 유래와 역사 3. 외암마을의 풍수지리 ⑴산세 ⑵수계 4. 마을의 공간구조 ⑴길 ⑵집 5. 외암마을의 주요주택아산 외암마을 위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1 구중에서 오양골 ( 외암골 ) 이라 불리는 곳으로 아산 시내에서 유구를 거쳐 공주로 가는 국도 39 번을 따라 8Km 정도 가면 송악면 소재지를 지나는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0.5Km 지점에 위치한다 .설화산 기슭 경사지에 위치한 외암마을은 약 500 년전에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정이 이주해 오면서 예안 이씨가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다 . 그 후 이정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점차 양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이정의 6 대손인 이간이 호를 ‘ 외암 ’이라 지은 후 마을 이름도 ‘ 외암 ’이라 불렀다고 한다 . 아산 외암마을은 마을중요 민속자료 제 236 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약 500 년 전부터 부락이 형성되어 충청 고유격식인 반가의 교택과 초가 돌담 ( 총 5.3km), 정원이 보존되어 있으며 다량의 민구와 민속품을 보유하고 있다 . 또한 가옥주인의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참판댁 , 병사댁 , 감찰댁 , 참봉댁 , 종손댁 , 성화댁 , 영암댁 , 신창댁 등의 택호가 정해져 있으며 마을 뒷산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끌어들여 연못의 정원수나 방화수로 이용하고 있다 . 아산 외암마을 유래아산 외암마을 역사 외암마을이 이씨 동족부락으로 형성되기 전에는 ( 약 500 여 년 전 ) 강 ( 姜 ) 씨와 목 ( 睦 ) 씨들이 살고 있었으며 , 일정한 기간 동안 평택 진 ( 陳 ) 씨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16 세기 예안 이씨 이사종이 진한평의 장녀와 혼인하여 입향 ( 入鄕 ) 하고 조상의 묘역을 봉수산에 조성하면서 예안 이씨들이 마을에 거주하게 되었다 . 이 후 이사종의 5 대손 이간이 유일 ( 唯一 : 박탁되지 않고 남겨진 사후에는 불천위 ( 不遷位 ) 로 모셔지면서 외암마을은 예안 이씨의 씨족마을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 신생부락이 아닌 기존부락에서 새로운 동족집단을 형성해 가는 것은 기존 부락민들과 수없이 많은 갈등이나 대립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가능한데 , 외암마을에서 이씨 동족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들이 많은 인재를 배출함으로 세력을 키워나갔기 때문이다 .아산 외암마을 의 풍수지리 봉수산 산세 외암마을은 표고 441m 의 설화산을 주산 ( 主山 ) 으로 하고 멀리 남서쪽에 위치한 표고 535m 의 봉수산을 조산 ( 朝山 ) 으로 하는 풍수적 국면을 갖는 마을이다 . 설화산은 광덕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맥인데 , 외암리 북동쪽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서남향으로 뻗는다 . 광덕산에서 설화산으로 흐르는 표고 400m 내외의 맥은 내맥이며 좌청룡이다 . 이 형국을 이른바 회룡고조 ( 회룡고조 : 용이 제 몸을 휘감아 제 꼬리를 돌아보는 모양 ) 의 형국으로 일컫는다 .우백호는 역촌리를 관통하여 흐르는 개천과 마을길은 외암리는 황산능선이 된다 . 청룡이 뚜렷한 산줄기임에 비해서 백호는 산세가 다소 낮고 개천이 관통하는 탓에 상당히 취약하다 . 상당히 취약하다는 말은 비단 풍수적인 것만 아니라 겨울의 북서계절풍을 막아줄 바람막이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살기에 부적절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에 외암마을은 마을 북서쪽에 송림 을 조성해 이러한 불리한 지세를 보안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 아산 외암마을 풍수지리아산 외암마을 풍수지리 수계 외암마을의 구성요소로서 채택하고 있는 물은 크게 두 가지 형상을 나타내 주고 있다 . 그것은 자연형태로서의 물과 인공적인 형태로서의 물이다 . 자연적인 형태로서의 물은 , 설화산 계곡에서 내려온 맑은 물줄기가 마을 주거지의 남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데 , 우리 전통마을에서는 일반적으로 마을 주거지의 경계를 수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 을 발견할 수 있다 .아산 외암마을 풍수지리 인공적인 형태로서의 물은 , 마을의 상부에서 물길을 만들어 인. 설화산은 이름에 화기를 띄고 있어 마을에까지 그 화의 기운이 미칠 가능성이 있다하여 화와 상극하는 물을 마을내부로 끌어들여 화기를 제압하자는 의미 를 지니고 있다 . 염승 ( 厭勝 마을의 안정을 목적으로 마을 지세가 지닌 부족한 점을 보충하거나 변경하는 행위이다 ) 또 주거지 안으로 들여온 물은 집집마다 통과하면서 생활용수로 사용 하고 하나의 물을 함께 쓰면서 마을 공동체를 느끼게 하는 매개체 가 된다 .아산 외암마을 공간구조아산 외암마을 공간구조 안길은 길 양측을 따라 조성된 돌담으로 뚜렷이 규정되고 있어 , 길의 방향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 외암마을에서 길을 만드는 요소는 돌담으로 돌담은 개별공간과 공동 공간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시각적으로 완전히 차단하지 않으면서도 사적인 영역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산 외암마을 공간구조 외암마을의 집들에는 바깥마당이 발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타작마당의 기능과 함께 공간적으로 훨씬 여유 있는 마을 경관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 바깥마당은 개별영역인 주택과 공동 영역인 길이 만나는 중간적 성격의 공간 요소로서 두 영역을 완충해준다 .아산 외암마을 주요주택 건재고댁 ( 영암군수댁 ) 중요 민속자료 제 233 호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 ( 李相翼 , 1848~1897) 이 살던 집이어서 ' 영암군수댁 ' 이라고도 불리운다 . 이상익은 예안이씨의 18 세손으로 외암 이간은 이상익의 직계 5 대조이다 . 현재 집주인은 이상 익의 고손 이준경씨이며 , 그의 말에 의하면 외암 이간이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집터였다고 한다 . 건재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 건재 ( 建 齎 ) 는 이상익의 아들인 이욱렬 ( 李郁烈 ) 의 호이다 . 현재의 가옥이 완성된 것을 건재당 때라고 한다 .아산 외암마을 주요주택 참판택 중요민속자료 236 호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 (1865~1950) 이 살던 집이라 ' 참판댁 ' 이라는 택호를 갖게 되었 다 . 이사종의 11 세손인 이정렬은 할머니가 고 종비인 명성황후의 이 받았다 . 참판댁은 이정 렬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 받아 지은 집이라 . 고종황제가 이정렬에게 하사해 ' 퇴호거사 ( 退湖 居士 )' 라는 사호를 영왕이 9 세때 쓴 현판이 아 직 남아 있다 . 솟을대문 참판댁안채아산 외암마을 주요주택 사랑채 사랑채는 5 칸 규모의 一자형 평면을 가진 집이다 . 왼쪽부터 작은 사랑방 - 대청 - 큰사랑 방 -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 왼족 3 칸앞에 는 반칸 너비의 툇마루를 두었고 , 나머지 2 칸 앞에는 고방과 골방을 마련하였다 . 사랑 대청에도 안대청과 마찬가지로 4 짝 여닫이 문을 달았는데 , 가운데에 2 짝 여닫이 , 양쪽 에는 1 작 여닫이를 달았다 . 사랑채 오른쪽 은중문간과 이어져 있다 . 사랑채아산 외암마을 주요주택 곳간채 곳간채는 안마당의 동쪽에 배치되었고 사랑 채와의 사이는 바람벽과 유사한 담을 쳐서 정면으로의 진입을 막고 있다 . 간살이는 일 자 맞걸이 5 간집인데 맨 앞에 대문간이고 다음은 헛간과 광이다 . 또한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 사당은 안채의 서북쪽 모에 놓이는 바 단간 전 퇴집이며 박공지붕으로 만들었다 . 건축년대가 더 떨어져서 20 세기 초 정도로 보인다 . 대문채는 일자형 8 간후퇴집으로서 중앙에 솟 을대문이 된다 . 간살이는 헛간과 구들로 이루어졌는데 뒷퇴는 모두 토방이다 . 지붕은 모임지붕으로 처리했다 . 곳간채아산 외암마을 주요주택 교수댁 이 집은 이사종의 13 세손인 이용구 (1854~?) 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하여 붙 은 택호이다 . 원래 사랑채 , 안채 , 행랑채 , 별채 가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안채와 행랑채 , 사당 만 남아있다 .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쪽에 ' ㅡ ' 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는 ' ㄱ ' 자 모양의 안채를 둔 튼 ' ㅁ ' 자 집이다 .호남대학교 건축학과 월성 향단월성 향단 위치 -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35 번지 - 보물 제 412 호 이언적 선생이 경상감사재직시 건립 . 이언적 을 위해 지어준 주택 . 이언적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된 집이다 .월성 향단 향단 평면도 복잡하지만 日자형 일체화된 평면구성 이중적 공간구성 외부 - 전면을 노출시키는 개방적인 모습 내부 - 폐쇄적이고 , 복합적이고 , 단절적 사랑채의 박공지붕을 통하여 외부로의 건물 노출월성 향단 향단 단면도월성 향단월성 향단 사랑채의 경우 一자형 몸채지만 , 지붕을 工자형으로 만들어서 사랑채 정면을 지붕에 2 개의 박공면이 강하게 노출되도록하였다 . 사랑채의 필로티라는 공간 요소를 도입해 구성됐다면 , 향단 사랑채는 박공朴工이라는 형태의 조작을 통해 만들어졌다 .월성 향단 주변 모든 곳과 통하게 되어 있는 안방 향단의 안채는 큰 안방과 작은 안방 , 둘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이들은 가운데 대청을 두고 방 끝 모서리를 맞대고 있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큰 방에는 시어머니 , 작은 방에는 며느리가 거처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 또한 큰 방에는 중년의 어머니 , 작은 방에는 소녀인 딸이 거처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 생긴 모습만 본다면 이 둘은 아주 유사하다 . 하지만 그 성격은 다소 차이가 있다 . 집 전체로 볼 때 이 큰 안방의 위치는 중앙이다 . 그리고 주변의 거의 모든 방향으로 문이 나 있어 서로 통한다 . 가운데에 있으면서 주변에 있는 것들 모두와 직 ,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 중심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 작은 안방에서 확인하기는 어려운 성격이다 .월성 향단 향단의 구조기법들을 보면 이 집의 표현적 의도가 절정에 달한다 . 집의 기둥은 행랑채까지 모두 원기둥을 사용했다 . 기둥위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익공을 달았고 , 대들보 위에는 공공건물에나 어울릴 화려한 복화반과 포대공을 올렸다 . 사랑채의 지붕도 부연을 단 겹처마다 . 모두 민간 살림집에는 금기시됐던 최고의 장식들로 이루어져있다 . 향단의 복화반과 포대공월성 향단 필로티형식의 고방 안채의 대청 필로티 / 원기둥월성 향단 행랑채와 안채 기둥모 습감사합니ow}
    공학/기술| 2009.03.20| 28페이지| 7,900원| 조회(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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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례 운조루, 월성 양동마을
    한국 주거사특론 Title: 월성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9호)중요민속자료 제189호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마을 지정일:1984.12.24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북 포항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를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산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자연과 어울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집들, 양반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자료들과 유교사상, 관습들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역사 -신라시대 아산 장씨에 의해 형성. 양자촌으로 불림. -류복하- 손 소- 이 번으로 계승. -조선시대 이후로 월성손씨, 여강이씨 동족촌으로 계승 발전 -사돈 지간의 양대 가문의 대립, 경쟁 속에서 향촌으로 발전 -한국 전통 마을 및 주거 공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마을로 건축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마을이다.류복하외손2대: 이의잠 (수졸당) 5대: 이덕록 (상춘고택) 6대: 이범중 (이향정) 이석중 (두곡고택) - 수졸당 사랑채 증축 8대: 이정수 (근암고택) 11대: 이능숭(사호당 고택) -근암고택 사랑채 개선양동마을 개보도손소(서백당외손종손손중론(관가정) 손숙돈(낙선당) -낙선당 재건지리적 위치 경주시에서 북으로 2km떨어져 있음. 인근마을: 인동리, 안계리 북서쪽의 설창산, 동남쪽의 성주로움 생각이 강하 게 반영된 건축물 -사랑채 구성 -관가정: 누마루 형식의 구성 -향 단: 박공 형식 도입1)손씨 분가 관가정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50번지 -보물 제 442호, 1514년 (중종 9년) 건립 -우재 손중돈의 고택으로 손씨문중의 분가로 건립 -배치구성 :상류주택에 비해 소규모로 단순구성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 좌우측에 날개를 단 모습 :좌우가 대칭의 형태 :연면적의 50%가 마루인 비기능적 평면 :담장이 없고 외부공간과 명확한 경계가 없음 (1981년 보수공사 시 담장 및 대문을 세움) :중문-안마당-대청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 :북동쪽에 사당이 자리잡고 있음중심축관가정의 전체 배치도관가정의 단면도2)손씨 분가 관가정 각 실 구성 - 사랑채 : 누마루 구성, 사랑대청 2칸, 온돌방 2칸으로 구성. : 남향으로 경치를 조망할 수 있게 개방. : 필로티 아래로 두 개의 기둥만 노출시킴으로써 누각의 형태 형성. : 대청 기둥 상부를 초익공계로 하고 대들보위로 고졸한 파련대공을 세움사랑채 정면사랑채 마당사랑채 후면사랑채 주두안채 :사랑채에 비하여 기능적이고 획일적. :3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 안방이 있다. :건너방과 안방 앞쪽으로 여러공간들이 양 익사를 형성행랑채 정면행랑채 후면행랑채 진입부안채 측면2)손씨 분가 관가정 각 실 구성 - 지 붕 : 홑처마 구성. : 사랑채와 안채가 만나는 곳에 팔작을 이루게 하여 맞배지붕을 형성한다.사랑채 외부안채 우측1) 이씨 분가 향단 구성 -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35번지 - 보물 제 412호 이언적 선생이 경상감사재직시 건립. - 여강 이씨 향단파 종택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이 지은 16세기가옥 -배치구성 :복잡하지만 日자형 일체화된 평면구성 :이중적 공간구성 외부-전면을 노출시키는 개방적인 모습 내부-폐쇄적이고, 복합적이고, 단절적 :사랑채의 박공지붕을 통하여 외부로의 건물 노출 :좌향-남향레벨의 차이 -몸체와 사랑채의 경계선 -양반과 하인의 동선분리향 단 사당을 안대로 삼아, 마 을의 전경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 -배치구성 :ㄱ자형 건물의 꺾이는 모퉁이에 방을 두어 2개의 마루 구획, :칸살이는 필요에 따라 길이 조절 :특징적인것은 작은 마루에 1/3칸 크기의 장판고를 가설해 서고로 사 용한점 :서당 건물다운 기능/규모, 건물은 매우 간결, 층고도 낮고 구조도 검소 :강학당 입구에 3칸 부속 행랑채를 두어 서당의 서비스를 담당. 2)안락정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58번지 -중요민속자료 제82호, 1776년 경에 건립 -이름과 형식은 정자이지만 손씨 일가가 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 -배치구성 :마을 동구 밖 동쪽 산 정상에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잡음. :5칸의 전형적인 강당건물로 경관은 매우 뛰어나다. :앞마당에 바위들로 연못 모양과 석가산을 만듬. 서당으로는 이례적으로 조경시설이 있음.3)심수정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35번지 -중요민속자료 제81호, 1560년경 건립. 정자는 철종 때 행랑채를 빼고 화 재로 모두 타버려 1917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 -배치구성 :정자는 ㄱ 자형 평면을 가지며 ㄱ자로 꺽이는 부분에 대청 마련 :대청 양 옆으로는 각각 방을 두었고, 왼쪽 방에 누마루를 만듬. :행랑채 역시 ㄱ자형 평면을 지닌 건물로 방, 마루, 방, 부엌, 광 순서로 1칸씩 구성 :누마루의 이름은 '함허루'로 비어있음, 을 뜻하는 공간. :ㄱ자로 형성된 대청의 이름은 삼현관. 3짝의 창문을 열면 예의 고목들 사이로 무첨당의 사당이 정점을 보인다. :ㄱ자 정자와는 반대로 부속 행랑채는 ㄴ자로 대각선 방향에 놓였다. 따라서 어느 각도에서 보면 마치 튼 ㅁ자집을 이루려다 미완된 하나의 복합체 같이 보인다.심수정의 계자난간심수정 평면4)수운정 -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35번지 - 중요민속자료 제81호, 1560년경 여강이씨 문중에 의해 세워짐 -배치구성 :양동마을 북쪽 능선 너머 독립된 봉우리 위에 홀로 서 있다. :정자 정면에 모두 계자난간을 두르고 마루면을 띄1773년에 건축. -배치구성 :-자형 모양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마당이고 그 왼쪽은 마구간 채가 있다. 건너편에 사랑채, 아랫채, 안채가 ㅁ 자 모양을 이루 고 있다. :어귀의 산자락에는 2칸 초가집이 대문을 마주보며 배치. :방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구성된 가장 작은 살림집. 대문채 옆 동 쪽으로는 재실이, 그 옆에는 다시 영당이 있고, 그 사이 언덕길로 오르면 동호정 위치. :ㅁ 자형 살림채를 중심으로 남으로 대문채, 북으로 곳간채들이 겹쳐 둘러싸여 있는 이집은 가장 규모가 큰 주택.두곡고택 배치대문채사랑채중 문창 고안 채9)수졸당(여강 이씨 수졸당파의 종가)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12번지 -중요민속자료 제78호, 조선 광해군8년(1616)에 건축.영조20년(1744)경 6대손 대사헌 양문당 이정규 선생이 사랑채를 늘려 지었다. -배치구성 :서백당의 맞은 편 능선 위, 아늑한 터에 자리잡았다. :수졸당 남쪽 바로 앞에는 또 다른 파종가 양졸정이 자리 잡고 있지만, 능선을 잘 활용해서 서로 보이지 않는다. :사랑채 앞마당의 좁은 터를 완만한 산자락이 감싸고 있고, 화초가 심어진 경사로로 마련. :안채는 낮고 길고, 안마당 옆으로 길쭉하다. 사랑채를 증축하면서 마당을 늘린 결과다. :두꺼운 사각기둥을 사용해 집의 수평적 인상을 더욱 강하게 함 :입지와 지형의 이용, 형태와 공간감은 마치 산 위에 숨겨진 성채와 같다.수졸당 배치전 경안 채사랑채,대문채사랑채 대청10)근암고택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14-1번지 -중요민속자료 제76호, 조선 정조4년(1780)경에 건축. -배치구성 :집의 구성은 크게 대문채, 안채, 사랑채로 구분 :대문채는 –자형 평면으로 가운데 대문을 두었고 왼쪽에는 광, 오른쪽에 방을 두었다. :부엌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과 대청, 건너방, 마루방을 놓았으며 부엌 밑으로 2칸짜리 방과 1칸 방을 만들었다. :안채 옆에는 앞면 4칸, 옆면 1칸 크기의 헛간을 지었는데 지금은 외양간으로 쓰고 있다. :60.21㎡ 기단: 자연석기단 가구: 3량 바닥: 온돌+우물마루 천장: 고미반자 + 연등천장 지붕: 팔작 기와: 구와작은사랑채 평면1.작은 사랑방 2.작은사랑대청 3.곳 간 4.안사랑마당평면구성-온돌방(2)+대청+누마루+마루방 면적(㎡): 60.21㎡ 기단: 자연석기단 가구: 3량 바닥: 온돌+우물마루 천장: 고미반자 + 연등천장 지붕: 팔작 기와: 구와작은사랑채 평면1.안방 4.부엌 2.안대청 5.중문간 3.건너방 6.안마당평면구성-온돌방(2)+대청+누마루+마루방 면적(㎡): 60.21㎡ 기단: 자연석기단 가구: 3량 바닥: 온돌+우물마루 천장: 고미반자 + 연등천장 지붕: 팔작 기와: 구와행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마구간 등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 대문 동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서 옛날에는 안주인이 출입했다.행랑채 평면도행랑채 이미지사당 평면1.사 당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채에 딸린 마당. 대게 사랑채의 전면에 놓이며, 대문과 바로 통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대문 가까이 놓인다. 운조루에서는 사랑채 마당 옆에 있는 마당을 행랑마당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창고로 쓰이는 광채이다. 그래서 이곳 마당에서는 짐을 푼다든지 꾸린다든지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면에 행랑 마당은 작업 공간의 성격을 가진다. 위치로 볼 때 가운데라는 점으로 이 마당이 중심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손님이 기거하는 곳을 행랑채라 한다. 평상시 남자 하인을 또한 이 행랑채에 기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행랑채에 딸린 마당을 건물 이름을 따서 행랑 마당이라 한다. 이 마당은 사랑채 마당과 같이 쓰이는 경우도 있고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가 마을을 서로 공유하면서도 일부는 분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여성들이 기거하는 곳을 안채라 하는데 여기에 딸린 안마당이라 불린다. 안채는 집 전체로 볼 때 그 위치가 안쪽에 들어가 있다. 이 마당은 대게 건물이나 담으로 둘러싸여}
    공학/기술| 2009.03.20| 60페이지| 7,900원| 조회(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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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라미드 구조와 축조방식 평가A좋아요
    피라미드의 구조와 축조방식피라미드 정의PYRAMID의 PYR은 그리스 어의 PYRO에서 파생된 말로 이말은 ‘불(火)또는 열(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중심에서 타는 불” 또는 “타오르는 불의 중심” 이라는 뜻이 된다. AMID라는 말도 그리스 어 MESOS에서 파생된 말로 존재(存在), 중심(中心)과 근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피라미드란 말은 “중심에서 타는 불” 또는 “타오르는 불의 중심” 이라는 뜻이 된다.피라미드는 4각형 토대에 측면은 3각형을 이루도록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려 한 정점에서 만나도록 축조한 기념비적 구조물이다. 때로는 측면이 사다리꼴을 이루어 꼭대기가 평평한 것도 있다.일반적으로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것이 유명하지만 이집트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이집트 외에도 멕시코 중남미에 있는 마야, 잉카문명 유적과 이집트,에티오피아,그리스,인도,그리고 아시아의 중국에도 몇 개가 실재한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고왕국 창건 때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종말에 이르기까지 2,700년 동안 장제용(葬祭用) 건축물이 계속 지어졌다.피라미드는 고대이집트 왕의 불사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즉, 피라미드는 불사의 희망 아래 건립된 왕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피라미드 정의에 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피라미드는 과거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왕의 무덤이라는 왕묘설과 과거 천문대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피라미드 천문대설, 해시계설, 다소 황당하지만 우주인의 기지설이 있다.그러나 우리가 알고있는 피라미드는 일반적으로 왕의 무덤이라는 왕묘설이 유력한데, 그 이유는 기원전 5세기에 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서술한 책에 “피라미드 가까이에 있던 장로가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왕묘라고 말하였다” 라고 하는 근거와 피라미드에는 석관으로 보이는 돌 상자가 있다. 이것이 근거가 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피라미드의 구조-장소의 선정오늘날까지도 세계최대의 석조 건축물인 쿠푸왕의레버를 이용하는 4명과 단순히 힘으로 돌을 맞추는 데 2명 , 석수장이가 돌을 다듬는데 2명이 필요했다. 앞서 가정한 것처럼 돌은 한 시간에 34덩이가 운반되었다. 그러므로 돌을 제때 놓지 못하면 돌이 적체되어 심각한 병목 현상이 발생할 수 밖에 없으므로 34덩이에 곱하기 10을 하면, 340명의 인력이 필요하다. 요즘 인력에 비해 효율성이 절반정도라고 본다면 680명이 필요하다.1360명의 절단 인력에 1212명의 이동 인력, 680명의 돌 앉히는 인력을 더해 보면 20여 년간 피라미드 건축을 완료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은 3252명인데 , 어떤 때는에는 아마 더 적었을 것이다. 이것이 피라미드의 건설에 투입된 전체의 인원의 총합이다.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분명 불가사의한 규모의 인원은 아니다.-도구이집트의 기본적인 측량도구는 추와 바늘 , 삼각자등 이었다. 돌은 줄과 나무 레버로 운반되었다는 점도 확인 하였다. 여기에다 해머와 정, 칼, 톱과 같은 기술 장비까지 건축을 위한 각종 편의 시설은 완벽했다.경도가 약한 석회암은 비교적 자르기 쉬워 쐐기와 정만으로도 쉽게 분리되었다. 사카라 근처에서 발견되 유적으로 미루어 고대 이집트는 제1왕조 때부터 이에 유용한 청동제 도구들을 사용했다. 석회암 채석장에서 돌이 잘려 나간 흔적을 살펴보면 정은 석회암의 상부와 측면을 자르는 데 , 쐐기는 바위 덩이를 분리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고품질의 석회암은 지표면 아래에 있었음에도, 이런 반법을 통해 지표면의 석회암을 잘라나갔다.화강암과 현무암은 훨씬 단단해 이집트인이 이를 어떻게 잘랐는지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다. 불과 물을 이용해 암석표면에 균열을 일으켰다는 견해도 끊임없이 제기되었지만, 쉼없이 돌을 마멸시켜 잘랐다고 보는 편이 현재로서는 더 설득력이 있다. 화강암 중에 제일 단단한 석영과 석고 , 물을 혼합한 풀을 청동제 톱과 톱과 드릴에 발라 바위를 잘랐다. 미세한 석영입자가 바위를 파쇄하면 톱날과 드릴이 정환한 선을 유지했다.아스완의 채석장에높이 9m인 큰 복도 안에는 건설 전에 입구를 닫는 돌(까만 색)이 넣어졌다. 옆 언덕길(회색)에 있는 노동자가 돌을 괸 들보를 뺘면 그 돌이 미끄려져 상슬로가 닫힌다.무덤을 봉ㅎ라는 노동자들은 큰 복도에서 석괴를 미끄러뜨려 상승로를 막았다. 이 작업은 벽의 홈에 끼워넣어 고정시킨 들보에 걸친 새끼줄을 사용해서 행해졌다. 상승로가 닫힌 뒤에는 무덤의 입구를 포함한 모든 통로가 돌로 막아졌다. 이런 독특한 수간에 의해 적어도 400년간은 영리한 무덤 도둑으로부터 화를 면했다. 그러나 끝내 미이라나 부장된 재보를 도둑맞고 말았다.-피라미드의 내부: 세 개의 방쿠푸피라미드의 모든 건축물 중 가장 매혹적인 것은 아마도 그 내부일 것이다. 초기 고고학자들이 현재의 학자들로부터 존경받을 만큼 정확한 조사를 벌였지만, 1880년부터 1882년까지 최초로 피라미드 내부 구조를 철저히 조사했던 사람은 플린더스 파트리였다. 초기 개척자들 중 주목할 만한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고용한 19세기 초의 에드메 프랑수아 조마르와 1837~1838년에 조사를 펼쳤던 영국의 듀오 하워드 바이즈 대령과 존 세어 페링이다.위대한 근대 건축가 르꼬르뷔지에가 집을 살기 위한 기계라고 정의 한 것은 유명하다. 그의 말을 따른다면, 대피라미드는 죽은 사람들을 휘한 기계, 더 정확히 말하면 부활을 위한 기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 구조는 매우 정교한 기계로서, 방들과 대기실들 , 열린 통로 , 숨겨진 통로, 구멍, 내리닫이문으로 구성된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올라가는 순서에 따라 왕비의 방, 대화랑, 왕의 안치실, 이렇게 세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눈 수 있다. 왜 방이 세 개인가? 이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일부는 선설이 진행되면서 초기의 계획들이 변경되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쿠푸가 예상외로 일찍 죽을 것을 대비한 일종의 비상 대책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말하며 ,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세 부분의 구조가 처음부터 계획되었다고 말한다.-비밀의 방비롯 헛된 희망으로 끝났지만, 피라미드회랑 위쪽 끝 계단의 양면에 나 있다. 그리고 회랑 서쪽 면에 있는 , 과거 돌로 막혀 있던 통로 바닥에는 구멍 혹은 ‘우물’의 입구가 있다. 이 구멍은 피라미드 안 직각으로 빠져 들고, 그 후 약간 비스듬한 각도로 휘어졌다가 , 암반을 뚫고 들어가서 내리막 통로의 서쪽 벽으로 나온다.한편 회랑을 통해 계속 올라가면 수평의 입구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대기실로 갈 수 있다.-대기실이 공간의 남,동,서쪽 벽은 붉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네 개의 거대한 홈이 동쪽과 서쪽 벽에 나 있는데, 이 중 세 개는 바닥으로 연결되어 있고, 다른 것들보다 작은 북쪽의 구멍은 통로의 천장에서 멈춘다. 이를 통과하면 마침내 대 피라미드의 영적 핵심에 다다르게 된다.-왕의 안치실이곳은 꽤 넓은 방이며 디자인이 예상외로 단순하다. 대기실과 같이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동서 길이는 10.5미터, 남북의 길이는 5.2미터이며, 높이는 5.8미터이다. 서쪽 벽을 향해 두껑이 없는 직사각형의 화강암 석관이 놓여 있는데, 이것이 쿠푸의 무덤이다. 플린더스 피트리는 이방을 조사하면서 , 이것이 바로 전의 방보다 약 1인치가 넓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내실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 그것이 이미 이 자리에 놓여 있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측을 했다. 그것은 피라미드의 중심축 위에 정확히 놓여 있다. 한 때는 뚜껑이 덮인 채 나무 관이 안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 도굴꾼들이 시신과 관을 함께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톱으로 인해 생긴 막 긇힌 자국이 두렷이 남아 있다. 위를 보면 , 천장을 구성하는 아홉 개의 거대한 널판이 보인다. 각각은 길이가 5.5미터를 훨씬 넘고, 무게는 25톤에서 50톤 사이로 추정된다. 따라서 천장의 총 무게는 놀랍게도 약 4백톤이 된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천장의 보이지 않는 구조이다. 하나 위에 다른 하나를 얹는 이 널판 구조는 다섯 개의 방에 모두 적용되었는데, 앞의 네 개는 평평한 직사각형의 형태로, 왕의 안치실은 뽀족이 들어간 모양으로 이 있었고, 사원의 동쪽 정면의 문을 통해 제방 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같은 역할을 하던 메이둠에 있는 신전과 ‘굽은 피라미드’의 신전보다 훨씬 컷다. 또한 이것은 검음 현무암으로 덮인 야외 안뜰이 있었고 일종의 열주랑으로 싸여 있었는데, 화강암 기둥이 지붕을 지탱했다. 모서리에 있는 것을 제외 하고는 주로 기둥이 직사각형이었다. 남서쪽 모서리 안의 돌계단을 통해 열주랑의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안뜰의 서쪽 면에는 창고였던 것으로 보이는 구덩이가 있고, 각 면에 단면이 둥그런 석비와 제단이 있는 내부의 성소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의견이 분분하다. 이후 시기의 장례 신정에는, 왕의 상과 서쪽의 가짜 문 두 개를 포함해 다섯 개의 상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틈새가 있지만, 여기서 그러한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피라미드 안뜰로 들어가기 위한 문은 북서쪽 모서리에 있었다.-위성 피라미드주 피라미드의 작은 복사본이다. 하부의 길이는 66피트밖에 되지 않으며, 비교적 최근에 이집트의 유명한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의 정기 청소작업중에 발견되었다. 대피라미드 남동쪽에 직접 위치해 있고, 쿠푸의 카를 위한 거처로 의도된것 같다. T자 모양의 내리막 통로와 조그만 안치실이 있다. 그 양쪽에는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안의 회랑처럼 , 텐트 모양과 비슷하게 움푹 꺼진 부분이 있다.-배 모양의 구덩이이 구조물은 주로 둘로 나뉜다. 배 모양으로 파인 구덩이와 실제 배를 분해한 조각을 담아 놓은 직사각형 구덩이가 그것이다. 첫 번째 구덩이들은 피라미드 복합체 주변에 흩어져 있다. 하나는 장례 신전 근처에 제방 길과 평행을 이룬다. 다른 두 개는 신전 남쪽과 북쪽에 있으며 네 번째 구덩이는 왕비의 피라미드들 사이에 다섯 번째는 위성 피라미드 옆에 있다. 직사각형 구덩이들은 이집트의 고고학자 카말 엔말라크가 1954년 5월에 발견했다. 두 개의 구덩이는 각각 거대한 석회암 널판으로 덮인 채 발견되었다. 첫 번째 구덩이에서 파괴된 조각들이 총 1224개가다.
    공학/기술| 2007.04.09| 20페이지| 7,900원| 조회(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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