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골프란?골프는 티잉 그라운드, 페어웨이, 러프, 홀이 있는 퍼팅 그린 등으로 구성된 지역에서 골프채로 볼을 치는 경기이다. 경기방식은 규칙에 따라 티잉 그라운드에서 퍼팅 그린의 홀에 넣을 때까지 가능한 한 적은 수의 스트로크로써 볼을 쳐서 한 라운드, 18홀을 도는 것이다. 플레이 형태는 홀의 승패수로 결정하는 매치 플레이와 총 스트로크 타수로서 결정하는 스트로크 플레이 두 가지가 있다.2. 플레이의 원칙 세 가지-코스를 있는 그대로 플레이 할 것-볼이 놓여진 상태 그대로 플레이 할 것-상기와 같이 못할 경우 공정하게 플레이 할 것3. 공정한 플레이의 원칙-플레이어가 스트로크 하는 동안 움직이거나, 말을 하거나, 플레이어의 가까이나 바로 뒤에 서면 안 된다.-앞 조가 볼의 도달거리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볼을 쳐서는 안 된다.-지체없이 플레이하여야 하며, 같은 조가 모두 퍼팅이 끝나면 즉시 퍼팅 그린을 떠나야 한다.-경기가 빠른 조는 통과 시켜야 한다.-디보트(뜯긴 잔디)는 제자리에 놓아야 하며, 벙커의 발자국은 반반하게 고쳐 놓아야 한다-다른 사람의 퍼팅 선을 밟아서는 안 된다.-퍼팅 그린에 채를 떨어 뜨려서는 안 된다-깃대는 똑바로 제자리에 세워 놓아야 한다골프 규칙4. 중요 골프 용어의 정의-티잉 그라운드 (Teeing Ground)플레이할 홀의 출발 장소를 말한다. 2개의 티 마커로 표시된다-스루 더 그린 (Through the Green)플레이중인 티잉 그라운드와 퍼팅 그린과 코스 내의 모든 해저드 구역을 제외한 코스 전 구역을 말한다.-해저드 (Hazards)모든 벙커 또는 워터 해저드를 말한다.-퍼팅 그린 (Putting Green)직경 4¼인치의 홀이 뚫려 있는, 퍼팅을 위하여 특별히 정비한 전 구역.-아웃 오브 바운드 (Out of Bounds)코스의 일부분이 아닌 플레이가 금지된 구역을 말한다. 볼의 전체가 아웃 오브 바운드에 있을 때는 아웃 오브바운드의 볼이 된다.-루스 임페디먼트 (Loose Impediments)자연물로 고정되어 있지 않거나 또는 생장하지 않고, 땅에 단단히 박혀 있지 않으며, 볼에 부착되어 있지 않은 돌, 나뭇잎, 나뭇가지 같은 것들과 동물의 분, 벌레들과 그의 배설물 및 이것들이 쌓여 올려진 것들을 말한다.-장해물 (Obstructions)모든 인공의 물건으로써, 아웃 오브 바운드를 표시하는 벽, 담, 말뚝 및 울타리, 그리고 움 직이지 못하는 인공물건의 모든 부분을 말한다. 또한 코스와 불가분한 것이라고 위원회가 지정한 모든 구축물이 포함된다.-캐주얼 워터 (Casual Water)플레이어가 스탠스를 취하기 이전 또는 이후에 볼 수 있는 코스 상의 일시적으로 고인 물-수리지 (Ground Under Repair)위원회의 지시로 수리지로 표시된 코스 내의 구역이다. 수리지라는 표식이 없어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쌓아 올려놓은 물건과 그린 키퍼가 만든 구멍이 포함된다.6. 일반적인 사항 (General Points)-라운드를 시작하기 전에 스코어카드의 로칼룰을 읽어본다.-많은 골퍼가 같은 상표의 볼을 사용하고 있기에 식별이 불가능하게 되면 분실구가 되므로 공에 표식을 한다.-채는 14개까지 허용되므로 채의 갯수를 확인한다.-라운드 동안 파트너와 캐디 외에는 어드바이스를 주거나 받을 수 없다.-한 홀을 플레이하는 도중에는 연습 스트로크를 할 수 없다.-플레이 시작 (Teeing Off)티잉 그라운드 이외의 지역, 즉 티 마커를 연결한 선 앞쪽이나 후방의 2클럽 지역 밖에서 티 오프하면 안 된다.-볼 플레이 (Playing the Ball)볼이 놓여 있는 그대로 플레이 할 것. 정당한 스탠스나 스윙을 취할 때를 제외하고 고정 되어 있거나 성장하는 것을 움직이거나 구부리거나 부러뜨려서는 안되며, 의도하는 스윙구 역이나 자신의 플레이의 선등 라이를 개선하면 안 된다. 볼이 벙커나 워터 해저드 내에 있 을 때 스트로크 하기 전에 벙커의 지면이나, 워터 해저드의 지면이나 물에 접촉해서는 안 된다. 볼을 밀거나 떠올려서는 안되며 클럽헤드로 바로 쳐야 한다.-퍼팅 그린 (On the Putting Green)퍼팅 선상의 볼 마크나 홀컵을 메운 자국은 수리할 수 있으나 스파이크 자국 같은 다른 것 에 의한 손상은 수리할 수 없다. 퍼팅 그린에서는 마크 후 볼을 집어 올릴 수 있고 닦을 수 있으며, 원위치에 정확히 리플레이스 하여야 한다. 볼을 굴리거나 그린의 표면을 문지 르거나 긁어서 그린면을 테스트하지 못한다.7. 상황별 규칙-퍼팅 그린에서 플레이한 볼이 깃대에 맞는 경우:매치 플레이에서는 그 홀에서 패하고, 스트로크 플레이에서는 2벌타가 가해진다.-정지된 볼이 움직인 경우자신의 볼이 규칙에서 허용된 경우를 제외하고 플레이어나 파트너 혹은 자신의 캐디에 의하여 움직인 경우 또는 플레이어가 어드레스를 취한 후 움직인 경우 1벌타 가산 후 리플레이스 해야 한다. 자신의 볼이 타인의 볼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움직여진 경 우 벌타 없이 리플레이스 하여야 한다.-움직이고 있는 볼이 방향변경 또는 정지되는 경우매치 플레이에서는 그 홀에서 패하고 스트로크 플레이에서는 2벌타를 가산 후 그 상태로 플레이하여야 한다.-플레이어가 친 볼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정지되거나 방향이 변경된 경우:매치 플레이에서 상대편이나 상대편의 캐디에 의하여 방향이 변경된 경우 다시 플레이할 수 있는 선택적인 권한을 가지며, 스트로크 플레이에서 퍼팅 그린에서 스트로크 한 후 볼 의 방향이 변경될 경우 반드시 다시 플레이하여야 한다.-플레이어가 친 볼이 정지된 다른 볼에 의하여 정지 되거나 방향이 변경된 경우:스트로크 플레이에서 플레이하기 전에 퍼팅 그린에 자신의 볼과 다른 볼이 있을 때에는 2 벌타를 가산하고 그 외의 경우에는 벌타 없이 있는 그 상태로 플레이하여야 한다.-플레이어의 방해 또는 원조가 되는 볼 (Ball Interfering with or Assisting Play)다른 플레이어의 원조가 된다고 생각할 경우 자신의 볼을 집어 올릴 수 있다. 자신의 플 레이에 방해가 되거나 다른 플레이어의 플레이에 원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그 볼 을 집어 올리게 할 수 있다.
아이스하키 규칙1. 아이스하키의 특색타 종목과 달리 아이스하키는 격렬한 몸싸움이 허용되고,경기장이 보드로 둘러싸여 있어 획이 링크 밖으로 나감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경기중단이 없고,보드를 이용해서 패스를 하고,링크안에고울이 놓여 있어 고울의 후방도 경기장으로 간주되어 슛이나 패스가 고울을 벗어나도 플레이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루어지며,@경기 중이라도 선수교체는 6명 범위 내에서라면 22명의 선수가 자유로이 행할 수 있다는 것 등이 아이스하키만이 지닌 특색이라 할 수 있다.2. 경 기 장아이스하키 경기장을 링크라 부른다. 링크는 1.20~1.22m 높이의 목재 또는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진 펜스(보드)로 둘러싸여 있으며, 링크의 크기는 최대 61m×30m,최소 56m×26m이나 국제대회를 치룰 수 있는 최소규격은 길이 60m,너비29m이다. 링크에는 총 5개의 라인과 페이스오프를 실시하는 5개의 원이 그려져 있으며, 두개의 블루라인(청색선)에 의하여 3개의 빙역(존)으로 등분 되는데, 중앙빙역을 뉴트렬 존,양단의 빙역을 엔드존이라 부른다. 이 엔드 존은 공격빙역(어택킹존)과 방어 빙역(디펜딩 존),이라 부르는데 이 공격 빙역은 상대팀에서 볼때는 방어 빙역이 된다. 양쪽 엔드 보드로부터 4m 떨어진 곳에 엔드라인(5cm 폭의 적섹선)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골라인(goal line)이라 한다.이 골라인 중앙에 골키퍼 보호를 위하여 붉은색 반원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골 크리스(goal crease)라고 부른다. 이 골크리스의 중앙 골라인에 높이 1.22m,너비 1.83m 크기의 골대가 놓여지게 된다. 링크를 2등분하는 중앙의 레드라인을 센터라인이라 부른다.3. 팀의 구성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팀 엔트리 수는 22명(골키퍼 2명, 플레이어 20명)이며, 링크 안에서 플레이에 참가하는 선수는 6명으로 구성된다. 골키퍼(GK)1명, 방어가 주 임무인 디펜스(DF)2명, 공격을 주로 하는 포워드(FW)3명이다. 이 중 디펜스는 라이트 디펜스(RD)와 레프트 디펜스(LD)로 나뉘고 포워드는 중앙에 위치하는 센터포드(CF)1명과 그 양옆에 자리하는 라이트 윙(RW)과 레프트 윙(LW)오로 구분된다.아이스 하키 규칙4. 경기 방법각 팀 6명(포워드 3명, 디펜스 2명, 골키퍼 1명)으로 편성된 선수들이 출장하고, 센터라인 중앙에서 양 팀의 센터가 마주선 가운데 심판이 떨어뜨리는 퍽을 스틱으로 서로 빼앗는 페이스오프(faceoff)를 하는 것으로써 경기가 시작되며, 골에 퍽을 때려 넣음으로써 득점이 되고, 득점수가 많은 쪽이 승리 팀이 된다. 중앙에서의 페이스오프는 각 피리어드가 시작될 때와 득점 발생 후에만 실시된다. 그 외의 페이스오프는 반칙이 있었을 때 그 반칙이 발생한 지점에서 펜스로부터 6m 떨어진 안쪽에서 실시하며 엔드 존에서 반칙이 있었을 경우 그 원인을 구분하여 공격 측이 있을 경우에는 뉴트럴 존의 스포트에서, 수비즉의 반칙인 경우에는 엔드존 스포트에서 페이스오프를 한다. 포워드는 주로 공격을 맡으며, 스피드가 좋은 선수가 적임이다. 디펜스는 바디 체크(몸으로 부딪쳐 막는)등으로 상대편의 공격을 막는 것이 주 임무라서 강건한 체력과 체격이 요구된다. 골키퍼는 퍽을 손으로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다. 근대 아이스하키는 플레이어 5명이 포지션에 구애없이 스피드하게 공.수 양면에 걸쳐 올라운드 플레이를 펼치는 경향이다. 선수교체는 경기 중 언제든지 6명 이내에서 22명의 선수 전원이 수시로 자유로이 할 수 있다. 이것은 골키퍼를 제외한 5명의 플레이어는 1~2분 정도 플레이에 참가하면 급격한 체력의 소모를 가져오기 때문에 잦은 선수 교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이스하키는 스피드하고 스틱을 사용하여 플레이하며, 규정의 한도 내에서 바디체크가 허용되는 경기이므로 때때로 위험한 플레이가 속출될 때가 있어, 반칙을 범한 선수는 그경·중에 따라 2분, 5분, 10분간, 또는 잔여 시간동안 퇴장을 당하는 페널티 등의 벌칙을 적절이 부과할 수 있도록 경기규칙이 상세히 만들어져 있다. 선수중에는 가슴에 알파뱃 C 또는 A를 부착한선수가 반드시 있는데, C는 주장(Captain),A는 부주장(Assistant Captain)으로써 심판의 판정에 대해 문의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6. 반칙의 종류일반적인 반칙: 퇴장 없이 경기만 중단되는 반칙은 다음과 같다.-오프사이드(off-side):퍽을 가진 공격 측 선수보다 퍽을 가지지 않은 동료 선수가 공격빙역 (어택킹존)에 먼저 들어간 경우에 오프사이드 반칙이 선언되며, 경기는 중단된다. 이때 페이스오프는 중앙 빙역(뉴트럴존)의 스포트에서 실시한다.-아이싱 더 퍽(icing the puck):센터라인 이전에서 패스하거나 쳐낸 퍽(A1)이 그 어느 선수 에게도 터치되지 않고 골라인을 통과했을 경우에 아이싱 반칙이 선언되며, 이때 페이스오 프는 반칙팀 수비지역의 엔드 페이스오프 스포트에서 실시한다.-오프사이드 패스(off-side pass:디펜딩 존에 있는 선수가 공격을 위해 센터라인너머에 있는 선수에게 패스 하는 것을 의미)룰은 98년 국제연맹 경기 규칙 개정에 의해 이번 시즌 부 터 허용됨벌칙이 부과되는 반칙: 다음과 같은 반칙이 발생하였을 경우에 그 반칙의 정도에 따라 마이너 페널티, 메이저 페널티, 미스컨덕트 페널티, 매치 페널티, 페널티 샷 등의 벌칙이 적절하게 부과된다.
미식축구 규칙1. 미식축구의 규칙미식축구의 매력은 분업과 전문화다. 선수들은 공격 11명, 수비 11명으로 나뉘어 자신의 전문 분야를 철저히 분담해 팀 공격과 팀 수비를 맞춘다. 그래픽 참조 미 프로풋볼리그(NFL)에서 한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한 팀의 엔트리는 무려 53명이다. 그 53명이 수시로 교체되며 톱니바퀴처럼 호흡을 맞춰 상대를 공격하고, 막아낸다.-수비팀DT(2.디펜시브 태클)=수비라인 한가운데서 공격 진영을 무너뜨리는 수비수 (번호 70~79 번)DE(2.디펜시브 엔드)=수비라인 양쪽 끝에서 쿼터백이나 러닝백을 향해 돌진하는 수비수 (번호 90~99번)OLB(2.아웃사이드 라인배커)=수비진 2선 양쪽에서 공을 든 공격수나 타이트 엔드를 전담하는 수비수 (번호 50~59번)MLB(미들 라인배커)=수비진 2선 한가운데서 공을 든 선수를 마크하는 수비의 핵심 선수 (번호 50~59번)CB(2.코너백)=와이드 리시버를 전담 마크하는 패스 전문 수비수. 발이 빠르다. (번호 20~49번)SS(스트롱 세이프티)=공이 올 가능성이 큰 쪽에 배치되는 최종 수비수. 패스도 막고 공 든 선수 태클도 한다. (번호 20~49번)FS(프리 세이프티)=공이 올 가능성이 작은 쪽에 배치되는 최종 수비수. 패스도 막고 러닝백 태클도 한다. (번호 20~49번)-공격팀미식축구 규칙C(센터)=쿼터백에 공을 전달해 주는 공격의 출발점 (번호 50~59번)G(2.가드)=센터 양쪽 옆에서 쿼터백을 보호하고 러닝백의 루트를 개척해 주는 임무 (번호 60~69번)T(2.태클)=가드 양쪽 옆에서 쿼터백을 보호하고, 공격진의 길을 열어 주는 임무 (번호 70~79번)TE (타이트 엔드)=블로킹과 패스 리시빙을 모두 할 수 있는 공격진의 조커 (번호 80~99번)WR(2.와이드 리시버)=패스를 전문으로 받아내는 공격수 (번호 80~89번)QB(쿼터백)=공격의 야전 사령관. 야구의 투수보다는 배구의 세터, 농구의 포인트가드가 적절한 비유 (번호 1~19번)RB(2.러닝백)=공을 들고 뛰는 공격수. 임무에 따라 블로킹 위주의 풀백(FB)과 러싱 위주의 테일백(TB)으로 나눔 (번호 20~49번)2. 공격.득점 방법미식축구는 '네 번 공격에 10야드 전진'을 기본으로 한다. 10야드를 전진하면 다시 공격권이 주어진다. 네 번 공격에도 10야드를 전진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공격권을 뺏긴다. 세 번째 공격까지 10야드를 전진하지 못했을 때 보통은 공을 멀리 차서 상대방에게 넘겨준다. 그러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으면 네 번째도 정상 공격을 시도할 때가 있는데 이때도 실패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상대방 공격이 시작된다. 공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미식축구 규칙-공을 들고 달려 상대 진영을 돌파하는 러싱-공중 패스를 이용해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패싱-공을 들거나 땅에 놓고 차는 키킹러싱은 다시 ▶ 중앙 돌파 ▶ 측면 돌파 ▶ 쿼터백이 공을 들고 뛰다가 상황에 따라 뒤에 따라오는 러닝백에게 토스하는 옵션 플레이 ▶ 와이드 리시버의 스피드를 이용하는 리버스 플레이 등으로 나눠진다.패싱에는 ▶ 쿼터백이 포켓(공격 라인맨들이 만들어 주는 보호구역)안에 서서 리시버에게 공을 던지는 전통적인 패스와 ▶ 다양한 눈속임 뒤에 리시버를 찾아내는 플레이 액션 ▶ 수비 라인맨을 유인한 뒤 러닝백에게 짧게 패스하는 스크린플레이 등이 있다.
-------------------------------목차---------------------------------1. 들어가면서2. 십자군 전쟁?3. 십자군 전쟁의 원인1)정치적 원인2)경제적 원인3)종교적 원인4. 십자군의 만행5. 십자군 전쟁의 결과6. 마치면서1. 들어가면서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몇 해 전, 미국은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등을 이유로 이라크와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전 세계는 테러의 위협에 있던 터라 이 사건은 전 세계의 이슈화 되었다. 물론 나도 이 전쟁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지켜보았었다.비단 전쟁이라 함은 여러 관계가 얽힌 상태에서 발생하기 마련인데, 미국은 단지 테러지원과 대량살상무기로 인한 국제질서의 혼란을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니 겉에 보이는 그 정의성으로 인해 미국편을 들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언론에서 미국이 중세시대의 십자군과 비슷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십자군에 대해 ‘그리스도의 군대’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을 뿐, 그것의 성격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두고 단순히 “미국의 행위가 역시 정당성을 띄고 있구나”란 생각을 하고 간과해버렸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함락하고 전쟁이 종결된 후,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가 나오지 않았고, 결국 세력 팽창과 석유 획득을 목적으로 한 전쟁이었다는 비난을 얻게 되고, 앞서 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얼마 후.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세계사를 배우던 중, 중세 시대 십자군 전쟁의 진정한 목적이 세력팽창과 토지, 성유물 획득이라는 것을 배우고 난 후, 당시 언론에서 말한, 미국의 행위가 중세 시대의 십자군과 비슷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었고, 이는 대학교에 오면서 서문유 수업을 들음으로써 더 확실해졌다. 미국-이라크 전쟁에 대한 관심은 결국 십자군 전쟁까지로 이어졌고, 서로 다른 문명의 충돌에 대한 전쟁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수업만으로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 깊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차에 이에 록 하겠다.2. 십자군 전쟁?유럽인들이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군사 원정으로써, 8차례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11세기에 봉건 유럽에서는 상업과 종교가 광범위하게 부흥했고, 예루살렘과 동방의 성지 순례가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비잔틴 제국은 점점 강대해지는 셀주쿠 투르크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는 유럽, 특히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1세는 알레시우스를 돕고 그리스도의 성묘를 탈환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군대를 소집했다. 이에 따라 베르망두앙의 위그, 보에몽, 생질의 레몽, 플랑드르의 로베르 같은 기사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보잘것없는 전자, 모험가 ,광신자들의 소규모 비조직적인 부대도 형성되었다. 1098년 그들은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1099년 7월 15일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 후, 몇 십 년간 십자군은 팔레스타인 해안을 따라 가느다랗게 뻗어 있는 지역을 장악하고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장령,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자령 등 소위 십자군 국가를 세웠으며, 그곳에 유럽인 통치자를 두었다. 그들은 해안과 내륙의 변경 을 따라 성을 세웠다.1144년 십자군은 모술에 강력한 이슬람 국 가를 세운 셀주크 투르크의 통치자 장기에게 에데사를 빼앗겼다. 에데사가 함락되었다는 소 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교화 유게니우스 3세는 제2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이 제2차 십자군 원 정 동안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왕 루 이 7세가 이끄는 군대가 1148년 봄 예루사렘 에서 연합해 5만 명의 병력으로 다마스쿠스 북 쪽을 공격했다. 그들은 장기의 후계자 누레딘의 군대에게 밀려 결국 후퇴했으며, 제2차 십자군 원정은 패배로 끝났다.1187년 살라딘은 갈릴리 바다 근처의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주둔 십자군 요새를 대부분 점령했다. 예루살 위해 소집한 제4차 십자군 원정은 예기치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십자군은 베네치아에서 들여온 배와 장비의 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베네치아인들을 도와 헝가리의 자라 시를 점령한 다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1204년 4월 13일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십자군과 배네치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란틴 제국을 세웠는데, 이 제국은 60년 이상 존속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의 이러한 행동을 비난했지만, 제4차 십자군은 비잔틴 교회와 라틴 교회의 동맹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해버렸으며, 비잔틴 제국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그 후, 유럽에서는 십자군 운동의 열기가 되살아나 1212년 소년 십자군이 형성되기도 했다.3년 후 인노켄티우스 4세는 다시 한번 이슬람교도들을 공격할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주로 프랑스와 독일 사람들로 구성된 제5차 십자군은 1219년 나일 강 근처의 담미에타를 점령했다. 그러나 홍수를 만나 카이로로 진격하지 못하고 있던 십자군은 8년간의 휴전에 합의하고 어물쩡하게 원정을 끝마쳤다. 이것은 교황이 직접 조직한 마지막 십자군이었다.제6차 십자군 때 출정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한 적이 있는 독일 황정 프리드리히 2세는 1229년 10년간 예루살렘을 유럽인들에게 반환한다는 협정을 얻어냈다. 1244년몽골족의 진출로 서쪽으로 밀려온 크바레즈미 투르크족이 이집트인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약탈했다. 1248년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 제7차 십자군도 제5차 십자군처럼 이집트에서 패배했다. 루이는 22년 뒤 마지막 십자군인 제8차 십자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튀니지에 상류한 직후 대부분의 군대와 함께 병에 걸려 죽었다. 그 후로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불행한 원정활동이 계속되었지만 십자군 시대는 끝나버렸다.3. 십자군 전쟁의 원인1)정치적 원인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게 침략을 당함으로써 서방에 원병을 요청했다. 1071년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Manzikert 전쟁에서키지 못했으나 다음 교황이 성공을 시켰다.또한 스페인 지역에서 1034년 회교 족장들의 싸움으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하던 칼리프 왕국이 멸망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스페인 지역을 탈환했다. 1060년 이후 시칠리 섬 탈환, 기독교인이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2)경제적 원인당시 영주의 장남이외의 아들들은 토지 상속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부족한 유럽지방이 토지가 아닌,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또한 도시 상인들은 시장개척을 열망하고 있었다.3)종교적 원인1076년부터 성지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점령당했다. 이들이 성지 순례를 방해했고, 교회는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황권이 강화되어서 동방교회까지 지배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십자군 전쟁은 한마디로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회가 개혁되고 신앙의 열정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운동이었다.십자군 전쟁의 명분무슬림은 예루살렘으로서의 성지 순례를 박해하였는가? 물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해적이 나타나는 일도 있었고, 해적 가운데 어떤 이들은 무슬림 출신이었다. 또 11세기 들어 지중해세계 동쪽에 전쟁이 잦아지면서 간혹 성지 가는 길의 근처가 전화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성지 순례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으며, 예루살렘은 여전히 기독교도에게 무척 안전한 곳이었다. 무슬림에 의한 박해가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서유럽에서 “아님 말로” 식으로 퍼뜨린 흑색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왜곡은 무슬림들이 겪은 학살도 결국 그들 스스로 원인제공을 해서 일어났다고 은연 중에 주장하는 셈인데, 하기야 침략자들은 늘상 자기 보호를 명분으로 걸지 않던가.4. 십자군의 만행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향해 대부분 '성지'에서 죽어나갔다. 한때 예루살렘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곧 투르크인에게 빼앗겼고, 이 과정에서 수백만의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를 죽음과 빈곤으로 몰아넣고, 아시아와 팔레스타인을 선혈로 물들인 것이 십자군 전쟁의 주요한 악행이라 할 수 있다.이들의 만행에서 한 가지 지군중 십자군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 가운데 날짜가 확인되는 일부를, 스티븐 런시만의 연구를 바탕으로, 시간 순으로 정리하였다.1095년 겨울. 루앙에서 유대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며 유대인들은 불안에 빠진다.1096년 4월. 피에르가 이끄는 십자군 부대가 지나가며, 퀼른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나다.5월 3일. 에미코가 이끄는 십자군 부대가 슈파이어에서 유대인 10여명을 살해하지만, 교회가 개입하여 살인자 들의 손을 자르는 형벌을 가하고 더 이상의 학살을 막는다.5월 20일. 에미코 부대가 보름스에서 교회 안에 피신한 유대인 500여명을 학살하다.5월 26일. 마인츠 대학살. 에미코 부대가 마인츠에 침입하여 d대인 1000여명을 학살하다. 학살은 이틀 넘게 계속되었다. 50여명의 생존자가 뤼데스하임의 주교관에 피신하지만, 기독교로의 강제개종 거부하고 죽음을 맞다.6월 1일. 에미코 부대가 쾰른에 도착하자 유대인들이 피난길에 오르다. 십자군은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들 을 살해하고 시나고그(유대교회당)를 불지르다.6월 1일. 유대인 학살을 위해 따로 갈라져 나온 부대가 트리어와 메츠의 유대인을 습격하 다. 이들은 6월 한 달 동안 라인 지역을 돌며 인근 유대인 거주지를 공격한다.6월 30일. 폴르마르가 이끄는 십자군 부대가 프라하의 유대인들을 살해한다. 비슷한 시기에 고트샬크의 부대 가 라티스본의 유대인들을 학살한다.십자군 이야기1, p.147, 김태권, 20035. 십자군 전쟁의 결과약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신도들은 더 이상 신이나 성직자들을 절대적인 존재로 보지 않게 된다. 십자군의 실패는 교황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십자군 참가자에게 면죄부를 함부로 주는 풍속을 자아내어 교회의 권위를 더욱 손상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봉건제를 붕괴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왕권이 강화되었고, 국민의식을 일으켜 왕권 강화에 유리한 작용을 하였다. 또한 동방무역이 열림에 따라 여러 나라의 도시가 번영하였다. 또한 십자졌다.
명성황후의 생애와 평가한국 근현대사 report1.명성황후의 생애(1)출생과 간택민비는 1851년에 여흥 민씨 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여흥 민씨는 제3대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제 19대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당시는 몰락한 상태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8세 때 부모를 여의고 고향 여주를 떠나 서울 친척집에서 자랐으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전해진다. 1864년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자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은 부패의 온상인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정치를 뿌리뽑고 이름뿐인 왕권을 강화하여 쇠락해진 봉건왕조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대원군은 외척의 세도정치를 원천 봉쇄할 계산으로 한미한 집안의 고아 소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아 소녀’라는 점 때문에 왕비에 간택된 것이다. 1867년 고종의 나이 15세, 민 소녀가 16세 때의 일이었다.『유홍종, 새롭게 읽는 명성황후 이야기』(2)대원군과의 갈등민비가 평화롭게 책 읽는 일로 나날을 보내던 1868년, 왕의 총애를 받던 상궁이 완화군(完和君)을 낳으니 고종과 대원군은 손이 귀한 왕실에서 오랜만에 본 아들이라 크게 기뻐하였다. 왕자 생산에 선수를 빼앗긴 민비는 위기의식과 함께 욕망의 화신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민비는 자신의 확고한 지위 확보를 위해 왕자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시아버지 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야겠다고 작정했다. 1871년 11월, 드디어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며칠 뒤에 죽고, 3년 뒤에 두 번 째 아들 척(拓·뒤에 순종)이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시아버지 대원군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틈이 벌어졌지만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의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일부 북인(北人)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했다.1873년, 유생 최익현이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 세금을 내게 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식군인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자, 명성황후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왕과 연락하는 한편,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청국군을 출동하게 하고 일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였으며, 다시 민씨세력이 집권하도록 암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 잠시 개화당 정부에 정권을 빼앗겼으나 곧 청국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왕궁에서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면서 유연성 있는 접촉을 유지하였다.『김행자, 민비집권기한정대외관계의 국제정치적 고찰』(4)을미사변과 명성황후 시해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침략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거세하려고 공작하였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미는 개화세력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정계에 적극 압력을 가하게 되자, 사세가 불리해진 명성황후는 친러정책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일본 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침략정책에 정면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그 척족 및 친러 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자, 민비집권기한정대외관계의 국제정치적 고찰』명성황후, 일본의 거액뇌물 거절노무라(野村靖) 당시 일본 내상이 1895년 8월 2일자로 이노우에 (井上馨) 공사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한국 부임을 앞둔 미우라 공사는 당시 명성황후 암살 사건에 개 입돼 일본 에 망명한 박영 효를 이날 만나 대화를 나눴다. 노무라 내상은“(박영효가)일찍이 조 선에서 이노우에 공사와 비밀 상담을 가졌는데 조선 정부에 줄 대 여금 300만엔 중 약간은 민비에게 배포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어느 날 그것을 왕비에게 이야 기했더니, 왕비 는 손을 뿌리치며 ‘받지 않겠다. 두렵다. 두렵다’며거 절했다”고 썼다. 박영효는 또 미우라에 게 “민비는 ‘한국의 큰 여우’ 로 만사의 장애가 되고 있다”고 말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마쓰(小松裕) 구마모토대 교수는 “(왕비 를) 돈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면, 죽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김기철기자, 조선일보 10월 6 2.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1)당시 외국인들의 평가1)미국 전권공사 푸트장군의 부인비록 젊기는 했지만 실권을 장악한 지 10년이나 지나서였는지 몰라도 이미 권위와 품위를 고루 갖춘 왕후였고, 한눈에 조선 정계의 실세(實勢)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 이다. 특히 푸트 여사의 민 왕후 평 가운데서 주목되는 점은 왕후가 뛰어난 침착성 [master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이라고 한 데 있다. 초면인 자신으로부터도 왕후는 줄곧 무엇인가를 알아내 려는 자세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따뜻한 배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과 왕 후와 왕자가 차례로 환영 인사를 했고 전통 깊은 동양 왕실의 에티켓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으며 왕후의 지식과 총명함 그리고 넘치는 위트에 기쁘고 감탄했다는......2)비숍여사당시 왕후는 40세가 넘은 여인으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 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사용해서 창.. 그녀는 미묘하면서도 유능한 외교관이었다.『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2)야사(野史)서의 평가1)고종은 세자를 사랑했지만 왕후는 구박하다임금이 세자를 몹시 사랑해서, 밥을 먹을 때마다 반찬을 골라 먹였으며 옷을 입을 때마다 소매를 펼쳐서 입혔다. 선조 임금들의 대를 잇게 된 아들이라서 중하게 여긴 것이다. 세자에게 말을 건넬 때에도 집안 식구 사이의 예법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남들과 맞대면하는 말투를 써서 매우 공경하고 공손하였다. 그러나 명성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만 거슬려도 쥐어박으며 “네가 아무리 세자라지만, 어찌 부모가 없겠느냐?” 고 소리쳤다. 그래서 세자가 임금은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왕후는 두려워했다.2)왕후가 의화군을 낳은 장씨를 불구로 만들다세자가 이미 양도를 펴지 못하고 불치의 병이 되자 명성은 대를 이를 희망이 없게 된 것을 한탄하고, 왕자 강의 아들 낳기를 기다려 세자의 뒤를 잇게 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강을 조금도 박대하지 않았으니, 완화군을 대하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신묘년(1891) 겨울에 임금에게 권하여 강을 의화군으로 봉하였다.의화군 강은 상궁 장씨가 낳았다. 강이 태어나자 명성이 성내면서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장씨의 처소에 이르러 창문에 칼을 들이대고 “칼을 받으라” 고 소리쳤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세었으므로 한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한 손으로 창문을 밀치고 나가, 엎드려서 살려 달라고 빌었다. 머리가 흐트러져 얼굴을 가렸다. 명성이 가엾게 여거 칼을 던지고 웃으며, “상감에게 사랑받는 자네를 이제 죽을 수는 없지. 그러나 궁중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 하였다. 힘센 사내를 불러다 결박하고 음구 양편의 살을 도려서 밖으로 내보냈다. 장씨는 그의 형제들에게 의탁해서 십여 년 살았지만, 상처로 고생하다가 죽었다.3)왕후가 황주 기생을 질투하여 죽이라고 하다진연 때에 궁중에 들어온 황주 기생이 있었는데, 임금이 그를 좋아해 몰래 불러들여 총애하였다. 정낙용에게 명하여 금반지 한 쌍과 세장전 삼천 냥을 주었네를 생각하여 서로를 떠들면서, “중전이 음란해서 이 난리가 일어나 낭자가 여기까지 피난오게 되었구려.” 하였다. 중궁은 말없이 듣기만 하다가, 환궁한 뒤에 이 마을을 모두 없앴다.5)대원군이 십 년 동안 저축한 국고를 일 년 만에 다 써버리다원자가 탄생하면서부터 잘 자라기를 비는 제사가 궁중에서 많아졌는데, 팔도에 이름 난 산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임금도 또한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상으로 주는 것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임금과 왕비가 하루에 천금씩 썼으니, 내수사의 재정으로는 그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다 썼는데, 재정을 맡은 신하 가운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따지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대원군이 십년 동안 모아 놓은 것을 일 년도 채 못 되어 다 탕진해 버렸다. 벼슬을 팔고 과거 급제를 파는 여러 가지 나쁜 정치가 이때부터 잇따라 행해졌다.6)민씨들이 정권을 잡자 백성들이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하다대원군이 십년 동안 정권을 잡으면서 안팎으로 위력이 강해져, 대운위분부라는 다섯 글자가 삼천리에 바람처럼 행해졌다. 무서운 천둥이나 끓는 물 같아서 관리와 백성들이 무서워했으며, 언제나 관청의 법률을 두려워하였다. 아침저녁으로 헛소문이 마구 생겨나서 시골 사람이 서울에 오면 붙잡아 죽인다고 하니, 깊은 산골이나 먼 바닷가의 백성들이 원하고 탄식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정권을 내어 놓게 되자 서로 기뻐하며 축하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길, "대원군이 정권을 내어 놓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망해 버려 오늘 같은 날도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민씨들이 정권을 잡고 나서 백성들이 그 착취를 견딜수 없게 되자, 자주 탄식하면서 도리어 대원군이 정치하던 시절을 그리워하였다. 이것은 후에 백성들이 탄식하면서 망조 시절을 다시 생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황현, 매천야록』(3)우리들의 평가1)김혜선18세기. 그 시기는 국내외 정세가 상당히 어수선 한 시대였다. 하지만 민비는 나라의 안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