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Template01Benetton group`s overviewUnited of Benetton use this picture for promote their product sale.WINTERTemplate01BusinessThe Benetton Group is present in 120 countries around the world. Its core business is fashion apparel.WINTERTemplate01A constant commitment to innovation, a crucial factor for development. Special attention is given to innovation in production.BusinessWINTERTemplate01Benetton Group was created in 1965 In 1968 the first store outside Italy was opened in Paris. In 1974 Benetton Group enlarged its brand portfolio, expanding product offerings.HistoryWINTERTemplate01During the 80's the Group continued its international expansion. In the 90's Benetton leveraged its manufacturing capabilities to offer high quality products at accessible prices In 2000's, Benetton introduced a new market approach to compete in the arenaHistoryWINTERTemplate01Brands of Benetton are 3 main brand United Colors of Benetton has an international style that combines color, quality and fashion. Over two-thirds of their clothing was for women, who represented 80 percent of Benetton`s shoppers.HistoryWINTERTemplate01SystemBenetton operated through a complex system of over 500 subcontractors and several joint ventures specializing in design.02Color and designBecause of having kept color marketing, now, anyone will know our products on only color”02베네통 광고Color and design02Dyed fabricSource of knowledge02Go to consumerJust in time02Computer Networking02Planning and marketing“Anyone can do production. It is important to know consumers' liking and sale strategic.a priest and a sister(1991)02Planning and marketing02stylish choice for green lifeGreen Campaign02Colors02Communication researchFabricaFailure of Benetton03Benetton, unlike its competitors, does not own retail outlets. Benetton's market cap fell from $5.8 billion in 2000 to $1.2 billion.Cons of shock ads03Message interpreted by consumers as offensive and insulting Offended consumers may avoid Benettons products that can affect sales03Controversies may gradually dent the brand image Withdrawn ads -waste of advertising budget Ads do not directly sell companies products to consumersCons of shock ads031. That sent the wrong signal. Benetton is a global mass-market brand, despite being recognized as a premium brand in India one point.Failure in India032. Matching is not shown in the world market, advertising products and products that you can buy in India.Failure in India033. Stores aggressively expanding in the small towns and the market is not mature even though it does not point.Failure in India034. Marketing team did not have experience in clothing retail and independent retail channels in preoccupied points.Failure in India04Benetton sold limited products in India comparing with world marketProductsProduct04So They started to sell more products which was sold in world marketProductsProduct04Premium Market DistributionReasonable Price High Quality Market DistributionProductsDistrubu -tionDistribution04Natalino Duo made a New growth Plan which is called “President Problem”ProductsProductsDistrubu -tionManagementManagement041998 Benetton is unhappy with the JV's rate of growth. Suggests putting in ore equity to open large format stores. Bharat Ram diff s, says he would like to see a return on his investment before investing more, Alternatively, DCM off s its stake to Benetton.1999 Benetton imposes Natalino Duo on the joint venture, Bharat Ram remains the chairman. Duo draws up an ambition business plan envisaging $15 millon (Rs. 73.50 crore) in investing, and promises a $50 millon (Rs 245 crore) topline by 2004. The partners continue to haggle over the purchase price.2000 Duo pushes ahead with his expansion plan, opens big stores, hires relatively expensive professionals, and steps up adverting to increase brand salience. The topline grows less than 10 per cent.2001 Overheads shoot up. Things worsen when Duo starts cleaning up the balance sheet, settling claims and writing off some bad debt. DCM starts lobbying for Duo's removal. There's a management change at Benetton, Italy, and stake purchase talks fail.2002 DCM Benetton 's fir -ever loss puts Benetton on the defensive. It agrees to remove Duo, and replace him with an expat from Brazil. The charge is given back to Bharat Ram, and more outsourcing of garments from the JV is promised.Management04Benetton did not employ nation people but other people who are expert in retail industryEmploy mentProductsDistrubu -tionManagementEmployment04ResearchEmploy mentBenetton can success in India by in-depth research for problems and find proper way to solve those problems, especially focusing on consumer behavior by change of seasonsProductsDistrubu -tionManagementResearch04StoreIndependent StoreStore In StoreResearchEmploy mentProductsDistrubu -tionManagementStore04'It's my time' employs models in 2010 season by casting at online.it's my timeHaving Changed{nameOfApplication=Show}
2008년 금융위기, 2010년 유로위기, 최근의 환율전쟁에 대하여?2008년 이래 서브프라임 위기의 원인 및 전개과정(2점)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2000년대 초 IT버블붕괴, 911테러, 아프간/이라크 전쟁 등으로 주가가 폭락하면서 경기가 침체되자 이로부터 회복하기위해 미국은 경기부양책으로 ?초저금리 정책을 펼쳤다.당시 제조업은 사양 산업이었기에, 저금리 정책으로 말미암은 풍부한 시중자금은 제조업투자가 아닌 자산 시장인 증권시장과 부동산시장으로 갔다. 글로벌 유동성으로 인해 향후 몇 년간 지속적으로 집값이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었고, 모기지 업체들은 만약 연체가 발생하더라도 주택 매각으로 충분히 디폴트를 커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브 프라임 등급의 투자자들에게도 모기지 대출을 해주었다. 그들은 "Buy now, pay later or never"이라는 홍보문구로 미국인들을 유혹했고, 이에 돈도 갖지 않고 매달 이자를 갚을 능력이 없는 미국인도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을 통해 너도나도 주택소유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 뒤로 집값이 계속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집 없는 서러움에 살았던 서민들이 갑자기 늘어난 자산에 힘입어 소비를 증대시키고, 5년 여간 이러한 과소비풍토가 지속된 결과 거품이 심화된다. 소비 활성화로 미국의 수입이 급증하기 시작하고, 전 세계의 경기 활성화로 이어졌다. 더욱이 신규주택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주택 건설 경기가 역대 최대의 호황 속에 전체 경기가 활성화 되었다. 주택모기지 대출의 급증으로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97년 이래 주택가격평균상승률이 무려 97%에 달했다. 결국, 경기과열로 인한 자산거품을 우려해 미 연방은행은 2004년 6월 이후 기준금리를 17개월 연속 인상하게 된다. 2005년까지는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집값 상승 추세를 이어가다가 2006년 들어서 주택경기가 둔화되고 시중 금리 상승으로 서브 프라임 대출자들의 연체율이 급증하게 되어 2006년 말 연체율이 14%대로 상승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미국의 집값이 하락이 만들어 지는데, 당시 저금리의 영향으로 장기 자금 운영 기관들이 투자처를 찾지 못한 상태이기에 모기지 업체와 생명 보험회사 등 투자 전문회사들이 많은 파생상품을 만들어 낸다. 즉, 모기지업체가 MBS를 발행하여 다른 금융기관에 판매하면, 이를 사들인 투자은행들은 MBS와 다른 대출 상품등을 모두 합치고 뒤섞어 CDO와 같은 복잡한 파생상품들을 만들어 낸다.월가의 금융천재들이 만들어낸 무수한 파생상품으로 인해 부실채권의 위험이 전 세계를 위협했고 이는 초저금리가 불러온 엄청난 부실대출에 대해 연방정부가 전혀 규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시장실패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문제점을 실제로 증명한 것이다. 또한 위기가 커지는 것에 신용평가사들의 몫도 있다. 월스트리트의 3대 신용 평가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증권화 상품의 80%가 미국 재무부 채권과 같은 AAA등급을 받았다. AAA등급은 투자처가 파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등급이다. 그러한 질 낮은 섞어찌개에 최고 등급을 준 신용평가 회사가 있었기 때문에 월스트리트가 위험성이 큰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담보로 한 증권거래를 국제시장으로 팽창해 나가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마침내 지속적인 금리인상으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대출의 실체는 드러나게 되고, 2007년 4월엔 미국내 서브프라임 모기지 2위 업체인 New Century Financial이 파산한다. 세계 3위 은행인 HSBC는 미국 주택시장에 뛰어 들었다가 106억달러를 회수하지 못하게 되었고 AIG는 약 850억달러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메릴린치, 리먼브라더스, AIG등 세계금융가를 주름잡던 회사들까지도 파생상품의 부실로 인해 파산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대응하여 전 세계 금융기관이 일체의 유동성을 통제하기 시작하고 이것이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이어지면서 실물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어 글로벌경제는 주저앉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전 세계 정부기관은 위기감을 느끼고, 더 이상의 금융기관 도산을 허용하지 않으려 적극적인 리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돈을 부당한 곳에 사용한 점도 보여주며, 미국 금융 회사의 비윤리적인 면을 보여준다.?미국 한국 및 세계경제 영향 (2점)이러한 사태로 인해 미국 내 채권보증기관의 손실 급증 및 자본구조 악화로 인해 Ambac, ACA, FGICD을 비롯한 기관들의 신용등급이 하락하여, 신용경색이 크게 심화되며 금융 불안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미국 5위의 투자은행인 Bear Stearns, 158년의 역사를 가진 투자은행이자 증권회사인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 하였다. 또한 미국 3위의 투자은행인 메릴린치는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불과 이틀 협상으로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경영권을 넘겼다. 또 세계최대 보험회사인 AIG가 부실 누적으로 파산 위기에 몰렸으나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 투입으로 겨우 위기를 넘기는 등 금융 불안이 최고조에 도달 하였다.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는 파급이 전 금융권, 전 세계 금융 시장으로 광범위 하게 확산 되고 있으며,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위기를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위기로 진단하고 아직 끝이 안 보인다고 전망할 정도다.그리고 영화에서도 미국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의 대기업들이 파산한 점과 도산하는 중국 공장 및 기업들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 금융가의 탐욕이 가난한 미국인 뿐 만 아니라 더 가난한 중국의 공장 노동자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점을 보여준다.서브프라임 사태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실물부문과 금융부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실물부문을 살펴보면, 미국 주택가격 하락 및 자본시장의 침체로 미국의 가계와 기업의 부채상환 비중이 증대되어 민간소비 증가세가 둔화되고 기업 투자의 부진을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의 수입수요가 감소하여 주요 교역상대국의 대미 수출이 감소하여 세계 경기가 둔화되면서 한국의 대미 및 대 세계 수출의 감소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대미수출 상품구조가 저가의 공산품에서 자동차, IT제품 등 고가의 내구재 중심으로 전환됨에 따라 한국의 대미 수악재가 발생하여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다. 2011년 중동사태, 동일본 대지진 등 예상치 못한 충격과, 유럽 재정위기 확산 우려와 미국 경제의 더블딥 가능성까지 대두되는 등 향후 세계경제의 부진이 지속될 전망이다.?국제금융 체제와 기축통화 문제 (2점)이러한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달러의 위상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고, 이로써 더 이상 달러는 세계기축통화로써 기능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금융시장 혼란의 원인으로 달러기축통화에 의존한 현 국제금융체제가 문제점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달러의 세계 기축 통화 문제는 과거 1944년 7월 브레튼 우즈 회의에서 케인즈는 당시 미국 대표인 해리 덱스터 화이트의 ‘미국 달러 우월론’에 반대해서 ‘방코르 안’을 제안했다. 케인즈는 ‘초국가적 중앙은행’과 같은 기구를 창설하며 미국 달러의 패권에 반대했다. 방코르라는 이름의 초국가적 통화를 발행하는 초국가적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의 중앙은행이 그곳에 장부를 설정해서 무역결제를 하는 제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케인즈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달러가 기축통화가 되었다. 또한 브래튼 우즈체제의 존속이 힘들 때, 경제학자인 로버트 트리핀이 ‘유동성의 딜레마론’을 주장하면서 미국 달러의 일국 기축통화체제의 한계를 지적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 이후 세계 각국의 재정파탄을 유발시킨 결과 마침내 세계 시스템의 변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더 이상 미국이 달러 기축통화란 이점을 활용한 경제운영구조에 기댈 수 없음을 시사해준다.그러나 2009년 4월 런던 G20정상회의를 통해 세계는 달러화 공급확대를 통해 세계경제위기의 해법을 찾아서 2009년 3월 1조7천억 달러 규모의 1차 양적완화, 2010년 11월 6천억 달러의 2차 양적완화를 시행하면서 총 2조3천억 달러를 공급해 금융시장을 일시적으로 안정시켰다.그러나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지 못하고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달러화가 세계 곳곳으로 풀려 세계경제를 회복시키기보다는 고 국채 가치가 오히려 상승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불안정한 국제 금융 시장에서 각국은 무역적자를 회피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자국 통화가치 절하에 나설 경우 미국이 의도한 달러화 약세효과보다는 무역전쟁으로 비화되면서 국제적 갈등을 키울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미국의 가능한 추가적인 양적완화 자체가 달러화 약세로 귀결되기보다는 경쟁적인 자국 통화절하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키울 가능성이 더 큰 것이 현실이다. 1, 2차 양적완화조치로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서지 않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달러, 유로, 엔, 파운드가 주도하는 현 국제통화질서에서 배제된 국가들로선 절대 무역수지 흑자를 통화 외환보유고 확충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러화 중심의 현 통화 질서 하에서 신흥국들에겐 이는 국가안보문제이다.결국 달러기축통화제로선 현재의 세계경제위기를 막아내는데 한계가 있기에 앞으로 새로운 대안 모색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달러 중심의 기축통화체제는 멀지 않은 미래에 무너질 것으로 보인다.?2010년이래 유로권 위기의 원인 및 전개과정(2점)미국의 서브 프라임 사태로, 세계굴지의 투자은행들이 파산하면서 세계 각국은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취하고 국채를 발행해서 자본을 유치했다. 국가의 빚은 늘어나고 양적완화정책으로 나라 안에 돈이 많이 풀려 기업들은 투자를 늘리고 국민들의 소득과 소비가 늘면서 경제가 활성화되는듯했다.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 했다. 금융위기로 인한 급격한 경기침체로 세수가 줄어들었고, 금융위기극복을 위한 구제 금융에 막대한 돈을 쓴 대가로 미국도 유럽도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 중에서도 재정적자가 심한, 일명 ‘PIGS'라 불리는 포르투갈, 이태리, 그리스, 스페인의 부도 위험성이 거론되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가 가장 심각했다. 물론 직접적으로는 그리스가 방만한 재정운용과 과잉복지로 적자경영을 심하게 했다는 것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수익이 악화되면서 적이다.
《현실적 정치가 ‘풍도’》도나미 마모루 저, 허부문 역, 『풍도의 길』 소나무, 2003. 06. 07.나는 서평에 쓰일 책을 고르기 전, 풍도가 무엇인지 몰랐다. 이것이 사람의 이름인지? 역사적 사건의 이름인지? 궁금했다. 그리하여, 자료를 검색한 결과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는 중국 오대 십국 대의 인물로,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기를 살아갔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역사적 활약을 한 인물이기에 11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언급되는 인물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풍도에 대해 검색하면서, 풍도가 인쇄술의 발달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을 알았다. 또한 역사적으로 굉장히 특이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에, 『풍도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다.우리는 역사를 통해 난세를 살아가는 영웅이나 영웅들을 훌륭하게 보필했던 명신들의 이야기를 쉽게 접하게 된다. 특히 중국의 역사를 통해서 요?순 임금부터 유명한 삼국시대의 유비와 조조 그리고 현대의 등소평에 이르기까지 영웅이라 할 만한 군주들과 관중, 악의에서부터 번쾌, 제갈량 등 뛰어난 재상, 신하들을 접할 수 있다. 그러한 인물들은 서로 다른 시, 공간 속에서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다양하며 엇갈린다. 하지만 모두 자신의 비범한 역량과 노력으로 놀랄만한 업적들을 이루어 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이에 비해『풍도의 길』을 통해 접한 풍도라는 인물은 너무 독특하게 느껴졌다. 풍도는 “네 왕조와 여덟 명의 천자를 모셨으며, 박학다식 했고, 만인과 다투지 않았다”는 말로 짧게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점이 흥미롭다. 이는 여러 왕조를 섬기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고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고대에 유명한 역사가들은 대부분 ‘忠(충)’을 최고의 신념으로 삼는다. 그런데 그는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일으켰던 번쾌나 열세였던 촉한을 이끌었던 제갈량, 충이라는 유교적 가치를 위해 목숨을 내던졌던 사육신이나 하다못해 조조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악을 쓰며 죽어간 위나라의 길평과 같은 충성심과 대나무 같은 고집도 찾을 수 없다.다시 말해 기존의 역사관, 즉 유교사관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대학생인 나의 입장에서 풍도는 높은 가치를 가진 인물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풍도라는 인물은 정치가의 비상한 모습과 덕목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사고가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풍도는 난세를 살아간 인물로써 유복한 가문의 자제는 아니었다. 또 남들을 압도할만한 카리스마나 영웅적 자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가 오늘날에도 이름을 남긴 이유는 매사에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남들을 밟고 올라선 것이 아니라 중용의 도를 지키고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후한 말의 유비가 생각났다. 하지만 유비는 황실과의 혈연관계가 있었다. 또 그의 부처님과 같은 용모와 행실에는 남다른 야망이 감춰져 있었고, 난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풍도와는 다르다. 이렇듯 내가 아는 역사적 인물들 중에서는 풍도와 비슷한 유형의 인물은 없다. 따라서 풍도라는 인물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이제부터 풍도라는 인물의 다섯 가지 모습을 통해 그의 인물됨을 정리해 보겠다.첫 번째, 후당의 민제가 이종가에게 쫓겨 궁 밖으로 달아났을 때, 풍도는 노도라는 사람에게 이종가를 왕위에 추대한다는 문서를 서둘러 쓰도록 명령했다. 두 번째, 고조 석경당 아래서 재상을 지내고 있을 때 사신으로 거란을 방문했던 때이다. 세 번째, 고조가 풍도에게 자신의 아들 석중예를 부탁하고 죽었을 때이다. 네 번째, 풍도의 말년을 읽으며 ‘천도(天道)’라는 시를 접하고 나서이다. 다섯 번째, 풍도가「장락노자서」에서 밝힌 ‘군주에 충성’과 ‘나라에 충성’ 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서이다.먼저 민제가 이종가에게 쫓겨 달아났을 때의 풍도를 보겠다. 그 때 풍도는 이종가가 아직 입궁하지도 않았는데 노도라는 사람에게 이종가를 왕위에 추대한다는 문서를 쓰도록 했다. 더군다나 그 때 풍도는 민제 아래서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지조 있는 신하’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듯한 행동은 난세를 살아가는 눈치 빠른 지식인의 발빠른 행동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풍도는 그 전에 비록 안중회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기는 했어도 명종에게 이종가를 벌주라는 주청을 올린 적이 있었다. 이에 이종가는 풍도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풍도가 이종가를 왕위에 추대한다고 해도 이종가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충성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풍도는 그 일과 관련해서 노도와 입장이 부딪히자 “모든 일은 실무를 중시해야 하네!”라는 말을 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주인과 그 주인에게 목숨을 다해 충성을 바치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정말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을 통해 풍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하지만 이러한 풍도의 국가위주의 세계관은 이후 그의 일관된 행적을 감안하면 오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또한 이 일을 통해 풍도를 지조와 절개가 부족하고 단순히 관료로서 자신의 업무에만 최선을 다하는 인물로 간주하기 힘들다. 풍도가 고조아래서 재상 자리를 맡자마자 사신으로서 거란을 방문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을 때 보여준 풍도의 행동은 그가 개인의 사욕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며, 또한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어쩌면 평생 호랑이 굴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는”그 일을 꺼리고 있을 때, 풍도는 자신을 사신으로 거란에 보내는 임금의 결정이 내려지자 “신이 간다고 아룁니다.(臣道自去)”라는 말을 올려 보내고 떠나는 날에는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거란 땅으로 떠났다. 그리고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다음에 거란 태종 야율덕광이 풍도에게 거란의 신하로 남기를 권하자 완곡하게 거절하고 일부러 거란 땅에 오래 머물러 있을 것처럼 행동했다. 이처럼 현명하게 처신하여 양국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고 귀국했던 것이다.하지만 이렇게 나라를 위해서는 제 한 몸 아끼지 않으며,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지만 풍도는 군주 개인이나 그 왕조(혈통)를 위해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고조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풍도에게 자신의 아들 석중예를 품에 안도록 하여 뒷일을 부탁했던 것과 이후 풍도가 고조의 형의 아들인 석중귀를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한 일을 통해 드러난다. 중국 역사를 통해 임금이 죽으면서 나이 어린 후계자를 믿을만한 신하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 신하에 대한 더 없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부탁을 받는 신하는 자신을 믿어주는 임금의 은혜를 더 없는 영광으로 여기며 그 책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의 전제군주였던 무제가 소제를 곽광, 김일제, 상관걸 등 삼인에게 부탁하고 임종했던 것은 무제의 곽광 등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삼국시대에는 촉의 유비가 자신의 아들을 제갈량에게 부탁했고 제갈량은 그러한 유비의 바람을 져버리지 않고 어리석은 유선을 끝까지 보필했던 것은 모두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여하튼 풍도는 고조의 부탁을 받고도 경연광과 협의해 “국가가 어려울 때일수록 나이 든 군주를 세워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풍도가 고조의 부탁을 외면한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등 권력을 향한 개인의 욕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내린 결정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석중귀가 후진의 소제로 등극한 이후에 경연광이 모든 것을 자신의 공적으로 내세우며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풍도는 권력 경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풍도라는 인물이 충(忠)이라는 잣대로 다루기는 어려운 인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풍도는 권력다툼에 참여하거나 자신을 높이는 일에 열중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학다식하고, 남들과 다투지 않으며, 청렴하고 국가와 서민을 생각하는 그의 자질과 품성은 그를 “때로는 천자 자신이 별로 원하지 않더라도, 풍도를 재상의 자리에 앉혀 두어야만 일이 수습되는 경우도 있을”정도로 만들었다. 그는 천도(天道)라고 제목을 붙인 시에서 ‘모든 일의 이치는 하늘의 도리에 분명히 정해져 있으니 힘들다고 탄성을 지르지 말고, 단지 할 일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풍도는 세상의 이치를 고민하여 억지로 꿰어 맞춘 자신의 논리를 하늘의 논리인 양 세상에 강요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에 자신을 맞겼다. 단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최소한의 도리를 누구보다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검소하고 자신의 식읍을 가난한 서민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백성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그의 모습은 제갈량의 검소함에 비견되며 겉으로만 민심을 외치며 뒤로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웠던 수 많은 영웅, 명신들과 대조된다.풍도는 「장락노자서」에 ‘집안의 효도’와 ‘나라에 충성’이라고는 썼지만 ‘군주에 충성’이라고는 쓰지 않았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풍도 자신의 기회주의적인 면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논리는 아니다. 중국의 역사는 난세와 혼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대십국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도 드물 정도로 엄청난 난세였다. 한편으로 삼국시대의 유비와 여포가 똑같이 여러 번 주인을 바꿨으나 여포는 지조 없는 무부로 낙인찍혔다. 반면 유비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 것을 지조를 버리는 사실적 행동을 좋은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개인적 능력과 연관해서 생각했을 때, 임금에 대한 절개나 왕조에 대한 지조라는 것도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현재 글을 쓰고 있는 비평가들의 결과론적인 탁상공론에 불과한 허구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극한 난세에서 지조와 절개라는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기 보다는 풍도는 자신의 신념을 보다 ‘현실적인’ 위치에 놓는 것이 솔직한 태도라고 하겠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십자군 전쟁은 봉건제도와 가톨릭교회로 안정을 이룬 유럽사회가 그들이 갖게 된 힘을 쏟고자 시작했다. 전쟁의 시작은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를 지난 기간 이슬람교도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11세기 무렵 셀주크투르크족이 이슬람 지역의 지배자가 되자, 순례자들을 방해하였다. 이에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을 공격했으나 황제가 포로가 되는 등 이슬람 세력의 행위에 대한 규탄을 하지 못했다. 그 후 교황이 이러한 상황을 불명예이고 동방 교회를 도와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11세기에서 13세기 동안 지겹게 펼쳐진 전쟁 중에서 전쟁 중에서 영화의 배경은 2차 십자군 전쟁 중 하틴 전투를 배경으로 한 Faction이다.영화는 인간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신의 뜻으로 해석하고 스스로 자멸해가는 모습과 십자군과 이슬람군 사이의 전쟁이 무의미함을 보여준다.주인공 발리안은 구원을 하고자 예루살렘을 갔을 때 그에게 예루살렘은 모든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예수가 처형된 장소에 가도 어떠한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에 예루살렘은 발리안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서구인들에게 예루살렘은 구원과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기에 그들의 욕망이 모든 것이 되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탐욕에 눈이 멀어 예루살렘을 독차지 하려고 했을 때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 이는 영화 속 발리안과 살라딘의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시작된 전쟁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이는 피와 살육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0. 서론2-1. 본론1) 인간 김대중2) 김대중의 대북관 및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3) 햇볕정책의 개념 및 특징4) 햇볕정책 추진현황5) 햇볕정책의 한계2-2. 본론1)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2) 여성부의 한계3. 결론1. 서론2012년 올해는 대한민국을 운영하는 수장과 의원들을 뽑는 중요한 해이다. 총선은 이미 끝났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라는 큰 선거가 있기에 요즘 대한민국은 한창 들썩거리고 있는 중이다. 각 정당은 유권자들에게 국가의 비전과 전망 그리고 국민을 위한 복지에 대한 정당만의 목표를 주장한다. 유권자들은 각 정책의 비교를 통해, 그들의 권리를 행한다. 국민의 선택에는 정답은 없다. 하지만, 선출되는 국민의 대표에 따라 향후 대한민국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를 것이다. 필자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에 대해 생각을 하며, 60여 년 동안, 각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마다 너무나도 뚜렷한 득과 실이 있음을 알았다. 필자는 김대중 대통령(이하 김대중이라 칭함), 국민의 정부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필자는 김대중에 대해 한 번도 정치인으로써 깊은 생각을 해본 적 이 없었다. 필자의 아버지는 맹목적으로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믿고 지지한다. 선거 기간이면 각 정당의 정책과 후보에 대한 비교 없이 노골적으로 보수를 지지를 하신다. 물론 야당에 대해서는 모든 일에 반대의사를 표명하신다. 그래서 김대중 정권이 집권했던 필자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하면, 필자는 항상 김대중을 향해 욕을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필자는 불과 얼마 전 까지도 김대중을 나쁜 사람, 우리 가정 형편을 어렵게 한 사람, 아버지가 미워한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실제로 김대중에 대해 아는 것 이 없었다.그리하여 이번 보고서를 통해, 김대중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역사적 인물이지만,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김대중에 관한 사서나 신문기사들의 대부분이 편향적이다. 이러한 점을 인지하고, 여러 각도에서 김대중이라는 인받은 바 있다.2) 김대중의 대북관 및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김대중의 대북관 및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을 살펴보기 전에 해방 후 우리나라 정권이 행해온 대북정책을 살펴보겠다. 지난 50여 년 간 남북한은 상대국을 상호 생존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서로의 이익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국제적 협력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웠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상대국을 자국의 생존에 대한 위협적 존재로 인식하여 안보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양국 간에는 항상 긴장과 갈등이 존재했고, 그 목적은 상대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냉전의 종식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인해 노태우 정권부터는 북한과의 평화적 정책을 만들고자 하였다. 노태우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북한과의 평화정책이 김대중 정권엔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발전되어 이루어졌다.그러나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과 6.23 공동선언), 1992년의 남북한 기본합의서), 1992년의 남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등은 이러한 상대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전략적으로는 국제적 협력이라고는 정책수단을 취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합의 역시 남북한 양국이 상대국을 자국의 안보에 대한 위협적 존재로 인식하여 상대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다만 전략적으로는 양국 간의 협력이라고 하는 정책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대결적 국면에서 상대국을 신뢰하지 못하고 각자의 이익을 더욱 중요시하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합의서나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김대중은 1970,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성장해 왔으며, 그의 대북정책관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면서 체계화 된다. 그의 대북정책관은 시기별로 4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김대중의 대북관은 대체로 전임 정부들과 다르다.김대중의 남북관계에 대한 입장 표명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유엔의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3원칙을 기조로 하여 튼튼한 안보의 토대위에서 안보와 화해?협력을 동시적으로 추진해 나가자는 것이다. 셋째, '햇볕정책'은 우리가 능동적, 자발적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 나간다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가장 적극적인 대북 참여정책이다.4) 햇볕정책 추진현황)국민의 정부는 지난 50년 이상 한반도를 지배해왔던 냉전구조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한반도의 평화확보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대북정책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대북정책을 세 가지 원칙)아래 북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평화를 확보하고자 했다. 국민의 정부는 당장 북한을 붕괴시켜 흡수통일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목표 아래 추진하였다.첫째, 정경 분리 원칙하에 민간기업의 북한에서의 상업적 거래를 개방하였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당국 간 대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민간이 먼저 접촉하고 교류하는 것을 권장했다. 그리하여 남북한 간에 보다 많은 접촉과 대화와 협력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북한 땅에 시장경제의 씨앗을 심고 가꾸어 자라나게 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당국 간 회담으로 나오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과거 서해교전) 사태와 금강산 관광사업의 동시 추진은 정경분리정책의 예로 볼 수 있다. 정경분리정책에 대한 비판은 많지만, 지속적인 신뢰구축으로 북한의 변화를 유도, 평화공존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둘째, 상호주의) 원칙하에 남북이 주고받는 방식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북한의 핵개발 포기와 연계된 경수로건설 지원 사업이 있으나, 정부차원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지원이 이루어질 정도로 남북관계가 진전되지 못했다. 정부는 남북의 국력격차가 현격한 현실에서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상호주의를 적용하여 전술적 융통성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단위 : 만 달러)셋째,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동포의 식량난 해결을 지원하였다. 국민의 정부는 국제기구를 통한 간접지원보다는 직접지원을 통해 남북관계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을 잡았다북한 간 화해와 교류 협력의 촉진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군사적 대립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 의지 등은 한국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할 뿐만 핵전쟁의 위기를 유발했으며, 분쟁관계에 있는 중동지역 국가들의 핵보유를 촉진시켜 전 세계적으로 핵 위협을 초래할 가능성을 열었다.둘째, 국민의 정부는 ‘평화, 화해, 협력’이라는 대북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에 대한 원조 등 경제적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다. 김대중 취임 후 처음으로 시행된 대북 비료지원을 하며, 이산가족 상봉을 제의하였다. 이는 취임 후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상징적 의미와 아울러 향후 북한에 대한 지원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제안이었다. 뿐만 아니라, 식량부족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북한에게 비료제공이란 북한의 절실한 제안도 있었다. 그러나 비료를 지원받은 북한은 이산가족 문제는 향후 별도의 해결과제로 활용하고자 했으며, 무조건적인 비료지원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국가 간 합의를 저버리고, 당시 통일부 장관인 강인덕 장관에 대한 인신공격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또한, 로동신문을 통해 김대중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난함으로써 과거의 적대적 관계로 회귀할 것이라고 표명하였다.) 또한 인민들을 위해 지급된 대한민국의 정부미는 북한군의 군량미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김대중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지속적으로 금전적 지원을 하였다. 지원을 하는 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원의 시점은 잘 못 되었다. 당시는 IMF 여파가 존재했고, 국민들의 실제 삶이 많이 나아졌다고 주장하기는 힘든 시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국내적 갈등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비용도 상당부분 떠안게 되었다.또한 북한은 햇볕정책에 대해 근원적인 불신과 적대감을 갖고 있다. 첫째, 햇볕정책이라는 단어에 대한 근본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햇볕정책은 결국 누군가의 옷을 벗기겠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로동신문은 “누가 벗어야 하는가?”하며 크게 반발.)< 국회 및 지방의회 여성의원 비율 > (단위 : 명)(출처 : 중앙 선거 관리 위원회,「국회의원선거총람」, 제18대 국회의원선거 당선자 현황, 「지방의회의원선거총람」각 년도,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선자현황」)이러한 결과로, 김대중 정권 이후에 여성의 정치, 사회 참여 비중이 늘어났다. 이는 현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얼마 전 총선에서 여당, 야당의 수장이 모두 여성이었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과 비교했을 때, 이제 정치계에서 여성의 힘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또한 재계에서도 여성 CEO와 임원의 비중은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여성부를 만들고, 조선시대 이후 낮아진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킨 영향으로 볼 수 있다.여성의 권리 향상은 대한민국을 민주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장관과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개국 이래 처음이다. 남성들로만 운영되던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이 등장한 점은 김대중 정부의 큰 업적으로 본다. 또한 가구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가구주의 비율도 김대중 정부를 기점으로 급속도로 증가한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여성권 신장 정책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출처 : 여성가족부(2009))2) 여성부의 한계하지만 여성부의 한계점은 많은 문제를 양산했다. 국민의 정부의 여성관련 공약이 공약(空約)이었음을 드러난다. 재임 중 여성장관 4명을 임명하겠다던 선거공약은 첫 내각 구성부터 지켜지지 않더니 급기야 1명으로 축소되었다. 이어 임명된 차관 인사에는 여성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전문성 있는 여성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인데,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장의 의견조차 묻지 않은 것을 보면 능력 있는 여성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 이는 당시 여당인 국민회의의 총선 공천과정에서도 여성 할당이 지켜지지 않은 점을 통해 알 수 있다.또한 불특정 다수에 의해 징수된 세금을 여성이라는 특정 조직만을 위해 사용 된 점이다. 여성부에 할당되는 세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