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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의 음악
    독일의 음악목차1.독일음악의 역사2.독일음악의 성격3.독일의 음악가1)헨델6)바그너2)바흐7)리하르트 슈트라우스3)베토벤8)베버4)브람스9)슈만5)멘델스존1. 독일음악의 역사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독일어 노래는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독일이 그 고유의 음악에 의해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3세기의 미네젱거(기사계급의 음유시인)이후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에는 상공업자인 마이스터징거가 세속 가곡 분야에서 활약했다. 한편 다성 음악의 발달은 이탈리아나 프랑스보다 훨씬 늦어 겨우 14세기 들어와서 나타났다. 15세기에 접어들어 콜라트 파우만을 비롯한 오르간 음악과 이자크를 중심으로하는 다성적 성악이 결실 하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독일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루터 등이 고안한 찬송가(코랄)가 그 후 독일 교회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17세기 바로크시대에는 새로운 양식이나 형식이 주로 이탈리아에서 생겨나 독일도 그 영향을 받게 되며, 바흐의 이전의 독일 최대의 거장 쉬츠도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모노디와 협주 양식 등을 독일에 들여왔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독일 특유의 깊은 정신성을 표현하였다. 바로크 시대 독일은, 쉬츠나 프레토리우스 등의 교회성악곡과 함께 건반, 특히 오르간 음악에 뛰어난 작품을 낳게 되었다.18세기 중엽부터 음악의 양식은 뚜렷하게 변화하여 복잡한 대위법 대신에 명쾌한 형식이나 화성이 중시되었다. 북부 독일에서 활약한 에마뉴엘 바흐와 슈타미츠를 중심으로 한 남독일의 만하임악파 등이 이 새로운 양식을 써서 고전파를 준비했다. 그리하여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이르러 고전파의 양식이 완성되고, 베토벤이 그것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독일음악은 국제적인 지위에 도달하였다. 19세기의 낭만파에서도 독일음악의 지도적 지위는 점점 강화되었다. 베버가 독일 국민오페라를 확립하였고, 슈베르트는 독일 리트[가곡]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주관적인 감정표현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정신은 독일인의 성격에 어울렸기 때문에 그 후에도 썼다. 또한 바흐는 아내를 두 번 맞이해 자녀를 20명이나 낳았지만, 헨델은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바흐의 사생활은 비교적 소상히 알려져 있으나,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한 헨델은 특히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노출시키지 않아 전기 작가들은 그의 전기를 쓰는데 자료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오라토리오 ≪메시아≫로 널리 알려진 헨델은 그때까지 음악의 모든 요소를 기반으로 하나의 새로운 음악 세계를 비약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이러한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려는 욕심을 가졌다가 그의 음악적인 재능이 너무 뛰어나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20세를 전후해 이탈리아에서 음악 공부를 한 그는 건반 악기 주자로 이름을 떨치다가 하노버 궁정 악장의 자리를 차지했고, 1710년 영국을 방문한 이래 그곳에 머무르면서 앤 여왕의 비호를 받으며 오페라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의 재능을 질투하던 이탈리아 악파 사람들의 음모 때문에 여러 번의 파산과 죽을 고비를 당하기도 했다. 여하튼 그는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살면서 오페라, 오라토리오 등 많은 작품을 썼으며 1726년에는 영국에 완전히 귀화했다. 헨델은 거대한 체구에 걸맞게 스케일이 크고 호쾌한 음악을 많이 발표해 당시 문화나 산업면에서 세계의 중심이었던 영국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독차지했다. 특히 그의 필생의 대작이었던 ≪메시아≫는 그의 생존시 34회나 공연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조지 2세가 감동한 나머지 기림을 했던 '할렐루야 코러스' 대목은 아직까지도 세계 각국의 청중들을 기립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영국에서의 헨델의 영향력은 너무나 커서 근세에 에드워드 엘가가 나오기 전까지 그 나라에서는 작곡가다운 작곡가가 거의 나오지 못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표절의 상습범'이라는 거장답지 않은 오명을 지녔던 그는 67세 때 완전히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 활동과 오르간 연주를 계속했고, 7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모든 국민의 애도 속해와 일화가 남아 있다. 음악가에게 가장 귀중한 청력을 잃었으면서도 그의 작곡활동은 더욱 활발해지고, 사교계를 떠나 오직 창작에만 진력하였다. 33세때 쓴"영웅교향곡"은 나폴레옹에게 헌사하려던 것으로 웅대한 구상과 강렬한 생명력은 청춘을 압도하는 탁월한 예술가의 혼의 기록으로서 그의 필생의 대작이었다.그런데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이 되려하여 그 세속적 태도에 영우의 이미지가 사라지자, 분개하여 헌사할 것을 취소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의 중기는 형식상 하이든, 모짜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30세 번후의 초기에 비해 고뇌, 투쟁, 비창, 승리 등을 연상시키는 심각한 걸작들 즉 교향곡 "운명", "전원", "피아노 소나타", "비창", "월광곡", "열정", 피아노협주곡 "황제", 가극 "피델리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후원자이던 귀족들도 몰락하자 그의 만년은 고생이 계속되었으며 무게와 표현의 강렬도를 더하여 낭만주의의 경향이 힘차게 나타나다가, 완전히 청력을 잃은 뒤로는 홀로의 고독한세계에 들어 박혀 일반인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만큼 명상적인 작품을 쓰고 있었다. 1827년 3울 24일 그는 격렬한 뇌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쓸쓸하게 57년의 생애를 독신으로 마쳤다. 그는 하이든과 모짜르트에 의해 거의 완성된 고전주의 음악을 더욱 강한 개성을 발휘, 결정적인 거승로 하였으며 음악을 단순한 오락과 취미에서 끌어올려 계시로 만드는 데 성공, 그 회유에 천재성을 나타냈었으며 수다한 숭배자와 음악가를 낳게 하였다. 작품으로 교향곡 9, 피아노 소나타 32곡, 협주곡, 실내악, 서곡 등 다수의 곡이 있다.♪브람스 함부르크 출생.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고, 7세 때 O.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0세 때 음악회에 나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자, 부모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재능을 이용하여 치부(致富)할 생각이었으나 코셀은 이를 반대하고 그의 스승인 E.마르크센에게 브람스를 사사받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는 작곡법, 고전음악의 가치, 음악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이에 대한 사의로 그 이듬해 《대학축전서곡》(작품 80)을 작곡하였다. 이어 1890년까지 《비극적 서곡》(작품 81), 《피아노협주곡 제2번》(작품 83), 《현악 5중주곡》(작품 88) 등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1890년부터는 체력과 창의력의 쇠퇴를 자각하고 대곡의 창작을 단념, 신변 정리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1891년 3월 뛰어난 클라리넷 주자 R.뮐펠트의 연주를 접하자, 다시 영감과 창의력을 얻어 1891년 《클라리넷 3중주곡》(작품 114) 《클라리넷 5중주곡》(작품 115)과 1894년 두 곡의 클라리넷소나타 등 일련의 클라리넷을 포함한 실내악곡을 쓰게 되었다. 1896년 3월 그의 평생의 친구인 클라라가 졸도한 후 병세가 악화되자,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성서를 토대로 한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 121)를 작곡하였다. 5월 20일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오르간용의 종교적인 오르간곡 《11의 코랄전주곡》(작품 l12)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1897년 4월 3일 마침내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오페라 이외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의 음악은 독일음악의 전통을 보수적일 만큼 존중하며, 견고한 구성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주의적인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때로는 북독일적이며, 때로는 빈(Wien)적이지만, 인간 브람스의 피가 흐르는 매우 소박한 풍격이 그의 음악의 큰 매력이 되고 있다. 그만큼 브람스의 작품에서는 호화스런 색채감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프로테스탄트 신자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이면서도 죽음의 예감이 감도는 장중한 작품들이 많으며, 특히 만년에 발표한 성악곡에는 이러한 것들이 많다. 브람스는 낭만주의의 화려한 시대에 있어 고전파음악의 전통을 지킴으로써, 시대의 풍조에 휘말리지 않는 독자적 작풍을 견지한 작곡가이다. 또한 그는 R.슈트라우》(서곡 1824, 기타 부분 1842) 《안티고네》(1840) 외에 합창곡 ·독창곡 등이 있다.♪바그너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18세 때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들어가 음악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8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첫 오페라 《혼례 Hochzeit》를 프라하에서, 1834년에는 제2작인 《요정 Die Feen》을, 1836년에는 제3작인 《연애금제(戀愛禁制) Das Liebesverbot》를 뷔르츠부르크에서 완성하였다. 1836년 여배우 미나 플라너와 결혼하였으나 불행하게 끝났고, 1839년 《리엔치 Rienzi》를 작곡하던 중 러시아령(領)의 리가에서 파리로 갔으나 생활은 불우하였다. 그러다가 1842년 《리엔치》가 드레스덴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궁정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방황하는 네덜란드 사람 Der Fliegende Hollander》을 직접 지휘하여 초연했고(1843), 다음 작품 《탄호이저 Tannhauser》는 1845년에 상연되었다. 또,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여겨지던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지휘하여 그 진가를 일반에게 알렸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바그너도 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렸다. 이를 미리 알고 피신하여, 리스트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다가 스위스의 취리히로 갔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를 돌봐준 베젠동크부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베젠동크가곡집》과 악극(樂劇)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에 담아 승화시켰다. 한편, 1850년에는 바이마르궁정극장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로엔그린 Lohengrin》이 상연되고, 1861년에는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 《바카날》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오페라극장에서 3회나 상연되었다. 또 같은 해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상연을 위해서 빈에 가기도 했으나 상연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예체능| 2007.04.27| 8페이지| 1,000원| 조회(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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