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 도Chapter 10 평신도 훈련의 전략적 가치교회는 오랫동안 제자의 개념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대사명(마 28:18-20)을 통해 제자화 운동은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확산되었다. 제자도는 믿는 자의 삶이요 걸어가야 할 과정이요 끝까지 지향해야 할 목표이고 교회 사역 자체이다. 제자도는 펴인도의 자아상을 재건하는 성경적인 기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제자화 전략은 평신도를 정예화하자는 운동이며 예수님의 제자화 전략과도 일맥상통하다.Chapter 11 예수님과 그의 제자예수님의 공생애는 제자를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는 선교활동을 계속할 그의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몸이 되었고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하여 복음 사역이 계속되고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했다. 예수님은 미숙함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권위있는 파송을 단행하시며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교훈을 가르쳐 지키라는 대사명을 주셨다. 그만큼 소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Chapter 12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라는 개념신약성경에서 제자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사용되고 있다. 마태는 광의적인 의미로 모든 신자들이 교역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항상 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마가는 협의적인 의미로 열두 명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제자로 부르지 않았다. 요한은 협의와 광의 적인 의미 모두를 사용하고 있다. 누가는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들어온 신자들을 묘사하는데 사용했다. 서신서로 넘어가면 제자라는 이름이 사라진다. 하지만 제자도의 의미를 담긴 표현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Chapter 13 믿는 자는 다 제자인가?예수님이 요구하신 제자도의 길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모두 해당된다. 이 점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대사명과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은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는 것이다.Chapter 14 인격적 위탁자제자도란 정의라기 보다 실제 생활 속에서 구현되는 산 진리이다. 제자도는 예수님에게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는 인격적 위탁이 들어있다. 이것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소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을 따라 가기를 원하는 제자는 단번에 결단을 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또한 그가 치러야 할 대가를 미리 계산해야 한다. 그것은 싸움, 선택의 희생, 십자가를 지는 일, 생명을 바치는 모험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을 따라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포기하는 전적 위탁이다. 이 위탁은 인격적 위탁으로 평신도를 제자화한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에게 인격적으로 전부를 맡기고 복종하는 사람을 만든다는 의미이다.Chapter 15 복음의 증인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위임한 궁극적인 일은 그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기는 서령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전도나 고백이 성령의 내적 충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모든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신약성경은 전도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에게는 예수를 증거하는 일은 본능적 소산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평신도를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 전 생활영역에서 고백하고 증거하는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도 영적지도자가 될 수 있다"1. 지도자로서 합당한 자는 누구인가?지도자는 완전하고 완벽한 자가 아닙니다.하나님은 그 계획과 목적을 사람을 통해 이루십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십니다. 이에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순종'이 필요합니다.모세를 볼 때 모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스스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자들을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된다고 하셨습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범사에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든지 해결해 주시고 결국엔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기드온의 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드온은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 6:15)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너의 신분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너를 통하여 반드시 이 일을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을 위해 불러 주시되 친히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예레미야를 부르시는데 있어서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렘1:6)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을 주십니다.(렘1:7~8)하나님께서 그 사역에 일꾼을 부르실 때 하나님에게는 가족 배경이나, 약점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게 될 때, 결코 부족하다는 생각이나 "보잘것없는 배경'을 가졌다는 것을 이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골1:9-10 둘째로 지도자는 그가 이끄는 사람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세계 각처에서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9:36-38교제의 마지막 요소는 순종입니다. 순종함이 없이 높은 이와의 교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의 순종의 삶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이와 같이 교제의 세 가지 요소는 말씀과 기도와 순종입니다. 이 세 가지는 지도자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요소들입니다.형제자매님들도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지도자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들리어진 병기와도 같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로서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3. 지도자의 내면 생활지도자에게 있어서 필요한 내적 자질은,첫째, 순결한 삶입니다. 지도자는 그의 행동이 말씀의 수준에 따르는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하나님은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들어 쓰시기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8장, 10장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a)그것이 과연 유익할까? b)그것이 나를 지배하지는 않을까? c)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지는 않을까? d)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면서 생활한다면 여러 유혹들로부터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둘째, 지도자의 내적 자질 가운데 중요한 특징은 겸손입니다. 교만은 사람의 시야를 굽게 하여 최선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처럼 교만한 마음은 참다운 분별력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자기 만족에 빠지게 하여 가르치려고만 들지 겸손히 배울 생각을 앗아갑니다. 결국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되고 불안정하게 되어 계획이 실패하거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정체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순수한 마음으로 찬양의 삶을 살 때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마20:25~28)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지도자는 섬기는 자로 가르치고 있습니다.지도자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민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때때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 평가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자기와 같은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해야 하며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아야 합니다.살전5:14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첫 번째 종류는 규모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어린아이로서 그는 도움을 계속 받을 필요가 있고 지도자는 엄청난 인내와 기도로 그를 끝까지 도와줄 책임이 있습니다.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마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지도자는 그러한 자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결국에는 그들도 믿음의 깊은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맛볼 수 있도록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장 최선의 방법 중 한 가지는 믿음으로 주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통하여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은 힘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늘 붙어 다니는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들은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들로서 때로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이들은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나눔으로써 문제가 해결됩니다.종의 태도와 민감한 마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데 있어서 극히 중요한 것들입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자 한다면 이러한 두 가지의 성품들이 삶에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게 인격화되어야 합니다.5. 탁월한 수준의 지도자뛰어난 지도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 세 가지1) 탁월성지도자로서의 탁월성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즉 지도자에게 필요한 탁월성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이며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본받아 그와 같이 되도록 힘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범사에 탁월한 수준으로 성취하려는 태도는 바로 그생각하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지도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내다보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이 모든 근본적인 자원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3) 창의력창의적인 태도를 소유하기 위한 방법은 당신 자신이 범사에 깊은 관심 가운데서 끊임없이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개방적이고 탐구적인 자세를 계속 가져야 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담대함과 용기를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깊고도 긴밀한 교제하는 삶을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입는 것입니다.6.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하나님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첫째 원리는 전심으로 행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정적이며 전심으로 따르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따라서 지도자는 그의 삶 전체에서 전심전력하는 태도를 명백히 보여 줌으로써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범사에 그러한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둘째 원리는 일심으로 행하는 태도입니다. 일단 중요한 일에 임하게 되면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태도입니다.일심으로 행해야 할 이유는 성경 세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a.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10)b.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에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야고보서 4:14)c. 우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5:58)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똑바로 좁은 길을 걸어갈 때 비로소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한 가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간증은 그러한 태도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이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셋째 원리는 감투정신입니다. 도저히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의 열정을 가지고 굽힘 없이 밀고 나가는 다.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기도 응답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행동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춘 것입니다.셋째,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계획은 신중하게 생각하여 세워야 하며, 사람을 조직하는데 있어서는 충성된 사람들을 찾아야 합니다.(딤후2:2) 일을 인도하고 참여하는데 있어서는 솔선 수범하여 본을 보여야 하며, 지도자로서의 책임 및 평가는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역 자들을 나처럼 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키워주어야 합니다.지도자로서의 성공 여부는 당신이 그 그룹을 이끌면서 또 다른 지도자, 즉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양성해 놓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8. 어떻게 최대의 성과를 거둘 것인가삶 가운데서 많은 분주한 일에 휩싸여 있으면서 우리는 여유를 찾고 있습니다.우리의 생활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비결입니다.1) 지금 즉시 하라.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당장 하지만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지금 즉시' 처리해야 하며 급한 일과 중요한 일 사이에서 중요한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2) 필요를 채워 주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뢰하라.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임무를 주실 때는 우리들을 도울 사람들도 함께 주십니다. 이들은 주님을 위하여 주님께서 주신 조력자, 동역 자들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틀림없이 그것을 실행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3) 장애물이 아니라 목표에 초점을 맞추라.세 번째 원리는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 혹은 사물을 보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어쩌면 반드시 장애물이 있게 마련입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때에 그 일에 매달려 있는 문제들을 먼저 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다.
현대 교회와 평신도서론교회의 부흥은 부패와 세속화를 걱정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이러하다. 교회는 빛과 소금의 구실을 바로 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평신도이다. 그러나 평신도는 오늘의 교회에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긍정적으로는 최대최선의 잠재력이 있지만 부정적으로는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편으로 발전하던지 전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교회의 개혁은 교혁자의 개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본서를 통해서 한국 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기대해본다.Chapter 1 문제와 도전 : 20세기 중반부터 시작하여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많은 환란 가운데서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열매였다. 한편 오늘날 한국 교회는 걱정과 비판의 소리가 자주 들리고 있다. 그 이유는 제2의 부흥기를 맞으면서 양적 성장에만 매달렸던 한국교회가 좋은 낙관론을 펴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양적 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허수, 허세, 허상의 삼허현상을 겪고 있다. 허수는 통계에 통탄할 정도로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고 허세는 사회 각 분야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많은데 영향력이 미미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허상은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지 못해 불신자와 그 차별성을 구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지금까지 이룬 값진 부흥을 헛되이 돌리지 않기 위해서 더 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전진하기 위해서 교회는 옷을 갈아 입어야 한다. 우리가 갈아 입어야 할 옷은 교회의 주체요 얼굴인 평신도를 예수의 제자로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Chapter 2 귀중한 각성 : 20세기 들어와 새로운 빛을 던진 각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평신도 운동이다. 평신도 각성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급속도로 팽창해 가는 현대 사회 구조 안에서 평신도가 지닌 증인으로서의 잠재력을 활용하고자 하는 노력과 에큐메니칼 운동 때문이다. 신약시대의 교회와 2세기 동안의 교회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였다. 따라서 평신도가 잠자고 있거나 주저앉아 있는 교회는 절대로 건강하다고 볼 수 없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에서라도 평신도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다면 지금 우려하고 있는 문제들이 반드시 개혁되고 교회의 체질이 새로워질 것이다.Chapter 3 평신도는 누구인가? : 평신도는 헬라어 라이코스로 ‘백성, 어떤 백성, 백성의 무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평신도라고 하면 그 본래의 의미가 주님을 모신 선택받은 자, 혹은 성도, 제자, 믿는 자의 공동체인 전교회를 가리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를 구별짓는 어떤 조건이나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것은 모든 신자가 지체로서 다 중요하며 각자가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평신도 하면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카르타고 감독이었던 키프리안이 사용하면서 시작되어 사용되었다. 결국 마치 교회 안에 두 계급이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던지는 변질된 이름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평신도는 그 말의 본래 의미대로 하나님의 백성이며 교회의 주체요 성직자와 평등하게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에서 평신도가 잠을 자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탁월한 평신도가 기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통상적인 봉사활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은 평신도를 방치하거나 병들게 한 책임을 교역자에게 물으실 것이다. 우리는 영적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는 성경적 평신도상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회복하는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평신도를 깨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세상으로 보냄받은 교회Chapter 5 목회 철학을 정립하라 : 목회지도자들은 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목회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무엇인지 왜 교회가 존재하는지 스스로 대답하고 바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평신도를 깨우기 위해 제자를 만들어야 한다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하고 교회의 본질과 소명에 일치해야 한다. 여기에서 목회철학이 중요하다. 목회철학은 목회전략과 방법의 결정이며 자신의 교회론에서 나온 목회 신념을 말한다. 그런데 교회라는 주제는 매우 익숙하여 진지하게 연구해 보는 일이 거의 없다. 한국교회 또한 관심 밖의 일로 여기고 개혁적인 자세를 갖지 못해 이렇다 할 목회철학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훈련은 하나님의 손에서 직접 받은 계시처럼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고하게 여기는 내면의 불길을 가진 자라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목회철학을 정립해야 한다.Chapter 6 교회가 무엇인가? :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 회중을 가리킨다. 한편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예수님이 오셔서 실현하신 하나님의 통치의 유기적, 제도적, 세상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말을 알리는 사인이며 앞으로 무엇이 도래할 것인가를 알리는 게시판과 같다. 세상에 남아 있는 교회는 그 자체의 존재 이유라 할 수 있는 독특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이 소명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세기 동안 지상교회는 자기도취에 빠져 소명없이 지나왔다. 아니 한편으로는 자기만이 소명자라는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안일하게 살아왔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지상 교회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한다. 세상으로 보냄받은 소명을 함께 가지고 있는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특권과 함께 소명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지상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한 세상으로 보냄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다.Chapter 7 도전받는 전통적인 교회론 : 전통적인 교회론은 도전받고 있다. 현대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선교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고 평하며 정적인 상황에 익숙해져서 긴박한 선교적 상황에 입각하여 교회를 보는데 한계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비판은 개혁신학의 배경과 복음주의 학자들로부터 나온 비평이다. 이들은 이런 취약한 교회론을 가지고는 현대사회를 책임지는 교회가 될 수 없다고 우려를 표한다. 이는 교회론을 계승한 후대 목사님이 자기도 모르게 평신도를 선교의 소명자로 무장시키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자들로부터 계승한 교회론에서 세상으로 보냄받은 소명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어 평신도를 소명자로 일깨우는데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루 빨리 이 상황을 변혁시켜야 한다.Chapter 8 교회의 사도적 본질 :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는 교회의 본질은 성성, 통일성, 보편성 이 세가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교회론을 통해 지상교회는 사도의 계승자로서 세상으로 보냄받은 소명자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사동성은 예수께서 그의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들의 터 위에 그의 몸된 교회를 세우셨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잘 아는 것처럼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이라는 점에서 거룩하다. 그러나 이 교회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라 할 수 없다. 사도직은 독특한 것이어서 반복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도직을 어느 개인이 대신하거나 대표할 수 없으며 오직 사도의 교훈과 사역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스큉은 사도성의 계승을 유효하게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하였다. 사도들이 성령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면 계승자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사도의 계승자가 되는 구체적인 방법은 사도들의 교훈을 계승하는 것, 전 교회가 사도의 사역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를 깨운다는 것은 바로 그들 각자가 사도의 사역을 물려받은 소명자임을 고백하고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Ⅰ.서 론A.문제의 제기 및 연구목적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의 속편으로 같은 저자가 같은 수신자에게 짧은 시일 후에 보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학설은 19세기초에 들어서면서 부터 상당한 의의가 일어났다.데살로니가 전서에 대한 진정성은 그렇게 심한 도전을 받지 않았으나 후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바울이 직접 쓴 편지일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바울 저작의 진정성을 최초로 의문시한 이는 J.E Christian Schmidt이다. 그는 2:1-12에 있는 두가지 충고들은 적 그리스도에 관련된 환상 만큼이나 비 바울적이라고 보았다.F.H.Kern 은 그 이론에 덧붙여 데살로니가 후서는 사실상 데살로니가 전서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비 바울적인 표현들과 데살로니가 후서 3:17을 지적했다.이러한 구절은 진정성이 없는 서신을 바울의 서신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무산시켰다.Kern의 연구는 수십년 동안 표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W.Wrede는 데살로니가 후서가 거의 전적으로 전서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바울이 자기 이름이 위조서신에 오용되고 있다고 믿었다면(살후 2:2 ; 3:17)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 철저히 대책을 세웠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이러한 Wrede의 비평이 광범위하게 오늘날 데살로니가 후서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기초가 되고 있지만 그 외에도 다른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은 후서가 보여주고 있는 전서와의 종말론 이해의 차이와 후서가 전서와 문자적으로 같은 어구를 반복하고 이런 부분이 전 서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양 서신 간의 문학적 유사점과 차이점을 들고 있다.또한 전서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을 후서에는 흔히 “주”로 대치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신학적 이해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이에 대해 필자는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며 바울저작의 진정성에 대한 옹호론자들의 주장과 비평가들의 주장을 면밀히 검토할 것이다.본 소고의 목적은 어떠한 결론을 도출하는데에 두지 않고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고찰에두 바울 혼자 기록한 편지는 아니며 바울이 혼자쓴 편지일 경우에도 “대서자”) 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또한 바울의 서신중 다른 사람이 기록 혹은 대서 하였다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바울 자신이 친필로 문안 인사만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이런 편지들은 “갈라디아서”)와 같은 친서와 대조가 되고 있다.)바울의 서신들은 안부인사 및 정중한 서두(書頭)에 있어서는 당대의 통상적인 헬라서신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 결과 이 관계가 훨씬 밀접한 것으로 드러났으며,통상적인 서신은 이전에 상정되어온 것보다 훨씬더 구조를 갖춘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다른 쟝르들 ,예컨대 설교와 축원과 같은 장르들을 연구한 결과 그 이상의 구조적 병행 귀절들이 들어났으며 ,또한 내적 유형들도 주목받고 있다.이들 가운데 가장 흥미있는 것들가운데 하나는 바울의 교차배열법,즉 a.b./b.a.구조들의 사용이다.예컨대 살전 2:19-20은 ‘기쁨···면류관···너희···우리 주 예수앞에/그의 강림하실 때···너희···영광···기쁨’(헬라어순서)으로 나와 있으며,이외에도 다른 예들이 많이 있다.바울은 먼저 완곡한 표현으로 한 귀절에 이른 다음 다시 역전 하여 그가 시작한 데에서 끝맺는 습관이 있었다.그러나 바울의 모든 저술이 이런 식이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한 편 그리스-로마에는 위조 서신들이 널리 양산되었다.그것은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제자들이 최소한 자신의 처녀작 만큼은 그의 스승의 이름으로 출간하는 관습이 있었다.그럼으로써 이들은 자신들이 그의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아울러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를 표명하고자 했다.의사들이 여러 발행물들을 히포크라테스의 저작으로 빌간했다면 이들은 이를 통해 과거 위대한 시대를 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물론 그 외에도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성된 위조서신들도 있었다.) 하지만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명한 위인의 이름을 저자로 이용하던 일이 흔하였기 때문에 저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 문서의 실제적인 모세로 인정하고 있다.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우리는 한글을 가리켜 세종대왕의 한글이라고 부르지만,사실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만드셨다는 말은 아니다.그 밑에 있던 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1611년네 출판된 영어 성서를 제임스 왕 역(King James Version)이라고 부르지만 ,그 왕이 친히 번역한 것이 아니다.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존경하는 이에 어던 공로를 돌린다는 것은 일종의 미덕이었고 관례였었다.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모든 법과 기본적인 교훈들과 심지어 그 민족 형성의 기본적인 역사 까지도 포함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일종의 기본 헌장으로 삼았을 때,그들의 국부요 또 이스라엘 법의 창시자이기도 한 모세를 그 저자라고 부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이 되었고,누구나 거기에 젖어 있는 시대에 예수님도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전통을 따르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이와같이 구약성서의 “익명의 저자 원리”는 구약 가경에도 그 범위를 확장할 수 있게된다.골드만의 말에 의하면 그들 가운데 “한 저자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때에,그것은 대체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편찬한 것이요,그 저자로 언급된 자는 사실로 그 저자가 아니라 유명한 학파의 창설자나 또는 잘 알려진 대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이와같이 유대교에 있어서 가명 차용의 관습은 상당히 보편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하지만 우리가 서신형식의 가경문학이 일반적인 가경 문학의 흐름과 완전히 유리된 것은 아닐테지만,신약성경 서신들의 비평에는 다른 어떤 형식들보다 서신형식의 가경들이 더 큰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본 고찰을 위해서 그 범위를 축소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유대교의 수많은 외경과 가경들 가운데서 서신 형태를 사용하려는 기색이 엿보이는 것은 오직 두 권 외에는 없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그 두가지는 예레미아의 편지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이다.그러나 이들은 어 볼때 첫 두 권의 책과 마지막 두권의 책은 그 전설적이고 허구적인 특징이 곧바로 명백히 드러난다.오직 바울과 세네카의 서신 왕래만이 기독교회에 겨우 어떤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바울행전에 포함되어 있는 고린도서(고린도3서)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보낸 서신은 바울의 신약 서신 양식을 모방하고 있으며 바울의 진짜 서신과 동일한 어구들을 이용하여 바울 저작임을 주장하고 있다.가경 바울 행전의 자칭 저자는 자신의 작품을 진품처럼 보이게 하고,당시의 오류에 대한 그가 생각하는 바울의 대답을 제시하기 위해 바울행전 속의 서신들의 기원에 대해 상대적으로나마 정확한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가명의 서신 자료를 통합시켜 넣었다.터툴리안의 설명에 따르면 전체 작품은 바울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이 책은 후에 시리아어를 말하는 동방지역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동방과 서방 교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오리겐,히폴리투스가 이책을 알고 사용도 했었지만 이들 중 누구도 이 책을 정경으로 취급한 것 같지는 않다.)또 다른 형식의 위경인 라오디게아서는 중세교회가 한동안 이를 정경으로 받아들인 적도 있다.이 책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이것은 골로새서 4:16에 부합하는 서신을 기술하고자 하는 욕망이 ,즉 영감받은 사도의 저작이 분실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이 위경을 낳게 했다는 것이 이 서신의 동기에 대한 특별한 평가이다.많은 초기 가경 문학 작품들과는 달리,이 작품의 목적은 옛 사도를 칭송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이단적 사상을 선전하기 위한 것도 아니였음을 알수 있다.이와 같이 살펴본대로 신약성서 외적인 부분에서의 서신 형식의 가경은 너무도 희박하다.사실 이러한 가명의 저작설은 이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 만큼이나 일반적이 아닌 어쩌면 특수하다고 할 정도까지 임을 알 수 있다.이러한 상황하에서 신약성서 안에 정경으로 포함된 바울 서신중 에서 반 수정도의 것을 이러한 가명 차용일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주장 만큼이나 당히 후에 있을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또한 후서의 내용인 “불법의 사람”은 완전히 유대적 사상으로서 전서와 사상적 근거에도 차이가 있다.그러므로 데살로니가 후서는 전서와 계시록을 조화시킨 후대인의 가작이라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두 서신의 반대되는 견해는 엄밀히 말해서 주의 가르침에서도 볼 수 있는 피상적인 모순에 비추어 생각해야 한다.)예수께서는 생각하지 못한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권고 하셨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어떤 표징을 보더라도 아직 끝은 아니므로 미혹되지 말것을 권고 하셨다.바울이 전서를 기록한 후 이 주제에 대해 숙고하면서 이러한 관계의 반면(反面)을 힘을 다해 보려고 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위와같은 변화의 이유는 저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신자에게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즉,전서에서는 그 때 마침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서 죽은 자를 인해 슬퍼하는 자가 있어 그를 위로 할 겸(살전 4:13-18),단순히 재림에의 흥분에서 그 임박성을 지적하였다.하지만 이것은 바울의 재림에 대한 근본 신념이었다.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은 곁길로나가 일부 몰지각한신자들은 재림이 임박하였다 하여 무위 도식하고 남에게 피해를 끼쳐 교회를 문란하게 하였다(3:10-12).그러므로 바울은 그릇된 종말관에 관한 수정을 도모하고 있으며 착실하게 재림을 대망할것을 교훈 하고 있다.또한 후서의 종말론이 유대적이리라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서 그것이 바울 사상의 근간이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러한 것으로 바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B.문학적 표현의 유사점과 차이점비평가들은 기자와 데살로니가 교회간의 관계의 차이도 매우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전서에서는 격려하며 달래었고,후서에서는 명령했다.)더구나 후서의 정서적인 어조도 전서와 다르다.전서에서는 기쁨과 감사와 온유함이 중심적으로 내포되어 있다.후서에도 충심의 감정과 감사의 표현이 포함되어 있지만 부드러운 감정으로 기록되어 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