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신배경1)조지 W부시(공화당)-1989년에서 1993년 제41대 대통령으로 있던 조지 부시의 장남-예일대학교(역사 학사) 하버드대학교(경영대학원 석사)을 졸업했다.-미국 텍사스주 공군 방위군 입대(1968~)-아버지 조지부시의 참모로 선거 참가(1986∼1992),-부친이 사업으로 성공한 텍사스에서 주지사를 지내기도 하였다(1993년)-2000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로 뽑이기도 하였다.2)앨고어(43대 대통령 후보였던 앨고어)-그의 아버지는 앨버트 고어 시니어는 상.하 양원을 32년 간 지킨 민주당의 정치 거물-부친의 뒤를 이어 하원의원, 상원의원, 부통령으로 뻗어 올라간 전형적인 2세 정치가-워싱턴DC에 있는 세인트앨번 고등학교를 졸업-고교에 호털에서 통학했던 일을 잘 알려진 이야기-하버드대학교 졸업-베트남전쟁 참전. 보도요원(1960∼)-테네시안 기자(1971∼)-민주당 테네시주의회 의원(1976∼)-테네시주 출신 상원의원(1984∼)-미국 부통령(1992∼2000)3)공통점-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강한 후원아래 정치계에 뛰어 들수 있었다는 점-고어는 하버드 대학교, 부시는 예일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원을 나왔다. 미국에서는 대학 입학생 선발 때 학생의 학력만으로 결정하지 않고 고교 때의 개인의 전체적 활동 상황이나 추천서등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정실이 개입할 여지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란히 명문 학교를 나온 두사람에 대해 명문 집안 출신이라는 것 때문인지 정말 대학에 들어갈 학력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사람이 여름 당대회 훨씬 전에 사실상 양당의 후보자로 결정된 봄에는 이 두사람의 성적이 좋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학 성적표가 폭로되는 일도 있었다.-두 사람 모두 베트남 전쟁의 병역을 경험한 세대이지만 고어는 베트남에 종군했으되 전선에서 싸우는 위험한 임무를 맡은 적이 없었고 부시의 경우에는 텍사스 주의 주방위병이라 해서 베트남행을 면제받았다. 이 같은 특별 대우에 관해 두 사람의 부친의 어떤 정치적 영향루는 데 기여한 부통령이었다.-클린턴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면 클린턴은 경제호황 등 성공적인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는 하였지만 클린턴의 성추문 사건은 오랜 기간동안 기사거리가 되었으며 비록 상원을 통과하지는 못하였지만 성추문 사건은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되는 등 실제로 국민들의 대다수가 클린턴이 비도덕적 행위를 했다고 믿고 있다. 대통령으로서의 클린턴은 높이 평가하지만 인간적인 측면의 클린턴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평가는 고어후보의 선거운동에서 일관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부통령으로서 집권당의 업적을 널리 광고하고 인정받아야 하지만 이는 곧 클린턴과의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므로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고어후보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클린턴과의 차별성을 유지해야만 했다. 부통령 후보로 리버만을 택한 것에서 볼수 있는데 민주당 의원으로서는 가장 먼저 클린턴을 공격한 의원이 리버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고어 후보와 클린턴 대통령의 모호한 관계는 클린턴이 한번도 고어와 동반하여 선거유세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어후보가 선거 막판까지 혼전을 거듭하고 있으면서도 클린턴의 유세를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확인해 볼수 있다.-미국의 유권자들을 백인, 흑인, 멕시코인, 라틴계, 동성애자, 여성, 청소년 등의 범주로 세분화하여 특정 집단의 삶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이슈와 정책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2000년 미국 대선에서는 인터넷 선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후보자와 유권자의 쌍방향적 대화의가능성이 증대되었는데여. 고어후보의 경우 사이트 게시판에서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유권자와 직접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로스엔젤레스에서 민주당이 전당대회를 벌일 때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고어는 부시에게 크게 뒤지어 있었다.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면서 부인 티퍼여사에게 정열적인 키스를 했는데 이 키스의 효과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고어세금, 사회보장 등 몇몇 측면을 제외하고는 경제나 사회문제에 있어서 두 정당이 뚜렷한 입장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크게 관심을 끈 쟁정이 적었던 선거로 평가된다.2)클린턴행정부 하에서 발생하여 계속되고 있는 재정 흑자의 사용 방법-부시 후보는 잉여 재산은 세금을 낸 국민들의 돈이므로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입장-고어 후보는 잉여 재산을 정부가 사회 보장이나 정부 부채 탕감을 위해 지출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3)사회보장제도및 노인의료보장제도:-고어는 이들 두 제도로부터 현재 발생하고 있는 잉여 자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하고 이 두제도에만 투자함으로써 사회보장제도를 최소한 2054년까지 그리고 노인의료보장제도를 최소한 2030까지 지속할 수 있도록 한다.-부시도 사회보장제도와 노인의료보장제도의 개선과 강화에 동의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사회보장제도와 관련하여서 부시는 근로자들이 사회보장 세금의 일부를 개인적인 투자에 돌릴수 있도록 구상을 밝혔다.4)연료문제-고어는 매연 감소 차량의 개발에 세금 감면 혜택이라는 인센티브를 주는 문제와 함께 알래스카 주의 동물 보호구역에서의 유전 개발계획을 환경 파괴 행위라고 비난했다.-부시는 알래스카 유전을 개발할 경우 하루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원유량이 이라크의 하루 생산량과 맞먹는1백만 배럴에 달한다는 점을 들어 유전 개발을 옹호하였다.5)교육-고어는 미국의 공립학교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교사 10만명을 신규 채용하고 교사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방법 등을 통해 공립학교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연방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부시는 교육문제에 연방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고 실패한 공립학교의 경우 연방정부가 출자한 부분만큼은 해당 학부모에게 돌려주어 그들의 자녀에게 적절한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교육에 불만인 학부모들이 정부 지원을 받아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게 하는 '스쿨바우처(school voucher)프로그램을 영은 연방지법의 판결에 불복해 공소해 놓은 상태라고 해명했을 뿐 아니라 ‘고어 진영이 그렇게 말한다면 국가 전체의 의료의 질이 떨어진 사실에 대해(지금까지 부통령으로서 정권의 핵심에 있던 책임에 관해)국민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반론했으나 부시 진영으로서는 사실상 아픈 곳을 찔린 선거CM이었다2)이에 대항하려는 듯 이번엔 부시 진영에서 고어가 가장 꺼려하는 점을 공격하는 선거 CM작전을 9월 중순부터 전개했다. 그 CM은 고어가 열심히 선거 자금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장면을 내보낸 후 선거 자금 개혁 논의가 활발해 진 것은 클린턴의 재선을 노렸던 1996년 대통령 선거때 고어가 부정한 선거 자금을 모금했다는 의혹이 계기가 됐던 것이 아니냐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6. TV토론-두 후보간의 지지도 격차가 오차 범위 내에서 머물고 있고 두 후보 모두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 수인 270표에 근접해 있는 상황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두 후보에게 있어서 텔레비전 토론의 중요성은 매우 켰다. 텔레비전 토론 내내 두 후보는 확신에 찬 자세로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평가받았다.-일반적으로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령 후보간의 토론에서 두 후보간에 뚜렷하게 우열이 가려지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토론 자체는 고어가 잘한 것으로 평가받았지만 부시의 경우 시청자들에게 우호적인 인상을 심는데 보다 성공적이었다.토론에서는 두 후보간에 서로에 대한 인신공격도 행해졌다. 고어는 베트남 전 당시 주방위군(Nation Guard)에 복무했던 부시와 비교하기 위해 자신이 당시 아버지가 테네시 주의 상원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에 자원하여 참가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부시는 고어와 관련된 선거 자금 모금과정을 둘러싸고 불거졌던 스캔들을 거론하였다◆1차토론-2000년 10월 3일 밤9시(이하 현지 시간)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첫 번째 토론회가 90분동안 열렸는데, 주로 이슈 중심이었다. 2000년 TV토론의 사회는 지난 1988년,는데 1차 토론의 승리는 고어의 승리였다. CNN-갭럽조사에 의하면 고어가 잘했다는 의견이 48%, 부시가 잘했다는 의견이 41%로 나타났다. CBS조사에 의하면 고어 56%, 부시 43%로 무려14% 차이가 났다.이러한 TV토론의 결과는 바로 지지율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차 토론 직전 고어와 부시의 지지율은 45%로 똑같았는데, 토론이 끝나고 나자 고어의 지지율은 51%로 크게 뛰어올랐고, 부시는 40%로 떨어졌다. 한번의 TV토론이 두 후보간의 차이를 무려 11%나 벌려놓은 것이다.-부시 진영은 토론이 있는 날 지지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고어가 저지른 거짓말과 과장을 감시하고 이를 대중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미디어는 고어의 몇몇 과장된 말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고, 심야 코미디 토크쇼에서는 부시가 말할 때 말을 자르고 끼여드는 고어를 비아냥댔다.◆2차토론-2차 토론회는 10월 11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원스턴-세일럼에 있는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에서 열렸다.-2차 토론회는 1차 토론회와는 약간 다른 방식을 택했다. 1차 때는 양 후보가 연단에 서서 토론을 하였는데, 2차에서는 사회자 짐 레러와 함께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 좌담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 같은 방식은 미국 대선 사상 처음 채택된 것으로 부시 진영이 선호해왔던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갈등을 완화시켜주는 배치인데다 좌담회 방식이기 때문에 온화한 이미지를 보여온 부시 후보에게 유리하다고 평가돼 왔다.-이 때문인 듯 부시는 시종 여유 있는 모습으로 국가 안보와 경제문제 등 국내 문제에 관한 고어의 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부시는 또 대외정책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고어측이 지적해온 외교 업무 경험과 대외 위기 대처 능력 부족 등의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주력했다.-고어 후보는 부시의 자질 등에 의문을 제기할 때에도 비교적 부드러운 말투와 제스처를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1차 토론회 당시 수차례 보였던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짓는 태도가 유권자들에게 부시 후보의.
▶가이아대지의 인격신,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태초의 혼돈인 카오스에서 태어난 최초의 피조물이다. 저승인 타르타로스, 밤인 닉스, 암흑인 에레보스, 그리고 출산을 맡아보는 에로스도 이때에 같이 태어났다. 이 가이아로부터 하늘인 우라노스와 바다인 폰토스, 또 산들이 태어났다. 그 뒤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관계하여 거인의 신족인 티탄들을 낳았다. 우라노스는 괴물인 키클로프스와 100개의 팔을 가진 거인들을 싫어하여 그들이 빛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다시 가이아의 태 안에 밀어넣었다. 이 때문에 가이아는 심한 통증으로 괴로워했다. 남편의 횡포에 화가 난 가이아는 아들 크로노스에게 금강석 낫을 주어 우라노스의 남근을 자르게 한다. 가이아는 아들인 폰트스와의 사이에서 많은 바다의 신들을 낳았다. 테티스를 비롯한 바다의 처녀 네레이스들의 아버지인 네레우스와 타우마스, 포르키스, 케토, 에우리비아 등을 낳았다.가이아는 거인 사냥꾼인 오리온이 지상의 모든 동물을 죽일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전갈을 낳아 오리온을 축이도록 했다. 가이아는 그리스 각지에서 숭배되었다.▶우라노스우라노스는 풍요의 원천인 하늘의 의인화이다. 우라노스는 가이아와 관계하여 12명의 티탄, 그리고 세명의 키클로페스와 세명의 헤카톤레이레스를 낳았다. 이렇게 많은 자식들을 낳은 데 불만을 품은 가이아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아들들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청했다. 아들들은 모두 거절했지만 막내인 크로노스만이 동의했다. 그는 매복해 있다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낫으로 아버지의 고환을 잘라 바다에 던졌다.이 사건이 드레파논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크로노스의 낫에서 온 것(드레파논은 ‘낫’이라는 뜻)이라 한다. 또한 그것은 파이아케스 족의 나라에 있는 코르키라에서 였다고도 한다. 그 섬은 다름 아닌 크로노스가 바다에 던지 낫이며, 파이아케스 족은 우라노스의 피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또한 시칠리아에서였다고도 한다. 시칠리아 땅은 신의 피가 뿌려져 그토록 풍요롭다는 것이다. 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는 우라노스에 관해운 백성이었다. 우라노스는 그들에게 처음으로 문명화된 삶을 가르쳐 주었다. 그 자신은 훌륭한 점성가로 별들의 움직임에 따라 최초의 달력을 발명했고, 세상에 일어날 주요한 사건들을 예언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들 신으로 예우했으며 차츰 그는 하늘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이다.▶12티탄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신족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원시시대에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거인이라고 생각했다. 최초의 티탄 신족은 크로노스, 레아, 오케아노스, 테티스,이아페토스, 히페리온, 코이오스, 크레이오스, 포이베, 테미스, 므네모시네, 테이아였다.크로노스가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고압적인 행위 때문에 타도했듯이 크로노스의 아들인 제우스도 크로노스의 횡포를 이기지 못해 아버지와 격렬하게 싸워 그를 우주의 지배자부터 물러나게 했다. 이 싸움으로 제우스와 티탄 신족은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를 비롯한 몇몇 신족, 100개의 팔을 가진 거인인 헤카톤케이르들 그리고 키클로프스 등이 제우스 편에 가담했다. 그러나 티탄 여신들과 마찬가지로 오케아노스와 헬리오스 등 그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티탄 신족도 많다. 티탄 신족은 오토리스 산을 그들의 성채로 삼고, 제우스들은 올림포스산을 본거지로 삼았다. 10년 동안 계속된 싸움에서 제우스는 타르타로스로부터 100개의 팔을 거진 거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제우스는 그의 적인 티탄 신족을 저승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로스에 집어넣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데스의 세계 밑의 깊은 곳에 있었다. 이 영원히 어두운 곳에서 티탄 신족은 청동의 문이 있는 감옥에 갇히고, 100개의 팔을 가진 거인 3명이 그들을 감시했다. 아틀라스만은 유폐되는 대신 어깨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티탄 신족의 지배가 야만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안락과 번영의 황금시대였는지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있다. 크로노스의 운명에 대해서도 이설이 있다. 즉 그는 권력탄 신과 티탄 여신의 이름은 기원이 극히 다양하다. 어느 것은 그리스어가 아니고, 또 므네모시네(기억), 포이베(빛나는), 테이아(신성한), 테미스(질서) 등과 같이 추상적인 개념을 인격화한 것도 있다.1. 오케아노스(Oceanos)오케아노소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천공의 신 우라노스에서 태어난 아들로써 티탄 신족 중의 하나이다. 그는 바다의 여성적 생산력을 상징하는 누이동생 테티스와 부부가 되었다. 오케아노스와 그 아내인 테티스는 제우스와의 싸움때 동료인 티탄 신족 편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넓은 영역을 평화리에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3000여명의 오케아니스를 포함하여 강, 호수, 바다의 모든 신들과 요정을 낳았다. 제우스와 티탄 신족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레아는 딸인 헤라를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에게 맡기면서 보호를 부탁하기도 했다.오케아노스는 원시 그리스 인들의 사고에서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상징되었던 물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 물은 땅이라는 평평한 원반 둘레를 강처럼 에워싸고 흐르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것은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나 땅의 가장 먼 경계에 해당했다. 땅에 대한 지식이 점차 구체화됨에 따라 이러한 개념들은 더욱 다양해졌고, 오케아노스는 고대 세계의 서쪽 경계였던 대서양만 가리키게 되었다. 신으로서의 오케아노스는 모든 강의 아버지다.2. 코이오스(Coeus)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천공의 신 우라노스에서 태어난 아들로써 티탄 신족 중의 하나이다.. 코이오스의 이름은 '하늘덮개'라는 뜻이다. 코이오스는 누이 포이베와 결혼한 그는 두 딸 레토와 아스테리아를 낳았다. 아스테리아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라는 뜻이다. 레토는 뒷날 태양의 신 아폴론과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어머니가 된다.3. 히페이론(Hyperion)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천공의 신 우라노스에서 태어난 아들로써 티탄 신족 중의 하나이다. 그는 누이 테이아와 결혼하여 헬리오스(태양), 셀레네(달), 에오스(새벽)를 낳았다. 맏이 헬리오스는 '태양'이라는 뜻이다때문이다. 히페리온의 이름은 '높은 곳을 달리는 자'라는 뜻이다.4. 크레이오스(Crios)크레이오스(Kreios)라고도 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천공의 신 우라노스에서 태어난 아들로써 티탄 신족 중의 하나이다. 폰토스와 가이아의 딸 에우리비아와 결혼하여 별의 신 아스트라이오스, 그리고 팔라스, 페르세스를 낳았다. 서풍 제피로스와 북풍 보레아스, 남풍 노토스, 동풍 에우로스(또는 에로스포스), 경쟁심을 뜻하는 젤로스, 승리의 여신 니케 그리고 모든 별들의 조상이다5. 이아페토스(Iapetus)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천공의 신 우라노스의 아들로 티틴 신족의 한사람이다. 오케아노스의 딸인 클리메네와 결혼하여 프로메테우스, 에피메테우스, 아틀라스, 메노이티오스를 낳는다.맏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먼저 아는 자'라는 뜻이다. 진흙으로 최초의 인간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신, 신들의 불을 훔쳐와 인간에게 준 것으로 전해지는 신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입니다. 둘째는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는 '나중에 아는 자'라는 뜻이다. 형의 당부를 잊고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셋째는 아틀라스(Atlas)는 제우스에게 저항했다가 하늘의 축을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올림포스의 신들과 티탄 신족과의 싸움에서 티탄 신족이 패하면서 이아페토스는 다른 티탄들과 함께 타르타로스에 던져진다.6. 크로노스(Cronus)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천공의 신 우라노스에서 태어난 아들로써 티탄 신족중의 한명이다. 크로노스는 어머니 가이아의 사주를 받고는 가이아가 건네준 낫으로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버린 신이다. 그 후 그는 하늘에서 우라노스의 자리를 차지했다.크로노스는 누이인 레아와 결혼을 한다. 미래를 내다볼수 지혜와 지식을 가진 우라노스와 가이아가 크로노스에게 친자식들 중 한 명에게 왕좌를 빼앗길것이라고 예언하자, 크로노스는 자식들을 낳는 즉시 잡아먹었다. 그는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그리고 포세이돈을 그런 식으로 잡아먹었는 배내옷에 돌을 싸서 크로노스에게 건네주었고, 크로노스는 속임수를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대로 집어삼켰다.다 자란 제우스는 오케아노스의 딸인 메티스, 혹은 가이아의 도움을 받아, 크로노스에게 약을 먹여 그때까지 집어삼킨 자식들을 모두 다시 뱉어 내게 했다. 이 자식들은 제우스와 힘을 합쳐 크로노스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크로노스는 티탄 족에게 도움을 구했다.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가이아는 제우스가 크로노스에 의해 타르타로스에 갇힌 존재들과 연합한다면 승리를 얻게 되리라는 신탁을 내렸다. 제우스는 그들을 구해 내어 승리했다. 크로노스와 티탄 족은 헤카톤케이레스 대신에 타르타로스에 갇혔고, 헤카톤케이레스는 그들의 감시자가 되었다.크로노스는 '시간', 즉 세월이라는 뜻이다. 크로노스의 모습이 종종 모래시계와 함께 그려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7. 테이아(Theia)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천공의 신 우라노스에서 태어난 여섯 딸 중에서 첫째로써 티탄 신족중의 한명이다. 테이아는 히페리온과 결혼하여 에오스(Eos ; 새벽), 헬리오스(Helius ; 태양) 셀레네(Selene ; 달)를 낳습니다. 또 케아노스와 관계를 맺어 쌍둥이 난쟁이 형제 케르코페스를 낳기도 하였다. 테이아는 그리스어로 ‘신성한’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에우리파에사라고도 불린다.8. 레아(Rhea)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천공의 신 우라노스에서 태어난 딸로써 티탄 신족중의 한명이다. 레아는 크로노스와 결혼하여 그와 함께 이 세상을 다스렸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이 결합으로 여섯명의 자식 즉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그리고 막내인 제우스가 태어났다고 한다. 크로노스는 자식들에 의해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그것이 두려워 자기 아들들을 차례로 삼켜 버린다. 그래서 레아는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어린 제우스를 숨기고 그 자리에는 돌맹이를 배내옷에 싸서 뉘었다. 포세이돈에 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며, 그의 어머니가 이와 비슷
1. 트루먼과 봉쇄정책의 태동(1945-1953)1)전후 미국의 힘-제1차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유렵은 전쟁으로 전국토가 폐허로 변하였고 많은 산업시설들이 파괴되었다. 거기에 비해 미국은 전시 경제에 힘입어 엄청나게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등 강력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들의 식민지에서 더 이상의 지배가 어려워 지면서 퇴각하게 되면서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힘의 공백을 미국이 맡게 되면서 소련과의 피할수 없는 경쟁과 대립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전후 새로운 국제질서인 냉전을 낳게 됩니다.2)전후, 미?소 관계의 악화 -대립관계의 형성-독일·이탈리아·일본등의 동맹국에 맞서 싸우면서 미국과 소련은 동지애를 느낄정도로 가까웠다. 그러나 얄타회담 이후 동부유럽에서 소련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스탈린의 의도가 보이면서 미소관계는 대립되기 시작한다.-스탈린은 동유럽을 소련의 안보에 중요한 지역으로 생각하면서 동유렵의 어떤 나라가 서방진영과 경제적ㆍ군사적 동맹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동부 유렵문제, 특히 폴란드 문제였다)-독일의 처리문제였다. 독일에 많은 피해를 입은 소련은 자국 산업의 재건을 위해 독일에 상당한 수준의 배상금 지불을 강요하자고 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유럽의 재건을 위해서는 독일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독일 산업의 재건을 느끼게 되었다. 포츠담 회담이래 트루먼 행정부는 독일을 농업국으로 만들려던 루스벨트 시대의 이른바 모겐소플랜을 폐기하고 그 대신 신속한 독일 재건 계획에 착수했다-그리스?터키?이란 문제-동아시아 문제 -일본과 중국3) 봉쇄정책의 태동 -대소봉쇄-1946년 3월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 이후 강경한 반소련정책을 추구하고자 한다.-트루먼 독트린: 1947년 3월 발표한다. 이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자유주의국가를 전복할려는 외부의 압력에 맞서 군사적ㆍ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① 트루먼 독트린의 성립?영국 -그리스와 터재래식무기의 재무장과 전략적 우위 확보에 힘을 솟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NSC-68은 엄청난 군비의 증강을 의미했으며 이는 국민들의 세금 부담을 어떻게 설득시킬것인가 고민하던중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1950년 9월 트루먼은 NSC-68을 실행하도록 명령하게 된다.8)애치슨 라인 선언-1950년 1월 12일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션 열도에서 일본과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제도로 이어진다는 애치슨 라인을 선언하게 된다. 그는 방위선 밖의 국가가 제3국의 침략을 받는다면 침략을 받은 국가는 그 국가 자체의 방위력과 국제연합 헌장의 발동으로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한국과 대만이 제외되면서 남침을 제공하게 된다.9)6?25전쟁-(1945년 해방이후 1950년 6?25가 발생하기 전까지 여러 행태의 정치적 폭력에 희생된 사람의 수가 10만명에 달한다는 계산이 있다)-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남침하게 됩니다. 이에 트루먼은 1930년대 독일의 라인 지역 침공에 비유하면서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미국의 제안이 폐기될 경우 미국 단독으로 군병력을 파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6월 25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무력침공을 비난하고 즉각적인 전쟁중지와 북한군의 38선으로서 철수를 요구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6월27일 안전보장이사회는 소련의 불참 속에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평화를 위한 단결’결의안을 채택합니다. 이에 16개 회원국이 한국전쟁을 돕기 위해 지상군이나 해군 혹은 공군을 파견합니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38선을 돌파하면서 달아나는 북한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군과 미국및 UN군은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에 맥아더등 강경파들은 북한지역과 중국 지역에 핵폭탄을 투하하고 대만지상군을 투입해야 한다는 전쟁 확장론을 내세웠으나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전쟁 확대 계를 시작하였으며 터키에 대한 영토 요구를 포기하였고 반미적 표현의 강도를 낮추면서 ‘평화공세’에 착수하였다.3)수에즈 운하사건-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가 영국과 프랑스의 수에즈 운하 지배를 종식시킬 목적으로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운하를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도 군대를 파견하였던 사건이다. 이에 소련은 이집트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서유럽에 미사일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하였다. 결국 11월 중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군이 후퇴하면서 정리되었다. 이사건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갈등을 보이면서 핵무기개발을 추진하였다.4)아이젠하워 독트린-수에즈 사건 이후 아랍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아이젠하워 독트린이 발표되게 된다.-내용: 국제 공산주의에 의해 조종되는 나라의 공개적 무력 침공에 맞서 도움을 요청하는 나라들을 보호할수 있도록 무력 사용을 허용하는 전반적 권한을 인정받게 된다.-아이젠하워는 아랍민족주의의 움직임을 소련의 위협이나 공산주의의 틀속에서 이해함으로써 아랍의 반미주의를 고무시킨 한계가 있습니다.5) 대외정책에 대한 평가-아이젠하워가 공화당 보수파의 대외정책은 나토와 같은 군사 동맹체를 통해서 전 지구적 차원의 패권정책으로 변모하였고 이것이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을 체제화시킨 것이다.-아이젠하워의 과도한 해외 개입은 군사 패권을 확립시키기는 했지만 도덕적 정당성은 실패했다고 볼수 있습니다.3. 케네디(1961-1963)~L.B. 존슨(1963-1969) ; 냉전의 세계화-196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의 냉전정책과 패권주의는 절정에 달한다. 즉 소련에 대한 정 책이 가장 강경하고 제3세계에 대한 개입 성향이 가장 노골적인 시대가 1960년대였다.1)군비확장정책-케네디는 아이젠하워 시대의 대외정책이 수동적인 것이었다고 비판하면서, 동맹국을 확보하고 방어를 강화하는 것보다는 미국을 따를 추종국들을 확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케네디는 군사력 증강을 우선적으남전 참전후 미국에서의 변화를 보면 첫째, 미국의 정치적 분열, 둘째 미국 경제의 쇠락, 셋째, 대통령권에 대한 연방의회의 제동 그리고 궁극적 여파라고 볼 수 있는 ‘패권적 대외정책의 후퇴’를 말한다.4) 대외정책에 대한 평가케네디와 존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이어 여전히 냉전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케네디의 유연전술은 아이젠하워의 대량보복 전략보다 확실히 핵군비경쟁의 부담이나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줄여 준 정책이었지만 아이젠하워와 마찬가지로 제3세계의 민족주의와는 병존할수 없었다.4. 닉슨(1969-1974), 포드(1974-1977)1)데탕트 시대의 배경-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일방적 세계 지배는 힘을 잃게 되었고 소련, 중국, 일본, 서유럽 공동체 등이 정치 경제적 경쟁자로 부상하면서 세계 지도자적 위치에 위기가 온다.-소련의 핵무장력은 이미 미국과 동등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며 이집트나 베트남에서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엇다. 이에 공산주의를 통제하는 새로운 방법은 값싸면서 기존정책과는 다른 정책이 필요성을 느꼈다-이에 미 행정부는 냉전 시대와는 다른 전환기임을 인식하고 현실주의, 실용주의 외교정책을 기반으로 한 데탕트 시대가 열리게 된다.*닉슨: 우익 성향의 전통적 공화당원. 닉슨 독트린, 워터게이트 사건.*키신저: 미국 안보문제 전문가. 독특한 외교술(give & take 원칙, 접근전, 협상의 귀재, 막후통로 이용한 비밀주의)로 미국 외교 정책에 많은 영향.2) 실용주의, 현실주의 외교정책 → 데탕트 시대데탕트는 닉슨-키신저 외교정책의 핵심적 추진력으로 이들은 냉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외교 정책이 아닌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선택하였다. 케네디의 뉴프론티어(세계경찰국가로서의 임무수행)를 비판하게 된다. 데탕트는 국제적 긴장 완화와 세계 정치에서 미국의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는데 중국과 소련을 봉쇄하고 쿠바, 베트남, 아프리카 등의 제 3세계를 급진적 혁명 세력으로 규정하고 억제하면서 지정학적 세력 균있다.-중?미 관계 개선으로 냉전 구도를 완화시키고 전략무기제한협정(SALT)나 NPT등으로 무기 경쟁을 완화시켰다.-중일관계를 수립시켜 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했고 중국에 미국기업이 진출하여 중미 무역은 7억달러를 상회했다.4)데탕트의 문제점-소련이 월남이나 인도, 중동 국가 같은 친소 국가들을 조종할수 있을것이라고 가정한 것이 잘못이었다. 즉 미소의 협력이 제3세계 문제를 진정시킬수 있으리라고 본것이 잘못이었다. 지역적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들 지역은 민족주의, 중립주의 국가로서 독립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무기 통제가 강조되었지만 대외 무기 판매는 최고에 달했다. 또 미국은 신형 잠수함과 신예 폭격기 등 파괴력이 강한 무기체제를 개발하기 위해 더 많은 예산을 요구했고 소련도 장비 현대화를 가속화시켰다.4) 닉슨과 키신저의 외교 정책 평가가장 큰 업적은 데탕트 체제 수립과 핵무기 제한 협정을 통해 동서 냉전 대립을 다소간 완화시켰다는 점이다. 하지만 미국적 체제에 대한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제 3세계 민족주의의 무시등으로 여러 분쟁을 초래하게끔 하였다.특히 월남전 패배는 미국의 패배일 뿐만 아니라 닉슨 키신저 외교 정책의 실패로 연결된다.닉슨의 워터게이트는또한 닉슨과 키신저의 개인적이고 비밀적인 외교술은 국민과 의회를 소외시켜 문제점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곧 미국 행정부 중심 체제의 외교 정책에 대한 문제점으로 평가되어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5. 카터 시대의 외교정책(1977~1981)1)인권외교정책-세계 모든 인간들은 노동, 선거, 기도, 여행, 언론, 결사에 대한 자유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수 있을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대량학살, 고문, 강제노동, 부정선거, 시민자유제한 등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독재자들은 인권을 존중해야 했으며 그렇치 않을 경우 미국의 대외원조가 삭감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유신체제에서의 박정희대통령과의 트러블이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동유럽에서 민족주의를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