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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산 김원봉 평가A좋아요
    약산若山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 혁명간부학교 교장, 민족혁명당 당수,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 1지대장, 임시정부의정원 의원, 임시정부군무부장 등 각종 굵직한 지위가 말해 주듯이 일본에 대항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중경 임시정부 당시 김구에 이어 제2인자의 자리에 위치했을 만큼 일제시기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해방 직후 중경 임시정부의 상황을 몰랐던 국내여론이 임시정부를 김구 중심으로 몰아갔다는 점과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했다는 이유로 역사적 조명에서 벗어난 점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여운형과 같은 좌파세력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무장 항일 노선을 통한 조국 해방을 부르짖었던 김원봉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1898년 경남 밀양에서 김원봉이 태어났을 무렵 조선의 국내외적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 해 전인 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임금을 황제로, 연호를 광부로 바꾸는 등 대대적인 체제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개혁시도는 타국가의 불인정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러시아, 일본은 오히려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했다. 이후 김원봉이 8세 때인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13세 면는 조선합병이 체결되었는데 이 같은 조선의 유약한 현실은 어린 시절부터 김원봉이 항일의식에 눈을 뜨게 하였다.김원봉은 강력한 무력으로서만 비로소 조선이 일본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무장투쟁 및 군대양성을 주장했다.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가 그해 12월 의열단을 조직해 의열단 단장을 역임했다. 독립 운동사에서 의열 투쟁은 수많은 독립운동방법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투쟁노선이었다. 이는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많은 효과를 올릴 수 있었으며 수단과 방법, 시간과 장소, 인물과 기관을 가리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창단 직후 의열단은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여기서 '5파괴'란 5가지의 파괴대상을 규정한 것으로 여기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 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외적 중요기관이 포함되어 있다. '7가살'은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으로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악덕 지방유지))을 지명했다. 그리고 초기 의열단은 '일제와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여, 계급을 타파하며, 토지소유를 평등하게 한다'는 4대 목표를 최대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여기서 평균지권은 의열단의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이를 통해 의열단은 단순히 독립만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지향했으며 대한광복회의 진보적 노선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초기의 의열단은 김익상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의거, 경북 의열단 사건,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습격사건,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등 국내 기관 파괴, 요인 암살을 지도했다. 1923년 단재 신채호에 의해 이 발표되었는데 이 선언문은 크게 5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제 1장은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박탈해 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했다. 제 2장은 3.1 운동 이후 국내에 대두된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문화운동론을 일제와 협력하려는 '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매섭게 규탄했다. 제 3장은 임시정부의 외교론, 실력양성론, 준비론 등의 허실투성이인 독립운동 방략을 비판하였다. 제 4장은 일제를 몰아내려는 새로운 혁명이념으로 '민중· 폭력'의 두 요소를 바탕으로 아나키즘적 민중혁명과 폭력 철학을 제시했다. 제 5장은 다섯 가지 파괴와 다섯 가지 건설의 목표를 제시했는데 '5파괴'의 대상으로 이족통치,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평균 및 노예적 문화사상으로 보았고, '5건설'의 목표로는 고유적 조선, 자유적 조선 민중, 민중적 조선, 민중적 사회 및 민중적 문화라고 선언하였다. 의열단 선언이 채택된 무렵 의열단은 국내외에서 가장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애국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의열단에 가입했다. 이처럼 김원봉의 주도 하의 의열단은 이념과 체제가 확고한 독립운동의 전위조직으로 발전하여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1926년 봄 김원봉와 일부 의열단 단원들은 새로운 군사정치기술을 배워 일제와 싸우겠다는 목표 하에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황포군관학교는 손문이 군사적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창설한 군사정치학교이다. 황포군관학교에서의 훈련은 김원봉이 의열단의 향후 진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고 이에 기존의 의열 투쟁방식에서 벗어나 군대양성에 의한 조직적인 무장 투쟁과 대중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되었고 당의 강령을 채택해 정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김원봉을 최고 지도자로 하여 11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였다. 또한, 김원봉은 한국혁명청년회를 조직해 세력 확장에 나섰으며 의열단의 외곽단체인 무창혁명청년회를 결성했다. 청년회의 결성은 항일청년세력을 한 곳으로 묶기 위함이었다.1930년대에 이르면서 중일전쟁의 기운이 무르익게 되고 이에 독립운동 진영의 연합 또는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김원봉 역시 민족협동전선을 이루어 민족적인 역량을 한데 모아야 한다고 보아 조선 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하면서 협동전선운동에 적극 관여했다. 1935년 7월 5일 남경에서 한국의 5개 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되어 독립운동정당으로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민족혁명당은 독립운동전선 내 중도좌파와 우파세력의 통합체이자, 좌우합작의 실현에 의한 통일전선체였다. 비록 김구의 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 창당의 핵심세력이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의열단 계열이었다는 점, 신당창당 세력의 일부가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불참하였지만, 이는 민족통일운동의 큰 성과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에서 총서기에 취임했는데 민족혁명당의 체제가 집행위원 합의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실권은 총서기였던 김원봉과 같은 의열단 출신이었던 김두봉이 장악하게 되었다. 민족혁명당 내에서의 의열단 세력 확대는 자연히 조소앙, 이청천 세력의 탈퇴로 이어졌고 결국 민족혁명당은 의열단의 확대조직으로 변질되었다.1937년 임시정부가 군사위원회 설치를 결정했을 무렵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때 중국에선 노구교에서의 중국군과 일본군 충돌을 계기를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중일전쟁의 발발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략상의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는데 특히 다수의 한인 청년을 불러 간부로써 훈련시킨 김원봉에 있어 이 사건은 절호의 기회였다. 중국 국민당 역시 일본군의 중요한 정보 수집, 일본군 내부 분열을 목적으로 한국청년들을 필요하였다. 이 같은 서로간의 필요에 따라 김원봉을 위시한 조선의용대는 정국 정치부에서 관할한다는 조건으로 창설을 승인했다. 조선의용대는 처음 2개 구대로 구성되었는데, 제1구대는 박효삼이 지휘하여 호남 등지에서, 제2구대는 이익봉의 지휘로 낙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병력이 적었으므로 전선에 직접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서의 적진 교란, 첩보 및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창설은 기존의 외교론과 실력양성론에 실망한 독립운동가들에 있어 큰 기대감을 심어주었고 이후 한국광복군, 조선의용군의 창설 및 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인문/어학| 2009.05.06| 3페이지| 1,000원| 조회(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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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시 문화 유적 답사
    ●공주시 문화유적 답사●◆ 답사일정: 2008. 11. 02 (일)◆ 답사장소: 공주시(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 공산성, 선화당, 국립공주박물관)◆ 공주시 연혁공주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운국(不雲國)이었고,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문주왕 1) 이후 538년(성왕 16)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약 6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가 멸망한 후 중국 당(唐)나라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고, 670년(문무왕 10) 신라가 차지한 후, 686년(신문왕 6) 웅천주(熊川州)를 설치하여 13개 군 29개 현을 통할하게 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웅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공주로 개칭하였다. 983년(성종 2) 공주목이 되었으며, 993년에는 하남도(河南道)에 속하였고, 1341년(충혜왕 2)에는 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는 공주에 진관이 설치되었으며, 1598년(선조 31)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되었다. 그뒤 1895년(고종 32) 공주군으로 개편되었고 이듬해에는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31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였고, 1938년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6년 1월 공주읍이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공주시와 공주군으로 분리되었고, 1995년 1월 다시 통합되어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공주시로 되었다. 1998년 봉황동이 중학동에 통합되고, 금흥동이 신관동에 통합되었다. 2003년 현재 유구읍과 계룡면·반포면·사곡면·신풍면·우성면·탄천면·의당면·이인면·장기면·정안면, 중학동·산성동·웅진동·금학동·옥룡동·신관동 등 1읍 10면 6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주시 문화 유적 답사(1)무령왕릉1971년 7월 5일 송산리 제 5,6호 고분의 침수방지를 위한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약 1,500만에 처녀분으로 발굴되었다. 특히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 부부라는 사실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어 세상 사람들을 크게 흥분시켰다. 조사된 무령왕릉은 봉토가 마치 작은 봉우리 같직경은 약 20m이며, 높이는 바닥에서 7.7m에 이르고 있으나 오랜 시일이 경과하면서 유실이 심하였던 것으로 보여 원래는 현재의 상태보다 훨씬 큰 규모였던 것으로 추측한다.봉토는 석회를 혼합한 흙을 사용하였으며, 능의 동남 기슭에서 봉토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한 호선이 일부 발견되었는데 형태가 불규칙한 잡석을 4-5층씩 쌓아 올린 것으로 처음부터 설치된 것이 아니라 뒤에 보수공사같은 형식으로 설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전축의 단실묘로 평면이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형태를 지닌 묘실은 중앙에 연도가 부설되어 있다. 벽면은 남쪽과 북쪽인 아래에서 천장부까지 수직으로, 동쪽과 서쪽은 상부에 이르러 차츰 곡률을 주어 아치형 천장을 구성하였다.묘실의 내부의 규모는 남북 길이 4.2m, 동서 너비 2.72m이며, 천장중앙까지의 높이는 3.14m이다. 왕 부부가 함께 모셔진 합장 무덤으로서는 낭비공간이 별로 없는 기본적인 규모이다. 벽체의 전축은 길이 모 쌓기와 작은 모 쌓기를 되풀이한 방식으로 길이모 쌓기는 전 4개를 눕혀서 포개고 작은모 쌓기는 1개를 세워서 배열한 4평 1수 방식을 취하고 있다.여기서 사용된 벽돌은 모두가 아름다운 연꽃무늬로 장식되었으며, 문양은 사용된 위치에 따라 몇 종으로 구별되는데 길이모 쌓기에 사용된 벽돌에서의 문양은 중간에 사격자의 망상문을 두고 그 양단은 네모나게 구획하여 대각 십자선의 중심에 6판의 소형 연화문을 하나씩 배열하였다. 작은모 쌓기 벽돌에서는 세 종류의 문양이 사용되었다. 벽체 하부를 구축한 전에는 주위를 네모나게 구획하고 그 내부에 팔판연화문을 반절한 것과 그 양편에 인동문을 하나씩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좌우로 맞대고 구축하였으므로 벽면에는 만개된 팔엽연화문의 전형이 이루어지게 되어 아름답게 배열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연꽃이라는 불교적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고인의 명복과 내생을 기리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무덤의 구조는 크게, 들어가는 입구와 왕과 왕비를 모신 현실의 방과 배수구로 나누어진다. 하여 북벽에 1개, 동 서벽에 2개씩 모두 5개소의 작은 벽감을 두어 내부에 청자등잔을 배치하였다. 등 밑에는 각각 창을 상징하는 모양을 시설함으로써 방안에 조명과 함께 영원으로 향한 창문들이 갖추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바닥구조는 먼저 암반을 평탄하게 깎아낸 후 그 상면에 벽돌을 삿자리 모양으로 배열하고 벽돌 사이에는 석화를 발라 암반에 고정시켜 깔았다. 묘실 남벽의 중앙에서 시작된 연도는 길이 2.9m, 너비 1.04m, 높이 1.45m의 규모이며, 천장은 완전한 아치를 이루고 있다. 돌의 문양과 구축방법은 묘실내부와 흡사하나 팔판연화문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바닥의 높이는 묘실의 바닥보다 높아 관대와 동일하게 하였다. 이 능에서 출토된 유물은 사용된 재질로만 분류해도 석조물, 목제품, 금은제품, 청동기류, 도기류 등 다양하며, 모두 108종 2,906점으로 이 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 17점에 달한다. 이 무령왕릉은 전축분으로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무덤 중 유일한 벽돌무덤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하겠으며 백제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매우 소중한 능이다. (2) 송산리 고분군송산의 중턱쯤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굴식 돌방무덤이다. 공주지역의 백제유적 중에서는 처음으로 1927년에 조사되었는데,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도굴된 것이었다. 조사 당시에는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5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4기만이 복원되어 있다.고분은 지하로 땅을 파고, 그 안에 벽돌모양으로 깬 돌을 축조하여 묘실을 만들었다. 묘실은 가로와 세로의 크기가 거의 같은 정사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남벽의 우측에는 묘실로 들어가는 널길이 달려있다. 벽면과 천정에는 백회를 발랐으며, 바닥에는 자갈을 깔았다. 도굴된 다음에 조사되었지만 금제와 은제, 그리고 금동제의 유물이 출토되어 웅진시대 백제사 복원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3) 공산성공주시 금성동, 산성동, 옥룡동에 걸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석혼축 산성으로 둘레 2결되고, 북으로는 해발 110m의 분지형 야산에 위치하며, 동서의 길이가 약 800m. 남북의 길이는 약 400m의 포곡형 형태를 띄고 있다.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시대 선조, 인조때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공산성은 백제시대의 도성이기는 하나 백제시대 뿐만 아니라 역사의 변천 속에서 시대별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였으므로 각 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성의 명칭은 백제시대 축조 당시는 웅진성이라 하였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주산성, 공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성의 구조는 석축이 약 1,925m, 토축이 약 753m, 동문지 밖의 토성 467m까지 포함하여 전체가 2,660m이며 외성을 제외하면 2,193m가 된다. 현재 성벽은 높이 약 2.5m, 너비 약 3m로 대부분 보수되어 있고 성벽은 이중으로 쌓여져 있다. 성 내에는 진남루, 공북루, 쌍수정, 명국삼장비, 쌍수산성사적비, 영은사, 연지, 임류각, 군창지, 동문, 서문 등의 유적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의자왕이 일시 거쳐가기도 하였으며, 또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822년에 김창헌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으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대왕이 피난하였던 곳이기도 하다.① 금서루금서루는 공산선의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이었으나 문지조차 훼손이 심하여 원상태의 복원이 어려웠으나 옛 기록과 동문지의 조사를 실시하여 1975년 성곽에 대한 보수공사를 겸하여 문지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1990년에 이르러 본래의 문이 있던 자리에서 남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철종 10년에 편찬된 기록에 의거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 건물로 복원하였다. 이 문루에서 웅진성 수문병 근무교대식 행사를 매년 백제문화제때 재현하고 있다. ② 쌍수정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일시 파천한 곳이다. 그 당시 이곳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쌓여 있었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두 그루의 나무에 정 3품의 통훈대부를 하사하였는데 이후 나무가 죽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영조 10년 관찰사 이수항이 쌍수정을 건립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후 몇 번의 수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건물의 형태가 많이 손상되어 1970년에 전면 해체하고 새로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③ 쌍수정 사적비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던 (인조2년 2월 13일~23일) 10일간의 내용을 새긴 비문이다.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지은 것으로 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썼다.④ 추정 왕궁지1930년대에 쌍수정 광장으로 불리던 넓이 약 1,600평방미터를 운동장으로 만들 때에 건물의 주춧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1985~1986년에 걸친 발굴 조사 때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의 저장 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연꽃 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부 건물터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우는 방식인 굴건식 유구가 확인되어 백제가 수도를 옮기기 전에도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⑤ 진남루공산성의 남문이며, 조선시대에 삼남의 주문이기도 한 이 문은 토성이었던 공산성이 석성으로 개축된 조선 초기에 세워진 문루로 1947년 장마로 유실되었던 것을 1949년 공주 고적 보존회가 재건하였으며, 지금의 문루는 1971년 전면적으로 해체 보수한 것이다. 문의 형태는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로 대칭시켜 조성한 후 그 위에 장대석을 겹쳐 덮은 다음 문루를 건축한 것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 팔작집이다. 이 진남루는 선조 35년에 관찰사 유근이 남문루 2층을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문루는 누정건물로 특별한 시설은 없지만 문루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단의 석축단을 두어 고준한 느낌을 준다. 문루의 남쪽 전방이 멀리까지 내려다보이고 주변에는 숲이 울창하.
    인문/어학| 2009.05.06| 8페이지| 1,500원| 조회(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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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회에서의 공자
    현대 사회에서의 공자역사교육학과 20060799 이 소영흔히 공자는 춘추전국 시대라는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문화와 학술을 집대성하여 중국적 문화골격을 이루는데 공헌하고, 중국 민족정신의 기초를 닦는 데 있어 크게 이바지한 사상가로서 묘사되어왔다. 그러나 전근대사회에서 근?현대사회로 이행하는 극심한 사회적 변동기 속에서 이러한 공자상은 부정되기도, 또는 확대 해석되기도 하였다. 특히 시대나 사회주도층세력에 따라 공자에 대한 해석은 천차만별 달라져 왔는데 이러한 비판과 옹호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자는 보수반동가에서 혁명가까지 다양한 평가와 이미지의 대상이 되었다. 어째서 현대 사회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의 사람에 대해 이토록 격한 논쟁을 일삼아 오고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현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 문제를 현대 중국에서 바라본 공자에 대한 관점과 그의 사상에서 이끌어 낸 현대사회의 모순 극복 방안과 연관시켜 보고자 한다.공자가 주창한 사상은 전근대사회의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강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이들 나라의 중심 사상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해왔다. 때문에 공자는 전근대사회와 봉건주의의 상징으로서 대표 되었고 타종교와는 달리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유가 사상의 근원지인 중국에서는 기존의 군주지배체제를 붕괴시키고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가 근대성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자와 예교질서를 타도시켜야한다는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자에 대한 발전론적인 관점인데 이로 인해 1910년대 중국에서의 5.4 신문화 운동과 문화대혁명, 비림비공운동 당시 봉건적인 유산을 청산한다는 목적 하에 공자 중심의 유가 사상은 파괴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서구 문명의 지나친 모방에 대한 비판과 서구식의 근대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공자 사상이야 말로 민족 문화를 부흥시키고 영구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는 환원주의적 관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재평가 및 관심은 장개석 정권의 신생활 운동에 적용되었으며 유교적 전통 속에서 현대 사회와 결합할 수 있는 가치를 찾고자 하는 지식인 중심의 현대 신유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유교사상에 대한 발전론적 관점의 경우 2000년 넘게 문화의 기반으로 자리 잡은 공자사상 중심의 전통을 지나치게 부정하고 배제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관점의 경우 공자를 중국 민족의 안위를 지키는데 기여한 민족주의자로 추켜세우기에 급급한, 즉 자문화중심주의적 경향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이렇듯, 공자를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해선 공자의 가르침을 현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에 적용할 필요가 있는데 먼저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대립, 갈등으로 인해 더욱 만연해진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심지어 공자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진 흑백논리는 공자가 주장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뀌거나 기울지 않는 중용의 자세를 통해 이겨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소외현상, 특히 노인 문제의 경우는 효 사상으로 비롯되는 가족윤리가 그 치료적 방안이 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기주의 만연 풍조는 살신성인하는 공익 우선의 가치관을 통해 극복 될 수 있다.
    인문/어학| 2008.04.30| 1페이지| 1,000원| 조회(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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