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면서21세기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여성의 가치가 주목 받는 시대가 될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넘어오면서 여성의 몫으로 남겨져 있던 가사노동은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님은 물론, 사회의 가치관이 변함에 따라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렇듯 여성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 가치를 창출한 대표적인 인물로 신사임당이 있다. 나는 신사임당이‘현모양처’이기 전에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우리에게 모범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조선시대 유교적인 여성의 지위에 굴하지 않고,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교육관을 지녔으며, 예술성에 관한 탁월하고 비범했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신사임당의 이러한 여성상에 대한 활동을 통해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자 한다.Ⅱ. 신사임당의 발자취1. 생애사임당이 태어난 강원도 강릉 땅은 옛날 예국(濊國)) 의 수도였던 오랜 역사를 통하여 빛나는 문화와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서쪽에는 태백준령의 대관령이 있고, 동쪽에는 푸른 동해가 펼쳐져 있다. 사임당은 조선 연산군 10년(1504) 외가인 강원도 강릉 북평촌(北坪村 : 현 오죽헌)에서 음력 10월 29일 새벽에 아들 없는 집안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조선초기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은 대표적인 여성으로 인품, 재능을 겸비한 한국의 모범적인 여성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명종 6년(1551) 5월 17일 새벽 병으로 누운 지 3일 만에 48세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그 후 파주 두문리 자운산하) 에 묻혔다.사임당의 아버지는 신명화이며, 어머니는 이씨 이사온의 딸이다. 본명은 신인선이며 어렸을 때부터 학문의 열의가 높았고 침공, 자수는 물론 당시의 여자로는 드물게 시 ? 서 ? 화에 모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 ? 임사재 라고도 하였다. 사임의 의미를 살펴보면 사(師)는 배우고 본받는다는 뜻이며 임(任)은 중국 고대 주(周)나연마에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결국 사임당은 태임과 같은 훌륭한 어머니가 되겠다는 인생관을 갖고 사신 분인 것이다.사임당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전해져오는 기록은 별로 없으나 어머니 이씨와 할머니 최씨와 더불어 오죽헌에 살았고, 7세 때부터 스승 없이 혼자 그림 배우기를 시작하였고, 붓놀림이 남달랐으며 안견의 화풍을 본받아 산수 포도와 풀벌레를 그리는데 절묘한 솜씨를 보였다. 당시의 여인으로 그림이나 학문을 익히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주변의 부모님과 외조부, 외조모 등이 사임당의 재능을 발견하여 글을 가르치고 그림공부를 하도록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3세 때인 중공11년(1516)에 아버지가 한성에서 진사에 올랐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 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 의 참화는 면하였다. 19세(1522)에 덕수 이씨인 원수와 혼인하였다. 그녀는 21세 때에 맏아들 선을, 26세 때에 맏딸 매창을, 33세 때인 이른 봄 어느 날 밤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있어 바다 속으로부터 물결이 치면서 백옥 같은 옥동자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가졌고 1536년 12월 26일 새벽에 검은 용이 분 바다로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오죽헌에서 셋째 아들 율곡을 낳았다. 그래서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한다. 이렇게 모두 7남매를 낳아 키웠다.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친정에 아들이 없어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서 생활하였다. 38세 때 친정에서 어머님을 하직하고 한성으로 올라오며 대관령에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서울 수진방에서 시집의 모든 살림살이를 주관했다. 48세 때 집을 삼청동으로 옮기고 같은 해 여름(1551년 5월 17일 새벽) 남편이 수운관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누워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2.시대적 배경조선시대 여성교육은 당시 유교적 사상으로 인해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성들은사회에서 살았지만 남성에 위축되기 보다는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 어려서부터 글월과 예법을 익혀 일생을 통해 부덕을 연마한 이상적 여성이라 할 수 있다.3. 유적(遺跡)노산 이은상‘사임당의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끼쳐 있었음이야말로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다행한 일이어니와, 그를 사모하고 존경하는 우리들은 그의 끼친 작품만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의 다니던 곳 앉았던 자리마저 찾고 더듬어 앙모하는 뜻을 다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민족 문화의 각도에서 볼 적에 더욱더 귀중함을 인정하게 도는 것이니, 어찌 나무 한 그루인들 소홀히 할 것이랴.’사임당의 유적지라고 할 만한 곳을 소개한다.① 오죽헌(烏竹軒)강릉시 죽헌동 203번지에 있는데 경포대와 경포 호수 ,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목조, 단층, 팔작, 한식 기와지붕으로 된 18평 규모의 집인데 보물 제 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임당도 이곳에서 태어났고, 율곡도 이곳에서 태어났고 특히 율곡이 태어난 방은 몽룡실) 이라 하여 소중히 보존도고 있다. 후원에 검은 대나무가 자생하는 까닭에 이곳을 상속받은 율곡의 이종아우 권처균이 자신의 아호를 오죽헌이라 부른데서 이곳을 통칭 오죽헌이라 부르게 되었다.②판관대 (判官垈)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 영동고속도로변에 있다. 일찍이 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와 만나 율곡을 잉태한 곳으로 전하는 곳인데 지금 그 자리에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나 판관대비를 세워 전하고 있다. 판관대란 이원수가 판관벼슬을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③파주 자운산 묘역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동문리에 있는데 사임당고 율곡의 내외 등 일가의 묘역이 있다. 원대 율곡의 선대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에서 대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묘역 부근에 자운서원과 경기도 교육연수원인 율곡교육원이 있다.④사임당 교육원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교향리에 있다. 강릉에서 50여 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1977년 ‘사임당의 얼을 이어받아 나라와 겨레를 위할 줄글씨로 ‘신사임당 상’이라 썼고, 다른 면에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사임당의 약력과 ‘사임당 찬가’를 김충현 선생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Ⅲ.사임당의 솜씨1.시(詩)①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고-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늙으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림영외로이 서울길로 떠나는 이마음 (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때때로 고개돌려 북평쪽 바라보니 (回首北坪時一望) 회수북평시일망흰구름 아래로 저녁산이 푸르구나. (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사임당이 강릉에 살다가 시집으로 갈 때 대관령을 넘으려 마루턱에 앉아 북평에서 친정을 내려다보면서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율곡이 지은?어머님 행장?에 의해 나타난다. 친정에 늙은 어머니 혼자 남겨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대관령에서 집을 바라보면서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② 어머님 그리워-사친(思 親)산이 겹친 내 고향은 천리련마는 千里家山萬疊峰(천리가산만첩봉)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歸心長在夢魂中(귀심장재몽혼중)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孤輪月(한송정반고륜월)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전일진풍)갈매기는 모래위에 흩어졌다 모이고 沙上白鷺恒聚散(사상백로항취산)고깃배는 파도 위로 오고 가리니 波頭漁艇各西東(파두어정각서동)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색동옷 입고 어머니 곁에 바느질할꼬 綵服斑衣膝下縫(채복반의슬하봉)평생을 모친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사임당의 간절한 심정이 표현된 작품으로, 자신의 운명적 삶에 대한 한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 시에서는 작자의 의식의 흐름이 현실과 환몽 그리고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개되고 있어, 작자 내면에 자리한 간절한 그리움의 의미를 더욱 절실하게 하고 있다. 사임당은 평소 가끔씩 비녀에게 거문고를 뜯게 하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사임당이 평소 친정의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바 어머니野艇帶月過江村正落寒潮水相隨夜到門)강남양초헐 산암운유습 말가동귀요 전계풍정급(江南兩初歇山暗雲猶濕末可動歸橈前溪風正急)동림송객처 월출백원제 소별노산원 하수과호계(東林送客處月出白猿啼笑別盧山遠何須過虎溪)해안경잔설 계사조석양 가빈하소유 춘초점간장(海岸景殘雪溪沙釣夕陽家貧何所有春草漸看長)병풍은 당시(唐詩)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초서로 쓴 것으로 강릉시 두산동 최돈길가(家)에서 대대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1971년에 강릉시가 양수하여 율곡 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이 병풍이 최씨 문중에 있게 된 것은 사임당의 이종 손녀(권처균의 딸로 최대해의 처)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 한다. 영조 때 이 글씨가 이웃 고을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당시 부사 이형규가 되찾아 주고 병풍으로 꾸며 보관하게 하였다.고종 6년(1869)에 최씨 집에서 불이나 온 집안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당시 안주인(김씨)이 80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불길 속에서 제일 먼저 이 병풍을 끌어내고 숨졌다 한다. 그 후 부사 윤종의가 이러한 일이 다시 있을까 염려하여 판각(板刻)을 만들었으며 이는 현재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②해서 1폭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3.그림신사임당의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화초어죽(花草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사임당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여러 기록이 있는데 그중에 명종 때의 어숙권은 『패관잡기(稗官雜記다.
Ⅰ. 머리말우리나라에 있어서 개항은 열강들의 제국주의가 침략하여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시키면서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변모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최초로 맺어진 조 ? 일 수호조규 즉 강화도 조약은 무역을 통한 경제침탈의 기반이 된 불평등한 조약이었고, 이후로 맺어진 열강들과의 조약 역시 불평등한 조약이었고 그 결과로 이어진 개항 역시 조선에게는 불리한 경제 사회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개항 이후 한국근대사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며 자주적인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근대사의 기점을 19세기 말 개항이후라 보고 1876년 조?일 수호조규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은 후 그해에 부산, 80년에 원산, 83년에 인천을 차례대로 개항하고 일본과의 무역을 확대해 나갔다. 통계자료를 통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1880년대 중반 무렵 중국과의 무역도 확대되었다. 1882년 조?청 수륙무역장정을 맺어 연안항해권과 상선이나 군함을 통해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무역의 변화는 통계의 수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추측되었다. 청?일 전쟁 이후 조선의 무역구조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수출과 수입이 모두 이전보다 약 2~3배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성적인 수입초과현상이 지속되었으며, 무역적자가 확대 ? 누적되고 있었다. 양적인 변화와 더불어 수입상품의 질적인 변화도 일어났다.1894년 이전 조선무역의 기본형태는 경?공업품과 농산물의 교환이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시기를 전후로 하여 소비재 생산부문의산업혁명이 시작되자 조선의 무역구조가 양과 질에서 모두 변하게 되었다. 영국제와 함께 일본제 면제품이 직접 수입된 것이다.1893년 4월에는 일본과 중국의 무역의 수치는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증가하였고 수입이 거의 비슷했지만)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이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일본이 조선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로 경쟁관계에 있던 청나라 상인이 대거 물러갔고 또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산 상품을 수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종래 조선에 수입된 구미 상품은 대개 사치품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국내 산업에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않았지만 일본 상품은 국내 상품과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점에서 국내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심각했다. 정규적인 무역 이외에 당시에는 밀무역도 성행하고 있었다. 청과 일본의 대다수 상인들이 세관을 거치지 않고, 불법적으로 조선 상품을 수출하거나 외국 상품을 수입하는 밀무역에 관여하여 밀무역으로 거래되는 양이 정규무역을 통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을 정도였다. 게다가 청국병선에 대한 밀무역의 합법적인 조치라든가 금의 무관세 규정은 밀무역에 대한 통제를 불가능하게하고 오히려 밀무역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Ⅱ. 개항이후 사회 경제적 영향1. 쌀 수출과 농업경영의 변동1880년대 일본의 양곡 사정은 수입보다는 수출이 월등히 많을 만큼 수급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1889년에 흉년이 들어 1890년에는 많은 양의 미곡을 수입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1882년부터 1889년까지 흉작이 계속되어 수출량보다는 오히려 수입량이 낳았다. 이 때의 주요 수출품으로는 쌀과 콩 등 곡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약 70%에 육박했다고 하였다. 그 외에 쇠가죽, 해산물 중에는 특히 건어물류, 금 (금이나 은은 화폐취급을 하였으므로 무역통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등이 많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쌀의 수출은 개항 이래 계속되어왔고 그 물량도 많았지만, 갑오개혁에 의한 조세의 금납화와 더불어 당시 산업혁명을 경험하고 있던 일본의 쌀 수요 확대가 쌀의 상품화 및 수출을 촉진시켰다.이 중 쌀과 콩은 일본이 가장 많이 수입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일본으로 수출된 쌀의 3분의 2이상이 오사카와 고베를 연결하는 한신 지역의 공업지대 노동자들에게 지급되었다. 일본은 자본주의체제가 도입되어 농업보다는 공업중심의 체제로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지대였던 한신 지역은 싼 값의 쌀이 필요하였고 이 지방의 하층노동자 ? 잡업층의 식때문에 일본쌀에 대해서 대체성이 높았다.따라서 수입미 중에서 조선 쌀이 비싼 편이었다. 이처럼 1890년 이후에 나타난 쌀 수출의 급증은 일본 자본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저임금구조의 유지에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의 형성은 우리나라 농민들의 소상품 생산자로서의 성장을 저지하고 많은 빈농층을 발생시킴으로써 가능하였다.)이 외에도 일본은 쌀로 청주(정종)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하거나 가공식품을 만들었으나 풍?흉의 차이가 커 쌀의 수입이 불가피하였다. 콩을 수입한 이유는 콩으로 된장, 두부, 간장 등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2. 면제품의 수입과 소상품의 생산자 층의 몰락18세기 洋木(서양에서 온 면제품을 말한다)은 개항 전에는 중국을 통해 대부분이 들어왔고 영국제품은 전체의 1/4를 차지하였으며 이를 통해 또 다른 시장체계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영국 면제품은 내구성은 약하지만 윤기가 흐르고 우리나라 무명은 내구성은 강하지만 거칠어서 수공업 면포는 농촌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18세기의 수출품은 인삼으로 사신들의 여비로 충당하였고 수출품은 사치품으로 부유한 도시계층들이 주로 애용하였다. 사치품 중에는 모자나 양목이 있었고 당시에는 척화파세력이 권력을 주도한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금지품목 이었으나 개항 후 에는 전면화 되었다.1890년대 이후 주요 수입품은 공산품 중에서 면제품이 거의 70%이상 이었으며 석유, 성냥, 생활용품이 대다수였다. 면제품 중에는 면사(면화 실로 짠 것을 말한다)나 면포(옷감을 말한다 : 완제품을 말한다)로 나눌 수 있었다. 중국에는 면사가 우리나라에는 면포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무역관계를 미면교환체제라고 불렀다.이후로 들어오면서 1894-5년 청?일 전쟁이후 조선이라는 확실한 시장을 확보한 일본의 섬유공업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일본제 면제품이 수입되기 시작하자 면포를 생산 ? 판매하던 농촌의 소상품 생산자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청 ?일 전쟁 이전에 많이 수입되었던 영국 면제품은 아름답고 윤기가 흐르는 광택을 보였으그 규격이나 품질이 조선산 면포와 유사하였다. 심지어 진주지방의 면포를 모방해서 ‘일본진목’이라고 나오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수입된 일본제 면제품은 소폭목면 ? 쉬팅 ? 방적사 등이 중심이었는데, 완제품인 면포류의 총액이 면사보다 훨씬 많았다.) 대부분이 수출용으로 만들어졌던 쉬팅은 수출량의 반 정도가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일본제 면제품은 대부분 소상품 생산자인 조선 재래의 면포업자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재래의 면포생산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 위한 농가부업으로서 가내수공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면포생산에 관련된 소상품 생산자 층의 자본축적 ? 생산 확대의 기회가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제 면포는 조선재래 면포와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선의 소상품 생산자들의 발전을 억압하고, 농민들의 의한 면포 자급자족경제를 해체시켰다.그러나, 일본제 면포의 조선시장 침탈에 대한 저항도 매우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경상도나 전라도 지방에서는 재래 면포가 꾸준히 저항하였는데 부산의 일본목면 수입량은 1896년을 정접으로 정체되었고 1902~1904년에는 오히려 감소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에 비해 이 지역에서 다른 지방으로 팔려나가는 재래 면포는 1896년 이후 대체로 감소하다가 1899년을 고비로 1906년까지 크게 증가하였는데 일본면목의 수입 감소는 재래면포의 성장 및 저항에 연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는 근대적 방직공업을 일으켜 외래 면포의 유입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민간과 정부 차원에서 많은 방직관계 회사가 설립되었고 동시에 기술개량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 서울이었다. 서울지방의 많은 직물업자들은 개량직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고, 기계를 이용한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해보기도 하였다.)조선 농촌 수공업 면포와 경쟁이 일어나 면포시장의 혼란을 가져왔다. 조선의 면직물업은 관세 장벽 등 국가적인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일본의 기계제 면제품과 힘든 경쟁을 벌여나가다가 1905년 이후 식민지 권력 이러한 대응책으로는 일본제 면포에 이길 수 없었다.Ⅲ. 맺음말1904년 러?일 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의 권력을 독차지 하였고 자국의 요구에 맞는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각종 법령의 정비, 군대와 경찰의 해산, 철도?항만?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농업이민의 장려 등 식민지화의 기초 작업을 추진하면서 조선을 자국의 식량 및 원료공급시장, 상품판매시장으로 만들어 나갔고 국내시장은 붕괴위기에 접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하여 일본은 우리나라에 고문정치를 실시하여 통감부를 설치하였고 이때부터 조선 식민지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 작업과 더불어 식민지지배를 효율적으로 해나가기 위한 제반조사를 실시하고 식민지지배의 기본조건을 마련해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의 식민지에 대한 요구는 식량?원료의 공급지와 상품시장의 확보 모두를 식민화 시키는 것이었다. 이 시기 일본이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은 식량 및 원료의 공급과 관련되는 부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을 맺어 일본은 우리나라에 차관정치를 실시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 합방하여 일본이 총독부를 설치하게 되면서 미국의 육지면 면화원료를 들여와서 면포생산보다는 면화재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원료공급지로 전락시키는 것을 추진하였다.쌀의 상품화와 증가로 쌀값은 상승하였고 화폐가치는 떨어져서 물가가 상승하게 되었다. 쌀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농민들은 밭을 논으로 일구고, 개간지를 간척사업을 하여 논으로 일구는 등 논을 확대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사업은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지주들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지주들의 논에 대한 면적은 확대되어 갔고, 비료나 농업기술을 동원하여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을 늘려갔다. 자작농들은 추수 후에는 바로 판매를 하여 어려운 생활을 반복해 나갔으나 지주들은 추수 후에는 쌀값이 내려감으로 농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봄철에 비산 값으로 내다 팔았다. 이에 따라 지주의 힘은 더 하였다.
- 한국의 문화와 예술 -Ⅰ. 들어가면서전통과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개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은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오히려 전통의 속박보다도 더 무서운 속박의 위험에 봉착한다는 자유의 역설을 현대 서구 지성은 깨닫기 시작했다. 극도의 개인주의가 낳는 소외와 고독, 권위와 방향성의 상실을 목도하면서 일부 서구 지성인들은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인간관계 속에서 전통의 힘과 공동체의 가치를 새롭게 회복시킬 방도를 모색하고 있다.) 그 하나의 방편으로 동양의 정신문화에서 찾고자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반면 동양은 서양의 세계관이 도래하는 19~90세기 동안에 동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정당한 평가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평가절하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도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으며, 주도적인 문화 역학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전통문화의 생명력 자체는 없어지지 않았으나 주인이 아닌 객이 되어버린 우리시대의 문화적 갈등이다.동양은 문화형성의 초기부터 건축을 공간의 대상으로 파악했고 공간을 관계의 개념으로 접근했다. 이는 동양문화 고유의 특성에 의한 결과였다. 시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전통공간을 계고할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공간을 연구하는 것이 곧 시대의 역사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근본적으로 우리 전통건축 공간의 중심에는 어떤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정리된 공간이 갖는 특성과 구조는 어떤 것인가를 더욱 명확히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편적인 언어로 정리하여야 할 것이라고 본다.)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고유한 나만의 개성이 다른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면 더욱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고유한 전통 속에서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을 구별해 내야 한다.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 나라의 삶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중의 하나가 종교일 것이다. 지배자는 원시시대부터 시작해서 통치를 이 고려시대에 태어났지만 송광사 중창을 시작한 해가 정종원년이었으니, 따라서 삼보 사찰이란 명칭은 조선시대 들어서고 난 뒤에 생겨난 것이다.송광사는 예로부터 승보 종찰로 이름난 절이니 만큼 청정한 승풍을 지켜온 것으로도 널리 이름이 났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송광사에 크게 깨우친 고승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찾아왔다. 조계산으로 들어서서 송광사 들머리로 향해 시냇물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니 냇물에 배춧잎 하나가 둥실둥실 떠내려 오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것을 보고 “뭐 이런가. 이렇게 음식물 하나 아낄 줄 모르는 절에 무슨 고승이니 대덕이 있을 턱이 있겠는가. 에이 헛걸음만 했구나.”하고 실망하며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을 오던 길을 되짚어 가고 있는데 뒤에서 "스님, 스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사미승 하나가 헐레벌떡 뒤따라오며 부르고 있었다. “왜 부르느냐”하고 스님이 묻자 사미승이 이렇게 되묻는 것이 아닌가.“스님, 혹시 오시다가 냇물에 배춧잎 하나 떠내려가는 걸 보지 못하셨습니까?”“봤지”그러자 사미승은 떠내려간 배춧잎을 찾으려고 부리나케 시냇물을 따라 달려 내려갔다. 스님의 모습을 보고서야 스님은“그러면 그렇지! 송광사의 승풍이 준엄하다는 말이 과연 헛말은 아니었군.”하면서 다시 발길을 돌려 송광사로 올라갔다고 한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 -승보사찰다운 송광사의 이 같은 청정 준엄한 승풍의 전통은 오로지 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사를 한국선종의 종찰로 자리매김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광사에 가면 우리나라 불교가 들어온 뒤 처음으로 체계적인 결사운동의 구심체인 정혜결사를 만들어 조계종풍을 일신한 보조국사 지눌의 영정이 국보 제56호로 지정된 국사전에 모셔져 있고, 삼일암 왼쪽 언덕 위에는 보조국사 사리탑인 감로탑과 비가 있으며, 성보각에는 보조국사의 원불이라고 전해지는 국보 제42호 목조삼존불감이 소중히 보존되고 있다.보조국사비는 원제가‘승평부 조계산 송광사 하여 6조 혜능의 가르침의 요체를 스스로 터득했던 것이다. 뒷날 지눌선사는 문도들을 가르칠 때 이 『육조단경』을 비롯하여 『금강경』과『화엄경』을 기본 경전으로 삼았다.3년 뒤인 1185년(명종 15년)에 선사는 거처를 하가산 보문사로 옮겨 주석했다. 하가산은 하가산 또는 학가산이라고도 하며 경북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에 있는데, 667년(문무왕 17년)의 의상조사가 창건하고 1184년에 보조국사가 중창했다고 하니 이 말이 맞는다면 지눌선다는 이미 1년 전에 보문사를 찾은 것이다.이후 후학들의 가르침에 있어서도 깊이와 넓이가 더해져 갈수록 따르는 문도가 늘어났는데 그 중에는 승려도 있었고 우학자도 있었고 속인으로 유명인사도 있었다.그런데 고려 왕실에서는 1170년(의종 24년)에 정중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에 의해 명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해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그 아우인 平凉公 旼이 새 임금으로 옹립되니 곧 신종이다. 그러나 신종은 본래 병약하여 7년 뒤인 1204년에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 태자가 바로 보조국사를 극진히 존경하던 희종이다.이처럼 당시 고려 조정은 무신정권 치하에 있었으므로 왕권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고, 불교는 비록 국교로서 튼튼했다고는 하지만 일부 권승이 무신들과 결탁하여 축제를 하거나 백성을 괴롭히는 등 타락상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불교계 내부적으로는 선 ? 교 양종이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대립하는 양상이었다.보조국사 지눌은 이런 시기에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이 바로 정혜결사로 나타났으니 이는 약100년 전에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세워 교학을 위주로 선 ? 교 양종을 통합하려고 했던 것에 반해 남종선을 중심으로 북종선을 아우르고 선동의 입장에서 양종을 통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지눌선사의 제자인 수우대사가 길상사로 내려가 대규모의 중창 불사를 일으켜 80여 칸의 건물을 완공한 것도 바로 그 해 1197년이었다. 지(法性偈)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도시의 평지에 지어지지 않고 산속에 위치한 산지 사찰로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고저차를 조정하기 위하여 두 단의 석축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석축을 기준으로 전체 사역은 밑으로부터 하단 ? 중단 ? 상단의 세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대웅전 뒷면의 높이 30, 40 척의 석축 위로 설법전과 수선사를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건물인 하사당과 국사전이 있는 상단 지역이 있다. 이곳에 선원의 성격을 지닌 설법전과 수선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선종에 바탕을 두고 수선을 중시하였던 보조 국사의 창건 이념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사실이다.한편 건물들의 배치 역시 종고루와 대웅전을 연결하는 중심축선과 이에 직교하는 축에 맞게 놓여 있으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전체적인 축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배치 계획의 자유로움을 지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설법전의 중심축과 우화각?천왕문의 중심축이 대웅전?종고루의 중심을 지나는 중심축과 일치하지 않고 조금씩 틀어지게 되어 있는 것 역시 그러한 선종 사찰의 특성을 보여 주는 경우이다.또한 송광사의 배치는 법성게의 도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사역 안에서는 비를 맞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법성게라고 하는 것은 의상 대사(義想大師, 625~702)의 210자 7언시를 도식화한 ‘華嚴一乘法界圖’를 말하는 것이다. ‘국사전중창상량명변서’와 ‘해청당중수기’의 내용 가운데 법계도의 모양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려고 했다는 기록과 요사채의 명칭을 법계도의 내용과 관련지었다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볼 때 사찰의 배치 계획이 법계도와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물론 법계도의 도식을 정화하게 따라 배치 계획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종축선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길게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다른 사찰의 일반적인 예와 비교하여 볼 때 송광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역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모여 있으며, 그 배치가 중심 중창이 완료되었고, 그 이후로도 많은 건물들이 지속적으로 중수?중건되었다.그 이후 1920년부터 10여 년간에 걸친 제6차 중창이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송광사는 과거의 면모를 되찾게 되었다.이상에서와 같은 배치 구조를 지니고 있던 상단과 중단에 변화가 오는 것은 한국전쟁이 전화로 이들 지역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소실되면서부터이다.한국전쟁 이후 취봉스님과 구산스님에 의하여 대웅전, 명부전, 응향각 등이 중창되고 종고루와 박물관이 새로이 조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전각과 문루로 밀집되어 있었던 중단의 중심 영역은 과거의 면모를 되찾지는 못했다.송광사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83년부터 시작된 제8차 중창 계획이 1988년 완성된 이후이다. 이 계획에 의하여 중단의 중심영역에 새로이 대웅보전, 승보전, 지장전, 성보유물각 등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대웅보전이 과거 대웅전이 있던 장소에 새로 크게 조영되었고, 박물관이었던 자리에는 구대웅전 건물이 승보전으로 개칭되어 재건되었다. 또한 명부전이 지장전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증축, 이전되어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배치 구조를 되찾게 되었다.이와 같이 조계종의 본산으로서 또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로서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중창 계획을 통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는 하였으나 대웅전과 여러 문루를 연결하고 있던 중심축과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부속 건물, 그리고 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행랑 등의 배치 구조를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3-3.공간구성송광사는 창건 초기에는 금당 앞의 마당을 중심으로 중요 건물들이 행랑으로 둘러싸인 공간 구성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삼국시대부터의 전통적인 평지가람 형식이 산지사찰이면서 평지가람 형식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공간구성과 배치는 송광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동시에 송광사의 역사가 통일신라-고려 기간의 전통적인 사찰 계획 수법을 반영하는 근거로도 이해될 수 있다.이와 같은 평지 가람의 일반적인 공간 구성과 더불어)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정치적 측면을 중심으로국어국문학과 최지혜사학과 노지수최연주머리말1. 대한제국의 성격1-1. 황제 중심의 권력구조 확립1-2. 주도세력의 성격1-3. 대한제국의 정치이념2. 광무개혁맺음말머리말한 세기 전에 망했던 대한제국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500년 전통의 조선 왕조와 36년간의 식민지 시대 사이에 13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한제국에 대해 일반의 인식은 ‘망국의 정권’에 불과했고, 실제로 제도권 내 교육에서는 대한제국의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제대로 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대한제국에 대한 연구도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최초의 민권운동단체로 높이 평가 받는 독립협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실정이다. 대한제국에 대한 연구는 한국 근대 변혁 운동의 주체를 둘러싸고 이른바 광무개혁 논쟁이 두 차례 벌어지면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연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광무정권의 성격 규명 즉, 대한제국의 근대성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대한제국이야말로 굴곡 많은 우리 근대사에서 밖으로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을 저지하고 안으로는 낡은 봉건제의 개혁이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정점이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선포는 한국사상 최초로 등장한 황제의 나라 즉,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음을 의미하고, 개항 이후 청일전쟁, 을미사변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고조된 반외세 감정에 부응하는, 자주독립의 의식 환기를 위한 상징이었고, 이후 열강의 침략에 대한 선언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제국은 전근대의 조선왕조와 현대의 대한민국을 잇는 가교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이러한 측면에서 대한제국의 성격과 대한제국이 실시했던 광무개혁을 살펴봄으로써 고종황제는 흔히 생각하는 망국의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고, 대한제국은 한국근대국가수립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근대국가로 인식하는 과정은 년 이후에 이르러서야 종식되어 전제군주제적 통치체제의 수립으로 귀결되었다.)그 후에도 일본에 망명중이었던 박영효와 유길준 등이 주도한 쿠데타 음모가 진행되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제 황제는 최고결정권을 가진 상태에서 친미파 ? 친일파 ? 친러파 ? 황제측근파 등 여러 정치세력들을 상호 견제시키면서 전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황제전권정치가 이루어졌다.또한 갑오개혁 이후 1898년에 이르기까지 정부대신 및 실무작업 관리는 개화파 소속이거나 갑오개혁에 참여하여 성장한 세력이었기에 이들이 추진해온 개혁조치를 쉽사리 부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 역시 보수적인 유생들이 주장하는 과거 질서로의 복귀, 즉 공맹의 도를 숭상하고 과거(科擧)를 복설하는 등의 완전한 복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고종은 유교적 도학 군주가 아니라 서양 절대왕정기의 개명군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1-2. 주도세력의 성격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을 겪으면서 고종을 비롯한 민중들은 일본이 더 이상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의 우방이 될 수 없음을 확신했다. 이에 따라 각계각층에서 칭제 요청 상소가 올라왔고 고종은 1년 간의 여론수렴 과정을 통해 대한제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 때 대한제국을 탄생시킨 주역들은 대부분 급진개화파도 아니고 보수적인 유생층도 아닌 ‘동도서기’를 따르는 개신유학자(남궁억, 장지연, 박은식 등) 그룹에 속하는 신진인사들로서 신분적으로 보면 하층 양반 혹은 중인층에 속한다. 그러나 대한제국 탄생 후 황제가 가장 신임하던 근왕세력들은 전현직 관료층이나 개신유학층과는 역사적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집단이 나타난다.광무연간 정부대신 역임자들은 조선왕조 시대 관료들의 일반적인 배경인 과거 출신자가 여전히 많으나, 서자이거나 무과 출신인 이범진, 이윤용, 민영기, 이근택, 이봉의, 이종건, 윤웅렬, 한규설 등도 대신직에 올랐다는 점은 갑오개혁 이후 관료사회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박제순, 유기환 등 상당수는 이미 으로 충성하는 근왕세력으로 성장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대한제국은 이와 같이 신분제 사회를 뛰어넘은 정권이라는 점에서 종전의 조선 왕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개항 이후 분열되었던 위정척사파)나 급진개화파도 대한제국기에는 정권에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대한제국은 보수적 유교정권도 아니고 급진개화파적 정권도 아니다. 전통과 근대를 절충하는 구본신참의 중도적 정권이라 할 수 있고 이는 곧 대한제국의 근대성에 직결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1-3. 대한제국의 정치이념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근대국가를 만들려고 했지만, 세계 각국이 나라마다 자기의 전통을 살려 군주전제, 혹은 입헌군주제, 혹은 공화제등 정치체제를 달리하고 있으며, 최고권력자의 칭호도 황제, 왕, 수상 등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은 우리의 전통을 살리면서 서양식 모델을 절충하는 ‘주체적 근대화’의 길 즉, ‘구본신참(舊本新參)’의 노선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의 의지해, 혹은 왕권을 약화시키면서 근대화를 시도하려는 ‘급진개화파’나, 중국 중심의 사대질서와 주자학 중심의 유교문화를 끝까지 고수하려는 ‘위정척사파’와 차별화 된다.‘구본’의 핵심은 ‘조선유일중화’ 사상과 ‘조선정통론’, 그리고 18세기 영?정조 이래의 ‘탕평군주상’과 ‘성인군주상’을 통한 ‘민국’건설이념을 계승하여 양반국가를 혁신하고, 황제권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탕평군주와 성인군주는 어느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군왕이 만민을 평등하게 바라보고 초월적으로 군림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래서 만민과 임금이 서로 일체가 되는 나라, 그것이 곧 ‘민국’이다.)고종황제는 이와 같은 성인군주, 탕평군주, 민국사상을 표방했으므로 정부 관료들의 자율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제와 백성의 일체성이 강화됨으로써 사회통합력은 오히려 상승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구본’의 실질적 효과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재건하여 ‘민’과 ‘국’이 하나가 됨으로써 보다 매개로 하여 위로부터의 주체적 근대화를 이룩함으로써 국민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비상조치라 할 수 있는데 이때 고종황제가 추진한 개혁을 ‘광무개혁’이라 한다.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실질적으로 밑받침 할 수 있는 물질적 바탕으로서 국방력과 재정력, 그리고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먼저 황제가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1899년 7월 원수부를 설치하고, 황제를 호위하는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를 대폭 증강하였으며 이어 원수부 안에 육군헌병대를 설치하였다. 그 동안 일본군에 의해 왕궁이 점령당해 온 수모를 막고 지방의 국방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다음으로 정부의 조세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토지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광무양전 ? 지계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1989년부터 1904년까지 6년 동안 실시했던 토지 조사 및 소유권 발부사업이다. 이를 통해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고 국가 재정이 개선 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양전사업은 여러 규정이 나라의 옛 법을 그대로 따른 점이나 지계의 원칙이 입안제도와 양안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은 舊를 本으로 삼은 것이고, 양전의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미국인 기사를 고빙함으로써 서구 근대의 측량기술을 이용한 점이나 근대적인 소유권 증서로서 지계 제도를 채택하여 근대적인 소유권으로 전환시킨 것은 新을 취한 것이다. 이전의 양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조사 대상이 농지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 토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토지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국가의 관리권 확립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국가 경영을 마련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그러나 양전을 실시한지 2년 만인 1901년에 큰 흉년이 들자, 양지아문)은 그해 12월 양전사업을 당분간 중지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때까지 양전 사업을 마친 곳은 경기 15군, 충북 17군, 충남 22군, 전북 14군, 전남 16군, 경북 27군, 경남 10군, 황해 3군 등 전국적으로 총124군이었다. 양전사업을가 추진한 이 사업은 근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이었다. 그 결과 1904년 당시 전국 군의 2/3에 해당하는 218개의 양전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으로 양전이 채 끝나지도 못하고 지계가 다 발행되기 전에 일본의 압력으로 이 기관은 해체되었고 사업은 중단되었다. 비록 중단되기는 했지만 구래의 소유권을 근대의 소유권으로 추인함으로써 지주자본을 근간으로 근대국가 건설을 지향하였던 광무 정권의 자주적인 근대 국가 건설 방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개혁 조처였다.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해서는 식산흥업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 후기 이래 농촌에는 경영형 부농을 비롯한 새로운 계층이 성장하였지만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본격화한 것은 아니었다. 유기제조업을 비롯한 일부 수공업과 광업 분야에 공장제 수공업 형태가 늘어났지만, 아직 전체 공업을 지배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상공업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국의 선진 기술을 수용하면서 국내의 상공업을 보호 육성해야한다. 이는 식산흥업을 말한다. 식산흥업운동은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와 정부가 적극적인 장려책을 펴고 민간이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활발히 추진되었다. 1898년 민인을 편안히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될 방도를 추구한다는 내용의 조칙을 내렸고 아울러 관민공동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학교 교육을 진흥하고 상공학교 개설에 착수했다. 1900년을 전후로 근대 상공업자를 양성하기 위한 각종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양잠업과 관련하여 농상공부에 잠업과가 설치되었고, 인공양잠전습소와 지방의 잠업 시험장이 설립되어 양잠업 기술자를 양성했다. 또, 광산 기술자를 양성하기위한 광무학교, 염직공?제지공?금공?목공 등의 공업기술자를 양성하기위한 직조 학교와 공업 전습소가 설립되었다. 정부뿐 아니라 민간의 제조 공장도 기술자 양성소를 부설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밖에 화폐 제도의 정비, 전화시설 마련, 중앙은행 설립, 새로운 도량형제의 제정 등을 비롯한 각종 근대화 시책을 추진하여 식산흥업의 여건을 조성했다.이러한 식산흥업운동이 성었다.
- 동양사 세미나 -- 2007년 1학기 -발표문제5장 개혁 ? 개방 노선과천안문 사건목차1.덩샤오핑 체제의 확립과 평화통일 정책으로의 전환2.농촌과 연해 지역에서 시작된 개혁 ? 개방3.정치 개혁 논의와 당의 개혁안4. 개혁 ? 개방의 딜레마와 높아지는 사회불안5.개혁파 내에서의 신권위주의 논쟁과 민주화 요구의 고양6.제2차 천안문 사건과 무력진압7.국제적 고립화와 냉전의 붕괴학 과 : 사학과학 번 : 20066011성 명 : 노지수과 목 : 동양사세미나교 수 : 손재현 교수님제출일 : 2007.5.18.금1. 덩샤오핑 체제의 확립과 평화통일 정책으로의 전환중국공산당 재11기 3중전회는 노선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나 화궈펑은 여전히 최고위직을 차지했고, 그를 지지하는 지도부도 건재했다. 덩샤오핑이 자신의 체제를 형성해서 확립하는 과정에서 풀어야할 과제는 첫째, 노선과 정책의 전환, 둘째, 화궈펑을 지지하는 지도부의 해체, 셋째, 화궈펑을 권좌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덩샤오핑은 한 번에 과제를 수행하지 않고, 정치 혼란 때문에 실천하기 어려웠던 첫 번째 과제부터 착수했다. 그 직후 두 번째 과제의 해결을 준비하고, 1978년 11월 제1차 천안문사건을 역전시킨 판결을 이용해 화궈펑 지도부의 약체화 ? 유명무실화에 몰두했다. 이와 더불어 1979년에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등을 정치국원에 발탁해 외곽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식으로 화궈펑이 지도부에서 갖고 있던 기반을 무너뜨려 점차적으로 덩샤오핑 지도체제가 그 기반을 굳혀나갔다. 마지막으로는 화궈펑의 실각이었다.“서두르지 않고 은근히 공격하는” 방식으로 추진했다. 1980년 8월에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와 제5기 전인대 제3회 회의에서는 성급하게 추진된 서양식대약진운동과 중월전쟁의‘실정’등이 문제로 제기되어 화궈펑은 국무총리에서 해임되고 그를 대신해 자오쯔양이 취임했다. 문화대혁명을 추진한 중신 인물이었던‘린뱌오와 사인방’에게는 사형 및 징역형의 판결이 내려졌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전회가 개최되고,「건국이 외교의 중점은 점차‘세계 평화 옹호’‘평화적인 국제환경 건설’로 옮겨갔다. 이어서 중국 외교의 특징으로‘독립 자주 노선’과 함께‘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처리하는데 평화공존 5원칙이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인식이 강조되었다. 즉, 어느 누구와도 특수한 관계를 갖지 않고, 실사구시를 중시했던 전방위 외교), 각각의 사례별로 문제 처리에 대응하는‘시시비비 외교’를 채택했던 것이다.또 하나의 중요한 정책 전환은 타이완 정책이었다. 이미 중국 공산당 제12차 전국대회부터 시작되어, 1980년대에 실현해야 할 3대 임무의 하나로 타이완과 홍콩을 포함한‘조국통일’ 을 제기하고 있다. 1979년의「타이완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미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던 날 발표되었다. 또 1982년 8월, 제112차 전국대회 2주전 미국의 타이완 무기 수출을 점차 축소시킬 것을 언급한 「중미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대타이완 정책과 대미 정책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고, 중국과 타이완 당사자 간의 논의에 의한 문제 해결은 동아시아의 안정을 고려하던 미국이 바라는 것이었다. 1980년대 전반 중국의 타이완 정책은 중국과 미국에게 희망을 주었으나 현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2. 농촌과 연해 지역에서 시작된 개혁 ? 개방1975년부터 쓰촨성의 당 제1서기에 취임했던 자오쯔양은 경영 관리의 하방(권한 이양), 가정 부업의 장려 등을 실시해 1977년 대풍작을 거두었다. 1987년에는 자류지)를 대폭 확대하고, 포산도조(생산관리의 작업조청부제)를 도입하는 등, 인민공사 아래에서 실시되었던 공동경영 ? 공동노동 방식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채택했다. 동시에 안후이성에서도 평양현 ? 추현 등 몇 개의 인민공사에서 촌 간부들이 비밀리에 생산대의 토지를 각 농가에 청부하고 농민의 생산 의욕을 높여 증산에 성공하고 있었다. 농가 생산청부제는 이 지역에서 확대되었고, 만년 적자 상황을 흑자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각종 생산청부제는 전국 규모로 확대되었다. 1982년 당 대회 종류 이후 을 갖춘 지역과 사람들로부터 먼저 부자가 되자”라는 격차를 인정하였다.생산책임제나 선부론 정책은 종래의 경제활동의 권한이 중앙으로 집중되어 각 지방을 통제하는 방식을 전환시켜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를 관철시키기 위해 일정한 방식으로 미리 중앙에 대한 상납금이나 중앙으로부터의 보조금을 체결하고 나머지는 지방이 독자적으로 재정을 관리하는 지방재정청부제로 전환했다. 나아가 법제 면에서도, 1954년 헌법이후 부정되었던 지방입법권이 1982년 제한적이지만 인정되었다.1984년 개혁 ? 개방 정책을 더욱 비약시키는데 중요한 해였다. 또 농촌경제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향진기업) 건설에 적극적으로 몰두한다는 방침을 내세웠다.도시개혁은 단지 공장과 기업의 개혁에 그치지 않고, 지령 통제경제에서 상품경제로 이행해야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상품경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가능한 한 기업 자신에게 자주권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경영의 주체인 공장장에 게 경영권을 대폭 부여하는 방안(공장장 책임제)이 제기되었다.또 도시개혁은 기업개혁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전면적인 개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기득권과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었고, 개혁을 진행하는데 상당한 반발과 곤란이 예상되었다.도시개혁은 비교적 손대기 쉬운 경공업 부문의 소?중규모 기업과 당시 출현한 개인경영기업, 합판합작기업 등으로 불리는, 과거 사회주의 기업에서 말하던 외곽이나 구조 외부의 기업에 대한 개혁부터 착수하게 되었다. 이시기의 개혁을 ‘체제외 개혁’으로 특정 짓는 사람도 있다.3. 정치 개혁 논의와 당의 개혁안덩샤오핑의 대두가 현실이 되자,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지만, 1979년 3월에 들어서면서 덩샤오핑 지시에 의해서 민주화 요구는 탄압 ? 봉쇄되기에 이르렀다덩샤오핑은 ‘4가지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4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첫째, 사회주의의 길 둘째, 프롤레타리아 독재 셋째, 공산 이것에 의해 학생운동?민주화운동은 중단되었다.1987년 1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후야오방은 민주화 요구하는 지식인 ? 학생에 대해 연약한 태도를 이유로 총서기직에서 사임하고, 후임으로 자오쯔양을 발탁해 중국공산당 제13회 전국대회를 위한 「정치체제 개혁안」을 작성하게 했다. 핵심적인 내용은 당의 지도계통과 행정의 지도계통에서 중복되는 부분을 배제하는 ‘당 ? 정 분리론’이었다. 또한 아래로는 권력이양, 정부기구 개혁, 공무원 제도 도입한 간부인사제도, 법제간화 등이 주장되고, 당 스스로 정치체제의 개혁을 시사한 점이 주목을 받았다. 1987년 가을부터 1988년에 걸쳐 중앙과 성 수준의 행정 부문에서 이러한 몇 가지 정치 개혁이 시작되었으나 많은 혼란을 야기하였고, 정치체제의 개혁은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혔던 것이다.4. 개혁? 개방의 딜레마와 높아지는 사회 불안정치체제 개혁에 대한 주장은 정치 참가의 확대와 정치 표현의 자유를 추구한다고 했던 민주화에 대한 요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1984년의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이후 경제체제는 구조적 전환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1985년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과학기술체제 개혁, 교육체제 개혁 등의 ‘결정’을 순차적으로 발표했고, 1986년에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 시스템을 타파하기 위해 기업 간의 횡적인 경제 연합의 추진이 호소되었다.1987년의 중국공산당 제13회 전국대회는 경제 개혁 면에서도 새로운 단계로의 돌입을 의미했고 자오쯔양은 「정치보고」에서 정치개혁과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기했다. 즉, 사회주의기는 하지만 경제가 낙후되었고,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경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빈곤과 정체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인 단계를 ‘초급단계’로 규정했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근대적인 공업의 발달과 상품경제로의 이행 등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 이론은 자본주의적으로 간주되고 있던 부동산의 매매, 사영기업과 주식제도의 도입 등이 적극적으로 실시될 수 중가격제를 악용해 서민들의 불평을 샀던 점이다. 넷째, 시장가격의 자유화와 함께 행정력으로 억제되고 있던 물가의상승과 가격의 불안정화이다. 특히, 사회주의 실현 후 안정되었던 물가는 개혁 ? 개방이 심화됨에 따라 급증하였다. 덩샤오핑은 가격자유화를 단행하여 그 뒤 물가상승률은 더욱 빠르게 급증하였다.도시주민의 실질소득 수준은 저하되었고, 인플레이션에 불만을 표명하고 있었다. 1988년9월 경제 환경의 정비와 경제 질서의 회복을 목적으로 한 정비 ? 정돈 방침이 결정되었지만, 계속된 인플레이션 경향 등의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혼란과 경제혼란을 야기한 주범으로 자오쯔양 총서기가 지목되어 비판을 받았고, 정치개혁의 혼란을 비롯해 1988년은 1987년 이후 개혁 ? 개방 노선을 담당했던 사람이 시련을 맞이한 시기였다.5. 개혁파 내에서의 신권위주의 논쟁과 민주화 요구의 고양1988년 가을 개혁 ? 개방의 전선에 위기를 인식하여 2가지 주장이 대두되었는데, 하나는 민주화를 중시하는 정치 개혁을 우선 보류하고 근대화를 지향하는 지도자에게 권위와 권력을 집중시켜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이른바 ‘신권위주의론’이 나타났다. 근대화를 진행하려면 정치 안정을 보증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고, 아시아NIEs(신흥공업경제지역)라고 불렸던 한국?타이완?싱가포르 등의 개발독재론과 유사하였다.장빙지우에 의하면, 신권위주의의 ‘新’은 지도가가 근대적 의식의 부산물이며, ‘권위’라는 강력한 권력을 갖고, 강제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인물로 인식되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4가지 기본원칙을 제창했던 덩샤오핑의 사고와 비슷한 것으로 자신도 1989년 3월 신권위주의론을 자신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덩샤오핑 후 자오쯔양 지도체제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또 하나의 이론은 민주화를 한층 가속화하자는 주장이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독재의 권위가 아니라 민주의 권위다”라는 등 신권위주의에 반발했다.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