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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를 빛낸 예술가들
    르네상스를 빛낸 예술가들- 목 차 -1. 르네상스란?1-1. 고대의 그리스?로마1-1-1. 고대사회 [古代社會, ancient society]1-1-2. 오리엔트[Orient]1-1-3.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1-1-4. 메소포타미아 문명1-1-5. 세계 4대문명1-2. 르네상스의 배경1-2-1. 비스콘티家1-2-2. 메디치家2.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 및 르네상스를 빛낸 예술가들2-1. 성 프란체스코, Berlinghieri, Bonaventura2-2. 치마부에[Cimabue, 1240~1302]2-3. 지오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1266~1337.1.8]2-3-1. 피렌체파[Scuola Fiorentina]2-3-2. 베네치아파 [Scuola Veneziana]2-4.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12.1]2-5.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1377~1446.4.15]2-5-1. 산타마리아델피오레대성당 [Santa Maria del Fiore]2-5-2. 판테온 [Pantheon]2-5-3. 원근법 [遠近法, Perspective]2-6.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12.13]2-7. 마사치오 [Masaccio, 1401.12.21~1428.]2-8. 베로키오 [Andrea del Verrocchio, 1435~1488]2-9. 도나토 브라만테 [Donato Bramante, 1444~1514.4.11]2-10.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1510.5.17]2-11.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4.15~1519.5.2]2-11-1.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제1피렌체 시대(1466∼1482)2-11-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제1밀라노 시대(1482∼1499)2-11-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제2피렌체 시대(1500∼1506)2-11-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제2밀라노 시대(1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해명은 아시리아학(學)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1-1-5. 세계 4대문명4대 문명의 발생지들은 모두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큰 강(황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나일강)을 끼고 있었다. 또한 대부분이 기후가 온화하고 기름진 토지를 지닌 지역들이었다.인더스 문명은 B.C 3000년 중엽부터 약 1000년 동안 인더스 강 유역에서 청동기를 바탕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다. 대표적 유적은 당시의 2대 도시였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인데,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를 받았던 하라파 유적의 이름을 따서 고고학적으로는 하라파문화라고 부른다.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하류의 비옥한 토지에서 이루어졌다. 이집트는 지리적 위치가 폐쇄적이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비해 정치·문화적 색채가 단조롭다. 사막과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서 외부의 침입없이 2000년 동안 고유 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또한 나일강과 주변의 기름진 토양을 바탕으로 일찍 농경이 발달하였다. 해마다 격게 되는 나일강의 범람은 상류의 비옥한 퇴적물을 운반하는 작용을 하였으므로 나일 강변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홍수는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미리 예측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농사의 시기를 조절할 수가 있었다. 이런 나일 강의 범람 때문에 태양력·기하학·건축술·천문학이 발달하였다.황하 문명은 중국 황하강 중류, 하류 지역에서 발생한 문명이다. B.C 5000년 ∼ 4000년경부터 신석기 문화가 이루어졌으며, 좁쌀·기장 등이 재배되고 개 ·돼지 등도 사육되었다. 황허강 유역의 신석기 문화는 양사오 문화와 그로부터 발생한 룽산 문화 두가지로 대별된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달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비옥한 반달 모양의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바빌로니아·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키나 넓게는 서남 아시아 전체의 고대 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능성을 발견해 냈다. 13세기 후반의 니콜라 파사노와 그의 아들 조반니 파사노, 로렌초 마이타이 등이 사실주의와 감정이입, 그리고 로마조각 풍인 조각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는 14세기 초반의 조토를 통해 회화의 영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해 가기 시작했다.2-2. 치마부에[Cimabue, 1240~1302]본명 Bencivieni di Pepo. B.조토의 스승이라고 하나 확증은 없다. 문헌상의 사실로는 1272년 로마에 있었고, 1301년에 피사에서 산타키아라성당의 성모자도를 그렸다는 것과, 그해부터 그 이듬해에 피사대성당 제실(祭室)에 모자이크 장식으로 성요하네상을 만들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 같은 시대의 시인 단테의 《신곡(神曲)》의 〈지옥편〉 제11가(歌)에서 “그림에서는 치마부에가 패자(覇者)의 자리를 유지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조토의 명성만이 높고 그의 이름은 희미하게 되었네”라는 것만 보아도 그가 조토 이전의 화단에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전기작가(傳記作家) G.바사리도 그의 《미술가열전》(1550)을 치마부에부터 쓰기 시작하였다.그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것에는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 있는 《성삼위일체의 성모》(1290), 산타크로체성당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아레초의 성도미니크성당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루브르미술관의 《성모자 제단화》 등이 있다. 피사대성당의 《복음서 저자 성요한》, 최대 걸작이라고 하는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성당의 벽화 《그리스도 책형(?刑)》과 《성모자와 4천사 및 성프란체스코》는 아직 비잔틴 화풍을 남기고는 있지만, 그 늠름한 조형 의욕과 자상한 감성의 추구에서 르네상스의 여명을 보여주고, 조토에 의하여 실현되는 신회화(新繪畵)의 탄생을 예고하였다.2-3. 지오토 디 본도네 [Giotto di Bondone, 1266~1337.1.8]피렌체파 회화의 창시자로서 그 명성은 동시대의 시인 단테의 《신곡》 《연옥편 제11가》에서 G.치마부에와 대비, 찬양되고, F.페트라화화’라 하여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구도의 통일과 사실적 묘사는 새로운 수법으로서 가히 ‘청동 화가’라는 말을 들을 만한 것이었다.제3문은 오랫동안 먼지에 덮여 거무죽죽해져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도로에서 튄 작은 돌로 손상된 부분을 수리하다가, 원래의 금을 입힌 찬란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일찍이 B.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찬양한 것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숭고한 아름다움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기베르티는 이 2가지 문의 제작에 거의 평생을 바쳤으며, 그 밖에도 시에나 세례당의 성수반(聖水盤)의 양각, 오르 산 미켈레 성당의 《세례자 요한》 《성(聖)마태오》 등도 만들었다. 그가 남긴 《코멘타리:Commentarii》는 당시의 미술사관(美術史觀)을 전하는 귀중한 문헌이다.2-5.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1377~1446.4.15]피렌체 출생.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양식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차남인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하는 대신 금속 공예의 기술을 익혀 조각가가 되려고 하였다. 1401년 피렌체 세례당 출입문의 양각(陽刻) 콩쿠르에 응모하여 L.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과 끝까지 경쟁한 결과, 결국 기베르티의 작품이 최종안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당시 시작품(試作品) 《이삭의 희생》(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은 하나하나의 조각상이 매스로서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고, 또 그것들이 극적으로 힘차게 구성되어 있어서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의 목각상 《그리스도의 책형(?刑)》(1409)과 더불어 브루넬리스키는 조각가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었다.콩쿠르에 낙선한 이후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건너가 고대 로마건축을 연구하면서 건축가로서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다시 유명해진 것은 피렌체로 돌아와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대성당의 커다란 돔(1436 낙성식) 제작을 의뢰받고, 이를 성공적으로 건축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적 기법을 이어받고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의 원리와 도나텔로의 인체조형의 성과를 섭취하였다고 평가되는데 이는 마사치오가 공간과 양체(量體)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의 참모습을 파악한 시각적 세계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초기의 《성(聖)안나와 성모자(聖母子)》(1420∼1423?)에서부터 앞에서 말한 피사의 다익제단화와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노베라성당의 《삼위일체(三位一體)》(1427)를 거쳐서 피렌체의 카르미네성당, 브란카치예배당의 벽화에 이르는 과정이 그것을 말해준다.2-8. 베로키오 [Andrea del Verrocchio, 1435~1488]화가 A. 발도비네티(1425∼1499)와 조각가 도나텔로(1386∼1466) 등으로부터 배웠다. 특히 조각과 금세공분야에 가장 힘을 기울였으며, 회화활동은 1470∼1480년에만 하였다.실제로 회화에서의 대표작은 《그리스도의 세례》(1470∼1472:레오나르도 다 빈치와의 공동작: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와 《피스토이아 대성당 제단화》(크레디와 공동작) 등 몇 개 안 되지만, 과학적 탐구를 지향한 15세기 후반 피렌체파(派)의 대표적 자연주의자의 면모는 뚜렷이 엿볼 수 있다.메디치가(家)로부터 후대를 받고 갑주(甲胄) ·분수 ·묘비 기타 많은 조각품 제작을 훌륭하게 해내 명성을 떨쳤다. 그 중의 하나인 메디치가(家) 별장 빌라 칼리지를 위한 청동분수 《돌고래를 안은 소동상(小童像)》(1470)은 오른쪽 발을 들어 올리고 왼쪽 다리로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매우 안정감을 주면서 그 동적인 자세가 또한 경쾌하고 발랄하다.바르젤로미술관에 있는 《귀부인상》도 견고하고 장중한 리듬이 느껴진다. 1476년경의 청동상 《다윗》(바르젤로미술관 소장)은 그 착의(着衣) 등 공예적 장식성이 두드러지며, 인체를 더할 나위 없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또 1483년 오르산미켈레성당 외벽의 성감(聖龕) 안에 놓여 있는 《성 토마스의 회의(懷疑)》는 그리스도의 엄숙한 면모와 위치의 배려, 비례가 아름다운 자태 등으로 당시 절찬을 받았다.
    예체능| 2011.05.29| 37페이지| 5,000원| 조회(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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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케치의 역사 (드로잉)
    스케치의 역사1. 선사 시대드로잉의 흔적은 주술적인 내용과 형체에 대한 연구가 뛰어났다. 그 당시의 고대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생존이었다. 단편적인 기록의 형상적인 표현에 머물렀는데 서구문명의 초창기인 이 시대는 미술이라는 것이 특수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고, 드로잉이란 지극히 관념적인 답습에 불과 했고 드로잉이 작가의 내면적 감수성의 표출과 거리가 멀었던 유일한 시기이기도 하다.2. 이집트 미술대상에 대한 초보적 묘사 수단은 아라비아고무 와 물로 섞은 목탄가루를 이용한 겁은 잉크를 사용한 것이었다. 이집트 미술의 특징은 전체집단의 형태를 동시적으로 파악하여 단순화한 부호적인 표현에 있었다. 그러나 매우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했다.3. 그리스?로마그리스의 양식은 부드러우면서 다이나믹한 표현을 획득하였고, 로마시대에는 대상에 대한 초보적인 묘사, 현실과 이상을 결합시킨 사실적인 인상을 주는 드로잉이 주종을 이루었다.4. 중세기하학적을 기초로 전법을 마련하여 모델링 하는 관념적인 학습방법을 택했다. 이는 중세의 관념적인 고딕미술이 교화를 위한 “필요성”에 기인한다. 예술에 있어서 정신주의를 주장한 이 시기의 드로잉이란 것은 제도사가 건축을 하기 위한 설계도를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화 작품을 하기 위한 밑그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5. 르네상스르네상스 시기에는 투시학적인 원근법의 업적과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의 두드러진 활동이 특징이다.“인간성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르네상스는 인간의 가치와 함께 인간의 한계를 함께 수용함으로써, 예술을 기(技)나 직(職)에서 한층 더 학문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현실적, 합리적, 세속적 경향으로서 미술품이 생활에 접근하였다. 또한 작가는 “예술가”로서의 자각(주체적 작가의식)을 지니게 되었고 “예술=과학”이라는 등식도 성립되었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은 신과 같은 존재이고, 예술가는 자연을 관찰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르네상스의 기념비적인 역작들인 그들의 드로잉은 뒤에 낭만주의, 신고전주의와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가게 된다.르네상스에 와서야 데생(Dessin, Disegno)이라는 용어가 탄생하였다. 이 개념은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개념을 가지며 습작, 밑그림, 작품구상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이른바 완성된 작품에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르네상스에서 탄생한 데생(그 어원은 disegn이다)의 원뜻은 완성작에 대립되는 준비단계의 갖가지 작업을 가리키는 것이다. 데생의 의미는 ‘습자’, ‘밑그림’, ‘초벌그림’, ‘설계도’ 이며, 이 과정은 작가수업에 있어서 해부학적이고 과학적인 소양을 위한 필요 과정이었다.르네상스 시기 드로잉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명암법의 사용과 투시법의 입체적 조명이었다. 르네상스를 맞아 인간에 대한 자각의 영향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건축가, 조각가들의 설계도, 에스키스와 함께 과학적인 사고에 의한 드로잉이 독립된 장르가 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정리하자면,1) 회화의 본질, 기념비적인 역작들을 완성2)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대가의 활동3) 철저한 검증과 분석, 과학적인 해부 연구, 투시학적 식견4) 명암과 투시법의 입체적 조명에 있었다.인상주의자들은 드로잉을 회화작품을 위한 기초 작업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인정하였다. 드가는 “드로잉이란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닌 대상을 보는 방법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인상주의 미술의 특징은 선묘의 사용에 색채를 밀착시키는 시도와 윤곽과 색채가 빛과 그늘로 대체되고, 자유로운 붓의 터치가 화면에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시기의 미술은 순간의 필치를 화면에 남긴다는 의미에서 매우 드로잉 적이었다. 어쩌면 인상주의 그림들은 ‘미완성(?)’ 스케치풍의 그림이기도 했다.6. 20세기~ 현대20세기에 이르러 외형적, 감각적 측면으로서의 소묘는 점차 왜곡되고 지적, 이성적 사고의 표현, 즉 확산된 정신세계의 표현매체로서 등장하게 된다. 큐비즘(Cubisme) 작가들은 각종 콜라주(Collage)의 방식으로부터 오브제(Objet)3)의 수용에까지 표현 영역을 확산시켜 정신세계의 내면적 드로잉을 시도하게 된다. 큐비스트들에게 드로잉은 형태나 색채가 아니라 사인(Sign)이었다.콜라쥬나 오브제의 수용에 이르기까지 큐비즘의 태동으로 시작된 인식의 변화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무의식적, 표현적 측면을 나타나게 된다. 미니멀(Minimal) 에서 대지미술(大地美術), 개념미술(槪念美術)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완성된 작품의 중요성보다 그것을 이룩하도록 했던 내적인 필연성, 아이디어 또 그것의 과정에 더욱 의미를 두게 되었다. 로드코 등의 미니멀리즘 서정성은 색면적 이기보다는 오히려 지각의 부호로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더 중점을 두었다. 추상회화의 탄생은 드로잉의 개념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예체능| 2011.05.29| 4페이지| 1,500원| 조회(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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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4대문명
    세계의 4대문명(고대의 4대 문명)1. 고대의 4대 문명고대의 4대 문명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을 말한다. 이 중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문명이 보다 일찍 문명의 단계에 들어섰다. (B.C 3500년경)4대 문명의 발생지들은 모두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큰 강을 끼고 있었다. 또한 대부분이 기후가 온화하고 기름진 토지를 지닌 지역들이었다. 지금의 중동 지방은 주로 사막으로 덮혀 있지만, 당시의 기후나 토양은 오늘날과 매우 달랐다. 6, 7쳔년 전에는 중동 지방의 기후는 현재보다도 더 온화했고 강수량도 많았다. 또한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도 오늘날처럼 대부분의 지역이 사막이 아니라 푸르고 울창한 숲으로 덮혀 있었다. (4대 문명 발생 지역의 기후는 대부분이 건조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하지는 않았다고 함)2. 4대 문명의 공통점큰 강 유역에서 발생하였다. 농사가 잘 되었다. 4대 문명이 발생한 지역은 기후가 따뜻하고, 큰 강을 끼고 있어 홍수 때면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이 내려오기 때문에 식량이 풍부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전제 군주가 출현하였다. 따라서 대규모의 수리 사업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 서로 간에 협동, 단결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은 대규모 수리 사업을 감독하고 이것을 이끌 만한 강력한 권력을 필요로 했다. 여기에 덧붙여 풍부하고 윤택한 경제생활을 배경으로 해서 풍성한 문화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매우 발달하였던 것이라고 평가한다.도시가 형성되었다. 문명(문자 등)이 발생하였다. 신석기 시대 농업 혁명을 거치면서 인류의 생산력은 크게 증대하였다. 특히 관개 농업이 행해진 큰 강 유역은 토지가 비옥하여 생산이 늘어나 많은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살 수 있었다. 그리하여 큰 촌락이 형성되었으며 청동기가 제작되고 바퀴, 쟁기, 돛단배 등이 발명되어 생산이 늘어나고 교통도 발달하였다.이리하여 촌락들이 뭉쳐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각 도시는 주변에 성을 쌓고, 제각기 독립하여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이배층이 거주하는 도시에는 호화로운 저택과 다양한 시설물들이 이들 생활에 편리하게 이용되었다.그러나 문명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있는 지배층의 호화로운 생활의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행해졌다. 이들은 거대한 소유 토지 경작에 수많은 노예를 혹사시켰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백성으로부터 막대한 조세와 공물을 거두어들였다. 지배층은 더 많은 노예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관리들은 정복지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징수하였다.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지배층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어 놓았으며, 저항할 경우 곧바로 군대를 파견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는 사업이 활발하였다. 궁전과 무덤의 크기는 국왕의 권위에 비례한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뚜렷하게 나뉜 사회에서 지배자들은 피지배층이 자신의 지배에 순순히 복종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였다.그들은 자신의 몸을 값비싼 장신구로 휘감아서 위대해 보이도록 애를 썼다. 또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사는 집을 거대하고 웅장하게 만들고, 죽은 후에도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무덤에 들어감으로써 지위의 영속성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은나라에서 왕이 죽었을 때 수십명의 산 사람을 강제로 함께 묻는 순장제가 행해지고, 이집트에서 거대한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는 것은 다 지배자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2-1. 이집트 문명나일 강 하류의 비옥한 토지에서 이집트 문명은 이루어졌다. 이집트는 지리적 위치가 폐쇄적이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비해 정치·문화적 색채가 단조롭다. 이집트는 사막과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서 외부의 침입 없이 2000년 동안 고유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이집트는 '헤로도투스'의 말처럼 '나일 강의 선물'이라 할 만큼 나일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집트는 나일강과 주변의 기름진 토양을 바탕으로 일찍 농경이 발달하였다. 해마다 겪게 되는 나일강의 범람은 상류의 비옥한 퇴적물을 운반하는 작용을 하였으므로가 (B.C 4000년경), B.C 3500 년 경에는 상·하 두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B.C 3000년경에는 통일 왕국이 성립되었다. 통일 왕조 수립 후 26왕조가 흥망 하였는데, 크게 대략 3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시 대왕 조수 도주 요 업 적고왕국 시대(B.C 2850 ∼ 2060)1 ∼ 10 왕조멤피스피라미드 건설중왕국 시대(B.C 2060 ∼ 1670)11 ∼ 17 왕조테베B.C 1670 이래 힉소스의 지배신왕국 시대(B.C 1570 ∼ 525)18 ∼ 26 왕조아마르나페르시아에게 멸망B.C 1700년경 중왕국 시대에 힉소소의 지배를 한 때 받기는 하였으나, 이를 몰아내고 시리아까지 진출하였다. 그 후 B.C 525년에 페르시아의 의해 망하였다.2-1-1. 이집트 사회이집트의 국왕은 파라오(Pharaoh : 큰 집)라 불리웠고, 태양의 신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토목 사업에 농민과 노예를 동원하였다. 귀족들은 소수의 관료와 신관으로서 왕에게서 넓은 토지를 받아 그 세력이 강대하였다. 평민의 대부분은 부자유 농민이며 공납과 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2-1-2. 종교이집트는 오리엔트의 다른 나라처럼 다신교를 믿었으며 신들의 수는 매우 많았다. 그 중에서도 태양신인 라(Ra)와 나일 강, 저승의 신인 오시리스가 가장 숭배되었다. 태양신 라 밑에는 공기의 신 '슈', 습기의 신 '테프누트'가 있었다. 이들 신은 서로 결합하여 대지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를 낳았다. 이들 신이 또한 결합하여 '세트', '네프티스', '오시리스', 그리고 '이시스'를 낳았다. 이어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세트는 네프티스와 각각 결혼하였다. 그리하여 오시리스 호루스를 낳고, 세트는 아누비스를 낳았다. 이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와 세트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신화를 통하여 이집트인의 강한 내세의 신앙과 부활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가 있다.이집트인들은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영혼 불멸을 믿어 미이라를 만들어 시체를 보존했고, '사자의 서'를 기록하여원리가 이용되었다. 수학에서는 10진법이 사용되고, 미이라 제작 과정에서 외과 의학이 발달하였다.2-1-5. 문자신성 문자(Hieroglyph - 히에로글리프)인 상형 문자가 사용되어 부분적으로는 표음 문자의 단계까지 도달하였다. 파피루스로 만든 종이에 갈대로 만든 펜과 검댕이 잉크를 사용하였다.2-2. 메소포타미아 문명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비옥한 반달 모양의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다. 바빌로니아·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키나 넓게는 서남 아시아 전체의 고대 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2-2-1. 메소포타미아의 변천1) 수메르 시대수메르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부 산악 지대에 살다가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원래 거주지에 있을 때부터 어느 정도 문명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는 금속과 돌을 함께 사용하는 문명이 알루바이드, 우르크 등과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여기에 수메르인들이 나타난 것은 B.C3500년경이었다.정치분야에 있어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시되었다. 신관, 관료, 전사 등이 지배 계층이었다. 지구라트(Ziggurat)라는 큰 탑을 가진 신전이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경제분야에 있어서는 교역이 일어남에 따라 상인이나 공인도 나타나게 되었다. 법전으로는 세계 최고의 성문법인 수메르 법이 1947년부터 발굴되었다.2) 아카드 시대B.C 2350년경 아카드 인이 수메르 인을 정복하고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세웠으나 오래 지탱하지 못하였다.3) 후 카사이트 인이 진출하여 바빌로니아를 지배하였다. 그 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다가 아시아아에 의해 통일되었다. (B.C 667)2-2-2. 메소포타미아 사회메소포타미아는 셈(Sem)족의 문명이다. 특히, 수메르 인의 문명이 토대가 되었고 아카드·아무르 인들의 문명이 가미되었다. 화폐는 쓰이지 않아서 물물 교환이 이루어졌다.2-2-3. 종교현세적 다신교로서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2-2-4. 과학점성술, 천문학, 태음력, 7요제, 60진법, 24시간, 360도 등이 나타났다.2-2-5. 문자수메르 인은 쐐기 문자(설형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점토판에 갈대로 찍어 썼는데 표음 문자로 발전했다. 페니키아 인들이 사용한 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다.2-2-6. 건축궁전과 신전 건축에 아치(arch)와 둥근 천장(dome)이 사용되었다. 이 지역은 돌이 매우 귀했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벽돌로 건축하였으며 그 벽돌을 이용하여 물을 끌어오기 위한 커다란 수로도 건설하였다.2-2-7. 문학수메르인의 문학은 주로 신화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여러 신화와 전설들은 각 도시의 건설자, 유명한 왕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 중 유명한 것이 우루크시의 왕이었던 '길가메쉬'에 관한 서사시이다.2-3. 인더스 문명B.C 3000년기 중엽부터 약 1000년 동안 인더스 강 유역에서 청동기를 바탕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은 듯 하다.2-3-1. 유적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은 당시 2대 도시였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이다. 도시의 특징은 질서 정연한 도시 계획에 있다. 건물의 대부분이 구워서 만든 벽돌로 지어졌다. 또한 정교한 도로망과 하수도 시설, 그리고 목욕탕·집회소·곡물 창고 등이 발굴되었다.2-3-2. 유물정교한 청동기와 칠무늬 토기를 만들었으며, 저울을 사용하였고, 상형 문자를 새긴 인장이 출토 되었다.2-3-3. 자연환경이 지방의 자연환경은 오늘날보다는 습윤(濕다.
    인문/어학| 2011.05.29| 9페이지| 2,000원| 조회(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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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학이란 무엇인가
    미학이란 무엇인가?- 목 차 -I. 고졸기의 미학1. 고졸기2. 시의 기원3. 조형예술의 기원4. 그리스인들의 공통된 미학적 입장5. 초기 시인들의 미학II. 고전기의 미학1. 고전기2. 문학3. 조형예술4. 미학과 철학5. 피타고라스 학파의 미학6. 데모크리토스의 미학7.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의 미학8. 플라톤 이전 미학의 주장들9. 플라톤의 미학10.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11. 고전 시대의 종말III. 헬레니즘 미학1. 헬레니즘 시대2. 헬레니즘 철학에서의 미학3. 에피쿠로스 학파의 미학4. 회의주의자들의 미학5. 스토아 학파의 미학6. 키케로와 절충주의자들의 미학7. 음악의 미학I. 고졸기의 미학1. 고졸기유럽 미학의 기원과 기초를 형성한 고대미학의 역사는 거의 천년에 달한다. 고대 미학은 BC 5세기( 혹은 6세기)에 시작되어 AD 3세기까지 이어졌다. 고대 미학은 거의가 그리스인들의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전적으로 그들의 업적에 의한 것이었지만, 후에는 다른 국가들도 함께 동참했다. 이 때문에 고대 미학은 BC 3세기에 일어난 구분에 따라 그리스 미학과 헬레니즘 미학의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그리스 미학은 다시 고졸기와 고전기라는 연속되는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그리스 미학의 고졸기는 BC 6세기와 BC 5세기 초에 해당되며, 고전기는 BC 5세기 말부터 BC 4세기에 걸쳐 있다.2. 시의 기원2-1. 코레이아2-1-1. 삼위일체의 코리이아그리스인들은 표현적 예술과 구성적 예술이라는 두 가지 예술에서 출발했다. 표현적 예술에는 시, 음악, 춤의 혼합물이 있었고, 구성적 예술에는 건축, 조각, 회화가 있었다.무용은 표현적 예술의 핵을 이루었다. 춤에는 언어와 음악적 소리가 동반되었다. 춤이 음악 및 시와 결합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룬 것이 문헌학자 찔링스키가 "삼위일체의 코레이아"로 기술했던 바로 그것이다.2-1-2. 카타르시스그리스 고졸기 예술은 무엇보다도 감정의 표현이었다. 즉 코레이아라는 예술로서 사람들은 위안을 가져다줄 것을 기대하면서 감정을 표현) 그리스 비극은 종교적 숭배의식에 속하는 제의에서 나온 것이며 그리스 서사시나 서정시보다도 제의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 코레이아, 즉 춤과 노래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삶과 인간의 운명이라는 거대한 문제들에 관계된 사상과 주제 때문에 위대성을 획득하게 되었다.2) 그리스 비극은 시각적으로 비극보다는 근대 오페라와 더 비슷했다. 음악과 춤은 언어와 소리, 동작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삼위일체의 코레이아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장경(spectacle)보다는 소리에 의한 공연에 더 가까웠다.3) 비극은 리얼리즘과는 공통점이 없었다. 초기에는 인간의 문제보다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사이의 경계선상의 문제를 다루었다. 주제는 신화적이었고 플롯은 단순했는데 주로 신과 인간간의 관계, 자유와 필연성간의 관계 등을 다루었다.4) 비극은 모두를 위한 예술이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서부터 모든 아테네 시민들은 국가로부터 연극표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을 받았다.5) 비극은 한 개인의 작품이었지 시인, 작곡가, 제작자의 연합작품이 아니었다. 작가는 대본을 쓸 뿐만 아니라 음악과 노래를 작곡하고 안무도 담당했으며, 제작자이자 배우였다.6)그 시대에 비극은 최고의 절정에 도달했다. 세 사람의 그리스 비극작가들의 연이어 등장했는데,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이다.7) 위대한 비극작가들은 사회적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소포클레스는 정의의 관념을 재현하고 소피스트들의 급진적인 계몽에 반대했는가 하면, 에우리피데스는 소피스트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 두 작가들의 작품들에서는 전통과 변혁, 보수적 경향과 진보적 경향간이 갈등이 예술에 도입된 것이며, 예술이론에도 영향을 미쳤다.2-2. 비극작가들과 에피카르모스의 미학적 의견미학에 관해서 보다 이해하기 쉬운 언급은 에피카르모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그는 시칠리아의 현실적이고 비제의적인 드라마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그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한 단편은 예술적 형식의 상대성, 인간에 대한 예술적 형식의 의존 등에 선하거나 악한 “에토스(마음의 상태)”로 인도할 수 있다.5-4. 오르페우스적 요소 : 예술을 통한 정화음악의 힘에 관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원리는 그리스 종교,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오르페우스 신앙의 원천이 있었다. 이 신앙의 본질은 영혼이 그 죄 때문에 육신 속에 갇혀 있는데 영혼이 정화되면 해방될 수 있고 이 정화와 해방이 인간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다른 무엇보다도 음악이야말로 영혼을 정화한다는 사상을 도입했다. 그들은 음악 속에서 영혼을 인도하는 힘도 보았지만 영혼을 정화시키는 힘(카타르시스적 힘)도 보았는데, 그것은 윤리적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기도 하다.음악을 통한 정화 이론에 관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1) 음악은 영혼과 영혼의 성격, 기질, 에토스 등의 표현이다.2) 음악은 “자연스런”표현이며 매우 독특하다.3) 음악은 그것이 표현해내는 성격에 따라 선하거나 악하거나 사악한 음악으로 나뉜다.4) 영혼과 음악 간의 연관성 덕분에 음악을 통해서 영혼을 개선하거나 타락시키는 등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5)그러므로 음악의 목표는 단순히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테나에우스가 후에 “음악의 목표는 즐거움이 아니라 덕에 봉사하는 것이다”라고 썼듯이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다.6) 선한 음악을 통해서 영혼은 정화되고 육신의 사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7) 그러므로 음악은 여타의 예술들과는 다른 예외적이고 독특한 것이다 (그들은 음악이 신들에게서 오는 선물이라 여겼다. 즉 음악이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의”선물이라 생각했다)5-5. 관조피타고라스학파는 관조의 개념을 입안해 냈다. 그들은 관조를 행위에 대립시켰는데, 즉 바라보는 입장과 행위 하는 입장을 대립시킨 것이다. 관조의 개념은 미와 진리 모두를 보는 것이다. 나중에 가서야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관조와 미에 대한 미학적 관조가 구별 지어지게 된다.5-6. 질서(코스모스)와 혼돈(카오스)그리스인들의 견해로 보자면 이치에 맞는 것,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우리가 향유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것 역시 거부했다. 소피스트들의 정의는 외형과 형식의 미로 한정시키면서 그리스의 미개념을 좁혀주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미는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이라는 예전의 개념에 집착했다. 미가 눈과 귀를 위한 미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지혜, 덕, 고귀한 행위, 올바른 법률 등도 포함된다.9-3. 미에 대한 객관적 이해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정의가 미를 주관적으로 설명한다는 이유에서도 비난했다. 즐거움을 유발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물의 객관적인 속성이 아니라 주관적인 반응이다. 미에 대한 플라톤의 이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소피스트들과 달랐다. 그는 첫째, 미가 감각적 대상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둘째, 미는 객관적인 속성, 즉 미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반응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물에 속한 내재한 속성이라고 했다. 셋째, 미를 검증하는 것은 즐거움이라는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미에 대한 타고난 감각이라고 했다. 넷째,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그가 진정한 미와 외견상의 미를 구별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9-4. 질서와 척도로서의 미플라톤이 채택하여 전개시킨 피라고라스 학파의 개념에 의하면, 미의 본질은 질서(탁시스), 척도, 비례(심메트리아), 협화, 조화 등에 있다. 말하자면 미는 첫째로 부분들의 배열(배치, 조화)에 달려 있는 하나의 속성으로 이해되었고, 둘째로는 수(척도, 비례)로 표현될 수 있는 수적 속성으로 이해되었다.플라톤은 미와 척도의 관계에 대해서 “선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것은 비례를 결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척도가 통일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사물의 미를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또 “척도”가 수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중용과 적합성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그는 척도를 토대로 한 좋은 예술과 인간의 감각적, 감정적 반응에 의지하는 나쁜 예술을 대립시켰다. 감각를 생각했고 피타고라스학파는 두 번째 의미를 생각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모방적인 예술은 다른 예술과 어떻게 다른가? 좀 더 전문적으로 말하면 시는 시 아닌 것들과 어떻게 다른가?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시는 “모방한다”는 사실 때문에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본질적인 특징이 표현과 실행이라는 뜻이다. 비록 재현이 한갓 수단일 뿐이며 충실한 반복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개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취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감정의 표현이며 실재의 재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의 관심사는 내용이며, 또한 시를 언어, 리듬, 멜로디로 기술하였는데 이것들은 시의 형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 간에 갈등이 존재할 수 없으며, 구별하지도 않았다.10-4. 예술대시분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그가 그리스적으로 예술과 시를 분리한 것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예술은 제작이지만 시는 예언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둘은 분리되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와 예술들을 통합시켰다.플라톤도 예술은 기술에서, 시는 “신적 광기”에서 나온다는 이유로 시를 예술 속에 넣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적 광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는 시가 “광기보다는 타고난 재능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좋은 시는 다른 여타의 예술과 마찬가지로 재능과 기술, 연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며, 다른 예술 못지않게 규칙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다.10-5. 예술들 간의 차이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 예술들이 사용한 매재(媒材)나 대상 혹은 “모방하는” 방법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A. 리듬, 언어, 멜로디는 시와 음악 모두가 사용하는 매체 혹은 수단이며 이것들은 같이 혹은 따로 사용된다.B. 모방되어지는 대상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구분은 사람들을 보통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예술과 있는 그대로보다 더 열등하게 혹은 더 낫게 묘사하는 예술로 나누는 것이다.C. 문학예술에 고유
    예체능| 2011.05.29| 65페이지| 5,000원| 조회(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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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죽헌
    종목 : 보물 제165호수량 : 1동지정일 : 1963.01.21소재지 : 강원 강릉시 죽헌동 201규모 : 양식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지붕시대 : 조선시대 중종소유자 : 강릉시건축 개요오죽헌은 율곡 이이(李珥)가 이곳의 몽룡실(夢龍室)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유명해진 강릉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본래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고택에 딸린 별당으로, 우리 나라 주택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헌(軒)은 옛 수레와 같아 높은 곳에 올라 의기양양함을 북돋우는 곳을 가리키며, 아름답고 활짝 트인 경관이 있는 높은 곳에 지어져,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는 요소로 건립되었다. 당(堂)과 같이 궁궐, 관아, 서원, 주택에 지어졌으며 정원에도 건립되었다. 주택에 지어질 경우에는 별당형식으로 취하였는데, 강릉의 오죽헌은 부근의 오죽림을 완성하는 별당건축으로 지어진 것이다.경내에는 오죽헌을 비롯하여 문성사(文成祠), 사랑채, 어제각(御製閣),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문성사는 이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본래 선생이 지으신 과 소년시절부터 사용하던 벼루의 보관을 위하여 1788년(정조 12)에 건축된 후 그동안 여러 번 중수 보관되어 왔던 것으로서, 1975년 10월 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와 구상에 의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신축되었고 선생의 시호를 따라 문성사라 이름지어졌다.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다. 1987년 6월에는 어제각을 복원하였으며 현재 어제각 상량문, 마루, 현판 등을 보존하고 있으며 근자에 안채가 복원되었다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오죽헌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이익공(二翼工)계의 건물이며 좌측 2칸은 대청으로, 1칸은 뒤편에 퇴가 달린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굵직한 *장대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각 기둥 위에 *둥근 도리를 얹었고 지붕은 겹처마이다.굵은 댓돌로 짜여진 높지 않은 기단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배열하고 각기둥을 세웠다. 대청 전면은 띠살문의 4분합문을, 측면과 후면에는 각기 두 짝의 여닫이 창호로 하고 판문 하부 벽면에는 머름을 둘렀다.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가운데 2개의 동귀틀 사이에 작은 청판들을 깔아 칸의 구별을 명확히 하였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으로 걸쳤으나, 온돌방과의 경계에 위치한 대들보는 그 아래 중앙에 세운 기둥으로 받쳐져 있다. 대들보 위로 종량과의 사이에는 대공을 받쳤는데, 그 형식은 오래된 수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대공의 계통을 이은 것이다.측면 창호 문틀에는 중간 *문설주 가 있었던 자리에 홈이 파여 있어 오래된 가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대청 천장 위에 우물 천장을 가설하고 다른 부분은 연등 청장으로 하였다.익공의 *쇠서와 *첨자의 곡선은 오래된 옛날기법을 따르고 있다.기둥과 기둥 사이에 있는 *화반은 주심포에서 익공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며, 지붕 처마를 높이 올려 일조와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공포는 이익공형식으로서 주심포계와 유사한 모습이 초기수법임을 보여 주며, 내부는 연등천장으로, 합각부분만 우물천장으로 구성하였다.비교적 낮은 기단 위에 조성되었으나 층고를 충분히 확보해 사용된 구조부재들이 충실하여 겹처마의 팔작지붕이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여유있는 공간의 조성과 조경도 이같은 느낌을 도와준다. 일부 장식화된 부재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는 구성으로 조선 전기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이 건물은 주택건축에서는 비교적 드문 예에 속하는 것으로, 쇠서의 곡선에는 굴곡이 남아 있으며, 첨차의 형태는 조선 말기적인 주심포집과 공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심포집에서 익공집으로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구(遺構)이다.*팔작지붕 : 지붕 위까지 박공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고 처마 끝은 우진 각 지붕과 같다. 맞배지붕과 함께 한식가옥에 가장 많이 쓰는 지붕의 형태이다*익공 : 기둥 위에 새날개처럼 뻗어나온 첨차식(墅遮式) 장식으로 장식적인 효과가 있는전통건축양식 , 창방과 직교하여 보를 받치며 쇠서 모양을 내고 초각한 공포재*장대석 : 네모지고 긴 석재로 기단에 가로 길게 놓은 돌*둥근 도리 : 보와 직각 방향으로 걸어 서까래를 받치는 수평재*문설주 : 문짝을 끼워 달게 된 기둥*쇠서 : 기둥 위에 붙이는 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첨자 : 기중 머리 좌우의 튀어나온 부분
    공학/기술| 2011.05.29| 7페이지| 1,500원| 조회(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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