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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평가A좋아요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메스컴에 속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것이 사실이라 믿고 있다는 말말이다. 특히나 인터넷의 정보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이 책에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역사는 초대강국의 위력 앞에서 약소국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체 서양에 대해 은연중에 열등의식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전 세계를 서양과 동양이라는 극단적인 2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놓은 지금 서양은 당연히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서양은 합리적이고, 근면하고, 생산적이고, 희생적이고, 절약하고, 자유민주적이고, 정직하고, 엄격하고, 성숙하고, 진보적이고, 독창적이고, 혁신적이고, 독립적이고, 능동적이라는 타고난 미덕들로 촉복 받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반대로 동양은 비이성적이고, 변덕스럽고, 나태하고, 비생산적이고, 엄격하지 않고, 이국적일 뿐 아니라 유혹적이고, 난잡하고, 광폭하고, 부패하고, 유치하고, 미성숙하고, 뒤떨어지고, 모방적이고, 수동적이고, 의존적이고, 정체되어 있고, 변화가 없는 등 서양과 반대되는 타아로 인식되어 있다. 즉 동,서양은 상반되는 인식으로서 서양은 일련의 발전적 현존(現存)으로, 동양은 일련의 부재(不在)로 정의 되고 있는 것이다.또한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 그 둘은 결코 만날 수 도 없었으며, 만났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인식을 서양의 흔히 강대국들이라는 국가들이 주입시킴으로서 수세기에 걸쳐 동양이 서양에 가져다준 긍정적인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서양이 고대 그리스 이후 줄곧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주장이 당연시 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때에도 동양은 그리스에 비해 굉장히 미개인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저자는 동양이 넓게는 세계 문명의 발전에, 좁게는 서양의 발흥에 기여한 과정을 하나씩 밝혀 나가고 인은 500년 이후 세계경제와 세계적 통신망을 구축했다. 둘째, 1492년 이후 유럽인은 제국주의를 무기로 서양의 발흥을 가져온 동양의 모든 경제적 자원을 도용했다. 다시 말해 동양의 도움 없이 서양의 발흥은 불가능했다. 오리엔탈리즘 또는 유럽 중심주의는 동양에 비해 서양이 타고난 우월성을 강조하는 세계관이다. 1700~1850년 사이 유럽인의 상상은 전 세계를 서양과 동양이라는 극단적인 2개의 진영으로 나누었는데 정확히 표현하자면 강제적으로 분할했다. 이러한 이중적 대립은 정확히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 가부장적으로 해석한 정체성 형성과 같은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동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주관적이면서 애매한 근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러한 시각으로 상상함으로써 오로지 서양만이 독자적이며 진보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또한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 마르크시즘도 오리엔탈리스트의 담론 속에 포함된다. 즉, 마르크스의 이론은 서양이 유일무이하며 동양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발전적인 역사를 이룩해 왔다고 가정한다. 유럽 중심적인 이야기가 정치적으로 부정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발생한 사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유럽인은 중동의 아랍인, 페르시아인, 아프리카인에 의해 정해진 협정에 따라 기존의 세계망으로 진입했을 뿐이다. 세계 경제력은 확장력 과 응집력 두 가지의 일반적인 형태로 나눌 수 있다. 650~100년 이슬람과 북미는 고도의 확장력과 응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100년경 응집력에 대한 주도권을 중국에게 내주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확장력에 대한 주도권을 15세기까지 줄곧 유지하다가 중국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18세기까지는 상당한 수준의 응집력과 확장력을 계속해서 발휘했다. 500~1800경까지 페르시아인, 아랍인, 자바인, 유대인, 중국인은 세계경제를 창건하고 지켰다. 이때 세계의 주요문명들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지역들이데 이는 3세기에서 확실하게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무하마드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이슬람세력의 통합을 주도한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무역과 합리주의적 활동 성향이다. 무하마드가 상인이었고 코란에도 투자와 상업적 이익의 중요성을 명기하고 있다. 이슬람세계는 650~1800년 사이에 무역뿐만 아니라 동양의 많은 자원들 을 서양으로 전달한 세계의 다리였다. 이슬람교는 종교적이거나 상업적인 영향력을 통해서 서유럽뿐만 아니라 동쪽의 인도, 동남쪽의 아시아와 중국, 남쪽의 아프리카로 뻗어 나갔다. 중동의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파티마 왕조는 고대에 알려진 인도양과 지중해 간 장거리 무역의 주요도로를 통합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무슬림은 특히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들과의 무역에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650~1000년 사이에 이슬람 사회의 집중적인 혁신과 기술, 사상적 진보는 대단했다.큰 삼각 돛의 발명으로 인도양에서 장거리 항해가 가능해 졌고 천문학과 수학분야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 종이제조는 751년 이후에 시작됐고 직물제조는 특히 중요하다. 또한 무슬림이 18세기까지 우위를 차지한 강철제품과 관련된 용어에서도 유럽인을 지배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1000년 이후 세계경제는 8개 지역의 하부조직과 연결된 3개의 중요한 무역로로 돌아 갔다. 북쪽 경로는 13세기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시작되었다. 이 국가는 동서양을 하나의 무역공간으로 연결했다. 13세기 말엽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이 몽골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중국과 유럽간 약 8000킬로미터에 걸쳐 세계적인 무역시장이 형성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수한 동양사상과 기술이 서양으로 전파되었다. 이 같은 무역망은 14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축소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무역은 중앙과 특히 남쪽경로를 따라 점점 확산되었다. 중앙루트는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해 작은 사막을 건넌 다음 메소포타미아평원을 지나 바그다드에 이되었으며 기원선 2세기에는 강철이 처음 생산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새롭게 창안한 제조법이다. 연철뿐만 아니라 주철을 이용해서 다양한 모양의 철을 생산했다. 이것은 주철제작의 기초가 되는 용해법의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용광로와 피스톤형 풀무의 이용을 꼽을 수 있다. 또 다른 충격적인 혁신은 11세기에 숯을 코크스로 대용한 일이다. 직물제조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는 송의 기적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중국의 비단산업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중국의 물방아는 31년, 용광로에 풀무질을 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무엇보다 물을 이용한 풀무의 피스톤막대와 동력전달 벨트를 이용한 점이 증기기관과 흡사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더욱이 인공수로와 저수지는 중요한 발명이었다. 또 하나 특별히 눈에 띄는 송나라의 혁신은 현금을 기반으로 하는 세금제도의 창설이다. 9세기경에 외상을 목적으로 처음 생겨난 지폐는 10세기 초가 되면서 교환의 매개물이라는 의미의 진정한 지폐로 발전했다. 송대 상업주의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놀라운 증거는 마을과 대도시의 생성이었다.중국의 농부는 유럽의 농부보다 훨씬 높은 수확률을 자랑했다. 정부는 농부들에게 농업에 투자랑 장려금을 지급하고 매우 낮은 금리의 차관을 제공했다. 또한 중국의 항해혁명에서 가장 눈부신 부분은 선박의 발전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규모와 수용능력 모두에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화약, 총, 대포는 850~1290년에 이루어딘 최초의 군사혁명 때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다. 중국인은 850년경에 화약을 발명했고 10세기 초에 그것을 화염방사기에 이용했으며 969년에는 불화살을 이용했다. 1231년에는 폭탄. 수류탄, 로켓에 이용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육지와 바다의 광산에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중국의 군사혁명이 가지는 가장 인상 깊은 면모 중 하나가 바로 해군이라는 사실이다. 송대의 해군은 2만 500척의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배의 무기체계가 지속교묘하게 피하며 무역을 했다. 세번째 이유는 모든 사무역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세계 은의 대부분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는 간단한 사실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즉, 중국 상인들은 공적인 제제가 있거나 말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돈벌이가 매우 큰 무역을 계속했다.일본을 보자면 1853년 메이시 시대를 거쳐 1868년 이후에 산업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즉, 서양의 영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일본이 메이지 시대 전까지 발전했다는 실증적 증거가 없었으나 1868년 이후 메이지 시대에 기록된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거의 모든 유럽 경제를 앞섰다. 일본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문을 걸어 잠그지도 않았고 본심을 숨기지도 않았다. 메이지 시대의 산업화는 대부분 그 지역에 있는 서양상인들 보다는 중국 상인들이 지배에 대적하기 위한 욕심해서 촉진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제 2부 서양은 꼴지였다.유럽이 온전히 자체의 힘으로 발전했다는 일반적인 가정과는 반대로 동양에서 전파되었다. 그 첫번째는 중쟁기 이다. 쇠편자와 무띠 마구법도 중요한데 5세기 경부터 훈족이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 마구법은 기원전 100년경에 중국 한나라에서 발명한 가슴띠 마구법을 개선한 것이다. 가슴띠 마구법은 기존 서양이 사용했던 목띠 마구법보다 효율적이었다. 또한 목띠 마구법도 중국에서 직접 전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럽의 농업혁명은 온전한 서양의 산물이 아닌 동양의 많은 기술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8세기경 나타난 새로운 전쟁 형식인 돌격 기병대는 봉건국가가 봉건경제의 제도적 기틀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의 계기는 등자의 발명이다. 등자의 발명이후 기병의 힘은 비약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등자는 인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등자의 중요한 혁신은 3세기경 중국에서 발명한 청동 및 주철 등자로 완성되었다. 유럽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기독교의 고위 성직자들은 정체성 형성을 위해 이슬람을 위협적인 존재다.
    인문/어학| 2007.12.09| 6페이지| 1,000원| 조회(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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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자 - 인간과 신화
    『공자, 인간과 신화』를 읽고 -공자.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보고 싶다. 내가 미약한 지식으로나마 알고 있었던 공자는 멍청이와 게으름뱅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그의 제자들 역시 어디서나 인정받았으며 그의 학설과 능력은 더욱 높이 평가받았다. 마치 지금 강남에서 가장 잘 나가는 학원 강사처럼 많은 학생들이 돈을 보따리로 들고 찾아와 양계장의 닭장마냥 좁은 강의실에 앉아 강의를 듣듯이 많은 제자들이 찾아와 그에게 배움을 갈구했으니 말이다. 그런 수많은 제자들 중에 그는 어떻게 훌륭한 제자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 궁금증은 다음의 공자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인간의 신체 중에서 눈동자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눈동자는 악을 감추지 못한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눈동자를 바라보라.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인격을 감출 수 있겠는가?”이러한 가르침에서 보이듯이 그는 교사로서 학문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의 진지한 지적 관심을 꽤뚫어보고자 했으며, 그러한 이들에게 진정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호소하는 힘을 가졌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시대의 어떤 교사도 그처럼 문학, 역사 및 철학에 대한 수준 높은 공부의 기회를 제공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공자는 합리적인 이성을 신뢰하였고 인간의 평등 및 협동사회의 인념을 제시함으로써 그 당시의 참담한 현실을 구제하려고 하였던 개혁가였으며, 그 사상의 기본원리는 오늘날 민주주의 원리와 상통한다 생각했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공자사상의 현대적인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도 계속 포기 되지 않는 것 같았다.허나 이 책에서는 유교의 본질을 권위와 위선으로 보고, 옛 성인을 이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복고적인 인간으로 공자를 묘사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미래보다는 과거를 지향하고, 창조보다는 답습을 도모하는 것이 공자의 전모라고 생각하게 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공자는 살아 숨쉬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가장 완벽한 경전의 ‘진실’말을 아랫사람에람끼리라야 토론이 가능하며 거기에 발전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비추어 볼 때 유교문화에 연원을 둔 한국사회는 토론이 부재한 사회, dogma가 지배하는 사회로 남아있다. 중국은 1966년 마오쩌똥에 의한 10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유교를 폐기 처분했고, 일본 역시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켜 무력한 유교사회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에 비해 한국사회는 아직도 유교적인 가치관이나 관습에서 졸업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저자는 1910년 한일합방, 1950년 6?25, 1997년 IMF라는 일련의 난관이 불과 10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불어닥친 이유를 묻는다. 저자는 그것이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유교문화 속에서 성장해 온 데서 연유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제 “유교의 유효기간은 끝났다”고 말한다.역사적으로 위대한 그림은 수많은 덧칠을 받게 된다. 위대한 명작인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원작이지만, 어느 집의 벽에 그린 것이기에 훼손되고 말았다. 그래서 다른 화가가 좀 더 명료한 색으로 덧칠을 했는데, 그림 색깔은 뚜렷해졌으나 원래 작품에서 풍기던 원근감과 생생함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림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되기에, 어쩌면 덧칠은 막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이처럼 위대한 인간은 왜곡된다. 공자라는 위대한 그림은 수많은 덧칠을 받아야했기에 지난 2000년 동안 그의 모습은 알아보기도 힘들게 되어버렸다. 도가, 법가철학자들과 한대 유학자들, 송대 주자학파, 이 모두가 덧칠의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덧칠한 사람만 탓하고 있을 것인가. 『논어』의 구절들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이 세상을 당당히 살았던 구도자의 모습이다. 제자 가운데 공자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따라서 공자의 시체가 식자마자 제자들이 아늑한 지적 안식처를 세우고 그 안에서 성전(聖典) 및, 결코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성인의 권위를 찾기 시작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배경공자가 살던 시대는 B.C 500년경으로, 중국 역사상 춘추시대이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봉건 제후들은 귀신의 이름 앞에서 나라 간의 약조를 맹세했지만, 그러한 맹약은 각국의 이해에 따라 너무도 쉽게 깨어졌다. 사람들은 이미 귀신의 진노를 믿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이상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되자 가장 세력이 큰 귀족조차도 몰락하거나 암살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으며, 평민들은 비극적인 처지에 놓여있었다. 누가 전쟁에 이기던 그 가운데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평민들이었고, 힘이 없었기에 평화시에도 고통 받아야 했다. 귀족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냥과 전쟁, 그리고 사치스러운 생활이었으며, 이러한 향락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평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젊은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이 구겨진 사회를 깔끔하게 다림질하는 데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구겨진 옷을 다리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과 누르는 힘이 필요하다. 그의 가슴에는 더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뜨거운 비전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회를 이루는 방법을 이야기하였고, 그런 그의 곁에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이제 교사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의 요체는 지배자로서의 요건이 백성의 행복과 복지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사회란 근본적으로 각자가 서로 남을 능가하려 하지 않고, 공동의 복리를 증진하려고 노력하는 상호협동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그러나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만은 않았는데, 공자는 당시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군주와 같은 사람들이 계속 정치를 좌우하는 한,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세계가 구현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그는 정부의 행정기능을 유덕하고 유능하며 적절한 교육을 받은 대신들에게 위임하도록 군주들을 설득하였고, 청년들을 교육하여 그러한 대신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무혈혁명을 달성하려고 한 것이다. 즉, 왕위를 세습한 군주로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아 공적을 기준으로 선발된 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일국의 국정을 담당하기를 원하였으며,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자기 손으로 구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주들이 선뜻 그의 손에 실권을 쥐어주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도’를 활용해 줄 군주를 찾아 여행길에 올라 여러 나라를 다녔다. 그러나 10여 년간 계속된 이 여행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이렇듯 그는 자신의 주의 주장을 위해서는 어떠한 시련과 박해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의 사도인 바울이 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몰매를 맞으면서도 각국을 여행하며 기독교 복음을 전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죽은 뒤 몇 세기 못 가서 세습적인 귀족정치는 사실상 중국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그의 영향력은 서구 민주주의와 중화민국에까지 이른다.현존하는 공자에 관한 자료중에서 가장 믿을만한 것은 『논어』이다. 이 책은 주로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는 후세에 첨가된 부분이 있지만, 그런 부분은 문체, 용어, 사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금방 위작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논어』가 위작이 아니라는 가장 좋은 증거 가운데 하나는, 『논어』가 유가서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유가로서는 포함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자료가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자하(子夏)편에는 제자들간의 논쟁이 상세히 전하고 있으며, 특히 제 25장에는 어떤 제자가 공자도 자하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한 것도 보인다. 또 옹야(雍也)편 제 26장에는 공자가 악명높은 부인과 만났다는 것이 실려 있다. 이런 것이 삭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논어』를 존숭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자료, 예컨대 사기『공자세가』나 『좌전』같은 경우는 조심스럽게 이용해야 할 것이며, 『공자가어』같은 경우 위작이 분명하다. 『맹자』는 공자 사후 100년 뒤에 쓰여졌는데, 어느 정도 상세하게 공자에 관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인간으로서의 공자공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다소 과묵한 편이었다은 세상에 닦이지 않고 소박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이다.그러나 그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는데, 덕과 성실에 배치되지 않는 한 쾌락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고나현악에 열띤 관심을 가졌고 스스로 관악기의 일종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천재요, 위대한 창조적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단히 균형이 잘 잡힌 사람처럼 보인다.그는 문명의 전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확신은 너무나 진지하였기에 부당한 비판도 미소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솔직함을 잃지 않았고, 전지전능한 척하지 않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지식을 얻었고, 제자들이 그와 의견을 달리했을 때도 그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사람은 평판보다는 공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공자는 항상 말했다. 하지만 그는 때로 세상의 평판에 관심을 가졌는데, 친한 제자들에게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 편으로 맹인을 접대하는 태도라든지 자신의 마굿간이 불탔을 때 보인 행동을 보면 그는 인정많고 생각도 깊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공자는 성자도 아니었고 완전무결한 사람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처럼 공자도 자기가 살았던 사회의 관행적인 사교관계에 적응하였다. 애제자 안회가 죽었을 때는 한껏 슬퍼하기도 하였으며, 무례한 친지에게 너무나 화가 났을 때는 지팡이로 정강이를 때리기도 하였다. 이것을 통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공자를 엿볼 수 있다.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정치적 개혁을 대체로 비형이상학적인 기초위에서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삼갔다. 한 번은 공자가 아팠을 때 제자 자로가 ‘선생님을 위해서 신령들께 기도해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공자는 “오래전에 내 방식의 기도는 끝났다‘라고 말했다. 또한 공자는 귀신에 관해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실제로 ”선생
    인문/어학| 2007.12.09| 8페이지| 1,000원| 조회(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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