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의 편지 읽기:중세 이탈리아 상인의 문서(사료) 읽기1. 머리글-역사가의 편지 읽기현재까지 미시사 연구에 가장 핵심적인 사료라고 한다면 ‘편지’일 것이다. 사료로서 주목받지 못하던 과거의 보통사람들의 편지글이 훨씬 현장감 있는 역사상을 제공하고 또한 어쩌면 역사가의 사관에 의해 걸러진 역사보다 더 객관적인 역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역사는 인류의 정치, 군사, 외교,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분야가 유기적으로 조직된 총체적 이야기다. 따라서 역사속의 인물이 쓴 편지 역시 다양한 시대상을 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거의 일상을 담는 편지글에서 무엇을 읽어 낼 것인가의 문제는 역사가(歷史家)가 그 속에서 어떠한 사실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역사화 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즉, 편지의 작자와 독자와의 관계, 즉 누가 쓴 것인가의 문제는 누구에 의해 읽혀지는가의 문제와 직결되는 관계-정치사나 왕조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정치적 파급효과가 컸던 유명한 사람들의 편지글이, 경제사학자들에겐 상인의 편지글이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큰 것이기에-는 역사 연구의 전문성을 보장-강화하는 한편 또 다른 역사상들을 놓칠 수도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중세 이탈리아의 상인들의 편지나 문서에 집중한 연구자나 그것을 토대로 한 연구논문은 대체로 경제사학자와 경제사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물론 상인의 편지글을 통해 사회상을 살펴보고는 있지만 한 가지 사료에 대한 전문적이고 다양한 고찰이 하나의 성과로 통합되지 않는 듯하다)따라서 최근 사회전반에 논의되고 있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제너널리스트(generalist)에 대한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특정 사료에 대한 다양하고 전문적인 역사읽기’는 더욱 풍부한 역사 연구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2. 몸 글 - 오래된 편지들과 역사가이제 두 사람의 편지(사료)와 관련한 논문들에서 역사학자의 사료 읽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가. 「중세 이탈리아 상인과 기록」-남종국)남종국은 베네치아 상인 로렌초 돌핀의 편지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알려줄 너의 소식을 기다리는 매일 매시간이 우리에게 천년같이 느껴진다. 그곳과 다른 지역들에 관한 최근의 소식들, 환율, 경기의 흐름 그리고 네가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알려주기 바란다. 우리에게 곧바로 답장하는 것을 잊지 말고, 제발 좀 더 자주 편지를 쓰도록 해라.” 이 편지는 15세기 초 베네치아 상인 로렌초 돌핀이 브뤼헤에 있는 자신의 주재원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상인들의 세계에서 편지가 갖는 여러 가지 의미를 잘 보여준다.’)남종국은 13세기 이후 이탈리아의 기록 작성자(사료작성자)로서의 성직자의 독점적 지위는 무너지고, 속인들(특히 공증인과 상인들)도 기록(사료)을 대량 생산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다양한 종류의 상업 문서들)을 통해 두 가지 측면, ①이탈리아 상인의 모습과 ②그들의 기록에 나타난 당시의 사회상-앞서 말한 여러 가지 의미-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상인의 모습(주로 경제 활동과 관련한 문제들)에 국한되고 두 번째 언급한 당시의 사회상(여러 가지 의미)이라는 개념(연구)은 빈약하다. 단지, 다티니(Francesco di Marco Datini, 이하 다티니Datini)의 편지-다티니의 편지는 그 종류와 양도 엄청남에도 불구하고-를 인용함에서도 다음과 같이 서술할 뿐이다.그가 남긴 기록들은 경제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사료로써 활용되고 있다. 그가 주고받은 서신에는 상업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치, 군사,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정보가 풍부하다. 그가 아내 마가레타와 주고받은 편지는 당시 상인들의 일상생활과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며, 비슷한 시기에 파리의 늙은 부르주아가 자신의 젊은 아내의 “훈육”을 위해 쓴 책과 비교해볼만 하다. 그의 회계장부 중 가족의 소비지출을 기록한 것은 당시 상인들의 음식문화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다티니(Datini)의 편지)의 경우, 중세 유럽사가(史家)들에게 훌륭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남종국의 경우에서와 같이 편지의 저자가 상인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역사가(歷史家)가 경제사적 관점에서 사료를 보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나. 「하느님과 이윤의 이름으로」,『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주경철하지만 주경철의 경우는 다티니(Datini)의 편지에 대한 짧은 글)을 통해서도 다양한 역사상을 언급하고 있다.“사실 ‘중세’라는 말과 ‘상인’ 이라는 말은 도저히 함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들이다. ~ 그러나 하느님과 돈, 이 두 가지는 아무런 모순 없이 중세 상인의 마음에 공존하고 있었다.”다티니(Datini)의 장부책 제일 앞면에 신조처럼 쓰여진 ‘하느님과 이윤의 이름으로’라는 구절을 통해 역사가는 약간의 중세 배경지식을 맥락화(脈絡化)함으로써 중세 이탈리아 상인의 종교관과 기업이념(?)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 극적으로 상상해 낼 수 있고, 나아가 중세 이탈리아의 교회의 기능도 유추할 수 있는 키워드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주경철은 다티니(Datini)의 결혼관, 가족관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도 언급하고 있다.하지만, 14세기 후반 영국의 왕 헨리 5세의 도서관에 있던 장서(藏書)가운데 절반가량이) 바로 다티니(Datini)에게 빌린 책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다티니(Datini)를 ‘바르디, 푸거 등과 같은 초대형 상인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구멍가게 수준은 넘는 중간 규모’)의 상인으로 보는 주경철의 평가는 다티니(Datini)가 중간규모의 상인으로 평가하기엔 뭔가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저자에 대한 다양한 평가, 보다 많은 2차 사료의 확증, 치밀한 역사화의 과정이 있다면 보다 풍부하고 생동감 있는 역사서술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What Life Was Like 천재들의 시대』)과 같은 역사 서술 방식은 역사를 지나치게 소설화한 방식일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AD1400-1550)시대를 가장 잘 표현한 역사서일까? 하는 의문도 품게 되지만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이에 선행되는 역사가의 사료읽기를 감안한-역사쓰기가 독자들에게 주는 ‘디테일’함과 ‘재미’ 이상의 가치는 사람의 구체적 삶이 전개되는 ‘일상 생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3. 나가는 글-역사가의 읽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실증주의 역사학 계열의 와인버거(S. S. Wineburg)의 이론으로 미시사연구에서 사료읽기를 논의하는 것이 범주착오적인 발상일수도 있으므로, 그에 근거한 사료읽기가 아니라 그에 대비한 차이점(혹은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는 역사가가 사료에서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활용하는 방법으로 발견법(heuristics))을 제시하는데, ①확증(corroboration), ②맥락화(contextualization), ③출처확인(sourcing heuristic)과 ④부재증거 고려(consideration of absent evidence) 등의 네 가지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편지라는 사료에 관련해 다음 두 가지를 부언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첫째, 확증적인 사료는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시공간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즉, 편지의 경우는 원격지간의 통신 수단이므로 동시대 특정 지역내에서도 시공간적 간극을 감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둘째, 맥락화의 오류이다. 즉, 앞에서 본 것처럼 중소 상인으로서 다티니(Datini)가 경제 분야 외에서의 큰 자리매김이 있었다면, 다티니(Datini)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축소된 것으로 맥락화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확증적 자료의 준비도 미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모든 역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미시사 연구에서의 ‘편지’라는 사료는 한 인간의 삶이 공간적으로 ‘특정 사회 속에서’ 어떻게 녹아 있는지, 또 ‘동시대적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대한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파악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접근, 역사 읽기가 필요할 것이다.▣ 참고문헌-「중세 이탈리아 상인과 기록」, 한국서양중세사학회 41차 발표문 , 남종국, 2005.9.-『What Life Was Like 천재들의 시대:르네상스 이탈리아 AD1400-1550』,타임라이프북스, 윤영호 역, 가람기획, 2004.
-17세기에 ‘대왕’루이 14세는 “짐은 곧 국가다”라고 했고, 18세기 그의 후계자 루이 15세는 “짐이 죽은 뒤에야 대홍수가 오건 말건 내 알바 아니다”라 했다.그리고 정말로 그가 초대한 대로 대홍수가 일어나 버렸다.향수뿌린 가발과 반바지(culotte)를 입은 귀족 대신 ‘상퀼로트(sanscnlottes)를 입은 평민들이 등장하여 프랑스인은 모두 ’시타와이엥 citoyes' 혹은 ‘시트와이엔느 citoyenee(남녀시민)’이 되었다. -부족한 것이라곤 없었다. 대영주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로써는 지금의 복잡한 상황들은 단순 위기 상황이라고만 생각했다. 미국 독립전쟁에 프랑스 국기를 들고 참여했을때에도 이 승리는 당연히 프랑스의 몫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은 군인의 임무로 행할 수 있는 임무를 다하면 되는 것이였다. 전쟁을 치루면서 워싱턴의 신임을 얻어 전쟁터에서도 승승장구하여 지지세력이 팽창되더라도(실제 그는 그러했다) ,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저들의 생각또한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독립이 목적은 아니였지 않은가?)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프랑스의 개입또한 독립을 위한 독립전쟁이 아닌 몇백년간의 앙숙인 영국하고의 처절한 전투에 지나지 않았다.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함대와 프랑스 군인이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전쟁에 임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한 모든 프랑스 군인들 그리고 위의 선조들이 그러하였듯이 자신도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면 조국을 위해 나의 몫은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782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문으로 당당히 개선장군으로 들어온 그로써는 프랑스를 위한 자신의 몫을 다했으므로 국왕옆자리에서 왕좌를 보좌하며 국정을 이끌면 되는 것이였다.25의 어린 나이에 국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독립전쟁때의 워싱턴과의 신임으로 인하여 프랑스와 미국과의 외교는 자신이 거의 도맡아 할만큼,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 모욕할 수 없는 위치에 자신이 평소 경멸하던 귀족역시 자신의 앞에서는 단 한마디도 욕할수 없지 않은가?..그는 그러했다짓누르고 있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다.왕으로써의 품새도, 정치인으로써의 명색한 두뇌게임도 굴리지 못하며, 경제지식과 외교지식도 그리 뛰어나지 않은 평범한 왕에 불과한 국왕을 보좌하기에, 자신의 발언권은 더욱 높아가고 있으며, 타고난 정치끼도 적지 않게 있어 누구하나 그의 발언권에 명확하게 반론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라파예트의 현 위치였던 것이다.그로써는 국왕의 얄팍하거나, 뛰어난 정치가가 아니라는 것이 더 낫다. 루이 16세는 그를 신임하고 있으며, 귀족, 군인층에게는 그리 먹혀들지 않는 뛰어난 정치색과 위험한 진보적 발언들도 루이는 그를 알게모르게 믿고 방어막이 되어주고 있었던 것이다.루이 16세의 삼부회 소집 명을 받은 라파예트(La fayette)는 자신과 루이의 생각대로 밀어 부칠 생각이였다. 사실 그러했다. 이미 국고 재정은 간당간당한 상태였고, 프랑스가 출전한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인해 얻은 것이라곤 영국과의 외교악화에 불과했다.하지만 요즘 들썩들썩 거리는 상황들에 대한 예감이 좋지 않았을 뿐이지, 그들이 국왕의 명을 거부하고 베르사유 궁전의 문을 박차고 나갈지는 몰랐다. 그들의 세력 징집의 효과가 어느정도인지는 몰라도 뭔가 사태가 심심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삼부회의 목표는 명확했다. 국가재정위기를 복구하고 위기에 벗어나 새로운 입헌군주를 도모하는것이 목적이였다. 비록 왕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고 그는 그러했다.그러나 그가 예측했던 생각들이 그것도 귀족이 아닌 평민들에 의해서 벗어나버린 것이 사태의 심각한 현황을 보여주는 첫 발걸음이라는 것을 정치감각이 뛰어난 그로서도 정확히 판단은 되지 않았다.곧 화려한 웅장미를 뒤로한 베류사유의 주인들과 귀족들은 베르사유의 아름다움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그들의 수다스러운 발언장이 되어버렸고, 사태수습에 방관하는 국왕의 모습은 뒤로한채 그때서야 라파예트는 자신이 지금 이 곳에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는지 빠르게 계산하고 그 대답을 내렸다.수수방관하고 있던 귀족들중 몇몇시 이 사태가 완만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삼부회 합동회의에 동의하여 전 의원이 합류하게 되었다.사실 국왕은 심기가 뒤틀려 사태수습을 포기한 상태일지도 몰랐다. 부족한 재정을 충만하여 국고열쇠 단단히 잠그고자 했던것이였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모든 것은 형평성(그가 생각한)은 잃어버린채 자신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둥둥 떠나니는 무게 없는 발언만 일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파예트는 달랐다.재빠른 그의 정치적 회전력은 국민공회에 참여하여 ‘인권선언안’까지 제출하여 1789년 7월13일 국민공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중이였다. 미라보 역시 국왕이 국민회의를 해산시키려고 하자 뛰어난 입담으로 위기를 극복하여 온 파리 시민의 인기를 라파예트와 함께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였다.그들에게는 궁정의 환락과 사치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고, 라파예트의 경우 국왕의 신임을 독차지 하고 있었던 터라 그가 생각한 이치대로 그 이치대로만 흘러주면 되는 것이였다.그러나 그도 몰랐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이 생각했던 입헌군주제의 꿈이 빨리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특유의 민첩한 행동으로 즉시 파리 국민군의 사령관에 몸을 실었다.‘89년 협회’를 주재하여 국왕과 혁명세력대표간의 회의를 하고 있는 중간중간,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현 프랑스의 모습은 나의 생각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을..그는 사령관으로써,정치인으로서, 국민의 대표자의 한사람으로서 지금 이 혁명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태를 일으키는 것은 저 많은 무리들이지만 그 사태를 수습하고 위기를 구해내고 안건을 만들어놓는 것은 자신의 몫이고, 이 몫은 썩어갈대로 썩어간 귀족의 반반한 머리를 쥐어짜여 생각해논 것이 아니라, 젊디 젊은 자신의 뛰어난 정치적 판단으로 사태의 모든 것을 주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파리의 길거리의 무수한 인민들은 자신과 미라보에 대해 존경의 눈빛과 굶주림으로리를 좁디좁은 골목길의 그 어디엔가에 토해내고 있었다.빠른 해결책은 일단 국민회의가 안건으로 내놓았던 봉건제ㆍ영주제 폐지안건, 행정 ㆍ사법의 개혁에 착수하여 민주주의의 확립에 머리를 모으고, 교회재산의 국유화로 재정의 구제를 시도하고 성직자 세속법들을 제정하여 최초의 헌법기초를 1791년 9월 완성하기에 이르렀다.미라보와 라파예트는 9월 30일자에 해산하여 그 다음에 등장하는 입법회의에 지도권을 장악했고, 라파예트의 뜻대로 입헌왕정의 정체를 수립함과 동시에 부르주아 사회 형성의 길을 열었다. 그로써는 정치적 뜻을 이루었고 최고의 위치에 자리잡았으며 사회의 변혁의 중심에서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프랑스 국민이 존경하는 사람 중 한사람이 되었다.그러나 그는 단 한가지를 몰랐다.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세세한 것까지 프랑스의 모든 것이 국민의 뜻대로 진행되어 이루어지를.그것은 처음부터 태어난 계급이 다르고, 살아온 길이 달랐던 그로써는 군중의 속까지 세세히 파악할 수 없던 것이였다.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고, 어찌보면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나, 젊은 나이에 많지 않게 너무 많은 것을 쥐어잡아버린 그로는 혁명의 근본적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국민과 그의 뜻 또한 다르지 않았던가?.혁명에 대한 예상을 그르치기 시작한 순간을 시작으로 국왕의 신임을 한몸으로 받고 있던 그로서는 국왕의 보좌에도 그의 힘을 아끼지 않았던 탓이였는지 1790년 가을부터 그에 대한 대중의 인기를 급격히 하락했다.1791년 4월 초기 프랑스 혁명의 중심인물인 미라보가 급사하였다. 미라보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파리에 갇혀서 불안했던 왕가 일족에게 더욱더 초조감을 안겨주었다. 미라보는 혁명의 추진력이긴 하였어도 입헌왕정을 신조로 삼았고, 그 뛰어난 역량과 안목에 의해서 왕가에게는 더없는 지주로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사망 후 도피계획이 급속히 구체화되어 국왕 일가는 6월 20일 새벽에 튈르리 궁전을 탈출하여 비밀리에 마차로 동부 국경으로 향했으나, 불은 국왕이 아니던가? 공화파와 왕정파 간의 대립이 격화하였고, 파리에서는 왕정폐지론이 급격히 대두하여 자코뱅당과 코르들리에 클럽의 시민은 7월 17일 마르스 광장에서 공화정체 수립의 서명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때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군에게 짓밟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간단히 진압되고 말았다. 그는 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대중은 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는 시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 역시 대중에 대한 인기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베르사유의 찬란한 궁전안에서 목소리에 힘주어 모든 발언권을 쥐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그리웠을 것이다.다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1792년 국왕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국왕은 마리 왕투아네트의 나라인 오스트리아로 도피하려 했었다),라파예트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위기는 또 한번의 기회라 했던가?프랑스 옆에서 영국과 더불어 프랑스의 앙숙인 오스트리아ㆍ프로이센에에게 프랑스는 선전포고 하였다. (지금 벨기에에 해당)네덜란드 지역은 덥석 영유하여 프랑스와 국경을 바로 접해 항상 눈엣가시였던 그곳에 대한 분쟁을 시작으로 나라간의 전쟁이 터져버린 것이다.혁명군은 라파예트를 원했다. 전쟁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사령관이라면 미국 독립전쟁에서의 뛰어난 경험과 연달은 승리를 안겨준 라파예트만큼 적임자가 없던 것이였다. 그는 전쟁의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혁명방위전쟁의 전선 사령관이 되었다. 중부지역의 군사령관으로 항전하여 뒤무리에 장군과 함께 10만 대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미국독립전쟁처럼 그 모든 운은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연전연패.분격한 파리 시민은 연일 의회로 몰려와서 패전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고, 보수파 의원의 언동을 방해했다. 수천만의 군중은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왕을 포위하고, 결국 입볍의회는 전국민에게 애국적 정열에 불타 의용군으로 참가하여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기를 바랬다.그리고 그 와중에서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은 재차 시민봉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이랬던 저랬던 라파예트의 패전은 또하나의 혁명세력을 불다.
카이사르에 대하여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카이사르 생전에 로마에서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달인 퀸틸리스(로마력의 제7월)를 '율리에'로 개명했다. 이 이름은 카이사르가 로마력을 개정해 만든 태양력인 율리우스력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력은 동방 정교회를 믿는 여러 나라에서 아직도 부분적으로 쓰고 있으며, 오늘날 서양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약간 개량해서 만든 태양력이다.로마 귀족이 명성을 얻고 가문의 명예를 높이는 방법은 공직에 선출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로마에서 정치적 경력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까다로웠고, 비용도 많이 들었으며, 경쟁도 치열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경제개혁으로 재산을 일부 몰수당한 농민계급은 지배계급을 증오하게 되었다. BC 133년부터는 혁명과 반혁명이 돌발적으로 번갈아 일어났다. 귀족계급의 악정이나 실정은 더이상 계속되기 힘들었으며, 군대에 병력을 공급하는 농민계급의 지지를 받는 군사독재가 가장 가능성 있는 대안으로 등장했다. 재산을 몰수당한 농민들은 대다수가 군대에 들어가 장기복무를 했으므로 이들의 지지야말로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귀족들 사이의 경쟁은 공직과 거기에 따른 이권을 얻기 위한 전통적 양상에서 독재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필사적인 경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집안은 이 경쟁에 적극 참여한 것 같지는 않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삼촌인 섹스투스 카이사르가 BC 91년에 콘술(집정관)을 지냈고, 이듬해 콘술을 지낸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으며,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BC 64년에 콘술을 지낸 정도이다. BC 90년에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로마 정부가 그들에게 로마 시민 헌법을 폐지하는 데 앞장섰다.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부관으로 출발했지만, 술라가 죽은 뒤 급진파로 돌변했다. BC 69(또는 BC 68)년에 카이사르는 콰이스토르(재무관, 로마의 정치적 단계를 올라갈 때 맨 처음 밟아야 하는 관직)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아내 코르넬리아와 마리우스의 미망인인 그의 고모 율리아가 죽었다. 그들을 위한 공개 장례식 추도연설에서 카이사르는 킨나와 마리우스를 찬양할 기회를 얻었다. 그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먼 친척인 폼페이아와 결혼했으며 원(遠)스페인 속주(지금의 안달루시아와 포르투갈)에서 콰이스토르로 일했다. 그는 BC 65년 공공건물을 관리하는 쿠룰레 아이딜레스(고위 조영관)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자 빌린 돈을 아낌없이 뿌려가며 이 직책에 뽑힌 것을 크게 선전했다. BC 63년 그는 정치적 술수를 써서 대신관단을 통할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신관)에 선출되었으며, BC 62년 콘술 다음 가는 지위인 프라이토르(법무관)로 선출되었다. 프라이토르 임기가 끝날 무렵, 카이사르의 집에서 여자들만을 위한 보나 데이(땅의 풍작과 여자의 다산을 관장하는 로마의 여신) 축제가 열렸는데,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여자로 변장하고 이 종교의식에 참석했다. 이로 말미암아 추문이 생기자, 아내가 클로디우스를 집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마침내 아내 폼페이아와 이혼했다. 그는 BC 61~60년 스페인(히스파니아) 총독 자리를 얻었고, BC 60년 로마로 돌아온 뒤 이듬해 콘술로 뽑혔다.카이사르는 이미 정치적 거두들과 제휴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동방의 질서를 회복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이탈리아로 돌아온 BC 62년에 그의 군대가 해산되자 원로원은 그가 제대군인들에게 나누어줄 땅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했다. 꾸준히 폼페이우스와 우정을 나눈 카이사르는 이제 그와 비밀협정을 맺었고 뛰어난 수완으로 크라수스를 설득해 동료로 끌어들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삼두정이다.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술라의 부관이었던 크라수스는 그때까지 폼것이 카이사르의 경력과 로마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중요성은 단기간에 걸친 카이사르의 브리튼 섬 공격과 마찬가지로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갈리아 정복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갈리아 정복으로 병력을 얻었고, 또한 재물과 명성을 얻음으로써 로마 및 지중해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개편작업을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그리스 로마 문명이 낳은 현재의 서양문명이라는 좁은 무대 안이 아니라 세계사라는 좀더 넓은 무대를 배경으로 살펴보면, 카이사르의 이 마지막 업적이 갈리아 정복보다 훨씬 중요해 보인다.BC 125년에 확립된 로마의 북서쪽 국경이 BC 58년에는 알프스 산맥에서 론 강 상류의 왼쪽 연안을 따라 내려와 피레네 산맥까지 뻗어 있었고, 세벤 산맥 기슭을 따라 가론 강 상류 유역에 이르렀지만 갈리아의 대서양 연안에는 이르지 못했다. BC 58년 카이사르는 이 국경선을 넘어 갈리아에 진격했으며, 이어서 라인 강 건너편 출신인 게르만 용병 아리오비스투스를 진압했다. BC 57년 카이사르는 멀리 북쪽에 사는 갈리아인의 일파이며 호전적인 벨기에족을 정복했고, 그의 부관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오늘날의 노르망디 지방과 브르타뉴 지방을 정복했다. BC 56년 오늘날의 브르타뉴 남부에 살던 베네티족이 북서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때까지 정복당하지 않은 도버 해협의 갈리아 쪽 해안에 사는 모리니족과 라인 강 하류의 남쪽 연안에 사는 메나피족이 이 반란을 지원했다. 카이사르는 간신히 베네티족을 다시 정복했으며 BC 55년에 나머지 두 부족을 전멸시켰다. 같은 해 코블렌츠 바로 밑에서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마니아를 공격했고, 다음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튼(브리타니아) 섬을 급습했다. BC 54년 다시 브리튼 섬을 공격했으며 갈리아 북동부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반란을 진압했다. BC 53년에는 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라인 강을 건너 2번째로 게르마니아를 공격했다에게 사사건건 맞섰고, 크라수스는 옛날의 적 폼페이우스에게 대항했다. 세 사람은 BC 56년 4월에 카이사르의 속주인 갈리아키살피나에 있는 루카에서 회의를 열고, 분쟁을 조정해 동맹관계를 원래 상태로 되돌렸다. 이 회의에서 세 사람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다음해에 콘술이 되어 속주 군대에 대한 카이사르의 지휘권을 다시 5년 동안 연장하는 한편, 크라수스가 5년 임기의 시리아 총독이 되고 폼페이우스가 5년 임기의 스페인 총독이 되는 데 합의했다. 이후 크라수스는 BC 53년 파르티아인에게 참패당하고 죽었으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결혼동맹은 BC 54년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죽음으로써 깨졌다. 그후 폼페이우스는 점점 더 카이사르한테서 멀어져, 두 사람 사이가 결정적으로 갈라졌을 때 폼페이우스는 어느새 귀족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귀족들은 결코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로마에서는 카이사르가 속주 총독에서 사임해 군사 지휘권을 잃게 되는 날짜와 2번째로 콘술에 취임하는 날짜 사이에 간격을 두어야 하느냐 두지 말아야 하느냐가 쟁점이 되었다. 간격을 둔다면 카이사르는 그동안에 어떤 공직도 갖지 않은 민간인으로서, 무방비 상태로 적들의 수많은 공격을 받게 될 처지였다.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는 정치적으로 파멸할 것이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2번째로 콘술에 취임할 때까지 그의 안전을 보장해줄 군사력이 있는 속주를 적어도 하나는 계속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 문제를 위기로 몰고 간 사람은 BC 50년의 콘술 가운데 하나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였다. 그는 임기가 끝나는 날짜에 카이사르가 지휘권을 내놓아야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같은 날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그러자 BC 50년 12월 1일 평민 호민관 쿠리오는 두 사람이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결의(찬성 370표, 반대 22표)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이튿날 마라키움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 카이사르는 테살리아에서 이집트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했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장교에게 살해당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겨울을 나면서 그곳 주민들과 싸우는 한편,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연인 관계를 맺었다. BC 47년에 그는 아나톨리아 북동부에서 아버지 미트라다테스의 폰투스 왕국을 되찾으려고 애쓰고 있던 킴메리 보스포루스의 왕 파르나케스와 잠시 국지전을 벌였다. 카이사르의 유명한 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는 이 전투에 대한 그 자신의 설명이었다.그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갔지만 몇 달 뒤에는 딕타토르라는 칭호를 갖고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에서는 그의 적들이 집결해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BC 46년 그는 카르타고 근처의 타프수스에서 적을 무찌르고 로마로 개선했지만, 새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1월에 다시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는 BC 45년 3월 17일 문다에서 이를 진압했고 그리스 로마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다. BC 44년 3월 15일 로마의 원로원에서 암살당할 때까지, 그가 이 방대한 재건작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된 시간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카이사르의 죽음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너그러움과 성급함 때문이었다. 이 2가지 성격의 결합은 그의 개인 신변에는 지극히 위험했다. 카이사르는 '이민족'에 대해서는 잔학 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결코 망설이지 않았지만, 그에게 반대하다가 패배한 로마인들에게는 거의 언제나 너그럽게 대했다. 따라서 너그러움은 단순히 정책적인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생활을 시작한 초기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것을 보았다. 카이사르는 정적들을 대규모로 사면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를 새로운 정권의 책임 있는 지위에 앉히기도 했다. 그의 암살 음모를 선동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로마 공화제의 상징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모두 일찍이 카이사르의 적이었다. "브루투다.
종교 ? 사회상으로 본 갈릴레오의 일생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별세한 지 꼭 이십년 만인 1564년 2월 15일 피사에서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태어났다. 갈릴레오가 태어나기 전 세기부터 유럽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500년에 이르러 유럽 사람들은 콜럼버스와 바스코다가마를 따라 황금을 찾아 떠났고, 이에 무역이 활발해지자 서유럽의 군주들은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교황과 카톨릭 교회의 힘을 약화시키려했다. 그 당시 중부 유럽은 프라하에 있는 신성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는 독일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였고, 북부 독일 국가들의 왕자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권력을 키웠다. 루터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협의회나 사제가 아니라 성경에 있다고 믿었다. 또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민족주의를 장려했다. 1540년 카톨릭 교회는 새로운 종교집단인 예수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고전들 대신에 새로운 관점의 지리학과 역사를 카톨릭의 종교적인 신념과 더불어 가르쳤다. 이 시대의 교육은 도시 지역에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 유렵의 교육과 민족주의는 기계식 인쇄덕분에 크게 발전 할 수 있었다. 1450년대부터 약 150여 년간 인쇄산업은 두 배 이상 성장했다. 인쇄소들은 곧 전통 문학 작품과 종교적 소책자들은 물론이고, 라틴어로 된 고전들까지 모두 책으로 만들어내며 당시의 사회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1500년 이전의 르네상스 작가들의 책도 인쇄술 덕분에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인쇄술의 발달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무대를 넓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좁히고 있었다. 갈릴레오의 일생동안 이탈리아 반도의 각 지역을 다스린 통치자들은 각양각색이었다. 당시 유럽 인구의 3/4은 농부였고 도시 인구가 10만 명을 넘어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유아 사망률은 20%나 되었고 인구의 약 5%정도만이 65세 이상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평범한 죽음 이외에도 흑사병이 발병하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앗아가기도 했다. 갈릴레오는 이런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었다.)갈릴레스의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왕자에게 헌정했다. 갈릴레오는 취직자리를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해 매년 여름마다 플로렌스에서 젊은 코시모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그 대가로 갈릴레오는 생활에 필요한 약간의 돈을 받았을 뿐이지만, 투스카니 궁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갈릴레오는 직접 망원경을 개량해서 달을 관찰하고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목성의 둘레를 도는 네 개의 작은 달을 발견한 것이다. 갈릴레오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달이 지구 둘레를 돌듯이, 그리고 금성과 수성이 해의 둘레를 돌듯이, 이것들은 목성의 둘레를 돌았다. 그는 곧 자신의 발견을 보고하기 위해 『별들의 소식』)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 책을 플로렌스 대공 코시모 2세이게 헌정하고 목성의 달들에게 메디치가문의 별들 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통해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면서 점차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발견에 반대하근 사람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천문학자와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늘의 물체인 달은 완벽하게 매끄러워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달의 표면이 울퉁불퉁하다는 주장에 격렬하게 반대했다.갈릴레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원하던 메디치가의 사람들도 코페르니쿠스의 문제에 있어서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특히 코시모 2세의 어머니 크리스티나 부인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것을 성경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았다. 갈릴레이는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과 과학은 별개임을 설명했다. 갈릴레이 자신도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하나님을 믿었지만 성경에 끼워 맞춘 과학적 해석에 동조할 수 없었다. 갈릴레오의 적들은 그가 죄를 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쟁에서 이길 유일한 희망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의 증거를 제시하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1615년 갈릴레오는 하늘이 아닌 지구를 관찰해 얻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에 대한 새로운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다. 갈릴레오는석 수학자이자 궁정 철학자도 함께 물려받은 셈이 되었다. 그러나 페르디난도는 성년이 될 때까지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어머니 막달레나 대공비와 할머니인 크리스티나 부인에게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1621년의 사망자 명부에는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교황 바오로 5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 그레고리 15세가 선출되었으나 교황직을 채 2년도 수행하지 못했다. 1623년 추기경들은 하루 두 차례 투표를 했다. 검표 결과가 필요한 2/3 과반수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검표를 맡은 추기경은 투표 용지를 젖은 짚이 들어있는 난로에서 태워 미결임을 알리는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결국 55명의 투표자 중 50명이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로 바르베리니에게 표를 던졌다. 그는 곧 우르바누스8세가 되었다. 이번에는 투표 용지를 마른 짚에 태워 바티칸 주변 사람에게 흰 연기 신호를 보냈다. 바르베리니 추기경과 갈릴레오의 관계는 1611년부터 지속되고 있었다. 추기경은 갈릴레오는 장수하여 남들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할 위대한 능력을 지닌 고귀하고도 독실한 인물로 묘사했고, 갈릴레오를 ‘당신의 형제’라고 칭찬함으로써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갈릴레오는 교황이 자신의 상당히 민감한 계획도 축복해 줄 것이라 믿었다. 우르바누스의 대관식 날 그는 엎드린 채로 자신이 교황의 직위를 교회의 선을 위해 쓰지 않는 그 순간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했다. 연로했던 바오로와 병약했던 그레고리의 이전 대관식과 비교해서 우르바누스는 활기차고 군인 같은 위상을 풍겼다. 그는 이후 20년간 이탈리아 반도와 교황령을 수호하기 위해 벌어진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이러한 재능을 발휘해야 했다. 우르바누스는 나름의 방식대로 가톨릭교회의 개혁에 박차를 가함으로서, 끊임없이 로마 교회의 권력을 잠식해 들어오는 종교 개혁과도 맞서 싸워야 했다. 그는 성직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로마를 근거지로 뻗어나가는 외국 선교 조직망이 있어야 한다고 내다보았다. 대담한 만큼이나 학문을 사랑했던 우르바누스해를 반 이상 넘긴 우르바누스는 자신은 그 교령을 지지한 일이 없으며 당시에 자신이 교황이었더라면 그 교령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교령이 발령되고 8년이 지났지만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대한 우르바누스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천문학적인 계산과 예측의 도구로 활용되는 데 아무런 해가 될 것이 없다고 믿었다. 태양 중심설은 입증되지 않은 단순한 견해로 남아있었고, 우르바누스는 차후에도 이것이 입증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갈릴레오가 자신의 학문과 논리를 펴나가는데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참작하고자 한다면, 이 학설이 가설이라고 전제하는 한 변함없이 교황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갈릴레오는 교황을 알현할 후 6년 동안 『대화』를 쓰는데 간헐적으로 매달렸다. 1625년 갈릴레오가 병석에 누움으로써 집필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 사이 갈릴레오는 다른 관심사에 몰두하거나 대공에게 고용된 철학자로서 공적인 의무를 다했다. 시간이 남을 때면 정원을 돌보았고, 그곳에서 가장 탐스러운 시트론을 꼬박꼬박 마리아 첼레스터에게 보내면 그녀는 씨를 빼고 즙을 짜낸 뒤 말려서 며칠간 설탕에 절여 그가 좋아하는 당과로 만들었다. 그의 아들 빈첸초는 피사대학에서 법학부의 박사학위를 얻고, 토스카나 궁의 고위직을 점령하고 있는 유력한 딸의 가문의 딸인 세스틸리아 보키네리와 결혼으로 갈릴레이를 기쁘게 해 주었다. 신부는 결혼 지참금으로 7백 스쿠도를 가져왔으며, 이 돈은 그녀가 16세 생일 전날 약혼하지 않았다면 수녀원에서 평생 보낼 수 있을 만한 금액이었다. 결혼식을 치른 후 갈릴레오는 다시 『대화』의 집필에 매달렸다.1629년 집필을 마친 갈릴레오는 최종적인 원고를 검열관에게 제출했다. 우주의 구조와 같은 민감한 문제를 다루기도 했지만, 어떤 주제를 다루든 모든 책은 1515년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공포한 교서에 따라 유럽 카톨릭교회의 철저한 검열을 받아야 했다. 이 교령에는 출판을 원하는 작가는 총애를 받고 있음에도, 그는 더 이상 지난번의 특권과 같은 개인적인 접촉을 기대할 수 없었다.6월 16일 리카르디 신부는 몇 가지 사항을 수정하는 조건으로 책을 펴내도 좋다는 조건부 허가문에 서명했다. 만족한 갈릴레오는 여름의 무더위와 함께 페스트와 말라리아가 로마를 휩쓸기 전인 6월 말 서둘러 로마를 떠났다. 체시공은 마흔 다섯의 나이로 그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린체이 아카데미는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갈릴레오는 대신 토스카나에서 출판 허가를 얻기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지난 몇 년간 밀라노와 토리노를 휩쓸었던 페스트가 피렌체까지 퍼지기에 이르렀다.마리아 첼레스터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기도와 참회가 페스트에 맞서는 수단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민간의 지혜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페스트가 유행하는 동안 고해와 참회의 가치는 전례 없이 높아졌는데 그것은 일단 이 질병에 걸리면 참회를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 페스트에 걸렸다 낫는 사람을 극소수였으므로 페스트의 발병은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한 환자에게서 다른 모든 이들에게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는데, 병자의 옷이나 소지품을 통해서도 전염되었고, 가족 중 한 명이 아프면 나머지 가족은 자연히 그 뒤를 따랐다. 이탈리아인들은 페스트를 주기적으로 추방해 냈지만, 끝내 패배시킬 수 없는 오랜 적으로 여겼다. 당시에는 이 페스트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검은 쥐에 기생하는 병원균 때문에 발병함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두 행성의 합, 기근, 거지, 매춘부, 유대인의 탓으로 돌렸다. 살아있는 쥐들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네 발로 또는 배에 탑승해 사방 팔방으로 페스트를 퍼트리는 동안,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자신들의 집과 도시에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데 그쳤다.1630년의 페스트는 토스카나의 대공인 페르디난도 2세에게 새로운 지도력을 펼 최초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성인이 된 후에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섭정기구로 통치권을 되찾았다. 그는 당면한 위기에 열다.
위대한 로렌조 (Lorenzo the Magnificent)피에로 일 고토소의 장남 로렌조는 아버지를 여의고 가문의 수장이 되어 피렌체의 통치권을 승계할 때가 불과 스무 살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매우 영특한 수장이었다. 가운데 가르마를 타 넘긴 굵고 짙은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납작한 큰 코는 코뼈가 부러진 것처럼 보였다. 또 주걱턱 때문에 아랫입술이 거의 윗입술을 덮는 것처럼 보였다. 남을 꿰뚫어 보는 듯 한 검고 큰 눈 위의 눈썹은 선이 불규칙하고 울퉁불퉁했다. 그럼에도 한껏 생기를 띠고 아주 매력적인 태도로 가늘고 긴 손가락을 사용해 가며 말을 잘해서 그런지 결점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일상사에도 굉장히 열정적이어서 주위사람들까지 전염될 정도였다. 로렌조가 열아홉이 되자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 부모가 클라리체 오르시니를 신붓감으로 택했다. 그녀는 몬테로톤도의 자코포 오르시니의 열여섯 날 딸로 로마출신의 상속녀였다.로렌조에 이르러 이 가문의 역량은 최고조에 달했다. 정치가로서의 식견과 판단, 정치적 혜안과 기민한 결정,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 고전 저자들에 대한 깊은 지식, 이탈리아어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시인 겸 저자로서의 역량, 예술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예술적 취향과 비평 지식, 농업과 사람들의 생활과 필요, 농촌생활에 대한 지식, 이런 다양한 분야에서 로렌조는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위대한 자(the Magnificent) 라는 칭호는 대중의 일치된 의견에 따라 그에게 부여된 것이었다.로렌조는 독재 형태의 정부가 당시 시대 상황이 허락하던 유일한 발생이라고 확인했으나, 그러면서도 무력과 범죄와 권모술수를 써서 권력을 키워가던 주위의 다른 군주들의 예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독재정과 민주정이라는 두 가지 전혀 상반된 정체를 하나로 결합시킨다.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던 문제를 해결했고, 동족들에게 사랑을 받는 정치 형태를 보존하려고 힘쓰면서도 인격의 힘으로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군대의 힘에 뒷받침을 받지 않으면서도 절대 권력을 휘둘렀고, 그 비용을 대느라 민중이 무거운 세금에 짓눌렸을 것이라는 추정을 일으킨다. 그러나 실은 정반대였다. 세금은 시뇨리아가 받았고, 그것을 다른 방면에 지출했으며, 메디치가가 공중의 유익이나 민중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렬과 축제에 지불한 비용은 대규모 은행 사업으로 벌어들인 그들의 사금고에서 나왔다.로렌조의 경우 까다로운 국정 수행과 그의 생애에서 특히 통치 초반에 가장 활발하게 펼친 대외 활동 간의 대조가 매우 두드러진다. 그때는 르네상스의 활기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그의 통치 첫 9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스무 살에서 스물아홉 살까지, 동생 줄리아노의 나이 열여섯에서 스물다섯 살까지는 피렌체에 온갖 축제, 음악, 예술, 시, 기쁨과 웃음, 삶의 모든 밝은 면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로렌조는 국정과 관련된 모든 의무들과 자신의 도서관사업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 증진을 위한 기관들 설립에 쏟은 온갖 노력 외에도 동생과 함께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대단히 호화로운 행렬들과 그 밖의 행사들을 기획하는 등 이런 축제들을 주관했다.이 영특한 두 메디치가 젊은이들이 기획한 유흥을 때로는 성대한 행렬과 마상대회의 형식을 취했으나, 좀 더 흔했던 것은 대단히 우의적인 가면극이었다. 로렌조와 줄리아노는 직접 다양한 활인화를 구상하고 거기에 온갖 고전적 암시를 엮어 넣었지만 연출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맡겼고 고대 그리스 시대를 될 수 있는 대로 완벽하고 드라마틱하게 피렌체인들의 눈앞에 재현시키는 이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 일에 어떤 수고와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복장과 마차는 매우 유명한 화가들이 디자인했고, 등장 인물들의 분장은 저명한 조각가들이 맡았,고 대사는 마르시로 피치노, 루이지풀치, 폴리치아노 같은 탁월한 고전 학자들이 준비했다.그러나 로렌조는 언제나 축제와 행렬을 계획만 하거나, 국사에 전념하지만은 않았다. 다른 많은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피에솔레에 있는 자신의 저택 주변에 작은 집들을 짓고 거기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불러와 살게 했으며, 그로와 그림 양면으로 살아남았다. 시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마상대회 라는 제목이 붙은 풀리치아노의 유명한 시로써 불멸화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널리 알려진 것은 회화 작품들이 이 마상대회를 기념하면서 남긴 기록이다. 보티첼리의 주요 작품들 중 세 점 씩이나 이 유명한 마상대회를 주제로 삼았는데 그것은 폴리치아노가 시로써 말한 것과 동일한 내용을 그림으로 기록한 그의 방식이었다. 그 그림들은 비너스의 탄생, 군신과 비너스, 봄의 귀한으로서 세 점 다 위대한 로렌조를 위해 그린 것들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마상대회 뿐 아니라 그것에 부수되어 벌여졌던 모든 유흥과 그것이 모두 로렌조의 주도와 후원 하에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로렌조가 시인으로서 재능이 있었고 이미 그 분야에서 큰 명성을 얻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점도 있었다.그러나 지평선 위로 검은 구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구름은 벌써 오래 전부터 이 밝고 유쾌한 정경들을 천천히 뒤덮으면서 로렌조의 젊음과 그가 줄리아노와 함께 누렸던 모든 행복에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1476년 4월 폴리치아노가 자기 시를 완성하기 전, 혹은 보티첼리가 세 점의 그림을 시작하기도 전에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사랑스런 얼굴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우리를 쳐다보는 마상대회의 가련한 미의 여왕 시모네타 데 베스푸치가 급성 폐결핵에 걸려 죽었다.그 뒤 1476년 12월에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잇따랐는데, 그 사건은 이탈리아의 세력 균형을 뒤흔들어 놓았고, 로렌조가 맺어온 모든 정치 관계들을 심각한 불안 가운데로 빠뜨렸다. 그리고는 곧 무서운 파치가 음모가 발생하여 해맑고 준수한 줄리아노, 일과 놀이에서 로렌조의 변함없는 친구였던 그가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로렌조 자신은 심각한 전쟁과 많은 고통 속에 던져졌다.이런 결과를 가져온 그 유명한 음모는 교황 시스투스4세와 그의 조카들인 리아리오가 사람들의 공모로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당시 피렌체에서 유력한 귀족 가문인 파치가를 음 내다보고서 야코포데 파치의 이 조카들 중 하나에게 손녀이자 로렌조의 누이 비앙카를 시집보냈었다. 그러나 때가 왔을 때 이런 조치는 로렌조를 파치가의 손에서 보호하지 못했다. 음모에 의해 모든 각본이 다 준비되자 대주교 살비아티가 몬테세코를 데리고 피렌체에 왔다. 몬테세코는 교황에게 고용된 용병으로 살해와 그밖의 공모에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 동시에 젊은 추기경 라파엘로 리아리오도 마치 야코포 데 파치를 방문하는 척하고 피렌체에 왔다.공모자들이 꾸민 첫 계획은 4월 25일 토요일에 메디치 궁전에서 거행하는 연회에서 두 형제를 독살하려는 것이었다. 연회가 시작되었으나 줄리아노는 몸이 불편하여 참석할 수 없었고 따라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위 파치가는 로렌조에게 젊은 추기경 리아리오가 메디치 궁전의 보물들을 무척 보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보냈다. 전갈을 받은 로렌조는 그와 그이 수행원들을 초대하여 일요일에 그곳에서 자기와 함께 머물도록 했다. 그날 추기경이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자 음모자들은 미사가 끝나고 저녁 식가를 위해 메디치 궁전으로 돌아갈 때 두 젊은 주인들이 추기경을 맞이하기 우해 일어나는 순간 그들을 살해하기로 계획했다. 초대를 받은 일행은 메디치 궁전으로 갔으나, 일요일 아침이 되자 줄리아노가 미사에는 참석하되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또 다른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대성당에서 미사 때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몬테세코는 살인에 신성모독을 더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계획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그의 자리는 공모자 무리에 끼어 있던 두 사제 안토니오 마페이와 스테파노 다 바뇨네로 대체되었다. 일요일 (4월 26일) 아침이 되자 로렌조는 메디치 궁전을 나서서 손님인 젊은 추기경 라파엘로 리아리오와 함께 걸어서 대성당으로 갔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서 줄리아노가 프란체스코 데 파치와 베르나르도 반디니와 함께 뒤따라갔다. 걸어가는 동안 프란체스코 데 파치는 마치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가문 성당인 산 로렌조 성당에서 엄수되었다.이 유명한 음모 사건은 실패로 끝이 났고 메디치가는 전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는 가운데 가문을 도말하려던 시도를 잘 견뎌냈다. 로렌조의 젊음은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의 죽음과 더불어 끝났다. 행렬과 축제는 더 이상 벌이지 않았고, 전쟁과 정치와 학문적 노력에만 매진했으며, 유일한 기분 전환책은 사냥뿐이었다.식스투스 4세는 음모가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게다가 피렌체가 자기 심복 대주교 살비아티를 매달아 죽이고 자기가 고용한 몬테세코와 그의 일행을 처형했다는 소식은 그의 분노를 한층 더 달아오르게 했다. 그는 즉각 피렌체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나폴리 왕과 다른 나라들에 자기 진영에 합세하도록 설득했다. 로마의 메디치가 은행을 몰수했고, 피렌체 국에 사절을 보내 로렌초를 자기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교황은 선전포고로 그치지 않고, 토스카나 전체에 파문을 선포했다.피렌체는 전쟁에서 크게 수세에 몰렸다. 로마와 나폴리 뿐 아니라 해묵은 원수국들인 시에나와 루카, 그리고 우르비노와 그 밖의 소국들이 강력한 세력을 이루어 피렌체를 침공했는데, 교황이 모든 나라들을 자기편에 끄어들이기 위해 그만큼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마침내 전쟁이 시작된 지 2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전세가 극히 불리해지자 로렌조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국정을 곤팔로니에레 토마소 소데리니의 손에 맡긴 채 직접 나폴리로 향했다. 로렌조는 12월 18일 나폴리에 도착했다. 거기서 매력적인 매너로 그가 이탈리아의 정세에 대해 왕 앞에 제시한 탁월한 평론을 제시하면서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지위가 불확실하다는 점과, 교황이 달라질 때마다 교황청의 정책이 종잡을 수 없게 바뀐다는 점, 그리고 피렌체만큼 그에게 가치 있는 우방이 다시 없다는 점을 주지시키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어 왕 페란테의 적개심이 우정으로 돌변하였다. 그 방문으로 로렌조는 피렌체가 잃었던 영토들을 되찾게 해주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