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
검색어 입력폼
  • 최병헌 연구
    감리교회사 인물연구한국 최초의 신학자 최병헌(崔炳憲) 연구2006M2078 최기윤- 들어가는말이번 감리교회사 수업을 통해서 탁사 최병헌 목사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전덕기 목사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최병헌 목사에 대해서는 감리교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계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에 불과 했다. 이번 연구를 통하여서 탁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감리교 초기에 많은 선구자들이 있지만 탁사 최병헌 목사가 우리에게 주는 자긍심은 말할 수 없이 크다.1. 생애최병헌(崔炳憲)은 1858년 1월 16일에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아호는 탁사라 불렀다.그는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열심히 한학을 공부하여 20대에 벌써 한학에 능통한 선비가 되었다. 그 당시 보통사람들이 과거시험을 통하여 출세하는 과정을 밟는 것처럼 그도 1888년에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올라와 과거시험에 응하였다. 의외에도 거기에서 목격한 것은 부정부패로 가득찬 관청의 모습이었다. 권문대가라 하는 세도가들은 문벌계급만을 사람취급하고 하급계층의 사람들은 재능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알게 되었다. 최병헌 자신도 이러한 부패의 와중에서 희생된 피해자로서 과거에 낙방하게 되었다.그가 기독교를 처음 알게된 것은 1880년에 그의 친구가 중국 상해로 부터 가져온 [영환지략]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서양문명의 발달과 그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란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된 것이다. 그로부터 여러해 뒤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888년 어느날 서울 정동에 있는 서양사람들의 숙소로 아펜젤러(Henry G.Appenzeller)목사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여러가지를 환담하고 한문 성서 한권을 얻어가지고 돌아와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최병헌이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성서연구를 시작한지 5년 후인 1893년 그의 나이 35세때였다. 오랫동안 성서연구와 마음의 준비 끝에 세례를 받았기 때에 감리사로 임명되어 인천과 서울지방의 교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1922년에 은퇴하였다. 은퇴한 후에는 감리교 협성 신학교 교수로 추대되어 후진양성을 위하여 수고하다가 1927년 5월 13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목회하는 일 외에도 다양하게 활동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1889년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의 한문 교사로 취직하고 시간이 호락하는 대로 한문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반 서민들에게서도 성서를 읽게 하기 위한 뜻에서였다. 그의 독서에 대한 열정과 서민들을 계몽하기 위한 배려는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1894년에 서점 겸 사설 도서관격인 대동서시를 설립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배재학당 안에 독립협회의 전신이며 협성회,를 조직하는데 함께 참여하였고, 아펜젤러와 함께 주간지인 [죠션그리스도인회보]를 창간하였으며 또한 1897년에는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느껴 [제극신문]을 창간하고 주필로서 활약하였다. 1898년-1900년까지는 아펜젤러가 중심이 되어 활약하던 성서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이 되어 신약성서를 한글로 완역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2. 그의 신학그는 1900년부터 존스(George H.Jones)와 함께 한국 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를 창간하여 발행하였다. 그리고 1901년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신학 논문인 '죄도리'를 [신학월보]에 게재함으로서 신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그의 학문에 대한 관심은 두가지 주제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첫째는 기독교신학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다른 종교에대한 연구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그의 신학사상은 1901년에 발표한 '죄도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위의 논문에서 기독교의 근본문제인 죄의 원인과 결과와 그 해결책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앙과 결부시켜 논하였다. 먼저 인간의 운명으로서의 원죄와 개인의 책임으로서의 죄를 말한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거역한데 되었다.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의 도리라고 주장하였다.둘째로 그의 신학사상은 다른 종교에 대한 연구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연구한 것이었다. 그는 1907년에 "셩산유람긔"란 논문을 [신학월보]에 게재했는데,이것은 1912년에 [聖山明鏡]이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거기에서 그는 유교와 불교와 선교와 기독교를 논하였고, 1909년에는 "사교고략"이란 논문을 썼는데 거기에서는 공자교,회회교,인도교,불교 등을 논하였다. 또한 세계의 여러 종교들에 대한 논문은 "종교변증론"으로서 1916년-1920년에 걸쳐 [신학세계]에 연재했었는데 1922년에 [만종일련]이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신학자가 저술한 최초의 세계종교사이다. 여기에서 그는 동서고금의 여러 종교들을 총망라해서 다루었고 특히 우리나라의 고유한 종교들을 모두 취급한데 그 특징이 있다. 그가 종교를 논하는데는 일정한 형식이 있었다 첫째는 그 종교의 근본이 되는 교조의 사상과 세계관과 역사를 취급하였다. 둘째는 그 종교가 한국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가를 다루었다. 셋째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 종교들을 비판하는 것이 그의 논술하는 방법이었다.다른 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유,불,선의 종교들과 한국의 다른 여러 종교들은 물론, 기독교를 포함한 세계의 여러 종교들이 모두 자기의 종교가 최고의 진리를 지닌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나 기독교까지도 절대적인 종교가아님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교파의 분열과 교회 타락의 역사를 지적함으로써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그는 논하였다. 이러한 판단의 기준을 그는 성서라고 말하였다. 즉 성서에 말씀한 그리스도의 진리만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철저한 성서 절대주의를 주장하였다.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비판의 절대적 기준은 성서라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그는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종교가 도달던 시기였다.그러나 그런 민족의 비극 앞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더욱 굳건하게 설 수 있었으며 나라 잃은 설움에 희망 없이 살아가던 백성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욱 끌어안았다.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며 모교회인 정동교회를 이끌어가며 복음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복음을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최병헌 목사가 정동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것에는 또 다른 국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그는 1914년 5월 인천 지방 감리사로 전임되어 갈 때까지 정동교회를 담당하면서, 교계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사로서 당대의 지도적인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정동교회의 지도력을 선교사들로부터 한인 목회자로 완전히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최병헌 목사는 정동제일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쌓고 그 위에서 평생 목회를 했음을 알 수 있다.최병헌 목사는 목회하는 일 외에도 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 중 하나가 1889년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서 한문교사로 재직하면서 한문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일반 서민들도 성서를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 또한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글로서 서민들을 계몽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1894년에 서점 겸 사설도서관격인 대동서시(大東書市) 를 설립하게 된다.4. 탁사의 목회와 부흥운동‘우리의 한국인 목사 최병헌은 훌륭하게 사역하여 자기 백성의 신실한 목자로 증명받았다. 나는 그와 함께 각 가정을 심방했는데, 이런 종류의 일은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효과적이다.’ 1904년 샤프 목사의 말에 따르면 탁사의 가정 심방(尋訪)이 목회에 효과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탁사가 정동교회에 담임으로 있었던 1907년에는 부흥운동이 일어나 정동교회의 교인이 세배 가까이 증가하는 놀라운 역사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런 정동교회의 급성장 원인을 탁사의 효과적 목회에 두었다.‘이 교회는 역사상 올해가 최고의 해였다. 최병헌 목사의 효과적인 목회 하에, 정(遜位)를 받은 후조선(後朝鮮)의 태조문성왕(太祖文聖王)으로 서술한 점이다.이는 기자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보던 것에서 탈피해, 독립국이던 후조선의 ‘기자왕업(箕子王業)’이 다시 대한제국에서 중흥하기를 기대하는 의도였다.탁사는 가깝게 지내던 친구 정교가 깊이 관여한 이 책의 발문에서 과거 중국 사서에 의거한 한국 고대사 서술이 ‘독립지권(獨立之權)’을 잃어버리게 했다고 지적하고, 단군 기자 이래 4천 년의 사적을 확실한 근거 위에 올려놓고, 정통 계통을 밝혀 놓은 이 책에 대해서, 후대 역사가의 ‘준승(準繩)’이요 사서를 읽는 자의 '지남(指南)’이 되기에 족하며, '야속탄설(野俗誕說)'을 종식시키고 ‘독립국권(獨立國權)’을 진작시킬 책으로 극찬했다.자주 독립 상실의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한 지식인으로서 탁사의 역사관이 드러난 글이라고 볼 수 있겠다.탁사의 기독교를 통한 사회진보론은 1906년 9월 27일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강연한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탁사는 그 관계를 체용론(體用論), 본말론(本末論), 내지 표리론(表裏論)으로 풀이했다. 상제로부터 나온 불변하는 도인 종교가 본체·근본·근원이라면 정치는 응용·말단·결과로서, 뿌리인 종교가 쇠퇴하면 열매인 정치가 어지러워진다. 한국 정치가 쇠망한 원인은, 유학을 하는 지식인들이 언필칭 요순공맹하지만 공맹의 본의는 실천하지 않고 탐관오리로 타락하였기 때문이다.따라서 정치를 유신하여 문명 진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근본인 종교를 쇄신하여야 하는데, 국가의 혼란을 가져온 쇠퇴한 유교가 아닌, 당대 구미 열강의 문명화를 가져온 기독교를 수용해야 한다. 탁사는 이전의 ‘기서’에서처럼 동도서기론에 반대했다.본질인 서도를 무시하고 말단에 불과한 서기만으로는 근대문명화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결론적으로 한국 지식인들이 종교(기독교)로 수신의 본을 삼고 정체로 치국의 용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908년 6월 28일 탁사는 장학사(奬學社)에서 ‘시대’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여기서.
    인문/어학| 2007.06.19| 11페이지| 1,000원| 조회(521)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1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7:50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