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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 문학
    Ⅰ. 서론Ⅱ. 본론1. 시대적 상황2. 염군사3. 파스큘라(PASKYULA)4. 카프(KAPF)1) 제 1차 방향전환2) 제 2차 방향전환Ⅲ. 결론Ⅰ. 서론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9년 뒤,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우리 민족의 역량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 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문화정치로 우리 민족을 회유하는 식의 정책을 폈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식민 통치 방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생활고는 더욱 힘들어 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주의가 유입되었다. 사회주의는 민족해방운동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박영희는 초기 공산주의문학이 새로운 문학의 경향이라고 하여 신경향파라는 이름을 붙였다.염군사와 파스큘라는 당시 결성된 가장 대표적인 사회주의 문학단체이며, 이 두 단체는 후일 카프가 조직되는데 가장 큰 모태가 된다. 하지만 염군사와 파스큘라는 완전한 공산주의 문학이 아니었고, 공산주의 문학에 가까워지는 것은 카프에 이르러서이다. 그렇지만 염군사와 파스큘라는 카프의 모태가 되므로 함께 알아봐야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의 공산주의문학에 대한 문제는 이 세 단체를 연구함으로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Ⅱ. 본론1. 시대적 상황일제의 폭압에 대항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거족적 대사였던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은 결과의 성패를 떠나 민족의 역량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준 좋은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의 원인은 국내적으론 봉건제도의 몰락, 신문물의 이입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민족모순 심화, 민족해방운동의 역량 증가 등 많은 현대적 변화와 더불어 민족의 각성이 진행 중이었고, 국외에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러시아의 10월혁명, 식민지 해방운동의 전세계적인 확산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지금까지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의한 영향으로 3?1운동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면 대외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성격은 무엇이며, 국내 운동자들이 그 수습하고 제 1차 세계대전과 같은 파국적인 전쟁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한다. 윌슨은 이 원칙에 의거하여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해체하여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패전국에 대한 승선국의 과도한 식민지 분할 요구를 억제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 간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가운데 미국이 전후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우리의 민족자결주의가 바로 제국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거 우리도 독립할 수 있다는 환상하에 3?1운동이 준비되었다는 비판론으로 이어진다.3?1운동과 러시아의 10월혁명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냐에 대해 연구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바는 없다. 그러나 많은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3?1운동이 10월혁명에 의해 고무되고 영향 받은 대중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2?8독립선언서에 러시아 10월혁명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 있고, 1918년이나 이 전에 이미 러시아의 연해주나 만주 등지에서 한인들이 활발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실들이 보고되고 있다.직접적인 3?1운동의 기원은 일본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으로 까지 소급해서 생각할 수 있다. 2?8독립선언의 지도자들은 8인의 급진적인 학생들로 1919년 2월 8일 YMCA에 약 600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독립을 부르짖다 결국 3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된 사건이었다. 일본에서 일어난 2?8운동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지도자들이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 이전에 국내에 마르크스나 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급진적인 혁명이론을 내세운 조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3?1운동으로 인해 조선에 공산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공산주의 사상이 들어오는 길이 트였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의 대의명분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국내에서의 3?1운동과 국외에서의 공산주의자 곧 바로 조선내의 공산화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문학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조선의 국권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에 자나지 않았으며, 그것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이런 움직임의 시작은 염군사부터였다.대정 11년(1922) 10월경 ‘무산계급 해방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함’이라는 강령을 내걸고 강택진, 최창익, 김동환, 김두수, 정옥도, 윤문렬, 정순경, 지정신, 전종명, 전화수, 김인숙, 이호, 김홍파, 송영, 이적효, 박세영, 박대용 등이 참가한 염군사는 ‘문학잡지사 동인들이란 실에 있어서는 집필할 줄 모르는 동인이 더 많이 꺼어 있는 중간치기 단체’같은 집단이었다. 여기에는 소작운동자, 기자, 고학생갈돕회 회장, 여자고학생상근회의 부회장, 상조회장 등 문학과 관련이 없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염군사가 조직된 시기를 보면, 1922년은 바로 민족주의 계열과 시회주의 계열의 운동이 분리되는 시기였다. 즉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부르주아 계열이 이끄는 민족의 독립운동은 이제 한계점에 이르렀고, 진보적인 새로운 사상을 가진 운동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염군사는 이중 문학에 관심 있던 이들이 모여 결성한 하나의 써클모임에 불과했지만, 후에 북풍회파로 분류되어 국내의 사회주의 운동을 담당하는 주된 세력으로 성장한다.드러난 사실로 보아 결성 초기에 염군사는 순수 문학 단체로 보기 어려운 사회주의 단체의 색깔이 농후하다. 핵심 멤버인 이호는 토요회 발기인이었고, 홍파, 송영, 적효는 노동사 발기인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말 그대로 ‘집필할 줄 모르는 동인이 더 많은’ 사회주의 운동단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정도의 염군사는 《염군》1호의 발간을 꾀하나 허가 불가라는 판정을 받았다. 또한 《염군》2호를 발간하려 하나 역시 발금 당하고 만다. 2호까지 발금 당하자 염군사는 국제부인데이 기념호를 편집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성, 대구, 해주 등지에서 강연회를 주최하였는데 후원으로는 신흥청년동맹, 신사상연구회, 조선노동연맹 여의치 않았다.이렇게 본다면 염군사의 초창기 구성원은 사회운동을 문학으로 하려는 정치청년들이 많았던 반면, 후기 구성원들은 문학을 통해 사회운동을 하려는 문학청년들이 많아 예술 자체에 상당한 관십을 가졌던 이원화된 조직체였음을 알 수 있다.염군사의 문단적 위치나 단원들의 문학적 활동은 당시 문단상황에서 그리 비중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염군》을 편집하고 발행하려 할 때, 이들은 이제 치기에 찬 소년들일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의 노력이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간금지 발매금지 당하지만 조선에 존재했던 최초의 무산문학운동단체로 그 소임은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3. 파스큘라(PASKYULA)1923년 7월과 9월에 두 번의 공연을 끝으로 김복진, 연학년, 김기진은 토월회를 탈퇴한 뒤 박영희, 이상화, 안석주, 김형원, 이익상 등과 함께 1923년 12월에 문학동인 단체인 파스큘라를 만든다. 이들은 모두 동경 유학생이었다. 박에서 PA, 성해와 상화에서 S, 김에서 K, 연에서 YU, 이에서 L과 안에서 A자를 따가지고 만든 명칭이었다. 파스큘라가 경성된 후 염군사원인 최승일이 박영희와 함께 김기진을 찾아오고, 잇달아 윤기정, 송영 등 염군사 주요 멤버들이 찾아와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합동의 논의한다. 김기진은 여기에 대해 선뜻 합동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파스큘라의 결성 취지가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싸우는 의지의 예술’ 이어서 염군사의 강령과는 달랐기 때문이다.파스큘라는 문예지를 발간하거나 하는 등의 실제적인 문학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다만 문학 강연회를 1924년 천도교 기념관에서 한번 개최했다. 그러나 이 단체에 참가했던 참가자들은 후에 조선 문단을 이끌어 나가는 중추적인 인물들로 성장해 간다. 염군사에 소석했던 이들보다는 김기진과 박영희의 경우는 문학적 능력이나 문단적 지위가 훨씬 뛰어났다.염군사와 파스큘라측 회원들을 유파별로 구별할 때 서울청년회 쪽에는 파스큘라가 북풍회 쪽에는 염군사가 많은 관련이 있다. 즉, 파스큘라는 염군사보다 사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 운동 단체들이 모여 1925년 4월에 대통합을 이루어 을 결성하게 됨으로 인해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그래서 그 동안 자연 발생적인 형태로 출발했던 문예 조직들도 목적 의식적, 통일적 조직을 만들어 프로 문예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에 따라 1925년 8월 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구성원들과 흑풍회와 관계 맺고 있던 이기영, 조명희 등이 참가하명서, 전문단적인 차원에서 무산 계급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1) 제 1차 방향전환카프는 1926년 준기관지인 《문예운동》을 발간하지만, 아직은 일정한 방침에 따른 조직 운동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문예 운동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1926년 말부터 목적 의식적 방향 전환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1926년 12월 조직 개편을 통해 본격적인 문예 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카프의 제 1차 방향전환 논의와 조직 개편 움직임은 복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1926년 11월에 발표된 ‘정우회 선언’과 1927년 2월에 범민족적인 운동 단체로 결성된 신간회와 직 ?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그리고 문예 운동상에서 제 1차 방향전환론은 1926년 9월 청야계길의 이라는 글의 영향을 받아, 박영희에 의해 1927년 7월에 목적 의식적인 방향 전환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며, 카프의 두 이론가인 박영희와 김기진 사이에는 소위 ‘내용 ? 형식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박영희가 주도했던 방향전환은 일본에서 활약하던 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다. 특히 이북만, 홍효민, 조중곤, 한식 등이 중심이 되었던 제3전선파는 박영희의 관점이 전 운동에 대한 몰이해, 예술 전체가 아닌 문학 영역에만 한정시킨 절충주의적, 공식주의적, 예술지상주의적인 것으로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이런 논의를 통하여 카프는 대중들이 함께 하는 대중 조직이 되어야 하며, 금일의 예술동맹은 예술 영역 내의 대중의 정치적, 사회적 확대를 위해 .
    인문/어학| 2008.06.12| 6페이지| 2,000원| 조회(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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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대혁명
    Ⅰ. 들어가는 말Ⅱ. 본론1. 원인1) 혁명의 원인(1) 정치 ? 경제적 원인(2) 계몽주의2) 혁명의 폭발2. 진행과정1) 국민의회2) 입법의회3) 국민공회4) 공포정치5) 혁명의 종결3. 결과Ⅲ. 나가는 말Ⅰ. 들어가는 말혁명이란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국체 또는 정체를 변혁하는 일을 뜻한다. 또한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과 아래로 부터의 혁명이 있다. 여기에 미루어 보아 프랑스 혁명을 보았을 때, 그 혁명은 구체제의 모순으로 쌓여 있던 불만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에서부터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의 표어인 ‘자유?평등?우애’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역사에 길이 남을 사상이다.연구의 대상인 프랑스 혁명은 오늘날 정치적 감성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적인 면에 그것은 더 이상 정치적 투쟁이나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대상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가지는 기념제적 기능은 오늘날 점점 더 그의 인식론적 공헌과 구분될 수 있다. 이런 프랑스 혁명의 원인과 과정 결과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원인1) 혁명의 원인(1) 정치 ? 경제적 원인프랑스 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구제도의 모순 및 거기서 비롯된 문제점들을 들 수 있고,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재정적 위기를 제시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근본적 원인인 계층 간의 인구구성비율, 계몽사상의 확산, 그리고 인구의 급속한 증가 및 경제적 침체로 보다 세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계층 간의 인구구성비율을 살펴보자. 이 당시 제 1계층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0.5%에 불과했다. 이들은 고위성직자, 하위성직자, 조수사와 평수사, 그리고 수녀로 구성되었다. 제 2계층, 즉 귀족 계층은 궁정귀족과 지방귀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던 제 3계층은 시민계층과 농민계층으로 분리되었다.이 당시 제 1계층과 제 2계층은 많은 특권을 향유했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우선 제 1계층은 병역 및 조세의 의무가 없었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으로 조세부루이 14세 사후 약 3,000,000,000 리브르에 달하는 부채를 넘겨받았는데 그러한 금액은 당시 프랑스 1년 세입의 20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이어 등극한 루이 15세는 국가의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자신의 선결 과제임을 인식하고 그것에 따른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거기서 어느 정도의 가시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재정적 상황은 다시 어렵게 되었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아메리카 독립전쟁 참여 및 호화로운 왕실운영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2) 계몽주의계몽주의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나뉘어 있다. 또한 계몽주의는 13,14세기의 신학과 철학의 대립에 기원을 두고 있는 근대선의 과정과의 단절이라기보다 그러한 과저의 가속화와 굴절이라고 할 수 있다.프랑스 혁명 전에 영향을 미친 것은 극단적 합리주의의 모습으로 소개된 근대 자연법이 아니라 로크의 사상이었다. 로크는 제 2의 스콜라 철학, 나아가 초기의 근대 자연법주의자들에게 어느 정도 신세지고 있었다. 그의 사상의 중심적 개념은 ‘재산권’이다. 그에게 재산권이라는 단어는 자아에 대한 재산권, 즉 자유와 안전과 그것의 연장인 사물에 대한 재산권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로크는 대부분의 자연법주의자들이 인정한 것과 같은 지위를 이성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이성은 단지 감성적 경험으로부터 나온 하나의 ‘강한 추론 능력’에 지나기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본유관념’과 아우구스티누스적 영감의 모든 변이형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로크에게 자연권은 인간 본래의 권리이며, 인간 이성은 모든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평등한 ‘권리’를 존중하도록 요구한다. 만일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자연상태야말로 실로 조화롭고 행복한 상태인 것이다. 자연상태란 인간이 이성의 법칙인 자연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 상태로서 공동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자연상태에서 모든 인간에게는 어떤 권리가 주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생명 ? 자유 및 재산에 대한 권리들이 실정법으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은 ‘일반의지’라는 하나의 도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루소에게서 일반의지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자연법을 위반할 수 없는 의지를 의미한다. 즉 각자가 실정법의 창안자이자 수신자라며, 모든 사람은 서로 해치기를 원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루소의 사상은 또 다른 심오함을 내포하고 있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실제로 의지주의적이지도 않으며, 창안자와 수신자들 간의 준만장일지만으로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일반의지는 일반의지를 그렇게 만드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정치적 루소주의를 신비롭게 만든다. 한편으로 루소는 다수결의 의지가 시민을 구속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수결의 의지가 미래의 많은 헌법 제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소는 헌법 제정의 정당성을 보장했지만 반대로 공공정신의 성숙과 일치되는 헌법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수가 다수의 의지에 구속되는 것은 일련의 사회계약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계승된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공동의 교훈은 분명했다.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들도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실정법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것이라는 교훈에 동의했다.대혁명 전야의 프랑스 계몽주의에는 앞에서 언급한 사상들 외에 또 다른 다양한 사사의 흐름이 있었다. 메스머리즘은 많은 지식인계층을 매혹시켰고, 계몽주의에 의해 흡수된 대혁명 전의 반혁명은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후일의 일시적 재정복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전기 낭만주의의 움직임도 있었다. 영향력이 결코 소멸되지 않았던 장세니슴은 인권선언 작업의 몇몇 순간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계몽주의 지도자들은 군주제나 사회계층의 구조를 폐기하지 않고도 앙시앵 레짐을 합리적으로 개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 대부분은 대혁명의 민중적 폭발을 불쾌하지 않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계몽적인 엘리트주의의 형식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2) 혁명의 폭발프랑스 재정은 7년 전쟁과 미를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 사유 재산, 안전의 추구와 압제에 대한 저항을 비롯한 기본권을 모든 시민에게 똑같이 보장했다.점차적으로 국민의회는 정치적 관점에 따라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눠지게 되었는데 귀족의 특권적 지위를 강조하는 ‘귀족파’, 상원의 설치 및 국왕의 거부권행사를 지지하는 ‘왕당파’, 루소의 이념을 추종한 ‘민주주의파’, 그리고 몽테스키외의 이론을 실제정체에 활용하고자 했던 ‘입헌주의파’가 그것이다. 상황이 급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활동을 귀족계층의 지지로 와해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봉건제의 폐지선언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10월 5일 식량부족으로 파리에서는 폭동이 발생했다. 부녀자들이 베르사유로 행진했고 국민방위군과 수많은 민중들이 이들을 뒤따랐다. 다음날에도 부녀자들의 시위는 이어졌다. 이후 왕을 비롯한 그의 친인척들은 파리로 강제 이송되었고 그러한 조치는 귀족들의 대규모 해외망명을 가져 왔는데 이를 지칭하여 ‘제 2차 귀족 망명’이라 한다.이후 혁명 정부는 1789년 11월 2일 교회 재산을 국유화시켰다. 프랑스 국토의 약 1/10에 이르는 교회 소유지는 대부분 부유한 농민과 시민계급에게 팔렸고, 그 돈은 막대한 국채를 갚는 데 쓰였다. 이어서 국민의회는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를 개편해 주교와 사제를 유권자가 직접 선출하도록 요구했으며,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와 유대교도에게도 종교의 관용을 베풀었으며, 판사를 선거로 뽑게 해 사법제도를 개혁했다. 국민의회는 지방행정제도도 개혁했는데 낡은 지방행정구역을 정비하여 83개의 도로 다시 나눈 것이다. 이는 절대군주정에서 단원제의 입헌군주정으로 바꾸는 헌법을 기초한 것이다.1791년 9월 3일 ‘91년 헌법’이 제정되었다. ‘91년 헌법’은 선거인단의 구성 및 운영방법에 대해서 언급했다. 만 25세 이상의 성인남자로 구성된 선거인단회의는 격년제 3월 2번째 주 일요일에 개최한다는 것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91년 헌법’은 일부회의 소집이 요구되었고 일반 보통선거제의 도입이 거론되었다. 이제 부유한 시민 계층을 대신하여 소시민 계층, 즉 수공업자 및 소상점주 등이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전쟁의 상황이 극도로 불리하게 되자 파리의 혁명주의자들은 1792년 9월 1일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1,100명의 죄수를 임의적으로 처형했다. ‘9월 학살’이라고 하는 이 처형으로 프랑스와 유럽의 많은 사람이 혁명에 등을 돌렸다. 한편, 9월 20일에 프랑스 군대는 발미에서 외국군을 물리치고 승리해 위기를 모면했다.3) 국민공회국왕의 퇴위로 혁명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첫 번째 단계는 입헌군주제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시민계급의 개혁운동이었으며, 두 번째 단계는 민주주의 원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거의 모든 성인 남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해 구성된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1일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선언했다. 공화국의 공신 표어는 ‘자유?평등?우애’였다.루이 16세는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국민공회는 루이 16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사형 여부를 표결에 부쳤다. 근소한 차이로 사형에 찬성한 표가 과반수를 넘어 루이 16세는 1793년 1얼 21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혁명은 점점 과격해졌고 급진 지도자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국민공회에서 급진 지도자들은 ‘산악당’이라 하고, 지도자는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등이었으며, 자코뱅클럽을 이끌었다. 산악당의 반대 세력은 ‘지롱드파’이었다.혁명은 자코뱅파과 지롱드파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산악당이 주도권을 잡았다. 1793년 6월에 국민공회는 지롱드파 지도자들을 제명하고 체포했다. 그러자 지롱드파 지지자들은 국민공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1793년 7월에 지롱드파 동조자 코르데가 마라를 암살했다. 곧 이어 국민공회 군대가 지롱드파 지지자들은 무찔렀다. 자코뱅파 지도자들은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른 유럽 국가들과 싸우기 위해 새로운 국민군을 창설했다. 병역을 의무화해 병사를 늘리고했다.
    인문/어학| 2008.06.12| 9페이지| 2,000원| 조회(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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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신라의 정치제도 평가B괜찮아요
    Ⅰ. 서론Ⅱ. 본론1. 신라의 삼국통일1) 역사적 배경2)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3)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4) 나당전쟁5) 역사적 의의2. 중앙통치조직의 정비1) 중앙통치조직의 정비과정2) 중앙통치조직3) 내정기관의 정비4) 재상제도의 운영3. 지방제도의 재편성1) 9주2) 5소경3) 주군현제의 구성과 운영4. 군사제도의 재편성1) 중앙2) 지방3) 진과 성곽시설Ⅲ. 나가는 말Ⅳ. 참고문헌Ⅰ. 서론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으로 우리 민족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통일 이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생활풍습이나 언어는 비슷했으나 동일한 민족이라는 의식은 없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고구려, 백제 유민과 신라인이 동일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관리였던 사람들을 신라의 관등체계로 편입했고, 왕실 근위부대인 9서당도 고루 안배하는 등 융합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러나 신라가 이룩한 통일은 고구려 땅을 거의 잃어버린 한계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통일을 했다는 데서 큰 의의를 지닌다. 처음으로 통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통일신라는 기존의 신라의 정치제도를 당시의 상황에 맞게 재편하여 통일신라를 다스렸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Ⅱ. 본론1. 신라의 삼국통일1) 역사적 배경고구려, 백제, 신라는 국가의 틀이 잡힌 시기와 발전 과정이 서로 달랐다. 고구려와 백제는 4~5세기 무렵에 사회 발전을 이루었으나, 신라는 그보다 늦은 6세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 삼국간의 힘겨루기는 각국의 성장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은 삼국시대 ? 5호16국시대 ? 남북국시대로 이어지는 분열기를 거쳐 수와 당이 통일제국을 형성하던 때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이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을 때 성장, 발전할 수 있었고, 이후 자국의 이익을 이들 나라들과 복잡하게 교류했다.더구나 신라의 통치제도는 특정한 한 시대에 이룩된 것이 아니라, 법흥왕 이래 점진적으로 발달하여 진평왕 대 크게 정비되었으며, 통일 후 문무왕을 거쳐 신문왕 때까지 170여 년의 기간에 정비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법흥왕 3년에 최초의 관부인 병부가 설치된 이후 예작부가 성립된 신문왕 6년까지 170년간을 거치면서 신라의 중앙통치조직은 정비된 것이다. 그만큼 신라의 관직체제는 오랜 시기를 두고 점진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통일 수에 당의 6부체제를 일부 답습하였다고 해도 신라의 고유한 전통은 끝까지 고수한다. 이러한 바탕은 족적기반을 갖고 있는 골품제도를 관직체계에 적용하는 데 따른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골품제와 관료제가 갖는 모순은 관직제도의 성장에 장애가 되었으며, 관등제와 관직제를 조절하는 중간기능을 대신할 「제도적 장치」가 불충분하였음을 보게 된다.신라는 족적전통을 강하게 갖고 있었지만, 중고기의 왕권강화에 따라 제도의 정비를 통한 통치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법흥왕 대에 이르러 백제 ? 고구려와의 빈번한 충돌, 점령지의 확대, 그리고 군사제도의 획일적 지배를 위해서는 지역적 성격을 띤 군주로서는 어려움이 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율령반포 ? 공복제정 그리고 불교공인 등 고대국가의 정치적 정비를 꾀한 법흥왕으로서는 새로운 제도의 설치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기존의 대보가 갖고 있는 군사권을 전담한 병부가 설치되었으며, 전반적인 국사는 상대등이 맡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이어 강화되어 가는 왕권의 입장에서 귀족세력의 견제를 위한 사정부와 국가의 공적인 지출이나 수입을 관장하는 품주가 설치되었다. 신라의 중앙통치제도는 이러한 왕권강화과정에서 설치 ? 분화되어 진평왕 대에 큰 발전이 있었으며, 김춘추 ? 김유신의 신세력이 강화된 진덕여왕시대에 새로운 단계를 맞게 되었다. 진덕여왕 대의 제도적 정비는 품주의 폐지에 따른 집사부와 창부의 설치에서 그 절정을 맞게 되었으며, 재정권과 행정권의 분리에 따른 무열왕 왕권의 절대화 과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진덕왕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 타협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위직의 겸직은 직능의 전문성과 행정의 능률성을 고려한 조치로서 결과적으로 절대왕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부(部)와 부(府)의 관계에 대한 뚜렷한 근거는 없으나 양자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4개의 부 중에서 집사부와 창부는 품주에서 분리된 것이며, 병부는 최고의 관부였다. 그리고 예부는 국학 ? 음성서 ? 전사서 ? 사법서 등을 갖고 있어, 4부(部)는 10부(府 )보다 상위기관인 것이다. 특히 부(部)관서의 관리 숫자가 부(府)관서의 관리수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도 부(部)관서의 위상을 엿보게 한다. 결국 신라는 중고대의 부족적 전통을 지닌 부(部)가 행정적 의미를 지닌 부(府)를 통제했다고 생각된다. 결국 중앙행정관부는 14부와 7사성전과 6개의 수도행정관부를 포함한 19전의 균형적 구조로 유지되었으며, 진골위주의 고급관리와 6두품 이하 다수의 하급관리로 하나의 관직제도를 형성한 것이다.신문왕 6년에 정비가 일단락된 중앙통치조직은 기밀사무를 맡은 집사부, 군사를 맡는 병부, 교육 ? 의례를 맡는 예부, 그리고 재정을 맡은 창부 등 4부(部)를 비롯하여, 위화부 ? 사정부 등 10부(府)가 핵심기구가 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병부와 예부의 지위 격상, 그리고 위화부와 공장부의 지위 약화 등이다. 병부는 상대등 ? 집사부 ? 내성 등과 함께 재부로서 실질적인 수부이게 때문에 관원구성에 있어서 타기관의 기준이 된다. 예부는 영객부와 같은 외교기관을 분리시켰으나, 국학을 비롯한 4개의 속관부를 갖고 있는 대표적 기관이다. 위화부는 사록관과 상사서의 분치에 따라 기능이 약화되고 관원 축소되었으며, 공장부는 별칭이 전사서란 점과 장관이 차관급인 감인 점으로 보아 그 지위가 한단계 떨어진 관청이지만, 무열왕실이나 오묘의 관장기관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선부는 수군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볼 수 있으며, 병부와 함께 6단계 조직을 갖고 있다. 그러나 14관부의 소내학생은 국학, 율령전은 이방부를 감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들 관리가 관등이 낮았으므로, 직접 행정관부를 통제한 것이 아니었고, 내성의 사신이 재상을 겸직하기 때문에 그를 통해 행정적 감독이 가능했으리라 여긴다. 특히 율령 ? 천문 ? 의학 등의 전무가 양성을 관장하고 있어 내성이 갖는 정치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내성기능의 강화는 시위부 위상의 강화와 함께 전제왕권의 지주로 작용하는 데 손색이 없었으리라 여겨진다.국왕의 행행을 관장하는 어룡성은 내성 권한의 비대함에 따라 그 위치도 격상되었다. 여기에도 문학 ? 의약 ? 음악 ? 의례 ? 음식 등 전문기관을 두었으며, 원당전을 두어 시전과 함께 7사성전을 관장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태자궁인 동궁관에도 어룡성과 같이 세택이 있어 시종과 조고의 직을 함께 관장케 하여 태자의 위상을 높였다. 특히 율령정치의 발달에 따라 사정관부나 율령기관을 행정 ? 내정기관에 두었을 뿐 아니라, 외사정을 각 지방에도 파견하여 왕권집행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으며, 외교기관과 제사기관을 내성에도 둠으로써 행정기관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행정 ? 내정기관의 견제와 균형은 재상과 사신을 겸직케 한 데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끝으로 승직인 정관은 승려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대사 ? 사 등 하급실무직과 정치적 자문직이 있었다. 국통은 진흥왕 12년에 고구려 귀화승인 혜양이 처음으로 입명된 이후, 왕의 정치 자문직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진흥왕순수비에 등장된 사문도인은 상대등 ? 대등과 함께 왕의 수행원으로 정치에 관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승관제의 정비는 주통 ? 군통으로 이어져 불교와 정치의 관계로 확대되어 선정사원의 문제까지 연결되었을 것이다.황룡사가 백좌강회의 장소로서 승통의 거처로서 중고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은 이후 문무왕과 사천왕사, 신문왕과 감은사, 성덕왕과 봉덕사, 그리고 혜공왕과 봉은사로 이어져 왕실과 사찰과의 관계가 성립되어 갔다. 특히 무열계왕실은 이러한 성전사원을 통의 연원은 지증왕 13년에 설치된 아시촌소경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이후 진흥왕 18년에 국원소경을 선덕왕 8년에 북소경을 각각 설치한 바 있다. 그런데 통일기에 아시촌소경과 북소경은 폐지하고, 대신 문무왕 18년과 20년에 북원소경과 금관소경을 각각 설치하였다. 신문왕 5년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을 설치하고, 기왕의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으로 바꾸어, 중원소경 ? 북원소경 ? 금관소경 ? 서원소경 ? 남원소경으로 이울어지는 5소경제가 완비되었다.통일 이전의 소경제는 왕경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취약점을 보완하고 지방지배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통일기에 소경제도 그러한 기능을 유지하되,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 ? 백제 ? 가야 등의 신세력을 소경에 분산 배치하여 견제 ?회유한다는 새로운 기능과 목적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이후에 신라의 국가 체제가 안정되면서 새로 유입된 신세력을 견제 ? 회유한다는 소경의 시능은 불필요하게 되어갔으며, 순수한 지방 문화의 중심지, 곧 지방 도시로서의 의미만 갖게 되었다. 소경의 이러한 성격 변화는 경덕왕대 이후에 ‘소경’이라는 명칭 대신 ‘경’이라고만 칭하게 된 것에도 반영되었다.3) 주군현제의 구성과 운영신라 지방제의 골격은 주 ? 군 ? 현으로 이루어지며, 이런 면에서 신라 지방제를 주군현제라 부르기도 한다. 주군현제의 구성과 운영 방식을 살펴보자.주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광역 행정 단위’로서의 의미, 영현 몇 개를 포괄하는 ‘중간 영역’으로서의 의미, 영현을 제외한 순수한 주치에 한정되는 ‘소영역’으로서의 의미이다. 군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영현 몇 개를 포괄하는 ‘중간 영역’으로서의 의미, 영현을 제외한 순수한 군치에 한정되는 ‘소영역’으로서의 의미, 이중에서 두 번째 의미의 주와 첫 번째 의미의 군은 같은 ‘중간 영역’을 의미하는 단위이며, 세 번째 의미의 주와 두 번째 의미의 군은 현 단위와 같은 ‘소영역’을 의미한다.주의 장관은 도독인데, 도독은 주조와 장사 등의 보좌를 받아 주단위의 업무를 총괄하였다다.
    인문/어학| 2008.06.12| 18페이지| 3,000원| 조회(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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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딕양식 -고딕건축을 중심으로
    Ⅰ. 고딕의 정의Ⅱ.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고딕 건축까지1. 로마네스크 건축1) 특징2) 대표적인 건축물2. 고딕 건축1) 특징2) 대표적인 건축물3.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의 차이Ⅰ. 고딕의 정의‘고딕'이라는 이름은 처음에는 르네상스 비평가들이 이 시대의 건축이 고전적인 그리스와 로마의 표준과 일치하지 않음을 비웃기 위해 사용하였다. 즉 이 시대의 건축은 야만족인 고트족(Goths)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하는데, 즉 고딕이라는 용어는 15C르네상스 인문주의자(르네상스) 들이 고딕을 비하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말로 반 고전적인 또는 야만적인 이라는 부정적인 뜻을 내포한 용어이다.Ⅱ.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고딕 건축까지고딕 건축은 로마네스크 건축이 발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고딕 건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로마네스크 건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의 특징과 대표적인 건축물, 그리고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의 차이를 알아보고자 한다.1. 로마네스크 건축(Romanesque architecture)1) 특징9세기부터 12세기까지 서유럽을 지배했던 건축 양식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아키텐, 브르타뉴, 부르고뉴, 일 드 프랑스, 노르망디, 프로방스 등 서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퍼졌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다양한 특징이 나타났다.로마네스크 건축물은 당시의 몇 안 되는 큰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보안과 방어의 목적을 위해 크고 육중한 로마네스크 건축물의 특성이 형성되었다. 로마네스크양식은 특히 교회와 수도원 건물에서 발달했다. 로마네스크 교회는 대개 세로대가 더 길고 그 위에 짧은 가로대를 붙인 라틴십자가 모양이었다. 신랑(본당 집회장소) 위의 지붕은 아치 모양을 바탕으로 한 둥근 석조 궁륭으로 완성되었다. 신랑의 양 옆으로는 복도가 있으며 ‘각주’라고 부르는 커다란 기둥들이 활처럼 둥글고 흰 지붕을 떠받쳤다. 벽에 있는 통로와 각주 사이에는 성서에 나오는 장면과 인물들을 새겨놓은 석강과 조각으로 장식했다. 벽면의 프레스코에는 역시 종교와 관련된 주제의 그림들이 담겨 있다.12세기 중반에 이르러 로마네스크 건축은 고딕 건축으로 발전했다. 그 요인은 더 이상 방어의 목적으로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어졌고 대신에 교회 건물을 좀더 경쾌하고 높게 짓기를 바랬기 때문이다.2) 대표적인 건축물① 산조반니세례당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세례당으로 피렌체대성당 앞에 자리 잡고 있어 이에 부속된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피렌 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건축으로, 그 역사는 로마시대에 세워진 마르스신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의 건 물은 4세기경에 건조되었던 소성당이 1060∼1150년경에 재건된 것으로, 8각형 플랜의 바실리카 성당이다. 외면은 백색과 녹색의 대리석으로 단장되어 있고, 전형적인 토스 카나 지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다. 반원 아치창의 명층(높은 창)이 있는 2중구조의 내부도 역시 대리석으로 단장되어 있다. 큐폴러(천장) 전면은 심판자 그리스도의 상을 중심으로 천체도, 구·신약성서의 에피소드, 그리스도와 성모 의 생애도, 세례자 요한의 생애도 등이 계층적 배열로 표현된 13세기의 비잔틴풍 모자이크로 장식되어있다.② 피사대성당이탈리아 피사에 있는 토스카나풍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1063년 부스케투스의 설계로 착공하여, 1118 년에 헌당식을 올렸고, 1272년 이후에 라이날두스에 의 해 회당부가 서쪽으로 연장되었다. 전체는 어느 것이나 바실리카풍의 단면을 가진 5회랑식 회당부와, 좌우의 익 랑으로 된 라틴십자 플랜을 나타내며, 교차부에는 드물게 보이는 타원형의 원개를 올려놓았다.대리석의 가로무늬 모양의 석조물 배합이 선명한 외부 는 전면에 장식적인 둥근 지붕이 있는 복도와 측주를 둘러쳤으며, 서쪽 정면의 상부 4층은 개방된 열주로 장식되었다. 대성당의 앞에 독립해서 세워진 세례당은 디오티살비의 설계에 의해 1153년에 착공되었으며, 2층의 회랑을 가진 내부는 원추상의 궁륭의 천장으로 덮이고, 이것을 외부의 원개가 싸안은 특수한 이중구조로 되었다. 고딕풍의 외관은 N.피사노도 협력했다고 전하는 13세기의 개장에 의한 것이다. 대성당의 배후에는 ‘피사의 사탑’으로서 이름 높은 종탑(캄파닐레)이 있다.2. 고딕 건축1) 특징고딕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첨두아치’, ‘플라잉버트레스(보조적으로 건물을 지지하거나 볼트나 아치의 추력을 받기 위해 벽에 덧붙여지어진 조적조)’, ‘리브(원형 천장의 갈빗대 모양의 뼈대) 볼트(원형 천장)’로 요약 될 수 있으나 이것들 중 어느 한 가지도 고딕 건축의 고유한 창조물은 아니다. 첨두아치는 오랫동안 아라비아 대륙에서 사용되어 왔으며, 에스파냐, 시칠리아, 프로방스 같은 지역에 일찍부터 소개되었고 플라잉 버트레스나 리브 볼트도 로마네스크 시대에 부분적으로 사용되던 요소다. 그러나 고딕 양식은 이들 요소를 하나로 결합하여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건물들을 만들어 냈다.또한, 로마네스크 교회의 크고 무거운 벽은 지지용의 가는 피어(기둥과 구분되는 견고한 석조 지주)로 대체하였다. 가늘고 긴 구조 때문에 큰 창문의 설치가 가능해졌고, 이것들은 빛을 내부로 비치게 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졌는데 이 빛은 신, 아름다움 그리고 광명이 하느님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딕 시대의 교회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욕망에 부응하여 첨탑의 높이가 점점 더 높아졌다. 프라이 부르크 성당은 115m, 쾰른 성당은 156m, 울름 성당은 158m로 첨탑이 계속해서 높아진다. 성당 내부에서도 수평선보다는 수직선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는 신이 인간이나 자연데 대한 계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횡추력이 감소된 첨두아치, 보다 경량화 된 리브 볼트, 그리고 구조체 외부의 플라잉 버트레스 등이 이러한 높이의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성당 전체는 지상에 천국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내부와 외부에서 암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성스러운 도시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하나의 지침인 동시에 선전 도구의 역할 수행한 것이다.2) 대표적인 건축물① 노트르담대성당노트르담 성당은 프랑스 초기 고딕성당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센강 시테섬에 있는 성당이다. 공사는 1163 년 주교 M.쉴리의 지휘 아래 내진 건축이 시작되었고, 성왕 루이 치하인 13세기 중엽에 일단 완성되었으나, 그 후에도 부대공사는 계속되어 18세기 초엽 측면 제실의 증설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어 19세기에 대대적 인 보수공사를 하였다.늑골교차궁륭으로 덮인 길이 약 130m의 장대한 신랑 을 중심으로 하는 오낭식의 웅대한 건축으로, 신랑 양측의 열주·트리포리움(명층 아래 연이은 층)·명층으로 된 명쾌한 3층 구성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단정한 서쪽 정면에는 최하층에 《최후의 심판》의 부조로 유명한 중앙 출입문 등 3개의 출입구가 있으며 여기에서 《제왕의 상》이 늘어선 가로가 긴 중간대를 거쳐 스테인드글라스를 본뜬 지름 9.6m 장미의 창을 중심으로 하는 층, 열주로 구성된 그랜드 갤러리가 잇달리고, 그 위에 지상 6.9m 높이의 직사각형 쌍탑이 얹혀 있다. 힘차게 활 모양을 그린 다수의 비량으로 지탱된 남북의 측면에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명층이 줄을 잇고, 중앙 부근에 돌출한 익랑 끝 부분에는 지름이 13m나 되는 유명한 장미의 창과 아름다운 조각을 볼 수 있다. 익랑과 신랑의 교차부에 치솟은 첨탑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예체능| 2007.11.27| 5페이지| 2,000원| 조회(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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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고려의 경제
    1. 들어가는 말2. 고려 전기의 경제1)시대적 특징2)권농적책3)전시과 제도 제정3. 고려 중기의 경제1)시대적 특징2)지주전호제의 발달3)전시과체제의 붕괴4)농민 경제 몰락과 농민 항쟁4. 고려 말기의 경제1)시대적 특징2)녹과전, 사패전과 농장3)성리학 도입4)과전법 제정과 조선의 건국5. 나가는 말6. 참고문헌1. 들어가는 말경제는 우리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바로 우리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경제가 바로 잡혀 있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다.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데 체계와 질서가 필요하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그것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사회에서의 생존 조건이 달리진다.우리는 지금 자유경제가 허락되어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도 예외는 아니다. 고려는 귀족사회이고 신분제 사회였다. 그래서 농민들은 귀족들과는 다르게 차별을 받으면서 살았다. 그리고 귀족들이 정하는 체계와 질서에 따라 그 들의 삶도 상당히 달라졌다. 고려의 경제제도라 하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전시과를 떠올린다. 고려의 전시과는 처음에는 아주 이로운 방향으로 잘 전개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이 욕심이 생겨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제도로 바뀌어갔다. 이 글에서는 고려의 경제제도인 전시과뿐만 아니라 다른 경제제도들도 시대에 어떤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2. 고려 전기의 경제1)시대적 특징신라의 붕괴로부터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의 통일에 이르는 장기간의 격동기에 사회와 문화는 크게 변동하였다. 중앙의 신라 지배층이 쇠락해가는 동안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도 한반도 중서부의 예성강 유역에 위치한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고, 고려의 지배층으로 참여한 세력들의 대부분도 각 지역의 호족 출신이었다.왕건은 유교적 통치이념을 도입하였다. 즉, 민심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잡는 방법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유교정치사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으로는 자방관 파견과 권농행정, 답험손실체계를 확립해 소농민에 대한 수탈 방지, 불칠요한 요역을 금지하였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위해서는 종자를 지급하고, 농기구를 대여해 주는 한편, 관에서 기르는 소를 대여해주고 촌락 내부의 린보조직 등을 통한 농업의 공동부조가 있다. 그리고 다른 권농정책으로는 부세를 공평히 해 주었는데 부세라는 것은 적을 수록 좋은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가벼운 것은 좋지 않고 국가 운영이 가능한 만큼의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만큼만 거뒀다. 또한 국가가 나서서 수리시설을 지어 주었다.3)전시과 제도 제정고려 초기에 호족들이 지방에서 할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각기 독자적인 군사력과 함께 경제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조와 역대 왕은 중아집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정치제도의 정비와 함께 당시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던 기본적 생산형태인 토지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즉 고려왕조는 호족의 사병을 해체하고 전시과체제의 토지제도를 도입하여 호족의 경제적 기반을 제거함으로써, 명실 공히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던 것이다.전시과 제도는 곡식이 나는 토지인 전지와 뗄감이 나는 시지를 관품의 고하여 따라 지급, 1대에 한하여 전시과를 부여하였다. 정치?사회?경제와 밀접히 연관되면서 태조부터 문종 대에 확립되었다. 일찍이 태조 때에 역분전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준 토지였다. 경종 때에 시정전시과를 시행하였다. 이는 공복 제도와 역분전을 토대로 전시과 제도를 만들었다. 이때는 관직의 높고 낮음과 함께 인품을 반영하여 토지를 지급하였기 때문에 운영에 문제가 있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목종 대에 전시과를 개정하여 관직만을 고려하여 지급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지급량도 재조정하였다. 이것이 개정 전시과이다. 이는 성종 대의 지배질서 성장과 관인체제의 정비를 토대로 이루어 졌다. 또한 전?현직의 문반?무반?군인을 관품에 따라 18과로 구분해 지급하였다. 그러나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회?문화 등 전반에 걸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무신난의 원인은 먼저 고려 전기 문벌귀족사회 자체의 내부모순에 있었다. 고려 초에 형성된 귀족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특권지배층으로 그 세력을 강화하면서 문벌을 형성하였고 유력한 문벌귀족이 대두하면서 왕권을 위협하며 문벌 간의 투쟁을 통해 내부갈등을 심화시켜 드디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북벌추진 등을 유발하면서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무반에 대한 차별대우도 무신난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문벌귀족 지배 하에서 무반은 형식적인 양반의 일부일 뿐 실질적으로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즉 무반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은 정3품의 상장군까지였고 6부의 하나인 병부의 관직도 모두 문반 차지였으며 심지어 군 지휘통수권까지 문반이 장악하여 무반은 단지 전투기술자로서 문벌귀족정권을 지켜주는 호위병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무반에게 지급되는 토지도 문벌귀족 출신의 문반에게 빼앗기기 일쑤였고 혼인도 가문의 제한을 받아 신분상승의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무반의 차별과 함께 군인의 불만도 점차 높아져갔다. 당시 군인은 전쟁뿐 아니라 이자겸의 난, 묘청의 북벌추진 등의 권력투쟁에 동원됨은 물론 토목공사 등 여러 잡역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반면에 토지전시과에 의하여 고려의 중간신분계층인 이들에게 지급된 군인전은 그 역이 무거웠고, 이것마저 문벌귀족들에게 빼앗기기도 하여 군인의 사기와 지위는 땅에 떨어지고 불만만 커졌다.무신난의 폭발 기운은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의종 24년 왕의 보현원 행차를 기회로 장군과 무신들이 군인들에게 문신들을 죽이라고 선동하며 난을 일으켰다. 많은 문신들을 죽이고, 잉 의종을 폐하고 그 아우 명종을 옹립하였다. 난을 성공시키고 정권을 잡은 정중부 등의 무신들은 의종과 문신 그리고 승려들의 재산과 토지를 나눠 가졌으며, 고관현직에서 미관말직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직을 독차지하였다. 그들은 관직을 이용하여 자산을 확대하는 등 부를 축적하였고, 정. 이로 지주 전호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3)전시과 체제의 붕괴전시과는 호족들의 출생지에 토지를 주었다. 그래서 거기의 영향력 있는 집안은 호족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향리가 내려와 관직에서 물러난 호족들의 토지를 완벽하게 반납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권력을 가지려면 관직을 해야 하는데 관직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배층의 인구증가가 피지배층의 인구증가보다 컸다. 그렇다고 관직을 하지 않는 지배층이 농사를 지으며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면서 정치자금이 늘어나게 되었다.전시과로는 재산이 늘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전시과를 은닉하게 되었다. 공전을 사전화하고 전란 등을 통한 토지의 황폐와 농민 자경지의 점탈?겸병?매득을 하였다.4)농민 경제 몰락과 농민항쟁농민은 조상이 물려준 토지인 민전을 경작하거나 국?공유지나 다른 사람의 소유지를 경작하였다. 또 품팔이를 하건 부녀자들이 삼베, 모시, 비단 등을 짜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대개 농민은 소득을 늘리려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배웠다. 농민이 진전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면 국가에서 일정 기간 동안 소작료나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경작하던 주인이 방치해서 황폐해진 토지인 진전을 개간할 때 주인이 있으면 소작료를 감면해 주고, 주인이 없으면 개간할 사람의 토지로 인정해 주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연해안의 저습지와 간척지도 개간되어 경작지가 확대되어 갔다.농업 기술의 방달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수리 시설의 발달 외에도 호미와 보습 등의 농기구와 종자도 개량되었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고 시비법도 발달하면서 휴경지가 점차 줄어 계속해서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늘어났다. 밭농사는 2년 3작 윤작법이 점차 보급되었고, 논종사도 고려 말에는 직파법 대신에 이앙법이 남부 지방 일부에 보급될 정도로 발전하였다.고려 후기에 이르러 농업 생산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거대한 규모의 농장을 만들고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면서 농민들은계속하였다. 김통정의 삼별초는 제주도에 내?외의 두 성을 쌓고 방비를 엄중히 하고 자주 본토를 공격하였다. 그런 결국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진압됨으로써 4년간에 걸친 항쟁은 종식되고 말았다. 원나라의 도움으로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된 다음해에 원종의 청혼에 따라 고려 태자와 원나라 세조의 공주가 혼인하였다. 고려 왕실은 원나라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원나라는 고려의 내정에 깊이 간여하게 되었다. 충렬왕 원년에 원나라는 고려의 관제가 황제국인 자국의 관제와 같아서는 안된다고 하여 관부명을 개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통합되어 첨의부가 되는 등 중앙관서들의 명칭이 변경되었다. 또한 고려 영토의 일부를 빼앗고 고종 45년에는 쌍성총관부를 원종 11년에는 동녕부를 또한 원종14년에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였다.이러한 원세력의 침투에 휘말리는 가운데 고려 지배층은 정치의 원칙을 상실하게 되었고, 법질서는 혼란에 빠졌다. 법과 제도에 의한 정부조직의 정치기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다. 고려 지배층은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에 빠져 정치적 합의와 결속을 이룰 수 없었고, 정치는 국왕과 그를 가까이 따르는 일부 측근 신료들을 중심으로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2)녹과전, 사패전과 농장고려후기가 되면 전시과제도는 존속하면서 국가의 관리권한이 약화되어 원활한 운영이 곤란해졌다. 이에 따라 군신관계는 엄존하면서도 신진관료에 대한 물적 보장은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였다. 특히 몽고와의 전쟁 후에는 농토가 황폐화되어 토지분급은 심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정 하에서 국가가 새로이 지급한 토지가 녹과전과 사패전이었다.녹과전은 국가가 분급 토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정 하에서 신진관료에 대해 새로이 분급한 토지이다. 녹과전은 경기에 한정되어 설치되었으며, 전시과와 과전법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 제도로 보고 있다. 녹과전은 기존의 분급 토지를 혁파하지 않은 채, 새로이 마련한제도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패전은 몽고와의 전쟁 후 많은 농토가 황폐화된
    인문/어학| 2007.07.02| 8페이지| 3,000원| 조회(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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