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사람은 누구나 의?식?주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영유하며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주거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공간이며 그 곳에서 우리의 생활의 대부분이 시작되고 그 곳에서 우리의 생활의 특징도 고스란히 담겨있기에 주생활이라는 주제로 일본의 문화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주거란 일정한 곳에 머물러 사는 삶이다. 즉 주거는 우리의 생활의 전부를 알 수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주생활을 통해 일본의 일상적인 문화를 알아보고 일본인들의 생각이나 그들만이 가진 독특한 문화의 일부분을 알아보고자 한다.나는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의 인테리어와 주생활 속의 건축물 등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해서 일본의 주거의 모습이 어떠할 지 알 수 없었다. 오직 드라마나 영화, 책을 통해 지나가면서 이러한 것이 있구나 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일본의 모습을 담고 있을 주거에 관해서 조사해 보고자 한다.본론1. 일본의 주변 환경에 따른 일본의 주택1) 여름형 주거이다. 일본은 습기가 높고 여름이 더운 나라로 유명하다. 그래서 개방적인 주택구조가 특징으로 여름형 주택 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창이 많고 지붕이 높아서 추운 겨울엔 부적합하다. 방과 방 사이에는 후스마라는 종이문 미닫이가 있고 바깥쪽에는 쇼지라는 장지문이 있는데, 장지문의 차이는 창살이 안쪽으로 있어서 밖에서 보면 창호지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문살을 습기로부터 보호한다.2) 비를 대비한 주거이다. 일본의 주택은 경사가 크고 좁은 툇마루와 집 바깥쪽을 '아마도' 라는 문으로 덮게 되는데, 이는 다우(多雨), 다설(多雪)을 대비한 구조라 할 수 있다.3) 지진을 대비한 주거이다. 일본의 건물들은 높지 않고 목조건물이 많다. 이것은 일본의 가장 큰 자연 재해인 지진 때문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건물이 낮을수록 무너질 확률 또한 낮아지며, 콘크리트 건물보다 목조건물이 흔들림에 훨씬 강하기 때문에, 지진이체의 41.3%)는 목조건물이었고, 32.4%는 내화 목조건물, 그리고 25.6%는 철근 콘크리트나 그 밖의 목재가 아닌 다른 자재로 지은 가옥들이었다. 도시지역에는 비교적 목조가옥이 적은 편이다. 예를 들면 도쿄 제 23구의 경우 고작 19.6%만이 목조 가옥이었고 42.5%는 내화 목조건물, 그리고 나머지 36.3%는 목재가 아닌 다른 자재로 지은 주태이었다. 전국적으로 신축가옥 중에서 목조가옥이 아닌 비육은 1970년대에 37%이던 것이 1992년에는 정확하게 60%였다.3. 한?일간의 주거생활1) 자료에 대하여(2003년도 조사 결과)- 부산대학교 사회학과의 박재환 교수를 연구책임자로 한 연구팀에서 2000년봄과 여름에 걸쳐 라는 주제 하에 한국인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필자는 공동연구자로 이 조사에 참가하여 일상적 삶의 질 가운데 주거 생활 부분을 담당하였다. 이 설문조사 중 주택과 관련된 자료가 이 논문에서 분석되었다. 조사에 응답한 대상자는 합계 582명인데, 부산312명, 후쿠오카 270명이다. 조사 방법과 표본추출 방법은 다음과 같다.부산에서는 조사원이 응답대상자를 방문하여 조사하는 면접식 설문조사가 진행되었다. 16개 구/군에서 무작위로 7개 구를 선정하고 구별 인구 분포에 비례하여 구의 표본수를 정했다. 다음으로 다단계집락표집을 사용하여 구/동/통/반으로 표본 집단을 정했다.후쿠오카에서는 응답대상자에게 설문지를 우편으로 보내고 설문조사에 응하겠다고 알려온 응답대상자를 조사원들이 약속시간에 방문하여 설문지를 회수하거나 우편으로 회수하는 우편조사의 방법을 사용했다. 후쿠오카 시의 7개 구에서 6개 구를 무작위로 추출하였다. 각 구에 있는 총 투표구 가운데 구별 인구비례에 따라 100개를 선정하였다. 각 투표구에서 10명씩 무작위로 선정하여 조사대상자가 거주하고 있는 집으로 1000개의 설문지를 우편으로 보냈다. 일본 큐슈대학에 있는 사회학자 오가와 타케오 교수가 이 조사 수행에 도움을 주었다.2) 주거생활- 먼저 응답대상자가는 한국보다 자가 소유자와 세입자들의 주택규모의 차이가 더 크다. 일본의 세입자 중 56.9%가 10평형대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임대주택-일반적으로 혼자, 혹은 결혼을 한 두 사람이 시작하는 생활은 도시의 임대주택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가족을 가진 세대를 위한 임대주택은 극히 한정되어있다. 1955년경까지는 23개구 내에도 단독 주택의 임대집이 여기 저기 있었는데, 1965년 이후는 점차로 집세 수입이 높은 아파트나 맨션으로 바뀌어 현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독 주택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또 넓은 공간의 고급 맨션의 임대료는 터무니없이 비싸서 서민들은 좀처럼 가질 수 없다. 도쿄에 사는 사람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집이 좁다’29.8%, ‘집세가 비싸다’27.6%로 나와 있다. 특히 민간 임대 거주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대다수가 좁은 집과 비싼 집세를 살기 불편한 점으로 꼽고 있다.(1991년도 경제 기획청 조사)또한 셋집 값에 관한 총무청 조사에 의하면 신규로 세를 드는 경우는 도쿄에서는 2DK(침실2개에 다이닝 키친이 딸린 집)의 아파트를 약 월 10만엔(약1백만원, 맨션은 약 월 12만 6천엔이 된다. 3DK(침실이 3개에 다이닝 키친이 딸린 집)로는 약 월 16만4천엔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총무청 ‘가계 조사(1999)’에 의하면 민간 세입자의 가구당 노동 실수입은 41만 4천 5백엔으로 가계 수입당 집세 비율을 20%로 친다면 소득 제약에 따라 현재보다 넒은 집으로 가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특히 임대주택의 상황을 보면 세대용 규모를 상정한 임대 주택의 공급이 극히 적어 어린이의 성장에 맞춰 주거를 바꾸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다.*교외에 단독 주택에 산다.-동경 23개 구에 새롭게 집을 살 수 없는 것은 1986~1987년경의 급격한 지가 상승에 요인이다. 도쿄에 있어 집을 갖는 이들의 증가 경향은 1957~1973년에 걸쳐 급증해 그 후 1983년 까지는 둔화되었다가 1983년부터 198을 소중히 여기고, 방에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이 되면서 벽면에 조작된 장치 그 자체로서 엄숙하고 위엄 있는 방의 분위기를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도코노마를 설치한 다다미방은 근세의 사회질서를 표현하는 공간으로서 무가주택은 물론 민가에서도 빠트릴 수 없는 것으로 되어 갔다. 현재에도 일본식 방을 장식하고 실내공간으로 질서를 만들어 내는 장치로서 그 전통은 계승되고 있다.- 도코노마의 종류① 혼토코(本床)와 라쿠시키토코(略式床): 혼토코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갈 네 가지의 조건이 있다.·토코바시라(도코노마에 특별히 사용하는 나무 기둥)·토코가마치(床圈:방바닥에서 조금 올라간 단에 쓰이는 나무)·토코타타미(床疊:단 위에 까는 다다미)·오토시카케(落掛:토코노마 위의 천장 부근의 벽을 지탱하는 나무): 혼토코 라고 해도 그 재료가 되는 나무의 종류와 형식에 따라 "진(眞), 행(行), 草(초)" 세 가지로 나눈다. 라쿠시키토코에는 이 네 가지 조건 중에서 무언가 생략된 것이 있다.- 도코노마의 공간 활용① 결혼식일본의 결혼식에는 신센(神前:신도식), 부츠젠(佛前:불교식), 기독교식 등 세 가지 양식이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결혼절차는 우선 약혼이 성립되면 그 증거로 신랑신부 양가가 서로 금품을 주고받는 의식인 유이노우(結納)가 행해진다. 또, 이 의식이 행해질 때, 도코노마에 장식물을 장식하기 때문에 양가에 있어서 도코노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② 손님 접대(다도)예의 범절의 장소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예를 갖추어서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를 해야합니다.- 풍수로부터 본 도코노마- 도코노마를 어느 방향으로 두면 좋은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북·서쪽의 방향에 카미다나(神棚)이나 부쯔단(佛壇)을 놓으면 좋다고 한다.?서쪽 방향 - 재물 운 상승?북서 방향 - 직업 운 상승-도코노마의 구성① 도코바시(床柱)도코노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재(部材)이며, 쇼잉 양식에서는 각주(角柱)가 기본이지만, 사저(私邸) 등에서는박 일배]이다. 아침에는 가족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고, 하루의 끝에는 평안과 무사한 것을 감사해서 참배한다. 그리고 축하 할일이 있었을 때는 그때마다 카미다나에게 그 기쁨을 전하고 신의 은혜를 감사해서 참배한다.① 참배의 방법- 카미다나의 참배는 먼저 손과 입을 깨끗이 하고, 재물을 올린 후, 신전에 앉아서 가볍게 인사를 한다. 다음에 2번 깊이 인사를 하고, 박수를 두 번 치고 나서 또 한번 깊이 인사를 한다. 그 다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서 물러나는 것이 기본이다.② 카미다나를 설치하는 장소- 카미다나는 집의 정신적 중심이 되는 신성한 곳이다. 설치하는 장소로서는 조용하고 높은 곳이나 가족끼리 즐기기 쉬운 밝은 느낌의 곳에, 남쪽방향 또는 동쪽방향으로 한다. 2층이 있는 집에서 1층에 카미다나를 설치하는 경우에는 그 위를 자주 지나갈 것 같은 장소는 피하고 있다. 카미다나에는 중앙에 신전을 모시고, 좌우에(사카키:비쭈기나무)나 불을 밝히는 기구 등을 세워 정면에 금줄을 친다.③ 카미다나를 새롭게 모시는 경우- 그 시기는 연말에 설치해서, 연초에 부적을 받아서 모신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단, 이것은 정식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집을 새로 지은 때, 축일, 결혼할 때, 액년( 운수가 좋지 않은 해)이 들었을 때, 가정에 불행이 끊이지 않는 때를 들 수 있다④ 카미다나를 바꾸는 경우- 지방에 따라서는 매년 새로운 카미다나로 바꾸는 곳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5년·10년·15년 등 5년마다 구분을 지어서 카미다나를 바꾸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가정의 카미다나도 아무리 길어도 20년에 한번은 새롭게 해야만 한다. 또, 카미다나를 새롭게 할 때는 오래된 카미다나나 부적은 반드시 불태우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4)고타쯔 (炬·火,こたつ)- 고다쯔는 일본의 유일한 난방도구라 할 수 있다. 낮은 책상 같이 생긴 곳에서 적외선 등을 달고 이불을 덮은 뒤 이불위에 또 윗판을 덮고 그 아래에 발을 넣어 몸을 덥히는 도구이다. 고다쯔를 굳이다.
제 1 장- 이번 일본 역사를 알아보면서 일본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사건들을 시대에 맞게 알아보고 그 시대만이 가진 특징을 알아보자.제 2 장1. 일본 열도의 형성-일본의 영토는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면을 따라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자리 잡은 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일본 열도는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의 네 개의 큰 섬이 활 모양으로 이루고 있다.활 모양의 원형은 약 2500만 년 전 동해가 생기면서 형성되었다. 이후 4번에 걸친 빙하기와 간빙기를 거치면서 일본 열도의 모양이 조금씩 변했다. 2백만 년 전 아시아대륙의 동쪽 즉 태평양에 면한 지역은 사할린 , 홋카이도, 혼슈가 거대한 내륙 호수를 품어 안은 형태로 대륙과 이어져 있으며 북쪽의 지시마, 남족의 류큐도 각각 커다란 호수를 내포하고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 6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계속된 마지막 빙하기에는 대륙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이고 해수면이 지금보다 100m나 낮아서 일본 열도는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되자 빙하기 녹고 해수면이 높아져 해협이 생기면서 대륙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해수면이 점점 상승하여 5000년 전 최고조에 이르자 일본 각지의 해안선이 지금보다 안쪽까지 올라갔다. 이 무렵을 정점으로 점차 기후가 서늘해지고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일본 열도가 현재와 같은 모양으로 된 것은 2300년 전쯤이다.2. 구석기 시대- 1949년, 군마현에서 홍신세 말기의 관동 롬층(적토의 화산재)으로부터 2만 4천 년 전의 타제 석기가 발견되어(이와주쿠 유적), 3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에 일본 열도에도 인류가 생존 하였음이 증명되었다.이제까지 열도에서 발견된 화석 인골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는, 홍적세의 신인에 해당하는 시즈오카현의 미카비인, 하마키타인, 오키나와연의 미나토가와인등이 있다.이들은 동굴 등에 거주하면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였고,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 나이프형 석기, 첨두기(尖頭器), 세석기(細石器)와 역기6세기의 고분 시대 후기가 되면 소형 고분이 수십 개에서 수백 개까지 집중된 군집군이 각지에서 성행하였다. 이는 지방 호족이 야마토 정권에 복속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농업 기술과 생산력의 향상에 의해 새로운 유력 계층이 성장하여 소형의 고분은 조영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분 시대에는 호족과 민중 사이에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명확해졌다. 또한 야요이 토기의 계보를 잇는 적갈색의 하지키가 사용되었으니 5세기가 되면 한반도로부터 전달된 회색의 경질 토기인 스에키가 만들어졌다.7. 야마토 정권-4세기 무렵부터 7세기 중엽 야마토를 중심으로 하는 긴키지방의 정치 체제 내지는 국가체제, 율령제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에 일본 열도에 있었던 정치 체제를 가리킨다. 야마토 조정, 야마토 왕권, 야마토 국가라고도 한다. 또 야마토를 '왜'로 표기하기도 한다.야마토 정권은 대왕을 중심으로 야마토와 가와치 주변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의 연합에 의해 구성되었다. 대왕가는 야마토 분지 남동부의 미와야마 산록을 기반으로 하여 그 세력을 넓혀갔다. 대왕가 중심의 지배 체제에 각지의 호족을 끌어들이기 위한 신분 질서로 우지, 가바네 제도가 만들어졌다. 야마토 정권의 권력과 연결된 자의 신분 표식으로, 대왕과 씨족 간의 인격적 결합 관계를 상징하였다.우지란 혈연을 바탕으로 한 정치?사회적 조직이었다. 대왕은 우지의 실력에 따라 가바네를 주어 정치에 참여하게 했다. 이것이 씨성 제도 이다. 가바네는 본래 인명에 붙은 히코?네코?기미?와케?스쿠네 등의 존칭으로부터 기원된 것으로 대왕이 우지의 수장에게 사여함으로써 성립되었다.유라쿠 천황의 사후 지반 호족의 세력 강대화에 따른 혼란 가운데 야마토 정권은 왕통이 단절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507년 오진의 5대손이라 하는 에치젠의 오오도왕이 가와치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의 반발로 게이타이는 쉽게 야마토로 들어가지 못했다. 527년 일찍이 신라와 통해 있던 쓰쿠시의 구니노미야쓰코 이와이가 반란을 일으켜 야마토 조정를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이 사건을 ‘에미노 오시카쓰의 난’ 이라고 한다.*간무 천황737~806년. 간무 천황은 나라 시대 후기의 정치 불안과 사회 혼란에 직면해서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했으며 중국 황제상을 이상으로 삼았던 군주이다. 어머니가 신분이 낮은 도래인 계통이었기 때문에 황태자가 되지 못하고 772년 황후와 황태자를 제거하고 난후 황태자가 된다. 재위 후 도읍지를 헤이안쿄로 옯기고 동북 변경의 주민인 에미시를 여러 차례 토벌했다. 또 율령 제도를 현실주위적 관점에서 재편하기 위해 관료의 통제를 강화했다.불교 정치를 불식하고 율령 정치 진흥에 힘썼는데 결정적으로 구 체제에서 탈피하기 위해 새 수도인 나카오카쿄의 조영에 착수했다. 이에 헤이안쿄로 천도를 한다.▶문화* 덴표 문화헤이조경을 거점으로 발달된 귀족 문화를 덴표 문화라고 한다. 텐표 문화는 견당사 등에 의해 전달된 성당(盛唐)문화의 영향을 받아 국제성이 풍부하며 국가 정책의 영향으로 불교적 색체가 강한 문화이다. 나라 시대에는 율령제로 국가 체제가 정비되고 전국에서 거두어 들인 조세를 바탕으로 중앙 집권적 통치가 행해졌다. 조정에 의한 통치의 정당성과 국가 의식을 반영한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텐무 천황 때 착수된 국사 편찬의 사업은 712년 『고사기』, 720년 『일본서기』로 완성되었다. 713년 에는 『풍토기』를 완성하였다.*국가 불교의 발달불교는 호국 불교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하였고 많은 절이 있었으며 불교 이론의 연구도 진전되어 남도 육종등의 제 학파가 형성되었다. 사원이나 승려는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이같이 불교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원의 빈번한 축조로 인해 국가 제정에 타격을 입었고 승려에 의해 정치적인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교단 내부의 종교 활동도 문제를 일으킨다. (천연두가 발생하여 많은 사망자가 나오고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이 이러나 사회가 불안해지자 741년 쇼무 천황은 부처의 힘으로 천재지변을 막기를 바라며 고쿠분사 건립한다.)10. 헤한 현상은 몽공 침공 이후 막부의 정치적 위기를 심화시켰다.*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가마쿠라는 황위 문제로 갈등을 빗으며 해결책으로 두 계통이 교대로 황실의 황위를 잇는 방식이었다. 막부의 지배 체제의 동요가 시작되었다. 겐지의 정통을 자부하며 호조씨으 L전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관동의 대슈고 아시카가 다카우치와 그에 동조한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공격해 양 거점을 모두 함락하자 도쿠소 다카토키가 일족과 함께 자살함으로서 드디어1세기 반에 걸진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고 만다.▶문화- 우아하고 섬세한 조정의 귀족문화와 신흥 무가의 현실적이며 실질적인 문화가 대조를 이룬다. 또한 송?원의 문화가 들어온다. 불교의 색체가 강하다.* 민중 불교말법 사상은 점점 더 사람들 사이에 퍼져 귀족은 물론 무사?서민에 이르기까지 똑같이 정신적인 구제를 기대하게 된다. 따라서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는 이미 귀족 세계를 벗어나 하급무사나 서민들에게 퍼져 가면서 민중구제사상으로 발전해 갔다.* 미술건축 양식으로는 천축양과 당양으로 불리는 송의 양식이 들어온다.12. 무로마치 막부- 좁은 의미로는 세 시기로 나누어 남북조 합일 까지를 남북조 시대, 1392년 남북조 합일부터 오닌의 난이 일어난 1467년 까지를 무로마치 시대, 오닌의 난부터 오다 노부나가가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모시고 입경한 1568년까지를 전국 시대라고 한다.㉠남북조 시대▶정치1335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북조의 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교토를 탈출한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에 들어가 남조를 열었을 때부터 1392년 무로마치 바쿠후의 주도로 남북 양조가 합쳐질 때 까지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남북조 시대는 60년간 계속된다. 내란 초기에는 북조가 우세했으나 바쿠후의 무사들이 대립하여 남조 세력이 한때 교토를 점령하기도 하고 유력 무장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내란은 장기화 된다. 남북조의 내란은 바쿠호 3개 쇼군 때에 끝나고 유력 슈고 다이묘들도 바쿠후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바쿠후에조정의 권한이 저의 흡수된다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잡기까지 약 30년 동안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 한다.▶정치거성이었던 이나바야마 성을 기후성으로 개명하고 천하포의 인장을 문서에 사용하여 자신의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 다음 해 에는 암살된 장국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앞세워 교토로 입경하였고, 요시아키를 장군직으로세워 전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갔다. 또한 전통적 권위를 자신의 수주에 두려고 했으며 강력한 종교적 권위와 경제력을 가진 사원 세력을 굴복 시켰다.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한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는 통일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난 1582년 히추에서 모리씨와 전투를 벌이고 있던 하시바를 원조하러 가다가 교토의 본능사에서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본능사의 변)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달성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히데요시는 전국 제패를 위해 각 지역으로 진격하지만 전황이 고착 상태에 빠져 결국 상호간의화목으로 결착을 보였다. 이에 군사적 정절이 아니라 조정이 가진 전통적인 지배권을 적극 이용한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조선 침략(임진왜란)과 강화 교섭규슈 평정을 단행한 직후, 1587년부터 히데요시는 쓰시마의 소씨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조공과 함께 가도입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이 거부하자 조선 침략을 계획한다. 이것이 ‘임진왜란’이다. 일본에서는 ‘문록의 역’이라고 한다.침략 초기에는 일본군의 우세로 한성을 점령한 후 평양까지 단기간에 진격하였지만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수군의 반격과 의병?승병의 강력한 항쟁, 명의 원군 파견등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이 된다. 그러자 1593년 강화 교섭을 취하기 시작하였지만 5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이는 무리한 요구에 있는 듯 하다. 또한 화의의 결렬로 일본군은 재차 침입했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며 일본에서는 ‘경장의 역’이라고 한다. 정유재란 때에는 조선도 왜침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유재란도 패하고 잠시 이순.